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와탈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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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와탈리 2세는 무르실리 2세의 장남으로, 히타이트 제국의 왕이었다. 그는 수도를 타르훈타사로 이전하고, 카데시 전투에서 람세스 2세와 맞서 싸운 것으로 유명하다. 윌루사의 통치자 알락산두와의 조약이 발견되었으며, 카데시 전투에서 히타이트는 아무르 왕국과 카데시 왕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그의 사후에는 내전이 발생했고, 서자인 무르실리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무와탈리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칭호히타이트
다른 이름무와탈리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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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르켈리 회위크에 있는 무와탈리 2세의 부조 묘사
선임자무르실리 2세
후임자무르실리 3세
부모무르실리 2세
왕비 가술라위야
친척하투실리 3세(형제)
투드할리야 4세(조카)
자녀무르실리 3세
울미-테슈프
통치 기간
재위기원전 1290년경 - 기원전 1272년
개인 정보
사망일기원전 12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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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무와탈리 2세는 무르실리 2세와 왕비 가술라위야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으로, 여러 형제가 있었다. 히타이트의 왕이 된 그는 하투사에서 타르훈타사로 수도를 옮기고, 형제인 하투실리 3세를 하투사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윌루사(트로이)의 통치자 알락산두와 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의 사본이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알락산두트로이 전쟁에 나오는 파리스와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한다.

이집트 학자들은 람세스 2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 무와탈리 2세가 세티 1세와 카데시에 대한 비공식적인 평화 조약이나 이해에 도달하여 시리아 지배권을 둘러싼 충돌을 피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세티 1세는 이 조약을 통해 이집트 국내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카데시를 히타이트에 양도한 것으로 보인다.

무와탈리 2세에게는 타누-헤파라는 아내가 있었고, 적어도 두 명의 자녀가 있었다. 무르실리 3세로 즉위한 우르히-테슈프와 쿠룬타인데, 쿠룬타는 하투실리 3세 통치 기간 동안 타르훈타사의 봉신 통치자가 되었다. 울미-테슈프라는 인물도 무와탈리 2세의 아들로 추정되지만, 울미-테슈프와 쿠룬타는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투드할리야 4세와 이집트 여왕 마아트호르네페루레는 무와탈리 2세의 조카였다.

무와탈리 2세는 람세스 2세카데시 전투에서 맞붙어 무승부를 기록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아다나 근교의 실케리 휴육(Sirkeli Höyük)에서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마애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옥외 히타이트 비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예로 여겨진다.

세이한 강 서쪽 강둑, 시르켈리](Sirkeli Höyük)] 마을 근처에 있는 히타이트 록 릴리프
세이한 강 서쪽 강둑, 시르켈리](Sirkeli Höyük)] 마을 근처에 있는 히타이트 록 릴리프
무와탈리 2세가 죽은 후, 고대 히타이트의 계승법에 따라 서자 무르실리 3세(후르리어: 울히 테슈프)가 왕위를 계승했다.

2.1. 수도 이전

무와탈리 2세는 히타이트의 수도를 하투사에서 타르훈타사로 이전하고, 그의 형제 하투실리를 하투사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수도 이전의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하투실리 3세가 쓴 기록과 무와탈리 2세가 벌인 전쟁을 바탕으로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히타이트와 카스카 사이의 국경 분쟁 및 피야마라두의 반란 때문이다. 하투사는 북부 국경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분쟁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의 타르훈타사로 수도를 옮겨 이집트와의 전투에 대비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했다.

두 번째는 종교적인 이유이다. 이타마르 싱어는 저서 "아크나톤과 무와탈리의 실패한 개혁"에서 수도 이전이 종교 개혁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무와탈리 2세는 인장에 전통적인 하늘의 폭풍신 (테슈브) 대신 번개의 폭풍신 (피하사사)에게 포옹받는 모습을 새겨 넣었는데, 이는 이후 히타이트 왕들의 인장에도 나타나는 새로운 모티프인 '움아르뭉스젠'(독일어, 신의 보호적인 포옹)을 도입한 것이다.

이러한 수도 이전은 결국 무와탈리 2세 사후 내전으로 이어졌다.

2.2. 카데시 전투

무와탈리 2세는 람세스 2세카데시 전투에서 맞붙어 무승부를 기록한 히타이트의 통치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수필룰리우마 1세의 손자이자 알레포의 왕이었던 탈미-샤르루마를 동맹으로 삼았다.

알레포 조약: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 2세와 알레포의 왕 탈미-샤르루마 사이의 조약으로, 아카드어로 작성되었다. 고대 하투사의 보아즈쾨이에서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1300년경으로 추정된다. 대영 박물관
알레포 조약: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 2세와 알레포의 왕 탈미-샤르루마 사이의 조약으로, 아카드어로 작성되었다. 고대 하투사의 보아즈쾨이에서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1300년경으로 추정된다. 대영 박물관


양측 모두 이 전투에서 승리를 주장했지만, 학자들은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고 군사력이 감소했기 때문에 이 전투가 양측, 특히 람세스 2세에게 불리하게 끝났다고 평가한다.

이 전투가 주목받는 이유는 람세스 2세가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벌인 모든 전투 중에서 이 전투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는 점이다. 람세스 2세는 전투에 대한 두 가지 공식 버전, 즉 '시'라고도 불리는 문학 기록과 전투에 대한 짧은 기록과 조각된 이미지를 포함하는 게시판 형태의 그림 기록을 제작했다. 이 두 가지 전투 묘사는 라메세움을 포함한 5개의 이집트 사원에 새겨져 있다.

람세스 2세가 카데시 전투에 참여한 모습을 보여주는 조각 중 하나.
람세스 2세가 카데시 전투에 참여한 모습을 보여주는 조각 중 하나.


무와탈리 2세는 이집트 군대에 맞서 뛰어난 전술을 구사했다. 그는 군대를 시리아 북부에 집결시키고 정찰병과 스파이를 보내 람세스 2세 군대의 위치를 ​​확인했다. 스파이들은 탈주병인 척하며 람세스 2세에게 접근하여 히타이트 군대가 알레포에서 백 마일 이상 떨어져 있다고 속였다. 그러나 얼마 후 다른 히타이트 정찰병이 붙잡히면서 람세스 2세는 속임수를 알아차렸고, 무와탈리 2세의 군대가 카데시 바로 밖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투는 히타이트 군대가 카데시로 진군하던 이집트 군대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카데시에 자신의 야영지에 있던 람세스 2세는 다른 부대보다 앞서 나갔고, 그의 군대 중 한 부대만 그와 함께 있었다. 람세스 2세 남쪽에 있는 부대가 히타이트 전차병에게 공격받는 동안, 무와탈리 2세는 두 번째 부대의 전차병을 보내 람세스 2세의 야영지를 공격했다. 람세스 2세의 군대는 히타이트의 공격을 막아내고 다음 날 전투에서 "승리"했다.

2.2.1. 전투 배경

무와탈리 2세는 히타이트의 왕으로, 할아버지 수필룰리우마 1세 시대부터 이어져 온 시리아 팽창 정책을 이어갔다. 이집트 제19왕조의 파라오 세티 1세는 히타이트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아무르 왕국과 카데시 왕국을 공격하여 이집트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무와탈리는 이에 반격하여 아무르를 다시 히타이트의 영향권으로 되돌렸지만, 이후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지속적인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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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티 1세가 죽고 람세스 2세가 파라오가 된 후, 람세스 2세는 다시 아무르 왕국을 점령하기 위해 군사 활동을 벌였다. 기원전 1274년 무와탈리 2세와 람세스 2세는 오론테스 강 유역의 카데시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의 결과, 히타이트는 아무르 왕국과 카데시 왕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2.2.2. 전투 경과

무와탈리 2세는 람세스 2세카데시 전투에서 맞붙었으나,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고 군사력이 감소하여 무승부로 끝났다. 이 전투가 주목받는 이유는 람세스 2세가 자신의 재위 기간 중 이 전투를 특별히 강조하여 두 가지 공식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하나는 '시'라고도 불리는 문학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전투에 대한 짧은 기록과 조각된 이미지를 포함하는 게시판 형태의 그림 기록이다. 이 두 기록은 라메세움을 포함한 5개의 이집트 사원에 새겨져 있다.

무와탈리 2세는 이집트 군대에 맞서 뛰어난 전술을 사용했다. 그는 시리아 북부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정찰병과 스파이를 보내 람세스 2세 군대의 위치를 ​​확인했다. 람세스 2세는 처음에 탈주병으로 위장한 스파이에게 속아 히타이트 군대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곧 다른 히타이트 정찰병이 붙잡히면서 람세스 2세는 속임수를 알아차렸고, 무와탈리 2세의 군대가 카데시 바로 밖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투는 히타이트 군대가 카데시로 진군하던 이집트 군대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람세스 2세는 자신의 야영지에서 다른 부대보다 앞서 나갔고, 그의 군대 중 한 부대만 그와 함께 있었다. 람세스 2세 남쪽에 있는 부대가 히타이트 전차병에게 공격받는 동안, 무와탈리 2세는 두 번째 부대의 전차병을 보내 람세스 2세의 야영지를 공격했다. 람세스 2세의 군대는 히타이트의 공격을 막아내고 다음 날 전투에서 "승리"했다.

람세스 2세가 카데시 전투에 참여한 모습을 보여주는 조각 중 하나.
람세스 2세가 카데시 전투에 참여한 모습을 보여주는 조각 중 하나.


람세스 2세는 두 개의 전투 기록에서 이 전투를 히타이트 군대와의 서사적인 투쟁으로 묘사하며, 자신의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과시한다. 짧은 공보에서는 무와탈리 2세를 "사악한 카티의 수장"으로 묘사한다. 람세스 2세는 무와탈리 2세의 행방에 대한 잘못된 보고를 들었다고 인정하지만, 무와탈리 2세 군대의 실제 위치를 발견했을 때, "그의 폐하는 그들을 그들의 자리에서 학살하셨다. 그들은 그의 말 앞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의 폐하는 혼자셨고, 다른 사람은 그와 함께 있지 않았다."라고 주장한다.

더 긴 시에서는 람세스 2세가 다시 무와탈리 2세를 "카티의 사악한 적"이라고 부르지만, 무와탈리 2세가 그를 두려워하는 모습도 묘사하며, "사악한 카티의 수장은 그와 함께 있던 군대 한가운데에 서 있었지만 그의 폐하를 두려워하여 싸우러 나오지 않았다."와 "불쌍한 카티의 수장은 그의 군대와 전차들 사이에 서서... 돌아서고, 움츠리고, 두려워했다."라고 말한다. 시와 공보는 모두 람세스 2세가 무와탈리 2세에게 놀라운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끝나며, 시는 무와탈리가 람세스 2세와 두려움 속에 평화 조약을 맺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람세스 2세의 열정적인 묘사와는 달리, 학자들은 이 전투가 람세스 2세에게 재앙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전투 이후 무와탈리 2세가 시리아로 계속 확장했고 이집트의 확장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멈추었기 때문이다.

2.2.3. 전투 결과 및 영향

람세스 2세카데시 전투에서 교착 상태로 싸운 히타이트 통치자로 가장 잘 알려진 무와탈리 2세는 수필룰리우마 1세의 손자이자 알레포의 왕이었던 탈미-샤르루마를 동맹으로 삼았다.

양측 모두 이 전쟁에서 승리를 주장했지만, 학자들은 이 전투가 양측, 특히 람세스 2세에게 좋지 않게 끝났다고 생각한다. 이는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군사력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이 전투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람세스 2세가 재위 기간 동안 벌인 모든 전투 중에서 이 전투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는 사실이다. 람세스 2세는 전투에 대한 두 가지 공식 버전(문학 기록, 그림 기록)을 제작했으며, 이 두 가지 전투 묘사는 라메세움을 포함한 5개의 이집트 사원에 새겨져 있다.

전투는 히타이트 군대가 카데시로 진군하고 있던 이집트 군대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의 공격을 막아내고 다음 날 전투에서 "승리"했다. 람세스 2세가 묘사한 두 개의 전투 기록은 이 전투를 히타이트 군대와의 서사적인 투쟁으로 묘사하며, 람세스 2세는 자신의 뛰어난 군사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과시한다. 짧은 공보에서는 무와탈리 2세를 "사악한 카티의 수장"으로 자주 묘사한다. 시와 공보는 모두 람세스 2세가 무와탈리 2세에게 놀라운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끝나며, 시는 무와탈리가 람세스 2세와 두려움 속에 평화 조약을 맺는 것으로 끝난다.

람세스 2세의 전투에 대한 열정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이 전투가 람세스 2세에게 재앙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이는 전투 이후 무와탈리 2세가 시리아로 계속 확장했고 이집트의 확장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멈추었기 때문이다.

무르실리 2세의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히타이트 왕이 된 무와탈리 2세는 할아버지이자 3대 전 왕인 수필룰리우마 1세 시대부터 이어진 시리아로의 팽창 정책을 계승했다. 이집트 제19왕조의 파라오 세티 1세는 히타이트의 종주권 아래에 있던 아무르 왕국과 카데시 왕국으로 군대를 진격시켜 두 왕국을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무와탈리는 반격에 나서 아무르를 다시 히타이트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지만, 이후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항시적인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세티 1세가 죽고 파라오가 된 람세스 2세는 다시 아무르 왕국의 지배를 목표로 활발한 군사 활동을 펼쳐 이를 제압했다. 그리고 기원전 1274년에 무와탈리와 람세스 2세는 오론테스 강 유역의 카데시에서 각각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싸웠다(전투 경과는 카데시 전투 기사 참조). 이 전투의 결과, 히타이트는 아무르 왕국과 카데시 왕국에 대한 영향력 유지를 성공했다.

2.3. 기타 업적

그는 히타이트의 수도를 타르훈타사로 이전하고, 그의 형제 하투실리 3세를 하투사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아르자와 땅 중 하나인 윌루사 (트로이)의 통치자 알락산두와 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의 사본이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알락산두트로이 전쟁에 나오는 파리스와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한다.

세이한 강 서쪽 강둑, [[시르켈리](Sirkeli Höyük)] 마을 근처에는 후기 히타이트 록 릴리프가 있는데, 이는 Çukurova(킬리키아 평원)에서 히타이트의 존재를 보여준다. 이 릴리프는 히타이트 대왕 무와탈리 2세(기원전 1290–1272년)를 묘사한다. 무와탈리 2세의 릴리프는 킬리키아 평원에서 가장 큰 정착지 언덕 중 하나인 시르켈리 höyük 근처에 있다. 이 정착지는 고대 시대에 푸루나 또는 피라모스로 알려진 세이한 강 왼쪽 강둑에 위치해 있다.

왕의 비문에는 그의 아버지 무르실리 2세의 이름도 언급되어 있다. "무와탈리, 대왕, 영웅, 무르실리의 아들, 대왕, 영웅". 그는 긴 로브를 입고 왼손에는 칼무스(리투스)를 들고 있다. 무와탈리 왕의 모습은 히타이트 도상학에서 하늘의 태양신(네피사스 이스타누, 또는 시미게)이 묘사된 방식과 일치하며, 이는 신격화를 나타낸다.

몇 미터 떨어져 있는 두 번째 릴리프는 매우 유사하지만 고대에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손상의 성격은 의도적인 파괴를 나타내어 이 인물의 이름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인물은 아마도 우르히-테슈프일 것이며, 그의 왕위명은 무르실리 3세였다. 그는 아버지 무와탈리 2세가 죽은 후 하티의 왕이 되었지만, 7년 후 그의 삼촌 하투실리 3세에 의해 전복되었다. 이 릴리프들은 고대 도시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보였을 것이며 풍경을 지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강줄기가 수 세기에 걸쳐 계속 바뀌었기 때문에 현재 릴리프는 방문객들에게 쉽게 보이지 않는다. 히타이트 시대에 시르켈리 höyük은 쿠만니의 숭배 도시였을 수 있다.

아다나 근교의 실케리 휴육(Sirkeli Höyük)에서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마애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옥외 히타이트 비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예로 여겨진다.

세이한 강 서쪽 강둑, 시르켈리](Sirkeli Höyük)] 마을 근처에 있는 히타이트 록 릴리프
세이한 강 서쪽 강둑, 시르켈리](Sirkeli Höyük)] 마을 근처에 있는 히타이트 록 릴리프

2.4. 사후

무와탈리 2세가 죽었을 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왕비와의 사이에서는 아들이 없었다. 고대 히타이트의 계승법에 따라 서자 무르실리 3세(후르리어: 울히 테슈프)가 왕위를 계승했다.

3. 가족 관계

무와탈리 2세는 무르실리 2세와 여왕 가술라위야의 장남이었다. 아내로는 타누-헤파가 있었으며, 슬하에 적어도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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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이름비고
아버지무르실리 2세
어머니가술라위야
아내타누-헤파
아들무르실리 3세(후르리어: 울히 테슈프)삼촌 하투실리 3세에게 폐위되기 전까지 왕위에 있었다.
아들쿠룬타하투실리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타르훈타사의 봉신 통치자가 되었다.
아들(?)울미-테슈프무와탈리 2세의 세 번째 아들로 추정되지만, 쿠룬타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카투드할리야 4세
조카마아트호르네페루레이집트 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