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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히로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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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야시 히로모리는 일본의 아악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메이지 시대 일본 음악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1831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아악을 배우고, 1841년 조정에 출사하여 궁내성 아악부에 소속되었다. 그는 '기미가요'의 작곡에 관여했으나, 실제 작곡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1880년 '기미가요' 악보 초안을 제출하고 덴초절에 처음 연주되었으며, 아악부 부장과 종칠위를 역임했다. 그는 생황 부흥에도 기여했으며, 189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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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히로모리
기본 정보
이름하야시 히로모리
본명하야시 에이노스케
다른 이름하야시 히로카네 (초명)
출생일본 셋쓰국히가시나리군
직업가가쿠 연주자
악기생황

2. 생애

셋쓰국 히가시나리군(현재의 오사카부 오사카시 덴노지구)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일본 황실에서 여러 직책을 역임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쿄로 이주했다. 1841년에 정6위에 서위되면서 좌병위권 소위로 임명되었고, 1855년에는 종5위에 서위되면서 이름을 히로모리(廣守)로 바꿨다.

1875년 일본 정부의 명령으로 서양음악 학습을 명받아 서양 음악 이론과 일본 음악 이론의 융합을 위해 노력했다.

1880년 악인을 대표하여 국가 제정 위원이 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노래인 《기미가요》는 같은 해 11월 3일 메이지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여 처음으로 연주되었다.[4] 그러나 《기미가요》의 작곡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전한다.[5] 미국의 일본계 역사학자 오누키 에미코는 "《기미가요》의 작곡가는 공식적으로 일본 황실의 감독관이자 수석 음악가였던 하야시 히로모리로 확인되지만 하야시 밑에서 작업했던 오쿠 요시이사가 프란츠 에케르트에 의해 약간의 편곡과 함께 그 음악을 작곡한 것으로 여겨진다."라고 집필했다.[6]

하야시 히로모리가 공로를 인정받은 《기미가요》의 멜로디는 일본을 방문하고 있던 아일랜드 출신 군악대 지휘관인 존 윌리엄 펜턴에 의해 편곡된 것을 대체했지만 1870년에 일본 황실로부터 거절당했다. 그 후 일본 궁내청은 오쿠 요시이사와 하야시 아키모리에 의해 작곡된 새로운 멜로디를 채택했다. 《기미가요》의 작곡가는 종종 그들의 감독관이자 하야시 아키모리의 아버지였던 하야시 히로모리라고 언급된다. 하야시 아키모리 또한 펜턴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7] 독일의 음악가인 프란츠 에케르트는 《기미가요》의 멜로디에 서양 스타일의 조화를 적용했다.

1888년 아악부 부장에 임명되었고, 1892년 종칠위가 되었다. 이듬해 퇴관한 후에는 후진 교육에 힘썼다.

2. 1. 출생과 가계

덴포 2년(1831년) 11월 25일, 오사카 텐노지의 아악 연주가 집안인 하야시 가문의 셋째 아들로 셋쓰국히가시나리군(현 오사카부오사카시덴노지구 레이닌초)에서 태어났다. 후에 같은 혈족의 지하 악인 하야시 히로나리의 양자가 되었다.[9] 하야시 가문은 아스카 시대 하타노 가와카쓰의 삼남의 후예라고 전해지며, 대대로 시텐노지에서 아악을 연주하는 집안이었다.[9] 센고쿠 시대 말기 오닌의 난으로 단절된 조정의 아악 부흥을 꾀한 고코 천황에 의해 시텐노지에서 불려 나온 하야시 히로야스(간에이 3년 4월 11일, 73세로 사망)가 그 사업에 크게 공헌하여 대대로 조정에서 일하게 되었다.[9] 히로야스의 7대손 하야시 히로사이는 무용의 달인으로 닌코 천황의 총애를 받아 정사위상을 받았으며, 히로모리는 어린 시절부터 히로사이와 그의 아들이자 양아버지인 히로나리에게 아악을 배웠다.[9]

2. 2. 조정 출사와 아악 활동

1841년(덴포 12년), 11세에 조정에 출사하여 정육위하 좌병위권소위에 임명되었다.[9] 3년 후에는 조정 악인으로서 최소한 필요하다고 여겨졌던 중예 시험에 합격했고, 1855년(안세이 2년)에는 종오위하에 임명되어 이름을 '''히로모리'''로 고쳤다.[9] 2년 후에는 지쿠젠수에 임명되었다.[9] 1865년(게이오 원년), 정오위하에 서임된 히로모리는 조정 악인 중 최고 시험인 상예 시험을 만점으로 합격했는데,[9] 이는 긴 아악료 역사상 5번째 쾌거였다.[9]

2. 3.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 메이지 천황도쿄 행차와 함께 도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아 궁내성 아악국(후에 아악부, 현재의 궁내청악부)에 배속되었다.[9] 1875년 정부의 명령으로 서양 음악 학습을 명받고, 이후 서양 음악 이론과 일본 음악 이론의 융합을 위해 노력했다.[9]

1880년 악인을 대표하여 국가 제정 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현재의 "기미가요" 악보 초안을 제출했고, 11월 3일 덴초절에 처음 연주되었다.[9] 미국의 일본계 역사학자 에미코 오누키티어니는 "《기미가요》의 작곡가는 공식적으로 일본 황실의 감독관이자 수석 음악가로 활동했던 하야시 히로모리로 확인되지만 하야시 밑에서 작업했던 오쿠 요시이사가 프란츠 에케르트에 의해 약간의 편곡과 함께 그 음악을 작곡한 것으로 여겨진다."라고 집필했다.[6]

1888년 아악부 부장에 임명되었고, 1892년 종칠위가 되었다. 이듬해 퇴관한 후에는 후진 교육에 힘썼다. 특히 유신 이후 쇠퇴 직전이었던 의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9]

2. 4. 사망

1896년 4월 5일 사망했으며, 사망 직전 정칠위에 서임되었다.[9]

3. 기미가요 작곡 논란

《기미가요》의 작곡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5]

3. 1. 공식적인 작곡가

공식적으로는 하야시 히로모리가 기미가요의 작곡자로 알려져 있다.[6] 미국의 일본계 역사학자인 에미코 오누키티어니는 "《기미가요》의 작곡가는 공식적으로 일본 황실의 감독관이자 수석 음악가로 활동했던 하야시 히로모리로 확인되지만 하야시 밑에서 작업했던 오쿠 요시이사가 프란츠 에케르트에 의해 약간의 편곡과 함께 그 음악을 작곡한 것으로 여겨진다."라고 집필했다.[6]

하야시 히로모리가 공로를 인정받은 《기미가요》의 멜로디는 일본을 방문하고 있던 아일랜드 출신 군악대 지휘자인 존 윌리엄 펜턴에 의해 편곡된 것을 대체했지만 1870년에 일본 황실로부터 거절당했다.[7] 그 후 일본 궁내청은 오쿠 요시이사와 하야시 아키모리에 의해 작곡된 새로운 멜로디를 채택했다. 《기미가요》의 작곡가는 종종 그들의 감독관이자 하야시 아키모리의 아버지였던 하야시 히로모리라고 언급된다. 아키모리는 또한 펜턴의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기도 했다.[7] 독일의 음악가인 프란츠 에케르트는 《기미가요》의 멜로디에 서양 스타일의 조화를 적용했다.

3. 2. 실제 작곡 과정에 대한 다른 견해

오쿠 요시이사가 실제 작곡을 담당하고, 프란츠 에케르트가 편곡했다는 주장이 있다.[6] 존 윌리엄 펜턴의 초기 편곡은 거절되었고, 이후 오쿠 요시이사와 하야시 아키모리가 새로운 멜로디를 작곡했다는 기록이 있다.[7] 하야시 히로모리는 감독관이었고, 그의 아들 하야시 아키모리가 작곡에 참여했다는 견해도 있다.[7]

4. 평가

하야시 히로모리는 메이지 시대 일본 아악의 근대화와 보존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서양 음악과의 융합을 통해 일본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9] 그는 일본 황실의 명을 받아 서양 음악을 배우고, 이를 일본 전통 음악과 융합하는 데 힘썼다.

기미가요 작곡과 관련하여 여러 가설이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하야시 히로모리가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9] 미국의 일본계 역사학자 에미코 오누키티어니는 하야시 히로모리가 공식적인 작곡가이지만, 오쿠 요시이사가 프란츠 에케르트의 도움을 받아 작곡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기미가요의 멜로디는 원래 아일랜드 출신 군악대 지휘관 존 윌리엄 펜턴이 편곡한 것이었으나, 일본 황실에서 거절당했다. 이후 오쿠 요시이사와 하야시 히로모리의 아들 하야시 아키모리가 작곡한 새로운 멜로디가 채택되었고, 하야시 히로모리가 감독관으로서 작곡가로 언급되었다. 프란츠 에케르트는 이 멜로디에 서양 스타일의 화성을 적용했다.

하야시 히로모리는 아악 연주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아악을 배웠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궁내청에서 아악을 담당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특히 의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하야시 히로모리가 일본 제국주의 찬양 논란이 있는 기미가요 작곡에 관여한 점을 비판적으로 보면서도, 전통 음악 보존 및 발전에 기여한 점은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참조

[1] 기타
[2] 기타
[3] 기타
[4] 서적 Human learning and memory: advances in theory and application : the 4th Tsukuba International Conference on Memory Routledge 2005
[5] 뉴스 Hinomaru, 'Kimigayo' express conflicts both past and future Japan Times 2007-07-17
[6] 서적 Kamikaze, cherry blossoms, and nationalisms: the militarization of aesthetics in Japanese histor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2
[7] 웹사이트 Briton who gave Japan its anthem https://web.archive.[...] Published by Telegraph Media Group Limited 2005-08-30
[8] 기타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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