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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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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로마치 막부는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가마쿠라 막부를 무너뜨리고 교토에 세운 무가 정권이다. 겐무 신정의 실패와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거쳐 아시카가 쇼군을 중심으로 하는 막부 체제를 구축했다. 무로마치 막부는 슈고 다이묘를 통해 지방을 통치했으며, 15세기 후반 오닌의 난을 겪으며 권위가 쇠퇴하여 센고쿠 시대의 혼란을 초래했다. 1565년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암살당하고, 1573년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교토에서 추방되면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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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막부
기본 정보
아시카가 가문의 문장
아시카가 가문의 문장
공식 명칭아시카가 막부 (足利幕府)
다른 이름무로마치 막부 (室町幕府)
존속 기간 시작1336년 8월 11일
존속 기간 끝1573년 9월 2일
멸망 사건아시카가 막부 폐지
주요 사건 1고카메야마 천황 항복 (1392년 10월 15일)
주요 사건 2오닌의 난 (1467년–1477년)
주요 사건 3오다 노부나가의 헤이안쿄 점령 (1568년 10월 18일)
수도헤이안쿄
정치 체제봉건제 군사 독재 하의 절대 군주제
종교신불습합
공용어중세 일본어
통화일본 몬
역대 지도자
천황고곤 천황 (1332년–1334년)
오기마치 천황 (1557년–1586년)
쇼군아시카가 다카우지 (1338년–135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 (1568년–1573년)
이전 및 이후 국가
이전 국가 1겐무 신정
이전 국가 2아시카가 씨
이후 국가 1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중앙 정부
주요 기관관령
만도코로
사무라이도코로
몬주쇼
효죠슈
호코슈
지방 정부
주요 기관가마쿠라 부
간토 관령
오슈 단다이
우슈 단다이
규슈 단다이
슈고
지토

2. 배경 및 초기

1180년부터 1185년까지, 겐페이 전쟁은 오랫동안 일본 천황과 그의 궁정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격렬한 경쟁을 벌여온 다이라 씨와 미나모토 씨 사이에서 벌어졌다. 겐페이 전쟁은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지휘 아래 미나모토 씨의 승리로 끝났고, 그는 ''쇼군''으로 선포된 후 가마쿠라 막부를 수립하여 가마쿠라 시대를 열었다. 호조 씨가 권력을 장악하여 가마쿠라에서 일본을 통치하는 동안, 천황과 그의 궁정은 헤이안쿄의 공식 수도에 남아 상징적인 존재로 남았다. 호조 씨의 독점적인 권력과 몽골의 침입 패배 후 토지 보상의 부족은 호조 씨의 가신들 사이에 끓어오르는 불만을 야기했다.

엔겐 원년(1336년) 5월, 규슈에서 동상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쿠스노키 마사시게를 무찔렀다. 고다이고 천황은 히에이잔으로 퇴거했지만, 마사시게와 함께 "미키잇초"라 불린 고다이고의 무장들(유키 친미쓰・나와 나가토시・센타네 다다아키)도 이 무렵 차례로 전사했기 때문에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다음 달, 입경한 다카우지는 고겐 상황을 치텐노군으로 옹립하고, 8월에는 고겐의 동생인 토요히토 친왕(고메이 천황)이 즉위했다. 화목이 성립됨에 따라 10월에 귀락한 고다이고는 유폐되었고, 11월 2일에 고메이에게 신기가 양여되었다.

같은 달 7일, 제엔(나카하라 쇼켄)・신에 형제 등이 기초한 『겐무식목』의 제정으로 새로운 무가 정권의 시정 방침이 제시되었지만, '''무로마치 막부의 실질적인 성립'''은 이 시기로 여겨진다. 북조로부터 권대납언에 임명된 다카우지는 "가마쿠라 대납언"이라 칭해지며, 가마쿠라 쇼군(가마쿠라도노)을 계승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다음 달 21일, 고다이고가 야마토국요시노로 탈출하여 남북조의 병립 상태가 시작되었다.

엔겐 2년(북조겐무 4년, 1337년) 8월, 진슈후 쇼군으로서 도호쿠에 있던 남조 측의 키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서상의 길에 오르고, 이듬해 엔겐 3년(북조 겐무 5년, 1338년) 1월에는 아오노하라 전투에서 막부군을 격파했지만, 그 후의 연전 끝에 5월에 전사했다(이시즈 전투). 또한, 사실상 남조 측 총대장이었던 니타다 요시사다도 윤7월의 후지시마 전투에서 패사했다.

이렇게 주장과 오슈에 세력을 구축한 유력 무장 2명을 잃은 남조 측의 열세는 뒤집을 수 없었고, 북조・막부 측 우위의 추세 아래, 겐무 5년(1338년) 8월 11일에 다카우지는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었다.

2. 1. 겐무 신정의 붕괴

1333년, 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에서 궁정 통치를 지지하며 호조 씨의 지배에 반대하도록 지역 통치 가신들에게 명령했다. 가마쿠라 막부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했지만, 다카우지는 가마쿠라에 반기를 들고 궁정을 위해 싸워 막부를 성공적으로 타도했다. 다카우지가 미나모토 씨의 비공식적인 지도자였던 반면, 호조 씨는 이전에 미나모토 씨가 패배시킨 다이라 씨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은 궁정의 문치로 돌아왔지만, 고다이고 천황의 정책은 인기가 없었고 그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1336년, 다카우지는 교토에 자신의 무가 정권을 세워 겐무 신정을 사실상 타도하고 자신을 새로운 쇼군으로 임명했다.

엔겐 원년(1336년) 5월, 규슈에서 동상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쿠스노키 마사시게를 무찔렀다. 고다이고 천황은 히에이잔으로 퇴거했지만, 마사시게와 함께 "미키잇초"라 불린 고다이고의 무장들(유키 친미쓰・나와 나가토시・센타네 다다아키)도 이 무렵 차례로 전사했기 때문에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다음 달, 입경한 다카우지는 고겐 상황을 치텐노군으로 옹립하고, 8월에는 고겐의 동생인 토요히토 친왕(고메이 천황)이 즉위했다. 화목이 성립됨에 따라 10월에 귀락한 고다이고는 유폐되었고, 11월 2일에 고메이에게 신기가 양여되었다.

같은 달 7일, 제엔(나카하라 쇼켄)・신에 형제 등이 기초한 『겐무식목』의 제정으로 새로운 무가 정권의 시정 방침이 제시되었지만, '''무로마치 막부의 실질적인 성립'''은 이 시기로 여겨진다. 북조로부터 권대납언에 임명된 다카우지는 "가마쿠라 대납언"이라 칭해지며, 가마쿠라 쇼군(가마쿠라도노)을 계승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다음 달 21일, 고다이고가 야마토국요시노로 탈출하여 남북조의 병립 상태가 시작되었다.

엔겐 2년(북조겐무 4년, 1337년) 8월, 진슈후 쇼군으로서 도호쿠에 있던 남조 측의 키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서상의 길에 오르고, 이듬해 엔겐 3년(북조 겐무 5년, 1338년) 1월에는 아오노하라 전투에서 막부군을 격파했지만, 그 후의 연전 끝에 5월에 전사했다(이시즈 전투). 또한, 사실상 남조 측 총대장이었던 니타다 요시사다도 윤7월의 후지시마 전투에서 패사했다.

이렇게 주장과 오슈에 세력을 구축한 유력 무장 2명을 잃은 남조 측의 열세는 뒤집을 수 없었고, 북조・막부 측 우위의 추세 아래, 겐무 5년(1338년) 8월 11일에 다카우지는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었다.

2. 2. 남북조 시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쇼군으로 자리 잡은 후, 국가 통치 방식을 둘러싸고 고다이고 천황과 갈등이 발생했다. 이 갈등으로 다카우지는 고후시미 천황의 둘째 아들인 유타히토 왕자를 광명 천황으로 옹립했고,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에서 도망쳤다. 이후 일본은 두 개의 궁정으로 분열되었다. 아시카가의 영향 아래 광명 천황을 지지하는 북조는 교토에 있었고, 고다이고 천황을 지지하는 남조는 요시노에 있었다. 북조와 남조는 56년 동안 이념적 권력 투쟁을 벌였고, 1392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 재위 중 남조가 항복하면서 종식되었다.

엔겐 원년(1336년) 5월, 규슈에서 동상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쿠스노키 마사시게를 무찔렀다. 고다이고 천황은 히에이잔으로 퇴거했지만, 마사시게와 함께 "미키잇초"라 불린 고다이고의 무장들(유키 친미쓰・나와 나가토시・센타네 다다아키)도 이 무렵 차례로 전사했기 때문에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다음 달, 입경한 다카우지는 고겐 상황을 치텐노군으로 옹립하고, 8월에는 고겐의 동생인 토요히토 친왕(고메이 천황)이 즉위했다. 화목이 성립됨에 따라 10월에 귀락한 고다이고는 유폐되었고, 11월 2일에 고메이에게 신기가 양여되었다.

같은 달 7일, 제엔(나카하라 쇼켄)・신에 형제 등이 기초한 『겐무식목』의 제정으로 새로운 무가 정권의 시정 방침이 제시되었지만, '''무로마치 막부의 실질적인 성립'''은 이 시기로 여겨진다. 북조로부터 권대납언에 임명된 다카우지는 "가마쿠라 대납언"이라 칭해지며, 가마쿠라 쇼군(가마쿠라도노)을 계승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다음 달 21일, 고다이고가 야마토국요시노로 탈출하여 남북조의 병립 상태가 시작되었다.

겐무 5년(1338년) 8월 11일에 다카우지는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었다.

3. 정부 구조

## 중앙

아시카가 막부는 일본의 세 막부 중 가장 약했다.[7] 전임자인 가마쿠라 막부나 후임자인 도쿠가와 막부와는 달리,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정권을 세울 당시 그의 통치를 뒷받침할 개인적인 영토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아시카가 막부는 쇼군의 권위와 개인적인 권력에 크게 의존했다. 가마쿠라 시대의 중앙집권적인 주종 관계는 고도로 분권화된 다이묘(지방 영주) 체제로 대체되었고, 직접적인 영토가 부족했기 때문에 쇼군의 군사력은 다이묘의 충성심에 크게 의존했다.[7]

겐무 신정의 실패로 궁정은 약화되고 종속적인 상태가 되었는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교토에서 천황과 가까운 곳에 궁정을 설립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강화했다. 지방 다이묘의 권한은 가마쿠라 시대보다 크게 확대되었다. 막부가 임명한 슈고는 군사 및 치안 책임 외에도 지방 관료의 사법, 경제 및 과세 권한을 흡수했고, 각 지방의 정부 소유지는 다이묘 또는 그 신하들의 개인 소유지로 빠르게 흡수되었다.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기반을 모두 상실한 궁정은 대부분의 권력을 상실했고, 그 권력은 아시카가 쇼군이 장악했다. 이러한 상황은 세 번째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통치하에 정점에 달했다.[7]

그러나 요시미츠 이후, 아시카가 막부의 구조적 약점은 여러 차례의 계승 문제와 조기 사망으로 인해 드러났다. 오닌 전쟁 이후 이것은 극적으로 더욱 심각해졌고, 막부 자체는 교토의 지역 정치 세력 이상으로 축소되었다.[7]

막부의 구조


무로마치 막부의 직제는 거의 가마쿠라 막부의 제도를 계승하고 있다. 기본 법으로 겐무 시키모쿠(建武式目)를 제정(1336년)했다. 구체적인 법령으로는 가마쿠라 시대의 고세이바이 시키모쿠(御成敗式目)(정영식목)를 적용하고, 필요에 따라 “겐무 이래 추가”(建武以来追加)라고 불리는 추가 법을 발포하여 보충하고 있다.

막부 개설 당초, 초대 쇼군 다카우지(尊氏)는 무케의 동량(武家の棟梁)으로서 제국의 무사를 통솔하고 집사(執事) 고 모로나오(高師直)가 이를 보좌하며, 정무·재판은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가 총리하는 이원 체제가 취해졌다. 이윽고 다다요시와 모로나오 사이에 불화가 생겨 막부 내가 다카우지·다다요시 양파로 분열하여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으로 발전, 남조(南朝) 측과 제국의 무사들을 끌어들여 내란은 장기화되었다.

다카우지의 뒤를 이은 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足利義詮)는 막부 기구의 재건에 힘썼고, 병으로 쓰러지자 호소카와 요리유키(細川頼之)를 간레이(管領)에 임명하여 미성년의 후계자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를 후견시켰다. 요리유키 후견기 및 요시미쓰에 의한 친정기를 거쳐 정치 기구가 정비되어 갔다.

가마쿠라 시대의 쇼군은 전국의 고케닌(御家人)과 개별적으로 주종 관계를 맺고, 소령(지토(地頭)직)을 안두(安堵)하는 입장에 있었고, 슈고(守護)는 임국의 군사·형사의 장이었고, 국내 고케닌의 감독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무로마치 막부는 슈고 다이묘(守護大名)에 의한 합의제·연합 정권이었다고 평가된다. 장기간의 남북조 내란 중에 슈고는 그 권한을 확대하고, 임국 내의 영주층 무사(구니진(国人))을 피관(被官)화하는 등 임국의 관리자에서 영국 지배자(다이묘)가 되어 간다(단, 지역차가 있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슈고령고쿠세이(守護領国制)”를 참조). 이에 따라 고케닌=쇼군 직신이라는 가마쿠라 막부의 기본 구조는 상실되고, 쇼군의 제국 무사·소령에 대한 지배는 상당히 후퇴하여 주로 슈고를 통해 전국 지배를 하는 체제가 되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쇼군이 이 현상을 좋게 여긴 것은 아니며, 가마쿠라 시대 이래의 아시카가 씨의 근본 피관이나 일족, 슈고의 분가 등, 슈고 다이묘를 넘어 각지의 무사와 주종 관계를 맺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직속 군사력의 정비에 열심이었고, 봉공중(奉公衆)을 정비해 나가고, 이후의 쇼군에게도 계승되었다.

또한 요시미츠 이후의 무로마치 막부는 “천하 무위(天下無為)”의 실현을 전국 통치의 기본적인 생각으로 하고 있었다.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며, 무로마치 궁인 쇼군의 상의(上意)를 가지고 분쟁 당사자 간의 조정을 꾀하는 것이었다. 상의는 분쟁 해결의 수단으로서는 만능이 아니었지만, 슈고나 구니진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7] 그러나 가키쓰의 난(嘉吉の乱) 이후, 미성년의 쇼군이 계속되는 가운데, 간레이인 호소카와 씨와 하타케야마 씨가 상의를 이용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려고 하고, 거기에 휘둘린 슈고나 구니진은 상의에 따르지 않고 독자 행동을 취하게 된다. 이윽고 그들은 동료끼리 연계하여 행동함으로써 상의의 상대화를 도모하게 되고, 특히 슈고들은 호소카와 씨 측과 반 호소카와 씨 측(처음에는 하타케야마 씨, 후에 야마나 씨를 맹주로 하는)으로 나뉘어 집단을 형성하여 다투어, 오닌의 난(応仁の乱)의 원인을 만들었다.[8]

그 한편, 무로마치 쇼군 이상의 세위를 가진 슈고 다이묘를 막부가 위험시하여 토벌한 예도 있다. 그러나 개개의 슈고 다이묘는 그렇다 치더라도, 슈고 다이묘와 무로마치 쇼군이 전면적으로 대립하는 일은 없었다. 슈고 다이묘는 막부로부터 임명받은 슈고직에 지배의 정당성의 근거가 있고, 무로마치 쇼군의 권위를 부정할 수 없고, 양자는 상호 보완하는 체제였다(무로마치 막부―슈고 체제). 쇼군의 권위의 실추는 곧 슈고 다이묘의 권위의 실추를 의미하고, 오닌의 난 이후 그렇게 되어 간다.

중세 후기, 천황으로부터 일본국의 지배를 위임받았던 무로마치 궁(室町殿)(정이대장군)의 정치적 권한이 미치는 실질적 통치 범위, 관할 구역을 '''무로마치 궁 분국'''(室町殿御分国), 또는 '''무로마치 궁 분국'''(室町殿分国), '''공방 분국'''(公方分国)이라고 한다. 그 범위는 규슈 단다이(九州探題) 관할 11개국, 가마쿠라부(鎌倉府) 관할 10개국을 제외한 기나이(畿内)·긴고쿠(近国), 산요도(山陽道), 산인도(山陰道), 난카이도(南海道), 도카이도(東海道), 호쿠리쿠도(北陸道)의 여러 국들로 이루어진다.[9] 분국 내의 수호가(수호 가문)(二十一屋形)의 대부분은 교토에 머물렀고, 국정의 중요 의제는 쇼군으로부터 수호들에게 질문되었으며, 쇼군과 함께 국정에 관여했다.[9]

분메이(文明) 연간, 야마토 고후쿠지(興福寺) 별당인 진손(尋尊)은 「다이죠인 사사 잡사기(大乗院寺社雑事記)」에, “특히 천하의 일, 더욱이 경사스러운 일이 없다. 긴고쿠(近国)에 있어서는 오미국(近江), 미노국(美濃), 오와리국(尾張), 도토미국(遠江), 미카와국(三河), 히다국(飛騨), 노토국(能登), 가가국(加賀), 에치젠국(越前), 야마토국(大和), 가와치국(河内)는 모두 쇼군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세금 등을 전혀 상납하지 않는 나라들이다. 그 외에는 기이국(紀伊), 셋쓰국(摂津), 에치고국(越中), 이즈미국(和泉)는 나라 안이 혼란스러운 사이에 세금 등의 문제에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 쇼군의 명령이 내려진 나라들은 하리마국(播磨), 비젠국(備前), 미마사카국(美作), 빗추국(備中), 빈고국(備後), 이세국(伊勢), 이가국(伊賀), 아와지국(淡路), 시코쿠(四国) 등이다. 모두 쇼군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수호의 태도는, 형식적으로는 명령을 두려워한다고 말하지만, 순행 등을 실제로는 하지 않았다. 수호대 이하 국내의 자들은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국은 모두 쇼군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라고 적고 있으며, 무로마치 궁 분국과 일본국의 범위가 같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10]

『남방기전(南方紀伝)』 등에 따르면, '''삼직칠두(三職七頭)'''의 가격(家格)이 정해졌다고 한다. '''간레이(管領)직'''에는 '''시바씨(斯波氏)''', '''하타케야마씨(畠山氏)''', '''호소카와씨(細川氏)'''의 삼씨(三氏)가 임하여 「'''삼직(三職)(삼간령(三管領))'''」이라 칭하고, '''야마나씨(山名氏)''', '''잇시키씨(一色氏)''', '''도키씨(土岐氏)''', '''아카마쓰씨(赤松氏)''', '''교고쿠씨(京極氏)''', '''우에스기씨(上杉氏)''', '''이세씨(伊勢氏)'''의 칠씨(七氏)가 「'''칠두(七頭)'''」라 칭해졌다. 특히 칠씨 중 야마나씨, 잇시키씨, 아카마쓰씨, 교고쿠씨의 사씨(四氏)와 도키씨를 포함한 계오씨(計五氏)가 '''교토봉행직(京都奉行職)(사무라이도코로(侍所)소사)'''에 임하여 「'''사직(四職)'''」이라 칭해졌다. 칠두의 나머지 이씨(二氏) 중 이세씨는 '''주자(奏者)(신차)''', 우에스기씨는 '''간토 집사(関東執事)(간토 간레이)'''에 각각 임명되었다. 그 외, '''다케다씨(武田氏)''', '''오가사와라씨(小笠原氏)'''의 양씨(両氏)를 '''예식봉행(禮式奉行)'''에, '''기라씨(吉良氏)''', '''시부카와씨(渋川氏)''', '''이마가와씨(今川氏)'''의 제씨(諸氏)는 '''무두(武頭)(사이다이쇼)'''로 하여, 쇼군 직할의 군사력으로 봉공중(奉公衆)이 편성되었다.

  • 삼간령(三管領)(삼직가):간레이직에 임명되는 다이묘(大名家)이며, 특별히 높은 격식을 자랑했다.
  • * 시바씨(斯波氏)(무위가):에치젠국・오와리국・도토미국의 슈고(守護)직을 세습. 삼직 중에서도 필두에 위치하며, 쇼군 연지(将軍連枝)와 동등한 격식이었다.
  • * 하타케야마씨(畠山氏)(금고가):기이국・가와치국・엣추국의 슈고직을 세습. 무로마치 중기에는 큰 세력을 자랑했지만, 동가의 가독쟁이(家督爭)가 오닌의 난(応仁の乱)의 최대 요인이 되었다.
  • * 호소카와씨(細川氏)(경조가):셋쓰국・단바국・사누키국・도사국의 슈고직을 세습. 무로마치 후기에는 간레이직을 거의 독점하여, 막부는 ‘호소카와 정권’의 체제를 갖추었다.

  • 어상반중(御相伴衆):삼직에 이은 유력 다이묘(大名家)로, 숙로(宿老)로서 숙로회의(宿老会議)에 출석하여, 쇼군의 자문에 답하여 막정(幕政)에 참가할 수 있던 집(家).
  • * 잇시키씨(一色氏):단고국・이세국・미카와국의 슈고직을 세습. 사무라이도코로(侍所)소사에 임명되는 집안.
  • * 하타케야마씨(畠山氏)(장작가):노토국의 슈고직을 세습.
  • * 호소카와씨(細川氏)(산슈가):아와국의 슈고직을 세습.
  • * 야마나씨(山名氏):다지마국・빈고국・아키국의 슈고직을 세습. 사무라이도코로(侍所)소사에 임명되는 집안.
  • * 아카마쓰씨(赤松氏):하리마국・비젠국・미마사카국의 슈고직을 세습. 사무라이도코로(侍所)소사에 임명되는 집안. 가키쓰의 난(嘉吉の乱)을 일으켜 일시 멸망하지만, 후에 재흥을 허락받는다.
  • * 교고쿠씨(京極氏):이즈모국・오키국・히다국의 슈고직을 세습. 사무라이도코로(侍所)소사에 임명되는 집안.
  • * 오우치씨(大内氏):스오국・나가토국・부젠국・지쿠젠국의 슈고직을 세습.

  • 국지중(国持衆):삼직, 어상반중(御相伴衆)에 속하는 다이묘의 서가(庶家)나, 기나이(畿内) 근국의 유력 다이묘(大名家)가 열거되었다.
  • * 시바씨(斯波氏)(오노가):가가국・에치젠국 오노군(越前大野郡)의 슈고직을 세습.
  • * 도키씨(土岐氏):미노국의 슈고직을 세습. 사무라이도코로(侍所)소사에 임명되는 집안.
  • * 롯카쿠씨(六角氏):오미국의 슈고직을 세습.
  • * 호소카와씨(細川氏)(조와이젠가):이즈미국의 슈고직을 세습.
  • * 호소카와씨(細川氏)(게와이젠가):이즈미국의 슈고직을 세습.
  • * 야마나씨(山名氏)(하키가):호키국의 슈고직을 세습.
  • * 야마나씨(山名氏)(이시미가):이와미국의 슈고직을 세습.
  • * 다케다씨(武田氏)(마메슈가):와카사국・아키국의 슈고직을 세습. 가이 다케다씨(甲斐武田家)의 별류(別流).
  • * 도가시씨(富樫氏):가가국의 슈고직을 세습.
  • * 이마가와씨(今川氏):스루가국의 슈고직을 세습. 가마쿠라부(鎌倉府)의 담당 지역에 인접해 있는 것으로부터 그 감시의 역할을 맡았다.
  • * 우에스기씨(上杉氏)(에치고슈고가):이마가와씨와 동일한 역할을 맡았다.
  • * 오가사와라씨(小笠原氏)(시나노슈고가):이마가와씨, 에치고슈고 우에스기씨와 동일한 역할을 맡았다.
  • * 고노씨(河野氏):이요국의 슈고직을 세습.

  • 준국지중(准国持衆):국지(国持)에 준하는 집(家).
  • * 호소카와씨(細川氏)(오슈가):근세(近世)]다이묘(大名)]로 성장한 히고 호소카와씨(肥後細川氏)의 전신(血統的には上和泉家).
  • * 교고쿠씨(京極氏)(가슈가):가키쓰의 난(嘉吉の乱)]에서 목숨을 잃은 교고쿠 다카카즈(京極高数)]의 흐름인가.


시대에 따라 변천은 있지만, 이들 삼직가(三職家)에서 준국지중(准国持衆)까지의 20여 가(家)가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에서 「다이묘(大名)」라고 칭해진 집들로[16], 속칭 「'''무로마치 이십일야형(室町二十一屋形)'''」이라고 불렸다(『경극가보(京極家譜)』).

이 「다이묘(大名)」라고 칭해진 집들 이외에, 이하와 같은 가격(家格)이 있었다.

  • 외양중(外様衆):국지중(国持衆)의 일문(一門)의 집(家). 효조슈(評定衆).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이래의 무문(武門)의 명가(名家). 원슈고(元守護).
  • * 시바씨(斯波氏)(스에노가):시바 우지쓰네(斯波氏経)]의 계통인가.
  • * 시바씨(斯波氏)(고조가)
  • * 호소카와씨(細川氏)(덴지쿠가)
  • * 호소카와씨(細川氏)(시시쿠사가)
  • * 하타케야마씨(畠山氏)(니시야우치가)
  • * 하타케야마씨(畠山氏)(스루가슈가)
  • * 야마나씨(山名氏)(셋쓰슈가)
  • * 야마나씨(山名氏)(아루지가)
  • * 잇시키씨(一色氏)(궁내소보가)
  • * 잇시키씨(一色氏)(고로가)
  • * 아카마쓰씨(赤松氏)(시치조가):아카마쓰 노리(赤松範資)의 계통.
  • * 아카마쓰씨(赤松氏)(아리마가):아카마쓰 요시(赤松義祐)의 계통. 근세(近世)]다이묘(大名)]로 성장한 구루메 아리마씨(久留米有馬氏)의 전신.
  • * 교고쿠씨(京極氏)(구라치가)
  • * 교고쿠씨(京極氏)(궁내소보가):서류(庶流)가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아마고씨(尼子氏)]로 성장.
  • * 니키씨(仁木氏)(단바가)
  • * 니키씨(仁木氏)(이세가)
  • * 이마가와씨(今川氏)(가마하라가)
  • * 이마가와씨(今川氏):원 규슈 단다이(九州探題)]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의 계통.
  • * 도키씨(土岐氏)(소가야가)
  • * 도키씨(土岐氏)(사라키가)
  • * 우에스기씨(上杉氏)(하치조 우에스기씨(八条上杉氏)|니하시 우에스기씨(二橋上杉氏)]])
  • * 우에스기씨(上杉氏)(이누카케 우에스기씨(犬懸上杉氏)|시조 우에스기씨(四条上杉氏)]])
  • * 다카시마씨(高島氏)(에치주슈가)
  • * 다카시마씨(高島氏)(에나다가)
  • * 오시마씨(大島氏):원 미카와국 슈고(元三河守護)
  • * 미야씨(宮氏):원 빗추국 슈고(元備中守護)
  • * 이와마쓰씨(岩松氏):원 히다국, 이요국, 빈고국 슈고(守護)
  • * 다케다씨(武田氏)(가이슈고가):전국기(戦国期)
  • * 셋쓰씨(摂津氏):효조슈(評定衆)의 가가(家柄)].
  • * 하타노씨(波多野氏)
  • * 니카이도씨(二階堂氏)
  • * 오타씨(太田氏)
  • * 마치노씨(町野氏)
  • * 도히씨(土肥氏)(미누라가)
  • * 구도씨(工藤氏)(나가노씨(長野氏)|나가노가]])
  • * 구도씨(工藤氏)(고바야카와씨(小早川氏)|고바야카와가]])

  • 오토모슈(御供衆):외양중(外様衆)에 이은 가격(家格)으로, 일부에 국지중(国持衆)과 같은 격식을 가진 집(家)도 있었다.
  • * 호소카와씨(細川氏)(아와지가):아와지국의 슈고(守護職)직을 세습. 국지중(国持衆)과 같음. 봉공중(奉公衆)의 일번 번두(一番番頭).
  • * 호소카와씨(細川氏)(비츄가):빗추국의 슈고(守護職)직을 세습. 국지중(国持衆)과 같음.
  • * 호소카와씨(細川氏)(덴큐가):셋쓰국 나카지마 군(摂津中島郡)의 슈고(守護職)직을 세습. 국지중(国持衆)과 같음.
  • * 야마나씨(山名氏)(이나바가):이나바국의 슈고(守護職)직을 세습. 국지중(国持衆)과 같음.
  • * 이세씨(伊勢氏)(세슈가):세이쇼 십사직(政所執事職)을 세습.
  • * 모모이씨(桃井氏):봉공중(奉公衆)의 이번 번두(二番番頭).
  • * 하타케야마씨(畠山氏)(반슈가):봉공중(奉公衆)의 삼번 번두(三番番頭).
  • * 우에노씨(上野氏):봉공중(奉公衆)의 삼번 번두(三番番頭).
  • * 하타케야마씨(畠山氏)(츄무쇼보가):봉공중(奉公衆)의 사번 번두(四番番頭).
  • * 오다테씨(大舘氏):봉공중(奉公衆)의 오번 번두(五番番頭).
  • * 호소카와씨(細川氏)(야슈가):이요국 우마군(伊予宇摩郡)의 슈고(守護職)직을 세습.
  • * 잇시키씨(一色氏)(식부쇼보가):잇시키 모치노리(一色持範)]의 계통.

  • 오베야슈(御部屋衆):오토모슈(御供衆)에 이은 가격(家格). 일부에 오토모슈(御供衆)와 중복되는 집(家)이 있다.
  • * 요시미씨(吉見氏)
  • * 미부치씨(三淵氏)
  • * 다카시마씨(高島氏)(구쓰키씨(朽木氏)|구쓰키가]])

  • 신지슈(申次衆):오베야슈(御部屋衆)에 이은 가격(家格). 일부에 오토모슈(御供衆), 오베야슈(御部屋衆)와 중복되는 집(家)이 있다.
  • * 이세씨(伊勢氏)(비츄가):호조 소운(北条早雲)]을 낸 집이라고 생각된다.
  • * 하타케야마씨(畠山氏)
  • * 오다테씨(大舘氏)
  • * 우에노씨(上野氏)
  • * 아라카와씨(荒川氏)

  • 세쓰사쿠슈(節朔衆):신지슈(申次衆)에 이은 가격(家格)으로, 식일(式日)에 쇼군의 면회를 허락받은 집(家).
  • * 오가사와라씨(小笠原氏)(비슈가):시나노 오가사와라씨(信濃小笠原氏)의 별류(別流). 쇼군(将軍家)가의 궁마 사범역(弓馬師範役)이었던 것으로부터, 본래의 가격(家格) 이상의 격식을 자랑했다.
  • * 잇시키씨(一色氏)(아슈가)
  • * 주조씨(中条氏)
  • * 센슈씨(千秋氏)
  • * 유키씨(結城氏)
  • * 나라바씨(楢葉氏)

  • 소슈(走衆):쇼군 직참(将軍直参). 보병(歩兵)|도보(徒歩)]로 쇼군의 경호를 했다.
  • 고반슈(小番衆):그 외의 봉공중(奉公衆).
  • * 가코씨(加古氏)
  • * 다케바야시씨(竹林氏)
  • * 사토미씨(里見氏)
  • * 오이다씨(大井田氏)
  • * 하가와씨(羽川氏)
  • * 우시자와씨(牛沢氏)
  • * 요코세씨(横瀬氏)
  • * 구마가야씨(熊谷氏)(시오쓰가)
  • * 오하라씨(大原氏)(비츄슈가)
  • * 오하라씨(大原氏)(시라이가)
  • * 고바야카와씨(小早川氏)


그 외, 「오이치카(御一家)」라고 칭해진 기라씨(吉良氏)(사이죠가)・기라씨(吉良氏)(도조가)・시부카와씨(渋川氏)(만라이계)・이시바시씨(石橋氏)・이시토씨(石塔氏)는 별격(別格)으로서, 삼직(三職)과 같은 격식을 주어졌다. 또 가마쿠라 구보(鎌倉公方)가 지배하는 간토(関東)・오슈(奥羽)에서는 「간토 간레이(関東管領)」「간토하치야카타(関東八屋形)」등 독자적인 가격(家格)이 정비되어 가고, 그 한편으로 교토(京都)의 막부(幕府)와 직접 주종(主従)을 맺는 「교토부지슈(京都扶持衆)」등도 존재했다.

## 지방

아시카가 막부는 일본의 세 막부 중 가장 약한 막부였다. 가마쿠라 막부나 도쿠가와 막부와는 달리,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정권을 세울 당시 그의 통치를 뒷받침할 개인적인 영토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아시카가 막부는 쇼군의 권위와 개인적인 권력에 크게 의존했다. 가마쿠라 시대의 중앙집권적인 주종 관계는 고도로 분권화된 다이묘(지방 영주) 체제로 대체되었고, 직접적인 영토가 부족했기 때문에 쇼군의 군사력은 다이묘의 충성심에 크게 의존했다.

겐무 신정의 실패로 궁정은 약화되고 종속적인 상태가 되었는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교토에서 천황과 가까운 곳에 궁정을 설립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강화했다. 지방 다이묘의 권한은 가마쿠라 시대보다 크게 확대되었다. 막부가 임명한 슈고는 군사 및 치안 책임 외에도 지방 관료의 사법, 경제 및 과세 권한을 흡수했고, 각 지방의 정부 소유지는 다이묘 또는 그 신하들의 개인 소유지로 빠르게 흡수되었다.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기반을 모두 상실한 궁정은 대부분의 권력을 상실했고, 그 권력은 아시카가 쇼군이 장악했다. 이러한 상황은 세 번째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통치하에 정점에 달했다.

무로마치 막부는 변방 분할 통치와 원국(遠國)의 화합을 기본적인 정치 방침으로 삼았다.[11] 15세기 전반에 막부는 “원국의 일은 비록 상의와 다르더라도, 적당히 처리하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12] 일본의 동쪽 국경은 가마쿠라 막부와의 경계인 스루가국(駿河)]에 있다고 이해하게 되었다.[13][14] 이로써 지방은 막부에 의한 일본 통치의 범위 밖에 놓이게 되었다.

도호쿠 지방에는 처음에 오슈 간레이가 설치되었으나, 시바 이에카네 등 4명의 간레이가 병립하여 다투는 등 혼란을 극에 달해, 반세기가 지나 오슈 단다이가 설치되었다. 더욱이, 오슈・우슈 2국 (무쓰국・데와국)이 가마쿠라부의 관할 하에 편입되면서 폐지되어 한때 이나무라칸포와 시노가와칸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막부는 가마쿠라부에 대항하기 위해, 시바 이에카네의 손자 오사키 아키모치를 오슈 단다이에 보임하고, 이후 오사키씨에 의해 세습된다. 그러나 아시나씨・다테씨 등이 교토부지슈(京都扶持衆)로서 센고쿠 다이묘화 해감에 따라, 오사키 씨도 지방 영주화 해간다. 또한, 이에카네의 사후 우슈 단다이가 분열하여 차남 모가미 가네요리 이후 모가미씨에 의해 세습된다.

3. 1. 중앙

아시카가 막부는 일본의 세 막부 중 가장 약했다.[7] 전임자인 가마쿠라 막부나 후임자인 도쿠가와 막부와는 달리,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정권을 세울 당시 그의 통치를 뒷받침할 개인적인 영토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아시카가 막부는 쇼군의 권위와 개인적인 권력에 크게 의존했다. 가마쿠라 시대의 중앙집권적인 주종 관계는 고도로 분권화된 다이묘(지방 영주) 체제로 대체되었고, 직접적인 영토가 부족했기 때문에 쇼군의 군사력은 다이묘의 충성심에 크게 의존했다.[7]

겐무 신정의 실패로 궁정은 약화되고 종속적인 상태가 되었는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교토에서 천황과 가까운 곳에 궁정을 설립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강화했다. 지방 다이묘의 권한은 가마쿠라 시대보다 크게 확대되었다. 막부가 임명한 슈고는 군사 및 치안 책임 외에도 지방 관료의 사법, 경제 및 과세 권한을 흡수했고, 각 지방의 정부 소유지는 다이묘 또는 그 신하들의 개인 소유지로 빠르게 흡수되었다.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기반을 모두 상실한 궁정은 대부분의 권력을 상실했고, 그 권력은 아시카가 쇼군이 장악했다. 이러한 상황은 세 번째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통치하에 정점에 달했다.[7]

그러나 요시미츠 이후, 아시카가 막부의 구조적 약점은 여러 차례의 계승 문제와 조기 사망으로 인해 드러났다. 오닌 전쟁 이후 이것은 극적으로 더욱 심각해졌고, 막부 자체는 교토의 지역 정치 세력 이상으로 축소되었다.[7]

무로마치 막부의 직제는 거의 가마쿠라 막부의 제도를 계승하고 있다. 기본 법으로 겐무 시키모쿠(建武式目)를 제정(1336년)했다. 구체적인 법령으로는 가마쿠라 시대의 고세이하이 시키모쿠(御成敗式目)(정영식목)를 적용하고, 필요에 따라 “겐무 이래 추가”(建武以来追加)라고 불리는 추가 법을 발포하여 보충하고 있다.

막부 개설 당초, 초대 쇼군 다카우지(尊氏)는 무케의 동량(武家の棟梁)으로서 제국의 무사를 통솔하고 집사(執事) 다카모로나오(高師直)가 이를 보좌하며, 정무·재판은 동생 아시카가 나오요시(足利直義)가 총리하는 이원 체제가 취해졌다. 이윽고 나오요시와 모로나오 사이에 불화가 생겨 막부 내가 다카우지·나오요시 양파로 분열하여 칸오의 난(観応の擾乱)으로 발전, 남조(南朝) 측과 제국의 무사들을 끌어들여 내란은 장기화되었다.

다카우지의 뒤를 이은 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足利義詮)는 막부 기구의 재건에 힘썼고, 병으로 쓰러지자 호소카와 요리유키(細川頼之)를 관령(管領)에 임명하여 미성년의 후계자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를 후견시켰다. 요리유키 후견기 및 요시미츠에 의한 친정기를 거쳐 정치 기구가 정비되어 갔다.

가마쿠라 시대의 쇼군은 전국의 고케닌(御家人)과 개별적으로 주종 관계를 맺고, 소령(지토(地頭)직)을 안두(安堵)하는 입장에 있었고, 슈고(守護)는 임국의 군사·형사의 장이었고, 국내 고케닌의 감독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무로마치 막부는 슈고다이묘(守護大名)에 의한 합의제·연합 정권이었다고 평가된다. 장기간의 남북조 내란 중에 슈고는 그 권한을 확대하고, 임국 내의 영주층 무사(쿠니진(国人))을 피관(被官)화하는 등 임국의 관리자에서 영국 지배자(다이묘)가 되어 간다(단, 지역차가 있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슈고령고쿠세이”(守護領国制)를 참조). 이에 따라 고케닌=쇼군 직신이라는 가마쿠라 막부의 기본 구조는 상실되고, 쇼군의 제국 무사·소령에 대한 지배는 상당히 후퇴하여 주로 슈고를 통해 전국 지배를 하는 체제가 되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쇼군이 이 현상을 좋게 여긴 것은 아니며, 가마쿠라 시대 이래의 아시카가 씨의 근본 피관이나 일족, 슈고의 분가 등, 슈고 다이묘를 넘어 각지의 무사와 주종 관계를 맺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직속 군사력의 정비에 열심이었고, 봉공중(奉公衆)을 정비해 나가고, 이후의 쇼군에게도 계승되었다.

또한 요시미츠 이후의 무로마치 막부는 “천하 무위(天下無為)”의 실현을 전국 통치의 기본적인 생각으로 하고 있었다.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며, 무로마치 궁인 쇼군의 상의(上意)를 가지고 분쟁 당사자 간의 조정을 꾀하는 것이었다. 상의는 분쟁 해결의 수단으로서는 만능이 아니었지만, 슈고나 쿠니진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7] 그러나 가키쓰의 난(嘉吉の乱) 이후, 미성년의 쇼군이 계속되는 가운데, 관령인 호소카와 씨와 하타케야마 씨가 상의를 이용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려고 하고, 거기에 휘둘린 슈고나 쿠니진은 상의에 따르지 않고 독자 행동을 취하게 된다. 이윽고 그들은 동료끼리 연계하여 행동함으로써 상의의 상대화를 도모하게 되고, 특히 슈고들은 호소카와 씨 측과 반 호소카와 씨 측(처음에는 하타케야마 씨, 후에 야마나 씨를 맹주로 하는)으로 나뉘어 집단을 형성하여 다투어, 오닌의 난(応仁の乱)의 원인을 만들었다.[8]

그 한편, 무로마치 쇼군 이상의 세위를 가진 슈고 다이묘를 막부가 위험시하여 토벌한 예도 있다. 그러나 개개의 슈고 다이묘는 그렇다 치더라도, 슈고 다이묘와 무로마치 쇼군이 전면적으로 대립하는 일은 없었다. 슈고 다이묘는 막부로부터 임명받은 슈고직에 지배의 정당성의 근거가 있고, 무로마치 쇼군의 권위를 부정할 수 없고, 양자는 상호 보완하는 체제였다(무로마치 막부―슈고 체제). 쇼군의 권위의 실추는 곧 슈고 다이묘의 권위의 실추를 의미하고, 오닌의 난 이후 그렇게 되어 간다.

중세 후기, 천황으로부터 일본국의 지배를 위임받았던 무로마치 궁(室町殿)(征夷大将軍)의 정치적 권한이 미치는 실질적 통치 범위, 관할 구역을 '''무로마치 궁 분국'''(室町殿御分国), 또는 '''무로마치 궁 분국'''(室町殿分国), '''공방 분국'''(公方分国)이라고 한다. 그 범위는 규슈 탐제(九州探題) 관할 11개국, 가마쿠라 푸(鎌倉府) 관할 10개국을 제외한 기나이(畿内)·킨코쿠(近国), 산요도(山陽道), 산인도(山陰道), 남카이도(南海道), 동카이도(東海道), 호쿠리쿠도(北陸道)의 여러 국들로 이루어진다.[9] 분국 내의 수호가(수호 가문)(二十一屋形)의 대부분은 교토에 머물렀고, 국정의 중요 의제는 쇼군으로부터 수호들에게 질문되었으며, 쇼군과 함께 국정에 관여했다.[9]

문명 연간, 야마토 흥복사(興福寺) 별당인 긴손(尋尊)은 「대승원사사잡사기」(大乗院寺社雑事記)에, “특히 천하의 일, 더욱이 경사스러운 일이 없다. 킨코쿠(近国)에 있어서는 오미(近江), 미노(美濃), 오와리(尾張), 토토미(遠江), 미카와(三河), 히다(飛騨), 노토(能登), 가가(加賀), 에치젠(越前), 야마토(大和), 카와치(河内)는 모두 쇼군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세금 등을 전혀 상납하지 않는 나라들이다. 그 외에는 키이(紀伊), 셋쓰(摂津), 에치고(越中), 이즈미(和泉)는 나라 안이 혼란스러운 사이에 세금 등의 문제에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 쇼군의 명령이 내려진 나라들은 하리마(播磨), 비젠(備前), 미사카(美作), 비추(備中), 비고(備後), 이세(伊勢), 이가(伊賀), 아와지(淡路), 시코쿠(四国) 등이다. 모두 쇼군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수호의 태도는, 형식적으로는 명령을 두려워한다고 말하지만, 순행 등을 실제로는 하지 않았다. 수호대 이하 국내의 자들은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국은 모두 쇼군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라고 적고 있으며, 무로마치 궁 분국과 일본국의 범위가 같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10]

『南方紀伝』 등에 따르면, '''삼직칠두(三職七頭)'''의 가격(家格)이 정해졌다고 한다. '''관령직(管領職)'''에는 '''스파씨(斯波氏)''', '''하타케야마씨(畠山氏)''', '''호소카와씨(細川氏)'''의 삼씨(三氏)가 임하여 「'''삼직(三職)(삼관령(三管領))'''」이라 칭하고, '''야마나씨(山名氏)''', '''잇시키씨(一色氏)''', '''토키씨(土岐氏)''', '''아카마츠씨(赤松氏)''', '''쿄고쿠씨(京極氏)''', '''우에스기씨(上杉氏)''', '''이세씨(伊勢氏)'''의 칠씨(七氏)가 「'''칠두(七頭)'''」라 칭해졌다. 특히 칠씨 중 야마나씨, 잇시키씨, 아카마츠씨, 쿄고쿠씨의 사씨(四氏)와 토키씨를 포함한 계오씨(計五氏)가 '''교토봉행직(京都奉行職)(사지(侍所)소사)'''에 임하여 「'''사직(四職)'''」이라 칭해졌다. 칠두의 나머지 이씨(二氏) 중 이세씨는 '''주자(奏者)(신차)''', 우에스기씨는 '''관동집사(関東執事)(관동관령)'''에 각각 임명되었다. 그 외, '''다케다씨(武田氏)''', '''오가사와라씨(小笠原氏)'''의 양씨(両氏)를 '''례식봉행(禮式奉行)'''에, '''기라씨(吉良氏)''', '''시부카와씨(渋川氏)''', '''이마가와씨(今川氏)'''의 제씨(諸氏)는 '''무두(武頭)(사이다이쇼)'''로 하여, 쇼군 직할의 군사력으로 봉공중(奉公衆)이 편성되었다.

  • 삼관령(三管領)(삼직가):관령직에 임명되는 다이묘가(大名家)이며, 특별히 높은 격식을 자랑했다.
  • * 스파씨(斯波氏)(무위가):에치젠(越前)・오와리(尾張)・토토미(遠江)의 슈고직(守護職)을 세습. 삼직 중에서도 필두에 위치하며, 쇼군 연지(将軍連枝)와 동등한 격식이었다.
  • * 하타케야마씨(畠山氏)(금고가):키이(紀伊)・카와치(河内)・에치주(越中)의 슈고직을 세습. 무로마치 중기에는 큰 세력을 자랑했지만, 동가의 가독쟁이(家督爭)가 응인의 난(応仁の乱)의 최대 요인이 되었다.
  • * 호소카와씨(細川氏)(경조가):셋쓰(摂津)・탄바(丹波)・사누키(讃岐)・토사(土佐)의 슈고직을 세습. 무로마치 후기에는 관령직을 거의 독점하여, 막부는 ‘호소카와 정권’의 체제를 갖추었다.

  • 어상반중(御相伴衆):삼직에 이은 유력 다이묘가(大名家)로, 숙로(宿老)로서 숙로회의(宿老会議)에 출석하여, 쇼군의 자문에 답하여 막정(幕政)에 참가할 수 있던 집(家).
  • * 잇시키씨(一色氏):탄고(丹後)・이세(伊勢)・미카와(三河)의 슈고직을 세습. 사지소사(侍所所司)에 임명되는 집안.
  • * 하타케야마씨(畠山氏)(장작가):노토(能登)의 슈고직을 세습.
  • * 호소카와씨(細川氏)(산슈가):아와(阿波)의 슈고직을 세습.
  • * 야마나씨(山名氏):타지마(但馬)・비고(備後)・아키(安芸)의 슈고직을 세습. 사지소사(侍所所司)에 임명되는 집안.
  • * 아카마츠씨(赤松氏):하리마(播磨)・비젠(備前)・미사카(美作)의 슈고직을 세습. 사지소사(侍所所司)에 임명되는 집안. 카키의 난(嘉吉の乱)을 일으켜 일시 멸망하지만, 후에 재흥을 허락받는다.
  • * 쿄고쿠씨(京極氏):이즈모(出雲)・오키(隠岐)・히다(飛騨)의 슈고직을 세습. 사지소사(侍所所司)에 임명되는 집안.
  • * 오우치씨(大内氏):스오(周防)・나가토(長門)・부젠(豊前)・치쿠젠(筑前)의 슈고직을 세습.

  • 국지중(国持衆):삼직, 어상반중(御相伴衆)에 속하는 다이묘의 서가(庶家)나, 기나이(畿内) 근국의 유력 다이묘가(大名家)가 열거되었다.
  • * 스파씨(斯波氏)(오오노가):가가(加賀)・에치젠 오오노군(越前大野郡)의 슈고직을 세습.
  • * 토키씨(土岐氏):미노(美濃)의 슈고직을 세습. 사지소사(侍所所司)에 임명되는 집안.
  • * 록각씨(六角氏):오미(近江)의 슈고직을 세습.
  • * 호소카와씨(細川氏)(죠와이젠가):와카야마(和泉)의 슈고직을 세습.
  • * 호소카와씨(細川氏)(게와이젠가):와카야마(和泉)의 슈고직을 세습.
  • * 야마나씨(山名氏)(하키가):하키(伯耆)의 슈고직을 세습.
  • * 야마나씨(山名氏)(이시미가):이시미(石見)의 슈고직을 세습.
  • * 다케다씨(武田氏)(마메슈가):와카사(若狭)・아키(安芸)의 슈고직을 세습. 카이 다케다가(甲斐武田家)의 별류(別流).
  • * 후가시씨(富樫氏):가가(加賀)의 슈고직을 세습.
  • * 이마가와씨(今川氏):스루가(駿河)의 슈고직을 세습. 가마쿠라후(鎌倉府)의 담당 지역에 인접해 있는 것으로부터 그 감시의 역할을 맡았다.
  • * 우에스기씨(上杉氏)(에치고슈고가):이마가와씨와 동일한 역할을 맡았다.
  • * 오가사와라씨(小笠原氏)(시나노슈고가):이마가와씨, 에치고슈고 우에스기씨와 동일한 역할을 맡았다.
  • * 코노씨(河野氏):이요(伊予)의 슈고직을 세습.

  • 준국지중(准国持衆):국지(国持)에 준하는 집(家).
  • * 호소카와씨(細川氏)(오슈가):근세(近世)다이묘(大名)로 성장한 히고 호소카와씨(肥後細川氏)의 전신(血統的には上和泉家).
  • * 쿄고쿠씨(京極氏)(가슈가):가키의 난(嘉吉の乱)에서 목숨을 잃은 쿄고쿠 타카카즈(京極高数)의 흐름인가.


시대에 따라 변천은 있지만, 이들 삼직가(三職家)에서 준국지중(准国持衆)까지의 20여 가(家)가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에서 「다이묘(大名)」라고 칭해진 집들로[16], 속칭 「'''무로마치 이십일야게(室町二十一屋形)'''」이라고 불렸다(『경극가보(京極家譜)』).

이 「다이묘(大名)」라고 칭해진 집들 이외에, 이하와 같은 가격(家格)이 있었다.

  • 외양중(外様衆):국지중(国持衆)의 일문(一門)의 집(家). 평정중(評定衆).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이래의 무문(武門)의 명가(名家). 원슈고(元守護).
  • * 스파씨(斯波氏)(스에노가):스파씨 케이(斯波氏経)의 계통인가.
  • * 스파씨(斯波氏)(고죠가)
  • * 호소카와씨(細川氏)(텐지쿠가)
  • * 호소카와씨(細川氏)(시시쿠사가)
  • * 하타케야마씨(畠山氏)(니시야우치가)
  • * 하타케야마씨(畠山氏)(스루가슈가)
  • * 야마나씨(山名氏)(셋쓰슈가)
  • * 야마나씨(山名氏)(아루지가)
  • * 잇시키씨(一色氏)(궁내소보가)
  • * 잇시키씨(一色氏)(고로가)
  • * 아카마츠씨(赤松氏)(시치죠가):아카마츠 노리후사(赤松範資)의 계통.
  • * 아카마츠씨(赤松氏)(아리마가):아카마츠 요스케(赤松義祐)의 계통. 근세(近世)다이묘(大名)로 성장한 구루메 아리마씨(久留米有馬氏)의 전신.
  • * 쿄고쿠씨(京極氏)(쿠라치가)
  • * 쿄고쿠씨(京極氏)(궁내소보가):서류(庶流)가 전국대명(戦国大名)니고쿠씨(尼子氏)로 성장.
  • * 니키씨(仁木氏)(탄바가)
  • * 니키씨(仁木氏)(이세가)
  • * 이마가와씨(今川氏)(가마하라가)
  • * 이마가와씨(今川氏):원 규슈 탄다이(元九州探題)이마가와 사다요시(今川貞世)의 계통.
  • * 토키씨(土岐氏)(소가야가)
  • * 토키씨(土岐氏)(사라키가)
  • * 우에스기씨(上杉氏)(니하시 우에스기씨(二橋上杉氏))
  • * 우에스기씨(上杉氏)(시죠 우에스기씨(四条上杉氏))
  • * 타카시마씨(高島氏)(에치주슈가)
  • * 타카시마씨(高島氏)(에나다가)
  • * 오시마씨(大島氏):원 미카와 슈고(元三河守護)
  • * 미야씨(宮氏):원 비츄 슈고(元備中守護)
  • * 이와마츠씨(岩松氏):원 히다(飛騨), 이요(伊予), 비고(備後) 슈고(守護)
  • * 다케다씨(武田氏)(카이슈고가):전국기(戦国期)
  • * 셋쓰씨(摂津氏):평정중(評定衆)의 가가(家柄).
  • * 하다노씨(波多野氏)
  • * 니카이도씨(二階堂氏)
  • * 오오타씨(太田氏)
  • * 마치노씨(町野氏)
  • * 도히씨(土肥氏)(미누라가)
  • * 쿠도씨(工藤氏)(나가노가)
  • * 쿠도씨(工藤氏)(코바야카와가)

  • 오토모중(御供衆):외양중(外様衆)에 이은 가격(家格)으로, 일부에 국지중(国持衆)과 같은 격식을 가진 집(家)도 있었다.
  • * 호소카와씨(細川氏)(아와지가):아와지(淡路)의 슈고직(守護職)을 세습. 국지중(国持衆)과 같음. 봉공중(奉公衆)의 일번 번두(一番番頭).
  • * 호소카와씨(細川氏)(비츄가):비츄(備中)의 슈고직(守護職)을 세습. 국지중(国持衆)과 같음.
  • * 호소카와씨(細川氏)(덴큐가):셋쓰 나카지마군(摂津中島郡)의 슈고직(守護職)을 세습. 국지중(国持衆)과 같음.
  • * 야마나씨(山名氏)(이나바가):이나바(因幡)의 슈고직(守護職)을 세습. 국지중(国持衆)과 같음.
  • * 이세씨(伊勢氏)(세슈가):세이쇼 십사직(政所執事職)을 세습.
  • * 모모이씨(桃井氏):봉공중(奉公衆)의 이번 번두(二番番頭).
  • * 하타케야마씨(畠山氏)(반슈가):봉공중(奉公衆)의 삼번 번두(三番番頭).
  • * 우에노씨(上野氏):봉공중(奉公衆)의 삼번 번두(三番番頭).
  • * 하타케야마씨(畠山氏)(츄무쇼보가):봉공중(奉公衆)의 사번 번두(四番番頭).
  • * 오오다테씨(大舘氏):봉공중(奉公衆)의 오번 번두(五番番頭).
  • * 호소카와씨(細川氏)(야슈가):이요 우마군(伊予宇摩郡)의 슈고직(守護職)을 세습.
  • * 잇시키씨(一色氏)(식부쇼보가):잇시키 모리노리(一色持範)의 계통.

  • 오베야슈(御部屋衆):오토모중(御供衆)에 이은 가격(家格). 일부에 오토모중(御供衆)과 중복되는 집(家)이 있다.
  • * 요시미씨(吉見氏)
  • * 미부치씨(三淵氏)
  • * 타카시마씨(高島氏)(쿠츠키가)

  • 신차슈(申次衆):오베야슈(御部屋衆)에 이은 가격(家格). 일부에 오토모중(御供衆), 오베야슈(御部屋衆)와 중복되는 집(家)이 있다.
  • * 이세씨(伊勢氏)(비츄가):호죠 소운(北条早雲)을 낸 집이라고 생각된다.
  • * 하타케야마씨(畠山氏)
  • * 오오다테씨(大舘氏)
  • * 우에노씨(上野氏)
  • * 아라카와씨(荒川氏)

  • 세쓰사쿠슈(節朔衆):신차슈(申次衆)에 이은 가격(家格)으로, 식일(式日)에 쇼군의 면회를 허락받은 집(家).
  • * 오가사와라씨(小笠原氏)(비슈가):시나노 오가사와라씨(信濃小笠原氏)의 별류(別流). 쇼군가(将軍家)의 궁마 사범역(弓馬師範役)이었던 것으로부터, 본래의 가격(家格) 이상의 격식을 자랑했다.
  • * 잇시키씨(一色氏)(아슈가)
  • * 츄죠씨(中条氏)
  • * 센슈씨(千秋氏)
  • * 유키씨(結城氏)
  • * 나라바씨(楢葉氏)

  • 소슈(走衆):쇼군 직참(将軍直参). 도보(徒歩)로 쇼군의 경호를 했다.
  • 코반슈(小番衆):그 외의 봉공중(奉公衆).
  • * 카코씨(加古氏)
  • * 타케바야시씨(竹林氏)
  • * 사토미씨(里見氏)
  • * 오오이다씨(大井田氏)
  • * 하가와씨(羽川氏)
  • * 우시자와씨(牛沢氏)
  • * 요코세씨(横瀬氏)
  • * 쿠마가야씨(熊谷氏)(시오츠가)
  • * 오오하라씨(大原氏)(비츄슈가)
  • * 오오하라씨(大原氏)(시라이가)
  • * 코바야카와씨(小早川氏)


그 외, 「오이치카(御一家)」라고 칭해진 기라씨(吉良氏)(사이죠가)・기라씨(吉良氏)(토죠가)・시부카와씨(渋川氏)(만라이계)・이시바시씨(石橋氏)・이시토씨(石塔氏)는 별격(別格)으로서, 삼직(三職)과 같은 격식을 주어졌다. 또 가마쿠라 쿤보(鎌倉公方)가 지배하는 간토(関東)・오우슈(奥羽)에서는 「관동관령(関東管領)」「관동팔야게(関東八屋形)」등 독자적인 가격(家格)이 정비되어 가고, 그 한편으로 교토(京都)의 막부(幕府)와 직접 주종(主従)을 맺는 「교토후지슈(京都扶持衆)」등도 존재했다.

3. 2. 지방

아시카가 막부는 일본의 세 막부 중 가장 약한 막부였다. 가마쿠라 막부나 도쿠가와 막부와는 달리,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정권을 세울 당시 그의 통치를 뒷받침할 개인적인 영토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아시카가 막부는 쇼군의 권위와 개인적인 권력에 크게 의존했다. 가마쿠라 시대의 중앙집권적인 주종 관계는 고도로 분권화된 다이묘(지방 영주) 체제로 대체되었고, 직접적인 영토가 부족했기 때문에 쇼군의 군사력은 다이묘의 충성심에 크게 의존했다.

겐무 신정의 실패로 궁정은 약화되고 종속적인 상태가 되었는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교토에서 천황과 가까운 곳에 궁정을 설립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강화했다. 지방 다이묘의 권한은 가마쿠라 시대보다 크게 확대되었다. 막부가 임명한 슈고는 군사 및 치안 책임 외에도 지방 관료의 사법, 경제 및 과세 권한을 흡수했고, 각 지방의 정부 소유지는 다이묘 또는 그 신하들의 개인 소유지로 빠르게 흡수되었다.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기반을 모두 상실한 궁정은 대부분의 권력을 상실했고, 그 권력은 아시카가 쇼군이 장악했다. 이러한 상황은 세 번째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통치하에 정점에 달했다.

室町幕府는 변방 분할 통치와 원국(遠國)의 화합을 기본적인 정치 방침으로 삼았다.[11] 15세기 전반에 막부는 “원국의 일은 비록 상의와 다르더라도, 적당히 처리하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12] 일본의 동쪽 국경은 가마쿠라 막부와의 경계인 스루가(駿河)에 있다고 이해하게 되었다.[13][14] 이로써 지방은 막부에 의한 일본 통치의 범위 밖에 놓이게 되었다.

동북 지방에는 처음에 오슈 간령이 설치되었으나, 시바 이에카네 등 4명의 간령이 병립하여 다투는 등 혼란을 극에 달해, 반세기가 지나 오슈 탄다이가 설치되었다. 더욱이, 오슈・우슈 2국 (무쓰 국・데와 국)이 가마쿠라 부의 관할 하에 편입되면서 폐지되어 한때 이나무라 칸포와 시노가와 칸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막부는 가마쿠라 부에 대항하기 위해, 시바 이에카네의 손자 오사키 아키모치를 오슈 탄다이에 보임하고, 이후 오사키 씨에 의해 세습된다. 그러나 아시나 씨・다테 씨 등이 교토 후지슈로서 센고쿠 다이묘화 해감에 따라, 오사키 씨도 지방 영주화 해간다. 또한, 이에카네의 사후 우슈 탄다이가 분열하여 차남 모가미 카네요리 이후 모가미 씨에 의해 세습된다.

관응의 난이 일어나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가마쿠라(鎌倉)에 동국(東国) 10개국을 통괄하는 기관으로 가마쿠라부(鎌倉府)를 설치했다. 장관은 가마쿠라쿠보(鎌倉公方)였으며, 다카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모토우지(足利基氏)의 자손이 세습했고, 간토칸료(関東管領)가 보좌했다. 무로마치 시대를 통해 가마쿠라쿠보는 막부와 대립했고, 간토칸료를 역임한 우에스기 씨(上杉氏)와도 대립해 갔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막부는 동국과 무쓰(陸奥)의 유력 고쿠진(国人)을 교토후지슈(京都扶持衆)로 직신화했다. 이 때문에,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教) 시대에 에이쿄의 난(永享の乱)을 일으킨 제4대 가마쿠라쿠보 아시카가 모치우지(足利持氏)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일시적으로 직접 통치를 시도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모치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나리우지(足利成氏)를 새로운 가마쿠라쿠보로 삼았다. 그러나 나리우지도 쿄토쿠의 난(享徳の乱)을 일으켜, 코가성(古河城)으로 달아나 코가쿠보(古河公方)를 자칭했고, 더욱이 우에스기씨는 야마우치우에스기가(山内上杉家)와 오기야우에스기가(扇谷上杉家)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오닌의 난(応仁の乱)이 시작되기 전에 간토 지방은 혼란 상태에 빠졌다. 막부도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었고,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의 서형 아시카가 마사토모(足利政知)를 간토에 파견했다(호리코시쿠보(堀越公方)). 그러나, 호리코시쿠보도 마사토모의 사후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중신 이세 모리토키(伊勢盛時)(호죠 소운(北条早雲))에 의해 무너져 실패로 끝났다. 코가쿠보도 코유미쿠보(小弓公方)와의 분열을 거쳐, 모리토키의 자손인 고호죠씨(後北条氏)에 의해 꼭두각시화되어 갔다.

규슈에는 본거지를 하카타(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에 두는 규슈탄다이가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가이라 친왕 등 남조 세력의 토벌을 맡은 이마가와 사다요시(료슌)가 취임하지만, 료슌이 규슈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자 막부에 경계받아, 료슌이 해임된 후에는 시부카와 씨의 세습이 된다.

3. 3. 외교 관계

아시카가 막부의 외교 정책은 조선과의 관계 변화와 한반도에서 그리고 명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4. 쇠퇴와 멸망

무장 가문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막부의 권위는 점차 쇠퇴하였고, 1441년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사망하면서 막부의 권위는 거의 소멸되었다.[2] 특히 오닌의 난(1467~1477)을 거치며 다이묘들이 권력을 쟁탈하면서 센고쿠 시대로 불리는 혼란기가 도래했다.

1565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암살당한 후, 오다 노부나가는 요시테루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15대 쇼군으로 옹립하였다. 요시아키는 노부나가의 꼭두각시였지만, 완전히 복종하지 않고 오토모, 모리 등과 같은 강력한 씨족들과 교류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려 했다.[2] 결국 1573년 노부나가가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추방하면서 아시카가 막부는 멸망했다. 요시아키는 시코쿠를 거쳐 모리 씨족의 보호를 받았다.

일반적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멸망 시점은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쫓겨난 1573년으로 본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추방된 후에도 쇼군직을 유지했고, 노부나가의 세력권 밖에서는 여전히 쇼군으로서의 권위를 행사했다. 노부나가는 모리 데루모토 등 모리 씨와의 협상에서 요시아키의 복귀를 승낙하기도 했지만, 요시아키의 인질 요구로 인해 실현되지 않았다.

후지타 다쓰오는 교토 추방 이후 요시아키의 정권을 "도모 막부"로 규정하기도 했지만,[6] 이미 대부분의 막신(幕臣)이 요시아키를 떠났기 때문에 막부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다. 1588년 1월 13일(음력), 요시아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참내하여 쇼군직을 조정에 반납했다. 요시아키는 쇼군직 사임 후에도 준삼궁(准三宮)의 대우를 받았으며, 히데요시로부터 귀인으로 예우받았다.

아시카가 가문은 16세기를 넘어 생존했으며, 기쓰레가와 영지의 다이묘 가문으로 이어졌다.

4. 1. 오닌의 난과 센고쿠 시대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죽음으로 인해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는 쇠퇴하였다.[2] 특히 1467년부터 1477년까지 벌어진 오닌의 난은 다이묘들이 권력을 쟁탈하기 위해 서로 싸우는 상황을 초래했고, 이는 센고쿠 시대로 이어지는 공공연한 전쟁으로 발전했다.

1565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암살당한 후, 오다 노부나가는 요시테루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15대 아시카가 쇼군으로 옹립하였다. 그러나 요시아키는 노부나가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2] 결국 1573년 노부나가가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추방하면서 아시카가 막부는 멸망했다. 요시아키는 시코쿠를 거쳐 서일본의 모리 씨족에게 의탁했다.

아시카가 가문은 16세기를 넘어 생존하였고, 그 가문의 분가 중 하나는 기쓰레가와 영지의 다이묘 가문이 되었다.

4. 2. 막부의 멸망

무장 가문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막부의 권위는 점차 쇠퇴하였고, 1441년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사망하면서 막부의 권위는 거의 소멸되었다.[2] 특히 오닌의 난(1467~1477)을 거치며 다이묘들이 권력을 쟁탈하면서 센고쿠 시대로 불리는 혼란기가 도래했다.

1565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암살당한 후, 오다 노부나가는 요시테루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15대 쇼군으로 옹립하였다. 요시아키는 노부나가의 꼭두각시였지만, 완전히 복종하지 않고 오토모, 모리 등과 같은 강력한 씨족들과 교류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려 했다.[2] 결국 1573년 노부나가가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추방하면서 아시카가 막부는 멸망했다. 요시아키는 시코쿠를 거쳐 모리 씨족의 보호를 받았다.

일반적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멸망 시점은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쫓겨난 1573년으로 본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추방된 후에도 쇼군직을 유지했고, 노부나가의 세력권 밖에서는 여전히 쇼군으로서의 권위를 행사했다. 노부나가는 모리 데루모토 등 모리 씨와의 협상에서 요시아키의 복귀를 승낙하기도 했지만, 요시아키의 인질 요구로 인해 실현되지 않았다.

후지타 다쓰오는 교토 추방 이후 요시아키의 정권을 "도모 막부"로 규정하기도 했지만,[6] 이미 대부분의 막신(幕臣)이 요시아키를 떠났기 때문에 막부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다. 1588년 1월 13일(음력), 요시아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참내하여 쇼군직을 조정에 반납했다. 요시아키는 쇼군직 사임 후에도 준삼궁(准三宮)의 대우를 받았으며, 히데요시로부터 귀인으로 예우받았다.

아시카가 가문은 16세기를 넘어 생존했으며, 기쓰레가와 영지의 다이묘 가문으로 이어졌다.

5. 역대 쇼군

무로마치 막부의 정이대장군과 무로마치 막부 장군 목록 문서를 참고하여 역대 쇼군 목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0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아시카가 요시타라)는 2번 쇼군직을 수행했다.

6. 무로마치 막부의 유산

쇼군의 거주지이자 "꽃의 궁궐"로도 알려진 곳은 교토에 위치했는데, 현재는 가라스마거리(동쪽), 이마데가와거리(남쪽), 무로마치거리(서쪽, 거리 이름의 유래), 카미다치우리거리(북쪽)로 둘러싸인 구역에 해당한다. 이곳은 남서쪽 모퉁이에 세워진 표지석으로 기념되고 있다. 도시샤대학의 칸바이칸/寒梅館일본어에는 이 지역의 유물과 발굴품이 보관되어 있다.

교토의 궁궐터 표지석

참조

[1] 서적 Muromachi-jidai https://books.google[...] Japan Encyclopedia 2005
[2]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1958
[3] 서적 Lessons from History: The Tokushi Yoron 1982
[4] 서적 Lessons from History: The Tokushi Yoron 1982
[5] 서적 Lessons from History: The Tokushi Yoron 1982
[6] 학술지 「鞆幕府」論
[7] 서적 室町幕府と地方支配と地域権力 戎光祥出版
[8] 서적 室町幕府と地方支配と地域権力 戎光祥出版
[9] 서적 室町殿 吉川弘文館
[10] 서적 戦国の地域国家 吉川弘文館
[11] 학술지 中世後期地域権力論研究の視角 http://dlisv03.media[...]
[12] 학술지 今川了俊の探題解任と九州情勢
[13] 학술지 境界論と主従の関係(報告、シンポジウム「中世史学の未来像を求めて」日本史部会、第一一〇回史学会大会報告)
[14] 학술지 中世後期の東国守護をめぐる二、三の問題 https://hdl.handle.n[...]
[15] 서적 中世後期社会と公田体制 岩田書院
[16] 서적 中世武家の作法 吉川弘文館
[17] 서적 国史大事典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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