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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노미야 스미코 내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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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쓰라노미야 스미코 내친왕은 고카쿠 천황의 딸로,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과 고메이 천황의 이복 언니였다. 사촌 간인노미야 나루히토 친왕과 약혼했으나, 결혼 전에 나루히토 친왕이 사망하여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1863년 가쓰라노미야를 계승하여 여성이 세습 친왕가를 계승한 유일한 사례가 되었으며, 1866년에는 준삼궁・일품에 서임되어 가쓰라 준후 궁으로 불렸다. 1881년 사망했으며, 가쓰라노미야 가문은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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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노미야 스미코 내친왕
기본 정보
존칭가쓰라 준고 궁
도미노미야
신위일품내친왕
위계준삼궁 (준후)
출생일문정 12년 1월 19일 (1829년 2월 22일)
사망일메이지 14년 (1881년) 10월 3일
묻힌 날짜메이지 14년 (1881년) 10월 20일
묘소교토부교토시히가시야마구, 센뉴지
아버지고카쿠 천황
어머니간로지 기요코
가문일본 황실
계승가쓰라노미야 당주
재위 기간1863년–1881년
이전가쓰라노미야 미사히토 친왕

2. 생애

고카쿠 천황간로지 기요코의 딸로 태어난 스미코는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고메이 천황의 이복 언니였다. 1840년 사촌 간인노미야 나루히토 친왕과 약혼하고, 1842년 황족이 되었으나, 결혼 직전 나루히토 친왕이 사망하여 혼인은 무산되었다.

1863년, 스미코 내친왕은 1836년에 사망한 이복 남동생의 뒤를 이어 신노케 중 하나인 가쓰라노미야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이는 여성이 가문을 계승한 매우 드문 경우였다. 가쓰라노미야 가문은 황실의 분가로서, 황실의 대가 끊어질 경우 천황의 자리를 계승할 수 있었다.

2. 1. 초기 생애

고카쿠 천황과 후궁인 간로지 기요코(勧修寺 婧子) 사이에서 1829년에 태어났다.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고메이 천황의 이복 언니였다. 1840년 5월 3일, 사촌인 간인노미야 나루히토 친왕과 약혼하였고, 1842년 10월 18일에는 혼인을 앞두고 내친왕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틀 뒤, 간인노미야 나루히토 친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혼인은 무산되었다. 이후 스미코 내친왕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날짜사건
덴포 11년 (1840년) 1월 28일간인노미야 나루히토 친왕과 약혼
덴포 13년 (1842년) 9월 15일혼인을 앞두고 내친왕 선하를 받음
덴포 13년 (1842년) 9월 17일간인노미야 나루히토 친왕의 사망


2. 2. 가쓰라노미야 계승

이복 동생인 사다히토 친왕이 1836년에 사망하여 가쓰라노미야는 당주가 없는 상태였다. 1863년 12월 23일, 스미코 내친왕이 제12대 가쓰라노미야를 계승했는데, 이는 여성이 세습 친왕가를 계승한 유일한 사례이다. 1866년 4월 22일에는 준삼궁(준후)・일품에 서임되어 '''가쓰라 준후 궁'''(가쓰라 쥬고노미야)으로 불렸으며, 같은 준삼궁이었던 고메이 천황의 처 구조 아사코(에이쇼 황태후)보다 궁중 서열이 높았다.[1]

2. 3. 말년

메이지 14년(1881년) 53세로 사망하였다. 같은 해 10월 20일 교토부 교토시 가미교구의 쇼코쿠지에서 장례가 거행되었으며, 히가시야마구센뉴지 내에 매장되었다. 스미코 내친왕의 사망으로 가쓰라노미야 가문은 단절되었다.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이 정부 요인에게 청원하여 셋째 아들인 세시마(구니노미야 구니히코 왕)에게 가쓰라노미야를 잇게 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3. 인물

스미코는 고카쿠 천황과 시녀인 간로지 기요코의 딸이었다.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고메이 천황의 이복 언니였다. 1840년 5월 3일, 사촌인 간인노미야 나루히토 친왕과 약혼했으며, 결혼을 준비하기 위해 1842년 10월 18일 공식적으로 황족이 되었다. 그러나 이틀 후, 나루히토 친왕은 결혼 전에 사망했다. 이후 스미코 내친왕은 사망할 때까지 미혼으로 남았다.

1863년, 1836년에 사망한 11대 당주이자 이복 남동생인 가쓰라노미야 미사히토 친왕의 뒤를 이어 가쓰라노미야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가쓰라노미야 가문은 신노케 중 하나로, 황실의 분가로서 정통 황실의 대가 끊어질 경우 천황의 자리를 계승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이는 여성에게 매우 드문 지위였다.[1]

심한 낯가림으로 고쇼 정원을 산책할 때에도 연(輿)을 타고 발의 사이로 엿보는 행동을 했다. 겁이 없는 성격의 여동생 가즈노미야와는 대조적이었다. 가즈노미야와 한때 동거한 적이 있다.

현재 니조성 혼마루 어전이라고 불리는 곳이 숙자(淑子)가 살았던 가쓰라노미야 저택이다. 노를 좋아했던 그녀의 취향에 따라, 다다미방 일부를 노 무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했으며, 그 유구가 현존한다.

4. 묘소

가쓰라노미야 스미코 내친왕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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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는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이마쿠마노미나미다니 정에 있는 센뉴지 내에 있다. 가쓰라노미야 스미코 내친왕 묘에는 아사히코 친왕 묘와 모리오사 친왕 묘가 인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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