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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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투샤는 터키의 고대 도시 유적으로, 기원전 6천년기 채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다. 하티족은 기원전 3천년기에 정착지를 건설했으며, 이후 아시리아 상인들이 무역 기지를 건설했다. 기원전 1700년경 쿠사라의 왕 아니타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히타이트 왕 하투실리 1세가 수도를 네샤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히타이트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하투샤는 전성기 1.8km² 면적의 거대한 도시였으며, 6km가 넘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기원전 1200년경 청동기 시대 붕괴로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하면서 파괴되어 버려졌다. 19세기부터 고고학적 발굴이 시작되어, 보아즈쾨이 문서 보관소에서 중요한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1986년에는 투드할리야 4세와 쿠룬타 간의 조약을 기록한 금속 비문이 발견되었다. 하투샤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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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투샤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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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어 | Hattuşaş |
| 위치 | 터키 아나톨리아 초룸 주 보아즈칼레 근처 |
| 개요 | |
| 유형 | 정착지 |
| 건설 | 기원전 6천년 |
| 폐허 | 기원전 1200년경 |
| 시대 | 청동기 시대 |
| 문화 | 히타이트 |
| 상태 | 유적 |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 공식 명칭 | 하투샤: 히타이트의 수도 |
| ID | 377 |
| 등재 연도 | 1986년 |
| 기준 | 문화: i, ii, iii, iv |
| 면적 | 268.46 헥타르 |
2. 역사
하투샤 유적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천년기 채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티족은 기원전 3천년기 말경 하투쉬(Hattush)라는 정착지를 건설했다.[2] 이 유적지에 정착한 가장 초기의 흔적은 기원전 6천년기의 채석기 시대에서 나타난다. 기원전 19세기와 18세기에 아시리아 상인들은 카네쉬(네샤)(현대 퀼테페)를 중심으로 그곳에 무역 기지를 건설하고 하위 도시의 별도 구역에 정착했다.[3] 발굴에서 탄화된 층이 발견된 것은 기원전 1700년경 하투샤 도시가 불에 타고 파괴되었음을 증명한다. 이 사건의 책임자는 쿠사라 출신의 왕 아니타로 보이며, 그는 이 행위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고 저주 비문을 세웠다.[4]
"내 뒤에 왕이 되어 하투샤를 재건하는 자는 하늘의 폭풍신이 그를 칠 것이다!"[4]
그러나 실제로는 아니타의 아들이 재건했을 가능성이 있다.[5][6]
기원전 1650년경 히타이트 왕 하투실리 1세는 수도를 네샤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히타이트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다.[7][8] 이후 카스키아인의 침략으로 수도가 잠시 사피누와와 타르훈타사로 이전되기도 했지만, 무르실리 3세 때 다시 하투샤로 돌아왔고, 기원전 12세기 히타이트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10]
전성기 하투샤는 1.8km² 면적에 달하는 거대한 도시였다. 수필룰리우마 1세 시대(기원전 1344-1322년경)에 건설된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내부와 외부 구역으로 나뉘었다.[11] 내부 도시는 약 0.8km² 면적에 요새, 왕궁, 대규모 행정 건물, 사원 등이 위치했다.[11] 왕궁은 뷔위케칼레(대요새)로 알려진 높은 능선에 건설되었다.[11] 도시는 6km가 넘는 성벽을 자랑했는데, 총 두께는 8m에 달했다.[12] 남쪽의 외부 도시에는 정교한 관문과 4개의 사원, 주거 시설이 있었다.[11] 성벽 밖에는 묘지가 있었다. 현대 학자들은 당시 도시 인구를 약 10,000명으로 추정한다.[13]
기원전 1200년경, 청동기 시대 붕괴와 함께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하면서 하투샤는 파괴되고 버려졌다.[14] 발굴 결과, 하투샤는 수십 년에 걸쳐 점차적으로 버려졌으며, 최종적으로 불에 타 파괴된 흔적이 발견되었다.[14][16] 이후 기원전 800년까지 버려졌다가 프리기아 정착지가 나타났다.
2. 1. 초기 정착과 하티족
하티족은 기원전 3천년기 말경 하투쉬(Hattush)라는 정착지를 건설했다.[2] 이 유적지에 정착한 가장 초기의 흔적은 기원전 6천년기의 채석기 시대에서 나타난다. 기원전 19세기와 18세기에 아시리아 상인들은 카네쉬(네샤)(현대 퀼테페)를 중심으로 그곳에 무역 기지를 건설하고 하위 도시의 별도 구역에 정착했다.[3] 발굴에서 탄화된 층이 발견된 것은 기원전 1700년경 하투샤 도시가 불에 타고 파괴되었음을 증명한다. 이 사건의 책임자는 쿠사라 출신의 왕 아니타로 보이며, 그는 이 행위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고 저주 비문을 세웠다.[4]"내 뒤에 왕이 되어 하투샤를 재건하는 자는 하늘의 폭풍신이 그를 칠 것이다!"[4]
그러나 실제로는 아니타의 아들이 재건했을 가능성이 있다.[5][6]
2. 2. 아시리아 무역 기지
기원전 19세기와 18세기에 아시리아 상인들은 카네쉬(네샤, 현재의 퀼테페)를 중심으로 무역 기지를 건설하고 하투샤에 정착했다.[3] 이들은 하위 도시의 별도 구역에 거주했다.2. 3. 도시 파괴와 아니타 왕
기원전 1700년경, 쿠사라의 왕 아니타는 하투샤 도시를 불태워 파괴하고 그 공로를 인정하며 저주 비문을 세웠다.[4]"내 뒤에 왕이 되어 하투샤를 재건하는 자는 하늘의 폭풍신이 그를 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니타의 아들이 재건했을 가능성이 있다.[5][6]
2. 4. 히타이트 수도 천도와 발전
기원전 2천년기 전반, 기원전 1650년경 히타이트 왕 라바르나는 수도를 네샤에서 하투샤로 옮기고 하투실리 1세("하투샤 출신의 사람")라는 이름을 사용했다.[7][8] 이후 카스키아인의 침입으로 투달리야 1세는 수도를 사피누와로, 무와탈리 2세는 타르훈타사로 잠시 옮기기도 했다.[9] 그러나 무르실리 3세는 다시 하투샤로 수도를 복귀시켰고, 하투샤는 기원전 12세기 히타이트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수도로 남아있었다.[10]
수필룰리우마 1세 시대(기원전 1344년경~1322년경)에 건설된 거대한 성벽은 도시를 내부와 외부 구역으로 나누었다.[11] 내부 도시는 약 0.8 km2 면적에 대규모 행정 건물과 사원이 있는 요새가 있었고, 왕궁 또는 아크로폴리스는 뷔위케칼레(대요새)로 알려진 높은 능선에 세워졌다.[11] 도시는 6 km가 넘는 성벽을 자랑했는데, 내벽과 외벽 사이의 두께는 3 m, 그 사이 공간은 2 m로, 총 두께는 8 m에 달했다.[12] 남쪽에는 약 1 km2의 외부 도시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전사, 사자, 스핑크스를 묘사한 부조로 장식된 정교한 관문이 있었다. 각기 현관식 안뜰을 중심으로 4개의 사원이 있었고, 세속 건물과 주거 시설도 있었다.
2. 5. 전성기와 멸망
하투샤는 기원전 1650년경 히타이트 왕 하투실리 1세가 수도를 네샤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히타이트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다.[7][8] 이후 카스키아인의 침략으로 수도가 잠시 사피누와와 타르훈타사로 이전되기도 했지만, 무르실리 3세 때 다시 하투샤로 돌아왔고, 기원전 12세기 히타이트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10]전성기 하투샤는 1.8km² 면적에 달하는 거대한 도시였다. 수필룰리우마 1세 시대(기원전 1344-1322년경)에 건설된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내부와 외부 구역으로 나뉘었다.[11] 내부 도시는 약 0.8km² 면적에 요새, 왕궁, 대규모 행정 건물, 사원 등이 위치했다.[11] 왕궁은 뷔위케칼레(대요새)로 알려진 높은 능선에 건설되었다.[11] 도시는 6km가 넘는 성벽을 자랑했는데, 총 두께는 8m에 달했다.[12] 남쪽의 외부 도시에는 정교한 관문과 4개의 사원, 주거 시설이 있었다.[11] 성벽 밖에는 묘지가 있었다. 현대 학자들은 당시 도시 인구를 약 10,000명으로 추정한다.[13]
기원전 1200년경, 청동기 시대 붕괴와 함께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하면서 하투샤는 파괴되고 버려졌다.[14] 발굴 결과, 하투샤는 수십 년에 걸쳐 점차적으로 버려졌으며, 최종적으로 불에 타 파괴된 흔적이 발견되었다.[14][16] 이후 기원전 800년까지 버려졌다가 프리기아 정착지가 나타났다.
2. 6. 프리기아 정착
기원전 800년경, 프리기아인들이 하투샤에 정착했다.[16] 그 이전에는 기원전 1200년경 청동기 시대 붕괴의 일환으로 히타이트 국가와 함께 하투샤는 파괴되었다. 발굴 결과에 따르면 하투샤는 히타이트 제국이 붕괴되면서 수십 년에 걸쳐 점차적으로 버려졌으며, 최종적으로 불에 의해 파괴된 흔적이 발견되었다.[14][15][16]3. 고고학적 발굴
19세기 초부터 유럽의 고고학자들과 탐험가들이 하투샤 유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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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년 프랑스 고고학자 펠릭스 마리 샤를 텍시에는 보아즈쾨이 마을 근처에서 기념비적인 유적을 발견했다.[17] 텍시에는 지형 측정을 하고, 삽화를 제작하고, 예비 유적 계획을 세웠다.[18] 이후 이 유적은 여러 유럽 여행가와 탐험가들이 방문했는데, 특히 1858년 독일 지리학자 하인리히 바르트가 주목할 만하다.[19] 조르주 페로는 1861년에 이 유적과 인근 야즐리카야 유적을 발굴했다.[20] 페로는 1886년에 보아즈쾨이가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라는 것을 처음으로 제안했다.[21] 1882년 독일 엔지니어 카를 후만이 유적 전체 지도를 완성했다.
에르네스트 샹트르는 1893~94년에 당시 보아즈쾨이라고 불리던 마을에서 몇 개의 시험 참호를 열었지만, 콜레라 발생으로 발굴이 중단되었다. 샹트르는 쐐기 문자로 새겨진 점토판 조각들을 발견했는데, 이는 중요한 발견이었다. 이 조각들은 아카드어와 나중에 히타이트어로 밝혀진 텍스트를 포함하고 있다.[22][23] 1901년부터 1905년까지 발데마르 벨크는 여러 차례 이 유적을 방문하여 다수의 점토판을 발견했다.
1905년 후고 윙클러는 독일 동양 학회(DOG)를 대신하여 보아즈쾨이에서 몇 차례 탐사를 실시하여 왕궁 유적인 뷔위칼레에서 35개의 쐐기 문자 점토판 조각을 더 발견했다.[24] 윙클러는 1906년에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하여 주로 왕궁 지역에 집중했다. 수천 개의 점토판이 발굴되었는데, 대부분 당시 해독할 수 없었던 히타이트어로 쓰여 있었다. 몇 안 되는 아카드어 텍스트를 통해 이 유적이 하투샤임이 확정되었다.[25] 윙클러는 1907년 (오토 푸흐슈타인, 하인리히 콜, 루드비히 쿠르티우스, 다니엘 크렌커)과 1911년과 1912년( 테오도르 마크리디)에 잠시 돌아왔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작업이 중단되었다.[26][27] 이 발굴에서 나온 점토판은 두 시리즈 "Keilschrifttexte aus Boghazkoi"(KB0)와 "Keilschrift urkunden aus Boghazköi"(KUB)로 출판되었다. 1931년 선사 시대 학자 쿠르트 비텔의 지휘 아래 작업이 재개되었으며, 지층 연구가 주요 초점이었다. 이 작업은 DOG와 독일 고고학 연구소(Deutsches Archäologisches Institut)의 후원하에 이루어졌으며,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중단될 때까지 9시즌 동안 지속되었다.[28][29] 1952년 비텔의 지휘 아래 발굴이 재개되었고, 1963년에는 페터 네베가 현장 책임자로, 1978년에는 감독으로 교체되어 1993년까지 이어졌다.[30] 상부 도시 지역에 초점을 맞추었다. 점토판 출판은 KUB와 KBo에서 재개되었다.[31][32] 1994년 위르겐 제어가 발굴을 맡아 2005년까지 이끌었으며, 뷔위카야와 경제 및 주거 공간을 포함한 비 기념물적인 지역에 초점을 맞추었다.[33] 2006년부터 안드레아스 샤흐너 신임 감독 하에 일부 고고학 작업이 계속되었지만, 관광객을 위한 복원 및 준비에 더 집중하고 있다.[34][35][36]
1986년 발굴 조사에서 스핑크스 게이트에서 서쪽으로 35m 떨어진 곳에서 대형(35 × 24 cm, 무게 5 kg) 금속 비문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13세기의 이 점토판에는 히타이트 투드할리야 4세와 타르훈타샤의 왕 쿠룬타 간의 조약이 담겨 있었다. 이 유물은 앙카라의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37][38] 1991년 유적 수리 작업 중 서쪽 경사면에서 미케네 청동 검이 발견되었다. 이 검에는 아카드어로 "위대한 왕 두탈리야가 아수와-컨트리를 격파하고 이 검들을 그의 주, 폭풍의 신에게 바쳤다"라고 새겨져 있었다.[39][40] 1990~91년 발굴 조사 시즌에 상부 도시의 "Westbau" 건물에서 또 다른 중요한 발견은 기원전 13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3400개의 봉인된 불라와 점토 덩어리였다. 이들은 주로 토지 문서와 관련이 있었다.[41]
3. 1. 초기 탐사 (19세기)
1833년 프랑스 고고학자 펠릭스 마리 샤를 텍시에는 터키 탐사 중 보아즈쾨이 마을 근처에서 기념비적인 유적을 발견했다.[17] 텍시에는 지형을 측정하고, 삽화를 제작하고, 예비 유적 계획을 세웠다.[18] 이후 1858년 독일 지리학자 하인리히 바르트를 비롯한 여러 유럽 여행가와 탐험가들이 이 유적을 방문했다.[19] 1861년 조르주 페로는 이 유적과 인근 야즐리카야 유적을 발굴했고,[20] 1886년에 보아즈쾨이가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라는 것을 처음으로 제안했다.[21] 1882년 독일 엔지니어 카를 후만은 유적 전체 지도를 완성했다.|thumb|하투샤의 뷔위카야 유적]]
|thumb|upright|하투샤 유적의 유물이 하투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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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본격적인 발굴 (20세기 초)
1893년~1894년, 에르네스트 샹트르는 당시 보아즈쾨이라고 불리던 마을에서 시험 발굴을 진행했지만, 콜레라 발생으로 중단되었다. 샹트르는 쐐기 문자로 새겨진 점토판 조각들을 발견했는데, 이는 아카드어와 히타이트어 텍스트를 포함하고 있어 중요한 발견이었다.[22][23] 1901년부터 1905년까지 발데마르 벨크는 여러 차례 유적을 방문하여 다수의 점토판을 발견했다.1905년 후고 윙클러는 독일 동양 학회(DOG)를 대신하여 보아즈쾨이에서 탐사를 실시하여 왕궁 유적인 뷔위칼레에서 35개의 쐐기 문자 점토판 조각을 더 발견했다.[24] 1906년, 윙클러는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하여 주로 왕궁 지역에 집중했다. 수천 개의 점토판이 발굴되었는데, 대부분 당시 해독할 수 없었던 히타이트어로 쓰여 있었다. 몇 안 되는 아카드어 텍스트를 통해 이 유적이 하투샤임이 확정되었다.[25] 윙클러는 1907년(오토 푸흐슈타인, 하인리히 콜, 루드비히 쿠르티우스, 다니엘 크렌커)과 1911년과 1912년(테오도르 마크리디)에 잠시 돌아왔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작업이 중단되었다.[26][27]
3. 3. 발굴 재개와 지속 (20세기 중후반~현재)
1931년, 쿠르트 비텔의 지휘 아래 발굴이 재개되었으며, 독일 동양 학회(DOG)와 독일 고고학 연구소(Deutsches Archäologisches Institut)의 후원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9시즌 동안 지속되었다.[28][29]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1952년에 비텔의 지휘 아래 다시 시작되었다.[30] 1963년에는 페터 네베가 현장 책임자가 되었고, 1978년에는 감독으로 승진하여 1993년까지 발굴을 이끌었다.[30] 상부 도시 지역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었으며 점토판 출판이 재개되었다.[31][32] 1994년부터 2005년까지 위르겐 제어가 발굴을 맡았으며, 뷔위카야와 경제 및 주거 공간을 포함한 비 기념물적인 지역에 초점을 맞추었다.[33] 2006년부터 안드레아스 샤흐너의 감독 하에 고고학 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며, 관광객을 위한 유적 복원 및 정비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34][35][36]1986년 발굴 조사에서 스핑크스 게이트에서 서쪽으로 35m 떨어진 곳에서 투드할리야 4세와 타르훈타샤의 왕 쿠룬타 간의 조약이 담긴 금속 비문이 발견되었다.[37][38] 1991년에는 유적 수리 작업 중 서쪽 경사면에서 아카드어로 "위대한 왕 두탈리야가 아수와-컨트리를 격파하고 이 검들을 그의 주, 폭풍의 신에게 바쳤다"라고 새겨진 미케네 청동 검이 발견되었다.[39][40]
3. 4. 주요 발굴 성과
|thumb|하투샤의 뷔위카야 유적]]
|thumb|upright|하투샤 유적의 유물이 하투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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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년 프랑스 고고학자 펠릭스 마리 샤를 텍시에는 보아즈쾨이 마을 근처에서 기념비적인 유적을 발견했다.[17] 텍시에는 지형 측정을 하고, 삽화를 제작하고, 예비 유적 계획을 세웠다.[18] 이후 이 유적은 여러 유럽 여행가와 탐험가들이 방문했는데, 특히 1858년 독일 지리학자 하인리히 바르트가 주목할 만하다.[19] 조르주 페로는 1861년에 이 유적과 인근 야즐리카야 유적을 발굴했다.[20] 페로는 1886년에 보아즈쾨이가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라는 것을 처음으로 제안했다.[21] 1882년 독일 엔지니어 카를 후만이 유적 전체 지도를 완성했다.
에르네스트 샹트르는 1893~94년에 당시 보아즈쾨이라고 불리던 마을에서 몇 개의 시험 참호를 열었지만, 콜레라 발생으로 발굴이 중단되었다. 샹트르는 쐐기 문자로 새겨진 점토판 조각들을 발견했는데, 이는 중요한 발견이었다. 이 조각들은 아카드어와 나중에 히타이트어로 밝혀진 텍스트를 포함하고 있다.[22][23] 1901년부터 1905년까지 발데마르 벨크는 여러 차례 이 유적을 방문하여 다수의 점토판을 발견했다.
1905년 후고 윙클러는 독일 동양 학회(DOG)를 대신하여 보아즈쾨이에서 몇 차례 탐사를 실시하여 왕궁 유적인 뷔위칼레에서 35개의 쐐기 문자 점토판 조각을 더 발견했다.[24] 윙클러는 1906년에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하여 주로 왕궁 지역에 집중했다. 수천 개의 점토판이 발굴되었는데, 대부분 당시 해독할 수 없었던 히타이트어로 쓰여 있었다. 몇 안 되는 아카드어 텍스트를 통해 이 유적이 하투샤임이 확정되었다.[25] 윙클러는 1907년 (오토 푸흐슈타인, 하인리히 콜, 루드비히 쿠르티우스, 다니엘 크렌커)과 1911년과 1912년( 테오도르 마크리디)에 잠시 돌아왔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작업이 중단되었다.[26][27] 이 발굴에서 나온 점토판은 두 시리즈 "Keilschrifttexte aus Boghazkoi"(KB0)와 "Keilschrift urkunden aus Boghazköi"(KUB)로 출판되었다. 1931년 선사 시대 학자 쿠르트 비텔의 지휘 아래 작업이 재개되었으며, 지층 연구가 주요 초점이었다. 이 작업은 DOG와 독일 고고학 연구소(Deutsches Archäologisches Institut)의 후원하에 이루어졌으며,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중단될 때까지 9시즌 동안 지속되었다.[28][29] 1952년 비텔의 지휘 아래 발굴이 재개되었고, 1963년에는 페터 네베가 현장 책임자로, 1978년에는 감독으로 교체되어 1993년까지 이어졌다.[30] 상부 도시 지역에 초점을 맞추었다. 점토판 출판은 KUB와 KBo에서 재개되었다.[31][32] 1994년 위르겐 제어가 발굴을 맡아 2005년까지 이끌었으며, 뷔위카야와 경제 및 주거 공간을 포함한 비 기념물적인 지역에 초점을 맞추었다.[33] 2006년부터 안드레아스 샤흐너 신임 감독 하에 일부 고고학 작업이 계속되었지만, 관광객을 위한 복원 및 준비에 더 집중하고 있다.[34][35][36]
|right|thumb|upright|하투샤 그린 스톤, 종교적 기원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기념물]]
1986년 발굴 조사에서 스핑크스 게이트에서 서쪽으로 35m 떨어진 곳에서 대형(35 × 24 cm, 무게 5 kg) 금속 비문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13세기의 이 점토판에는 히타이트 투드할리야 4세와 타르훈타샤의 왕 쿠룬타 간의 조약이 담겨 있었다. 이 유물은 앙카라의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37][38] 1991년 유적 수리 작업 중 서쪽 경사면에서 미케네 청동 검이 발견되었다. 이 검에는 아카드어로 "위대한 왕 두탈리야가 아수와-컨트리를 격파하고 이 검들을 그의 주, 폭풍의 신에게 바쳤다"라고 새겨져 있었다.[39][40] 1990~91년 발굴 조사 시즌에 상부 도시의 "Westbau" 건물에서 또 다른 중요한 발견은 기원전 13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3400개의 봉인된 불라와 점토 덩어리였다. 이들은 주로 토지 문서와 관련이 있었다.[41]
3. 4. 1. 보아즈쾨이 문서 보관소

이 유적지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는 히타이트 제국 신왕국 시대의 점토판으로 된 설형 문자 왕실 기록 보관소인 보아즈쾨이 문서 보관소로, 공식 서신 및 계약, 법전, 제례 절차, 신탁 예언, 고대 근동 문학으로 구성되어 있다.[45] 특히 중요한 한 점토판은 현재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히타이트와 람세스 2세 치하의 이집트 간의 카데시 전투 이후 몇 년 만인 기원전 1259년 또는 1258년에 체결된 평화 협정의 내용을 상세히 담고 있다. 이 조약의 사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국제 평화 조약의 사례로 뉴욕 시티의 유엔에 전시되어 있다.[45]
3. 4. 2. 금속 비문과 청동 검
1986년, 스핑크스 게이트 근처에서 히타이트 투드할리야 4세와 타르훈타샤의 왕 쿠룬타 간의 조약을 기록한 대형 금속 비문이 발견되었다. 1991년, 유적 수리 작업 중 미케네 청동 검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위대한 왕 두탈리야가 아수와-컨트리를 격파하고 이 검들을 그의 주, 폭풍의 신에게 바쳤다"라는 아카드어 명문이 새겨져 있다.3. 4. 3. 봉인된 불라와 점토 덩어리
1990년에서 1991년 사이에 상부 도시의 "Westbau" 건물에서 기원전 13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3400개의 봉인된 불라와 점토 덩어리가 발견되었다.3. 4. 4. 스핑크스
하투샤 남쪽 문에서 발견된 한 쌍의 스핑크스는 1917년 복원을 위해 독일 제국으로 옮겨졌다. 더 잘 보존된 것은 1924년 터키로 반환되어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었지만, 다른 하나는 독일에 남아 1934년부터 페르가몬 박물관에 전시되다가, 이스탄불 스핑크스와 함께 원래 위치 근처에서 한 쌍을 다시 합쳐 하투샤 유적지 밖의 보아즈쾨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4. 주요 유적
4. 1. 내부 도시
4. 2. 외부 도시
4. 3. 야즐리카야
5. 갤러리






6. 세계유산 등록 기준
wikitable
| 세계유산 등록 기준 |
|---|
| (ⅰ) 인류의 창의적 천재성이 돋보이는 걸작을 대표할 것 |
| (ⅱ) 오랜 기간 또는 세계의 특정 문화권 안에서 건축, 기술, 기념비적 예술, 도시 계획 또는 조경 디자인의 발전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류를 보여줄 것 |
| (ⅲ)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
| (ⅳ) 인류 역사상 중요한 시대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또는 경관의 뛰어난 사례일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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