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1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에드워드 1세는 1239년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272년부터 1307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그는 제2차 남작 전쟁에서 승리하고 웨일스를 정복했으며,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에 개입하여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1290년에는 잉글랜드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는 등 강력한 왕권 확립과 법률 및 행정 개혁을 추진했다. 그의 통치는 모범 의회의 시작을 알렸으며,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중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체스터 백작 - 에드워드 3세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조의 왕으로, 쿠데타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친정 후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백년 전쟁을 일으켜 승리했으나 말년에는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 의회 발전과 국가 정체성 강화가 이루어졌다. - 체스터 백작 - 제6대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
13세기 잉글랜드 귀족이자 군인인 제6대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는 프랑스 귀족 가문 출신으로 레스터 백작 작위를 주장하여 헨리 3세의 신임을 얻어 인정받았으나, 이후 왕과의 갈등, 옥스퍼드 조례를 통한 의회 정치 개혁 추진, 남작 전쟁 주도, 루이스 전투 승리, 이브셤 전투 전사 등의 행적을 거치며 대의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동시에 유대인 박해 책임에 대한 비판도 받는다. - 13세기 잉글랜드의 군주 - 루이 8세
루이 8세는 필리프 2세의 아들로 1223년부터 1226년까지 프랑스 왕으로 재위하며 잉글랜드 침공과 알비 십자군을 지원하고 푸아투를 점령했으며, 몽팡시에 성에서 이질로 사망했다. - 13세기 잉글랜드의 군주 - 헨리 3세
헨리 3세는 1216년부터 1272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한 왕으로, 대외 원정 실패와 과세 강화로 귀족들의 반발을 샀으나 예술과 건축의 후원자로서 웨스트민스터 사원 재건축에 기여했다. - 남작 전쟁 관련자 - 제6대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
13세기 잉글랜드 귀족이자 군인인 제6대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는 프랑스 귀족 가문 출신으로 레스터 백작 작위를 주장하여 헨리 3세의 신임을 얻어 인정받았으나, 이후 왕과의 갈등, 옥스퍼드 조례를 통한 의회 정치 개혁 추진, 남작 전쟁 주도, 루이스 전투 승리, 이브셤 전투 전사 등의 행적을 거치며 대의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동시에 유대인 박해 책임에 대한 비판도 받는다. - 남작 전쟁 관련자 - 헨리 3세
헨리 3세는 1216년부터 1272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한 왕으로, 대외 원정 실패와 과세 강화로 귀족들의 반발을 샀으나 예술과 건축의 후원자로서 웨스트민스터 사원 재건축에 기여했다.
에드워드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직위 | 잉글랜드 국왕 |
통치 기간 | 1272년 11월 20일 - 1307년 7월 7일 |
대관식 | 1274년 8월 19일 |
이전 통치자 | 헨리 3세 |
다음 통치자 | 에드워드 2세 |
출생일 | 1239년 6월 17/18일 |
출생 장소 |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
사망일 | 1307년 7월 7일 (68세) |
사망 장소 | 컴벌랜드, Burgh by Sands |
매장일 | 1307년 10월 27일 |
매장 장소 | 웨스트민스터 사원 |
배우자 | 엘리너 오브 캐스틸 (1254년 결혼, 1290년 사망) 마르그리트 드 프랑스 (1299년 결혼) |
자녀 | 아래 참조 |
왕가 | 플랜태저넷 가 |
왕조 | 플랜태저넷 왕조 |
아버지 | 헨리 3세 |
어머니 | 엘레오노르 드 프로방스 |
별칭 | 긴다리왕 (Longshanks) 스코트인 잡는 망치 (Hammer of the Scots) |
가족 | |
자녀 상세 | 헨리 엘레오노르, 바 백작부인 조안, 헤르트퍼드 백작부인 알폰소, 체스터 백작 마르그리트, 브라반트 공작부인 베렌가리아 메리 오브 우드스톡 엘리자베스, 홀란드 백작부인 에드워드 2세 토머스, 노퍽 백작 에드먼드, 켄트 백작 |
군사 활동 | |
참전 | 제2차 남작 전쟁 에베섬 전투 제9차 십자군 웨일스 정복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폴커크 전투 |
2. 생애
1239년 헨리 3세의 장남으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1254년 카스티야 페르난도 3세의 딸 엘레오노르와 결혼했다.
1258년 Oxford Parliament (1258)|옥스퍼드 의회영어에서 가결된 옥스퍼드 조항을 둘러싸고 헨리 3세와 에드워드 등 왕권파와 레스터 백작시몽 드 몽포르 등 개혁파 제후들의 대립이 심화되어 1264년 제2차 남작 전쟁이 발발했다. 에드워드는 루이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부왕과 함께 포로가 되었지만, 1265년 탈출하여 이이브스햄 전투에서 레스터 백작을 전사시키고 왕권을 되찾았다.
내란 종결 후 에드워드는 부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주도했다. 옥스퍼드 조항은 부정했지만, 웨스트민스터 조항을 인정하고 Statute of Marlborough|말버러 법영어을 제정했다. 1270년부터는 제8차 십자군에 참가했다.
1272년 헨리 3세가 사망하면서 에드워드는 국왕으로 즉위했다.
2. 1. 어린 시절과 결혼

에드워드는 1239년 6월 17일에서 18일 밤에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헨리 3세와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 사이에서 태어났다.[3] 에드워드는 앵글로-색슨 이름으로, 노르만 정복 이후 잉글랜드 귀족들 사이에서는 흔한 이름이 아니었지만, 헨리는 참회왕 에드워드를 숭배했고, 그의 맏아들 이름을 이 성인의 이름을 따서 짓기로 결정했다.[5]
1239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장남으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1254년 프랑스에 대한 견제책으로 카스티야 왕・레온왕페르난도 3세의 딸 엘레오노르와 결혼했다.
그의 어린 시절 친구 중에는 헨리 3세의 형제인 콘월의 리처드의 아들인 사촌 알마인의 헨리가 있었는데,[7] 알마인의 헨리는 평생 동안 왕자의 가까운 동료로 남았다.[8] 에드워드는 1246년 기파드가 사망할 때까지 미래의 재무관 고드프리 기파드의 아버지인 휴 기파드의 보살핌을 받았고, 그 후 바솔로뮤 페체가 그의 뒤를 이었다.[4][9]
어린 시절 에드워드는 1246년, 1247년, 1251년에 병을 앓는 등 건강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하고, 운동 능력이 뛰어나며, 인상적인 남자로 성장했다.[4] 키가 약 1.83m로, 동시대 사람들보다 키가 컸고,[11][12] 그래서 그의 별칭은 "롱생크스"(Longshanks), 즉 "긴 다리" 또는 "긴 정강이"를 의미한다.
1254년, 잉글랜드는 카스티야 왕국의 잉글랜드령 가스코뉴 공작령 침략에 대한 두려움으로 15세의 에드워드와 13세의 카스티야의 엘레오노르, 즉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의 이복 여동생 사이의 정치적으로 유리한 결혼을 주선했다.[14] 그들은 1254년 11월 1일 카스티야의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라스 우엘가스 수도원에서 결혼했다.[15] 결혼 합의의 일환으로 알폰소 10세는 가스코뉴에 대한 그의 주장을 포기했고, 에드워드는 연간 15,000 마르크의 가치가 있는 토지를 받았다.[16]
1254년부터 1257년까지 에드워드는 그의 어머니 친척들, 즉 사보이 가문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22][23]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여왕의 삼촌인 사보이의 피터 2세였다.[24] 1257년 이후, 에드워드는 루지냥 파벌, 즉 그의 아버지 헨리 3세의 이복형제들과 점점 더 가까워졌는데, 윌리엄 드 발렌스와 같은 사람들이 그들을 이끌었다.[25]
2. 2. 제2차 남작 전쟁
1258년에 Oxford Parliament (1258)|옥스퍼드 의회영어에서 가결된 왕권 제약 조항인 옥스퍼드 조항을 둘러싸고 헨리 3세와 에드워드 왕자 등 왕권파와 제6대 레스터 백작시몽 드 몽포르 등 개혁파 제후들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1264년 양측은 제2차 남작 전쟁에서 충돌했고,[1] 루이스 전투에서 패배한 에드워드는 부왕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1265년 탈출에 성공, 이이브스햄 전투에서 레스터 백작을 전사시키고 왕실에 권력을 되찾았다.[1]1258년 헨리 3세가 재정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소집한 옥스퍼드 의회에서 레스터 백작 중심의 개혁파 제후들은 옥스퍼드 조항을 가결시켜 국왕 권력 제한을 시도했고, 헨리 3세와 에드워드는 이에 반발했다.[2][3] 1259년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 가결된 웨스트민스터 조항은 국왕뿐 아니라 영주 재판권 등 귀족 권력도 제한하는 내용이었다.[4] 에드워드는 개혁파 제후들의 분열을 간파하고 귀족들을 상대로 반격할 때 이 조항을 이용했다.[5]
1261년 교황알렉산데르 4세가 옥스퍼드 조항 준수 맹세 무효를 인정하면서 국왕과 제후 간 대립이 격화되었다. 양측은 경쟁적으로 지방 장악을 시도했고,[2][6] 1264년 5월 루이스에서 양측이 충돌하며 제2차 남작 전쟁이 발발했다. 루이스 전투에서 제후군이 압승하며 에드워드와 부왕은 포로가 되었다.[5][7] 이후 1년 정도 레스터 백작이 정부를 주도했지만, 1265년 5월 에드워드가 탈주, 8월 이vesham 전투에서 레스터 백작을 전사시키며 왕실 권력을 회복했다.[8][9]
1266년 6월, 에드워드와 헨리 3세는 개혁파 제후들이 농성하던 Kenilworth Castle|케닐워스 성영어을 포위했으나 함락에 실패했다. 이에 Dictum of Kenilworth|케닐워스 선언영어을 발표, 옥스퍼드 조항 폐기와 함께 반란 가담 정도에 따른 벌금형 외 추가 처벌은 없을 것이라 보증했다. 대부분의 제후들은 연말까지 선언을 수용하고 투항했다.[10]

2. 3. 십자군 원정과 즉위
에드워드는 1268년 6월 24일, 동생 에드먼드 크라우치백과 사촌 헨리 오브 알메인과 함께 십자군에 참여할 것을 서약했다.[59] 존 드 베시와 제7대 글로스터 백작과 같은 에드워드의 이전 적대자들 중 일부도 십자군에 헌신했지만, 글로스터와 같은 일부는 결국 참여하지 않았다.[59] 국가가 안정되자, 이 프로젝트에 가장 큰 장애물은 자금 조달이었다.[60] 십자군 지도자였던 프랑스 국왕 루이 9세는 약 17500GBP를 대출해 주었다.[61] 이것으로는 부족했고, 나머지는 1237년 이후로 부과되지 않았던 평민에 대한 직접적인 세금을 통해 충당해야 했다.[61] 1270년 5월, 의회는 모든 동산의 20분의 1을 세금으로 허가했다. 그 대가로 국왕은 마그나 카르타를 재확인하고 유대인 돈 대여에 대한 제한을 가하기로 동의했다.[63] 1270년 8월 20일, 에드워드는 도버를 출발하여 프랑스로 항해했다.[65] 역사가들은 그의 동행 병력 규모를 확실하게 결정하지 못했지만, 약 225명의 기사를 포함하여 1,000명 미만이었을 것이다.[60]- 십자군
- Mongols영어|몽골}}]]
원래, 십자군은 팔레스타인의 아크레에 있는 포위된 기독교 거점을 구원하려 했지만, 루이 9세와 그의 동생 앙주 백작 샤를, 시칠리아 왕은 북아프리카에 거점을 세우기 위해 튀니스 토후국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66] 이 계획은 프랑스군이 유행병에 휩싸여 8월 25일 루이가 사망하면서 실패했다.[67] 에드워드가 튀니스에 도착했을 때, 샤를은 이미 토후와 튀니스 조약을 체결했고, 시칠리아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할 일이 거의 없었다.[68] 추가적인 군사 작전은 다음 봄까지 연기되었지만, 시칠리아 해안에서 발생한 파괴적인 폭풍으로 샤를과 루이의 후계자인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 모두 더 이상의 원정을 포기하게 되었다.[69] 에드워드는 혼자 계속하기로 결정했고, 1271년 5월 9일 아크레에 상륙했다.[70]
성지의 기독교 상황은 위태로웠다. 예루살렘은 1244년 무슬림에게 재정복되었고, 아크레는 이제 예루살렘 왕국의 중심지가 되었다.[71] 무슬림 국가들은 맘루크의 지도자 바이바르스의 지휘 아래 공세를 펼치며 아크레를 위협하고 있었다. 에드워드의 병력은 수비대에 중요한 추가 병력이었지만, 바이바르스의 우세한 병력에 맞서 거의 승산이 없었고, 6월에 인근 생 조르주 드 레베인에서 벌인 초기 습격은 대체로 헛수고였다.[72] 몽골의 일 칸국 아바카에 대한 사절단은 북쪽의 알레포에 대한 공격을 촉진하여 바이바르스의 병력을 분산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73] 몽골 침공은 결국 실패했다. 11월, 에드워드는 카쿤에 대한 습격을 이끌었는데, 이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실패했다. 아크레의 상황은 절망적으로 변했고, 1272년 5월 키프로스 국왕 휴 3세, 즉 명목상 예루살렘 왕국 왕은 바이바르스와 10년 휴전을 체결했다.[74] 에드워드는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1272년 6월 시리아 암살자단의 일원, 즉 바이바르스의 명령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자의 암살 시도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는 암살자를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독이 든 것으로 의심되는 단검에 팔을 찔려 이후 몇 달 동안 심각하게 쇠약해졌다. 이것은 에드워드가 원정을 포기하도록 설득했다.[6][76]

1272년 9월 24일 에드워드는 아크레를 떠났다. 시칠리아에 도착한 직후, 그는 11월 16일에 부왕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77] 에드워드는 이 소식에 깊이 슬퍼했지만,[78] 급히 귀국하기보다는 북쪽으로 여유로운 여정을 떠났다.[79] 이는 부분적으로 그의 여전히 좋지 않은 건강 상태 때문이었지만, 긴급함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다.[80] 잉글랜드의 정치 상황은 세기 중반의 격변 이후 안정되었고, 에드워드는 그 당시까지 관례였던 자신의 대관식에서가 아니라 부왕의 사망 후 왕으로 선포되었다.[81] 에드워드가 부재중일 때, 나라는 로버트 번넬이 이끄는 왕립 위원회에 의해 통치되었다.[82]
3. 웨일스 정복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를 정복하기 위해 두 차례의 주요 군사 작전을 펼쳤다. 1277년과 1282년부터 1284년에 걸쳐 웨일스 공 리웰린 압 그리피드가 통치하는 웨일스에 침공했다. 첫 번째 침공에서 아버콘위 조약을 체결하여 리웰린의 영향력을 감소시켰다.[88] 1282년, 리웰린이 사망하자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를 완전히 병합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아들 에드워드 (훗날 에드워드 2세)에게 웨일스 공 작위를 수여했으며, 이는 이후 영국 왕태자에게 주어지는 전통이 되었다.[88]
4.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1280년대까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비교적 평화롭게 지냈다.[153] 1278년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3세는 매형인 에드워드에게 경의를 표했지만, 이는 잉글랜드 내 스코틀랜드 왕 소유의 토지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154] 그러나 1290년대 초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1286년 알렉산더 3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세 살 된 손녀이자 유일한 후계자인 마가렛이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155] 버검 조약에 따라 마가렛은 에드워드 왕의 여섯 살 된 아들 에드워드 2세와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종주권에서 벗어나기로 되어 있었다.[156][157]
하지만 1290년 말, 일곱 살이 된 마가렛이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항해하던 중 병에 걸려 오크니에서 사망했다.[158][159]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는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 되었고, 대의명분이라 불리는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160] 14명의 왕위 경쟁자가 나타났는데, 주요 경쟁자는 존 발리올과 아난데일의 로버트 드 브루스, 5대 영주였다.[161] 스코틀랜드 유력자들은 에드워드에게 절차 진행과 결과 관리를 요청했지만, 분쟁 자체에 대한 중재는 요청하지 않았다.[162] 실제 결정은 발리올과 브루스가 각각 40명씩 임명하고, 에드워드가 스코틀랜드 정치계 고위 인사 중에서 24명을 선출하여 총 104명의 감사관이 내리기로 했다.[162]
버검 조약에서 두 왕국 간 개인적 연합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종주권 문제는 에드워드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의 봉건 군주로 완전히 인정받아야 경연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63] 스코틀랜드인들은 이를 꺼리며, 왕이 없으므로 누구도 이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다고 답했다.[164] 결국 경쟁자들이 정당한 후계자가 나올 때까지 왕국을 에드워드에게 넘기기로 합의하면서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165] 오랜 심리 끝에 1292년 11월 17일, 존 발리올에게 유리한 결정이 내려졌다.[166]
발리올 즉위 후에도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권위를 계속 주장했다. 스코틀랜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는 공위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를 통치했던 수호자 법원의 판결에 대한 항소를 듣기로 했다.[167] 파이프 백작 말콤 2세의 아들 맥더프가 제기한 소송에서 에드워드가 발리올에게 영국 의회에 직접 출두하여 혐의에 답변할 것을 요구하면서 또 다른 도발이 발생했다.[168] 스코틀랜드 왕은 이에 응했지만, 에드워드가 스코틀랜드 유력자들에게 프랑스와의 전쟁에 군사적 복무를 제공하라고 요구하면서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했다.[169]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요구였고, 스코틀랜드인들은 대신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칼라일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170]
에드워드는 1296년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버윅어폰트위드를 점령하고,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171] 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의 저항은 사실상 분쇄되었다.[172] 에드워드는 운명의 돌을 가져와 에드워드 왕의 의자에 안치하고, 발리올을 폐위시켜 런던 탑에 가두었으며, 영국인들을 파견하여 스코틀랜드를 다스리게 했다.[173] 이 군사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잉글랜드의 승리는 일시적일 뿐이었다.[174]
1297년, 앤드루 드 모레이와 윌리엄 월리스가 이끄는 저항이 일어났다. 스털링 브리지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대패했다.[284] 1298년, 에드워드는 폴커크 전투에서 월리스 군대를 격파했지만, 스코틀랜드는 스털링 성을 탈환했다.[286][287][288] 에드워드는 1300년 케얼라버록 성을 점령하고 1301년 원정을 벌였지만, 스코틀랜드는 소규모 습격을 선호하며 전투를 피했다.[289]
스코틀랜드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게 잉글랜드 대신 스코틀랜드에 대한 교황의 종주권을 주장하도록 호소했지만, 에드워드는 1301년 남작 서한을 통해 이를 거부했다. 1303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 평화 협정으로 프랑코-스코틀랜드 동맹이 해체되었다.[290] 1304년, 대부분의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에드워드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잉글랜드는 스털링 성을 탈환했다.[292] 1305년, 윌리엄 월리스가 잉글랜드에 넘겨져 처형되었다.[293]
1306년, 로버트 1세가 경쟁자를 살해하고 스코틀랜드 왕으로 즉위하며 독립 전쟁을 시작했다.[295][296] 에드워드는 건강이 좋지 않아 직접 원정을 이끌지 못하고 다른 지휘관들에게 맡겼다.[298] 같은 해, 잉글랜드는 메스벤 전투에서 브루스를 격파하고 영토를 탈환했다.[299] 에드워드는 브루스의 가족과 지지자들을 잔혹하게 처벌했지만, 오히려 스코틀랜드인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303][304] 1307년, 브루스는 다시 군사를 일으켜 5월 라우던 힐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305] 에드워드 1세는 병세가 악화된 와중에도 스코틀랜드로 향하던 중, 7월 6일 버러 바이 샌즈에서 사망했다.[306][307] 그의 시신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었다.[314][315]
4. 1.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개입

1280년대까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관계는 비교적 평화로웠다.[153] 공물 문제도 웨일스에서처럼 큰 논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1278년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3세는 매형인 에드워드에게 공물을 바쳤지만, 이는 잉글랜드 내 스코틀랜드 왕 소유의 토지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154]
1290년대 초,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1286년 알렉산더 3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세 살 된 손녀이자 유일한 후계자인 마가렛이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155] 버검 조약에 따라 마가렛은 에드워드 왕의 여섯 살 된 아들 에드워드 2세와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종주권에서 벗어나기로 되어 있었다.[156][157]
그러나 1290년 말, 일곱 살이 된 마가렛이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항해하던 중 병에 걸려 오크니에서 사망했다.[158][159]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는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 되었고, 대의명분이라 불리는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160]
14명의 왕위 দাবি자가 나타났으며, 주요 경쟁자는 존 발리올과 아난데일의 로버트 드 브루스, 5대 영주였다.[161] 스코틀랜드 유력자들은 에드워드에게 절차 진행과 결과 관리를 요청했지만, 분쟁 자체에 대한 중재는 요청하지 않았다. 실제 결정은 발리올과 브루스가 각각 40명씩 임명하고, 에드워드가 스코틀랜드 정치계 고위 인사 중에서 24명을 선출하여 총 104명의 감사관이 내리기로 했다.[162]
버검 조약에서 두 왕국 간 개인적 연합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종주권 문제는 에드워드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의 봉건 군주로 완전히 인정받아야 경연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63] 스코틀랜드인들은 이를 꺼리며, 왕이 없으므로 누구도 이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다고 답했다.[164] 결국 경쟁자들이 정당한 후계자가 나올 때까지 왕국을 에드워드에게 넘기기로 합의하면서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165]
오랜 심리 끝에 1292년 11월 17일, 존 발리올에게 유리한 결정이 내려졌다.[166]
발리올 즉위 후에도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권위를 계속 주장했다. 스코틀랜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는 공위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를 통치했던 수호자 법원의 판결에 대한 항소를 듣기로 했다.[167] 파이프 백작 말콤 2세의 아들 맥더프가 제기한 소송에서 에드워드가 발리올에게 영국 의회에 직접 출두하여 혐의에 답변할 것을 요구하면서 또 다른 도발이 발생했다.[168] 스코틀랜드 왕은 이에 응했지만, 에드워드가 스코틀랜드 유력자들에게 프랑스와의 전쟁에 군사적 복무를 제공하라고 요구하면서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했다.[169]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요구였고, 스코틀랜드인들은 대신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칼라일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170] 에드워드는 1296년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버윅어폰트위드를 점령하고,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171] 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의 저항은 사실상 분쇄되었다.[172] 에드워드는 운명의 돌을 가져와 에드워드 왕의 의자에 안치하고, 발리올을 폐위시켜 런던 탑에 가두었으며, 영국인들을 파견하여 스코틀랜드를 다스리게 했다.[173] 이 군사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잉글랜드의 승리는 일시적일 뿐이었다.[174]
4. 2. 스코틀랜드 침공과 저항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고 스코틀랜드 왕위를 주장하며 저항을 진압하려 했다.1280년대까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비교적 평화롭게 지냈다.[153] 1278년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3세는 에드워드 1세에게 경의를 표했지만, 이는 잉글랜드 내 소유지에 대한 것이었다.[154] 1290년대 초,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1286년 알렉산더 3세가 사망하고, 그의 손녀 노르웨이의 마가렛이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155] 버검 조약에 따라 마가렛은 에드워드 1세의 아들 에드워드 2세와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종주권에서 벗어나도록 했다.[156][157]
1290년, 마가렛이 스코틀랜드로 항해 중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158][159] 존 발리올과 아난데일의 로버트 드 브루스, 5대 영주 등 14명의 경쟁자가 나타났다.[161] 스코틀랜드 유력자들은 에드워드 1세에게 중재를 요청했지만,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의 봉건적 군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63] 스코틀랜드인들은 왕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지만, 결국 경쟁자들은 에드워드에게 왕국을 넘기기로 합의했다.[164][165] 1292년 11월, 존 발리올이 왕으로 결정되었다.[166]
발리올 즉위 후에도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권위를 주장하며, 스코틀랜드 법원 판결에 대한 항소를 듣고 발리올에게 영국 의회 출두를 요구했다.[167][168] 또한, 스코틀랜드 유력자들에게 군사적 복무를 요구하자,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를 공격했다.[169][170] 1296년,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버윅어폰트위드를 점령하고 던바 전투에서 승리했다.[171][172] 스코틀랜드의 돌을 가져오고 발리올을 폐위시킨 후, 영국인들을 파견하여 스코틀랜드를 다스리게 했다.[173]
1297년, 앤드루 드 모레이와 윌리엄 월리스가 이끄는 저항이 일어났다. 스털링 브리지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대패했다.[284] 1298년, 에드워드는 폴커크 전투에서 월리스 군대를 격파했지만, 스코틀랜드는 스털링 성을 탈환했다.[286][287][288] 에드워드는 1300년 케얼라버록 성을 점령하고 1301년 원정을 벌였지만, 스코틀랜드는 소규모 습격을 선호하며 전투를 피했다.[289]
스코틀랜드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게 잉글랜드 대신 스코틀랜드에 대한 교황의 종주권을 주장하도록 호소했지만, 에드워드는 1301년 남작 서한을 통해 이를 거부했다. 1303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 평화 협정으로 프랑코-스코틀랜드 동맹이 해체되었다.[290] 1304년, 대부분의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에드워드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잉글랜드는 스털링 성을 탈환했다.[292] 1305년, 윌리엄 월리스가 잉글랜드에 넘겨져 처형되었다.[293]
1306년, 로버트 1세가 경쟁자를 살해하고 스코틀랜드 왕으로 즉위하며 독립 전쟁을 시작했다.[295][296] 에드워드는 건강이 좋지 않아 직접 원정을 이끌지 못하고 다른 지휘관들에게 맡겼다.[298] 1306년, 잉글랜드는 메스벤 전투에서 브루스를 격파하고 영토를 탈환했다.[299] 에드워드는 브루스의 가족과 지지자들을 잔혹하게 처벌했지만, 오히려 스코틀랜드인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303][304]
4. 3. 로버트 1세와의 전쟁과 죽음
에드워드는 1296년 스코틀랜드를 떠날 때 정복을 완료했다고 믿었지만, 곧 앤드루 드 모레이와 윌리엄 월리스가 이끄는 저항이 일어났다. 1297년 9월 11일,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대패했다.[284] 이 패배는 잉글랜드에 충격을 주었고, 보복 작전을 위한 준비가 즉시 시작되었다. 에드워드는 플랑드르에서 돌아온 직후 북쪽으로 향했다.[285] 1298년 7월 22일, 폴커크 전투에서 에드워드는 월리스의 군대를 격파했지만,[286] 그 기세를 이용할 수 없었고,[287] 다음 해 스코틀랜드군은 스털링 성을 탈환했다.[288] 에드워드는 1300년 케얼라버록 성을 성공적으로 포위하고, 1301년 스코틀랜드에서 원정을 벌였지만, 스코틀랜드군은 소규모로 잉글랜드 시골을 습격하는 것을 선호하며 다시 공개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289]스코틀랜드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게 잉글랜드 대신 스코틀랜드에 대한 교황의 종주권 주장을 호소했다. 에드워드 왕에게 보낸 교황의 교서는 1301년 남작 서한에 의해 에드워드를 대신하여 단호히 거부되었다. 잉글랜드는 다른 수단을 통해 나라를 진압했다. 1303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 사실상 프랑코-스코틀랜드 동맹이 해체되었다.[290] 1291년 왕위 계승자의 손자인 로버트 1세는 1301-02년 겨울에 잉글랜드 편을 들었다.[291] 1304년, 대부분의 다른 귀족들도 에드워드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잉글랜드는 스털링 성을 탈환했다.[292] 1305년에는 윌리엄 월리스가 존 드 멘테스 경에게 배신당하고 잉글랜드에 넘겨져 런던으로 끌려가 공개 처형당하면서 큰 선전 승리를 거두었다.[293]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의 지배하에 놓이자, 에드워드는 잉글랜드인과 협력적인 스코틀랜드인을 임명하여 나라를 통치하게 했다.[294]
상황은 1306년 2월 10일에 다시 바뀌었다. 로버트 1세가 그의 경쟁자인 존 코민을 살해했고,[295] 몇 주 후인 3월 25일에 스코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296] 브루스는 이제 스코틀랜드 독립을 회복하기 위한 작전을 시작했고, 이는 잉글랜드군을 놀라게 했다.[297] 에드워드는 이 무렵 건강이 좋지 않아 직접 원정을 이끄는 대신, 에이머 드 발렌스, 펨브로크 백작 2세와 헨리 퍼시, 퍼시 남작 1세에게 다른 군사적 지휘를 맡기고, 주요 왕립군은 웨일스 공이 이끌게 했다.[298] 잉글랜드는 초기에 성공을 거두었다. 6월 19일, 에이머 드 발렌스는 메스벤 전투에서 브루스를 격파했다.[299] 브루스는 숨어 다녀야 했고, 잉글랜드군은 잃어버린 영토와 성을 탈환했다.[300]
에드워드는 브루스의 가족, 동맹자, 지지자들을 상대로 이례적으로 잔혹하게 행동했다. 그의 여동생인 메리 브루스는 록스버러 성의 우리에 4년 동안 갇혔다. 브루스에게 왕관을 씌운 이소벨 맥더프, 부칸 백작 부인은 버윅 성의 우리에 갇혔다.[301] 그의 남동생인 네일 드 브루스는 교수, 거열형에 처해졌다. 그는 자신과 그의 수비대가 그의 아내, 딸과 자매를 찾던 에드워드의 군대를 막아낸 후 체포되었다.[302] 에드워드는 이제 이 투쟁을 두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불충한 신하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으로 간주했다.[303] 이러한 잔혹함은 스코틀랜드인을 진압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정반대의 효과를 내어 브루스에 대한 지지가 커지게 만들었다.[304]
1307년 2월, 브루스는 그의 노력을 재개하고 병사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5월에는 라우던 힐 전투에서 밸런스를 격파했다.[305] 약간 회복된 에드워드는 이제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이동 중에 이질에 걸렸고, 상태가 악화되었다. 7월 6일, 그는 스코틀랜드 국경 바로 남쪽에 있는 버러 바이 샌즈에 야영했다. 다음 날 아침, 시종들이 그를 일으켜 세워 식사를 하게 하려 하자, 왕은 그들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306][307]
에드워드의 임종 유언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가 나왔다. 한 전설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심장을 이교도들과 싸울 군대와 함께 성지로 가져가 달라고 요청했다.[308] 더 의심스러운 이야기는 그의 유골을 스코틀랜드에 대한 미래의 원정에 함께 가져가기를 바랐다는 것이다.[307] 그의 임종 장면의 또 다른 설명은 더 신빙성이 있다. 한 연대기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제3대 링컨 백작 헨리 드 레이시, 제10대 워릭 백작 가이 드 보챔, 아메 드 밸런스, 제1대 클리퍼드 남작 로버트 드 클리퍼드를 불러 아들 에드워드를 돌보라고 명령했다. 특히, 그 해 초에 추방했던 피어스 개브스턴이 귀국하는 것을 막도록 해야 했다.[309][310] 새 왕 에드워드 2세는 아버지의 소원을 무시하고, 거의 즉시 그의 총애를 받던 자를 망명에서 불러들였다.[311] 에드워드 2세는 8월까지 북쪽에 머물렀지만, 재정적 제약으로 인해 캠페인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향했다.[312] 그는 1308년 2월 25일에 왕위에 올랐다.[313]

에드워드 1세의 시신은 남쪽으로 옮겨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10월 27일에 매장되기 전 월섬 수도원에 안치되었다.[314][315] 장례식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며, 비용은 473GBP였다.[314]
에드워드의 무덤은 관례적인 왕실 초상이 없는, 특히 평범한 석관인 퍼벡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왕실 자금 부족의 결과일 수 있다.[317] 런던 골동품 협회는 1774년에 무덤을 열어, 시신이 지난 467년 동안 잘 보존되어 있었음을 확인하고, 왕의 원래 키를 측정할 기회를 가졌다.[318] 무덤 옆면에는 "Edwardus Primus Scottorum Malleus hic est, 1308. Pactum Serva"("스코틀랜드의 망치 에드워드 1세, 1308. 약속을 지켜라")라는 라틴어 비문[319]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이는 로버트 더 브루스의 반란에 대한 그의 복수 서약을 언급하는 것이다.[320] 이로 인해 에드워드는 역사가들로부터 "스코틀랜드의 망치"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이는 16세기에 수도원장 존 페켄햄에 의해 추가된 것으로, 당시의 것이 아니다.[321]
5. 법과 행정 개혁
에드워드 1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아버지 헨리 3세의 혼란스러운 치세 이후 질서를 회복하고 왕권을 재확립하는 데 착수했다.[193] 이를 위해 그는 즉시 행정 인사의 대대적인 변화를 명령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1274년 로버트 번넬을 재상으로 임명한 것이었는데, 그는 1292년까지 재상직을 유지하며 왕의 가장 가까운 측근 중 한 명이 되었다.[194] 번넬이 임명된 같은 해에 에드워드는 escheators와 지방 장관과 같은 대부분의 지방 관리를 교체했다.[195] 이 조치는 왕실 관리의 권력 남용에 대한 불만을 청취할 잉글랜드 전역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심문을 준비하기 위해 취해졌다. 심문의 두 번째 목적은 국왕이 헨리 3세의 치세 동안 잃어버린 토지와 권리를 확립하는 것이었다.[196]
심문은 Hundred Rolls라고 불리는 일련의 인구 조사 문서를 만들었다.[197] 이것들은 11세기 Domesday Book에 비유되었으며,[198] 나중에 ''Quo warranto'' 소송이라고 불리는 법적 심문의 기초를 형성했다.[199] 이러한 심문의 목적은 어떤 영장()으로 자유가 유지되었는지 확립하는 것이었다.[200] 피고가 자유 부여를 증명하는 왕실 면허를 제시할 수 없는 경우, 당시 영향력 있는 13세기 법학자 헨리 드 브랙턴의 저작을 바탕으로, 그 자유는 왕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국왕의 견해였다. 웨스트민스터 법 1275년과 웨스트민스터 법 1285년은 잉글랜드의 기존 법을 성문화했다.[201] 1278년에 글로스터 법을 제정함으로써, 왕은 일반적인 eyres (전국을 순회하는 왕실 재판관) 시스템을 부활시키고, 이러한 eyres에 의해 심리될 quo warranto 소송 건수를 대폭 늘림으로써 남작의 권리에 도전했다.[202]
이는 귀족들 사이에서 큰 당혹감을 야기했으며,[203] 그들은 오랜 관행 자체가 면허를 구성한다고 주장했다.[204] 결국 1290년에 타협이 이루어져, 1189년 사자왕 리처드의 대관식 이후 행사된 것으로 입증될 수 있는 한 자유는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205] ''Quo warranto'' 소송으로 인한 왕실의 이득은 소수의 자유만이 왕에게 반환되었기 때문에 미미했지만,[206]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유가 국왕으로부터 나왔다는 원칙을 확립함으로써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207]
1290년의 ''Quo warranto'' 법은 광범위한 입법 개혁의 한 부분일 뿐이었으며, 이는 에드워드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공헌 중 하나였다.[208] 이러한 입법 조치의 시대는 이미 남작 개혁 운동 시기에 시작되었고, 말보로 법 (1267년)은 옥스퍼드 조항과 켄일워스 규정의 요소를 모두 포함했다.[209] Hundred Rolls의 편찬은 웨스트민스터 I (1275년)의 발행으로 이어진 후, 이는 왕권을 주장하고 자유에 대한 제한을 개략적으로 설명했다.[210] 몰트메인 법 (1279년)은 교회에 대한 토지 기부 문제를 다루었다.[211] 웨스트민스터 II (1285년)의 첫 번째 조항인 ''De donis conditionalibus''는 토지의 가족 정착과 상속 제한을 다루었다.[212] 상인 법 (1285년)은 채무 회수를 위한 확고한 규칙을 제정했으며,[213] 윈체스터 법 (1285년)은 기존의 경찰 제도를 강화함으로써 지역 수준에서의 안전 및 평화 유지를 다루었다.[214] ''Quia emptores'' (1290년) - ''Quo warranto''와 함께 발효 - 는 재분봉에 의한 토지 양도로 인한 토지 소유권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제정되었다.[215] 위대한 법령의 시대는 1292년 로버트 번넬의 죽음으로 대체로 끝났다.[216]
1290년대의 끊임없는 전쟁은 에드워드 1세의 신하들에게 큰 재정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왕은 1294년까지 세 번의 평신도 보조금을 징수했지만, 1294년에서 1297년 사이에 네 번의 세금이 부과되어 200000GBP 이상이 징수되었다.[260] 이와 함께 프라이즈의 부담, 양모와 가죽의 압수, 그리고 '몰톨트'("부당하게 빼앗은")라는 추가적인 양모 관세가 있었다.[261] 왕의 신하들에 대한 재정적 요구는 원성을 샀고, 결국 심각한 정치적 반대로 이어졌다. 초기 저항은 평신도 세금이 아니라 성직자 보조금 때문에 발생했다. 1294년, 에드워드는 모든 성직자 수입의 절반을 보조금으로 요구했다. 약간의 저항이 있었지만, 왕은 반대자들을 불법자로 위협하여 대응했고, 결국 보조금이 지급되었다.[262]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된 로버트 윈첼시는 서임식을 받기 위해 이탈리아에 있었다.[263] 윈첼시는 1295년 1월에 돌아와 그해 11월 또 다른 보조금에 동의해야 했다. 1296년, 그는 교황 칙서 ''Clericis laicos''를 받으면서 입장이 바뀌었다. 이 칙서는 성직자가 교황의 명시적인 동의 없이 세속 권위에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금지했다.[264] 성직자들이 칙서를 언급하며 납부를 거부하자, 에드워드는 불법자로 대응했다.[265] 윈첼시는 왕에 대한 충성과 교황 칙서 준수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졌고, 그는 각 성직자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납부하도록 결정했다.[266] 그해 말, 새로운 교황 칙서 ''Etsi de statu''가 제시되어 긴급한 경우 성직자 과세를 허용했다.[267] 이를 통해 에드워드는 영국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상당한 금액을 징수할 수 있었다.[268]
평신도의 반대는 더 늦게 나타났다. 이 저항은 군 복무를 요구할 왕의 권리와 세금을 부과할 왕의 권리에 초점을 맞췄다. 1297년 2월 솔즈베리 의회에서 국원경 로저 비고드, 노퍽 백작 5세는 군 복무에 대한 왕의 소환에 반대했다. 비고드는 군 복무 의무는 왕과 함께 복무하는 데만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만약 왕이 플랑드르로 항해할 의도라면, 신하들을 가스코뉴로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270] 7월, 비고드와 험프리 드 보훈, 헤리퍼드 백작 3세 및 잉글랜드 치안관은 항의서로 알려진 일련의 불만을 작성하여 높은 수준의 과세에 대한 반대를 표명했다.[271] 에드워드는 이에 굴하지 않고 또 다른 평신도 보조금을 요청했다. 이 보조금은 특히 도발적이었는데, 왕이 의회의 공동체 대표가 아닌 소수의 유력자들로부터 동의를 구했기 때문이다.[272] 에드워드가 윈첼시에 머물면서 플랑드르 원정을 준비하는 동안, 비고드와 드 보훈은 세금 징수를 막기 위해 재무부에 도착했다.[273] 왕이 군대를 크게 줄여 나라를 떠나자, 왕국은 내전 직전에 놓인 것처럼 보였다.[274][275] 스털링 브리지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의 영국 패배로 상황이 해결되었다. 고향에 대한 위협이 다시 고조되면서 왕과 유력자들은 공동의 목표를 갖게 되었다.[276] 에드워드는 마그나 카르타 확정을 서명했고 귀족들은 스코틀랜드 원정에 왕과 함께 복무하기로 동의했다.[277][278]
에드워드와 반대 세력의 문제는 스코틀랜드 원정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자신이 했던 약속, 특히 숲 헌장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했다. 1301년 의회에서 왕은 왕실 숲의 평가를 명령해야 했지만, 1305년에는 이 양보에서 그를 면제하는 교황 칙서를 얻었다.[279] 결국 에드워드에 대한 반대의 종말을 가져온 것은 인사의 변화였다. 드 보훈은 1298년 말 스코틀랜드 원정에서 돌아온 후 사망했다.[280] 1302년, 비고드는 왕과 그에게 유리한 협정을 맺었다. 자녀가 없는 비고드는 관대한 연례 보조금의 대가로 에드워드를 자신의 상속자로 만들었다.[281] 에드워드는 성직자 과세에 대한 왕의 정책에 반대했던 윈첼시에게 복수했다.[282] 1305년, 클레멘스 5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클레멘스는 왕에게 동정적인 가스코뉴 사람이었고, 에드워드의 사주로 윈첼시를 직무 정지시켰다.[283]
6. 모범 의회
에드워드 1세는 재위 기간 동안 정기적으로 의회를 개최했다.[229] 1295년에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 의회에서는 세속 및 교회 영주뿐만 아니라 각 카운티에서 두 명의 기사와 각 자치구에서 두 명의 대표가 소집되었다.[230][231] 이전에는 평민들이 대영주가 내린 결정에 동의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이제는 평민 대표들이 지역 사회의 완전한 권한(''plena potestas'')을 가지고 의회에서 내린 결정에 동의하기 위해 모여야 한다고 선포되었다.[232] 이로써 에드워드 1세는 전체 인구로부터 평신도 보조금을 징수할 수 있는 완전한 지원을 받게 되었다.[233] 헨리 3세는 재위 기간 동안 단 네 번의 평신도 보조금만 징수했지만, 에드워드 1세는 아홉 번이나 징수했다.[234] 이러한 의회 형식은 결국 후대 의회의 표준이 되었고, 역사가들은 이 회의를 "모범 의회"라고 명명했는데,[235] 이 용어는 영국의 역사가 William Stubbs에 의해 처음 도입되었다.[236]
7. 유대인 추방
에드워드 1세는 유대인을 이용해 재정적 이익을 취하려 했다. 당시 기독교인은 고리대금이 금지되었지만, 유대인은 예외였다. 에드워드 1세는 유대인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여 채권을 헐값에 팔게 만들었고, 이는 국왕과 측근들이 채무자의 토지를 싼값에 사들여 재산을 불리는 수단으로 악용되어 큰 불만을 샀다.[239]
1275년, 의회의 불만에 직면한 에드워드 1세는 유대인 법령을 발표하여 고리대금을 금지하고 유대인에게 다른 직업을 갖도록 장려했다.[240] 1279년에는 화폐 변조범 단속을 구실로 잉글랜드 내 모든 유대인 가구주를 체포하고 약 300명을 처형했으며, 최소 16,000파운드의 벌금과 재산 몰수 수입을 거두었다.[242] 1280년에는 도미니크 수도사들의 설교에 모든 유대인이 참석하도록 강요하여 개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244]
1280년경, 유대인들은 더 이상 국왕에게 큰 재정적 이득이 되지 못할 정도로 착취당했지만,[245] 정치적 협상에는 여전히 이용될 수 있었다.[246] 결국 1290년 추방령을 통해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의 모든 유대인을 추방했다.[247] 이 법령은 의회로부터 11만 파운드라는, 중세 시대 최대 규모의 평신도 보조금을 얻어내기 위한 거래의 일환으로 보인다.[252]
추방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해적에게 약탈당하거나 재산을 빼앗기고, 폭풍으로 사망하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248] 국왕은 유대인들의 재산을 처분하여 측근과 가족에게 나누어 주었다.[249] 에드워드 1세는 추방이 "예수를 기리기 위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며 유대인의 배신과 범죄 행위를 비난했다.[256] 그는 유대인에게 살해당했다고 거짓으로 알려진 리틀 세인트 휴의 무덤을 개조하여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치적 명분을 얻으려 했다.[257]
8. 평가
에드워드는 격렬하고 예측 불가능한 성격을 지녔으며, 위협적인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175] 1295년 높은 세금 부과에 반대하려던 세인트 폴 대성당의 수석 사제가 왕 앞에서 쓰러져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76] 14세기 연대기 작가는 요크의 토마스 대주교의 죽음이 왕의 가혹한 행동 때문이라고 보았다.[177] 에드워드 오브 카나번이 총애하던 피어스 가베스턴에게 백작령을 요구하자, 왕이 격분하여 아들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뽑았다는 이야기도 있다.[178] 1264년의 ''리우스의 노래''는 그를 강력하고 예측 불가능한 동물인 표범으로 묘사했다.[179]
그의 가혹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의 영국 동시대인들은 그를 유능하고 심지어 이상적인 왕으로 여겼다.[180] 신하들에게 사랑받지는 못했지만, 두려움과 존경을 받았으며, 이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에서 무장 반란이 없었다는 사실에 반영되었다.[181] 에드워드는 패배한 적들에게 복수심을 드러내고, 그의 행동에서 승리주의를 보였다는 점으로 자주 언급된다.[182] 역사가 R. R. 데이비스는 에드워드의 반복적이고 "무자비한 적대자 폄하"가 "그의 왕으로서의 성격에서 가장 일관되고 매력적이지 않은 특징 중 하나"였다고 생각했다.[183] 예로는 1283년 웨일스 정복 후 웨일스에서 성 십자가 조각을 압수하고, 1296년 스코틀랜드 정복 후 스코틀랜드에서 스코네의 돌과 왕관을 압수한 사건 등이 있다.[184]
역사가 마이클 프레스위치는 에드워드가 유능하고 결단력 있는 군인이자, 공유된 기사도적 이상을 구현함으로써 왕위에 대한 동시대의 기대를 충족시켰다고 평가한다.[186] 그는 종교적 의무에서도 시대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관대하게 자선을 베풀었으며, 성모 마리아와 성 토마스 베켓에 대한 헌신을 보였다.[187] 아버지처럼 에드워드는 왕의 손길 전통에 열렬히 참여했는데, 이는 손을 댄 사람들의 림프절 결핵을 치료한다고 믿어졌다. 동시대 기록에 따르면 왕은 매년 1,000명 이상을 만졌다.[6] 그의 개인적인 경건함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봉사한 캔터베리 대주교들과 자주 갈등을 겪었다. 교황청과의 관계는 때때로 더 나아지지 않았으며, 에드워드는 교회 과세 문제를 놓고 로마와 갈등을 겪었다.[6]
에드워드는 유럽에서 인기를 누렸던 아서 왕 전설에 큰 관심을 보였다.[188] 1278년 그는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을 방문하여 당시 아서 왕과 기네비어의 무덤으로 여겨지던 곳을 열었고, 북웨일스 정복 후 리웰린으로부터 "아서의 왕관"을 회수했다.[189] 웨일스에서의 그의 성 건축 캠페인은 디자인과 위치에서 아서 왕 전설을 활용했다.[190] 그는 1284년과 1302년에 토너먼트와 연회를 포함하는 "원탁" 행사를 개최했으며, 연대기 작가들은 그와 그의 궁정에서의 사건들을 아서 왕에 비유했다.[191] 어떤 경우에는 에드워드가 웨일스에서의 그의 통치를 합법화하고 아서 왕이 그들의 정치적 구원자로 돌아올 수 있다는 웨일스인의 믿음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등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아서 왕 전설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192]
16세기와 17세기의 에드워드에 대한 초기 역사들은 주로 연대기 작가의 저작에 의존했고, 당시의 공식 기록을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322] 17세기, 법률가 에드워드 코크는 에드워드의 입법에 대해 광범위하게 글을 썼으며, 비잔틴 법률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빗대어 이 왕을 "영국 유스티니아누스"라고 칭했다.[324] 18세기, 역사가들은 에드워드를 시대 상황에 따라 만들어진 유능하지만 무자비한 군주로 묘사했다.[326]
영향력 있는 빅토리아 시대 역사가 윌리엄 스텁스는 에드워드가 영국의 법과 제도를 형성하고, 영국이 의회와 입헌 군주제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면서 국가 역사를 적극적으로 형성했다고 주장했다.[327] 스텁스의 제자 토머스 토트는 처음에는 같은 관점을 취했지만, 에드워드의 왕실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한 후, 그의 생각을 바꾸었다.[329] 토트는 에드워드를 자기중심적이고 보수적인 지도자로 보았다.[330]
20세기와 21세기의 역사가들은 에드워드와 그의 치세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했다.[331] 대부분은 이 시기가 영국 중세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고 결론지었으며, 일부는 에드워드를 위대한 중세 국왕 중 한 명으로 묘사했지만,[230] 대부분은 그의 마지막 몇 년이 권력 초기의 수십 년보다 덜 성공적이었다는 데 동의한다.[332] F. M. 포위크의 저서(1947년과 1953년 출판)는 수십 년 동안 에드워드에 대한 표준 연구가 되었으며, 그의 치세의 업적과 정의 및 법에 대한 그의 초점을 칭찬하는 데 있어서 대체로 긍정적이었다.[335] 1988년, 마이클 프레스위치는 그의 정치 경력에 초점을 맞춘 왕에 대한 권위 있는 전기, 여전히 그를 동정적으로 묘사했지만, 그의 실패한 정책의 결과를 강조했다.[336] 마크 모리스의 전기는 2008년에 출판되었으며, 에드워드의 성격에 대한 더 많은 세부 사항을 이끌어내고, 일반적으로 그의 약점과 덜 유쾌한 특성에 대해 더 가혹한 견해를 취했다.[337]
역사학자들은 에드워드 1세의 치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쟁해 왔다. 마이클 프레스위치는 1988년에 그의 시대의 기준으로 그를 평가하려 시도했다. 프레드 카젤은 그의 정치적 "민감성" 부족과 타협하지 않는 태도에 관해서 특히 이 접근 방식에 동의하며, 분노가 그의 정치적 무기라고 주장한다.[339] 프레스위치는 "에드워드는 강력한 왕이었고, 성공과 실망이 모두 있었지만, 그의 치세는 훌륭했으며,"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시대의 가장 위대한 통치자 중 한 명이었다"고 결론지었다. G. W. S. 배로우는 에드워드의 동시대인들이 "연민, 관대함, 정의, 아량의 의미"를 알고 있었고, 그는 그의 시대의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을 거의 넘지 못했으며, 오히려 매우 복수심에 불타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영국 정치사의 가장 대담한 기회주의자" 중 한 명이라고 반박한다.[340] 존 길링엄은 에드워드가 "효과적인 불량배"였지만 "영국 어떤 왕도 에드워드 1세보다 영국의 국민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영국 국가의 현대 역사가들은 항상 에드워드 1세의 치세를 중추적인 시기로 인식했다."
에드워드 1세에 대한 영국의 역사 서술과 스코틀랜드의 역사 서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342] G.W.S. 배로우는 에드워드가 스코틀랜드의 지도자 부재 상태를 무자비하게 이용하여 왕국에 대한 봉건적 우위를 확보하고 그것을 영국의 소유로 만들었다고 보았다.[343] 웨일스 역사가들은 에드워드의 치세와 정복을 웨일스인의 자신감과 문화에 대한 재앙으로 본다. R. R. 데이비스는 웨일스에서 그의 방식을 본질적으로 식민주의적이라고 보았으며,[344] 깊은 분노와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은" 사회 구조를 만들었다.[345] 아일랜드 역사가 제임스 리든은 13세기와 에드워드의 치세를 아일랜드의 전환점으로 여겼다. 영주는 그의 전쟁을 위해 아일랜드 자원을 추출하고, 평화를 유지하지 못했으며, 게일 아일랜드의 운명이 부활하도록 허용하여 장기간의 갈등을 초래했다.[347]
바리 돕슨은 현대 청중에게 에드워드 1세가 유대인 소수 민족에게 한 행동이 그의 치세에서 가장 관련성이 높은 부분으로 보인다고 말한다.[353] 폴 하이엄스는 그의 "진실한 종교적 편협함"이 유대인에 대한 그의 행동의 중심이라고 보고,[355] 리치몬드는 그를 "선구적인 반유대주의자"로 보고, 로버트 스테이시는 그를 반유대주의 국가 정책을 시행한 최초의 영국 군주로 간주한다.[356]
스코틀랜드 및 프랑스와의 전쟁 비용을 모금하기 위해 에드워드 1세는 1295년 11월에 의회를 소집했다. 막대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서는 사회 각층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이 당시 의회는 각 계층에서 광범위하게 대표를 모았기 때문에, 이후 잉글랜드 의회의 대의제의 모범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19세기 역사가들은 이를 "모범 의회"라고 명명했다.
이 모범 의회에는 백작 7명, 기타 봉건 귀족(남작), 대주교 및 주교 등의 고위 성직자 41명, 수도원장 및 부제장 등의 하급 성직자 70명, 각 주교좌 성당 참사회의 성직자 대표 1명, 각 주교 관구에서 성직자 대표 2명, 각 주의 주 기사 2명씩, 도시 및 자유 도시의 시민 대표 각 2명씩이 소집되었다.
이전의 의회와 비교하면 대의적 요소가 강하고, 사회 각층이 잘 대표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에드워드 1세를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그가 권력을 잡았던 1264년부터 1265년까지의 의회도 광범위한 사회 계층에서 대표를 모았다)와 함께 "영국 의회의 아버지"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때의 의회는 아직 귀족원과 하원으로 분리되지 않았고, 하급 성직자는 도중에 의회에 출석하지 않게 되었다.
참조
[1]
논문
[2]
논문
[3]
논문
[4]
논문
[5]
논문
[6]
논문
[7]
논문
[8]
논문
[9]
논문
[10]
논문
[11]
논문
[12]
논문
[13]
논문
[14]
논문
[15]
논문
[16]
논문
[17]
논문
[18]
논문
[19]
논문
[20]
논문
[21]
논문
[22]
논문
[23]
논문
[24]
논문
[25]
논문
[26]
논문
[27]
논문
[28]
논문
[29]
논문
[30]
논문
[31]
논문
[32]
논문
[33]
논문
[34]
논문
[35]
논문
[36]
논문
[36]
논문
[37]
논문
[37]
논문
[38]
논문
[39]
논문
[40]
논문
[41]
논문
[42]
논문
[43]
논문
[44]
논문
[45]
논문
[46]
논문
[46]
논문
[47]
논문
[48]
논문
[49]
논문
[50]
논문
[51]
논문
[52]
논문
[53]
논문
[54]
논문
[55]
논문
[56]
논문
[57]
논문
[58]
논문
[59]
논문
[60]
논문
[61]
논문
[62]
논문
[63]
논문
[64]
논문
[65]
논문
[66]
논문
[67]
논문
[68]
논문
[69]
논문
[70]
논문
[71]
논문
[72]
논문
[73]
논문
[74]
논문
[75]
논문
[76]
논문
[77]
논문
[78]
논문
[79]
논문
[80]
논문
[81]
논문
[82]
논문
[83]
논문
[84]
논문
[85]
논문
[86]
논문
[87]
논문
[88]
논문
[89]
논문
[90]
논문
[91]
논문
[92]
논문
[93]
논문
[94]
논문
[95]
논문
[96]
논문
[97]
논문
[98]
논문
[99]
논문
[100]
논문
[101]
논문
[102]
논문
[103]
논문
[104]
논문
[105]
논문
[106]
논문
[107]
논문
[108]
논문
[109]
논문
[110]
논문
[111]
논문
[112]
논문
[113]
논문
[113]
논문
[114]
논문
[114]
논문
[114]
논문
[115]
논문
[116]
논문
[116]
논문
[117]
논문
[117]
논문
[118]
논문
[119]
논문
[120]
논문
[121]
논문
[121]
논문
[121]
논문
[121]
논문
[122]
논문
[122]
논문
[123]
논문
[124]
논문
[124]
논문
[125]
논문
[125]
논문
[126]
논문
[126]
논문
[126]
논문
[127]
논문
[128]
논문
[129]
논문
[129]
논문
[130]
논문
[131]
논문
[132]
논문
[133]
논문
[134]
논문
[134]
논문
[135]
논문
[136]
논문
[137]
논문
[138]
논문
[139]
논문
[139]
논문
[139]
논문
[140]
논문
[140]
논문
[140]
논문
[141]
논문
[142]
논문
[143]
논문
[144]
논문
[145]
논문
[146]
논문
[147]
논문
[148]
논문
[149]
논문
[150]
논문
[151]
논문
[152]
논문
[153]
논문
[154]
논문
[155]
논문
[156]
논문
[157]
논문
[158]
논문
[159]
논문
[160]
논문
[161]
논문
[162]
논문
[163]
논문
[164]
논문
[165]
논문
[166]
논문
[167]
논문
[168]
논문
[169]
논문
[170]
논문
[171]
논문
[172]
논문
[173]
논문
[174]
논문
[175]
논문
[176]
논문
[177]
논문
[178]
논문
[179]
논문
[180]
논문
[181]
논문
[182]
논문
[183]
논문
[184]
논문
[185]
논문
[185]
논문
[186]
논문
[187]
논문
[187]
논문
[188]
논문
[188]
논문
[189]
논문
[190]
논문
[190]
논문
[191]
논문
[191]
논문
[192]
논문
[192]
논문
[193]
논문
[193]
논문
[194]
논문
[195]
논문
[196]
논문
[197]
논문
[198]
논문
[199]
논문
[200]
논문
[201]
논문
[202]
논문
[203]
논문
[204]
논문
[205]
논문
[206]
논문
[207]
논문
[208]
논문
[209]
논문
[210]
논문
[211]
논문
[212]
논문
[213]
논문
[214]
논문
[214]
논문
[215]
논문
[216]
논문
[217]
논문
[218]
논문
[219]
논문
[220]
논문
[221]
논문
[222]
논문
[223]
논문
[224]
논문
[225]
논문
[226]
논문
[227]
논문
[228]
논문
[229]
논문
[230]
논문
[231]
논문
[232]
논문
[233]
논문
[234]
논문
[235]
논문
[236]
논문
[237]
논문
[238]
논문
[239]
논문
[239]
논문
[239]
논문
[239]
논문
[240]
논문
[240]
논문
[240]
논문
[241]
논문
[242]
논문
[242]
논문
[243]
논문
[244]
논문
[244]
논문
[245]
논문
[245]
논문
[245]
논문
[246]
논문
[247]
논문
[248]
논문
[249]
논문
[250]
논문
[251]
논문
[252]
논문
[253]
논문
[254]
논문
[255]
논문
[256]
논문
[257]
논문
[258]
논문
[259]
논문
[260]
논문
[261]
논문
[262]
논문
[263]
논문
[264]
논문
[265]
논문
[266]
논문
[267]
논문
[268]
논문
[269]
논문
[270]
논문
[271]
논문
[272]
논문
[273]
논문
[274]
논문
[275]
논문
[276]
논문
[277]
논문
[278]
논문
[279]
논문
[280]
논문
[281]
논문
[282]
논문
[283]
논문
[284]
논문
[285]
논문
[286]
논문
[287]
논문
[288]
논문
[289]
논문
[290]
논문
[291]
논문
[292]
논문
[293]
논문
[294]
논문
[295]
논문
[296]
논문
[297]
논문
[298]
논문
[299]
논문
[300]
논문
[301]
논문
[302]
논문
[303]
논문
[304]
논문
[305]
논문
[306]
논문
[307]
논문
[308]
논문
[309]
논문
[310]
논문
[311]
논문
[312]
논문
[313]
논문
[314]
논문
[315]
논문
[316]
논문
2024
[317]
논문
2003
[318]
논문
1997
[319]
논문
2010
[320]
논문
2009
[320]
논문
2003
[321]
논문
1997
[321]
논문
2003
[322]
논문
1950
[323]
논문
2009
[324]
논문
1950
[325]
논문
1950
[326]
논문
1950
[327]
논문
1880
[327]
논문
1950
[328]
논문
2013
[329]
논문
1950
[330]
논문
1950
[330]
논문
1920
[331]
논문
2013
[332]
논문
1997
[332]
논문
1950
[332]
논문
1991
[332]
논문
2014
[332]
논문
2013
[332]
논문
2008
[333]
논문
1950
[334]
논문
2009
[334]
논문
2013
[334]
논문
2014
[335]
논문
1947
[335]
논문
1962
[335]
논문
2013
[335]
논문
1991
[336]
논문
1997
[336]
논문
1989
[336]
논문
1991
[336]
논문
2004
[337]
논문
2009
[337]
논문
2013
[337]
논문
2009
[338]
논문
1981
[338]
논문
2013
[339]
논문
1991
[340]
논문
1989
[341]
논문
2014
[341]
논문
2024
[341]
논문
2014
[342]
논문
2009
[343]
논문
1965
[344]
논문
2000
[345]
논문
2000
[346]
논문
2000
[346]
논문
2007
[347]
논문
2008a
[347]
논문
2008b
[348]
논문
2000
[348]
논문
1999
[348]
논문
1990
[348]
논문
1983
[348]
논문
1990
[349]
논문
2000
[349]
논문
1999
[349]
논문
1990
[349]
논문
1983
[350]
논문
1990
[350]
논문
1998
[351]
논문
1990
[352]
논문
1990, 1983, 1998
[353]
논문
1992
[354]
논문
1992, 1990
[355]
논문
1974
[356]
논문
1992, 2001
[357]
논문
1992
[358]
논문
2006, 1992
[359]
논문
1996, 2002, 1992, 1998, 1975
[360]
논문
1984
[361]
논문
1997
[362]
논문
1997
[363]
논문
2004b
[364]
논문
2004a
[365]
논문
2008
[366]
논문
2009
[367]
논문
2008
[368]
웹사이트
Edward I king of England
https://www.britanni[...]
[369]
웹사이트
Edward I 'Longshanks', King of England
http://www.thepeerag[...]
2015-11-26
[370]
서적
수상록
Firmin Didot
190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