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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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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경 한반도 북부에 건국되었다고 전해지는 고대 국가이다. 단군 신화를 바탕으로 건국되었으며, 초기에는 단군조선으로 불렸다. 이후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으로 이어졌다는 설이 있으나, 위만조선의 실존만이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고조선은 비파형 동검, 탁자식 고인돌, 미송리형 토기 등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중국과 교역하며 성장했다. 기원전 4세기에는 연나라와 대립하기도 했으며, 위만조선은 한나라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고조선의 건국 연대와 통치 기간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며, 단군릉과 참성단 등 관련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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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지도
기원전 108년의 고조선
기원전 108년의 고조선
기본 정보
데모님
통치자
역사
시대 구분
계승 국가예맥
삼한
한사군

2. 국호

원래 국호는 '조선'이었으나, 고려 충렬왕 때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서 위만이 찬탈한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칭하였다. 오늘날에는 1392년에 건국된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부르며, 위만조선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모두 합쳐 고조선으로 본다.[8]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고조선의 군주에 따라 둘로 나누어 단군이 다스린 조선을 단군조선, 기자가 다스린 조선을 기자조선이라 하고, 각각 전조선과 후조선으로 구분하여 불렀다. 이러한 구분법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널리 사용되었다.[8]

'조선'이라는 국호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가장 오래된 설은 《사기집해》에 인용된 장안(張晏)의 견해로, 그는 조선이 강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 신채호는 조선의 어원이 숙신(肅愼)에서 나온 것이며, 원래 명칭은 주신(珠申)이라 주장하였다. 고조선의 초기 도읍인 아사달(阿斯達)을 한자로 옮긴 것이 조선이라는 견해도 있다. 또한, 조선의 글자 뜻을 그대로 해석하여 '땅이 동쪽에 있어 아침 해가 선명하다(地在東表 朝日鮮明, 지재동표 조일선명)'라는 의미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8]

3. 역사

고조선의 건국 신화는 단군, 기자, 위만과 관련된 세 가지 주요 설화로 나뉜다.[8]

백두산의 천지,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전해지는 곳


삼국유사에는 단군 신화가 기록되어 있다.[9] 이에 따르면 하늘 임금의 아들과 곰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은 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했고, 기원전 1122년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왕위에 앉혔다고 한다.[9] 제왕웅기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하늘 임금 환인의 아들 환웅백두산에 신시를 건설했고,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를 원하자 쑥과 마늘만 먹으며 100일 동안 동굴에서 지내라고 했다. 호랑이는 포기했지만 곰은 웅녀가 되었고,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10]

단군 이야기는 신화로 여겨지지만,[11] 고조선 건국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신화적으로 종합한 것으로 보인다.[12] 서경덕과 강인구(2002)는 하늘을 숭배하는 청동기 시대 부족과 곰을 숭배하는 신석기 시대 부족의 통합을, 이기백(1984)은 '단군왕검'이 고조선의 역대 지도자들이 사용한 칭호였다고 보았다.

삼국유사, 제왕웅기, 동국통감, 조선왕조실록은 단군이 기원전 2333년경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기록한다.[13] 역사적 자료에 따라 연대가 다르지만, 모두 요 임금의 재위 시대로 보고 있다.[14]

기자는 상나라 인물로, 기원전 1122년 상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한반도로 피난하여 기자조선을 건국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시대에는 기자를 중심으로 한 국가적인 제사 의식이 발달했다.[21] 동사강목은 기자의 활동과 업적을 상세히 서술하고, 한서의 팔금(犯禁八條)은 사유 재산을 보호하는 계층적인 사회의 존재를 시사한다.[2]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정하며,[17][21] 전국시대 혼란을 피해 이주한 진나라 시대 이주민들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19]

위만은 기원전 195년 한나라를 피해 한반도 북부로 망명,[9] 왕검성(현재 평양 추정)을 수도로 삼고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 왕이 되었다.[9][20]

고조선 신화와 역사는 단군,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22] 조선 중기에는 기자조선신라가 중요하게 여겨졌지만, 1930년대 신채호의 영향으로 단군 이야기가 더 인기를 얻었다.[24] 신채호는 단군을 한국 ''민족''과 첫 국가의 창시자로 보았다.[27]

기원전 7세기 연의 동북 지역 개척과 관자[15]의 기록을 통해 고조선이 무역으로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4세기 고조선은 연과 전쟁을 벌일 정도로 발전했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통틀어 고조선이라 한다. 단군조선은 전설적인 존재이며, 실증적인 역사학에서는 기자조선위만조선만을 가리킨다. 13세기 삼국유사의 "고조선"은 단군조선을 가리키며, 현재 한국에서 고조선은 주로 단군조선을 의미한다. 위만조선은 실존이 확정되었다.

중국일본 학계는 고조선을 14세기 이후 이씨 조선에 대해 부르는 말이며, 세 왕조를 통칭하는 명칭으로 이해하지만,[61] 한국 학계는 중국계인 기자조선위만조선을 고조선에서 제외하려 한다.

3. 1. 단군조선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요임금 즉위 50년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일연은 요임금은 무진년에 즉위하였으므로 즉위 50년은 정사년이 되므로 정확한 시기가 의심스럽다는 주석을 함께 실었다.[80]동국통감》〈외기〉에는 “동방은 애초에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모셔 단군이라 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으니 요임금 무진년이다. 처음엔 평양에 도읍하였고 나중엔 백악으로 옮겼다.”[81]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왕운기》 역시 건국 연도를 무진년으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사기》에도 단군의 건국을 다루고 있으나 즉위 연도를 밝히고 있지는 않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삼국유사》를 근거로 단군 조선의 설립을 기원전 2333년으로 보고 있고[82] 현행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들 역시 이를 바탕으로 기원전 2333년을 단군 조선의 건국 시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한편,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부터 시점을 잡아도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역사서의 건국 시점에 대한 서술이 실제와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83]

단군 신화환웅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문명을 가진 외래 세력과 으로 대표되는 토착 세력의 결합을 통해 고조선이 건국된 것으로 이해된다.[87] 한편으로는 조선으로 지칭되는 불특정한 소규모 지역 집단의 집합체가 초기 고조선의 사회 모습이었다고 보기도 한다.[88]

단군 신화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단군고기》가 인용되었다. 《삼국유사》의 설명은 《고기》(古記)에 기록된 단군의 건국과 전해 내려오는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으나, 《고기》의 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단군 신화의 내용은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거하였으며, 그 아들인 단군이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왕권의 정통성과 국가의 존엄성을 수식하려는 당시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단군을 둘러싼 신화에 따르면, 하늘 임금의 아들과 곰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은 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했다.[9] 전설에 따르면, 하늘 임금 환인에게는 아들 환웅이 있었는데, 그는 백두산으로 내려와 신시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그러자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찾아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환웅은 그들에게 쑥과 마늘만 먹으면서 100일 동안 동굴 속에서 지내면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100일이 되기 전 호랑이는 포기하고 동굴에서 나왔다. 반면 곰은 참고 견디다 아름다운 여자 웅녀가 되었다. 환웅은 후에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10]

단군 이야기는 신화로 간주되지만,[11] 고조선 건국과 관련된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을 신화적으로 종합한 것으로 여겨진다.[12]

3. 1. 1. 초기

고조선은 기원전 7세기의 기록으로 알려진 《관자》에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사서에 처음으로 등장한다.[90] 그러나 현대에는 《관자》가 기원전 4세기경 직하학궁의 학자들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며, 이에 따라 고조선이 중원에 알려진 시기는 최소한 기원전 4세기 이전으로 좁혀진다. 또한 춘추전국시대에 성립된 기록인 《산해경》에는 조선이 연나라의 동쪽, 바다의 북쪽에 있다고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특정한 국가를 지칭한다기보다는 요동지방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 집단을 통칭한 것으로 본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 동검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 집단이 존재하였는데, 이들이 큰 세력으로 통합되면서 고조선이라는 고대 국가가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통합한 집단의 시조설화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기원전 7세기경 고조선으로 추정되는 정가와자 집단의 강역.


기원전 4세기 중반에는 연나라와 관련된 사료인 《전국책》에서 조선이 연나라 동쪽의 유력한 세력으로 언급된다. 적어도 이 무렵에 고조선이 고대 국가로 성장하여 전국 시대 중국의 국가와 대등한 외교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 말에는 연나라와 분쟁이 일어나 고조선 측이 선제 공격을 꾀하였다가 중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중국은 종주국인 주나라가 쇠퇴하고 각 지의 제후들이 왕을 칭하고 있었는데 연나라가 기원전 323년에 왕을 칭하자 고조선의 군주도 ‘왕’이라 칭했다고 전한다.

기원전 3세기경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한 고조선의 영역.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 연나라가 세력을 확대하면서 고조선은 연나라의 공격을 받아 광대한 영토를 상실하고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위략에 따르면 연나라의 장수 진개의 침입으로 고조선은 2,000여 리의 땅을 빼앗겼으며, 만번한(滿潘汗)을 경계로 하게 되었고, 연나라가 고조선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에는 요동군(遼東郡)이 설치되었고 장성도 쌓았다고 한다. 이때 고조선이 상실하였다는 지역은 랴오닝성 일대로 보이며,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이 패배로 고조선이 요동 지방을 상실하였다고 본다.

기원전 221년에 (秦)이 중국을 통일하고 기원전 214년에 만리장성을 건설하자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복속하였다. 그러나 직접 조회하는 것은 거부한 것으로 보아 표면적인 복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왕의 뒤를 이은 준왕(準王) 시기 진나라에 내란이 발생하고 뒤이어 유방과 항우가 전쟁을 벌이는 등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중국 유민들이 대거 고조선으로 이주하였다. 기원전 202년에 중국을 통일한 전한은 연·진 시기의 장성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를 포기하고 요동의 옛 장성을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3. 2. 위만조선

위만조선의 강역. 압록강 부근까지 진출하였다.


기원전 195년, 연나라 지역에 한나라가 임명한 노관흉노로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연나라 지역이 혼란에 빠지자,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위만은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는데, 상투를 틀고 고조선의 복색을 하였다고 한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 리 땅을 통치하게 하고 변방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기원전 194년, 위만은 중국 군대가 침입한다는 거짓 구실로 수도 왕검성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이때부터 '''위만조선'''이라 불린다. 위만의 출신에 대해서는 연나라가 정복한 고조선 지역 주민(고조선 출신)이라는 주장과 연나라 출신 유력자라는 주장이 있다.

위만은 유이민 집단과 토착 세력을 함께 지배 체제에 참여시켜 양측 간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또한 중국 문물, 특히 철기를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진번, 임둔 등 주변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는 진국 등 남쪽 나라들이 한나라에 조공하는 것을 막고 중계 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여 한나라와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濊君) 남려(南閭) 세력은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이 무렵 한나라는 동방 진출을 본격화하면서 위만조선과 긴장 관계가 고조되었다. 양측은 외교적 절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기원전 109년, 한무제는 양복순체 등에게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이끌고 위만조선을 공격하게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위산을 사신으로 보내 외교적 절충을 재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전쟁이 재개되었고, 장기화되면서 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 이탈되었다. 조선상 역계경(歷谿卿)은 화친을 건의했으나 거부되자 2,000여 호를 이끌고 진국으로 갔다. 노인(조선상), 한음(상), 이계상 삼(니谿상), 왕겹(장군)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내분 와중에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長)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大臣) 성기가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기원전 108년 왕검성이 함락되어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한나라는 고조선 영역에 한사군(낙랑군, 임둔군, 현도군, 진번군)을 설치하였고, 많은 고조선인이 남쪽으로 이주하였다.[91]

위만조선 시기에는 철기가 더욱 보급되어, 기원전 3∼2세기부터 철제 농기구와 무기가 제작되는 등 철기 문화가 사회 발전과 생산력 증가를 가져왔다.[92]

4. 도읍지

삼국유사》에서는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왕검이 처음에는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였으나 이후 백악산아사달로 옮겨 1500년 간 나라를 다스렸으며, 이후 주나라 때 기자가 조선왕에 책봉되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8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70년대 이전까지 고조선의 도읍지를 랴오닝성이라 주장하였으나, 주체사상 강화 이후에는 오늘날의 평양시가 고조선의 도읍지라고 주장하며 단군릉이 평양시에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학의 입장 변화는 정치적 영향에 따른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다.[88]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지배적인 학설인 중심지 이동설에 따르면, 고조선은 초기에 랴오둥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기원전 3세기 무렵 연나라의 침입을 받아 영토를 대거 상실하고 평양 일대로 중심지가 이동하였다고 한다.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인 위만조선의 도읍지 왕검성은 오늘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평양시에 있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중국 랴오닝성 지역에 있었다는 소수설도 있다.

5. 정치

위만조선의 관직으로는 박사(博士), 대부(大夫), 상(相), 대신(大臣), 장군(將軍), 비왕(裨王) 등이 있었으나, 그 구체적인 성격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91]

이러한 관직을 가진 이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은 한나라와의 외교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자신의 무리 2천 호를 이끌고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이탈하기도 했다.[91] 이계상(尼谿相) 삼(參) 등도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들은 일정한 세력 집단의 대표로서 중앙 정부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위만조선에는 여러 명의 상이 있었고, 이름으로 보아 다수가 고조선 인이었다. 상의 휘하 집단에 대해 왕실의 통제력이 미쳤을 것으로 보이나, 각 집단 내부의 일은 자치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역계경 등의 집단적인 이탈 행위가 이를 뒷받침한다.[91]

왕은 기본적으로 가장 큰 집단의 수장이었고, 위만조선 왕실은 그 직할 집단이었다. 국가의 주요 결정은 이들 상들이 참가한 회의체에서 결정되었다. 이러한 정치 구조는 왕권이 강력하지 못했고, 중국식 제도에서 비롯된 관직명이 부분적으로 보이지만 관료 조직은 발달하지 않았으며, 자치 집단들의 연맹체와 같은 형태였다는 것을 보여준다.[91]

유력한 수장 휘하에는 여러 촌락이 귀속되어 있었다. 수장은 사적으로 우월한 경제적·군사적 힘을 바탕으로 촌락들을 규합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으며, 지배 계급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위만조선은 이러한 유력한 수장들을 통합하여 성립되었으며, 왕권 아래에서 수장들은 '상'으로서 상당한 자치권을 가진 세력 집단을 대표하였다. 고조선의 중심을 이룬 이들 집단의 외곽에는 피복속 촌락 공동체들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삼국 초기의 정치 구조와 연관성을 가진다.[91]

5. 1. 단군왕검

단군왕검은 고조선 사회의 제사장이자 군주로서, '''단군'''은 대제사장적인 성격을, '''왕검'''은 국가를 통치하는 대군주의 의미를 띠고 있다고 해석된다.[94] 즉, 제정일치 사회의 지도자이다.[95] 방언의 분포와 비교언어학적으로 살펴볼 때에도 제사장과 정치적 지도자를 함께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96]

5. 2. 단군 신화



단군 신화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이 가장 오래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단군고기》가 인용되었다. 《삼국유사》의 설명은 《고기》(古記)에 기록된 단군의 건국과 전해 내려오는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으나, 《고기》의 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단군 신화의 내용은,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거하였으며, 그 아들인 단군이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왕권의 정통성과 국가의 존엄성을 수식하려는 당시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고조선의 왕은 매년 그의 조상신인 천신께 제사를 지냈을 것이며, 그때 베풀어진 의식은 단군 신화의 내용을 재현하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제의에 고조선을 구성하던 모든 집단의 장들이 참여해 정치적 통합을 강화하고 결속력을 높였을 것이다. 곧 단군 신화는 고조선 당대의 정치 이데올로기였고, 그 제의는 정치적 집회의 기능을 지닌 것이었다.

13세기 후대 한국 작품인 『삼국유사』에 따르면,[9] 하늘 임금의 아들과 곰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은 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했고, 기원전 1122년 주 무왕이 기자(箕子)를 왕위에 앉히면서 기자에게 왕위를 계승했다고 한다.[9] 비슷한 이야기는 『제왕운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하늘 임금 환인에게는 아들 환웅이 있었는데, 그는 백두산으로 내려와 신시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그러자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찾아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환웅은 그들에게 쑥과 마늘만 먹으면서 100일 동안 동굴 속에서 지내면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100일이 되기 전 호랑이는 포기하고 동굴에서 나왔다. 반면 곰은 참고 견뎌 아름다운 여자 웅녀가 되었다. 환웅은 후에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10]

단군 이야기는 신화로 간주되지만,[11] 고조선 건국과 관련된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을 신화적으로 종합한 것으로 여겨진다.[12] 이 신화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이 있다. 서경덕과 강인구(2002)는 단군 신화가 하늘을 숭배하는 침략적인 청동기 시대 부족과 토착적인 곰을 숭배하는 신석기 시대 부족이 통합되어 고조선을 건국한 데 기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조선의 건국을 다루는 단군 신화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문명을 가진 외래 세력과 으로 대표되는 토착 세력의 결합을 통해 건국된 것으로 이해된다.[87]

5. 3. 참성단

마니산 꼭대기에 있는 참성단은 단군왕검이 쌓았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 않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강화의 지형이 천하의 요새이기 때문이며, 예로부터 마이(摩利)·혈구(穴口) 등은 하늘과 인연이 깊다고 전해진다. 또한 개국신화의 등장인물인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도 마니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전해진다.

6. 사회 및 문화

사마천사기반고한서에 따르면, 고조선에는 '8조법'이라는 법률이 있었다. 이 법은 권력층이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8조법은 가부장 중심의 계급 사회로서, 사유 재산을 중요하게 여기고 응보주의에 따른 형법을 가졌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현재는 그중 3개의 조항만이 전해지고 있다.


  •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그 죄를 갚는다.
  •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죄를 용서받고자 하는 사람은 한 사람마다 50만 전을 내야 한다.


당시 고조선 사회는 계급 분화가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다. 현재 전해지는 3개 조항에서 화폐 개념, 노비의 존재, 사유 재산 보호 조치를 확인할 수 있다. 지배층 무덤에서 출토되는 화려한 부장품은 계급 분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촌락에서는 공동체적 관계가 여전히 작용하고 있었다.

고조선 사회 계층은 귀족, 촌락의 일반민, 노비로 나눌 수 있다. 귀족은 노예, 토지, 재화 등 경제적 기반을 가지면서 촌락 공동체를 대표하는 수장(首長)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노비는 상당수 존재하였으나, 대규모 노예경영은 발달하지 않았다. 노예제 경영이 발달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화폐 경제 발달, 도시 번창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산 활동을 담당한 이들은 촌락의 일반민이었다. 이들은 낮은 농업 생산력, 가뭄이나 홍수 등에 따른 생산 불안정성, 철제 농기구 부족 등으로 인해 소농(小農) 단위의 자립성을 유지할 수 없었으며, 촌락 단위로 상호 의존하여 생산과 소비생활을 하는 공동체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기원전 2000년경에는 채색과 조각 디자인이 특징인 새로운 토기 문화가 발달했다. 이들은 정착된 공동체 생활에서 농업을 실천했으며, 아마도 가족 씨족으로 조직되었을 것이다. 직사각형 오두막과 고인돌 무덤이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었다. 청동 단검과 거울이 발굴되었으며, 이 시대의 작은 성곽 도시 국가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2][46] 이 지역에서 발견된 고인돌과 청동 단검은 한국 고유의 것이며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중국에서 발견되는 몇몇 고인돌은 대부분 산둥성에 있다.[47]

기원전 2000년경부터 기원전 400년경까지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거대한 고인돌이 나타난다.[51][52] 기원전 900년경에는 사회 계층 분화가 심화되면서 매장 풍습이 더욱 정교해진다. 한국과 만주 지역의 고인돌은 서 있는 돌들이 수평으로 놓인 돌판을 받치고 있는 형태이며, 동아시아 다른 지역보다 한국에 더 많이 분포한다. 다른 새로운 매장 방식으로는 돌로 만든 석관(돌로 안을 댄 지하 매장실)과 토기 항아리 관이 있다. 고인돌과 석관에서 발견된 청동기, 토기, 옥 장신구는 이러한 무덤이 엘리트 계층을 위해 마련되었음을 시사한다.[2][53]

기원전 6세기경에는 고인돌 무덤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그릇과 잔에도 미세한 철분이 풍부한 점토로 만들어지고 매끄럽고 윤이 나는 표면이 특징인 연마된 적색 토기가 등장한다.[2]

1964년 중국과 북한의 공동 발굴을 통해 요동반도에서 강상무덤(崗上墓)과 누상무덤(樓上墓)이 발견되었다. 누상무덤은 1958년 발굴 이전에 이미 발견되었다.[54][55] 강상무덤과 누상무덤은 고조선 지역 귀족들의 돌무지무덤으로 여겨진다. 일각에서는 이 무덤들을 고조선 시대에 노예제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보기도 하지만,[2][56] 다른 학자들은 그러한 결론을 내리기에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주장한다.[57]

6. 1. 대외 교역

《관자》에 따르면 고조선은 무늬가 있는 가죽(文皮)이 특산물로 유명했으며,[97] 제나라 등 중국과 활발하게 교역하였다.[97]

6. 2. 의복

위만은 상투를 틀었고, 한족의 복식과는 다른 복장을 하였다.[98]

7. 고고학적 연구

비파형 동검과 탁자식 고인돌, 미송리형 토기는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추정할 수 있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다만, 비파형 동검의 분포 및 유형에 따라 고조선이 아닌 동호의 문화에 속하는 지역도 있어 주의해야 한다.[99]

기원전 2000년경에는 채색과 조각 디자인이 특징인 새로운 토기 문화가 발달했다. 이들은 정착된 공동체에서 농업을 실천했으며, 아마도 가족 씨족으로 조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직사각형 오두막과 점점 더 커지는 고인돌 무덤이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었다. 청동 단검과 거울이 발굴되었으며, 이 시대의 작은 성곽 도시 국가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도 존재한다.[2][46] 이 지역에서 발견된 고인돌과 청동 단검은 한국 고유의 것이며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중국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은 대부분 산둥성에 있다.[47]

무문토기 시대(기원전 1500년~기원전 300년)에는 이전의 빗살무늬 토기가 평범하고 조잡한 토기로 대체되었는데, 이는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한국으로 이주한 새로운 인구의 영향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2] 이러한 유형의 토기는 일반적으로 벽이 더 두껍고 다양한 모양을 보이는데, 이는 가마 기술의 향상을 나타낸다. 이 시기는 "한국 청동기 시대"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청동 유물은 기원전 7세기까지 비교적 드물고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 시작은 일반적으로 기원전 1000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원전 13세기에서 8세기까지 다양한 추정치가 존재한다.[48] 한국 청동기 문화는 요녕과 만주에서 유래했지만, 특히 의례용품에서 독특한 유형과 스타일을 보여준다.[49]

기원전 7세기까지 만주, 몽골 동부, 시베리아, 그리고 스키타이 청동 스타일의 영향을 받은 청동기 문화가 한반도에서 번성했다. 한국 청동기는 이웃 청동기 문화보다 아연 함량이 더 높다. 매장지에서 가장 자주 발견되는 청동 유물은 주로 기하학적 무늬로 장식된 검, 창, 단검, 작은 종, 거울 등이다.[2][50]

고조선의 발전은 청동기 기술의 채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의 독자성은 독특한 유형의 청동검, 또는 "비파형 동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비파형 동검은 요녕, 허베이, 만주 지역에서 한반도까지 발견되며, 이는 고조선의 영토 존재를 시사한다. 고조선의 "비파형" 동검은 중국에서 발견되는 검 유물과는 확연히 다르다.

1962년 말 또는 1963년 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최용건중화인민공화국(중국)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에게 중국 동북부의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을 통해 고조선의 발상지를 찾아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다. 한동욱(동북사범대학 부학장)은 당시 최용건과 저우언라이의 대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71]

8. 역사서의 내용

고조선의 역사는 여러 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 내용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일부 사서는 학계에서 위서로 판단하기도 하며, 진서라 하더라도 신화적 요소가 많은 경우도 있다.



기자는 상나라 시대 인물로, 기원전 1122년 상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한반도로 피난하여 기자조선을 건국했다고 전해진다. 기자조선은 가장 오래된 중국 기록인 『삼국지』에 언급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와 같은 후대의 한국 문헌에서 더욱 발전되어 전해진다. 고려 시대 중엽에는 기자를 중심으로 한 국가적인 제사 의식이 발달했고,[21] 1778년에 편찬된 『동사강목』은 고조선에서 기자의 활동과 업적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기자조선 관련 기록에는 『한서』에 기록된 팔금(犯禁八條)이 언급되는데, 이는 사유 재산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계층적인 사회의 존재를 시사한다.[2] 그러나 많은 현대 학자들은 고고학적 증거와 시대착오적인 역사적 증거의 모순으로 인해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정한다.[17][21]

조선 중기 무렵, 기자조선신라는 중요하게 여겨졌지만, 고조선과 고구려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23] 그러나 1930년대에는 신채호의 역사관의 영향으로 단군 이야기가 더 인기를 얻었다.[24] 신채호단군을 한국 ''민족''의 창시자이자 첫 번째 한국 국가(''국'')의 창시자로 보았으며,[27] 최남선단군을 중국과 일본의 황제보다 더 높은 위치에 두었다.[31]

서진 시대에 최보가 저술한 고금주(古今注)에 따르면, 공후인(箜篌引) 또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라는 시가 고조선 기원이라고 한다.[58]

8. 1. 삼국유사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는 단군 신화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환웅웅녀의 결합으로 단군이 탄생하고,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9]

《삼국유사》에 따르면, 하늘 임금 환인의 아들 환웅백두산으로 내려와 신시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자, 환웅은 쑥과 마늘만 먹으며 100일 동안 동굴에서 지내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호랑이는 도중에 포기했지만, 곰은 웅녀라는 아름다운 여자가 되었다. 환웅과 웅녀는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10]

단군 신화는 신화로 여겨지지만,[11] 고조선 건국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신화적으로 종합한 것으로 보인다.[12]

8. 2. 제왕운기

고려 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승휴가 저술한 《제왕운기》 〈전조선편(前朝鮮篇)〉에 의하면, 환인의 서자 환웅천부인 세 개와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에 내려와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고,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고 사람이 되게 하여 단수신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이는 흔히 알려진 삼국유사의 단군조와는 다른 이야기로, 단군 전설에 다양한 판본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9]

8. 3. 삼국사절요

조선 시대에 쓰여진 삼국사절요 외기(外記)에 따르면, 동방 아홉 종족에 군장이 없었으나 신인(神人) 단군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와 국호를 조선(朝鮮)이라고 하였다. 건국 연도는 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 서기 전 2333년, 요(堯) 25년)이었고,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했다가 뒤에 백악(白岳)으로 도읍을 옮겼고,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乙未)에 단군이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고 한다.

8. 4. 사기

사기》〈조선열전〉에는 위만조선에 대한 기록만 남아 있다.[59]

8. 5. 레지 사료

장 밥티스트 레지스는 프랑스 예수회 소속 신부로, 청나라 북경에 선교하러 왔다가 강희제의 명으로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 제작에 참여했다. 그는 당시 중국한국의 정보를 편지 형식으로 본국 예수회에 보냈는데, 이를 모은 사료가 <18세기 프랑스 지식인이 쓴 고조선, 고구려 역사>(한글) 또는 <레지 고조선 사료: Regis’s historical records on Old Joseon, RHROJ>(영문)이다.[100]

이 사료는 단군과 고조선을 신화처럼 서술한 삼국유사와 달리 사실적이고 정치적인 사건을 기록했다. 레지스가 Coree로 기록한 고조선과 중국 (夏), (商) 왕조와의 전투 장면이 간략하게나마 담겨 있다. <레지 사료>는 고조선이 유구한 나라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거의 유일한 ‘해외 작성 사료(historical record of Old Joseon produced by non-Korean writers)’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100] 이 사료는 대일항쟁기의 한학자이자 역사가인 김교헌이 집필한 <신단민사> 및 <신단실기>와도 교차 검증된다.

8. 6. 기타 자료

허목의 《동사(東史)》와 《태원선우씨세보(太原鮮于氏世譜)》에는 기자조선의 왕과 마한의 왕이 선우씨였다는 기록이 있다.[1] 《청장관전서》에는 기자조선의 왕에 대한 기록이 있다.[1]

환단고기와 같은 위서에는 기자조선에 대한 내용이 없거나, 단군조선의 존속 기간에 대한 기록이 《규원사화》와 다르다.[2]

9. 건국 연대 및 치세

일반적으로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고 알려져 있고 단기도 그에 따르고 있으나, 사서에 기록된 단군조선의 건국 연대와 치세에 관한 기록은 다양하다.[8]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통감》, 《조선왕조실록》의 묘사에 따르면, 단군은 기원전 2333년경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한다.[13] 역사적 자료에 따라 연대가 다르지만, 모두 전설적인 요 임금의 재위 시대(전통적인 연대: 기원전 2357년?~기원전 2256년?)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는 단군이 전설적인 요 임금 즉위 50년에 즉위했다고 하고, 『세종실록』은 즉위 원년이라고 하며, 『동국통감』은 25년이라고 한다.[14]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88] 제왕운기에는 1028년 또는 1038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계산하면 1048년이 되어 착오로 추정된다.[88] 세종실록에는 유사눌이 《세년가》를 인용하여 1048년이라 주장했다.[88] 응제시주에는 단군의 후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한 것이 1000년 이상이라고 했다.[88] 역대세년가, 동사강목, 기년아람에는 단군의 수명이 1048세라고 했다.[88] 동국통감에는 단군 후손들이 역대로 다스린 햇수가 1048년이라고 했다.[88] 여암전서에는 재위 년수가 1048년이라고 했다.[88] 규원사화에는 1205년으로 기록되어 있다.[88] 이처럼 치세 기간은 문헌에 따라 차이가 커서 정확한 통치 기간을 추정하기는 어렵다.

사서별 단군 치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사서치세 기간 (년)비고
삼국유사1500평양성(미상)+아사달(1500년)+장당경(미상)
제왕운기1028 또는 1038실제 계산 시 1048년. 착오로 추정.
세종실록1048유사눌이 《세년가》 인용
응제시주1000 이상단군의 후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
역대세년가, 동사강목, 기년아람-단군의 수명은 1048세
동국통감1048단군 후손들의 역대 햇수
여암전서1048재위 년수
규원사화1205-



이기백국가가 형성되려면 청동기 시대가 필요하며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12세기라고 하였다. 고조선 건국 연대는 기원전 10세기로 보는 수밖에 없으며 한국인의 조상이 신석기 시대에 국가를 건국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뛰어다니고 학교에 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68]

노태돈은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했다는 것은 중국의 요(堯)와 동시대에 한국에 국가가 존재하고 한국 역사가 중국 역사에 뒤지지 않을 만큼 길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며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한국 상고 시대의 기년을 늘어뜨린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69]

송호정은 서거정 등이 저술한 『동국통감』이 중국 북송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참고하여 요(堯)의 즉위를 기원전 2357년으로 설정하고, 요(堯)의 즉위 25년 후인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설정했던 것이며, 건국 연도에 구체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고, 건국 연도로서 의미가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70]

9. 1. 건국 연대

《삼국유사》는 요와 같은 시기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일연은 요임금 즉위 50년 경인년(기원전 2311년)을 단군의 원년으로 기록했지만, 요임금 즉위 50년은 경인년이 아니라 정사년(기원전 2284년)이라고 주석을 달았다.[80]제왕운기》는 《본기》(本紀)를 인용하여 요와 같은 시기인 무진년(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고려사》 〈백문보전〉에는 백문보공민왕에게 단군 이후로 3,600년이 되었음을 주장하는데, 그 시기는 '''기원전 2240년''' 부근이다. 《동국통감》은 《고기》(古紀)를 인용하였는데, 그 내용은 《제왕운기》와 거의 같다. 하지만 사론을 통해 《고기》의 기록이 틀렸다고 비판하며 요 즉위 25년인 무진년(기원전 2333년)이라고 정정하고 있다. 《동국통감》 저술을 전후한 시기에 고조선의 건국 연대가 무진년(기원전 2333년)으로 공인되는 양상이 보이는데, 학계에서는 요 원년 갑진년(기원전 2357년)과 단군 원년 무진년(기원전 2333년)에서 명나라의 건국(1368년)과 조선의 건국(1392년)과의 기간이 동일하게 3725년 차이가 나도록 연대를 비정한 것으로 본다. 이를 통해 상고대 요, 단군의 즉위와 명 홍무제, 조선 태조의 즉위가 천명의 조화에 따른 것이라 미화하려는 의도이다.[101]

조선 《성종실록》의 양성지 상언 내용 중에는 단군 이후로 3,900년이 되었음을 주장하는데, 그 시기가 '''기원전 2420년'''이 된다. 심언광은 《단군사(檀君祠)》라는 시에서 단군의 건국 연대를 '''요임금 갑자년(기원전 2337년)'''이라 기록했다. '''갑자년(기원전 2457년)''' 개기(開基)설이 있는데, 최명길의 시 등에 한마디 나오며, 그 의미는 명백치 않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삼국유사》를 근거로 단군 조선의 설립을 기원전 2333년으로 보고 있고[82] 현행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들 역시 이를 바탕으로 기원전 2333년을 단군 조선의 건국 시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부터 시점을 잡아도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역사서의 건국 시점에 대한 서술이 실제와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83]

이기백국가가 형성되려면 청동기 시대가 필요하며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12세기라고 하였다. 고조선 건국 연대는 기원전 10세기로 보는 수밖에 없으며 한국인의 조상이 신석기 시대에 국가를 건국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뛰어다니고 학교에 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68]

노태돈은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했다는 것은 중국의 요(堯)와 동시대에 한국에 국가가 존재하고 한국 역사가 중국 역사에 뒤지지 않을 만큼 길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며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한국 상고 시대의 기년을 늘어뜨린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69]

송호정은 서거정 등이 저술한 『동국통감』이 중국 북송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참고하여 요(堯)의 즉위를 기원전 2357년으로 설정하고, 요(堯)의 즉위 25년 후인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설정했던 것이며, 건국 연도에 구체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고, 건국 연도로서 의미가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70]

9. 2. 치세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88] 제왕운기에는 1028년 또는 1038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계산하면 1048년이 되어 착오로 추정된다.[88] 세종실록에는 유사눌이 《세년가》를 인용하여 1048년이라 주장했다.[88] 응제시주에는 단군의 후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한 것이 1000년 이상이라고 했다.[88] 역대세년가, 동사강목, 기년아람에는 단군의 수명이 1048세라고 했다.[88] 동국통감에는 단군 후손들이 역대로 다스린 햇수가 1048년이라고 했다.[88] 여암전서에는 재위 년수가 1048년이라고 했다.[88] 규원사화에는 1205년으로 기록되어 있다.[88] 이처럼 치세 기간은 문헌에 따라 차이가 커서 정확한 통치 기간을 추정하기는 어렵다.

사서별 단군 치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사서치세 기간 (년)비고
삼국유사1500평양성(미상)+아사달(1500년)+장당경(미상)
제왕운기1028 또는 1038실제 계산 시 1048년. 착오로 추정.
세종실록1048유사눌이 《세년가》 인용
응제시주1000 이상단군의 후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
역대세년가, 동사강목, 기년아람-단군의 수명은 1048세
동국통감1048단군 후손들의 역대 햇수
여암전서1048재위 년수
규원사화1205-


9. 3. 주요 인물

위만조선 시기의 주요 인물로는 , 성기, 왕겹, 장항, , 한음, 노인 등이 있다.[91] 이들은 위만조선의 관직을 가졌던 인물들로,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91]

한나라와의 외교 정책에서 왕과 의견이 맞지 않아 휘하의 2천 호를 이끌고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탈해 간 조선상(朝鮮相) 역계경이나,[91] 한나라와의 전쟁 중 전선을 이탈하여 수도 함락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이계상(尼谿相) 등은 일정한 세력 집단의 대표로서 중앙정부에 참여한 이들이 지닌 관직의 이름으로 여겨진다.[91]

9. 4. 기타

장 밥티스트 레지스(EN: Jean-Baptiste Régis)는 1698년 예수회 선교사로 청 제국에 파견된 프랑스 지식인으로, 당시 청 황실 서고의 사료를 통해 고조선의 역사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8]

고조선 건국 신화에는 단군, 기자, 위만과 관련된 세 가지 주요 신화가 있으며, 한국 신화#건국 신화에서 주요하게 다룬다.[8]

삼국유사에 따르면, 하늘 임금의 아들과 곰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은 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했고, 기원전 1122년 무왕기자를 왕위에 앉히면서 기자에게 왕위를 계승했다고 한다.[9] 전설에 따르면, 하늘 임금 환인에게는 아들 환웅이 있었는데, 백두산으로 내려와 신시를 건설했다.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자, 쑥과 마늘만 먹으며 100일 동안 동굴에서 지내면 사람이 된다고 했다. 호랑이는 포기했지만 곰은 견뎌 웅녀가 되었고, 환웅은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10] 단군 이야기는 신화로 간주되지만,[11] 고조선 건국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신화적으로 종합한 것으로 여겨진다.[12]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통감, 조선왕조실록은 단군이 기원전 2333년경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묘사한다.[13] 자료마다 연대가 다르지만, 모두 전설적인 요 임금의 재위 시대(기원전 2357년?~기원전 2256년?)로 본다.[14]

기원전 7세기, 연은 동북 지역을 개척했다. 관자에 따르면,[15] 이 시대 고조선은 무역으로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에 연과 전쟁을 벌일 정도로 발전했다.

위만(衛滿)은 기원전 195년, (漢)을 피해 중국 동북부 연(燕)의 군사 장교로서 한반도 북부로 망명했다.[9] 왕검성(王儉城)을 수도로 삼았는데, 현재 평양 지역으로 추정된다.[9] 3세기 중국 문헌인 삼국지의 위략에는 위만이 고조선(古朝鮮)의 준왕(準王)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9][20]

고조선 신화와 역사는 단군,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22] 조선 중기, 기존 역사학자들은 한국의 기원을 중국 난민으로 추적하여 한국 역사를 중국과 관련된 왕조들의 역사로 간주했다. 기자조선신라는 중요하게 여겨졌지만, 고조선과 고구려는 그렇지 않았다.[23] 그러나 1930년대 신채호의 영향으로 기자 건국 이야기는 단군 이야기보다 인기가 적어졌다.[24] 신채호 등은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의 영향을 받았다.[25] 신채호에게 단군은 한국 ''민족''의 창시자이자 첫 번째 한국 국가(''국'')의 창시자였으며, 한국 역사의 필수적인 출발점이었다.[27] 한국 국수주의 역사 서술은 고대 한국을 중국과 일본에 필적하는 "신과 영웅"의 황금기로 묘사한다.[29]

관자는 고조선이 발해만 주변에 위치하고 중국 제(齊)와 무역을 했다고 기록했다.[37] ''장자'', ''산해경'', ''사기''는 초기 기록 중 일부이며, 기원전 195년부터 사기에서 국가로 언급하기 시작할 때까지 고조선을 지역으로 언급한다.[38]

기원전 4세기까지 초기 청동기 시대 "성곽 도시 국가" 지역에서 정치 구조가 명확한 국가들이 발전했는데, 고조선은 한반도에서 가장 발전했다.[2] 동맹이나 군사 정복을 통해 다른 도시 국가들을 통합하며 확장했다. 고조선이 발전하며 지도자는 한(Khan)으로 불렸는데, 주나라 전통을 따른 것으로 연(燕) 지도자와 같은 시기였다.[39]

기원전 300년경 고조선은 연나라와 전쟁 후 서쪽 영토를 잃었지만, 이는 고조선이 연과 전쟁을 벌이고 2000 리(800킬로미터) 영토를 잃고도 살아남을 만큼 컸음을 보여준다.[41] 이 무렵 수도를 평양 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2]

기원전 2000년경, 채색과 조각 디자인이 특징인 새로운 토기 문화가 발달했다. 정착 생활에서 농업을 실천했고, 가족 씨족으로 조직되었을 것이다. 직사각형 오두막과 고인돌 무덤이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었다. 청동 단검과 거울이 발굴되었으며, 작은 성곽 도시 국가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2][46] 이 지역 고인돌과 청동 단검은 한국 고유이며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중국에서는 산둥성에 몇몇 고인돌이 발견된다.[47]

최보가 서진 시대에 저술한 고금주에 따르면, 공후인 또는 공무도하가라는 시가 고조선 기원이라고 한다.[58]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公無渡河 "사랑하는 님, 강을 건너지 마세요."
  • 公竟渡河 "하지만 님은 결국 강을 건넜네."
  • 墮河而死 "그리고 강물에 빠져 죽었네."
  • 當奈公何 "이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통틀어 고조선이라 한다. 단군조선은 전설이며, 실증적 역사학에서는 기자조선과 위만조선만 가리킨다. 13세기삼국유사』의 "고조선"은 위만조선, 기자조선에 대응하는 단군조선을 가리키며, 한국에서 고조선은 보통 단군조선을 가리킨다. 기자조선은 전설상의 창작 국가, 실존 왕조 반영 전승, 사실이라는 등 견해가 엇갈린다. 위만조선은 실존이 확정되었다. 사마천의 『사기』는 위만조선을 "조선"이라 불렀지만, 국호가 잊혀 낙랑군 조선현(평양) 명칭을 사용했을 뿐, 실제 국호는 아니라는 설도 있다.

고조선은 시대순으로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포함한다고 여겨지지만, 단군조선은 조선 외 자료 근거가 부족한 신화·전설로 여겨진다.[59] 중국은 단군조선은 없고, 기자조선 및 위만조선은 중국 번속국·지방 정권이며, 조선의 역사에 포함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60]

중국, 일본 학계는 "고조선이란 14세기 이후 이씨 조선 왕조에 대해 부르는 말이며,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통틀어 부르는 명칭이다"라는 이해가 일반적이다.[61]

궁와키 준코는 "고조선"을 "조선반도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 총칭으로,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가리키지만, 단군조선 실존 증거는 없고, 실증적 역사학에서는 존재가 의심받는다. 13세기삼국유사』는 단군조선을 고조선이라 칭하며, 『주몽』은 이 개념을 계승하여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무시한다"고 설명한다.[64]

한국 학계는 조선반도 청동기 사용이 기원전 10세기 전후이므로, 기원전 24세기경 고조선 건국은 불가능하다고 한다.[65]

중국 역사 교과서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고조선 영역에 여러 종족이 흩어져 살았다", "위만(연나라 출신 망명자)가 위만조선 건국"이라 기술하여, 위만조선 이전 조선반도에 정체가 없고, 외적 요인으로 고조선이 형성되었다는 인식을 심어준다.[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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