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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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왜구는 '일본인 해적'을 의미하는 단어로,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한반도와 중국 해안에서 약탈을 자행한 해적 집단을 지칭한다. 용어는 일본인을 뜻하는 '왜'와 도적을 뜻하는 '구'의 결합으로, 414년 광개토대왕릉비에 처음 등장한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극심한 피해를 입혔으며, 전기 왜구는 일본인, 후기 왜구는 중국인이 주를 이루었다. 14세기 일본의 내란과 명나라의 해금 정책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활동했으며, 단순 약탈뿐 아니라 인신매매, 밀무역 등 다양한 형태로 이익을 추구했다. 고려, 조선, 명나라에서 토벌 노력을 기울였으나, 왜구의 활동은 쉽게 근절되지 않았다. 왜구의 정체에 대해서는 일본인, 한국인, 몽골인 등 다양한 민족 집단이 섞여 있었다는 논쟁이 있으며, '토착왜구'와 같은 용어는 현대에도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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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 |
---|---|
지도 정보 | |
명칭 | |
한자 | 倭寇 |
중국어 | wōkòu (워커우) |
광둥어 | wo1 kau3 (워까우) |
객가어 | vo24 kieu55 (보키우) |
민남어 | e-khò͘ (에커) |
오어 | u kheu (우커) |
한국어 | 왜구 |
일본어 | わこう (와코) |
개요 | |
시기 | 13세기 ~ 16세기 |
활동 지역 | 중국 및 한국 해안 |
특징 | 해적 행위 |
역사 | |
배경 | 원나라 말기의 혼란 명나라의 해금 정책 일본의 사회적 불안 |
주요 활동 | 해안 지역 약탈 노예 무역 밀수 |
영향 | 중국과 한국의 해안 방어 강화 조선의 국방력 강화 동아시아 해상 무역 질서 교란 |
구성 | |
국적 | 일본인 (주로) 중국인 한국인 기타 동남아시아인 |
조직 | 다양한 해적 집단 연합 강력한 지휘 체계 부재 |
용어 관련 | |
의미 | 倭 (왜): 일본을 가리키는 옛 명칭 寇 (구): 도적, 해적 |
번역 | 일본어: 와코 (わこう) 영어: Wakou |
기타 | |
참고 자료 | 일본유산 "국경의 섬" 이키·쓰시마·고토 교역·교류와 긴장의 역사 |
2. 용어의 기원과 의미
왜구(倭寇)는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 활동하던 해적 집단을 가리킨다. 이들은 배를 타고 다니며 약탈과 살인을 일삼아 큰 피해를 입혔다.[4]
왜구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러 논쟁이 있다. 초기 왜구는 주로 일본 열도의 외딴 섬에 근거지를 두고 일본해에서 활동했지만,[4] 16세기 왜구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4]
도쿄 대학의 다나카 다케오 교수는 초기 왜구가 대마도 등 섬에 살던 한국인이었다고 주장했다.[34] 조선왕조실록 세종 편에 따르면, 이순몽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중 진짜 일본인에 의한 것은 10건 중 1~2건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우리나라 백성이 일본인 복장을 하고 소란을 피운 것"이라고 말했다.[34][35] 그러나 이순몽은 고려 시대 사람이 아니며, 그의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37]
무라이 쇼스케는 초기 왜구가 단일 민족이 아닌 여러 집단 출신이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36] 그는 왜구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지역에 살던 '변방의 사람들'이었다고 주장하며, 초기 왜구 지도자 중 한 명인 아지발도가 몽골인, 일본인, 한국인 등으로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39]
2. 1. 어원
'왜구(倭寇)'라는 명칭은 '왜(倭)'와 '구(寇)'가 결합된 것으로, '일본인이 떼지어 도적질을 하다'라는 의미이다.[97] '왜'는 일본인을 가리키는 말이며, '구'는 무리를 지어 활동하는 도적을 뜻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왜구'는 '일본 해적'을 의미하는 명사로 굳어졌다.[98]왜구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광개토대왕비(414년)이다. 비문에는 "왜구"(倭寇, 일본 도적)들이 바다를 건너왔다가 광개토대왕에게 패배했다는 내용이 있다.[5] 고려사에도 고종 10년(1223년)에 '왜가 김해를 침략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등, 이후 자주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98]
'왜구'는 문자 그대로 "왜인(倭人)(일본인)의 침략 도적"을 의미하며, 중국과 조선에서는 일본인 해적을 뜻했다.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이나 일중전쟁에서 일본군도 '왜구'라고 불렸으며, 현대에도 한국인이나 중국인이 일본인을 경멸하는 표현으로 사용한다.
2. 2. 최초의 기록
'왜구'라는 표현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414년)이다.[98][5] 비문에는 404년에 "왜구"(倭寇, 일본 도적)들이 바다를 건너왔다가 광개토대왕에게 패배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5] 이후 고려사 고종 10년(1223년) 기록에도 '왜구금주(倭寇金州)'라는 표현이 등장한다.[98]2. 3. 현대적 의미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타이완(대만) 등에서 '왜구'는 일본인을 비하하거나 폄하하는 멸칭으로 사용된다. 이는 13~16세기경 배를 타고 다니며 약탈을 일삼던 해적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더불어, 임진왜란과 일중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을 '왜구'로 부른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반일 감정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3. 왜구의 출현 배경
왜구는 크게 전기 왜구(14세기 전후)와 과도기를 거친 후기 왜구(16세기)의 두 시기로 나뉜다.[42]
전기 왜구는 주로 규슈 북부를 근거지로 한 일본인이 대부분이었고, 일부 고려인도 포함되어 주로 조선 연안에서 활동하였다. 중국 연안(등주, 교주 등 황해 연안)에도 출몰했으나, 조선의 쓰시마를 중심으로 한 통제 무역, 명일 화합 무역의 발전과 함께 소멸했다.[44] 이는 고려 왕조 멸망의 한 원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44]
후기 왜구는 명나라의 해금 정책에 따른 처벌을 피하기 위해 말라카, 샴, 파타니 등으로 이주한 중국인(절강성, 복건성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일부 일본인(쓰시마, 이키, 마쓰우라, 고토, 사쓰마 등 규슈 연안 출신)과 포르투갈인 등 여러 민족이 포함되었다는 추정도 있지만,[45] 여러 학설이 있다. 이들은 주로 동중국해, 남양을 무대로 활동했으나, 명나라 해방 강화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해적 금지령으로 사라졌다.[44]
3. 1. 일본의 상황
14세기 일본은 난보쿠초 시대(1336~1392)의 내란기로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99] 특히 규슈 북부 지역은 원과 고려 연합군의 정벌로 큰 피해를 보아 식량 부족이 심각했다.[99]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시기 상공업 발달로 상인들의 활동 범위가 넓어졌으나, 명나라 홍무제는 1371년 해금정책을 실시하여 제한된 조공 무역만 허용하였기 때문에 일본 상인들은 밀무역을 하며 해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101] 조공 무역은 특권 계급들의 수요만 충족시킬 수 있었을 뿐, 일본의 지방 호족들이나 상인들은 조공 무역의 혜택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101]쓰시마섬, 이키섬, 마쓰우라 등지는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주민들이 어업과 무역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고,[102] 흉년 등으로 기근이 발생하면 해적으로 돌변하여 약탈을 일삼았다.[97] 쓰시마섬의 경우, 섬 전체가 해발고도 400m 내외의 산지이고 농경지는 총면적의 4%에 불과하고 계단식 밭이 대부분이었다.[103]
3. 2. 중국과 고려의 상황
14세기는 원명 교체기로, 몽골족이 건국한 원이 쇠퇴하고 1367년에 한족 왕조인 명이 건국되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북원과의 패권 경쟁으로 왜구 문제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고려는 원 간섭기에 원의 간섭과 감시로 자체 군사력을 갖추기 어려워 국방이 약화되어 있었다. 1356년 고려 공민왕이 반원개혁을 단행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지만, 약화된 군사력을 단번에 회복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다시 고려에 압력을 가하려는 북원과 신흥국인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 긴장으로 왜구 침입에 군사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105]4. 활동 시기 및 영역
왜구는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한반도와 중국 대륙 연안에서 활동한 해적 집단을 말한다. 이들은 활동 시기와 구성원에 따라 전기 왜구와 후기 왜구로 구분된다.
전기 왜구(13세기~15세기)는 주로 쓰시마섬, 이키섬, 마쓰우라 등 규슈 지역 출신 일본인들이 대부분이었다.[95] 이들은 척박한 토지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흉년 등이 발생하면 해적으로 돌변하여 약탈을 일삼았다.[97]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시기에는 명나라의 해금정책으로 인해 밀무역을 하던 일본 상인들이 해적이 되기도 했다.[101] 몽골의 일본 원정으로 중국과 한국의 해안 방어 능력이 약화된 틈을 타 왜구는 약탈을 강화했다.[8][9] 정몽주가 일본에 파견되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10]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해적 20명을 중국으로 보내 처형하기도 했다.[12] 한국 기록에 따르면 왜구는 1350년경부터 전라도, 경상도 남부를 침략한 후 충청도, 경기도 지역으로 북상했다.[13] 고려사에는 1380년 진포에서 왜구를 물리친 해전 기록이 있다.[13] 1419년에는 조선군이 쓰시마섬을 공격하는 응영의 외구를 일으켰다.[14] 1443년 조선과 소 사다모리 사이에 계해약조가 체결되면서 왜구의 활동은 진정되었다.[1]
후기 왜구(16세기)는 명나라의 해금 정책으로 밀무역이 성행하면서 중국인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95] 이들은 약탈과 더불어 사무역과 밀무역에도 활발하게 참여했다.[106] 활동 영역은 동중국해, 남중국해, 동남아시아까지 확대되었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16세기 왜구의 30%는 일본인이었고 70%는 중국인이었다.[22] 명나라는 무역 금지령을 시행했지만, 이로 인해 중국 해군이 축소되면서 왜구가 남동부 해안을 장악하게 되었다.[25] 왜구와의 싸움에 참여한 유명한 중국 군인으로 치지광(戚繼光)과 위다유(俞大猷)가 있다.[27] 왜구는 17세기에 섬멸되기 전에 필리핀에도 진출하여 루손(Luzon) 북부의 아파리(Aparri)에 해적 도시 국가를 설립하기도 했다.[28][29][30][31]
후기 왜구는 명나라의 해금 정책에 따른 처벌을 피하기 위해 말라카, 샴, 파타니 등으로 이주한 중국인이 대부분이었고, 일부 일본인과 포르투갈인 등 여러 민족이 포함되어 있었다.[45] 이들은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활동 무대로 삼았으나, 명나라 해방 강화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해적 금지령으로 사라졌다.[44] 후기 왜구는 중국인이 중심이었으며,[80] 대규모 노예 무역을 행하여 중국 남동부 주민들을 납치해 규슈 지방에서 노예로 팔았다.[81] 전국 시대의 난방취와 임진왜란으로 노예 무역은 더욱 확대되었다. 왜구의 근거지는 일본의 대마도와 이키섬, 고토 열도, 세토내해을 비롯하여, 조선의 제주도, 중국의 연해 제도, 그리고 타이완과 하이난섬에도 존재했다.
4. 1. 전기 왜구 (13세기 ~ 15세기)
13세기에서 15세기에 활동하던 왜구(전기 왜구)는 주로 일본 출신이 대부분이었다.[95] 이들은 규슈(九州)의 쓰시마섬, 이키섬, 마쓰우라 출신으로, 토지가 척박하고 농업 생산량이 적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02][103] 이 때문에 주민들은 어업이나 무역에 종사했으며, 흉년 등으로 기근이 발생하면 해적으로 돌변하여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대상으로 약탈을 일삼았다.[97] 왜구는 흉년, 기근, 전쟁 등으로 생계가 끊긴 농민, 어민, 상인, 몰락한 사무라이들이었다.[104]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시기에는 상공업 발달로 상인들의 활동 범위가 중국까지 넓어졌다. 그러나 명나라 홍무제는 1371년 해금정책을 실시하여 제한된 조공무역만 허용했고, 일본 상인들은 밀무역을 하며 해적이 되기도 했다.[101]
14세기경 왜구의 본격적인 출현은 일본이 남북조 시대(1336~92) 내란기에 접어들면서 규슈(九州) 북부 지역이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기 때문이다.[99] 원과 고려 연합군의 일본 정벌 실패로 일본과의 외교가 단절된 상태에서, 원명교체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중국과 한반도의 군사력이 약화되고 해안 경비가 소홀해진 틈을 타 규슈 지방 세력들은 밀무역에 나섰고, 주민들은 생계 유지를 위해 해적질에 가담했다.[100]
몽골의 일본 원정으로 중국과 한국의 해안 방어 능력이 약화되었고, 쓰시마, 이키, 고토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극심한 빈곤을 겪었다. 왜구는 중국과 한국 해안에서 약탈을 점차 강화했다.[8][9] 정몽주가 일본에 파견되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규슈 총독 이마가와 사다요가 왜구를 진압하고 약탈한 재산과 사람들을 한국으로 돌려보냈다.[10][11] 1405년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사로잡은 해적 20명을 중국으로 보냈고, 그들은 닝보에서 처형되었다.[12]
한국 기록에 따르면, 왜구는 1350년경부터 특히 기승을 부렸다. 전라도와 경상도 남부 지방을 거의 매년 침략한 후,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으로 북상했다.[13] 『고려사』에는 1380년 일본 해적을 물리치기 위해 100척의 군선을 진포로 보내 334명의 포로를 석방한 해전 기록이 있다. 고려는 1377년 화약 무기청을 설립하여 왜구를 효과적으로 몰아냈다.[13]
1419년, 조선군은 쓰시마에 상륙하여 왜구에 대한 최대 규모의 작전인 응영의 외구를 시작했다. 이종무 장군이 이끄는 함대가 쓰시마를 향해 출발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군은 왜구 선박을 나포하고 가옥을 불태우고, 왜구에게 잡혀 있던 중국인을 구출했다.[14] 이후 조선군은 거제도로 철수[16]했고, 최종적으로 완전히 철수했다.[17]
1443년 조선과 소 사다모리 사이에 계해약조가 체결되고 쓰시마 소씨가 무역 특권을 부여받자, 한반도를 따라 왜구의 활동은 진정되었다.[1] 왜구 방어를 위해 건설된 해안 요새 중 일부는 절강성과 복건성에서 아직도 볼 수 있다.[21]
왜구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쟁이 있는데, 이 해적들의 민족 구성과 국적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이 존재한다. 도쿄대학교(University of Tokyo)의 다나카 다케오(Takeo Tanaka) 교수는 초기 왜구가 이 섬들에 살던 한국인이었다고 주장했다.[34] 그러나 이 주장은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왜구에 대한 자료로서 높이 평가받지 못한다.[36] 현재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론[38]은 무라이 쇼스케(Shōsuke Murai)의 이론으로, 그는 초기 왜구가 단일 국가가 아닌 여러 민족 집단 출신이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36] 초기 왜구 지도자 중 한 명인 아지발도(Ajibaldo)가 당시 자료에 따라 몽골인, 일본인, 한국인, 그리고 "섬사람"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39]
중국에서는 1368년에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고, 일본에 대해 왜구 토벌을 요청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다. 규슈에서는 남조의 고다이고 천황의 황자이자 정서장군궁 가네요시 친왕이 활동하고 있었고, 사신을 맞이한 회량은 규슈 제압을 위한 권위로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아 "일본 국왕"이라 칭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명나라와의 무역을 원하여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왜구를 진압했다. 왜구 진압으로 요시미쓰는 명나라로부터 새롭게 "일본 국왕"으로 책봉되었고, 1404년(응영 11년)부터 일명 무역이 시작되었다.
주원장은 복건성에 성을 축성하여 병사와 군선을 배치하고, 절강성에는 성을 축성하여 병사를 배치하고, 광동성에 군선을 배치하여 방비를 강화했다.[56]
초기 왜구는 조선반도와 산둥·요동반도에서 사람들을 잡아 노예로 삼거나, 이키, 쓰시마, 규슈 북부에서 노예로 팔았으며, 심지어는 류큐까지 되팔린 경우도 있었다.
4. 2. 후기 왜구 (16세기)
명나라의 해금 정책으로 밀무역이 성행하면서, 중국인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95] 이들은 약탈과 더불어 사무역과 밀무역에도 활발하게 참여했다.[106] 활동 영역은 동중국해, 남중국해, 동남아시아까지 확대되었다.『명사(明史)』에 따르면, 16세기 왜구의 30%는 일본인이었고 70%는 중국인이었다.[22] 1553년의 상소문에서 감찰관 두중루(杜仲魯)는 해적의 10%가 이민족이고, 20%가 류큐인(琉球人)이며, 나머지는 중국의 복건성(福建省)과 닝보(寧波) 지역 출신이라고 기록했다.[23]
미국계 중국인 역사가인 황런위(黃仁宇)에 따르면, 일본 해적들은 빈번하게 중국 집단과 협력했다. 중국 탐험가들이 원정을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주요 전투원은 일본 해적들이었다. 일본은 일본 해적들의 근거지 역할을 했고, 일본은 일본 해적들에게 모든 군사 전문 지식과 장비를 제공했다.[24]
명나라는 정치적 통제를 중앙집권화하려는 시도에서 무역 금지령을 시행했는데, "무제한적인 무역은 혼란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공감대가 있었다.[25] 해상 무역이 금지되면서 중국 해군은 축소되었고, 그 결과 증가하는 밀수를 단속할 수 없게 되어 왜구가 남동부 해안을 장악하게 되었다. 왜구(倭寇)는 "일본 해적"을 뜻하지만, 16세기 주요 왜구 집단은 명나라의 무역 금지령으로 생계가 끊긴 중국 상인들이 이끌었다.[25] 명나라 조정의 광범위한 부패로 인해 많은 중국 관리들이 해적들과 관계를 맺고 해적 행위로 이득을 보았기 때문에 중앙 정부가 통제하기 어려웠다.[26]
왜구와의 싸움에 참여한 두 명의 유명한 중국 군인으로 치지광(戚繼光)과 위다유(俞大猷)가 있다. 우대유는 명나라 장군으로 왜구로부터 해안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1553년, 치지광이라는 젊은이가 명나라의 부지방병마절도사(副地方兵馬節度使)가 되었다. 그는 "산적을 처벌하고 백성을 보호하라"는 임무를 받았는데, 이는 명나라 동부 해안을 공격하는 왜구를 상대하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이듬해 전에는 절강성(浙江省)에서 그의 성공으로 정식 절도사로 승진했다.[27]
왜구는 17세기에 섬멸되기 전에 필리핀에도 진출했다. 루손(Luzon) 북부의 아파리(Aparri)는 왜구의 후원 아래 해적 도시 국가로 설립되었다. 아파리 주변 지역은 왜구와 스페인 군인 간의 1582년 카가얀 전투(1582 Cagayan battles)가 벌어진 곳이었다.[28][29][30][31] 왜구는 아파리에 국한되지 않았다. 해적 지도자인 리마홍(Limahong)은 마닐라(Manila) 침공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나서 스페인이 그를 축출하기 전에 카볼로안(Caboloan) (팡가시난)에 임시 해적 국가를 세웠다.[32]
연호 | 지역 | 합계 | |||||
---|---|---|---|---|---|---|---|
요동(遼東) | 산동성(山東省) | 강남(江南) | 절강성(浙江省) | 복건성(福建省) | 광동성(廣東省) | ||
홍무제(洪武帝) (1358–1398) | 1 | 7 | 5 | 21 | 3 | 9 | 46 |
건문제(建文帝) (1399–1402) | 2 | 2 | |||||
영락제(永樂帝) (1403–1424) | 2 | 8 | 4 | 25 | 1 | 3 | 43 |
홍희제(洪熙帝) (1425) | 0 | ||||||
선덕제(宣德帝) (1426–1435) | 1 | 1 | 1 | 3 | |||
정통제(正統帝) (1436–1449) | 1 | 10 | 11 | ||||
경태제(景泰帝) (1450–1456) | 1 | 1 | |||||
영종(英宗)(명) (천순(天順) (1457–1464) | 0 | ||||||
성화제(成化帝) (1465–1487) | 1 | 1 | 2 | ||||
홍지제(弘治帝) (1488–1505) | 1 | 1 | |||||
정덕제(正德帝) (1506–1521) | 1 | 1 | 2 | ||||
가정제(嘉靖帝) (1522–1566) | 5 | 207 | 192 | 158 | 39 | 601 | |
융경제(隆慶帝) (1567–1572) | 19 | 19 | |||||
만력제(萬曆帝) (1573–1619) | 1 | 5 | 9 | 15 | |||
합계 | 746 |
후기 왜구는 명나라의 해금 정책에 따른 처벌을 피하기 위해 말라카, 샴, 파타니 등으로 이주한 중국인(절강성, 복건성 출신자)이 대부분이었고, 일부 일본인(쓰시마, 이키, 마쓰우라, 고토, 사쓰마 등 규슈 연안 출신자)을 비롯해 포르투갈인 등 여러 민족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45] 여러 학설이 있다. 주로 동중국해, 남양을 활동 무대로 삼았으나, 명나라 해방의 강화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해적 금지령으로 사라졌다.[44]
후기 왜구의 구성원 대부분은 밀무역을 행하는 중국인이었다고 여겨진다. 후기 왜구의 활동은 무역과 습격을 병행하는, 소위 무장 해상 상인이었다.[62] 주요 활동 지역은 중국 연안 전역이었으며, 당시 미개척지였던 타이완과 하이난섬 연안에도 진출하여 활동 거점으로 삼았다.[62] 또한 당시 류큐 왕국의 조공 무역선과 그 영토(아마미 군도, 센카쿠 제도 포함)도 습격하거나 거점화했지만, 류큐 왕정에 의해 여러 차례 격퇴되었다. 또한 당시 일본 이즈미 은산에서 생산된 고순도 은도 밀무역의 자금원이었다.[62]
『명사(明史)』 일본전에는 "(중국인) 도적 두목 모해봉(毛海峰)이 자진하여 항복을 청하였고, 주산(舟山)에서 왜구를 한 번 격파하고, 력표(瀝表)에서 다시 격파하였으며, 또한 그의 무리를 보내 각 섬을 회유하여, 서로 따르고 순종하여, 더 큰 상을 청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오다치(大太刀)를 휘두르는 왜구의 전투력은 높았고, 후에 치지광이 『영류목록』(影流目錄)과 일본도를 분석하여 대책을 세울 때까지 명군(明軍)은 계속 패주를 반복했다.
이 시기에도 명나라는 계속해서 해금 정책으로 밀무역을 제한했고, 이에 반대하는 중국(일설에는 조선도 포함)의 상인들은 일본인의 복장을 본떠 (위왜) 절강성의 수이와 복건성 남부의 월항(月港)을 거점으로 삼았다. 이들 후기 왜구는 연안부의 유력 향신과 결탁하고, 후기에는 대항해시대의 시작과 함께 아시아 지역에 진출한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등의 유럽인과 일본 하카타 상인과도 밀무역을 했다.
후기 왜구의 두목으로는 중국인 왕직(王直), 서해(徐海), 이광두(李光頭), 허동(許棟) 등이 있으며, 왕직은 일본 히라도, 고토 열도, 사쓰마의 보쓰 항, 야마카와 항 등을 거점으로 규슈(종자도)로의 철포 전래에도 관계되어 있다. 철포 전래 후 일본에서는 철포가 보급되었고, 무역 기록 연구에 따르면 당시 세계 최고의 총 보유량을 자랑했다고 추정된다.[63]
1547년에는 명나라 관료 주환(朱紈)이 절강 순무(浙江巡撫)로 파견되었지만 진압에 실패했고, 1553년부터 가정대왜구(嘉靖大倭寇)라고 불리는 왜구의 대규모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나라 내부 관료들 사이에서도 해금 완화를 통한 사태 해결을 주장하는 의견이 강해졌다. 그 중 한 사람인 호종헌(胡宗憲)이 왕직을 회유했지만, 중앙의 명령으로 처형했다. 지도자를 잃은 왜구의 세력은 약해졌고, 이어 치지광이 왜구 토벌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명나라는 이 해금을 완화하는 유화책으로 전환하여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포르투갈 등과의 무역을 허용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후기 왜구에게 거점을 제공한 것 등에 대한 불신감으로 무역을 허용하지 않는 태도를 계속했다. 왜구는 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구 단속령을 발령할 때까지 계속 기세를 올렸다.
1586년, 필리핀에서는 일본인 왜구가 단순한 약탈 이상의 야심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고 있으며, "그들은 거의 매년 산에서 내려와 루손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한다고 말해지고 있다"라고 일본인에 의한 필리핀 침략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64]
한편, 조선에서는 1587년에 조선 변방 백성이 왜구와 내통하여 전라도의 손죽도(損竹島)로 인도하여 습격하게 하고, 변장 이태원(李太源)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65] 1589년, 히데요시로부터 조선 통신사 파견 요청을 받고 조선을 방문한 무로마치 막부의 종의지는 조선 조정으로부터 조선인 왜구 인도 요구를 흔쾌히 승낙하고, 몇 달 안에 조선인 왜구를 붙잡아 조선에 인도했다.[66] 이 조선의 요구는 조선 통신사 파견 요청에 대한 시간 끌기 전략이었지만, 간단히 해결됨으로써 이듬해인 1590년,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金誠一)이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65]
후기 왜구는 중국인이 중심이었으며, 『명사』에는 일본인 왜구는 열 명 중 세 명이고 나머지 일곱 명은 이들에게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大抵真倭十之三、從倭者十之七。」).[80]
후기 왜구는 더욱 대규모의 노예 무역을 행하여 중국 남동부의 강남, 절강, 복건 등을 공격하여 주민들을 납치했고, 잡힌 사람들은 쓰시마, 마쓰우라, 하카타, 사쓰마, 오스미 등 규슈 지방에서 노예로 팔렸다.[81]
1571년 스페인 사람들의 조사 보고에 따르면, 일본인 해적과 밀무역상들이 지배하는 식민지는 마닐라, 카가얀 지방, 코르디예라, 링가옌, 바탄, 카탄두아네스에 있었다.[82] 마닐라 해전 (1574년), 카가얀 전투 (1582년)에서 영향력이 감소했지만, 왜구의 무역 네트워크는 필리핀 북부에까지 미치는 대규모의 것이었다.
전국 시대의 난방취와 임진왜란(조선 출병)으로 노예 무역은 더욱 확대되었고, 동남아시아에 거점을 확장하여 밀무역을 하는 후기 왜구에 의해 아시아 각지에서 팔린 노예 중 일부는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마카오 등에서 되팔렸고, 거기서 동남아시아·인도로 보내진 경우도 있었다. 1570년까지 사쓰마에 당도한 포르투갈 선박은 총 18척이며, 왜구의 정크선을 포함하면 그 이상이 된다.[83] 예수회는 왜구를 두려워했고, 1555년에 쓰인 편지에서 루이스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는 왜구 일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선교사들이 무기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84]
정순공(鄭舜功)이 편찬한 백과사전 『일본일감(日本一鑑)』은 남규슈의 고슈에서는 200~300명의 중국인 노예가 가축처럼 취급받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노예가 된 중국인들은 복주(福州), 흥화, 천주(泉州), 장주(漳州) 출신이었다고 한다.[85]
역사학자인 요네타니 히토시는 소바의 사례를 들고 있다. 소는 절강의 어부로 1580년에 왜구에게 잡혔다. 소는 사쓰마의 교박으로 끌려가 거기서 불교 승려에게 은 4냥에 사들여졌다. 2년 후 그는 쓰시마의 중국인 상인에게 팔렸다. 6년간 쓰시마에서 일하고 자유를 얻은 소는 히라도로 이주했다. 히라도에서는 생선과 옷감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1590년, 중국 배로 루손섬에 건너간 후 이듬해 중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86]
왜구의 근거지는 일본의 대마도와 이키섬, 고토 열도, 세토내해을 비롯하여, 조선의 제주도, 중국의 연해 제도, 그리고 타이완과 하이난섬에도 존재했다.
보르네오의 전설에 왜구로 생각되는 자들이 활약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87] 이 지역까지 광범위하게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5. 주요 활동 내용
왜구는 주로 식량을 노리고 약탈을 일삼았으며, 특히 지방에서 세금을 거두어 한성이나 개성으로 운반하는 세곡선의 피해가 컸다.[118] 이들은 100척에서 500척, 심지어 1천 명이 넘는 대규모 선단을 이루어 연안 마을을 습격하거나 내륙 깊숙이 침입하기도 했다.[97][93]
고려 말 41년간(1350년~1391년) 기록된 왜구 침입은 506회에 달하며,[108][109][119] 조선왕조실록에는 312건이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 시대(1368~1644년)에는 왜구로 인해 남방과 주변 지역 통제가 어려웠고, 이는 명나라 멸망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110] 중국 광동성에서는 왜구 세력 간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1533년에는 왜구 무리가 절강성, 항저우, 안후이성 등 강남 지방을 휩쓸며 4천여 명을 살해하는 일도 있었다.[101]
고려와 조선, 명나라는 왜구 토벌을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출몰 시기와 장소를 예측하기 어려워 진압에 어려움을 겪었다.
5. 1. 약탈 및 피해
왜구의 주요 약탈 대상은 식량이었으며, 지방에서 조세를 거두어 한성이나 개성으로 올라가는 세곡선 등 공선(公船)의 피해가 가장 컸다.[118] 왜구들은 100척에서 500척에, 1천 명이 넘는 거대한 집단도 있었는데,[97][93] 이들은 주로 대규모 선단을 이루어 연안 마을을 습격하는 형태였으나 때로는 내륙 깊숙이 들어오기도 하였다.고려 말 1350년부터 1391년까지 41년간 기록에 나타난 것만 506회 침입이 있었고,[108][109][119] 조선왕조실록에는 312건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중국 광동성에서는 왜구 세력들 간에 집단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1533년, 한 무리의 왜구들이 동남해안을 따라 절강성 · 항저우 · 안후이성 등 강남지방의 성들을 차례로 휩쓸면서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살인과 약탈을 서슴지 않았다. 왜구 무리들은 80여 일 동안 약 4,000여 명의 농민들을 살해하는 일도 있었다.[101]
명나라 시대(1368~1644년)에 남방과 주변 지역을 통제하지 못하여 왜구에 의하여 자주 점령되었다. 명나라가 멸망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왜구의 침략이며,[110] 이로 인해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화되고 국가 기반은 흔들렸다.


5. 2. 근절 노력과 토벌
고려와 조선, 명나라는 군대를 파견하여 왜구 토벌을 시도했으나, 출몰 시기와 장소를 예측하기 어려워 진압에 어려움을 겪었다. 조선은 대마도 정벌 등 강경책과 더불어 회유 정책도 실시했다.[97] 투항하는 왜구에게 의식주를 제공하고 관직을 하사했으며, 삼포를 개방하여 무역도 허용했다. 명나라는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 왜구 단속의 대가로 명과의 무역을 허가했다. 중일 무역은 조공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는 큰 이익이 발생했고, 요시미쓰는 왜구를 엄격히 단속하기도 했다.[97]해금정책으로 밀무역을 엄하게 처벌하던 명나라가 1567년에 법률을 완화하고,[113]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8년에 해적금지령을 내려 지방 영주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자 왜구가 거의 근절되었다.[106] 또한 이 시기에 왜구가 감소한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막부의 적극적인 왜구 근절 노력도 있었지만, 동남아시아를 통해 유입된 서양 세력과의 무역으로 규슈 영주와 막부가 더 많은 이익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6. 삼국시대의 왜구
신라 문무왕은 자신이 죽으면 화장하여 바다에 묻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용(龍)이 되어 왜적을 막겠다고 하였다. 그의 유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왜구의 한반도 침입은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있어 왔다.[114] 4세기 말에 백제, 가야와 연합한 왜(倭)가 신라를 공격하여 금성(경주)을 공격했다. 광개토태왕이 400년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고 신라에 쳐들어온 왜를 쫓아내 최종적으로는 왜구를 물리쳤다. 고구려는 낙동강 하류의 동쪽 지역인 종발성에 신라인을 관리자로 배치하고 성을 지키게 하여 제후국인 신라로 하여금 더는 왜(倭)가 발호하지 않게 조치하였다.
7. 고려시대의 왜구
1223년(고종 10년) 5월 김해 지방에 왜구가 처음 출몰하였다.[115] 이후 100여 년 동안 기록에 나타나는 왜구의 침입은 10여 차례에 불과했다. 그러다 충정왕 2년(1350년)부터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116][117]
처음에는 남해안에서 약탈을 일삼았지만, 점차 서해로 활동 반경을 넓혀 내륙까지 침략하여 양민 학살을 자행했다. 수도 개경 입구인 강화의 교동과 예성강 어구까지 출몰하여 개경의 치안이 위협받자, 고려 조정은 왜구 때문에 천도를 고려하기도 했다.[118][119]
공민왕 집권 내내 왜구의 잦은 출몰로 피해가 극심했으나, 집권 초기에는 반원정책으로 원과 갈등하며 북방 수비에 군사력을 집중하던 시기였기에 왜구의 약탈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120] 고려의 방어가 소홀해지자 왜구는 삼남지역을 누비며 약탈과 양민 학살을 자행하여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7. 1. 왜구 출몰과 반격
왜구는 1223년(고종 10년) 5월 김해 지방에 처음 출몰하였다.[115] 이후 100여 년 동안 기록에 나타나는 왜구의 침입은 10여 차례에 불과했다. 그러다 충정왕 2년(1350년)부터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116][117]처음에는 남해안에서 약탈을 일삼았지만, 점차 서해로 활동 반경을 넓혀 내륙까지 침략하여 양민 학살을 자행했다. 수도 개경 입구인 강화의 교동과 예성강 어구까지 출몰하여 개경의 치안이 위협받자, 고려 조정은 왜구 때문에 천도를 고려하기도 했다.[118][119]
공민왕 집권 내내 왜구의 잦은 출몰로 피해가 극심했으나, 집권 초기에는 반원정책으로 원과 갈등하며 북방 수비에 군사력을 집중하던 시기였기에 왜구의 약탈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120] 고려의 방어가 소홀해지자 왜구는 삼남지역을 누비며 약탈과 양민 학살을 자행하여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고려 조정이 왜구 침입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된 시기는 홍건적의 2차 침입을 물리친 후였다. 고려의 본격적인 반격의 전환점이 된 것은 홍산대첩(1376)의 승리였으며, 이후 진포해전(1380)에서 처음으로 화포를 전투에 이용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관음포 해전(1383)에서 승리하여 큰 자신감을 얻은 고려는 대마도 정벌(1389)을 감행하여 성공함으로써 왜구에 대해 공세적인 우위에 서게 되었다.
7. 2. 주요 전투
연도 | 사건 | 내용 |
---|---|---|
1376년 | 홍산대첩 |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이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123] 금강을 따라 내륙으로 진출하려는 왜구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124] |
1380년 | 진포 해전 |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를 이용하여 왜선 500척을 격파하였다.[129] |
1380년 | 황산대첩 | 이성계가 왜구를 격파하고 아지발도를 사살하였다.[129] 이 전투로 왜구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130] |
1383년 | 관음포대첩 | 정지가 이끄는 고려 수군이 화포 공격으로 왜구를 격퇴하였다.[108] |
1389년 | 대마도 정벌 | 박위가 이끄는 고려군이 대마도 정벌을 통해 왜구의 근거지를 공격하였다.[135] 정박해 있던 왜선 300여 척을 불태우고, 잡혀있던 고려인 100여 명을 구출해왔다.[135] |
8. 조선시대의 왜구
1393년(태조 2) 3월부터 5월까지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136] 같은 해 11월 도평의사사는 병선의 위력으로 왜적 피해가 줄었다고 언급했다.[137] 1394년(태조 3)에도 왜구의 침입이 있었으나, 조선 수군이 효과적으로 요격했다는 기록이 대부분이다.[138] 예를 들어, 음력 3월 17일 수군 첨절제사 김빈길 등이 왜적선 3척을 격퇴했고,[139] 음력 8월 15일에는 수군 만호 장용검이 충청도 안성에 침입한 왜구의 배 9척을 노획했다.[140]
1396년(태조 5) 음력 6월 18일 동래 만호 윤형과 석포 천호 이의경이 왜구의 배 1척을 잡아 군기와 갑옷을 바쳤다.[141] 음력 8월 9일에는 왜적선 120척이 경상도에 침입하여 병선 16척을 탈취하고 수군 만호 이춘수를 살해했으며, 동래, 기장, 동평성을 함락시켰다.[142] 음력 10월 27일 왜구가 동래성을 포위했다가 패퇴하며 병선 21척을 불태웠고, 수군 만호 윤형과 임식이 전사했다.[143] 1406년(태종 6년)에는 전라도, 1408년에는 충청도에 왜구가 침입하여 운수 물품을 약탈하고 병선을 불태우거나 만호를 살해하기도 했다.[144]
1419년(세종 1년), 조선은 대마도를 정벌하고 3포를 폐쇄하는 강경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부산포, 웅천, 염호 등 삼포를 개항하여 일본과의 정식 무역을 유도하는 유화책을 폈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삼포왜란(1510년), 사량진왜변(1544년), 을묘왜변(1555년), 정해왜변(1587년) 등 임진왜란 이전까지 크고 작은 왜변이 계속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구 출신들이 정규군으로 조선을 침략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시대는 고려 말에 비해 왜구의 침입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1419년 조선 태종은 왜구 토벌을 명목으로 이종무가 이끄는 227척, 1만 7,285명의 군사를 쓰시마에 침공시켰다. (응영의 외구).[57][58][59][60][61] 이 사건으로 쓰시마와 북큐슈 여러 다이묘들의 단속이 강화되었고, 왜구 귀화 등의 회유책으로 전기 왜구는 쇠퇴했다.
9. 중국과 아시아에서의 왜구
후기 왜구는 대부분 밀무역을 하는 중국인이었고, 무역과 습격을 병행하는 무장 해상 상인이었다.[62] 주요 활동 지역은 중국 연안 전역이었으며, 당시 미개척지였던 타이완(臺灣)과 하이난다오(海南島) 연안에도 진출하여 활동 거점으로 삼았다.[62] 류큐 왕국(琉球王国)의 조공 무역선과 그 영토(아마미군도(奄美群島), 센카쿠 열도(先島諸島) 포함)도 습격하거나 거점화했지만, 류큐 왕정에 의해 여러 차례 격퇴되었다. 당시 일본 이즈미 은산(石見銀山)에서 생산된 고순도 은도 밀무역 자금원이었다.[62]
『명사』 일본전에는 중국인 도적 두목 모해봉(毛海峰)이 항복을 청하고, 명나라 군대가 주산(舟山)과 력표(瀝表)에서 왜구를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다치(大太刀)를 휘두르는 왜구의 전투력은 높았고, 척계광(戚繼光)이 『영류목록』(影流目錄)과 일본도(倭刀)를 분석하여 대책을 세울 때까지 명군은 계속 패주를 반복했다.
당시 명나라는 해금정책(海禁政策)으로 밀무역을 제한했고, 이에 반대하는 중국 상인들(일설에는 조선도 포함)은 일본인 복장을 한 위왜(僞倭)가 되어 절강성 수이(雙嶼)와 복건성 남부 월항(月港)을 거점으로 삼았다. 이들은 연안부 유력 향신과 결탁하고, 대항해시대에 진출한 포르투갈(포르투갈), 스페인(스페인) 등 유럽인, 일본 하카타(博多) 상인과도 밀무역을 했다.
후기 왜구 두목으로는 중국인 왕직(王直), 서해(徐海), 이광두(李光頭), 허동(許棟) 등이 있다. 왕직은 일본 히라도섬(平戸島), 고토열도(五島列島), 사쓰마(薩摩)의 보쓰항(坊津港), 야마카와항(山川港) 등을 거점으로 규슈(種子島)로의 철포 전래(鉄砲伝来)에도 관계되어 있다. 철포 전래 후 일본에서는 철포가 보급되었고, 당시 세계 최고의 총 보유량을 자랑했다고 추정된다.[63]
1547년 명나라 관료 주환(朱紈)이 절강 순무로 파견되었지만 진압에 실패했고, 1553년부터 가정대왜구(嘉靖大倭寇)라 불리는 대규모 왜구 활동이 시작되었다. 명나라 관료들 사이에서 해금 완화를 통한 사태 해결 주장이 강해졌고, 호종헌(胡宗憲)이 왕직을 회유했지만 중앙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지도자를 잃은 왜구는 약해졌고, 척계광(戚繼光)이 왜구 토벌에 성공했다. 이후 명나라는 해금 완화로 동남아, 포르투갈 등과 무역을 허용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불신감으로 무역을 허용하지 않았다. 왜구는 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왜구 단속령을 발령할 때까지 계속 기세를 올렸다.
9. 1. 명나라
『명사(明史)』에 따르면, 16세기 왜구의 30%는 일본인이었고 70%는 중국인이었다.[22] 1553년 상소문에는 해적의 10%가 이민족, 20%가 류큐인(琉球人), 나머지는 중국의 복건(福建)과 닝보(寧波) 지역 출신이라는 기록도 있다.[23]
미국계 중국인 역사가 황적(黃仁宇)에 따르면, 일본 해적들은 중국 집단과 협력하는 경우가 많았고, 중국 탐험가들이 원정을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주요 전투원은 일본 해적들이었으며, 일본은 이들에게 군사 전문 지식과 장비를 제공하는 근거지 역할을 했다.[24]
명나라는 정치적 통제를 중앙집권화하려는 시도에서 무역 금지령을 시행했다. "무제한적인 무역은 혼란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25] 그러나 해상 무역 금지로 중국 해군이 축소되면서 밀수가 증가했고, 왜구가 남동부 해안을 장악하게 되었다. 16세기 주요 왜구 집단은 명나라의 무역 금지령으로 생계가 끊긴 중국 상인들이 이끌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25] 명나라 조정의 부패도 심각하여, 많은 중국 관리들이 해적들과 관계를 맺고 이득을 보았기 때문에 중앙 정부가 통제하기 어려웠다.[26]
왜구와의 싸움에 참여한 유명한 중국 군인으로는 기제광(戚繼光)과 유대유(俞大猷)가 있다. 우대유는 왜구로부터 해안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은 명나라 장군이었다. 1553년, 당시 26세였던 기제광은 명나라의 부지방병마절도사(副地方兵馬節度使)가 되어 "산적을 처벌하고 백성을 보호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이는 명나라 동부 해안을 공격하는 왜구를 상대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듬해에는 절강성(浙江省)에서의 성공으로 정식 절도사로 승진했다.[27]
왜구는 17세기에 섬멸되기 전 필리핀에도 진출했다. 루손(Luzon) 북부의 아파리(Aparri)는 왜구의 후원 아래 해적 도시 국가로 설립되기도 했다. 이 지역에서는 왜구와 스페인 군인 간의 1582년 카가얀 전투(1582 Cagayan battles)가 벌어지기도 했다.[28][29][30][31] 왜구는 아파리에 국한되지 않았다. 해적 지도자 리마홍(Limahong)은 마닐라(Manila) 침공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카볼로안(Caboloan) (팡가시난)에 임시 해적 국가를 세웠다가 스페인에 의해 축출되기도 했다.[32]
후기 왜구는 대부분 밀무역을 하는 중국인이었고, 무역과 습격을 병행하는 무장 해상 상인이었다.[62] 이들은 중국 연안 전역과 타이완(臺灣), 하이난다오(海南島) 연안을 거점으로 삼았다.[62] 류큐 왕국(琉球王国)의 조공 무역선과 영토(아마미군도(奄美群島), 센카쿠 열도(先島諸島) 포함)도 습격했지만, 류큐 왕정에 의해 여러 차례 격퇴되었다. 당시 일본 이즈미 은산(石見銀山)에서 생산된 고순도 은도 밀무역 자금원이었다.[62]
『명사』 일본전에는 중국인 도적 두목 모해봉(毛海峰)이 항복을 청하고, 명나라 군대가 주산(舟山)과 력표(瀝表)에서 왜구를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다치(大太刀)를 휘두르는 왜구의 전투력은 높았고, 척계광(戚繼光)이 『영류목록』(影流目錄)과 일본도(倭刀)를 분석하여 대책을 세울 때까지 명군은 계속 패주를 반복했다.
당시 명나라는 해금정책(海禁政策)으로 밀무역을 제한했고, 이에 반대하는 중국 상인들은 일본인의 복장을 한 위왜(僞倭)가 되어 절강성 수이(雙嶼)와 복건성 남부 월항(月港)을 거점으로 삼았다. 이들은 연안부 유력 향신과 결탁하고, 대항해시대에 진출한 포르투갈(포르투갈), 스페인(스페인) 등 유럽인, 일본 하카타(博多) 상인과도 밀무역을 했다.
후기 왜구 두목으로는 중국인 왕직(王直), 서해(徐海), 이광두(李光頭), 허동(許棟) 등이 있다. 왕직은 일본 히라도섬(平戸島), 고토열도(五島列島), 사쓰마(薩摩)의 보쓰항(坊津港), 야마카와항(山川港) 등을 거점으로 규슈(種子島)로의 철포 전래(鉄砲伝来)에도 관계되어 있다. 철포 전래 후 일본에서는 철포가 보급되었고, 당시 세계 최고의 총 보유량을 자랑했다고 추정된다.[63]
1547년 명나라 관료 주환(朱紈)이 절강 순무로 파견되었지만 진압에 실패했고, 1553년부터 가정대왜구(嘉靖大倭寇)라 불리는 대규모 왜구 활동이 시작되었다. 명나라 관료들 사이에서 해금 완화 주장이 강해졌고, 호종헌(胡宗憲)이 왕직을 회유했지만 중앙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지도자를 잃은 왜구는 약해졌고, 척계광(戚繼光)이 왜구 토벌에 성공했다. 이후 명나라는 해금 완화로 동남아, 포르투갈 등과 무역을 허용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불신감으로 무역을 허용하지 않았다. 왜구는 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왜구 단속령을 발령할 때까지 계속 기세를 올렸다.
1586년(1586年), 필리핀(フィリピン)에서는 일본인 왜구가 약탈(略奪) 이상의 야심을 가졌을지 모른다고 추측하며, 일본의 필리핀(フィリピン) 침략(侵略)에 대해 경종을 울렸다.[64]
9. 2. 필리핀
17세기에 왜구는 필리핀에도 진출했다.[28] 루손(Luzon) 북부의 아파리(Aparri)는 왜구의 후원 아래 해적 도시 국가로 설립되었다.[28] 아파리 주변 지역에서는 왜구와 스페인 군인 간의 1582년 카가얀 전투(1582 Cagayan battles)가 벌어졌다.[28][29][30][31]왜구는 아파리에 국한되지 않았다. 해적 지도자인 리마홍(Limahong)은 마닐라(Manila) 침공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이후 스페인이 그를 축출하기 전에 카볼로안(Caboloan)(팡가시난)에 임시 해적 국가를 세웠다.[32]
1571년 스페인 사람들의 조사 보고에 따르면, 일본인 해적과 밀무역상들이 지배하는 식민지는 마닐라, 카가얀 계곡 지방, 코르디예라, 린가엔, 바탄, 카탄두아네스에 있었다.[82] 마닐라 해전 (1574년), 카가얀 전투 (1582년)에서 영향력이 감소했지만, 왜구의 무역 네트워크는 필리핀 북부에까지 미치는 대규모였다.
1586년(1586年), 필리핀(フィリピン)에서는 일본인 왜구가 단순한 약탈(略奪) 이상의 야심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그들은 거의 매년 산에서 내려와 루손(ルソン)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한다"라고 말하며 일본인의 필리핀(フィリピン) 침략(侵略)에 대해 경고했다.[64]
10. 기타 논란
왜구와 관련해서는 위장 왜구, 토착 왜구와 같은 논란이 존재한다.
10. 1. 위장 왜구
일본 학자 다나카 다케오(田中健夫)는 '가왜(假倭)'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왜구가 일본인과 고려인의 연합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했다.[145][146] 그의 주장은 세종실록 세종 28년 10월 28일에 기록된 이순몽의 상소문을 근거로 한다. 상소문에는 고려 말 왜구에 의한 변고 때 실제 왜인은 20% 미만이었고, 고려인들이 왜인의 의복을 입고 변란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있다.[147] 다나카 다케오는 이를 근거로 전기 왜구도 어느 시기부터는 고려인 또는 조선인이 주체가 되었다고 주장한다.그는 또한 고려와 조선에서 왜구는 외환이자 내우이며, 이씨조선이 왜구가 외환임을 강조함으로써 내우의 성격을 은폐하고 국가 체제를 확립했다고 주장한다.[148] 당시에는 국가주권 개념이 없었고, 남북조 내란과 한반도 왕조 교체기의 혼란으로 인해 일본인과 고려, 조선인 천민들이 손잡고 해적집단을 형성하기 쉬운 상황이었다고 주장했다.[149] 역사학자 무라이 쇼스케(村井章介)도 비슷한 주장을 했으나,[150] 이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151]
10. 2. 토착 왜구
일제강점기 이태현이 쓴 정암사고라는 산문집에서 '토왜(土倭)’라는 표현이 등장한다.[152] 토왜(土倭)는 '자생적인 친일파'라는 뜻으로 진짜 왜구를 뜻하는 진왜(眞倭)와 구분짓기 위해 사용된 표현으로 보인다.[153][154] 사학자 전우용의 주장에 따르면 ‘토왜’를 현대식으로 풀어 쓰면 ‘토착왜구’”이며,[155] 이태현은 이 말의 창안자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서 많이 쓰다 보니 지식인들의 문집에도 등재되었다고 한다. 토왜라는 표현이 처음 언론에 등장한 것은 1908년으로 보이며,[156] 1910년 대한매일신보에는 ‘토왜천지(土倭天地)’라는 글이 실렸는데, 이 글에서는 토왜를 ‘얼굴은 한국인이나 창자는 왜놈인 도깨비 같은 자'라고 규정하였다. 또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인종’이며, 그 외에도 여러 분류기준이 있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157] 2019년에는 정치권에서 '토착왜구'라는 표현이 사용되면서 '친일 논란'이 발생한 적이 있다.[158][159][160][16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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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토착왜구’ 어원 찾기에 전우용 “을사늑약 이후 사용” - 고발뉴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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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토착왜구가 누군지 알려드립니다” 전우용 저격글
https://news.naver.c[...]
2019-05-07
[158]
웹인용
“나경원은 토착왜구”…반민특위 발언에 거센 후폭풍
http://www.hani.co.k[...]
2019-05-07
[159]
웹인용
정동영, 나경원 향해 "토착왜구가 21세기 대한민국 휘저어"
http://www.nocutnews[...]
2019-05-07
[160]
뉴스
정치권 때아닌 親日 공방… "한국당은 토착 왜구" "문재인·노무현, 친일파 유족 소송 맡아"
https://www.chosun.c[...]
조선일보
2019-03-16
[161]
웹인용
한국당, '토착왜구 나경원' 발언에 "모욕·명예훼손죄 등 법적 조치" - 머니투데이 뉴스
http://news.mt.co.kr[...]
2019-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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