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국
1. 개요
고리국은 여러 역사서에 등장하는 고대 국가로, 부여 건국 설화와 관련되어 다양한 이름으로 표기된다. 중국 역사서에서는 '탁리국', '고리국', '색리국' 등으로 기록되었으며,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 관련 설화에 등장한다. 고리국은 부여 건국 설화에서 동명왕이 탈출하여 부여를 건국하기 전의 배경으로 묘사되며, 위치는 현재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부근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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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역사 -
갈사국
갈사국은 22년 갈사왕이 부여에서 분리되어 건국한 소국으로, 압록곡에서 해두국왕을 살해하고 갈사수 가에 도읍을 정했으나 68년 고구려에 항복하여 멸망했으며 정확한 위치는 현재 밝혀지지 않았다. -
부여의 역사 -
북부여
북부여는 고대 부여가 분열된 후 북쪽에 위치하여 고구려와 경쟁하다가 고구려에 흡수되어 멸망한 국가이다. -
예맥 -
고조선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건국설이 널리 알려진 고대 국가로, 단군, 기자, 위만과 관련된 건국 신화가 전해지며, 기원전 4세기 이후 고대 국가로 성장했으나 기원전 108년 한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
예맥 -
동예
동예는 오늘날 원산에서 강릉에 이르는 동해안 중부 지역에 위치했던 부여족 계통의 군장국가로, 옥저와 함께 한사군에 속했으며, 매년 음력 10월에 무천이라는 축제를 열었고, 단궁, 과하마, 반어피 등의 특산물이 있었다. -
한국의 역사 -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간 지속된 시기로, 강제 병합, 경제적 착취, 정치적 억압, 문화적 동화 정책 등이 특징이며, 3·1 운동과 같은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고, 위안부 문제 등 심각한 인권 유린이 있었으며, 현재까지도 다양한 논의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
한국의 역사 -
국가재건최고회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수립된 군사 정권 기구로, 헌법 일부 조항 효력 정지, 국회 해산 등 권위주의적 통치를 펼치며 경제 개발을 추진했으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비판을 받았고, 1963년 제3공화국 출범과 함께 해산되었다.
2.1. 중국 역사서
후한 시대 왕충의 논형에는 '탁리'(橐離)라고 적혀 있으며, 부여 건국자인 동명왕의 가장 오래된 기록이기도 하다. 논형 권 2, 지험(吉験) 편에는 탁리국 (橐離國중국어) 에 대한 묘사가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제30권 오환선비동이전에는 고리국 (高離國중국어) 에 대한 묘사가 있다.
3. 건국 설화
부여 건국 설화에는 동명왕이 고리국 왕의 시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리국 왕은 동명이 활을 잘 쏘는 것을 보고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죽이려 했다. 이에 동명은 고리국을 탈출, 남쪽으로 도망가 엄호수를 건너 부여를 건국했다.
동명의 부여 건국 설화는 여러 역사서에 비슷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나라 이름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 왕충의 《논형(論衡)》 (서기 60년): 탁리국(橐離國)
* 진수의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 부여 (3세기): 고리국(高離國)
* 범엽의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부여 (5세기): 북이(北夷)의 색리국(索離國)
백제가 고리국에서 나왔다는 기록도 있다.
* 7세기 북사(北史): "백제국은 대체로 마한의 족속이며 색리국에서 나왔다"
* 815년 일본 신센쇼지로쿠(新撰姓氏録): "백제는 부여 땅의 탁근국 왕의 시녀에서 나왔다"
3.1. 부여 건국 설화
부여의 건국 설화에 따르면, 부여를 건국한 동명왕은 고리국 왕의 시녀가 낳은 아들이다. 고리국 왕은 동명이 활을 잘 쏘았기 때문에 장차 나라를 빼앗길까 염려하여 동명을 죽이려 하였다. 이에 동명은 고리국을 탈출하여 남쪽으로 도망가다가 엄호수를 건너 부여를 건국하였다.
동명의 부여 건국 설화는 다양한 역사서에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나라 이름은 각 문헌별로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 사료 | 나라 이름 | 내용 |
|---|---|---|
| 왕충의 《논형(論衡)》 (서기 60년) | 탁리국(橐離國) | 북쪽 오랑캐 탁리국 왕의 시녀가 임신하였다. 왕이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달걀 같은 기운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 아들을 낳았는데, 왕이 돼지우리에 버렸으나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겨 말에 깔려 죽게 했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의심하여 어미에게 아이를 거두어 종처럼 천하게 기르도록 하였다. 이름을 동명이라 하고 말을 기르도록 명하였다. 동명은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은 동명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은 달아나 남쪽으로 엄호수에 이르렀다.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흩어져서, 쫓던 병사들은 건널 수가 없었다. 동명은 도읍을 정하고 부여의 왕이 되었다. |
| 진수의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 부여 (3세기) | 고리국(高離國) | 옛날 북쪽에 고리국이 있었는데, 그 왕의 시녀가 아이를 갖자 왕은 그녀를 죽이려 했다. 시녀는 "하늘에서 닭알 같은 기운이 내려와서 제가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자 왕은 속았다. 그 후 아이를 낳자 왕은 그 아이를 돼지 우리에 버렸지만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살려냈다. 그 후 왕은 아이를 말 우리로 옮겼지만 말들이 입김을 불어 살려냈다. 왕은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아이를 다시 어머니에게 데려가 기르게 하고 이름을 동명이라고 지었다. 동명이 성장하여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숙해지고 성격이 포악해지자 왕은 동명이 자신의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워 그를 죽이려 했다. 동명은 나라에서 도망쳐 남쪽으로 시엄수에 이르렀다. 그가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이 물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은 흩어졌고, 뒤쫓아온 군사들은 물을 건너지 못했다. 동명은 부여 땅에 도읍을 정하고 그곳의 왕이 되었다. |
| 범엽의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부여 (5세기) | 북이(北夷)의 색리국(索離國) | 5세기에 정리된 것으로 기록 자체는 《삼국지》 기록보다 오래되었다. |
시라토리 구라키치에 의하면, 탁리(橐離)·삭리(索離)는 퉁구스어로 "검다"는 의미이며, 시엄(施掩)·엄표(掩淲)는 퉁구스어 아무르의 대음으로 큰 강의 의미이며, 삭리는 흑수부에서 송화강이 흑룡강과 합류하는 곳을 중심으로 한 나라로, 강은 흑룡강을 가리킨 것이 틀림없다고 한다. 간즈겅([하얼빈사범대학])은 부여의 위치를 지린성농안현에 둔 다음, 그 북쪽으로서, 눈강 하류와 쑹화강 중류 이북의 땅, 즉 쑹눈 평원에 탁리의 거주지가 있었다고 보고, 헤이룽장성자오위안현의 [바이진바오 문화]나, 그것이 대표하는 문화 유형이 탁리의 문화라고 한다.
3.2. 백제 건국 설화와의 관계
백제가 고리국에서 나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7세기에 편찬한 북사(北史)에는 "백제국은 대체로 마한의 족속이며 색리국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815년 일본 천황의 명으로 편찬한 신센쇼지로쿠(新撰姓氏録)에는 "백제는 부여 땅의 탁근국 왕의 시녀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사』에는 백제왕이 "삭리국(索離国)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百濟之國,蓋馬韓之屬也,出自索離國。…至夫餘而王焉。…王姓餘氏,…魏延興二年,其王余慶始遣其冠軍將軍…上表自通,云:「臣與高麗,源出夫餘。」zh-Hant
『삼국사기』는, 백제는 전한 성제의 홍가 3년(기원전 18년)에 시작되었고, 백제왕은 북부여에서 와서 왕이 되었다고 하지만, 북부여는 삭리국(索離国)이나 고리국(槀離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삼국사기』는 북부여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삭리국이나 고리국은 부여가 아니다. 중국 사료는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至夫餘而王)", "왕이 부여의 땅에 있었다(王夫餘之地)"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에서 부여의 땅에 와서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4. 위치
고리국의 위치는 부여의 북쪽 끝 지역에 해당하는데, 눈강의 동쪽, 쑹화강의 북쪽에 있는 평원 지대로 비정하고 있다. 이 위치는 오늘날 중국 헤이룽장성의 하얼빈시 부근이다. 그러나 동명신화의 탁리(槀離)를 부여에 앞서 실재한 것으로 보고 고리-부여-고구려의 순서로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논리는 매우 어색하다는 지적이 있다.
4.1. 통설
한서 상층-망해둔 문화는 연대가 이미 전국시대에서 서한시대에 이르며, 분포 범위는 한서 하층보다 넓으면서 주거지에서는 좁쌀이 나와 농경의 존재를 시사한다. 검자루맞추개돌이 나와 청동단검이 응용되었다고 추정되는 망해둔-한서 상층문화를 고리국 문화로 보기도 한다.
고리국의 위치는 오늘날 만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눈강의 동쪽, 쑹화강의 북쪽에 있는 평원 지대로서, 송눈평원의 동부와 송요평원의 북쪽 지역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 위치는 오늘날 중국 헤이룽장성의 하얼빈시 부근이다. 유태용에 의하면, 5세기 중엽 부여가 고구려와 물길 등 주변 세력으로부터 침략을 받자, 부여의 일부 유민들이 나하를 넘어 부여의 옛 선조들이 살았던 고리국 지역으로 되돌아가서 두막루라는 나라를 건국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유태용의 학설에 따르면, 오늘날 중국의 하얼빈 시 지역에는 고리국 - 부여 - 두막루로 이어지는 부여계 국가가 기원전 5세기?부터 서기 726년까지 각 시대 별 다른 국가명으로 약 1,300년가량 존재했으며, 결국 8세기 초에 발해로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명신화의 탁리(槀離)를 부여에 앞서 실재한 것으로 보고, 고리-부여-고구려의 순서로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논리는 매우 어색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동명과 주몽의 건국신화가 북방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신화라는 논리를 따른다면 이 내용에 집착하여 고리국의 위치를 부여(길림시)의 북방 어딘가에 굳이 비정하려는 논리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백금보 문화와 한서 2기 문화가 동명설화의 고리국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지 못하고 있다.
4.2. 소수설
한서 상층-망해둔 문화는 연대가 전국시대에서 서한시대에 이르며, 분포 범위는 한서 하층보다 넓으면서 주거지에서는 좁쌀이 나와 농경의 존재를 시사한다. 검자루맞추개돌이 나와 청동단검이 응용되었다고 추정되는 망해둔-한서 상층문화를 고리국 문화로 보기도 한다.
고리국의 위치는 오늘날 만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눈강의 동쪽, 쑹화강의 북쪽에 있는 평원 지대로서, 송눈평원의 동부와 송요평원의 북쪽 지역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 위치는 오늘날 중국 헤이룽장성의 하얼빈시 부근이다. 유태용에 의하면, 5세기 중엽 부여가 고구려와 물길 등 주변 세력으로부터 침략을 받자, 부여의 일부 유민들이 나하를 넘어 부여의 옛 선조들이 살았던 고리국 지역으로 되돌아가서 두막루(豆莫婁)라는 나라를 건국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유태용의 학설에 따르면, 오늘날 중국의 하얼빈 시 지역에는 고리국 - 부여 - 두막루로 이어지는 부여계 국가가 기원전 5세기?부터 서기 726년까지 각 시대 별 다른 국가명으로 약 1,300년가량 존재했으며, 결국 8세기 초에 발해로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명신화의 탁리(槀離)를 부여에 앞서 실재한 것으로 보고, 고리-부여-고구려의 순서로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논리는 매우 어색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동명과 주몽의 건국신화가 북방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신화라는 논리를 따른다면 이 내용에 집착하여 고리국의 위치를 부여(길림시)의 북방 어딘가에 굳이 비정하려는 논리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백금보 문화와 한서 2기 문화가 동명설화의 고리국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지 못하고 있다.
4.3. 비판적 시각
동명신화의 탁리(槀離)를 부여에 앞서 실재한 것으로 보고, 고리-부여-고구려 순서로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논리는 매우 어색하다는 지적이 있다. 동명과 주몽의 건국신화가 북방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신화라는 논리를 따른다면, 이 내용에 집착하여 고리국의 위치를 부여 (길림시)의 북방 어딘가에 굳이 비정하려는 논리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백금보 문화와 한서 2기 문화가 동명설화의 고리국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