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바 전역 (1873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히바 전역 (1873년)은 러시아 제국이 중앙아시아의 히바 칸국을 정복하기 위해 감행한 군사 작전이다. 1870년대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코칸트 칸국과 부하라 칸국을 점령한 후, 마지막 독립국가인 히바 칸국을 공격했다. 과거 두 차례의 정복 시도가 실패한 후, 1872년 12월 러시아 황제는 최종 공격을 결정하고, 1873년 2월 총사령관 콘스탄틴 폰 카우프만의 지휘 아래 12,000~13,000명의 병력으로 히바 칸국을 침공했다. 전투 결과, 히바 칸국은 겐데미안스키 평화 조약을 통해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으며, 러시아는 칸국에 대한 외교 및 군사적 통제권을 확보하고 배상금을 받았다. 이 전역은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의 일환으로 평가되며,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73년 분쟁 - 혈세잇키
혈세잇키는 1873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발생한 농민 봉기로, 메이지 정부의 개혁 정책에 대한 반발, 과중한 세금, 흉작, 신분 차별 등이 원인이 되어 정부 청사 등을 공격했으며, 정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종결되었다. - 러시아 제국령 중앙아시아 - 히바 칸국
히바 칸국은 16세기 초에 건국되어 1920년까지 존속한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크 칸국으로, 초기 혼란과 수도 이전, 러시아 제국의 보호국 시기를 거쳐 소비에트 혁명으로 붕괴되었으며, 농업 기반 경제와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 러시아 제국령 중앙아시아 - 러시아-히바 전쟁 (1839년~1840년)
러시아-히바 전쟁은 러시아 제국이 중앙아시아 히바 칸국을 침공한 사건으로, 팽창주의적 야망, 아랄 해 탐사, 아무다리야 강 흐름 변경 연구, 목화 무역 통제 등 과학적, 경제적 목표 달성을 위한 시도였으나 험난한 기후와 부실한 보급으로 실패했다.
히바 전역 (1873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분쟁 개요 | |
분쟁 명칭 | 1873년 러시아-히바 전쟁 |
일부 |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 |
![]() | |
날짜 | 1873년 3월 11일 – 1873년 6월 14일 |
장소 | 히바 칸국 |
결과 | 러시아의 승리 |
영토 변경 | 히바 칸국이 러시아의 보호국이 됨 |
교전 세력 | |
교전국 2 | 히바 칸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러시아 제국 | 알렉산드르 2세 K. 폰 카우프만 |
히바 칸국 | 무함마드 2세 |
병력 규모 | |
러시아 제국 | 13,000명 |
히바 칸국 | 알 수 없음 |
사상자 및 피해 | |
러시아 제국 | 33명 사망, 124명 부상 |
히바 칸국 | 5,000명 이상 사망 |
2. 배경
1870년대 러시아 제국은 코칸트 칸국과 부하라 칸국을 점령하여 중앙아시아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이로써 중앙아시아의 마지막 독립국가인 히바 칸국만이 남게 되었고, 히바 칸국은 러시아의 보호국인 부하라 칸국에 의해 모든 영토가 포위되었다. 결국, 러시아는 히바 칸국 점령을 위한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2. 1.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
19세기 중반, 러시아 제국은 적극적인 남하 정책을 추진하며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1860년대 후반, 러시아는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고, 코칸트 칸국과 부하라 칸국을 복속시키며 중앙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장악해 나갔다. 히바 칸국은 이러한 러시아의 팽창 정책에 맞선 마지막 주요 세력이었다.[1]과거 러시아는 두 차례에 걸쳐 히바 정복에 실패했다. 1717년, 베코비치-체르카스키 공작은 카스피 해에서 진격하여 히바군과 교전했으나, 히바인들의 외교에 유인되어 그의 군대는 전멸하고 생존자는 거의 남지 않았다. 1839년 히바 원정에서 페롭스키 백작은 오렌부르크에서 남쪽으로 진군했으나, 유난히 추운 겨울 날씨로 인해 러시아 낙타 대부분이 죽게 되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2]
1868년까지 러시아는 투르케스탄 정복을 통해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고, 동쪽 산맥의 코칸트와 옥수스 강을 따라 위치한 부하라를 통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카스피 해 동쪽, 아랄 해 남쪽, 페르시아 국경 북쪽에 대략 삼각형 모양의 지역이 남게 되었으며, 히바 칸국은 이 삼각형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3]
2. 2. 히바 칸국 정복의 실패
러시아는 과거 두 차례에 걸쳐 히바 정복에 실패했다. 1717년 베코비치-체르카스키 공작의 원정군은 카스피 해에서 진격하여 히바군과 교전했으나, 히바인들의 외교에 유인되어 군대 전체가 학살당하고 생존자는 거의 남지 않았다. 1839년 히바 원정에서 페롭스키 백작은 오렌부르크에서 남쪽으로 진군했으나, 유난히 추운 겨울 날씨로 인해 러시아 낙타 대부분이 죽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3. 히바 원정 (1873년)
1873년 2월, 히바 칸국 정복 작전이 시작되었다. 러시아 제국은 타슈켄트 군(장군 콘스탄틴 폰 카우프만), 오렌부르크 군(장군 니콜라이 베룝킨), 만그샬라크 반도군 (장군 니콜라이 파블로 로마킨), 투르크멘바시 군(장군 바실리 마르코조프) 등 4개 군을 투입했다. 총 12,000~13,000명의 병력과 포 56문, 말 4,600마리, 낙타 20,000마리가 동원되었으며, 러시아령 투르키스탄 총독 콘스탄틴 폰 카우프만 장군이 총지휘를 맡았다.
2월 26일, 오렌부르크 군은 엠비 대초원에서 진격을 개시했으나, 히바 지역에서 불어오는 눈보라와 혹독한 추위로 어려움을 겪었다. 거의 매일 적과 교전하며 소잘리와 만그이트까지 진군했다. 5월 14일, 선봉부대는 오렌부르크에서 합류하여 만그샬라크 반도군과 함께 진군했다. 5월 26일, 만그샬라크 반도군은 히바 북쪽에 접근했고, 28일에는 모든 부대가 히바 맞은편 샤-아바드 정문에 도달했다. 같은 날 러시아군은 샤-아바드 정문을 공격했으나, 베룝킨 장군이 머리에 총을 맞아 미하일 스코벨레프 대령이 지휘권을 넘겨받았다.[6]
5월 29일, 카우프만 군이 히바 남동쪽에 도착했고, 히바 남부에서는 칸국이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도시 북쪽에서는 혼란으로 인해 항복 소식을 알지 못해 전투가 계속되었다. 스코벨레프 대령과 샤하바츠키예 부대는 성문을 습격하고 성벽 안으로 진군했지만, 카우프만 장군의 명령으로 공격이 중지되었다.
바실리 마르코조프의 크라스노보츠크 군은 물 부족으로 인해 히바와 투르크멘바시를 점령하지 못하고 회군했다.
1869년, 표도르 라데츠키는 크라스노보츠크를 건설했는데, 이곳은 자카스피 군관구의 본부가 되었고, 트란스카스피 횡단 철도의 시작점이 되었다. 1870년 3월, 히바 공격이 결정되었다. 히바는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군대 이동 전 사막 지도화와 물웅덩이 확보가 필요했다. 미하일 스코벨레프는 크라스노보츠크에서 오아시스 가장자리까지, 바실리 마르코조프 대령은 그 지역을 더 자세히 탐사했다. 니콜라이 로마킨은 망기슐라크 반도를 탐사했다. 1872년 12월, 차르는 히바 공격을 최종 결정했다.
3. 1. 원정 준비
1872년 12월, 러시아 황제는 히바 칸국 공격을 최종 결정했다. 이에 따라 보병 61개 중대, 코사크 기병 26개, 대포 54문, 박격포 4문, 로켓 부대 5개로 구성된 원정군이 편성되었다.[1]히바는 사방이 수백 마일에 달하는 사막으로 둘러싸인 오아시스였기 때문에, 러시아군은 진군에 앞서 사막 지도를 작성하고 물웅덩이를 찾는 데 주력했다. 미하일 스코벨레프는 크라스노보츠크에서 오아시스 가장자리까지의 경로를 탐사했고, 바실리 마르코조프 대령은 이후 이 지역을 더 자세히 탐사했다. 니콜라이 로마킨은 망기슐라크 반도를 탐사했다.[1]
원정군은 타슈켄트, 오렌부르크, 망기슐라크 반도, 크라스노보츠크 등 4개 방면에서 동시에 진격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투르케스탄 주 총독 카우프만 장군이 원정군 총사령관을 맡았다.[1]
3. 2. 전투 경과


1873년 2월, 히바 칸국 정복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 작전에는 타슈켄트 군(콘스탄틴 폰 카우프만 장군), 오렌부르크 군(니콜라이 베룝킨 장군), 만그샬라크 반도군 (니콜라이 파블로 로마킨 장군), 투르크멘바시 군(바실리 마르코조프 장군) 등 4개 군이 참여했다. 총 12,000~13,000명의 병력과 포 56문, 말 4,600마리, 낙타 20,000마리가 동원되었으며, 러시아령 투르키스탄 총독인 콘스탄틴 폰 카우프만 장군이 총지휘를 맡았다.
오렌부르크 군은 2월 26일 엠비 대초원에서 진격을 개시했으나, 히바 지역에서 불어오는 눈보라와 혹독한 추위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은 거의 매일 적과 교전하며 소잘리와 만그이트까지 진군했다. 5월 14일, 선봉부대는 오렌부르크에서 합류하여 니콜라이 파블로 장군의 만그샬라크 반도군과 함께 진군했다.
카우프만 장군이 이끄는 타슈켄트 군은 3월 23일 지자크에서 출발하여 4월 13일 할라-아타를 거쳐 5월 23일 우치-우착에서 옥수스 강에 도달했다. 5월 29일, 히바 남동쪽에 도착했고, 5월 30일 셰이크-아리크에서 히바 포대를 제압하고 강을 건넜으며, 6월 4일에는 하자라스프 요새를 점령했다.
5월 26일, 오렌부르크 군과 만그샬라크 반도군은 히바 도시 북쪽에 접근했고, 28일에는 모든 부대가 히바 반대편인 샤-아바드 정문에 도달했다. 같은 날 러시아군은 샤-아바드 정문을 공격했으나, 베룝킨 장군이 머리에 총을 맞아 미하일 스코벨레프 대령이 지휘권을 넘겨받았다.[6]
5월 29일, 히바 남부에서는 칸국이 항복을 선언했지만, 도시 북쪽에서는 혼란으로 인해 항복 소식을 알지 못해 전투가 계속되었다. 스코벨레프 대령과 샤하바츠키예 부대는 북문을 공격하여 성 안으로 진입했으나, 카우프만 장군의 명령으로 공격이 중지되었다.
바실리 마르코조프 장군의 크라스노보츠크 군은 물 부족으로 인해 투르크멘바시와 히바를 점령하지 못하고 회군해야 했다.
베료프킨 장군은 델타 북서쪽 모퉁이에, 카우프만 장군은 남쪽 모퉁이에 위치해 있었는데, 6월 4일과 5일이 되어서야 전령을 통해 서로 연락이 닿았다. 베료프킨 장군은 로마킨 장군의 군대를 지휘하여 5월 27일 쿵가르드를 떠나 코잘리와 망기트를 점령했다. 망기트에서는 총격전으로 인해 도시가 불타고 주민들이 학살되었다. 6월 7일, 베료프킨 장군은 히바 외곽에 도착했고, 6월 9일에는 도시 북문에 도달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베료프킨 장군은 눈에 부상을 입었지만, 포격이 시작되었고, 오후 4시에 항복 제안이 들어왔다. 그러나 성벽에서의 사격이 멈추지 않아 포격이 재개되었고, 도시 일부가 불길에 휩싸였다.
6월 10일, 카우프만 장군으로부터 칸이 항복했다는 메시지가 도착하자 포격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일부 투르크멘인들이 성벽에서 사격을 시작하자, 포병대가 공격을 개시하여 문을 부쉈다. 스코벨레프 대령과 1,000명의 병력이 칸의 거처 근처까지 진입했을 때, 카우프만 장군이 서문을 통해 평화롭게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스코벨레프 대령은 물러나 카우프만 장군을 기다렸다.
4. 겐데미안스키 평화 조약과 그 이후
러시아와 히바 칸국 간에 겐데미안스키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히바 칸국은 명목상 지위를 유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 전역에 참여한 이들에게는 히바 전역 훈장이 수여되었다. 조약에 따라 칸은 러시아의 동의 없이는 외교나 군사 작전을 할 수 없었고, 히바 노예 무역과 노예 제도를 폐지해야 했다. 칸국은 러시아 상인에게 개방되었고 아무다리야 강은 러시아 배에 개방되었으며, 220만러시아 루블의 배상금이 책정되었다. 러시아군은 히바 동쪽에 주둔했고, 히바 영토 일부는 부하라 토후국에 할양되었다. 트란스카스피 군관구가 창설되었고, 히바는 혁명 때까지 러시아의 보호령으로 남았다.
카우프만은 요무드 투르크멘족을 공격하여 불필요한 학살을 자행했고, 다른 투르크멘 부족들은 많은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5]
4. 1. 겐데미안스키 평화 조약 체결
겐데미안스키 평화 조약이 러시아와 히바 칸국 간에 체결되면서 히바 칸국은 명목상으로는 지위를 유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다.[5] 1873년 7월 22일, 알렉산드르 2세는 이 전역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히바 전역 훈장을 수여했다.칸은 베료프킨의 포격에서 도망친 후, 6월 14일에 다시 소환되어 복위되었다. 8월 2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메시지가 교환된 후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에 따라 칸은 러시아의 동의 없이는 외교나 군사 작전을 할 수 없게 되었고, 히바 노예 무역과 노예 제도를 폐지해야 했다.[5] 또한, 칸국을 러시아 상인에게 개방하고 아무다리야 강을 러시아 배에 개방해야 했으며, 1893년까지 할부로 지불될 배상금 220만러시아 루블에 동의했다.[5] 러시아군은 히바 동쪽의 페트로알렉산드롭스크에 주둔했다.[5] 10월, 히바 영토의 일부는 아미르의 중립성에 대한 보상으로 부하라 토후국에 넘어갔다. 1874년 3월, 크라스노보츠크에 사령부를 둔 트란스카스피 군관구가 창설되었다. 히바는 혁명 때까지 러시아의 보호령으로 남아있었다.[5]
4. 2. 요무드 족 진압
카우프만은 칸과 협상하는 동안, 오아시스 남서쪽에 살던 요무드 투르크멘족을 공격했다. 맥거헌[5]에 따르면, 카우프만은 이들에게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세금을 요구했고, 요무드 족이 이에 응하지 못하고 도망치자 병사들을 보내 불필요한 학살을 자행했다. 요무드 족이 몰락한 후, 다른 투르크멘 부족들은 이와 유사한 많은 공물을 바치기로 동의했다.4. 3. 결과
겐데미안스키 평화 조약으로 히바 칸국은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다. 1873년 7월 22일, 알렉산드르 2세는 이 전역의 참가자 전원에게 히바 전역 훈장을 수여하였다.[5]1873년 8월 2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메시지가 교환된 후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5]
- 칸은 러시아의 동의 없이는 외교 및 군사 작전을 포기한다.
- 히바 노예 무역과 노예 제도를 폐지한다.
- 칸국을 러시아 상인에게 개방한다.
- 옥수스 강을 러시아 배에 개방한다.
- 1893년까지 할부로 지불될 2200000RUB의 배상금에 동의한다.
러시아군은 히바 동쪽의 페트로알렉산드롭스크에 주둔했다. 1873년 10월, 히바 영토의 일부는 아미르의 중립성에 대한 보상으로 부하라에 할양되었다. 1874년 3월, 크라스노보츠크에 사령부를 둔 트란스카스피 군관구가 창설되었다. 히바는 혁명까지 러시아의 보호령으로 남았다.[5]
한편, 카우프만은 오아시스 남서쪽에 살던 요무드 투르크멘족을 공격했다. 맥거헌에 따르면, 카우프만은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세금을 요구했고, 요무드가 도망치자 불필요한 학살을 가하며 병사들을 뒤쫓아 보냈다. 요무드가 몰락한 후 다른 투르크멘 부족들은 이와 유사한 많은 공물을 바치기로 동의했다.[5]
참조
[1]
서적
Хивинский поход 1873 года. Действия кавказских отрядов.
тип. В.С. Балашева
[2]
서적
The Passage of Waters of the Amu-Darya
[3]
서적
The Eye-Witnesses Account…
[4]
문서
[5]
문서
[6]
웹인용
Саранчов Владимир Семенович
http://regiment.ru/b[...]
2014-09-0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