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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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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을묘왜변은 1555년 왜구들이 전라남도 연안을 침략한 사건이다. 조선 정부의 왜구에 대한 강경책과 회유책 사이의 갈등 속에서, 왜구들은 조선의 통제에 불만을 품고 전라남도 해안을 습격하여 달량성, 어란포, 영암, 진도 등을 약탈하고 장흥, 강진까지 침입했다. 조선군은 초기에 패배하고, 절도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컸으나, 이준경을 도순찰사로 임명하고 중앙군을 파견하여 왜구를 격퇴했다. 이후 왜구는 제주도까지 공격했으나, 김수문 목사에게 격퇴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은 비변사를 상설 기구로 설치하고, 대마도주와 외교 관계를 개선했으며, 군사 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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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을묘왜변, 달량왜변
시기1555년 5월 30일(음력 5월 11일) ~ 7월 15일(음력 6월 27일)
장소전라도 영암·강진·진도·완도·나주
결과조선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조선
교전국 2왜구
지휘관 및 지도자
조선심연원
한온
이준경
이윤경
원적
김경석
남치훈
이광식
이덕견
이흠례
정승복
곽흘
변협
왜구확인 불명
병력 규모
조선확인 불명
왜구확인 불명
사상자 규모
조선전라도병영 전멸, 확인 불명
왜구확인 불명

2. 배경

16세기 초, 조선은 왜구의 잦은 침입과 노략질에 대응하기 위해 강경책과 회유책을 병행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삼포왜란(1510년) 이후 조선은 왜구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고, 이는 왜인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1555년 왜구는 배 70여 척으로 전라남도 해남군의 달량성(達梁城)·어란포(於蘭浦)를 기습 공격하고, 진도와 금갑도(金甲島)·남도(南桃) 등의 보루(堡壘)를 기습 공격, 병력을 학살하고 불태웠으며, 민가를 약탈하고 방화하여 해남, 영암, 진도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든 뒤 장흥·강진에도 침입하였다.

2. 1. 조선의 대왜 정책

조선 정부는 1510년 삼포왜란, 1544년 사량진왜변 등 왜구의 행패가 있을 때마다 조선 입국을 엄격히 제한하고 세견선(歲遣船)의 수를 줄여 허가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조선에 생선과 해산물을 팔고 물자를 보급받아야 했던 왜인들은 조선 정부에 여러 차례 규제 완화를 요청했으나, 조선 정부는 서신을 묵살하거나 응하지 않았다. 이러한 조선 정부의 통제에 불만을 품은 왜구는 1555년(명종 10) 5월 11일, 배 70여 척으로 전라남도 연안을 습격, 해남군의 달량성(達梁城)·어란포(於蘭浦)를 기습 공격하였다.

2. 2. 왜구의 불만 고조

1510년 삼포왜란, 1544년 사량진왜변 등 왜구의 행패가 있을 때마다 조선 정부는 조선 입국을 엄격히 제한하고 파견 가능한 세견선(歲遣船)의 수를 감축하여 허가했다. 조선에 생선과 해산물을 팔고 물자를 보급받아야 했던 왜인들은 조선 정부에 수차례 규제 완화를 요청했으나, 조선 정부는 서신을 묵살하거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러한 조선 정부의 통제에 불만을 품은 왜구는 1555년 5월 11일, 배 70여 척으로 전라남도 연안지방을 습격했다.

3. 경과

1544년 사량진에서 난동을 부리던 왜구들은 이후 조선에서 문호를 닫자, 대마도에서 무역을 할 수 있게 항포를 열어 달라고 요구하여 조선에서는 삼포(부산포, 제포, 염포)를 열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소란을 피우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뜨렸으며, 제주도와 다도해, 전라남도 해안가를 침략했다.

1555년 왜변으로 정부는 급히 이광식을 후임 병마절도사로 임명해 병력을 주어 내려보냈다. 이광식은 진도와 해남 등지의 해안가에서 왜구와 교전했다.

당시 나주를 거쳐서 북상하려는 왜구는 이흠례 등에 의해 격퇴되었다.

3. 1. 초기 전투와 조선의 패배

1555년(명종 10년) 5월 11일, 왜선 70여 척이 전라남도 연안의 달량포(達粱浦)에 쳐들어왔다.[2] 이 기습으로 근무 중이던 변장들이 살해되고, 순식간에 10개 진이 함락되었다.[3]

5월 13일, 왜구들은 영암, 달량을 점령하고 어란포(於蘭浦)[4], 장흥, 강진, 진도 등지를 짓밟으며 만행을 저질렀다. 이 과정에서 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 등이 전사하고, 영암 군수 이덕견은 포로로 잡혔다.[5]

가리포 수군첨사 이세린에게 보고를 받은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적은 장흥부사 한온, 영암군수 이덕견 등과 함께 출전했으나, 오히려 왜구에게 포위되었다. 원적과 한온은 항복했다가 살해되었고, 이덕견은 항복하는 척하다 탈출했다. 이로 인해 전라도 병마절도사 휘하의 정예군이 붕괴되면서, 침입한 왜구의 횡행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3. 2. 왜구의 확산과 만행

5월 13일 왜구들은 영암, 달량을 점령하고 어란포(於蘭浦)[4], 장흥, 강진, 진도 등지를 짓밟으며 만행을 저질렀다. 이 과정에서 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 등은 전사하고 영암 군수 이덕견은 사로잡혔다.[5] 전라도 병마절도사 휘하의 정예군이 붕괴되자 침입한 왜구의 횡행을 막을 수 없었다.

4. 진압

조선 조정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왜구 진압을 위해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로, 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을 방어사로 임명하여 전라도 지역에 급파했다.[1] 또한, 전주부윤 이윤경을 파견하여 영암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하도록 했다.[1]

4. 1. 중앙군 파견과 지휘 체계 강화

조정에서는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을 방어사로 임명하고 이윤경을 파견하여 영암에서 적을 크게 격파하여 그들을 몰아내었다.[1]

조정은 금군(禁軍) 등 한성의 정예군사를 동원하고, 산직(散職) 무신과 한량(閑良)·공사노(公私奴)·승도(僧徒) 등을 징집하여 병력을 보강했다.[1]

또한 호조판서 이준경을 전라도 도순찰사(都巡察使), 김경석·남치훈을 좌·우도 방어사(防禦使)로 임명하여 내려보내 이들을 토벌하도록 했다.[1] 이와 함께 부산포에 있는 일본인들을 전부 내보내 삼포 왜인의 준동을 방지하고 침입한 왜구의 진공을 막도록 경상도와 충청도에도 각각 장수를 추가 파견했다.[1]

4. 2. 지방군의 활약

나주를 거쳐 북상하려던 왜구는 이흠례(李欽禮) 등에 의해 격퇴되었다.[5] 전라병사와 장흥부사를 사살한 왜구는 5월 하순까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어란포, 완도, 장흥·강진, 진도 등을 약탈하고 주민을 살해하거나 민가에 방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이흠례군, 이광식군에 의해 밀리자 다시 영암으로 침입했고, 일부는 진도 일대를 약탈했다. 한편, 당시 조선군 일부 장수들은 변장들이 살해되고 지방관들이 포로로 끌려갔다가 살해된 것을 두려워하여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전세는 지지부진하였다.[5]

이에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을 방어사로 임명하고, 전주부윤 이윤경을 파견하여 영암에서 적을 크게 격파해 그들을 몰아내었다.[5]

4. 3. 제주도 전투

5월 25일 영암 해변에서 조선군에게 패배하여 퇴각하던 왜구는 녹도(鹿島)를 습격한 데 이어, 6월 27일 제주도를 습격했다.[1] 그러나 제주 목사 김수문(金秀文)이 군사를 이끌고 왜구를 토벌하였다.[1]

5. 결과

5월 25일 조선군이 영암 해변에서 왜구를 격파하고, 이후 녹도, 제주도에서도 왜구를 토벌하였다.[3] 그해 10월, 대마도주(쓰시마국주) 소 요시시게는 왜구의 목을 바치며 사죄하고 세견선 증가를 요청했다.[3] 조선 조정은 이를 수용하여 세견선 5척을 늘리고, 비변사를 상설 기구로 설치했다.[3]

5. 1. 인명 및 재산 피해

왜구의 침략으로 전라도 해안 지역은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입었다. 많은 주민들이 살해되거나 약탈당했으며, 가옥과 농경지가 파괴되었다.

5. 2. 군사 제도 개혁

을묘왜변으로 조선의 군사력 취약점이 드러나자, 조선 조정에서는 후원군을 파견하고 각지에서 왜구를 격퇴하였다. 전주부윤 이윤경은 군사를 이끌고 영암으로 가서 남치훈의 군사와 합세, 5월 25일 영암 해변에서 왜구를 격파했다.[3] 왜구는 퇴각하며 녹도를 습격하고 6월 27일에는 제주도를 공격했으나, 목사 김수문이 이끄는 군사에게 토벌당했다.[3]

그해 10월, 대마도주(쓰시마국주) 소 요시시게전라남도 해안을 습격한 왜구의 목을 베어 보내 사죄하고 세견선 증가를 요청했다.[3] 조선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세견선 5척을 늘리고, 비변사를 상설 기구로 만들었다.[3]

5. 3. 대왜 관계 변화

5월 25일 영암 해변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승리한 후, 그 해 10월 대마도주(쓰시마국주) 소 요시시게전라남도 해안가를 습격한 왜구의 목을 잘라 보내어 죄를 사과하고 세견선의 증가를 요청했다.[1]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승낙하여 세견선 5척을 증가시켰으며, 이를 계기로 비변사를 상설기관으로 하였다.[1]

참조

[1] 웹사이트 乙卯達梁倭変とは https://kotobank.jp/[...] 2022-10-25
[2] 문서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
[3] 웹인용 전라도 관찰사 김주가 달량포에 왜선 70여 척이 침략해왔다고 치계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1555-05-16
[4] 문서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5] 웹사이트 전라도 관찰사가 왜적이 달량을 포위하여 성을 함락시켰다고 치계하다 http://sillok.histor[...] 명종실록 155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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