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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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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덕상은 1931년 경상남도 함양군 출생으로, 일본에서 성장하여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재일 한국인 최초로 히토츠바시 대학 교수를 역임한 역사학자이다.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연구에 매진했으며, 일본의 제국주의와 한일 병합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했다. 주요 저서로는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등이 있으며, 2021년 6월 12일 림프종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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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강덕상
원어 이름강덕상
출생일1931년 6월 26일
출생지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함양군
사망일2021년 6월 12일
사망지일본 도쿄도
국적대한민국
직업역사학자
활동 기간알 수 없음
학력
출신교와세다대학 제1문학부 사학과 졸업
대학원메이지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사학 전공 동양사 전수 박사 과정 단위 취득 만기 퇴학
연구 활동
분야역사학
하위 분야조선 근현대사
연구 기관히토쓰바시대학교, 시가현립대학교
학파알 수 없음
지도 교수알 수 없음
영향을 줌알 수 없음
시대알 수 없음
주요 관심사알 수 없음
영향을 받음알 수 없음
주요 저작'현대사자료 6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1963년)
'관동대지진' (1975년)
개인 정보
별명알 수 없음
종교알 수 없음
배우자알 수 없음
자녀알 수 없음
기타 정보
칭호알 수 없음
수상국민훈장 석류장
서명알 수 없음
논문 URL알 수 없음
논문 제목알 수 없음
논문 연도알 수 없음
소속 기관알 수 없음
지도 학생알 수 없음
유명 제자알 수 없음
주요 개념알 수 없음
공식 웹사이트알 수 없음
각주역사학자 강덕상 씨 사망, 재일 한국인 최초 국립대 교수

2. 생애

1931년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태어났다.[16][3] 1934년 12월, 2세 때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갔다.[2][3] 부모는 폐품 수집업을 하였고, 도쿄도 시부야구 히로오에서 자랐다. 1950년 3월, 도쿄도립 아오야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3] 같은 해 4월, 와세다 대학 제1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여 중국사를 공부하는 서클에 소속되었다. 1955년 3월,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다.[3] 서클을 통해 알게 된 야마베 켄타로의 권유로 대학원 시절부터 조선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4][2] 1960년 3월, 와세다 대학 대학원 상학 연구과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3]

1960년경, 국립국회도서관의 사서로부터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압수되었다가 반환된 문서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관동 대지진 당시 해군의 움직임을 기록한 "공문비고"를 발견하고, 당시 아직 연구가 진척되지 않았던 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조사와 자료 수집을 시작했다.[4]

1963년, 메이지 대학 대학원 문학 연구과 사학 전공 동양사 전수 박사 과정 단위 취득 만료 퇴학. 조선사 연구회 간사가 되었다.[3] 같은 해 10월, 금병동과 함께 공편저 『현대사 자료 6 관동 대지진과 조선인』을 저술했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근무처인 대학에서는 전임이 될 수 없어, 10개 이상의 대학에서 비상근 강사를 맡았다. 그 동안 시부야구에서 중화 요리점을 경영하며 연구비를 마련했다.[5]

1989년 4월, 재일 한국인·조선인 최초의 국립대 교수로서 히토츠바시 대학 교수로 취임했다.[1]

2013년경, 가나가와현이 내무성에 조선인 학살 상황을 보고한 것으로 보이는 문서를 고서점에서 발견했다. 사망할 때까지, 문서 내용을 뒷받침하는 실지 조사를 계속했다.[6]

2021년 6월 12일, 악성 림프종으로 도쿄에서 사망했다.[8][1]

2. 1. 어린 시절과 교육

강덕상은 1931년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태어났다.[16][3] 1934년 12월, 2세 때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갔다.[2][3] 부모는 폐품 수집업을 하였고, 도쿄도 시부야구 히로오에서 자랐다. 1950년 3월, 도쿄도립 아오야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3] 같은 해 4월, 와세다 대학 제1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여 중국사를 공부하는 서클에 소속되었다. 1955년 3월,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다.[3] 서클을 통해 알게 된 야마베 켄타로의 권유로 대학원 시절부터 조선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4][2] 1960년 3월, 와세다 대학 대학원 상학 연구과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3] 이후 메이지 대학 대학원에서 동양사를 전공하여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 2. 학문 연구와 사회 활동

강덕상은 1931년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태어났다.[16] 1934년일본으로 이주, 와세다 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고 메이지 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동양사를 전공하여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히토쓰바시 대학 교수를 거쳐 와세다 대학과 시가 현립 대학 명예교수를 지냈으며, 2005년에 민단의 주도로 설립된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초대 관장에 취임하여 2017년까지 역임했다.[9] 또한 2009년에 발간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지도위원을 지냈다.

그는 1968년 4월 도쿄 대학 동양 문화 연구소 연구 위촉을 시작으로,[3] 메이지 대학 문학부 겸임 강사[3], 신슈 대학 인문학부 외국인 강사[3], 도쿄 대학 동양 문화 연구소 강사[3], 가쿠슈인 대학 동양 문화 연구소 객원 연구원[3], 호세이 대학 대학원 사회학과 연구과 겸임 강사[3], 히토츠바시 대학 사회학부 및 대학원 강사[3], 요코하마 국립 대학 경제학부 강사[3]등을 역임했다. 1989년 4월 히토츠바시 대학 사회학부 교수가 되었고,[3] 1995년 3월 정년 퇴직 후[3] 시가현립 대학 인간 문화학부 교수로 재직하였다.[3]

2021년 6월 12일 일본 도쿄에서 숙환인 림프종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2. 3.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사망

강덕상은 1931년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태어났으며[16], 1934년일본으로 이주했다. 와세다 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고 메이지 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동양사를 전공하여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히토쓰바시 대학 교수를 거쳐 와세다 대학과 시가 현립 대학 명예교수를 지냈으며, 2005년에 민단의 주도로 설립된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초대 관장에 취임하여 2017년까지 역임했다. 2009년에 발간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지도위원을 지냈다.

2021년 6월 12일 일본 도쿄에서 숙환인 림프종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3. 주요 연구 및 주장

강덕상은 일본인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미국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 운동에 패배한 것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10] "국가가 없어졌음에도 '조선 민족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이 3·1 운동이었다. 관헌에게 탄압받아도 중국, 러시아로 도망쳐 반일 통일 전선을 형성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 패배한 것은 원폭도 있지만, 이미 아시아의 민족 해방 운동과의 힘겨루기에서 좌초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10]

한일 병합은 "독립 운동을 학살로 억누르는 등, 병합이 아니라 군사적인 점령이었다"라고 주장하며,[11] 한일 병합 이후의 조선 역사를 "1910년대는 토지 조사 사업에 의한 땅 내놔라, 20년대는 산미 증식 계획에 의한 쌀 내놔라, 30년대는 황민화 정책에 의한 사람 내놔라, 40년대는 징용, 징병에 의한 목숨 내놔라, 이렇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했다.[12]

"메이지 시대는 제노사이드의 역사였다."라고 주장하며,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을 '언덕 아래는 진창이었다'고 비난한다.[13]

전시기의 재일 조선인이 급격히 증가한 이유에 대해서는 "농경 민족이었던 조선 민족은 토지 정책에 의해 토지를 빼앗기고, 노동력을 팔아 생활하는 최하층 노동자가 되어, 바다를 건너 농민에서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했다"고 주장한다.[12]

관동 대지진에서의 조선인 학살은 "일본의 민중이 유언비어에 휩쓸려 조선인을 학살했다는 것은 오해이며, 군대와 경찰이 앞장서서 조선인 학살을 실행하고, 조선인 폭동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중을 흥분시켜 학살을 선동했다."라고 주장하며, "국가 권력을 주범으로, 민중을 종범으로 만든 민족적 대범죄, 대학살이 되었다."라고 결론 내렸다.[14]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이 실수를 저지른 것이 계기가 되어, 아소, 에토, 이시하라와 같은 사람들에게 대표되는 다양한 역사적인 망언을 반복한다. 이것이 10년 전이었다면 아소이든 이시하라든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라고 분개했다.[15]

3. 1.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연구

3. 2. 일본 제국주의 비판

강덕상은 일본인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미국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 운동에 패배한 것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가가 없어졌음에도 '조선 민족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이 3·1 운동이었다. 관헌에게 탄압받아도 중국, 러시아로 도망쳐 반일 통일 전선을 형성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 패배한 것은 원폭도 있지만, 이미 아시아의 민족 해방 운동과의 힘겨루기에서 좌초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10]

한일 병합은 "독립 운동을 학살로 억누르는 등, 병합이 아니라 군사적인 점령이었다"라고 주장하며,[11] 한일 병합 이후의 조선 역사를 "1910년대는 토지 조사 사업에 의한 땅 내놔라, 20년대는 산미 증식 계획에 의한 쌀 내놔라, 30년대는 황민화 정책에 의한 사람 내놔라, 40년대는 징용, 징병에 의한 목숨 내놔라, 이렇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했다.[12]

"메이지 시대는 제노사이드의 역사였다."라고 주장하며,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을 '언덕 아래는 진창이었다'고 비난한다.[13]

전시기의 재일 조선인이 급격히 증가한 이유에 대해서는 "농경 민족이었던 조선 민족은 토지 정책에 의해 토지를 빼앗기고, 노동력을 팔아 생활하는 최하층 노동자가 되어, 바다를 건너 농민에서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했다"고 주장한다.[12]

관동 대지진에서의 조선인 학살은 "일본의 민중이 유언비어에 휩쓸려 조선인을 학살했다는 것은 오해이며, 군대와 경찰이 앞장서서 조선인 학살을 실행하고, 조선인 폭동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중을 흥분시켜 학살을 선동했다."라고 주장하며, "국가 권력을 주범으로, 민중을 종범으로 만든 민족적 대범죄, 대학살이 되었다."라고 결론 내렸다.[14]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이 실수를 저지른 것이 계기가 되어, 아소, 에토, 이시하라와 같은 사람들에게 대표되는 다양한 역사적인 망언을 반복한다. 이것이 10년 전이었다면 아소이든 이시하라든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라고 분개했다.[15]

3. 3. 재일 조선인 문제

강덕상은 일본인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미국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 운동에 패배한 것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국가가 없어졌음에도 '조선 민족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이 3·1 운동이었다. 관헌에게 탄압받아도 중국, 러시아로 도망쳐 반일 통일 전선을 형성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 패배한 것은 원폭도 있지만, 이미 아시아의 민족 해방 운동과의 힘겨루기에서 좌초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10]

한일 병합은 "독립 운동을 학살로 억누르는 등, 병합이 아니라 군사적인 점령이었다"라고 주장하며,[11] 한일 병합 이후의 조선 역사를 "1910년대는 토지 조사 사업, 20년대는 산미 증식 계획, 30년대는 황민화 정책, 40년대는 징용, 징병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12]

강덕상은 "메이지 시대는 제노사이드의 역사였다."라고 주장하며,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을 '언덕 아래는 진창이었다'고 비난한다.[13]

전시기의 재일 조선인이 급격히 증가한 이유에 대해서는 "농경 민족이었던 조선 민족은 토지 정책에 의해 토지를 빼앗기고, 노동력을 팔아 생활하는 최하층 노동자가 되어, 바다를 건너 농민에서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했다"고 주장한다.[12]

관동 대지진에서의 조선인 학살은 "일본의 민중이 유언비어에 휩쓸려 조선인을 학살했다는 것은 오해이며, 군대와 경찰이 앞장서서 조선인 학살을 실행하고, 조선인 폭동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중을 흥분시켜 학살을 선동했다."라고 주장하며, "국가 권력을 주범으로, 민중을 종범으로 만든 민족적 대범죄, 대학살이 되었다."라고 결론 내렸다.[14]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이 실수를 저지른 것이 계기가 되어, 아소, 에토, 이시하라와 같은 사람들에게 대표되는 다양한 역사적인 망언을 반복한다. 이것이 10년 전이었다면 아소이든 이시하라든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라고 분개했다.[15]

3. 4. 북한 관련 발언

강덕상은 조선 역사에 대한 존중의 인식을 갖기 위해, 일본인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미국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 운동에 패배한 것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10] "국가가 없어졌음에도 '조선 민족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이 3·1 운동이었다. 관헌에게 탄압받아도 중국, 러시아로 도망쳐 반일 통일 전선을 형성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 패배한 것은 원폭도 있지만, 이미 아시아의 민족 해방 운동과의 힘겨루기에서 좌초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10]

한일 병합은 "독립 운동을 학살로 억누르는 등, 병합이 아니라 군사적인 점령이었다"라고 주장하며,[11] 한일 병합 이후의 조선 역사를 "1910년대는 토지 조사 사업에 의한 땅 내놔라, 20년대는 산미 증식 계획에 의한 쌀 내놔라, 30년대는 황민화 정책에 의한 사람 내놔라, 40년대는 징용, 징병에 의한 목숨 내놔라, 이렇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한다.[12]

"메이지 시대는 제노사이드의 역사였다."라고 주장하며,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을 '언덕 아래는 진창이었다'고 비난한다.[13]

전시기의 재일 조선인이 급격히 증가한 이유에 대해서는 "농경 민족이었던 조선 민족은 토지 정책에 의해 토지를 빼앗기고, 노동력을 팔아 생활하는 최하층 노동자가 되어, 바다를 건너 농민에서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했다"고 주장한다.[12]

관동 대지진에서의 조선인 학살은 "일본의 민중이 유언비어에 휩쓸려 조선인을 학살했다는 것은 오해이며, 군대와 경찰이 앞장서서 조선인 학살을 실행하고, 조선인 폭동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중을 흥분시켜 학살을 선동했다."라고 주장하며, "국가 권력을 주범으로, 민중을 종범으로 만든 민족적 대범죄, 대학살이 되었다."라고 결론 내렸다.[14]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이 실수를 저지른 것이 계기가 되어, 아소, 에토, 이시하라와 같은 사람들에게 대표되는 다양한 역사적인 망언을 반복한다. 이것이 10년 전이었다면 아소이든 이시하라든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라고 분개했다.[15]

4. 주요 저서


  •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2005년 저.
  • 근현대 한일관계와 재일동포, 1999년 저.
  • 呂運亨評傳(여운형 평전)<1>朝鮮三.一獨立運動, 2002년 저.
  • 呂運亨評傳(여운형 평전)<2>上海臨時政府, 2005년 저.
  • カラ-版 錦繪の中の朝鮮と中國 : 幕末.明治の日本人のまなざし, 2007년 저.
  • 『조선독립운동의 군상 - 계몽운동에서 삼일운동으로』아오키 서점, 1984년
  • 『조선인 학도 동원 - 또 하나의 바다의 소리』이와나미 서점, 1997년
  • 여운형 평전 1 조선 3·1 운동』신간사, 2002년
  • 『여운형 평전 2 상하이 임시정부』신간사, 2005년
  • 이성시, 정조묘, 강덕상, 강재언, 박일 외 "마음 있는 일본인들에게 - 중학교 '역사 교과서' 채택에 즈음하여, 지금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 - 함께 생각합시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문교국, 2005년.
  • 임종국 저, 『서울 성 아래 한강은 흐른다: 조선 풍속사 야화』 박해석, 강덕상 역 평범사 1987년 1월 ISBN 9784582474183
  • 【특집】관동 대지진 90주년 ― 조선인 학살을 둘러싼 연구・운동의 역사와 현재 (1) 일국사를 넘어 ― 관동 대지진에서의 조선인 학살 연구 50년/【特集】関東大震災90周年 ― 朝鮮人虐殺をめぐる研究・運動の歴史と現在 (1) 一国史を超えて ― 関東大震災における朝鮮人虐殺研究50年일본어

5. 같이 보기

참조

[1] 뉴스 歴史学者・姜徳相さん死去 在日韓国人初の国立大教授 https://www.asahi.co[...] 2021-06-14
[2] 웹사이트 姜徳相さん死去 朝鮮人虐殺研究 https://www.tokyo-np[...] 東京新聞 2024-06-28
[3] 웹사이트 姜徳相(カン・トクサン)教授略歴 https://hermes-ir.li[...] 一橋論叢 2021-06-14
[4] 웹사이트 姜徳相 滋賀県立大名誉教授・歴史学者 https://www.chunichi[...] 東京新聞 2024-06-28
[5] 뉴스 国立大に在日韓国人教授 姜さん国籍の壁越え 一橋大 『中日新聞』 1989-04-05
[6] 웹사이트 「朝鮮人145人虐殺」神奈川県が国に報告か 政府の「記録なし」説明覆す 関東大震災2カ月後に作成の文書 https://www.tokyo-np[...] 東京新聞 2024-06-28
[7] 웹사이트 <2023かながわ 取材ノートから>(5)関東大震災虐殺 内務省宛て文書公表 行政の向き合い方、いかに https://www.tokyo-np[...] 東京新聞 2024-06-28
[8] 웹사이트 「関東大震災 朝鮮人虐殺」の研究家 姜徳相氏が死去 http://www.wowkorea.[...] エイアイエスイー 2021-06-12
[9] 뉴스 <在日社会>在日韓人歴史資料館・東京にオープン http://www.toyo-keiz[...] 東洋経済日報 2005-11-25
[10] 웹사이트 対談・「在日」の過去から未来を展望する http://www.mindan.or[...] 民団新聞 2004-01-01
[11] 뉴스 韓国併合100年でシンポ、「真の和解」向け歴史認識の転換呼び掛け http://news.kanaloco[...] 神奈川新聞
[12] 웹사이트 在日の歴史教科書作り 事実風化させず未来へ http://www.mindan.or[...] 民団新聞 2004-11-17
[13] 웹사이트 <歴史資料館5周年シンポ>「新しい100年」創造へ http://www.mindan.or[...] 民団新聞
[14] 간행물 コリアン・ジェノサイドの真相解明を――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ソウル・シンポジウム より 『統一評論』 2009-06
[15] 웹사이트 「3・1独立運動」から学ぶ http://www.mindan.or[...] 民団新聞 2003-03-05
[16] 뉴스 http://dn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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