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웰린 압 그리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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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허웰린 압 그리피드는 그루피드 압 르웰린 압 요르워스의 아들로, 1222년 또는 1223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1240년 할아버지 르웰린 대왕이 사망한 후, 숙부 다피드 압 르웰린과 잉글랜드 왕 헨리 3세 사이의 갈등에서 숙부를 지지하며 초기 활동을 시작했다. 1258년 "웨일스 공" 칭호를 사용하며 세력을 확장했으나, 잉글랜드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267년 몽고메리 조약을 통해 웨일스 공으로 인정받았지만, 영토 확장을 둘러싸고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와 대립했다. 1277년 아버콘위 조약으로 굴욕적인 강화를 겪었지만, 1282년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사망하면서 웨일스의 독립을 위한 저항은 종식되었다. 그의 죽음은 웨일스 민족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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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웰린 압 그리피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르웰린 아프 그리피드 |
다른 이름 | 르웰린 에인 르웰 오라프 (Llywelyn Ein Llyw Olaf, "마지막 지도자 르웰린") |
로마자 표기 | Llywelyn Ein Llyw Olaf |
라틴어 표기 | Princeps Walliae |
웨일스어 표기 | Tywysog Cymru |
출생 | 1223년경, 귀네드 |
사망 | 1282년 12월 11일, 킬메리 |
가문 | 아베르프라우 가문 |
종교 | 알 수 없음 |
직위 | |
귀네드의 군주 | 1246년 - 1282년 |
기타 직위 | 아베르프라우 공, 스노든의 영주 |
선임 | 다피드 아프 르웰린 |
후임 | 다피드 아프 그리피드 |
웨일스 공 | 1267년 - 1282년 |
선임 (웨일스 공) | (공석) |
후임 (웨일스 공) | 다피드 아프 그리피드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그리피드 아프 르웰린 아프 요르웨르스 |
어머니 | 세나나 페르흐 카라독 |
배우자 | 엘리너 드 몽포르 |
자녀 | 캐서린 (추정) 그웬리안 페르흐 르웰린 |
2. 가문과 초기 생애
르웰린 압 그리피드는 그루피드 압 르웰린 압 요르워스의 둘째 아들이었으며, 어머니는 앵글시 영주였던 카라독 압 토마스 압 로드리의 딸인 세나나 페르치 카라독이었다.[1] 일설에는 그의 어머니가 아일랜드 왕의 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1] 그는 1222년 또는 1223년경에 태어났다. 그의 형제로는 오와인 고흐 압 그루피드, 다피드 압 그루피드, 로드리 압 그루피드가 있었다.
1240년 그의 할아버지인 르웰린 대왕이 사망한 후, 르웰린의 삼촌인 다피드 압 르웰린이 귀네드의 통치자가 되었다.[2] 르웰린의 아버지 그루피드는 1244년 런던 탑에서 탈출하려다 추락사했다.[3][4]
르웰린은 1244년경 클위드 계곡에서 토지를 소유한 기록이 있다. 1240년 할아버지 르웰린 대왕이 사망한 후, 숙부인 다피드 압 르웰린이 귀네드의 통치자가 되었고,[2] 이 시기 르웰린은 잉글랜드의 헨리 3세의 형제인 콘월의 리처드와 함께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도 했다.[2]
아버지 그루피드와 형제 오와인은 다피드에게 억류되었다가 잉글랜드 헨리 3세에게 넘겨졌다. 그루피드는 1244년 런던 탑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추락사했다.[3] 헨리 국왕은 더 이상 그루피드를 이용할 수 없게 되자, 1245년 다피드 2세와 전쟁을 벌였다.[5] 르웰린은 이어진 전투에서 숙부를 지지했다. 한편 오와인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헨리 3세에 의해 석방되어 1247년 우드스톡 조약에서 스노도니아 일부를 받았다.[6]
2. 1. 가계와 출생
르웰린 압 그리피드는 그루피드 압 르웰린 압 요르워스의 둘째 아들이었으며, 어머니는 앵글시 영주였던 카라독 압 토마스 압 로드리의 딸인 세나나 페르치 카라독이었다.[1] 일설에는 그의 어머니가 아일랜드 왕의 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1] 그는 1222년 또는 1223년경에 태어났다. 그의 형제로는 오와인 고흐 압 그루피드, 다피드 압 그루피드, 로드리 압 그루피드가 있었다.1240년 그의 할아버지인 르웰린 아브 요르워스가 사망한 후, 르웰린의 삼촌인 다피드 압 르웰린이 그위네드의 통치자가 되었다.[2] 르웰린의 아버지 그루피드는 1244년 런던 탑에서 탈출하려다 추락사했다.[3][4]
다음은 르웰린 압 그리피드의 가계도이다.
르웰린 아브 요르워스 | |||||||||
그루피드 압 르웰린 압 요르워스 | 다피드 압 르웰린 | ||||||||
오와인 고흐 압 그루피드 | 르웰린 압 그리피드 | 다피드 압 그루피드 | 로드리 압 그루피드 | Gwenllian of Wales | Llywelyn ap Dafydd | Owain ap Dafydd | Tomas ap Rhodri |
2. 2. 초기 활동
르웰린은 그루피드 압 르웰린 압 요르워스의 네 아들 중 둘째였으며, 르웰린 압 요르워스의 장남과 세나나 페르치 카라독의 딸이었다.[1] 형제로는 오와인 고흐 압 그루피드와 다피드 압 그루피드, 로드리 압 그루피드가 있었다. 1222년 또는 1223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1244년경 클위드 계곡에서 토지를 소유한 기록이 있다.1240년 할아버지 르웰린 대왕이 사망한 후, 숙부인 다피드 압 르웰린이 귀네드의 통치자가 되었다.[2] 이 시기 르웰린은 잉글랜드의 헨리 3세의 형제인 콘월의 리처드와 함께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도 했다.[2]
아버지 그루피드와 형제 오와인은 다피드에게 억류되었다가 잉글랜드 헨리 3세에게 넘겨졌다. 그루피드는 1244년 런던 탑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추락사했다.[3] 헨리 국왕은 더 이상 그루피드를 이용할 수 없게 되자, 1245년 다피드 2세와 전쟁을 벌였다.[5] 르웰린은 이어진 전투에서 숙부를 지지했다. 한편 오와인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헨리 3세에 의해 석방되어 1247년 우드스톡 조약에서 스노도니아 일부를 받았다.[6]
3. 초기 통치
3. 1. 귀네드 분할과 갈등
1247년 리웰린과 오와인은 헨리 3세와 우드스톡 궁전에서 우드스톡 조약을 체결했다.[7] 그 결과, 그위네드 왕국은 스노도니아 주변의 콩위 서쪽 (그위네드 우치 콩위)과 앵글시로 제한되었고, 이 지역은 리웰린과 오와인이 나누어 통치했다. 페르페드윌라드로 알려진 콩위 동쪽의 그위네드 왕국의 다른 절반은 헨리 왕이 차지했다.
다피드 압 그리피드가 성인이 되자, 헨리 왕은 그에게도 그위네드의 일부를 주려 했고, 리웰린은 이에 반발했다. 오와인과 다피드는 리웰린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으나, 1255년 6월 브린 데르윈 전투에서 리웰린은 오와인과 다피드를 격파하고 사로잡아 그위네드 우치 콩위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8] 이후 리웰린은 그위네드 이스 콩위로 통제 구역을 확장하고자 하였다. "중간 땅"을 의미하는 "페르페드윌라드"라고도 알려진 이 지역은 헨리 왕이 그의 아들 에드워드에게 주었으나, 에드워드 1세는 1256년 여름 방문했을때 관리들의 통치에 대한 불만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이에 리웰린에게 호소가 이루어졌고, 리웰린은 1256년 11월 군대와 함께 콩위 강을 건넜다. 12월 초까지 리웰린은 디서스의 왕립 성을 제외한 모든 그위네드 이스 콩위를 통제했다.[8]
3. 2. 웨일스 내 세력 확장
1257년, 르웰린은 궨트헤르니온의 토지를 장악하고 그의 사촌인 앵글로-노르만족 로저 모티머를 몰아냈다. 이후 파위스로 진출하여 그웬위누인과 데헤우바르트에 영향을 미쳤고, 브리스톨 해협까지 노르만족의 지배에 맞서 자신의 친족을 도왔다.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서 웨일스의 데간위로 군대를 동원하여 보복했지만, 공식적으로 르웰린의 웨일스 영토였던 콘위로 진입하지는 않았다. 1258년에는 휴전이 이루어졌지만, 마르체르 영주들은 이를 완전히 준수하지 않았다.데헤우바르트의 지도자 리스 피찬은 르웰린을 주군으로 받아들였지만, 리스의 영지가 이미 마레두드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르웰린은 리스에게 영지를 돌려주었으나, 국왕의 사절은 마레두드에게 접근하여 그가 입장을 바꾼다면 리스의 영지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마레두드는 1257년 말에 헨리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1259년 르웰린은 마레두드를 크리키에스 성에 투옥했다가 아들을 인질로 넘겨준 후에야 풀어주었다.
1258년 초, 르웰린은 웨일스 공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르웰린과 그의 지지자들, 그리고 코민 가문과 관련된 스코틀랜드 귀족들 간의 합의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실은 이 칭호를 인정하지 않았고,[9] 1263년에는 르웰린의 형제 다피드가 공작에게 적대적이었고 헨리 왕에게 복종했다.[10]
1260년 1월, 르웰린은 부엘트의 로저 모티머를 몰아냈다. 잉글랜드는 슈루즈버리와 체스터에 군대를 집결시켰으나, 정부 내 합의에 이르지 못해 추가로 2년 동안 휴전이 발효되었다. 잉글랜드가 계속해서 성을 건설하자 웨일스인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르웰린은 마엘리니드에서 그들을 지원했다. 이후 르웰린은 브레콘 영주령까지 남웨일스로 확장을 계속했고, 그곳에서 웨일스인들로부터 충성을 받았다. 1263년 12월 12일, 이스터매너의 코뮤트에서 그리피드 압 그웬위누인은 르웰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봉신 영주가 되었다.[11]
4. 웨일스 공 지위 확립
[[File:https://cdn.onul.works/wiki/source/19501449255_aaae5f30.svg|thumb|upright=1.1|1267년 몽고메리 조약 이후의 웨일스
]]
허웰린 압 그리피드(류엘린 압 그리피드)는 그위네드 공작에서 시작하여 웨일스 전역으로 패권을 확장한 사웨린 압 요르베르스(Llywelyn the Great)의 손자였다.[14] 그는 숙부와 형제들과의 항쟁 속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1258년 "웨일스 대공"(웨일스 공) 칭호를 사용했다.[14]
잉글랜드 왕실은 르웰린의 '웨일스 공' 칭호를 인정하지 않아 갈등이 심화되었다.[14] 1264년 잉글랜드에서 영 시몽 드 몽포르가 르위스 전투(제2차 남작 전쟁)에서 국왕 지지자들을 격파하고 국왕과 에드워드 경을 포로로 잡자, 류엘린은 드 몽포르와 협상을 시작했다. 1265년 피프턴 조약을 통해 류엘린과 드 몽포르는 동맹을 맺었지만, 교황 클레멘스 4세는 류엘린에게 파문된 몽포르와 동맹을 맺지 말라고 경고했다. 류엘린은 잉글랜드 내 분쟁을 틈타 웨일스 변경 제후령에 침공하여 영토를 확대하고, 1265년 시몽 드 몽포르가 정권을 잡자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했다.[14]
제2차 바론 전쟁(1264년 - 1267년)에서 1265년 8월 4일 이브샴 전투에서 시몽 드 몽포르가 전사한 후에도 잉글랜드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1265년 북웨일스에서 하모 르 스트레인지와 모리스 피츠제럴드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몽고메리로 이동하여 로저 모티머의 군대를 격파하는등 군사적 승리를 통해 협상의 우위를 확보했다. 오토부오노 교황 사절의 지원을 받아, 류엘린은 1267년 몽고메리 조약을 통해 헨리 3세로부터 잉글랜드의 종주권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웨일스 대공으로 인정받았다. 이 조약으로 류엘린은 잉글랜드 왕에게 공납금을 지불하고, 마레두드 압 리스 그리그를 제외한 모든 웨일스 공들은 류엘린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하지만, 류엘린은 웨일스 전체를 통일하려는 야망을 품고 영토 확장을 꾀했기 때문에 남부 제후들의 반발을 샀다.[14] 잉글랜드가 안정되자 헨리 3세와 에드워드 1세 및 변경 제후들도 이전의 상실한 영토 회복을 시도하면서 대립 관계가 이어졌다.[14] 길버트 드 클레어와의 글래모건 토지 소유권 분쟁으로 케어필리 성 건설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고,[12] 헨리 국왕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길버트가 성을 되찾으면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12]
1272년 헨리 국왕이 사망하고 에드워드 1세가 즉위한 후에도 갈등은 계속되었다. 허프리 드 보훈이 브리체이니오그를 되찾으려 하자, 류엘린의 변경에서 라이벌 중 한 명인 로저 모티머가 드 보훈을 지지했고, 류엘린은 조약에 따른 연간 금액 지불을 중단했다.
1274년, 류엘린의 형제 다피드와 포위스 웬윈윈의 그리피드 압 그웬윈윈과 그의 아들 오와인이 류엘린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했다.[10] 다피드와 그리피드는 잉글랜드로 도망쳐 국왕의 지원을 받으며 류엘린의 영토를 습격했다.[10] 에드워드가 1275년 류엘린을 체스터로 소환하여 경의를 표하라고 요구했으나, 류엘린은 이를 거부했다.[10]
류엘린은 시몽 드 몽포르의 딸인 엘레노어 드 몽포르와 1275년에 대리 결혼을 했지만,[13][14] 에드워드 국왕은 엘레노어가 그의 사촌이라는 이유로 결혼에 반대했다.[13][14] 엘레노어가 류엘린을 만나기 위해 프랑스에서 항해했을 때, 에드워드는 그녀의 배를 압수하고 류엘린이 특정 양보를 할 때까지 윈저 성에 감금했다.[13][14]
4. 1. 웨일스 공 칭호 사용
1258년, 르웰린은 웨일스 제후의 으뜸을 의미하는 "웨일스 대공" 칭호를 사용했다. 이는 스코틀랜드 귀족들과의 합의에 따른 것이었다. 르웰린은 그위네스의 공작부터 웨일스 전역으로 패권을 확장한 대 사웨린(Llywelyn the Great, Llywelyn ap Iorwerth영어)의 손자이자, 그리피즈 압 사웨린 압 요르베르스의 차남이었다. 런던 탑에 유폐되었던 아버지 그리피즈가 탈출을 시도하다 추락사한 후,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숙부 및 형제들과의 항쟁에서 승리하며 세력을 확장했다.4. 2. 잉글랜드와의 갈등과 협상
[[File:https://cdn.onul.works/wiki/source/19501449255_aaae5f30.svg|thumb|upright=1.1|1267년 몽고메리 조약 이후의 웨일스]]
허웰린 압 그리피드(류엘린 압 그리피드)는 그위네스 공작에서 시작하여 웨일스 전역으로 패권을 확장한 사웨린 압 요르베르스(Llywelyn the Great)의 손자였다.[14] 그는 숙부와 형제들과의 항쟁 속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1258년 "웨일스 대공"(웨일스 공) 칭호를 사용했다.[14]
잉글랜드 왕실은 르웰린의 '웨일스 공' 칭호를 인정하지 않아 갈등이 심화되었다.[14] 1264년 잉글랜드에서 영 시몽 드 몽포르가 르위스 전투(제2차 남작 전쟁)에서 국왕 지지자들을 격파하고 국왕과 에드워드 경을 포로로 잡자, 류엘린은 드 몽포르와 협상을 시작했다. 1265년 피프턴 조약을 통해 류엘린과 드 몽포르는 동맹을 맺었지만, 교황 클레멘스 4세는 류엘린에게 파문된 몽포르와 동맹을 맺지 말라고 경고했다. 류엘린은 잉글랜드 내 분쟁을 틈타 웨일스 변경 제후령에 침공하여 영토를 확대하고, 1265년 시몽 드 몽포르가 정권을 잡자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했다.[14]
제2차 바론 전쟁(1264년 - 1267년)에서 1265년 8월 4일 이브샴 전투에서 시몽 드 몽포르가 전사한 후에도 잉글랜드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1265년 북웨일스에서 하모 르 스트레인지와 모리스 피츠제럴드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몽고메리로 이동하여 로저 모티머의 군대를 격파하는등 군사적 승리를 통해 협상의 우위를 확보했다. 오토부오노 교황 사절의 지원을 받아, 류엘린은 1267년 몽고메리 조약을 통해 헨리 3세로부터 잉글랜드의 종주권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웨일스 대공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류엘린은 웨일스 전체를 통일하려는 야망을 품고 영토 확장을 꾀했기 때문에 남부 제후들의 반발을 샀다.[14] 잉글랜드가 안정되자 헨리 3세와 에드워드 1세 및 변경 제후들도 이전의 상실한 영토 회복을 시도하면서 대립 관계가 이어졌다.[14] 길버트 드 클레어와의 글래모건 토지 소유권 분쟁으로 케어필리 성 건설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고,[12] 헨리 국왕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길버트가 성을 되찾으면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12]
1272년 헨리 국왕이 사망하고 에드워드 1세가 즉위한 후에도 갈등은 계속되었다. 허프리 드 보훈이 브리체이니오그를 되찾으려 하자, 류엘린의 변경에서 라이벌 중 한 명인 로저 모티머가 드 보훈을 지지했고, 류엘린은 조약에 따른 연간 금액 지불을 중단했다.
1274년, 류엘린의 형제 다피드와 포위스 웬윈윈의 그리피드 압 그웬윈윈과 그의 아들 오와인이 류엘린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했다.[10] 다피드와 그리피드는 잉글랜드로 도망쳐 국왕의 지원을 받으며 류엘린의 영토를 습격했다.[10] 에드워드가 1275년 류엘린을 체스터로 소환하여 경의를 표하라고 요구했으나, 류엘린은 이를 거부했다.[10]
류엘린은 시몽 드 몽포르의 딸인 엘레노어 드 몽포르와 1275년에 대리 결혼을 했지만,[13][14] 에드워드 국왕은 엘레노어가 그의 사촌이라는 이유로 결혼에 반대했다.[13][14] 엘레노어가 류엘린을 만나기 위해 프랑스에서 항해했을 때, 에드워드는 그녀의 배를 압수하고 류엘린이 특정 양보를 할 때까지 윈저 성에 감금했다.[13][14]
5. 웨일스 내 패권
1267년 몽고메리 조약은 류엘린의 권력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류엘린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에 의해 웨일스 공으로 인정받았으며, 마레두드 압 리스 그리그를 제외한 모든 웨일스 공들이 류엘린 2세에게 복종했다. 이러한 인정을 위해 류엘린은 잉글랜드 왕실에 24,000 마르크를 할부로 지불해야 했고, 이 합의는 로마 교황청에 의해 확인되었다. 류엘린은 원하는 경우 데헤우바르스의 유력한 토착 공인 마레두드 압 리스를 5,000 마르크에 매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류엘린의 영토 확장에 대한 야망은 점차 일부 소규모 웨일스 지도자들, 특히 남웨일스의 공들에게 인기를 잃게 했다.
[[File:Wales_after_the_Treaty_of_Montgomery_1267_Colorblind.svg|thumb|upright=1.1|alt=1267년 몽고메리 조약 이후의 웨일스를 묘사한 지도. 류엘린 압 그리피드의 공국 그위네드는 녹색, 류엘린에게 정복된 영토는 자주색, 류엘린의 봉신 영토는 파란색, 마르체르 남작의 영주는 밝은 주황색, 잉글랜드 국왕의 영주는 노란색으로 표시됨.|1267년 몽고메리 조약 이후의 웨일스:
]]
5. 1. 몽고메리 조약 이후의 갈등
1267년 몽고메리 조약으로 웨일스 공으로 인정받은 류엘린 압 그리피드는 웨일스 내 다른 지도자들과 갈등을 빚었다. 특히 글래모건 지역의 분쟁은 잉글랜드와의 관계 악화로 이어졌다. 길버트 드 클레어가 케어필리 성을 건설하며 분쟁이 발생했고, 헨리 국왕이 중재에 나섰지만 실패했다.[12]1272년 헨리 국왕이 사망하고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즉위한 후, 류엘린은 브리체이니오그를 둘러싼 허프리 드 보훈과의 분쟁에서, 에드워드 1세의 측근인 로저 모티머의 지원을 받았다. 류엘린은 몽고메리 조약에 따른 공납금 지불을 중단했다.
1274년 초, 류엘린의 형제 다피드와 포위스 웬윈윈의 그리피드 압 그웬윈윈, 그의 아들 오와인이 류엘린 암살을 모의했으나 실패했다.[10] 다피드와 그리피드는 잉글랜드로 도망쳐 에드워드 1세의 지원을 받으며 류엘린의 영토를 습격했다. 1275년 에드워드 1세가 류엘린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요구했으나, 류엘린은 이를 거부했다.
류엘린은 시몽 드 몽포르의 딸 엘레노어 드 몽포르와 1275년 대리 결혼을 했지만, 에드워드 1세는 엘레노어가 왕족이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엘레노어가 류엘린을 만나러 가던 중 에드워드 1세에게 납치되어 윈저 성에 감금되었다.[13][14]
6. 몰락과 죽음
1282년 초, 1277년 르웰린에 맞서 에드워드 1세를 지지했던 많은 하급 군주들이 왕실 관리들의 과세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해 종려 주일에 다피드 압 그리피드는 하워든 성에서 잉글랜드군을 공격한 후 루들란을 포위했다. 한편, 반란은 웨일스의 다른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마레두드 압 리스 그리그 (남웨일스/데헤이버스의 왕자 상속자)에 의해 아베리스트위스 성이 점령 및 소각되었고, 연대기에 따르면 다피드의 영감으로 카레그 케넨 성이 점령되면서 남웨일스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캔터베리 대주교 존 펙함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르웰린은 반란 계획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형을 지원해야 할 의무를 느꼈고, 웨일스인들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전쟁이 시작되었다.
사건은 1277년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에드워드의 군대가 기니드 이스 콩위, 앵글시를 점령하고 수확물을 획득했다. 앵글시를 점령한 잉글랜드군은 배 다리를 통해 본토로 건너가려 했지만 실패하고 모엘-이-돈 전투에서 패배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르웰린과 에드워드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했고, 르웰린에게는 웨일스를 에드워드에게 넘기면 잉글랜드에 대저택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고, 다피드는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여 왕의 허가 없이는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2] 애브로스 선언과 비교되는 감정적인 답변에서 르웰린은 "브루투스의 아들 캄베르 시대"부터 그의 조상들이 보호해 온 사람들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며 제안을 거절했다.
르웰린은 이제 다피드에게 기니드의 방어를 맡기고 남쪽으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중부 및 남부 웨일스에서 지지를 모으고 중요한 두 번째 전선을 열려고 했다. 1282년 12월 11일 부일스 웰스에서 벌어진 오레윈 다리 전투(실메리 전투)에서 그는 군대와 떨어져 사망했다. 정확한 상황은 불분명하며 그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설명이 있다. 두 설명 모두 르웰린이 자신의 군대 대부분을 떠나도록 속았고 이후 공격을 받아 죽었다는 데 동의한다. 첫 번째 설명은 르웰린과 그의 수석 장관이 다리를 건넌 후 에드먼드 모티머와 휴 르 스트레인지의 군대에 접근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본대가 로저 데스펜서와 그루피드 압 그웬윈윈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는 소리를 들었다. 르웰린은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돌아서서 돌아갔지만, 고독한 창기병이 그를 따라가 쓰러뜨렸다. 잉글랜드 기사가 시신을 국왕으로 인정한 것은 한참 뒤였다. 이 사건의 버전은 약 50년 후 잉글랜드 북부에서 기록되었으며 스털링 브리지 전투에 대한 세부 사항과 의심스러운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르웰린의 망명한 딸 그웬리안 페르흐 르웰린과 조카 글라디스 페르흐 다피드와 접촉한 수도사들이 잉글랜드 동부에서 기록한 사건의 대안적인 버전은 르웰린이 군대의 선두에서 에드먼드와 로저 모티머, 휴고 르 스트레인지, 그루피드 압 그웬윈윈의 연합군에게 그들의 경의를 받겠다는 약속을 받고 접근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속임수였다. 그의 군대는 즉시 치열한 전투에 휘말렸고, 그 과정에서 상당 부분이 궤멸되어 르웰린과 그의 18명의 측근이 고립되었다. 황혼 무렵, 르웰린과 소규모 측근(성직자 포함)은 아베레드우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쫓겨 숲으로 들어갔다. 르웰린은 포위되어 쓰러졌다. 그는 죽어가면서 사제를 요청했고 자신의 신원을 밝혔다. 그는 이후 살해되었고 머리는 시신에서 잘려나갔다. 그의 소지품을 수색한 결과 가짜일 가능성이 높은 "공모자" 목록과 그의 비밀 인장을 포함한 다양한 품목이 회수되었다.
마지막 르웰린의 비밀 인장, 그의 아내 엘레노어, 그의 형제 다피드 압 그리피드는 1284년 잉글랜드인들이 시신에서 발견한 후 성배를 만들기 위해 녹여버린 것으로 여겨진다.[22]
르웰린의 잘린 머리의 운명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그것이 루들란의 에드워드에게 보내졌고, 앵글시에 주둔한 잉글랜드 군대에게 보여진 후, 에드워드는 머리를 런던으로 보냈다. 런던에서 그것은 도시 사형 기둥에 하루 동안 세워졌고 아이비로 왕관을 씌웠다(즉, 그가 아웃로의 "왕"이었음을 보여주고, 웨일스인이 런던에서 브리튼 전체의 왕으로 즉위할 것이라고 말한 고대 웨일스 예언을 조롱하기 위해). 그 후 그것은 창 끝에 꽂혀 기마병에 의해 런던 탑으로 옮겨져 문 위에 세워졌다. 15년 후에도 런던 탑에 있었다.[21]
르웰린의 시신이 마지막으로 안치된 곳은 확실하지 않지만, 항상 시토회 수도원인 애비쿰히르에 매장되었다는 전통이 있었다. 1282년 12월 28일, 펙함 대주교는 브레콘 사원의 브레콘 부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 르웰린의 시신이 쿰히르 교회에 묻혔는지 조사하고 명확히 하십시오. 그는 주현절 전에 후자를 명확히 해야 하며, 이 문제에 대한 다른 위임을 받았고, 크리스마스 전에 주 대주교에게 증명했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21]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추가 증거는 플로렌스 오브 워체스터 연대기에서 찾을 수 있다.
왕자의 시신, 그의 훼손된 시신은 시토회 수도원에 속한 쿰 히르 수도원에 매장되었다.[21]
또 다른 이론은 그의 시신이 카디프의 란럼니 홀로 옮겨졌다는 것이다.[23]
시인 그루피드 압 이르 이나드 코흐는 르웰린에 대한 비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요동치는 떡갈나무를 보지 못하는가?
무서운 가슴속에 차가운 내 마음
아베르프라우의 떡갈나무 문인 왕을 위해
웨일스 연대기 브루트 이 티위소기온에는 수수께끼 같은 언급이 있다. "... 그리고 나서 르웰린은 뱅거의 종탑에서 자신의 사람들에게 배신당했다." 더 이상의 설명은 없다.
6. 1. 잉글랜드와의 전쟁
1275년, 허웰린은 프랑스로 도피해 있던 시몽 드 몽포르의 딸 엘리나와의 결혼을 결정하고, 엘리나 등 몽포르의 유족들을 웨일스로 맞이하려 했다.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 왕의 허가 없이 이루어진 이 약혼에 불만을 품고, 프랑스에서 웨일스로 향하던 엘리나 일행의 배를 잉글랜드 해역에서 나포, 석방의 대가로 허웰린에게 신종을 강요했다.허웰린이 협상을 지연시키자, 에드워드 1세는 이를 이유로 웨일스를 침공했다. 허웰린에게 반발하던 남웨일스의 제후들과 동생 다비드 압 그리피드 등도 참가했기 때문에, 싸움은 일방적인 것이 되었고, 협상 끝에 허웰린은 굴복하여 본령인 그위네스의 일부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포기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했다. 그러나, 완전히 신종함으로써 웨일스 대공을 계속 칭하는 것을 인정받아, 1278년이 되어서 에드워드의 후견 하에, 잉글랜드 영내 우스터에서 허웰린은 엘리나와 결혼할 수 있었다. 엘리나 공비는 상속인이 될 아이를 갖지 못했던 허웰린을 위해 1282년에 딸을 낳았지만, 그 직후 병사했다.
6. 2. 아베르콘위 조약
1276년, 에드워드 1세는 르웰린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1277년에 그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다. 에드워드 1세는 르웰린을 완전히 몰아내고 그위네드 이스 콘위를 직접 장악하려 했다. 그는 르웰린의 형제인 다비드와 오와인에게 그위네드 우치 콘위를 나누어 주거나, 앵글시 섬을 합병하고 본토만 두 형제에게 나누어 주는 방안을 고려했다. 에드워드 1세는 다비드 압 그리피드와 그리피드 압 거윈윈의 지원을 받았다. 르웰린을 지지했던 많은 작은 웨일스 군주들은 에드워드 1세와 서둘러 화해했다. 1277년 여름, 에드워드 1세의 군대는 체스터를 출발하여 콘위강에 도착했고, 데건위에 주둔했으며, 다른 부대는 앵글시 섬을 점령하고 그곳의 수확물을 차지했다. 이로 인해 르웰린과 그의 부하들은 식량을 빼앗겨 협상을 모색하게 되었다. 공격은 국경 동쪽의 모든 방향에서 시작되었고, 헨리 드 레이시는 슈루즈버리와 몽고메리셔에서, 로저 모티머는 부일스에서, 거윈윈은 키페일리오그와 포위스의 다른 지역을 되찾기 위해 돌아왔다. 식량 부족으로 르웰린은 숨어 다닐 수밖에 없었지만, 웨일스인들은 잉글랜드에 맞서 소규모 성공을 거두었다.
전투의 결과는 1277년 11월 9일 르웰린이 서명한 아버콘위 조약이었다. 르웰린은 잉글랜드에 굴복하여 본령인 그위네스의 일부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포기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했다. 조약의 결과와 평화 협정은 르웰린에게 영토의 반환을 보장했지만, 그 대가가 따랐다. 그는 앵글시 섬과 스노도니아의 일부를 웨일스 공으로 통치하는 자신의 그위네드 왕국으로 되찾았고, 다섯 명의 영주가 충성을 바쳤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5만 마르크의 벌금을 내야 했고, 앵글시 섬 임대료의 몫을 왕실에 포기해야 했다. 한편, 린 반도는 1254년에 감옥에서 풀려난 그의 형제 오와인에게 주어졌다. 그 후 그위네드의 페르페드와드는 다비드 압 그리피드에게 주어졌으며, 르웰린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 그위네드 우치 콘위의 몫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있었다.

평화 협정이 체결되자, 르웰린은 1277년 크리스마스를 위해 런던과 의회로 가서 잉글랜드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완전히 신종함으로써 웨일스 대공을 계속 칭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르웰린은 에드워드 1세와 그의 파트너 엘레노어와 우스터에서 왕족을 만났고, 그들은 이듬해 결혼할 예정이었다.
6. 3. 결혼과 가족
1275년 르웰린은 프랑스로 도피해 있던 시몽 드 몽포르의 딸 엘레노어(엘리나)와의 결혼을 결정했다.[13]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 왕의 허가 없이 이루어진 이 약혼에 불만을 품고 엘레노어 일행의 배를 나포, 석방의 대가로 르웰린에게 신종을 강요했다.[13] 르웰린이 협상을 지연시키자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를 침공했고, 르웰린은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했다.[13] 그러나 완전히 신종함으로써 웨일스 대공을 계속 칭하는 것을 인정받아, 1278년 우스터에서 엘레노어와 결혼할 수 있었다.[13]르웰린과 엘레노어의 결혼은 우스터 대성당 앞에서 이루어졌으며,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 랭커스터 백작이 참석했다.[13] 엘레노어는 1282년 딸 그웬릴리안을 낳은 직후 사망했다.[13] 르웰린은 사생아를 둔 것으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는 웨일스 왕족에게 매우 드문 일이었다.[13]
6. 4. 최후의 저항과 죽음
1282년 초, 1277년 르웰린에 맞서 에드워드 1세를 지지했던 많은 하급 군주들이 왕실 관리들의 과세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해 종려 주일에 다피드 압 그리피드는 하워든 성에서 잉글랜드군을 공격한 후 루들란을 포위했다. 한편, 반란은 웨일스의 다른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마레두드 압 리스 그리그 (남웨일스/데헤이버스의 왕자 상속자)에 의해 아베리스트위스 성이 점령 및 소각되었고, 연대기에 따르면 다피드의 영감으로 카레그 케넨 성이 점령되면서 남웨일스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캔터베리 대주교 존 펙함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르웰린은 반란 계획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형을 지원해야 할 의무를 느꼈고, 웨일스인들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전쟁이 시작되었다.사건은 1277년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에드워드의 군대가 기니드 이스 콩위, 앵글시를 점령하고 수확물을 획득했다. 앵글시를 점령한 잉글랜드군은 배 다리를 통해 본토로 건너가려 했지만 실패하고 모엘-이-돈 전투에서 패배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르웰린과 에드워드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했고, 르웰린에게는 웨일스를 에드워드에게 넘기면 잉글랜드에 대저택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고, 다피드는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여 왕의 허가 없이는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2] 애브로스 선언과 비교되는 감정적인 답변에서 르웰린은 "브루투스의 아들 캄베르 시대"부터 그의 조상들이 보호해 온 사람들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며 제안을 거절했다.
르웰린은 이제 다피드에게 기니드의 방어를 맡기고 남쪽으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중부 및 남부 웨일스에서 지지를 모으고 중요한 두 번째 전선을 열려고 했다. 1282년 12월 11일 부일스 웰스에서 벌어진 오레윈 다리 전투(실메리 전투)에서 그는 군대와 떨어져 사망했다. 정확한 상황은 불분명하며 그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설명이 있다. 두 설명 모두 르웰린이 자신의 군대 대부분을 떠나도록 속았고 이후 공격을 받아 죽었다는 데 동의한다. 첫 번째 설명은 르웰린과 그의 수석 장관이 다리를 건넌 후 에드먼드 모티머와 휴 르 스트레인지의 군대에 접근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본대가 로저 데스펜서와 그루피드 압 그웬윈윈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는 소리를 들었다. 르웰린은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돌아서서 돌아갔지만, 고독한 창기병이 그를 따라가 쓰러뜨렸다. 잉글랜드 기사가 시신을 국왕으로 인정한 것은 한참 뒤였다. 이 사건의 버전은 약 50년 후 잉글랜드 북부에서 기록되었으며 스털링 브리지 전투에 대한 세부 사항과 의심스러운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르웰린의 망명한 딸 그웬리안 페르흐 르웰린과 조카 글라디스 페르흐 다피드와 접촉한 수도사들이 잉글랜드 동부에서 기록한 사건의 대안적인 버전은 르웰린이 군대의 선두에서 에드먼드와 로저 모티머, 휴고 르 스트레인지, 그루피드 압 그웬윈윈의 연합군에게 그들의 경의를 받겠다는 약속을 받고 접근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속임수였다. 그의 군대는 즉시 치열한 전투에 휘말렸고, 그 과정에서 상당 부분이 궤멸되어 르웰린과 그의 18명의 측근이 고립되었다. 황혼 무렵, 르웰린과 소규모 측근(성직자 포함)은 아베레드우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쫓겨 숲으로 들어갔다. 르웰린은 포위되어 쓰러졌다. 그는 죽어가면서 사제를 요청했고 자신의 신원을 밝혔다. 그는 이후 살해되었고 머리는 시신에서 잘려나갔다. 그의 소지품을 수색한 결과 가짜일 가능성이 높은 "공모자" 목록과 그의 비밀 인장을 포함한 다양한 품목이 회수되었다.
마지막 르웰린의 비밀 인장, 그의 아내 엘레노어, 그의 형제 다피드 압 그리피드는 1284년 잉글랜드인들이 시신에서 발견한 후 성배를 만들기 위해 녹여버린 것으로 여겨진다.[22]
르웰린의 잘린 머리의 운명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그것이 루들란의 에드워드에게 보내졌고, 앵글시에 주둔한 잉글랜드 군대에게 보여진 후, 에드워드는 머리를 런던으로 보냈다. 런던에서 그것은 도시 사형 기둥에 하루 동안 세워졌고 아이비로 왕관을 씌웠다(즉, 그가 아웃로의 "왕"이었음을 보여주고, 웨일스인이 런던에서 브리튼 전체의 왕으로 즉위할 것이라고 말한 고대 웨일스 예언을 조롱하기 위해). 그 후 그것은 창 끝에 꽂혀 기마병에 의해 런던 탑으로 옮겨져 문 위에 세워졌다. 15년 후에도 런던 탑에 있었다.[21]
르웰린의 시신이 마지막으로 안치된 곳은 확실하지 않지만, 항상 시토회 수도원인 애비쿰히르에 매장되었다는 전통이 있었다. 1282년 12월 28일, 펙함 대주교는 브레콘 사원의 브레콘 부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 르웰린의 시신이 쿰히르 교회에 묻혔는지 조사하고 명확히 하십시오. 그는 주현절 전에 후자를 명확히 해야 하며, 이 문제에 대한 다른 위임을 받았고, 크리스마스 전에 주 대주교에게 증명했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21]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추가 증거는 플로렌스 오브 워체스터 연대기에서 찾을 수 있다.
왕자의 시신, 그의 훼손된 시신은 시토회 수도원에 속한 쿰 히르 수도원에 매장되었다.[21]
또 다른 이론은 그의 시신이 카디프의 란럼니 홀로 옮겨졌다는 것이다.[23]
시인 그루피드 압 이르 이나드 코흐는 르웰린에 대한 비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요동치는 떡갈나무를 보지 못하는가?
무서운 가슴속에 차가운 내 마음
아베르프라우의 떡갈나무 문인 왕을 위해
웨일스 연대기 브루트 이 티위소기온에는 수수께끼 같은 언급이 있다. "... 그리고 나서 르웰린은 뱅거의 종탑에서 자신의 사람들에게 배신당했다." 더 이상의 설명은 없다.
7. 사후
리윌린의 죽음으로, 웨일스인들의 사기와 저항 의지는 약해졌다.[24] 다피드는 리윌린이 지명한 후계자였다. 그는 수개월 동안 투쟁을 이어갔지만, 1283년 6월 아버그윙레긴 위의 베라 산에서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24] 그는 에드워드 앞에 끌려갔고, 그 후 슈루즈베리로 이송되어 특별 의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거리를 끌려 다니며 교수, 거세 및 사지 절단형을 당했다.[24]
1283년 최종 패배 이후, 기네드는 모든 왕실 상징물, 유물 및 왕관을 박탈당했다.[24] 롱샹크 에드워드는 기네드 왕조의 왕실을 점령하는 것을 특히 즐거워했다. 1284년 8월, 그는 기네드의 아버그윙레긴에 자신의 궁정을 세웠다.[24] 그는 똑같이 신중하게 기네드에서 모든 위엄의 상징을 제거했다. 왕관은 웨스트민스터의 성 에드워드 신전에 엄숙하게 헌정되었고, 리윌린,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형제 다피드의 인장의 모형은 녹여져 성배를 만들었고, 그 성배는 왕에 의해 발 로얄 수도원에 기증되었으며, 1538년 수도원이 해산될 때까지 그곳에 보관되었다가 마지막 수도원장의 가족에게 넘어갔다.[24] 기네드에서 가장 귀중한 종교 유물인 네이스 십자가로 알려진 진정한 십자가의 파편은 1285년 5월 런던에서 왕, 왕비, 캔터베리 대주교, 14명의 주교, 그리고 왕국의 고관들이 이끄는 엄숙한 도보 행렬로 시위를 벌였다. 에드워드는 그렇게 기네드 가문의 역사적, 종교적 왕관을 점령하고 그 왕조의 멸망과 공국의 그의 왕관으로의 합병을 세상에 알렸다.[25] 이에 대해 한 당대의 연대기 작가는 "그리고 그때 모든 웨일스가 땅에 떨어졌다"라고 선언했다고 한다.[25]
리윌린의 친척 대부분은 투옥된 채 생을 마감했는데, 그의 막내 동생 로드리 압 그리피드는 왕위에 대한 권리를 이미 오래전에 팔고 매우 조용히 지내려고 노력했고, 먼 사촌 마도그 압 리윌린은 1294년에 반란을 일으켜 잠시 웨일스 공 칭호를 주장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주목할 만하다. 리윌린과 엘리너의 어린 딸 웨일스의 웬릴리안은 1283년 에드워드의 군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녀는 남은 생애 동안 잉글랜드의 셈프링엄 수도원에 감금되어 1317년에 수녀가 되었고, 1337년에 후손 없이 사망했으며, 아마도 자신의 유산을 거의 알지 못하고 자신의 언어를 전혀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피드의 두 생존 아들은 체포되어 브리스톨 감옥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여러 해 후에 사망했다. 리윌린의 형 오와인 고흐 압 그리피드는 1282년 기록에서 사라진다. 리윌린의 생존한 형제 로드리 압 그리피드(1272년부터 웨일스에서 추방됨)는 살아남아 글로스터셔, 체셔, 서리, 그리고 포위스에 영지를 소유했고, 1315년경에 사망했다. 그의 손자 오와인 라우고흐는 나중에 웨일스 공 칭호를 주장했다.
7. 1. 웨일스 저항의 종식
르웰린 압 그리피드의 죽음으로 웨일스인들의 사기와 저항 의지는 약해졌다.[24] 조직적인 저항은 사실상 끝이 났다. 르웰린이 지명한 후계자인 그의 동생 다피드는 수개월 동안 투쟁을 이어갔으나, 1283년 6월 아버그윙레긴 위의 베라 산에서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24] 그는 슈루즈베리로 이송되어 특별 의회에서 교수, 거세 및 사지 절단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24]1283년 최종 패배 이후, 기네드는 모든 왕실 상징물, 유물 및 왕관을 박탈당했다.[24] 롱샹크 에드워드는 기네드 왕조의 왕실을 점령하는 것을 특히 즐거워했다.[24] 1284년 8월, 그는 기네드의 아버그윙레긴에 자신의 궁정을 세웠다.[24] 그는 기네드에서 모든 위엄의 상징을 제거했다. 왕관은 웨스트민스터의 성 에드워드 신전에 헌정되었고, 르웰린,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형제 다피드의 인장의 모형은 녹여져 성배를 만들었고, 그 성배는 왕에 의해 발 로얄 수도원에 기증되었다.[24] 기네드에서 가장 귀중한 종교 유물인 네이스 십자가로 알려진 진정한 십자가의 파편은 1285년 5월 런던에서 왕, 왕비, 캔터베리 대주교, 14명의 주교, 그리고 왕국의 고관들이 이끄는 엄숙한 도보 행렬로 시위를 벌였다.[25] 에드워드는 그렇게 기네드 가문의 역사적, 종교적 왕관을 점령하고 그 왕조의 멸망과 공국의 그의 왕관으로의 합병을 세상에 알렸다.[25] 이에 대해 한 당대의 연대기 작가는 "그리고 그때 모든 웨일스가 땅에 떨어졌다"라고 선언했다고 한다.[25]
르웰린의 친척 대부분은 투옥된 채 생을 마감했는데, 그의 막내 동생 로드리 압 그리피드는 왕위에 대한 권리를 이미 오래전에 팔고 매우 조용히 지내려고 노력했고, 먼 사촌 마도그 압 리윌린은 1294년에 반란을 일으켜 잠시 웨일스 공 칭호를 주장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주목할 만하다. 르웰린과 엘리너의 어린 딸 웨일스의 웬릴리안은 1283년 에드워드의 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잉글랜드의 셈프링엄 수도원에 감금되어 1317년에 수녀가 되었고, 1337년에 후손 없이 사망했다.
다피드의 두 아들 아들은 체포되어 브리스톨 감옥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여러 해 후에 사망했다. 르웰린의 형 오와인 고흐 압 그리피드는 1282년 기록에서 사라진다. 르웰린의 생존한 형제 로드리 압 그리피드는 살아남아 글로스터셔, 체셔, 서리, 그리고 포위스에 영지를 소유했고, 1315년경에 사망했다. 그의 손자 오와인 라우고흐는 나중에 웨일스 공 칭호를 주장했다.
7. 2. 웨일스 공국의 종말
르웰린 압 그리피드가 사망하면서 웨일스인들의 저항 의지는 약해졌다.[24] 르웰린과 엘리너의 어린 딸 웨일스의 웬릴리안은 1283년 에드워드의 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잉글랜드의 셈프링엄 수도원에 감금되었고, 1317년에 수녀가 되었다.[24] 웬릴리안은 1337년에 후손 없이 사망했으며, 자신의 유산이나 언어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4]1283년 패배 이후, 기네드는 모든 왕실 상징물, 유물 및 왕관을 박탈당했다.[24] 롱샹크 에드워드는 기네드 왕조의 왕실을 점령하는 것을 특히 즐거워했으며, 1284년 8월 기네드의 아버그윙레긴에 자신의 궁정을 세웠다.[24] 그는 기네드의 모든 위엄의 상징을 제거했고, 왕관은 웨스트민스터의 성 에드워드 신전에 헌정되었다.[24] 르웰린,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형제 다피드의 인장 모형은 녹여져 성배를 만들었고, 이 성배는 발 로얄 수도원에 기증되었다가 1538년 수도원 해산 때 마지막 수도원장의 가족에게 넘어갔다.[24] 기네드의 가장 귀중한 종교 유물인 네이스 십자가는 1285년 5월 런던에서 왕과 왕비 등이 이끄는 행렬을 통해 시위되었다.[25] 에드워드는 기네드 가문의 역사적, 종교적 왕관을 점령하고 그 왕조의 멸망과 공국의 잉글랜드 왕관으로의 합병을 알렸다.[25]
8. 유산
8. 1. 웨일스 민족 정체성에 미친 영향
르웰린 압 그리피드는 웨일스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영웅으로 기억된다. 그의 저항은 웨일스 민족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동생 다비드는 웨일스 산악 지대로 도망쳐 스스로 웨일스 대공을 칭하며 저항을 계속했지만, 이듬해인 1283년 에드워드 1세에게 속아 붙잡혀 가족과 함께 처형당했다. 남은 르웰린의 딸 그웬시안은 링컨셔의 수녀원으로 보내져 50년 가까이 이곳에서 지냈다. 그녀는 1337년에 사망하여 웨일스 대공가는 단절되었다.8. 2. 문장에 대하여
여기에 묘사된 것은 리웰린 압 그리피드(그리고 오와인 글린두르와 오와인 로고흐)의 문장으로, c. 1270–1280년 경에 그려진 문장 두루마리에 있는 이미지를 재현한 것이다.[26] 다른 문장 변형이 발견되는 두루마리도 존재한다.
9. 대중 문화
1982년 웨일스 국립 에이스트페드포드에서 시인 게랄트 로이드 오언이 르웰린의 죽음에 대한 시 ''킬메리''를 발표하여 바드 의장을 수상했다.[27] 하웰 테이피 에드워즈는 이 시를 20세기 유일의 ''아들''이라고 칭하며, T. 귄 존스의 1902년 걸작 ''야마더위드 아서''("아서의 죽음")에 필적한다고 평가했다.[27] 오언의 시는 1282년 12월 11일, 킬메리 근처에서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점령에 대항하는 봉기를 이끌다가 전투에서 사망한 리윌린 압 그리피드의 죽음을 재해석했다.[27] 오언의 시는 이 왕자를 비극적 영웅으로 묘사하고, 그의 죽음에 그리피드 압 어르 야나드 코크가 죽음 직후 국왕을 애도하는 유명한 비가를 쓴 이후 유례없는 고뇌를 부여했다.[27] 또한 에드워즈에 따르면 오언은 왕자의 죽음에 웨일스인의 지속적인 "민족 생존을 위한 투쟁"을 담아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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