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데 카르타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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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안 데 카르타헤나는 16세기 초 마젤란의 세계 일주 항해에 참여한 인물로, 항해 경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안 로드리게스 데 폰세카 주교의 영향으로 감찰관 및 산 안토니오 호의 선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마젤란의 독단적인 항해 방식에 반발하여 갈등을 겪었으며, 결국 반란을 주도했으나 진압당해 무인도에 버려지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그의 반란은 마젤란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에 대한 저항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반역자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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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데 카르타헤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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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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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카스티야 |
사망일 | 약 1520년 |
사망 장소 | 파타고니아 |
직업 | 탐험가 |
알려진 이유 | 마젤란 탐험대 선박의 선장, 1520년 반란의 주모자 |
2. 초기 생애
후안 데 카르타헤나는 구 카스티야의 역사적인 수도인 부르고스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와의 무역을 규제하는 카사 데 콘트라타시온의 영향력 있는 수장이었던 후안 로드리게스 데 폰세카 대주교의 측근이자 "조카"였다.[1][2] 일부 역사가들은 이 "조카"라는 표현을 카르타헤나가 폰세카의 사생아임을 나타내는 완곡어법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마젤란의 탐험 당시 그의 나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결혼했으며 딸 도냐 카탈리나를 두었다.
카르타헤나는 통상원의 최고 책임자였던 후안 로드리게스 데 폰세카 주교의 조카 또는 서자였으며,[1][2] 폰세카는 플란데런 지방과의 양모 교역으로 번영한 부르고스 주교였다.[3] 폰세카는 부르고스 상인이자 후에 마젤란에게 출자한 크리스토발 데 아로를 비롯한 부르고스의 이권과 관련된 인맥을 구축하고 있었다.[3]
폰세카는 당시 플란데런 지방과의 양모 교역으로 번영한 부르고스 주교로, 부르고스 상인이자 후에 마젤란에게 출자한 크리스토발 데 아로를 비롯한 부르고스의 이권과 관련된 인맥을 구축하고 있었다.[3]
3. 마젤란 함대 합류
1519년, 마젤란이 세계 일주 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카르타헤나는 폰세카의 주선으로 함대의 재무 및 거래 업무를 담당하는 총감찰관으로 취임했다.[4] 또한, 공동 사령관이었던 루이 팔레이루가 출발 직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에 의해 함대에서 제외되면서 카르타헤나는 후임 준사령관으로 승격되었다.[5]
함대의 중추는 폰세카의 측근으로 채워졌다. 카르타헤나와 같은 카스티야 출신인 안토니오 멘도사가 재무관 겸 빅토리아 호 선장, 안토니오 데 코카가 회계관, 가스파르 데 케사다가 콘셉시온 호 선장으로 취임했다. 함대 내 포르투갈인을 5명 이내로 제한하라는 통상원의 압력에 마젤란은 국왕과의 협약과 훈령을 내세워 반발했다. 스페인인 선원을 마음대로 모으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마젤란의 친족 3명을 포함하여 최소 30명 이상의 포르투갈인이 항해에 참여했다. 이러한 폰세카의 방해는 함대 내에 이중 권한을 발생시켰고, 마젤란에게 스페인인 선원에 대한 불신감을 품게 했다.[7]
함대가 스페인을 떠나자마자 카르타헤나와 마젤란 사이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선장들 간의 회의에서 카르타헤나는 일상적으로 마젤란의 항해 결정에 반대했고 관례상 요구되는 상사 경례를 거부했다. 테네리페 남쪽에서 폭풍으로 인해 함대의 이동이 지연되었고 식량이 배급되어야 했다. 카르타헤나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마젤란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그가 지휘 능력이 없다고 암시했다. 마젤란은 즉시 그를 체포하고 지휘권을 박탈한 후 남아메리카 항해 বাকি 기간 동안 빅토리아 호에 감금했다.[8]
3. 1. 감찰관 임명
카르타헤나는 선원으로서의 경험이 전혀 없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상원의 최고 책임자였던 후안 로드리게스 데 폰세카 주교의 조카 또는 서자였기 때문에 폰세카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마젤란의 몰루카 함대의 감찰관(Veedor General)으로 임명되었다.[1][2] 감찰관은 원정대의 재정 및 무역 활동을 감독하는 권한을 가졌다.[4] 스페인 국왕 카를 5세는 또한 카르타헤나에게 함대장인 마젤란을 통하지 않고 직접 원정대에 보고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러한 책임 분담은 이후 항해에서 어려움의 원인이 되었다.[5]
마젤란은 카르타헤나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그의 지지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에게 함대 전체의 함대장으로서의 자신의 권위에만 복종하는 조건으로 원정대에서 가장 큰 배인 ''산 안토니오''의 선장 직을 부여했다.[1][6] 카르타헤나는 마젤란을 포함하여 함대 내에서 가장 높은 110,000 마라베디의 봉급을 받았다.[4]
3. 2. 산 안토니오 호 선장 임명
카르타헤나는 항해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후안 로드리게스 데 폰세카 주교의 영향력으로 마젤란의 몰루카 함대에서 감찰관으로 임명되었다.[4]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는 카르타헤나에게 함대장인 마젤란을 거치지 않고 직접 원정대에 대해 보고하도록 지시했다.[5]
마젤란은 카르타헤나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그의 지지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에게 함대에서 가장 큰 배인 ''산 안토니오'' 호의 선장 직을 부여했다.[1][6] 이로써 카르타헤나는 함대 전체의 함대장인 마젤란의 권위에만 복종하면 되었다. 카르타헤나는 마젤란을 포함하여 함대 내에서 가장 높은 110,000 마라베디의 봉급을 받았다.[4]
4. 마젤란과의 갈등
후안 데 카르타헤나는 항해 경험이 전혀 없었으나, 통상원의 최고 책임자였던 후안 로드리게스 데 폰세카 주교의 친척 또는 서자라는 배경을 통해 마젤란의 ''몰루카 함대'' 감찰관(''Veedor General'')으로 임명되었다.[1][2] 그는 원정대의 재정 및 무역 활동을 감독하는 권한을 얻었으며, 스페인 국왕 카를 5세는 카르타헤나에게 함대장인 마젤란을 통하지 않고 직접 원정대에 보고하도록 지시했다.[5] 이러한 책임 분담은 이후 항해에서 어려움의 원인이 되었다.[6]
마젤란은 카르타헤나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그의 지지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에게 함대 전체의 함대장으로서의 마젤란의 권위에만 복종하는 원정대에서 가장 큰 배인 ''산 안토니오''의 선장 직을 부여했다.[1][6]
함대가 스페인을 떠나자마자 카르타헤나와 마젤란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슈테판 츠바이크에 따르면 마젤란은 함대를 통솔하기 위해 철저한 상명하달 체제를 구축했다. 모든 함선은 기함 트리니다드 호|트리니다드 호es를 따라야만 했으며, 구체적인 항로 등의 협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각 함장은 일몰 시 뱃머리에서 마젤란에게 경의를 표하고 야간 당직 명령을 받았다.
잠시 동안 이 체제가 유지되었지만, 마젤란이 처음의 항로를 독단적으로 변경하여 아프리카 대륙을 남하하기 시작하자 함대 내에 동요가 일어났다. 이 항로 변경은 실패하여, 잔잔한 날씨로 인해 2주 정도 지체되었고, 테네리페 섬 남부에서 만난 폭풍우로 인해 식량을 절약할 수밖에 없었다. 카르타헤나는 마젤란에 대한 의문을 드러냈지만, 마젤란은 질책으로 답했다. 분개한 카르타헤나는 이후 일몰 시의 인사를 대리인에게 맡겼고, 결국 아무도 하지 않게 되었다.[8]
이후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인 "#항해 결정에 대한 이견"과 "#마젤란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참조.
4. 1. 항해 결정에 대한 이견
카르타헤나와 마젤란의 갈등은 함대가 스페인을 떠나자마자 시작되었다. 선장 회의에서 카르타헤나는 마젤란의 항해 결정에 계속 반대했고, 상사에 대한 관례적인 경례도 거부했다.[8] 테네리페 남쪽에서 폭풍으로 항해가 지연되고 식량이 배급되자, 카르타헤나는 마젤란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지휘 능력이 부족하다고 암시했다. 마젤란은 즉시 카르타헤나를 체포하고 지휘권을 박탈한 뒤 남아메리카 항해 기간 동안 빅토리아호에 감금했다.[2]마젤란은 함대 지배권을 명확히 하기 위해 트리니다드 호에 모든 함장을 소집했다. 협상을 기대하고 모인 함장들 앞에서 카르타헤나는 즉시 체포되었다. 스페인 선장들은 당황했고, 멘도사는 카르타헤나를 쇠사슬로 묶는 대신 자신의 함선에 감금해 달라고 요청했다. 카르타헤나는 선장직에서 해임되었고, 파타고니아의 산 훌리안 만에 도착할 때까지 억류되었다.[9]
카르타헤나는 통상원 최고 책임자인 후안 로드리게스 데 폰세카 주교의 친척이었고,[1] 폰세카의 주선으로 함대의 재무 및 거래를 담당하는 총감찰관으로 임명되었다.[4]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는 항해 보고를 마젤란이 아닌 카르타헤나가 하도록 지시했다.[5] 마젤란은 카르타헤나의 영향력을 고려하여 함대 최대 함선인 산 안토니오 호의 선장으로 임명했다.[6]
이러한 상황은 함대 내 이중 권한을 발생시켰고, 마젤란은 스페인 선원들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었다.[7] 카르타헤나 등은 마젤란의 독단적인 항로 변경과 항해 정체에 대해 의문을 품었지만, 마젤란은 이들을 불신했다.
4. 2. 마젤란의 권위주의적 리더십
카르타헤나는 항해 경험이 없었지만, 후안 로드리게스 데 폰세카 주교의 영향력으로 마젤란 함대의 감찰관으로 임명되었다.[4] 카를로스 1세는 카르타헤나에게 마젤란을 거치지 않고 직접 보고하도록 지시했다.[5] 마젤란은 카르타헤나의 영향력을 고려하여 함대에서 가장 큰 배인 산 안토니오 호의 선장으로 임명했다.[1][6]함대가 출항하자마자 마젤란과 카르타헤나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카르타헤나는 마젤란의 항해 결정에 반대하고, 상사에게 경례하는 관례를 따르지 않았다.[8] 테네리페 남쪽에서 폭풍으로 항해가 지연되고 식량이 부족해지자, 카르타헤나는 마젤란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지휘 능력 부족을 암시했다. 마젤란은 즉시 카르타헤나를 체포하고 지휘권을 박탈하여 빅토리아호에 감금했다.[9]
마젤란은 모든 함선을 철저히 통제하고, 항로 결정 등 중요한 협의를 하지 않았다. 각 함장은 일몰 시 마젤란에게 경의를 표하고 명령을 받아야 했다. 마젤란이 독단적으로 항로를 변경하여 아프리카 대륙을 남하하자 함대에 동요가 일어났다. 카르타헤나는 마젤란에게 의문을 제기했지만, 마젤란은 질책으로 답했다. 분개한 카르타헤나는 인사를 대리인에게 맡겼고, 결국 아무도 하지 않게 되었다.[8]
마젤란은 함대의 지배자를 명확히 하기 위해 함장들을 소집했고, 카르타헤나는 즉시 체포되었다. 스페인인 선장들은 당황했고, 카르타헤나를 쇠사슬로 묶지 말고 자신의 함선에 감금해 달라고 간청했다. 카르타헤나는 선장직에서 해임되어 산 훌리안 만에 도착할 때까지 억류되었다.[2][9]
카르타헤나 등은 마젤란의 변심을 유도하는 항의 활동에 가까운 행동을 했다. 그들은 마젤란에게 보낸 '탄원서(스플리카시온)'에서 자신들의 항의 활동을 변명하고, 제독권을 빼앗을 의도는 없으며, 대우를 개선해 준다면 충실히 따를 것이라고 밝혔다.[12]
하지만, 미지의 해협을 찾는다는 사명감에 불타던 마젤란에게 그들의 비명은 닿지 않았다. 마젤란은 그들의 나약함을 비웃듯, 먼저 빅토리아 호를 제압했다. 카르타헤나 등은 위압당하고, 뒷걸음질치고, 결국 짓밟히는 운명이었다.[12]
5. 산 훌리안 반란
1520년 4월 1일, 산 훌리안 만에서 겨울을 나면서 사기가 크게 저하된 함대에서 마젤란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마젤란에게 불만을 품은 스페인인 선원들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그 중심에는 후안 데 카르타헤나가 있었다.
카르타헤나는 이전에 마젤란과의 갈등으로 인해 선장직에서 해임되어 억류된 상태였다. 그는 몰래 빅토리아 호를 떠나 산 안토니오 호로 돌아가, 가스파르 데 케사다,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 등과 함께 반란을 주도했다. 이들은 산 안토니오 호를 장악하고 마젤란에게 함대의 지휘권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마젤란은 재빠른 대응으로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빅토리아 호를 기습하여 선장을 살해하고 배를 탈환했다. 또한 산 안토니오 호가 강풍으로 인해 트리니다드 호에 접근하자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결국 카르타헤나는 저항 없이 콘셉시온 호를 항복시키며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반란 가담자들은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카르타헤나는 주모자임에도 불구하고 친척인 후안 로드리게스 데 폰세카 주교를 배려하여 산 훌리안 만에 버려지는 형벌을 받았다. 이후 그의 생사는 알려지지 않았다.
5. 1. 반란의 배경
후안 데 카르타헤나는 신대륙의 통상을 관할하는 통상원의 최고 책임자였던 후안 로드리게스 데 폰세카 주교의 조카 또는 서자였다.[1][2] 폰세카는 당시 플란데런 지방과의 양모 교역으로 번영한 부르고스 주교로, 부르고스 상인이자 후에 마젤란에게 출자한 크리스토발 데 아로를 비롯한 부르고스의 이권과 관련된 인맥을 구축하고 있었다.[3]카르타헤나는 항해 경험이 없었지만, 1519년 마젤란이 세계 일주 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폰세카의 주선으로 함대의 재무 및 거래 업무를 담당하는 총감찰관으로 취임했다.[4] 공동 사령관이었던 루이 팔레이루가 출발 직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로부터 1519년 7월 19일 자 통상원 앞으로 보낸 서한으로 함대에서 제외된 후에는 후임 준사령관으로 승격했다.[5] 또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는 항해 보고를 마젤란이 아닌 카르타헤나가 하도록 명령했다. 카르타헤나의 영향력을 고려한 마젤란은 그를 함대 내 최대 함선인 산 안토니오 호의 선장으로 임명했다.[1][6]
그 이전 4월까지 카르타헤나와 같은 카스티야 출신인 안토니오 멘도사가 재무관 겸 빅토리아 호 선장, 안토니오 데 코카가 회계관, 가스파르 데 케사다가 콘셉시온 호 선장으로 취임하여 함대의 중추는 폰세카의 측근으로 채워졌다. 함대 내 포르투갈인을 5명 이내로 제한하라는 통상원의 압력이 가해지자 마젤란은 국왕과의 협약과 훈령을 내세워 반발했다. 스페인인 선원을 마음대로 모으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마젤란의 친족 3명을 포함하여 최소 30명 이상의 포르투갈인이 항해에 참여했다. 이 폰세카의 방해는 함대 내에 이중의 권한을 발생시켰고, 마젤란에게 스페인인 선원에 대한 불신감을 품게 했다.[7]
마젤란과 카르타헤나의 반목은 출항 후 곧바로 표면화되었다. 120톤의 산 안토니오 호에서 75톤의 산 디에고 호까지, 모든 크기가 다른 함대를 통솔하기 위해 마젤란은 철저한 상명하달 체제를 구축했다. 모든 함선은 기함 트리니다드 호를 따라야만 했으며, 구체적인 항로 등의 협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각 함장은 일몰 시 뱃머리에서 마젤란에게 경의를 표하고 야간 당직 명령을 받았다. 잠시 동안 이 체제가 유지되었지만, 마젤란이 처음의 항로를 독단적으로 변경하여 아프리카 대륙을 남하하기 시작하자 함대 내에 동요가 일었다. 이 항로 변경은 실패하여, 잔잔한 날씨로 인해 2주 정도 지체되었고, 테네리페 섬 남부에서 만난 폭풍우로 인해 식량을 절약할 수밖에 없었다. 카르타헤나는 마젤란에 대한 의문을 드러냈지만, 카르타헤나 등을 처음부터 불신하던 마젤란은 질책으로 답했다. 분개한 카르타헤나는 이후 일몰 시의 인사를 대리인에게 맡기게 되었고, 결국 아무도 하지 않게 되었다.[8]
마젤란은 이 기회에 누가 함대의 지배자인지 분명히 밝히기로 했다. 잠시 후, 트리니다드 호에 모든 함장을 소집했다. 협의에 응하는가 싶어 모인 함장들 앞에서 카르타헤나는 즉시 체포되었다. 허를 찔린 스페인인 선장들은 당황했고, 멘도사가 귀족과 관련된 카르타헤나를 쇠사슬로 묶는 것은 삼가해 달라고, 적어도 자신의 함선에 감금하는 것으로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카르타헤나는 선장직에서 해임되었고, 파타고니아의 산 훌리안 만에 도착할 때까지 억류되었다.[2][9]
5. 2. 반란 주도
카르타헤나는 함대가 파타고니아에 도착할 때까지 억류 상태로 남아 있었다. 1520년 4월 1일, 그는 몰래 ''빅토리아''를 떠나 ''산 안토니오''로 돌아가, 스페인인 선원들과 장교들 사이에서 포르투갈인 마젤란에 반대하는 지지자들을 모았다. ''콘셉시온''의 선장 가스파르 데 케사다, 항해사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 그리고 30명의 스페인인 선원들과 함께 카르타헤나는 ''산 안토니오''를 장악하고 마젤란의 지휘에서 벗어났음을 선포했다. ''콘셉시온''과 ''빅토리아''의 장교들도 반란에 가담했고, 1520년 4월 2일에는 마젤란의 기함인 ''트리니다드''에 함대가 더 이상 그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2]마젤란은 ''트리니다드''를 ''빅토리아'' 옆에 대고 배를 내려 답신을 보냈다. 배의 선원들이 ''빅토리아''의 갑판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편지를 건네는 척했다. ''빅토리아''의 선장이 그것을 받으려 하자, 배의 선원들은 그를 찔러 죽였다. 동시에 마젤란의 배에서 15명의 남자가 올라와 반란자들을 공격했다. ''빅토리아''의 선원들은 그들의 대의에 동참했고 배는 장악되었다.[2]
카르타헤나는 전투 전에 ''콘셉시온''으로 옮겨 갔고, 그래서 잠시 자유로웠다. 그러나 그 배와 ''산 안토니오''만이 반란자들의 손에 남아 있었다. 마젤란은 함대가 정박한 만 입구에 세 척의 배를 배치하고, 카르타헤나의 두 배와의 교전을 준비했다. 4월 2일 밤, 강풍 속에서 ''산 안토니오''는 닻을 끌고 ''트리니다드'' 쪽으로 무력하게 표류했다. 마젤란은 일제 사격을 명령했고, ''산 안토니오''의 선원들은 항복하여 배를 다시 빼앗겼다. 반란이 실패했음을 깨달은 카르타헤나는 4월 3일, 저항 없이 ''콘셉시온''을 항복시켰다.[11]
5. 3. 마젤란의 진압
1520년 4월 1일, 산 훌리안 만에서 겨울을 나면서 사기가 크게 저하된 함대에서 멘도사, 케사다, 그리고 카르타헤나의 후임 함장으로 해임된 코카는 마젤란에 대항하기 위해 스페인인 선원들로부터 동지를 모았고, 40명 정도가 이에 호응했다. 이들 중에는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도 포함되어 있었다.[9] 이들은 먼저 코카의 안내로 산 안토니오 호를 급습했다. 선장이자 마젤란의 사촌인 알바로 데 메스키타를 구속하고 저항한 부선장 후안 데 에롤리아가를 살해하여 산 안토니오 호를 장악했다. 이들은 함대가 자신들의 지휘하에 들어갔다는 통고를 기함에 있는 마젤란에게 보냈다.[9]산 안토니오 호를 비롯한 3척이 반란 측으로 돌아서고, 소형의 산 디에고 호는 전투에 적합하지 않아 트리니다드 호만 남게 된 마젤란은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마젤란은 이들의 허를 찌르는 대응을 했다. 그는 먼저 빅토리아 호에 심복 곤살로 고메스 데 에스피노사를 파견했다. 통고 회신을 전달하는 사자를 가장한 에스피노사는 회신을 받으려고 몸을 내민 멘도사를 살해하고 빅토리아 호를 제압했다.[10] 트리니다드 호 이하 3척은 즉시 만 입구를 포위했고, 다음 4월 2일 밤, 강풍에 휩쓸려 돌출한 산 안토니오 호가 나포되자 콘셉시온 호에 있던 카르타헤나 일당은 항복했다.[11]
반란에 가담한 40명 정도의 스페인인 선원들은 사형 판결을 받았고, 케사다는 에롤리아가 살해 혐의로 즉시 처형되었다. 케사다의 수행원 루이스 데 몰리나에게 주인의 목을 베면 특사하겠다는 거래를 한 후에 처형이 이루어졌다. 멘도사와 케사다의 시신은 사지가 찢겨 매달렸다. 나머지는 쇠사슬에 묶여 배의 수리 작업에 종사함으로써 면죄되었다. 주모자인 카르타헤나는 친척인 폰세카를 배려하여, 같은 해 8월 24일에 가담자인 페드로 산체스 데 라 레이나 신부와 함께 약간의 물과 식량을 건네받고 산 훌리안 땅에 버려졌다. 그 후 두 사람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11]
6. 비극적인 최후
반란 이후, 마젤란은 공모자들에 대한 재판을 열었다. 카르타헤나의 동맹인 가스파르 데 케사다(《콘셉시온》호 선장)는 참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마젤란은 폰세카의 가까운 친척을 처형하는 것을 꺼려[1] 카르타헤나는 또 다른 공모자인 사제 페드로 산체스 데 라 레이나와 함께 무인도에 버려지는 형을 선고받았다. 이 형벌은 반란 4개월 후인 1520년 8월 11일에 집행되었으며, 함대가 산 훌리안에서 겨울을 보내고 출발하기 직전이었다.[3] 카르타헤나와 사제는 작은 배의 비스킷과 식수를 조금 받아서 파타고니아 해안의 작은 섬에 버려졌다. 그들은 다시는 발견되거나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11]
7. 역사적 평가 및 의의
카르타헤나는 신대륙 통상을 관할하는 통상원의 최고 책임자였던 폰세카 주교의 조카 또는 서자였다.[1][2] 폰세카는 플란데런 지방과의 양모 교역으로 번영한 부르고스 주교였으며, 부르고스 상인들과 이권을 맺고 있었다.[3]
카르타헤나는 항해 경험이 없었지만, 1519년 마젤란 함대의 총감찰관으로 임명되었다.[4] 카를로스 1세는 항해 보고를 마젤란이 아닌 카르타헤나가 하도록 명령했다.[6] 마젤란은 그를 함대 내 최대 함선인 산 안토니오 호 선장으로 임명했다.[1][6] 함대의 중추는 폰세카 측근들로 채워졌다.[7]
마젤란과 카르타헤나의 반목은 출항 후 곧바로 표면화되었다. 마젤란은 철저한 상명하달 체제를 구축하고 독단적으로 항로를 변경했다.[8] 카르타헤나는 마젤란에게 의문을 드러냈지만, 마젤란은 질책으로 답했다. 분개한 카르타헤나는 이후 인사를 대리인에게 맡겼고, 결국 아무도 하지 않게 되었다.[8] 마젤란은 카르타헤나를 체포하여 산 훌리안 만에 도착할 때까지 억류했다.[2][9]
1520년 4월 1일, 산 훌리안 만에서 겨울 나기로 사기가 저하된 함대에서 멘도사, 케사다 등과 함께 마젤란에 대항하기 위해 스페인 선원들의 동지를 모았다.[10][11] 그러나 마젤란은 심복을 파견해 멘도사를 살해하고 빅토리아 호를 제압했다.[10] 반란은 진압되었고 케사다는 처형되었으며, 카르타헤나는 약간의 물과 식량을 건네받고 산 훌리안 땅에 버려졌다.[11]
1522년 9월 6일에 빅토리아 호가 귀환하여 마젤란의 항해는 종료되었다. 카르타헤나 등의 실정을 알릴 수 있는 인물은 거의 없었으며, 그들은 반역자로서 성공자들의 영광 뒤편에 묻히게 되었다.
7. 1. 진보적 관점에서의 재해석
카르타헤나 등은 무역원, 폰세카, 부르고스 상인들의 의도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국왕의 신임을 받은 감찰관이었고, 카스티야 출신 선장들 또한 귀족 계급이었다. 이들은 스페인의 명예와 국익을 위해 마젤란을 감시할 의무가 있었다. 마젤란이 당초 결정된 항로를 변경하고 항해가 정체되자, 이들이 마젤란에게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마젤란은 고국 포르투갈의 방해나 폰세카 등 무역원의 훼방을 뿌리치고 출항했기에, 그들에 대한 불신은 더욱 컸다.카르타헤나 등은 무모한 항해에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왕명으로 참가했기에, 고메스처럼 무단 이탈하거나 마젤란을 무력으로 제거할 수도 없었다. 이들은 마젤란의 변심을 유도하는 항의 활동을 했으며, 이는 반란이라기보다는 탄원에 가까웠다. 산 안토니오 호 제압 후 마젤란에게 보낸 통고문은 '탄원서(스플리카시온)'라 불리는 저자세의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항의 활동을 변명하고, 제독권을 빼앗을 의도는 없으며, 대우를 개선해 준다면 충실히 따를 것이라고 밝혔다.[12]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을 끊는 해협을 찾는다는 사명감에 불타던 마젤란에게 이들의 비명은 닿지 않았다. 마젤란은 빅토리아 호를 선장 살해라는 수단으로 재제압하고, 카르타헤나 등을 짓밟았다.
1522년 9월 6일 빅토리아 호가 귀환하며 마젤란의 항해는 끝났다. 카르타헤나 등의 실정을 알릴 수 있는 인물은 생환한 엘카노, 전기 작가 피가페타, 그리고 고메스뿐이었다. 고메스는 자신의 배신 행위를 얼버무리기 위해 마젤란의 전횡을 고발했고, 엘카노는 반란 가담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침묵했다. 메스키타는 고메스에게 갇힌 채 귀국하여 스페인에 갇히는 등 고초를 겪었다.[13]
피가페타는 항해의 전기를 남기며 마젤란에게 명성을 안겨주었지만, 함대의 중추에 있지 않아 정치적 갈등은 다루지 않았다. 마젤란 사후 엘카노와 헤어진 트리니다드 호의 에스피노사와 선원 히네스 데 마프라는 포르투갈에 구출되어 인도를 경유, 4년 늦게 세계 일주에서 귀환했다. 이들은 리스본에서 구류 후 석방되었으나, 엘카노는 이미 타계했고, 멘도사 살해의 장본인인 그들에게서 카르타헤나에 대한 증언은 나오지 않았다.[14]
고메스와 엘카노의 침묵, 피가페타의 활동으로 마젤란의 명예가 회복되고, 폰세카가 사망하자 카르타헤나 등의 진심을 전하는 자는 사라졌다. 그들은 반역자로, 성공자들의 그늘에 묻히게 되었다.
마젤란이 카르타헤나와 케사다에게 내린 심판은 57년 후 프랜시스 드레이크 함대에 위험한 판례를 안겨주었다. 드레이크는 친구 토마스 도우티를 배신 혐의로 쇠사슬로 묶어 산 훌리안에 도착, 카르타헤나가 버려진 곳에서 도우티에게 죽음 또는 버려짐을 물었고, 도우티는 죽음을 택했다. 츠바이크는 반복된 죽음의 재판을 카르타헤나 등의 '폭동' 종말로 언급하며, "인류의 가장 기억할 만한 사업이 거의 언제나 유혈에 물들고, 가장 가혹한 사람들이 최대의 성공을 거둔다는 것은, 인류의 영원한 숙명이다!"라고 마무리했다.[15]
7. 2. 반란의 진정한 의미
후안 데 카르타헤나 등의 반란은 단순히 개인적인 불만이나 권력 다툼을 넘어선 복합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카르타헤나는 신대륙과의 무역을 담당하는 통상원의 고위 관리였던 후안 로드리게스 데 폰세카 주교의 친척이었으며,[1][2] 폰세카 주교는 플란데런과의 양모 교역으로 번성했던 부르고스의 상인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3] 이러한 배경은 카르타헤나가 마젤란 함대의 감찰관으로 임명되고, 함대의 주요 직책이 폰세카의 측근들로 채워지는 데 영향을 미쳤다.[4][7]카를로스 1세는 항해 보고를 마젤란이 아닌 카르타헤나가 하도록 명령할 정도로 카르타헤나에게 힘을 실어주었다.[6] 이는 마젤란에 대한 견제와 동시에, 스페인의 국익을 위한 감시 역할을 부여한 것이었다. 카르타헤나를 비롯한 카스티야 출신 선장들은 귀족 계급으로서 스페인의 명예와 국익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젤란은 포르투갈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폰세카를 비롯한 통상원의 방해를 뚫고 어렵게 출항한 만큼 스페인인 선원들에 대한 불신이 컸다.[7] 마젤란이 항로를 독단적으로 변경하고, 그 결과 항해가 지체되면서 선원들의 불만은 커져갔다.[8] 어떠한 협의나 지시도 받지 못한 카르타헤나 등이 마젤란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카르타헤나 등은 더 이상의 위험한 항해에 동참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지만, 왕명으로 참여했기에 함부로 이탈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마젤란을 무력으로 제압하기에는 그 권한과 역량 차이가 컸다.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카르타헤나 등이 선택한 것은 반란이라기보다는 마젤란의 변화를 요구하는 항의에 가까웠다. 그들은 마젤란에게 탄원서를 보내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고, 대우 개선을 약속하면 충성을 다하겠다고 밝혔다.[12]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하는 해협을 찾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던 마젤란에게 이들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마젤란은 냉혹한 판단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카르타헤나 등을 반역자로 처벌했다.[11]
1522년 9월 6일에 빅토리아 호가 귀환하면서 마젤란의 항해는 끝이 났다. 그러나 카르타헤나 등의 진실을 알릴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반란에 가담했던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침묵했고, 안토니오 피가페타는 항해의 성과만을 기록했을 뿐 정치적 갈등은 다루지 않았다. 결국 카르타헤나 등은 반역자로 역사에 기록되었고, 그들의 입장은 묻혀버렸다.
57년 후,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산 훌리안 만에서 친구였던 토마스 도우티를 배신 혐의로 처형하면서 마젤란의 판례를 따랐다.[15]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들을 통해 인류의 위대한 업적이 종종 가혹한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지적한다.[15]
7. 3. 엘카노의 귀환과 진실 은폐
엘카노는 고메스의 입장이 위태로워질 것을 알았지만, 자신도 반란에 가담한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했다. 둘은 서로의 오점을 덮어주듯 침묵하며 영예를 나누었다.[13]마젤란 사후 엘카노와 헤어진 트리니다드 호 일행은 파나마 지협 다리엔으로 향했으나, 악천후와 기아로 항해를 포기하고 몰루카 제도로 돌아가 테르나테 섬의 포르투갈 요새에 나포되었다. 후임 선장 에스피노사와 선원 히네스 데 마프라는 구속되어 인도를 경유, 엘카노보다 4년 늦은 1526년에 세계 일주에서 귀환했다. 이들은 리스본에서 7개월간 구류된 후 석방되었다. 이미 엘카노는 사망했고, 멘도사 살해의 장본인인 이들에게서 카르타헤나 관련 증언이 나왔다는 기록은 없다.[14]
고메스와 엘카노는 침묵했고, 피가페타의 활동으로 마젤란의 명예는 회복되었으며, 폰세카는 1524년 사망하여 영향력을 잃었다. 결국 카르타헤나의 진심을 전하거나 변호하는 사람은 사라졌고, 이들은 반역자로서 성공자들의 영광 뒤편에 묻히게 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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