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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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혜통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의 승려로, 출가 전 수달의 뼈를 보고 깨달음을 얻어 승려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당나라에 건너가 무외삼장에게 가르침을 받고 신라로 돌아와 신문왕의 악성 종기를 치료하고 신충봉성사 건립을 주도했다. 또한, 혜통은 교룡을 물리치는 설화의 주인공으로, 당나라에서 공주의 병을 고치고 신라로 돌아와 정공을 해하려던 교룡을 쫓아냈으며, 효소왕 때 군사를 물리치고 공주의 병을 고쳐 국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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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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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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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정보 | |
이름 | 혜통 |
한자 표기 | 慧通 |
출생 | 612년 |
사망 | 686년 |
활동 시기 | 7세기 |
국적 | 신라 |
속성 | 김씨 (金氏) |
출가 | 625년 (14세) |
주요 활동 | 당나라 유학, 문무왕의 신임 |
주요 저서 | 십문화쟁론소 (十門和諍論疏) |
스승 | 원광 |
2. 생애와 행적
혜통은 수달 사건을 계기로 출가하여 승려가 된 후, 당에 유학하여 무외삼장에게 불법을 배우고 문무왕 5년(665) 신라로 돌아왔다.[1] 신라로 돌아온 후에는 신문왕의 병을 고쳐주고 신충을 위한 절을 짓게 하는 등 여러 행적을 남겼다.
혜통은 신문왕의 악성 종기를 고쳐주었는데, 왕에게 전생의 악연으로 인해 병이 생긴 것이라 설명하고 신충을 위해 신충봉성사를 지을 것을 권했다. 신문왕은 혜통의 말에 따라 절을 지었고, 절이 완성되자 하늘에서 신충이 왕에게 감사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신충봉성사는 이후 사천왕사, 봉덕사 등과 함께 국가의 관리를 받는 주요 사찰이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혜통이 당나라와 신라에서 교룡을 쫓아낸 이야기가 전해진다. 혜통은 당나라 황실 공주의 병을 고치기 위해 교룡을 쫓아냈고, 신라로 도망친 교룡을 다시 쫓아내 백성들을 구했다. 이 과정에서 혜통과 친분이 있던 정공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지만, 혜통은 효소왕의 공주를 치료해주고 정공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또한 기장산으로 도망친 교룡에게 불살계를 주어 악행을 멈추게 했다.
2. 1. 출가 전
혜통의 행적은 《삼국유사》에만 수록되어 있는데, 《삼국유사》는 혜통의 씨족이 누구인지조차 자세하지 않다고 적고 있어 신분이 낮은 출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그가 승려가 된 계기에 대해, 일찍이 남산 기슭 서쪽의 은천동 어귀에 살던 그가 집 앞의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아 살을 발라내고 그 뼈는 동산에 버렸는데, 다음 날 보니 그 뼈가 사라지고 없었다. 핏자국을 따라 가보니 수달의 뼈는 제 살던 굴 속에서 다섯 마리의 새끼를 끌어안고 웅크리고 있는 것이었다. 혜통은 이에 크게 충격을 받고 한참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이 일을 계기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2. 2. 당나라 유학
혜통은 남산 기슭 서쪽의 은천동 어귀에 살았는데, 집 앞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아 살을 발라내고 그 뼈는 동산에 버렸다. 다음 날 뼈가 사라져 핏자국을 따라가 보니, 수달의 뼈는 굴 속에서 다섯 마리의 새끼를 끌어안고 있었다. 혜통은 이에 크게 충격을 받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이후 혜통은 당(唐)에 들어가 무외삼장(無畏三藏, 637-735)에게 인결(印訣)을 받고, 문무왕 5년(665) 견당사 정공(鄭恭)과 함께 귀국하였다.[1] 일설에는 혜통의 진언종이 무외삼장이 아닌 인도승 불공삼장(不空三藏: 705-774)에게서 유래했다고도 한다.[1]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나라로 간 혜통은 선무외삼장에게 제자로 받아줄 것을 3년이나 청했지만, 선무외는 "야만스런 동쪽 오랑캐 출신은 불법의 그릇이 못 된다"며 거절했다. 혜통은 화로를 머리에 이고 뜰에 서 있었는데, 이마가 터지면서 벼락 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선무외는 화로를 내리고 손으로 터진 자리를 어루만지며 주문을 외워 낫게 했다. 이후 선무외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고, 혜통의 이마에는 왕(王) 자 모양의 흉터가 남았다.
2. 3. 신라 귀국과 활동
혜통은 《삼국유사》에만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유사》는 혜통의 집안에 대해 자세히 적지 않아 신분이 낮은 출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혜통이 승려가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혜통은 남산 기슭 서쪽 은천동 어귀에 살았는데, 집 앞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아 살을 발라내고 뼈는 동산에 버렸다. 다음 날 뼈가 사라져 핏자국을 따라가 보니, 수달 뼈가 제 살던 굴에서 새끼 다섯 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혜통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후 혜통은 당(唐)에 들어가 무외삼장(無畏三藏, 637-735)에게 인결(印訣)을 받고, 문무왕 5년(665) 견당사 정공(鄭恭)과 함께 신라로 돌아왔다.[1] 일설에는 혜통의 진언종이 무외삼장이 아닌 인도승 불공삼장(不空三藏, 705-774)에게서 유래했다고도 한다.[1]
《삼국유사》에 따르면, 혜통은 당나라에서 선무외삼장에게 3년간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청했으나, 선무외는 "야만스런 동쪽 오랑캐 출신은 불법의 그릇이 못 된다"며 거절했다. 혜통은 화로를 머리에 이고 뜰에 섰고, 이마가 터지며 벼락 치는 소리가 나자 선무외가 와서 화로를 내리고 손으로 터진 자리를 어루만지며 주문을 외워 낫게 했다. 이후 선무외는 혜통을 제자로 받아들였고, 혜통의 이마에는 왕(王) 자 모양 흉터가 남았다.
신라로 돌아온 혜통은 신문왕의 악성 종기를 고쳐주었다. 혜통은 신문왕에게, 왕이 전생에 재상으로 신충이라는 백성을 잘못 재판하여 종으로 삼은 업보 때문에 신충이 앙갚음으로 악성 종기를 앓게 한 것이라며, 신충을 위해 절을 지어줄 것을 요청했다. 신문왕은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를 지었고, 낙성식 날 하늘에서 신충이 왕에게 감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신충봉성사는 사천왕사, 봉덕사 등과 같이 성전(成典)을 두어 관리하는 주요 사찰로 존속하였다.
2. 4. 혜통항룡 설화
《삼국유사》에는 혜통과 관련된 항룡 설화가 전해진다.효소왕은 혜통과 정공의 친분을 알고 혜통을 잡아오도록 군사를 보냈다. 혜통은 왕망사 지붕에서 군사들을 기다리다 주사가 든 병을 꺼내 병목에 붉은 줄을 긋고, 병사들에게 목을 보라고 했다. 병사들 목에는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혜통이 "내가 이 병의 목을 부러뜨리면 너희 목도 잘릴 것이다. 어쩔 테냐?"라고 하자, 병사들은 두려워 돌아갔다. 효소왕은 병사들의 목에 그어진 붉은 줄을 보고 혜통을 내버려 두었다.[1]
이후 효소왕의 공주가 병에 걸리자, 효소왕은 혜통에게 병을 고치도록 명했다. 공주가 완치된 후, 혜통은 정공이 교룡의 농간으로 억울하게 죽었다고 호소하여 정공의 처자를 풀어주고, 혜통을 국사로 삼았다. 한편, 기장산으로 달아난 교룡이 웅신으로 둔갑하여 백성들을 괴롭히자, 혜통은 기장산으로 가서 교룡에게 불살계를 주어 악행을 멈추게 했다. 부산 기장산 장안사의 청룡등은 혜통에게 쫓겨난 교룡이 숨어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1]
2. 4. 1. 당나라에서의 항룡
혜통이 당나라에 있을 때, 스승 선무외의 추천으로 당나라 황실에 불려가 공주의 병을 고치게 되었다. 병의 원인은 한 마리의 교룡(蛟龍)이었다.[1] 혜통에게 쫓겨 신라로 달아난 교룡은 문잉림에 머물며 많은 사람의 목숨을 해쳤고, 신라의 사신 정공에게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혜통은 귀국하여 다시 교룡을 쫓아냈다.[1] 교룡은 혜통을 신라로 불러들인 정공에게 앙심을 품고 정공의 집 앞에 버드나무로 변신해 살았다.[1] 정공은 이 버드나무를 몹시 아낀 나머지 신문왕 사후 그의 능원을 짓느라 필요한 길을 닦을 때도 그 길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던 버드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다.[1] "버드나무를 베느니 차라리 내 목을 베라"는 정공의 말을 전해 들은 효소왕은 노하여 "제 원하는 대로 해주라"며 정공을 죽이고 그가 살던 집터마저 파묻어버렸다.[1] 정공을 죽게 만든 뒤 교룡은 기장산으로 가 버렸다.[1]2. 4. 2. 신라에서의 항룡
혜통이 당나라에 있을 때, 스승 선무외의 추천으로 당나라 황실에 불려가 공주의 병을 고치게 되었다. 병의 원인은 교룡(蛟龍)이었다. 혜통에게 쫓겨 신라로 달아난 교룡은 문잉림에 머물며 많은 사람의 목숨을 해쳤고, 이를 신라의 사신 정공으로부터 전해 듣고 혜통은 귀국을 결심하여 다시 교룡을 쫓아냈다.[1]교룡은 혜통을 신라로 불러들인 정공에게 앙심을 품고 정공의 집 앞에 버드나무로 변신해 살았다. 정공은 이 버드나무를 몹시 아낀 나머지 신문왕 사후 그의 능원을 짓느라 필요한 길을 닦을 때도 그 길 한가운데에 있던 버드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다. "버드나무를 베느니 차라리 내 목을 베라"는 정공의 말을 전해 들은 효소왕은 "제 원하는 대로 해주라"며 정공을 죽이고 그가 살던 집터마저 파묻어버렸다. 정공을 죽게 만든 뒤 교룡은 기장산으로 가 버렸다.[1]
정공이 혜통과 평소 친분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던 조정에서는 혜통도 잡아 없애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혜통에게도 군사를 보냈다. 혜통은 왕망사 지붕 위에서 군사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주사가 든 병을 병사들 앞에 내보이며 "내가 하는 것을 봐라" 하고는 병목에 붉은 줄을 긋고, 병사들에게 그들의 목을 보게 했다. 병사들의 목에는 모두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혜통은 병사들에게 다시 "내가 이 병의 목을 부러뜨리면 너희 목도 잘려나갈 것이다. 어쩔 테냐?"라고 외쳤고, 병사들은 두려워 돌아오고 말았다. 병사들의 목에 그어진 붉은 줄을 본 효소왕도 끝내 혜통을 어쩌지 못하고 내버려 두었다.[1]
이후 효소왕의 공주가 갑자기 병이 들었고 효소왕은 혜통에게 병을 고칠 것을 명했다. 공주가 완치되고 난 다음에 혜통은 정공이 악독한 교룡의 농간으로 억울하게 죽었다고 호소, 정공의 처자를 풀어주고 혜통을 국사로 삼았다. 한편 기장산으로 달아난 교룡이 산에서 웅신으로써 백성들에게 패악을 부리고 있음을 알게 된 혜통은 기장산으로 가서 교룡을 타일러 불살계를 주었고, 이후 교룡은 악행을 부리지 않게 되었다. 부산 기장산의 장안사에 있는 청룡등은 이때 혜통에게 쫓겨간 교룡이 숨어 있었다는 전승이 있다.[1]
3. 사후 평가 및 영향
전하는 바에 따르면 혜통이 진주의 의곡사를 지었다고 한다.
4. 기타
진주의 의곡사는 혜통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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