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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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탁주는 남송 시대의 권신으로, 광종을 폐위시키고 영종을 옹립하여 13년간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조여우를 몰아내고 주희와 주자학을 탄압하는 경원의 당금을 일으켰으며, 금나라를 공격하는 개희북벌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금나라와의 화의 과정에서 살해되었고, 사미원이 그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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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원은 남송 효종 때 우승상 사호의 아들로, 과거 급제 후 한탁주의 북벌을 반대하고 숙청을 주도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25년간 재상으로 재임하며 남송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 송나라의 태사 - 한세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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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탁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직함 | |
직위 | 송나라의 재상 |
임기 시작 | 1205년 7월 23일 |
임기 종료 | 1207년 11월 24일 |
군주 | 영종 |
이전 | 진자강 |
다음 | 사미원 |
개인 정보 | |
출생 | 1152년 11월 6일 |
사망 | 1207년 11월 24일 |
사망 장소 | 임안, 남송 |
가족 관계 | 황후 한씨 |
직업 | 정치가 |
2. 생애
1189년 효종이 퇴위하고, 조돈이 광종으로 즉위하였다. 광종은 우둔하여 황후 이씨의 말만 들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재상 조여우, 한탁주 등은 광종을 퇴위시켰다. 한탁주는 이 일로 권력에 가까워질 것이라 예상했으나, 조여우 등은 한탁주를 멀리했다.[6]
이에 원한을 품은 한탁주는 1195년(경원 원년) 조여우를 재상직에서 몰아냈다. 경원 3년에는 조여우 편에 섰던 주필대, 유정, 왕난, 주희, 팽귀년 등 59명이 금고(禁錮)에 처해졌다. 이듬해에는 주희의 주자학(당시 도학(道學)이라 불림)도 거짓 학문으로 탄압받았다(경원의 당금).[6]
한탁주는 아버지의 음서로 출세하여 효종 말년에는 여주방어사, 지각문사에 이르렀고, 1194년 효종 사후 광종의 아들 조확(닝종) 즉위에 기여하여, 이후 10여 년간 권력을 잡았다. 그는 금나라가 북쪽 타타르족의 침입으로 약화된 틈을 타 개희북벌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6]
1207년 금나라는 화평 조건으로 한탁주의 머리를 요구했고, 사미원은 한탁주를 살해하고 그의 머리를 금나라로 보내 화의를 맺었다.[6]
2. 1. 초기 생애와 권력 장악
1189년 효종이 퇴위하고, 조돈이 광종으로 즉위하였다. 광종은 우둔하여 황후 이씨의 말만 들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재상 조여우, 한탁주 등은 광종을 퇴위시켰다. 한탁주는 이 일로 권력에 가까워질 것이라 예상했으나, 조여우 등은 한탁주를 멀리했다.[6]이에 원한을 품은 한탁주는 1195년(경원 원년) 조여우를 재상직에서 몰아냈다. 경원 3년에는 조여우 편에 섰던 주필대, 유정, 왕난, 주희, 팽귀년 등 59명이 금고(禁錮)에 처해졌다. 이듬해에는 주희의 주자학(당시 도학(道學)이라 불림)도 거짓 학문으로 탄압받았다(경원의 당금).[6]
한탁주는 아버지의 음서로 출세하여 효종 말년에는 여주방어사, 지각문사에 이르렀다. 1194년 (소희 5년), 효종이 승하하였으나 광종은 병으로 상례를 치를 수 없었다. 한탁주는 조여우 등과 함께 광종의 아들 가왕 조확(닝종)의 즉위를 협의하여 태황태후 오씨의 재가를 얻었다. 이후 황제의 신임을 얻은 한탁주는 작위가 가봉되었고, 송나라 조정에서 13년에 걸쳐 전권을 휘둘렀다. 한탁주는 자신의 측근을 재상 등 요직에 추천하여 자신의 의향에 따른 정치를 하게 함으로써 실질적인 권력을 쥐게 되었다.[6] 이러한 전횡에 반대한 주희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한탁주는 주희의 성리학을 위학으로 규정하고 금지하였다(경원의 당금).[6]
2. 2. 경원의 당금(慶元之黨禁)
1189년 효종이 퇴위하고 조여우(趙汝愚), 한탁주(韓侂胄) 등에 의해 광종이 퇴위당했다.[6] 이것에 원한을 품은 한탁주는 1195년(경원 원년) 조여우를 재상직에서 몰아냈고, 경원 3년에는 조여우 편에 섰던 주필대(周必大), 유정(留正), 왕난(王藺), 주희(朱熹), 팽귀년(彭龜年) 등 59명이 금고(禁錮)에 처해졌다.[6] 그 다음 해에는 주희의 주자학(당시 도학(道學)이라고 불렸다)도 거짓 학문이라고 탄압받았다(경원위학의 금(慶元僞學之禁)).[6] 이 일련의 사건을 경원의 당금(慶元之黨禁)이라 불렀다.[6]2. 3. 개희북벌(開禧北伐)과 최후
1189년 효종이 퇴위하고 조돈(趙惇)이 광종(光宗)으로 즉위했지만, 우둔한 광종은 황후 이씨의 말만 들었다. 이에 재상 조여우(趙汝愚), 한탁주(韓侂胄) 등은 광종을 퇴위시켰다. 한탁주는 이 공으로 권력을 잡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조여우 등은 한탁주를 멀리했다.[6]이에 원한을 품은 한탁주는 1195년(경원 원년) 조여우를 재상직에서 몰아냈고, 경원 3년에는 조여우 편에 섰던 주필대(周必大), 유정(留正), 왕난(王藺), 주희(朱熹), 팽귀년(彭龜年) 등 59명을 금고(禁錮)에 처했다. 이듬해에는 주희의 주자학(당시 도학(道學)이라 불림)을 거짓 학문이라며 탄압했다(경원위학의 금(慶元僞學之禁)). 이 사건들을 경원의 당금(慶元之黨禁)이라 한다.[6]
이후 10년간 권력을 유지한 한탁주는 황후와 황태후가 차례로 사망하자 권력이 약화되었다. 그는 북쪽의 타타르 침입으로 약해진 금나라를 공격해 남송의 비원인 금나라 타도를 성공시켜 권력을 확고히 하려 했다. 1206년, 닝종(寧宗)은 금(金) 토벌 조칙을 내려 개희북벌(開禧北伐) 이라 불리는 금(金) 공격이 시작되었으나 실패했다. 남송군의 약체화가 심각했기 때문이다.[6]
1207년 금나라는 화평 조건으로 한탁주의 머리를 요구했고, 예부시랑(문부대신) 사미원은 한탁주를 살해하고 그의 머리를 금나라로 보내 화의를 맺었다.[6]
참조
[1]
서적
War, Politics and Society in Early Modern China
Routledge
[2]
서적
Cambridge History of China v.5.1
[3]
서적
Cambridge History of China v.5.1
[4]
서적
Cambridge History of China v.5.1
[5]
문서
韓琦墓誌銘
[6]
서적
衣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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