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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사키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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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노에 사키히사는 1536년에 태어나 1612년에 사망한 일본의 귀족이자 정치가이다. 1554년 관백과 좌대신에 취임했고, 1555년 종1위로 승진했으며, 이후 우에스기 겐신,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과 교류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혼노지의 변 이후에는 유랑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1585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양자로 삼아 관백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는 다방면에 재능이 뛰어났으며, 특히 와카, 렌가, 서예, 매사냥 등에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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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사키히사
기본 정보
씨명고노에 (近衛)
이름사키히사 (前久)
하루쓰구 (晴嗣) → 마에쓰구 (前嗣) → 사키히사 (前久)
류 (竜), 산 (山), 스기 (杉), 슌 (春)
도호류잔 (竜山,龍山)
시호없음
계명도구인 류잔 쿠요 (東求院龍山空誉)
묘소교토시히가시야마구도후쿠지
시대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초기
출생덴분 5년 (1536년)
사망게이초 17년 5월 8일 (1612년6월 7일)
신호없음
관위
관위종1위, 간파쿠, 좌대신, 태정대신, 준삼궁
주군고나라 천황 → 오기마치 천황 → 고요제이 천황
씨족고노에 가문
가족 관계
아버지고노에 다네이에
어머니구가 요시코
형제자매하나야 교쿠에이
다이요인 (아시카가 요시테루 정실)
고노에 사키히사
요잔
도초
손신
히노모지히메 (아사쿠라 요시카게 계실)
슈잔 손쇼
게이코인
사이토 마사요시 (서자)
정실구가 하루미치 딸
측실하타노 소시치 딸
호주인
자녀노부타다
손세이
호코인
사키코
고쇼인
양자교신
지운
교뇨
특기 사항고미즈오 천황 외조부

2. 생애

고노에 사키히사는 와카렌가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서예에도 능했다. 또한, 고대의 관직, 의식, 복식 등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고, 승마와 매사냥에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매사냥에 관한 전문 해설서를 겸한 가집을 집필하기도 했다.[1]

교토에서 추방되어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녔지만, 이는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또한, 지방에 중앙 문화를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

덴분 23년(1554년)에 관백 좌대신이 되었고, 토우시 쵸쟈에 취임했다.[1] 덴분 24년(1555년) 1월 13일, 종1위로 승진하고, 아시카가 쇼군가로부터 받은 이름(「晴」)을 버리고 '''사키쓰구'''(前嗣)로 개명했다. 당시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미요시 나가요시와 대립하여 교토에서 구쓰키로 피난갔으며, 개명은 요시테루와 관계를 끊으려는 의도로 보인다.[1]

에이로쿠 2년(1559년), 우에스기 겐신이 조락했을 때, 겐신과 혈서로 맹약을 맺었다.[1] 에이로쿠 3년(1560년), 관백 직을 유지하며 겐신을 따라 에치고국으로 갔다.[1] 에이로쿠 4년(1561년) 5월, 겐신의 간토 평정을 돕기 위해 고즈케마에바시성으로 이동, 아시카가 후지우지의 시모사고가성 탈환을 지원했다. 겐신이 에치고로 돌아간 후에도 고가성에 남아 정세를 보고했다. 이때 이름을 '''사키히사'''(前久)로 바꾸고 화압을 무가 양식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다케다·호조 연합군의 양면 작전으로 겐신의 간토 평정이 어려워지자, 에이로쿠 5년(1562년) 8월, 실의에 빠져 교토로 돌아갔다.[3]

1565년 (에이로쿠 8년) 5월, 에이로쿠의 변으로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살해당한 후, 미요시 산닌슈를 옹호하고 아시카가 요시히데의 쇼군 취임을 지원했다. 1568년 (에이로쿠 11년) 10월, 오다 노부나가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경하자, 요시아키와 니조 하루요시로부터 요시테루 암살에 관여했다는 의심을 받고 교토에서 추방되었다. 그 후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가 1575년 (덴쇼 3년) 2월, 노부나가의 주선으로 교토로 돌아왔다.

오다 노부나가와는 매사냥이라는 공통의 취미를 통해 더욱 가까워졌으며, 모리 데루모토에 대한 포위망 구축을 위해 규슈로 내려가기도 했다.[1] 덴쇼 8년(1580년), 사키히사는 노부나가와 혼간지(本願寺) 사이의 조정을 맡아 겐뇨(顕如)의 오사카 혼간지 퇴거를 성사시켰다.[1] 덴쇼 10년(1582년) 2월, 태정대신이 되었지만, 5월에는 사임했다.[1]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급사하자, 출가하여 '''류잔'''(龍山)이라 칭했다.[5] 아케치 미쓰히데 관련 참언으로 인해 문책을 받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의지하여 도토미국 하마마쓰로 피신했다.[6] 1583년 이에야스의 중재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오해가 풀려 교토로 돌아왔으나,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로 인해 다시 나라로 피신했다가 양측의 화의 후 귀경했다. 1585년 7월, 아들 노부타다니조 아키자네 사이에 간파쿠 자리를 둘러싼 다툼(간파쿠 상론)이 발생하자, 히데요시를 양자로 삼아 간파쿠 직을 물려주었다.

1587년(덴쇼 15년) 이후, 지쇼지(慈照寺)의 도큐도(東求堂)를 별장으로 삼아 은거했다.[5]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는 중립을 유지하면서, 세키가하라 전투의 상세한 정보를 아들 노부스미에게 전달하는 등, 과거의 활약을 엿보게 하는 행동을 했다.[6] 게이초 17년(1612년) 5월 8일,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덴분 5년(1536년), 고노에 타네이에의 장남으로 교토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쿠가 미치노리의 양녀인 케이코이다.

1540년(덴분 9년), 원복을 치르고, 숙모인 케이쥬인의 남편이기도 한 무로마치 막부의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로부터 편휘를 받아 '''하루쓰구'''(晴嗣)라 불렀다. 1541년(덴분 10년) 종3위에 서임되어 공경 반열에 올랐다. 이후 1547년 나이다이진, 1553년 우다이진 등을 역임하였다.

와레키 연도날짜서기 연도사건
덴분 9년12월 30일1541년원복,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편휘를 받아 고노에 하루쓰구로 개명하고, 정5위 하에 서임되어 금색을 허가받음
덴분 10년1월 3일1541년사콘에곤쇼쇼에 임관
1월 5일종4위 상으로 승진
2월 24일사콘에곤추조로 전임
2월 27일종3위로 승진, 사콘에곤추조는 전과 같음
3월 27일이요곤노모리를 겸임
덴분 11년1월 5일1542년정3위로 승진, 사콘에곤추조 겸 이요곤노모리는 전과 같음
2월 2일곤추나곤으로 전임, 사콘에곤추조는 전과 같음
덴분 13년1월 6일1544년종2위로 승진, 곤추나곤 겸 사콘에곤추조는 전과 같음
덴분 14년12월 23일1545년곤다이나곤으로 전임
덴분 15년3월 13일1546년우콘에타이쇼를 겸임
12월 23일사콘에타이쇼를 겸임, 우콘에타이쇼는 사임
덴분 16년1월 5일1547년정2위로 승진, 곤다이나곤 겸 사콘에타이쇼는 전과 같음
2월 17일나이다이진으로 전임, 사콘에타이쇼는 전과 같음


2. 2. 정치 활동

덴분 23년(1554년)에 관백 좌대신이 되었다. 또한 토우시 쵸쟈에 취임했다.[1]

덴분 24년(1555년) 1월 13일, 종1위로 승진하고, 아시카가 쇼군가로부터 받은 이름(「晴」)을 버리고 '''사키쓰구'''(前嗣)로 개명했다. 당시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미요시 나가요시와 대립하여 교토에서 구쓰키로 피난갔으며, 개명은 요시테루와 관계를 끊으려는 의도로 보인다.[1]

에이로쿠 2년(1559년), 에치고국우에스기 겐신(당시 나가오 가게토라)이 조락했을 때, 겐신과 혈서로 맹약을 맺었다.

에이로쿠 3년(1560년), 관백 직을 유지하며 겐신을 따라 에치고로 갔다. 유카와 도시하루는 고노에 나오미치의 여동생 게이주인이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에게 시집가 낳은 요시테루가 쇼군이 되면서 조정과 무로마치 막부 관계가 고노에 가문을 통해 강화되었고, 겐신의 조락을 재촉하기 위해 고노에 사키히사가 파견되었다고 본다.[1]

에이로쿠 4년(1561년) 5월, 겐신의 간토 평정을 돕기 위해 에치고에서 고즈케마에바시성으로 이동, 아시카가 후지우지의 시모사고가성 탈환을 지원했다. 겐신이 에치고로 돌아간 후에도 고가성에 남아 정세를 보고했다. 이때 이름을 '''사키히사'''(前久)로 바꾸고 화압을 무가 양식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다케다·호조 연합군의 양면 작전으로 겐신의 간토 평정이 어려워지자, 에이로쿠 5년(1562년) 8월, 실의에 빠져 교토로 돌아갔다. 겐신은 이에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3]

에이로쿠 8년(1565년) 5월, 에이로쿠의 변으로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살해한 미요시 산닌슈는 죄를 추궁당할까 두려워 사키히사에게 의지했다. 사키히사는 요시테루의 사촌이었지만, 자신의 누나이자 요시테루의 정실인 다이요인을 보호한 점을 높이 사 이들을 인정하고, 아시카가 요시히데의 쇼군 취임을 결정했다.

에이로쿠 11년(1568년) 10월, 오다 노부나가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경했다. 요시아키는 에이로쿠의 변 이후 사키히사의 행동을 보고 형의 죽음에 관여했을 것이라 의심했고, 전 관백 니조 하루요시도 사키히사의 죄를 추궁했다. 결국 요시아키는 사키히사를 조정에서 추방했다.

2. 3. 추방과 유랑

1565년 (에이로쿠 8년) 5월, 에이로쿠의 변으로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살해당한 후, 미요시 산닌슈를 옹호하고 아시카가 요시히데의 쇼군 취임을 지원했다.

1568년 (에이로쿠 11년) 10월, 오다 노부나가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경하자, 요시아키와 니조 하루요시로부터 요시테루 암살에 관여했다는 의심을 받고 교토에서 추방되었다.

그 후, 단바국의 아카이 나오마사(매제 또는 사위[4])를 의지하여 구로이 성의 하관에 유거했다. 다음 해 11월에는 셋쓰국오사카 혼간지사내 마을로 옮겨갔으며[4], 이 때 관직에서 해임되었다.[4] 혼간지 11세 겐뇨는 사키히사가 사내 마을에 있는 것을 몰랐으며, 그것을 알게 된 것은 1570년 (겐키 원년) 9월, 이시야마 전투 발발 직전이었다.[4] 이 무렵 겐뇨의 장남 쿄뇨를 사키히사는 자신의 유자로 삼은 듯하다.

1571년 (겐키 2년), 미요시 요시츠구가 있는 가와치국와카에 성의 성하로 옮겨갔다.[4]

1572년 (겐키 3년)에는 은밀히 에치젠국이치조다니의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방문했다.[4]

1573년 (덴쇼 원년) 7월, 요시아키가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되어 와카에 성에 들어가자, 이 전후로 사키히사는 와카에의 마을을 떠났다.[4] 그 후, 사키히사는 다시 아카이 나오마사의 곁으로 옮겨갔다.[4]

1575년 (덴쇼 3년) 2월, 노부나가의 주청에 의해 교토로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었다.

2. 4. 오다 노부나가와의 관계

덴쇼 3년(1575년) 2월, 오다 노부나가의 주선으로 교토로 돌아온 고노에 사키히사는 노부나가와 친교를 맺었다.[1] 특히 매사냥이라는 공통의 취미를 통해 더욱 가까워졌으며, 사키히사와 노부나가는 서로의 성과를 자랑했다고 전해진다.[1]

같은 해 9월, 사키히사는 모리 데루모토에 대한 포위망 구축을 꾀하던 노부나가의 요청으로 규슈로 내려가 오토모 씨, 이토 씨, 사가라 씨, 시마즈 씨 간의 화의를 도모했다.[1]

덴쇼 5년(1577년) 2월, 교토로 돌아온 사키히사는 이듬해인 덴쇼 6년(1578년)에 준삼궁의 대우를 받았다.[1] 같은 해 6월에는 두 사람이 소수의 수행원만을 데리고 매사냥을 즐겼는데, 노부나가는 그 자리에서 당시 공가령으로는 파격적인 1,500석의 가증 명령서를 써서 사키히사에게 건넸다고 한다.[1]

덴쇼 8년(1580년), 사키히사는 노부나가와 혼간지(本願寺) 사이의 조정을 맡아 겐뇨(顕如)의 오사카 혼간지 퇴거를 성사시켰다.[1] 10년 가까이 걸려도 함락하지 못했던 오사카 혼간지를 개성시킨 것에 대한 노부나가의 평가는 높았으며, 사키히사가 아들 노부모토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노부나가로부터 "천하 평정의 새벽에는 고노에 가문에 일국을 헌상하겠다"는 약속을 얻었다고 한다.[1]

덴쇼 10년(1582년) 2월, 태정대신이 되었지만, 5월에는 사임했다.[1] 이는 노부나가의 삼직 추임 문제와 관련하여, 사키히사가 노부나가에게 동직을 양보하려는 의향이었기 때문이라고도 전해진다.[1] 같은 해 3월, 노부나가를 따라 고슈 정벌에 참전했다.[1]

2. 5. 혼노지의 변 이후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급사하자, 사키히사는 실의에 빠져 출가하여 '''류잔'''(龍山)이라 칭했다.[5] 그러나 "아케치 미쓰히데 군이 사키히사 저택에서 혼노지를 총격했다[6]"는 참언으로 인해 오다 노부타카와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문책을 받았다. 이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의지하여 도토미국 하마마쓰로 피신했다.

1583년, 이에야스의 중재로 히데요시와의 오해가 풀려 교토로 돌아왔다. 하지만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양자가 격돌하면서 다시 위태로워진 사키히사는 나라로 피신했다가, 양측의 화의 후 귀경했다.

1585년 7월, 아들 노부타다니조 아키자네 사이에 간파쿠 자리를 둘러싼 다툼(간파쿠 상론)이 발생하자, 히데요시를 양자로 삼아 간파쿠 직을 물려주었다. 이는 고노에 가문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고노에 사키히사의 혼노지의 변 이후 행적은 다음과 같다.

와레키 연도날짜서기 연도사건출처
덴쇼 10년2월 2일1582년다이죠다이진 선하
3월가이국 후추에서 오다 노부나가와 동행
5월다이죠다이진 사임
6월 2일혼노지의 변 발발. 출가, 야마시로국 사가에 칩거
11월도토미국 하마마쓰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의탁
덴쇼 11년9월1583년귀경
덴쇼 12년3월1584년야마토국 나라로 피신
7월미노국으로 이동
덴쇼 13년7월1585년하시바 히데요시를 양자로 삼음
8월에치젠국으로 하향
윤8월귀경


2. 6. 은거와 죽음

1587년(덴쇼 15년) 이후, 고노에 사키히사는 아시카가 쇼군 가문과 관련된 지쇼지(慈照寺)의 도큐도(東求堂)를 별장으로 삼아 은거했다. 조쿄 3년(1686년)에 간행된 『요슈후시』에 따르면, 사키히사가 은거하던 시대의 지쇼지는 "때때로 이 절에는 주지가 없다"는 상태였다고 한다.[5]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때, 사키히사는 동군에 속한 미즈타니 가쓰토시의 적자 가쓰타카를 숨기는 한편, 서군의 시마즈 씨와 서신을 주고받는 등 중립을 유지하면서, 세키가하라 전투의 상세한 정보를 아들 노부스미에게 전달하는 등, 과거의 활약을 엿보게 하는 행동을 했다.[6]

게이초 17년(1612년) 5월 8일, 사키히사는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례는 교토 도후쿠지(東福寺)에서 치러졌다. 법명은 '''도큐인 류잔 구요(東求院龍山空誉)'''이다.

3. 인물과 평가

고노에 사키히사는 오섭가의 필두 가문 출신으로, 명문 귀족의 전형적인 삶을 살았지만, 동시에 파란만장한 유랑 생활을 경험했다. 와카, 렌가, 서예(쇼렌인류), 고실(故實), 승마, 매사냥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보인 당대 최고의 문화인이었다.[7] 매사냥 전문 해설서를 겸한 가집을 집필하기도 했다.[7]

정치적으로는 우에스기 겐신,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당대 유력자들과 깊이 교류하며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1559년 우에스기 겐신이 상경했을 때 그와 맹약을 맺었고, 1560년에는 겐신을 따라 에치고국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1561년에는 겐신을 도와 고즈케국 마에바시성으로 가서 아시카가 후지우지의 시모사국 고가성 탈환을 지원하는 등 공가답지 않은 행동력을 보였다. 1562년 실의에 빠져 귀경하였는데, 겐신은 이에 상당히 분노했다고 한다.[3]

1565년 영록의 변으로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살해되자, 미요시 산닌슈의 요청으로 아시카가 요시히데의 쇼군 취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1568년 오다 노부나가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경하자, 요시아키는 사키히사가 요시테루의 죽음에 관여했다고 의심하여 그를 조정에서 추방했다.

이후 사키히사는 단바국의 아카이 나오마사, 셋쓰국이시야마 혼간지, 가와치국 와카에 성 등지를 전전했다. 1573년 요시아키가 노부나가에 의해 추방된 후, 1575년 노부나가의 주선으로 귀경이 허락되었다. 이후 노부나가와 친교를 맺고, 1580년 노부나가와 혼간지의 조정을 맡기도 했다. 1582년 태정대신이 되었으나 곧 사임했다. 혼노지의 변 이후 아케치 미쓰히데의 연루설이 제기되어 오다 노부타카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문책을 받았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의지하여 도토미국 하마마츠로 내려갔다가, 1년 후 히데요시의 오해가 풀려 교토로 돌아왔다.

1585년 고노에 노부타다니조 아키자네 사이에 관백 지위를 둘러싼 다툼이 발생하자, 히데요시를 양자로 삼아 관백직을 넘겨주었다. 1587년 이후 은거 생활을 하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중립을 지키면서 양측과 교류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유랑 생활을 통해 중앙 문화를 지방에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7]

4. 가계

近衛 前久일본어는 고노에 다네이에의 장남으로 교토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구게 구조 가문 출신으로, 구조 미치노리의 양녀인 게이코이다.[1]



'''범례''' - 실선은 친자, 세로 점선은 양자, 가로 점선은 혼인.

고노에가아시카가 쇼군가천황가



5. 작품

고노에 사키히사는 와카렌가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쇼렌인류 서도를 배우고 유소쿠코지츠에도 정통했다. 마술과 매사냥에도 능하여 매사냥 해설서인 "류잔 공 매 백수"를 집필,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사본을 주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7주기에 "나무아미타불"을 첫 글자로 하는 추도 가 6수를 남겼다.[7][8]

5. 1. 저서

후지와라 씨적류의 섭가답게, 와카렌가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서도는 쇼렌인류를 배우고, 유소쿠코지츠에도 정통했다. 게다가 마술이나 매사냥 등에도 발군의 역량을 보여 "류잔 공 매 백수"라는 매사냥 전문 해설서를 겸한 가집도 집필하여, 히데요시이에야스에게 사본을 주었다. 고필 수집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전구가 소지한 쿠가 미치치카 필이라 불리는 센자이 와카슈는 그 분할에 즈음하여, 고필가에 의해 류잔절로 명명되었다.[7]

가도에 관해서는, 노부나가의 7주기(덴쇼 16년 6월 2일)에 읊은 추도 가의 6수가 남아 있다. 6수 모두 5・7・5・7・7의 첫 글자가 각각 "나무아미타불"로 맞춰져 있다.[8]

  • 울어도, 아쉬움이 다하지 않는, 눈물인가, 오히려 그리워하는, 없는 얼굴 모습
  • 다정했던, 옛사람이, 맞이할 텐가, 텅 빈 하늘의, 자줏빛 구름
  • 덧없는 세상의, 애처로움을 생각하면, 밝아지고, 하늘의 눈물인가, 넘치는 옷으로
  • 봐도, 오히려 보고 싶어하는 것은, 남겨두고, 산봉우리에 걸리는, 없는 듯한 달
  • 찾아도, 구슬의 곳은, 구슬 흔들림도, 옷자락의 이슬에, 누구일까, 떨어질까
  • 저무는 밤의, 잠자리에 있으면서, 부는 바람에, 두 번 다시 보이지 않는, 옛 흔적의 꿈

5. 2. 관련 작품


  • 야마다 후타로의 소설 《고노에 닌포 캘린더》(1969년)
  • * 忍法流水抄|닌포 류스이쇼일본어 (가도카와 문고, 1983년) / 武蔵忍法旅<山田風太郎忍法帖短編全集8>|무사시 닌포 여행 <야마다 후타로 닌포첩 단편 전집 8>일본어 (지쿠마 문고, 2004년) 수록
  • 아베 류타로의 소설 戦国秘譚 神々に告ぐ|전국 비담 신들에게 고하다일본어 상하 (가도카와 쇼텐〈가도카와 문고〉, 2002년)
  • * 상 ISBN 4-04-365901-6, 하 ISBN 4-04-365902-4
  • 미야기 겐슈의 소설 近衛前久 隠密状|고노에 사키히사 은밀장일본어 (가도카와 하루키 사무소〈하루키 문고〉, 2003년) ISBN 4-7584-3053-5
  • 군사 칸베에 (2014년, 대하드라마) 배역: 카와이 카츠오
  • 노부나가 타유 (2016년, 신춘 와이드 시대극) 배역: 테라오 아키라
  • 기린이 온다 (2020년, 대하드라마) 배역: 혼고 카나타

참조

[1] 서적 戦国期公家社会と荘園経済 続群書類従完成会 2005
[2] 서적 戦国北条家一族事典 戎光祥出版
[3] 문서 尊経閣文庫所蔵文書 上越史
[4] 서적 織田信長権力論 吉川弘文館
[5] 문서 この前久邸は元は天正7年(1579年)に豊臣秀吉が自邸として建設したものの、信長に没収されて代わりに前久に贈られた物であり、二条御所周辺で唯一の武家造の建物であったという。
[6] 문서 この事から本能寺の変の黒幕を前久だとする説があるが、本能寺の変直前には信長を後任に推挙して太政大臣を辞任し、かつ変前日にも信長と歓談していた程の親密な関係であった前久にとって、信長の死は痛恨の窮み以外の何物でもなかった。これは、本能寺の変直後に出家している事や、既に徳川氏の天下になっていた慶長13年(1608年)の信長の命日に追悼句会を開いている事からも明白である。
[7] 서적 国史大辞典 吉川弘文館 1985
[8] 서적 本能寺の変 信長の油断・光秀の殺意 洋泉社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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