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북평 달량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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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남 북평 달량진성은 완도로 통하는 남창 동쪽 해안에 있는 성으로, 현재 약 50m의 성벽이 남아있다. 조선 성종 때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되었으며, 조선 초 만호가 배치된 우수영 관할의 진성이었다. 달량진성은 해남과 완도를 잇는 해상 교통로였으며, 달량진사변(을묘왜변)이 일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552년 완도 가리포로 수군진이 옮겨진 후 달량진사변이 발생했으며, 이후 북평면 이진에 이진진이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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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북평 달량진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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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이름 | 해남 북평 달량진성 터 |
한자 표기 | 海南 北平 達梁鎭城 |
위치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273 |
유형 | 향토문화유산 |
지정 번호 | 19 |
지정일 | 2010년 11월 19일 |
시대 | 조선 |
소유 | 북평면 |
면적 | 826m² |
2. 역사
달량진성은 완도로 통하는 남창의 동쪽 해안에 축조된 성으로, 조선 성종 대에 왜구의 해안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에는 만호(萬戶)가 배치되었던 우수영 관할의 진성이었다. 성이 자리한 남창 지역은 해남에서 완도를 잇는 중요한 해상 교통로였으며, 당시 달량진 또는 우달도(右達島)로 불렸다.
이곳은 특히 1555년 발생한 달량진사변(을묘왜변)의 무대가 되었으며, 당시 해남 현감 변협(邊協)이 성을 지켜낸 일화와 수성송(守城松) 유래가 전해진다. 1552년 수군진이 완도 가리포(加里浦)로 옮겨진 후, 1555년 달량진사변이 일어났다. 사변 이후 인근 북평면 이진리에는 이진진(梨津鎭)이 새로 설치되었다. 현재 성벽은 남창마을 동쪽 해안에 약 50m 정도 남아 있다.
2. 1. 축조 배경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부터 외적의 침입이 잦아 수많은 성곽을 쌓았으며, 조선 세종 때 양성지(梁誠之)는 우리나라를 '성곽의 나라'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는 외부의 침략이 그만큼 빈번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해남군이 위치한 남해안 지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서남 해안의 길목에 자리하여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으나, 동시에 왜구를 비롯한 외부 세력의 침입에 자주 시달려야 했다.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해안 방어를 위해 여러 형태의 성곽이 축조되었는데, 달량진성 역시 이러한 목적으로 세워진 진성(鎭城) 중 하나이다. 정확한 축조 연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조선 성종 대에 빈번했던 왜구의 해안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에 이미 만호(萬戶)가 배치되었던 수군진으로, 우수영의 관할하에 있었다. 성이 위치한 남창 지역은 해남에서 완도군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해상 교통로였으며, 당시 달량진 또는 우달도(右達島)로 불렸다.
2. 2. 달량진사변 (을묘왜변)
달량진성은 달량진사변(을묘왜변)과 수성송(守城松)에 대한 유래가 전해진다.1522년 신달량(新達梁)의 진(鎭)에 왜구가 침범하였고,[1] 1552년 완도 가리포(加里浦)로 수군진을 옮긴 후 이곳에서 달량진사변, 즉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이때 인근 현들이 모두 함락되는 가운데도 해남 현감으로 있던 변협(邊協)만이 달량진성을 지켰던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변이 끝난 후, 달량진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북평면 이진(梨津)에 이진진(梨津鎭)이 설치되었다.
2. 3. 이진진 설치
조선 초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곳(달량진성)에 수군진성이 설치되었다. 1522년 신달량(新達梁)의 진(鎭)에 왜구가 침범하였고,[1] 1552년 완도 가리포(加里浦)로 수군진을 옮긴 후 이곳에서 달량진사변(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이때 인근 현들이 모두 함락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해남 현감으로 있던 변협(邊協)만이 성을 지켜낸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변이 끝난 후,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에 이진진(梨津鎭)이 설치되고 이곳에 남창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남창 이전에는 달량진, 또는 우달도(右達島)라 불렀다고 한다. 남창에서 땅끝 쪽으로 가는 동남쪽 해안에는 성으로 온 마을이 쌓여 있는 이진리가 나온다. 이곳의 지형이 배처럼 생겼다 해서 배진 또는 이진이라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이곳 이진, 남창, 완도군 달도는 배 모양의 지형(배형국)을 이룬다고 하며, 이진은 배, 달도는 닻, 이진과 남창 사이의 언덕은 키(舵)로 여겨진다.3. 지리적 특징
달량진성은 완도로 통하는 길목인 남창의 동쪽 해안에 자리 잡고 있다.[1] 현재 해남군 북평면 남창마을 동쪽 해안에 약 50m 가량의 성벽이 남아 있다.
성을 끼고 있는 남창 지역은 해남에서 완도를 잇는 중요한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달량진 또는 우달도(右達島)라고도 불렸으며, 이곳에 남창(南倉, 세곡 창고 또는 관아)을 두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곳은 달량진사변과 수성송(守城松)에 대한 유래가 전해지는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남창에서 땅끝 방향인 동남쪽 해안에는 이진진(梨津鎭)이 있었던 이진리가 위치한다. 이곳의 지형이 배처럼 생겼다고 하여 배진 또는 이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특히 이진, 남창, 완도군의 달도를 묶어 배 모양의 지형, 즉 배형국(舟形局)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때 이진은 배, 달도는 닻, 이진과 남창 사이의 언덕은 배의 방향을 조절하는 키(舵)에 해당한다고 여겨졌다.
한반도 남해안 지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예로부터 해상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특히 달량진성이 위치한 서남해안 모퉁이는 왜구의 침입 등 외부의 공격에 자주 시달렸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 배경 속에서 달량진성은 해안 방어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4. 한국 성곽사에서의 의의
달량진성은 조선 성종 대에 왜구의 해안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수영 관할의 수군 진성(鎭城)이다.[1] 이 성은 해남에서 완도를 잇는 중요한 해상 교통로인 남창의 동쪽 해안에 자리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다.
조선 초기에 설치된 수군진성으로서, 1522년에는 왜구가 신달량진(新達梁鎭)을 침범하는 사건이 있었고,[1] 1555년에는 성 앞에서 달량진사변(을묘왜변)이 발생하기도 했다. 특히 달량진사변 당시 인근 현들이 함락되는 와중에도 해남 현감 변협(邊協)이 홀로 성을 지켜낸 일화는 당시 왜구의 침입에 맞선 조선 수군의 방어 노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비록 이후 수군진이 완도 가리포(加里浦)로 이전되고, 인근 북평면 이진리에 이진진(梨津鎭)이 새로 설치되면서 그 기능이 축소되었지만, 달량진성은 조선 전기 남해안의 군사적 상황과 해안 방어 체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유적으로서 의의를 지닌다.
4. 1. 성곽의 발달 과정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 이래 끊임없이 이어진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많은 성을 쌓았다. 조선 세종 때 양성지(梁誠之)는 우리나라를 성곽의 나라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외부의 침입이 잦았다. 특히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남해 지역은 고대부터 해상 교통의 중요 거점이었으며, 서남 해안의 길목에 위치하여 바다를 통한 외침에 자주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해남 지역에도 여러 곳에 많은 성곽이 축조되었다. 지방 행정 관서가 있는 읍을 방어하기 위한 읍성, 수군의 방어 기지인 영성(營城)과 진성(鎭城) (예: 달량진성), 그리고 산의 자연 지형을 활용한 산성 등 다양한 형태의 성곽이 존재한다.고고학적으로 성곽은 대체로 기원전 1~2세기경,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집단 거주지에서 외부의 짐승이나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방어 시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삼국 시대에 들어 삼국 간의 대립과 잦은 전투는 본격적인 성곽 구축의 배경이 되었다.
성곽은 일반적으로 축조 기술의 발달에 따라 변화해왔다. 초기에는 비교적 만들기 쉬운 나무 울타리인 목책(木柵) 형태로 시작되었다. 이후 흙을 쌓아 올린 토성으로 발전하였는데, 토성은 흙을 다져가며 쌓는 판축법(板築式)과 성을 쌓을 곳의 좌우 흙을 파내 둔덕을 만드는 삭토법으로 주로 축조되었다. 판축법은 주로 평야 지대에서, 삭토법은 산등성이에서 사용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인력과 비용이 들지만 견고하고 오래가는 석성으로 발전해 나갔다.
성의 형태 또한 변화를 보이는데, 초기에는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정상 부근을 테처럼 두른 테뫼형 산성이 많았으나, 후기로 갈수록 산골짜기를 포함하여 넓은 지역을 감싸는 포곡형(包谷形) 산성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성곽들은 축조 목적과 지형 조건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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