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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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문왕은 《환단고기》에 기록된 번조선의 왕으로, 기자조선의 후예인 기(箕)가 번한을 병합하여 건국한 번조선의 역대 왕들을 지칭한다. 번조선은 연나라의 침략, 위만의 침입 등 잦은 외세의 위협을 겪었으며, 위만에게 멸망했다. 기씨(箕氏) 왕조는 기(箕) - 기욱(箕煜) - 기석(箕釋) - 기윤(箕潤) - 기비(箕丕) - 기준(箕準)으로 이어진다. 번조선에 대한 기록은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전해지나, 그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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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문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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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현문왕 |
한자 표기 | 顯文王 |
한글 표기 | 현문왕 |
로마자 표기 | Hyeonmun-wang |
개인 정보 | |
휘 | 석(釋) |
출생 | 생년 미상 |
사망 | 기원전 251년 |
재위 기간 | |
재위 | 기원전 290년 ~ 기원전 251년 |
가족 관계 | |
부왕 | 삼로왕(三老王) |
모후 | 미상 |
배우자 | 미상 |
자녀 | 미상 |
왕조 정보 | |
왕조 | 고조선(古朝鮮) |
계보 | 고조선의 38대 군주 |
전임자 | 삼로왕(三老王) |
후임자 | 장평왕(章平王) |
2. 사료
번조선, 특히 기자조선 후예로 알려진 기씨(箕氏)가 다스린 시대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 주요하게 참조되는 사료는 『환단고기』이다.[1][2] 『환단고기』의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단군세기」, 「북부여기」 등에는 기씨 번조선의 건국 과정, 왕위 계승, 주요 활동 및 멸망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1][2][3][5]
이 기록들에 따르면, 연나라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운 수유(須臾) 사람 기(箕)가 후사 없이 사망한 번한 수한(水韓)의 뒤를 이어 기원전 323년 무렵 번조선왕을 칭하며 기씨 왕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1][2] 이후 왕위는 기(箕)를 시작으로 기욱(箕煜), 기석(箕釋), 기윤(箕潤), 기비(箕否)를 거쳐 기준에게로 이어졌다.[1] 특히 기비는 종실 출신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우는 데 협력한 인물로 묘사되며[1][3], 마지막 왕 기준 대에는 연나라 출신 망명객 위만을 받아들였으나 결국 기원전 194년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바다로 망명하여 기씨 번조선은 멸망하였다고 전한다.[1][4][5] 『환단고기』는 위만을 '유적(流賊)'으로 기록하고 있다.[4][5]
다만, 『환단고기』는 현대 역사학계에서 위서(僞書) 논란이 있는 문헌으로, 그 사료적 가치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과 비판적 검토가 요구된다. 따라서 『환단고기』의 기록을 통해 번조선의 역사를 이해할 때는 이러한 논쟁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2. 1. 『환단고기』에 나타난 번조선
『환단고기』는 번조선의 역사를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1] 이 기록에 따르면, 번조선은 기자조선의 후예로 알려진 기(箕)씨에 의해 계승되었다. 연나라의 침입을 막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수유(須臾) 사람 기(箕)는[1] 후사 없이 죽은 번한 수한(水韓)의 뒤를 이어 군권을 대행하다가, 기원전 323년 (무술년)에 스스로 번조선왕(番朝鮮王)을 칭하며 기씨 번조선이 시작되었다.[1][2]기씨 번조선의 왕위는 기(箕) → 기욱(箕煜) → 기석(箕釋) → 기윤(箕潤) → 기비(箕否) → 기준(箕準) 순으로 이어졌다.[1] 이 중 기비(箕否)는 종실이었던 해모수와 협력하여 그가 북부여를 세우고 대권을 잡는 데 기여한 인물로 묘사된다.[1][3]
기씨 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 대에 이르러, 기원전 195년 연나라 출신 망명객 위만을 받아들여 박사(博士)로 삼고 서쪽 변경의 땅을 맡겼다.[5] 그러나 기원전 194년, 기준은 위만에게 속아 공격을 받고 패배하여 결국 바다로 망명하였으며, 이로써 기씨 번조선은 멸망하였다.[1][4][5] 『환단고기』는 위만을 '유적(流賊)'으로 표현하고 있다.[4][5]
2. 1. 1.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경진년에 해인의 아들 산한(山韓)이 즉위했으나 같은 해에 자객에게 해를 입었다. 신사년에는 산한의 아들 수한(水韓)이 즉위했다. 수한 즉위 다음 해인 임오년에 연(燕)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하여 안촌홀(安寸忽)을 공격하고 험독(險瀆)까지 들어왔다. 이때 수유(須臾) 사람 기(箕)가 자제 5천 명을 이끌고 와서 고조선을 도왔으며, 진한(眞韓)과 번한 연합군이 연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또한 군대를 나누어 기성(機城) 남쪽에서도 승리하자,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사과하고 왕자를 인질로 보냈다.[1]무술년에 수한이 후사 없이 죽자, 기(箕)가 명을 받아 군권을 대행했다. 연나라는 이를 축하하는 사신을 보냈으나, 같은 해 왕을 칭하며 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에 기(箕)는 번한의 왕, 즉 번조선왕(番朝鮮王)을 칭하고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번한성(番汗城)에 거주하기 시작했다.[1][2] 기(箕) 이후 번조선의 왕위 계승은 다음과 같다.
왕 | 즉위년 | 주요 내용 |
---|---|---|
기(箕) | 무술년 (군권 대행 및 번조선왕 칭) | 연나라의 침략을 막는 데 공을 세움. 수한 사후 군권 대행 및 번조선왕을 칭함.[1][2] |
기욱(箕煜) | 병오년 | [1] |
기석(箕釋) | 신미년 | 현량(賢良) 270명 선발, 친경(親耕), 연나라의 조공 받음.[1] |
기윤(箕潤) | 경술년 | [1] |
기비(箕丕) | 기사년 | 해모수와 협력하여 북부여 건국 지원. 단군세기에 따르면 해모수가 수유후(須臾侯)였던 기비를 번조선왕으로 삼아 상하 운장(雲障)을 지키게 했다고 함.[1][3] |
기준(箕準) | 경진년 | 위만에게 망명 허용 및 박사 임명, 상하 운장 봉토 하사. 이후 위만에게 패하여 망명.[1][5] |
기준(箕準)의 치세 말기인 병오년(기원전 195년), 연나라의 노관이 한(漢)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흉노로 망명했다. 이때 노관의 부하였던 위만이 무리 천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에 망명을 요청했다. 당시 북부여의 해모수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나 병으로 인해 직접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번조선왕 기준은 여러 실책 끝에 위만을 박사(博士)로 임명하고 서쪽 변경의 상하 운장(雲障) 땅을 떼어주어 살게 했다.[5]
그러나 정미년(기원전 194년), 위만은 기준을 속여 공격했고, 기준은 패하여 결국 바다로 망명하여 돌아오지 못했다. 이로써 기씨 번조선은 멸망하였다.[1][4][5]
2. 1. 2. 단군세기(檀君世紀)
단군세기의 47세 고열가 단군 재위 기간 기록에 따르면, 임술년(기원전 239년)인 고열가 57년에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에 내려와 군사를 일으켰다. 해모수의 선조는 고리국(槀離國)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 해인 계해년(기원전 238년), 고열가 단군은 결국 왕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수도의 길을 걸었다. 이후 오가(五加)가 6년 동안 나라를 공동으로 다스리는 체제가 이어졌다.[3]한편, 이보다 앞선 시점에 종실(宗室) 출신인 대(大) 해모수가 수유(須臾)와 비밀리에 협력하여 옛 수도인 백악산(白岳山)을 습격하여 점령하는 사건이 있었다. 해모수는 스스로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였고, 주변의 모든 지역이 그의 명령을 따르게 되었다. 그는 여러 장수를 임명하였으며, 특히 수유후(須臾侯)였던 기비를 번조선왕으로 승격시켜 상하 운장(雲障) 지역의 방어를 맡겼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북부여가 건국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고구려는 해모수의 출신지였기 때문에 그가 세운 나라도 고구려라고 불리기도 하였다.[3]
2. 1. 3. 북부여기(北夫餘紀)
기원전 195년(병오년), 해모수 재위 45년에 연(燕)의 노관이 한(漢)을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노관의 무리였던 위만은 북부여로 망명하기를 청했으나, 당시 황제였던 해모수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모수는 병환으로 인해 직접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5]한편, 번조선의 왕 기준은 여러 실책을 저지르고 있었는데[5], 그는 결국 위만을 받아들여 박사(博士)로 삼고 상하 운장(雲障) 지역을 떼어 봉토로 주었다.[5][1] 이는 결과적으로 번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같은 해 겨울, 해모수 황제가 붕어(崩御)하고 웅심산(熊心山) 동쪽 기슭에 장사지냈다. 뒤이어 태자 모수리가 즉위했다.[5]
기원전 194년(정미년), 모수리 원년에 번조선왕 기준은 결국 자신이 거두었던 '유적(流賊)'[4] 위만에게 유인되어 패하고 나라를 빼앗겼으며, 마침내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못했다.[5][1] 이로써 번조선은 멸망하였다.
3. 번조선의 건국과 발전
기자조선의 후예로 알려진 기(箕)씨가 번한(番韓)을 병합하면서 번조선이 건국되었다. 기(箕)씨는 수유(須臾) 지역 출신이었으며, 당시 진한(眞韓)과 번한(番韓)은 연나라의 침략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기(箕)씨는 이러한 혼란을 이용하여 번한을 통합하고 스스로 번조선의 왕이라 칭하였다.
4. 번조선의 멸망
(내용 없음)
5. 주요 인물
- 기자조선의 기(箕): 수유(須臾) 사람[2] 또는 기자조선의 후예[2]로 여겨진다. 연나라가 안촌홀과 험독을 침략했을 때, 자제 5천 명을 이끌고 와 진한과 번한을 도와 연나라 군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1]. 마한세가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323년[2] 수한(번조선)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명을 받아 군정을 대행하게 되었다[1]. 이후 군사를 이끌고 번한에 들어가 스스로 번조선의 왕을 칭했다[2]. 이후 번한성에 거주하며 외부의 침입에 대비했다[1]. 이는 기(箕)가 번한을 병합하여 번조선을 건국한 것으로 해석된다[2].
- 기욱(箕煜): 기(箕)의 아들로, 아버지가 사망한 후 번조선 제2대 왕으로 즉위했다[1].
- 기석(箕釋): 기욱(箕煜)의 아들로, 아버지가 사망한 후 번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했다[1]. 즉위한 해에 어질고 능력 있는 인재(현량, 賢良) 270명을 선발했으며, 직접 교외에서 농사를 지으며 농업을 장려하기도 했다. 그의 재위 기간에는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기도 했다[1].
- 기윤(箕潤): 기석(箕釋)의 아들로, 아버지가 사망한 후 번조선 제4대 왕으로 즉위했다[1].
- 기비(箕丕): 기윤(箕潤)의 아들로, 아버지가 사망한 후 번조선 제5대 왕으로 즉위했다[1]. 그는 종실(宗室)인 해모수와 비밀리에 약속하여 옥새를 교환하기로 했으며, 해모수가 북부여의 대권을 장악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1][3]. 다른 기록에는 해모수가 당시 수유후였던 기비를 번조선왕으로 임명했다고 전한다[3].
- 기준(箕準): 기비(箕丕)의 아들로, 번조선의 마지막 왕이다[1].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실정을 저질렀으며[5], 연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로 삼고 서쪽 변경 지역인 상하 운장(雲障)을 지키게 했다[5]. 그러나 기원전 194년 (정미년), 사서에 유적(流賊)으로 기록된 위만에게 속아 나라를 빼앗겼다. 기준은 결국 바다로 망명하여 돌아오지 못했으며[1][4][5], 이로써 기(箕)씨 번조선은 멸망하였다.
- 해모수: 고리국 사람의 후예로[3], 기원전 239년 웅심산에서 군사를 일으켰다[3]. 종실 출신인 그는 기비와 협력하여 옛 도읍 백악산을 점거하고 스스로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며 북부여 건국의 기반을 닦았다[3]. 이후 기비를 번조선왕으로 삼아 상하 운장(雲障) 지역의 방비를 맡겼다[3].
- 위만: 연나라 출신의 인물. 연나라 왕 노관이 한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흉노로 도망가자, 그의 부하였던 위만은 무리를 이끌고 번조선으로 망명했다[5]. 당시 번조선왕 기준은 위만을 받아들여 박사(博士)로 임명하고 서쪽 국경 수비를 맡겼으나[5], 위만은 이를 기회로 세력을 키워 기원전 194년 반란을 일으켜 기준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위만조선을 건국했다[1][4][5].
6. 주요 연표
연도 | 주요 사건 |
---|---|
기원전 323년 | 기자(箕詡) 즉위. 번조선 수립. |
기원전 315년 | 기욱 즉위. |
기원전 290년 | 기석 즉위. |
기원전 284년 | 연(燕)의 침략을 받아 천리(千里)를 물러남. |
기원전 251년 | 기윤 즉위. |
기원전 231년 | 기부 즉위. |
기원전 221년 | 기준(箕準) 즉위. |
기원전 194년 | 위만에게 멸망당함. |
기자(箕詡)는 "처음 번한성(番汗城)에 거(居)했다"고 전해진다. 『위략』에는 "만번한(満番汗)을 경계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번한성(番汗城)은 만번한(満番汗)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거란고전』에는 만관간성(曼灌幹城)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갈석산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된다.[6] 기자(箕詡)는 번조선을 세운 후에도 기자조선이 봉해진 지역에 계속 머물렀다. 기원전 284년, 연(燕)의 진개가 공격해오자, 기록에 따르면 "동호(東胡)는 천여 리(千余里) 골(谷)을 꺾었다"고 한다. 여기서 동호(東胡)는 기자조선 또는 번조선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거란고전』에는 이 세력을 "은(殷)"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기석은 연(燕)의 진개에게 밀려 천리(千里)를 후퇴했으며, 새롭게 자리 잡은 곳은 대릉하 동쪽 의무려산 부근의 진번조선이다.[6]
7. 역사적 의의와 논쟁
번조선, 특히 『환단고기』에서 묘사되는 후기 기(箕)씨 왕조는 한국 고대사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관련 기록의 부족과 해석의 차이로 인해 여러 논쟁이 존재한다. 가장 핵심적인 논쟁은 『환단고기』 자체의 위서 논란으로, 이 책에 상세히 기록된 번조선 후기 역사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는다.[1][2][3][4][5]
주요 논쟁점으로는 기(箕)씨 번조선의 실체와 성격, 위치와 강역 문제, 그리고 위만조선과의 관계 등이 있다. 특히 『환단고기』 기록에 기반하여 기(箕)씨를 수유 사람[2] 또는 기자조선의 후예[2]로 보고, 이들이 기존 번한 세력을 대체하여 왕조를 세웠다는[2] 해석이 제기되지만, 이는 사료적 한계와 맞물려 논란의 대상이 된다. 또한 마지막 왕 기준이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한(韓) 땅으로 남하하는 과정[4][5] 역시 고조선 후기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서 다양한 해석과 논쟁을 낳고 있다. 이러한 논쟁들은 제한된 사료 속에서 번조선의 실체를 규명하려는 노력 과정에서 발생하며, 번조선 역사 연구에 있어 비판적 검토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7. 1. 『환단고기』 위서 논란
『환단고기』는 번조선 후기의 역사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그 내용의 신뢰성에 대한 위서(僞書) 논란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해당 기록을 접할 때는 비판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환단고기』에 나타난 번조선 후기 기(箕)씨 왕조 관련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환단고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하'에 따르면, 번조선의 왕 수한(水韓)이 후사 없이 죽자(무술년), 연나라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운 수유(須臾) 사람 기(箕)가 명을 받아 군령을 대행하다가 번조선왕을 칭하고 번한성(番汗城)에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1] 반면, '마한세가 하'에서는 무술년에 수유 사람 기대(箕代, 기(箕)와 동일인물로 추정)가 군사를 이끌고 번한(番韓)에 들어가 근거하여 스스로 번조선왕이라 칭했다고 기록되어 있어[2], 왕위 계승 과정에 대한 설명에 차이가 나타난다. 일부 해석에 따르면 기(箕)가 번조선왕이 된 것은 기원전 323년으로 추정된다[2].
기(箕)씨 왕조의 계보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1][2]
순서 | 왕명 | 비고 |
---|---|---|
1대 | 기(箕) | 수유(須臾) 출신, 번조선 왕위 계승 (기원전 323년 추정[2]) |
2대 | 기욱(箕煜) | |
3대 | 기석(箕釋) | 현량(賢良) 270명 선발, 연나라 조공 받음[1] |
4대 | 기윤(箕潤) | |
5대 | 기비(箕否) | 해모수의 북부여 건국 협력 및 번조선왕 책봉 기록 존재[3][1] |
6대 | 기준(箕準) | 위만에게 패배하여 왕위 상실 (기원전 194년)[4][5] |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따르면, 5대 왕 기비(箕否)는 종실 해모수와 협력하여 그가 북부여를 세우고 대권을 잡는 데 기여했으며, 이후 해모수에 의해 번조선왕으로 봉해져 상하 운장(雲障)을 지키게 되었다고 한다.[3][1] 이는 기비가 해모수보다 먼저 번조선왕이었다는 '번한세가'의 기록[1]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 대에는 연나라 사람 노관의 망명(병오년, 기원전 195년)과 그의 무리였던 위만의 망명 요청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 「북부여기」 상편에 따르면,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는 위만의 망명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병으로 인해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실책이 많았던 번조선왕 기준이 위만을 박사로 삼고 상하 운장을 떼어 봉해주었다고 한다.[5] 결국 기준은 정미년(기원전 194년)에 유적(流賊) 위만에게 속아 패배하고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못했으며[4][5], 이로써 기(箕)씨 번조선은 멸망하였다.
7. 2. 번조선의 위치와 강역
번조선의 초기 위치는 기자(箕詡)가 처음 거주했다는 번한성(番汗城)으로 여겨진다.[6] 『위략』에는 "만번한(満番汗)을 경계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번한성은 만번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거란고전』에는 만관간성(曼灌幹城)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현재의 갈석산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된다.[6]기원전 284년, 연(燕)의 장수 진개가 침략하여 동호(東胡)가 천여 리(千余里)를 물러났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동호는 번조선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며[6], 『거란고전』에는 "은"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침략으로 당시 번조선을 다스리던 기석(箕釈)은 천리(千里)를 물러나 대릉하 동쪽 의무려산 부근으로 이동하여 진번조선(真番朝鮮) 지역에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게 되었다.[6]
참조
[1]
서적
倭人のルーツと渤海沿岸
星雲社
1997-12-01
[2]
서적
倭人のルーツと渤海沿岸
星雲社
1997-12-01
[3]
서적
倭人のルーツと渤海沿岸
星雲社
1997-12-01
[4]
서적
倭人のルーツと渤海沿岸
星雲社
1997-12-01
[5]
서적
倭人のルーツと渤海沿岸
星雲社
1997-12-01
[6]
서적
倭人のルーツと渤海沿岸
星雲社
1997-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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