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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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은 1606년에 제작된 석가여래삼불좌상과 복장유물을 포함한다. 삼불상은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를 협시로 배치한 형식이며, 조선 중·후기 불교 조각 양식을 보여준다. 복장유물에서는 1606년 불상 제작 당시와 1883년 중수 시에 봉납된 다양한 전적, 다라니, 공양물 등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1606년 조성발원문을 통해 제작 시기와 제작자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불상은 17세기 불교 조각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며,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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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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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문화재 정보 | |
이름 |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
유형 | 보물 |
번호 | 1719 |
지정일 | 2011년 9월 5일 |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789 동학사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동학사 |
수량 | 3구, 복장유물 일괄 |
문화재청 ID | 12,17190000,34 |
2.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공주 동학사 대웅전에 봉안된 삼불상은 사바세계의 교주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좌우에 동방 만월세계의 약사여래와 서방 극락세계의 아미타여래를 배치한 공간적 삼세불상 형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공간적 삼불좌상은 임진왜란 이후 크게 유행한 형식이다.[2]
2. 1. 불상의 조성 및 중수 과정
2010년 8월 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진행된 복장 조사에서 불상의 조성 및 중수 과정을 알 수 있는 발원문과 다양한 복장 유물이 발견되었다.[2] 조성 발원문은 삼불상 모두에서 발견되었고, 약사불상에서는 1883년 중수 발원문, 아미타불상에서는 1883년과 1957년 중수 발원문이 발견되었다.[2]발원문에 따르면, 이 삼불좌상은 만력 34년(1606년, 선조 39년) 계룡산 청림사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조성되었다.[2] 불상 조성은 1605년 초겨울에 시작하여 이듬해 늦봄에 완료되었다.[2] 수많은 평범한 신도와 승려들의 시주로 재원을 마련했고, 석준(釋俊)의 증명 아래 상화원(上畵員) 각민(覺敏), 각심(覺心), 행사(幸思), 휴일(休一), 덕잠(德岑) 등 5명의 조각승들이 제작했다.[2][3][4] 1883년 개금 중수에는 19세기 후반에 크게 활약한 화승 선율(善律), 약효(若效) 등이 참여하였다.[2]
2. 2. 불상의 형태와 특징
본존 석가여래는 변형된 편단우견을 걸쳐 입고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하였다. 머리와 육계는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으며, 반달형 중앙계주와 구형 정상계주가 조각되어 있다. 머리카락은 나발로 촘촘하게 부착되어 있다. 고개는 약간 앞으로 숙여 아래를 굽어보는 듯한 시선 처리가 돋보인다. 행인형으로 돌출한 눈두덩 사이로 새긴 가늘게 뜬 눈은 선정에 잠긴 듯 고요하며, 뚜렷한 이목구비는 부드럽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얼굴은 날렵한 턱과 절제된 양감으로 인해 17세기 중·후반의 불상에 비해 갸름하고 정돈된 느낌을 준다. 이는 조선 전기와 후기 불상을 연결하는 특징으로 볼 수 있다.[2] 좌우 협시불상 역시 석가불상과 거의 같은 상호 표현을 보이지만, 좀 더 경쾌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여 변화를 주었다.삼불상의 착의 형식은 조선 후기 석가여래삼불 형식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본존 석가여래는 오른쪽 어깨를 드리운 변형된 편단우견을, 좌우 협시불상은 두 장의 대의를 걸친 이중 착의법을 하고 있다. 대의에 표현된 주름은 깊이 변화가 없는 직선 위주로 묘사되었고, 부분적으로 힘이 들어간 곡선도 사용되었다. 삼불 모두 가슴에는 비스듬히 접은 수평의 군의 자락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무릎 앞쪽에는 긴 대롱 모양의 주름 좌우로 수평의 3단 주름이 펼쳐져 있다. 좌우 측면과 배면에는 주름을 새기지 않았지만, 신체와 밀착된 불의(佛衣)를 통해 건장하면서도 부드러운 불신(佛身)의 실루엣을 느낄 수 있다. 간결한 직선 위주의 선묘지만 경직되지 않고 신체와 유기적으로 밀착되어 율동적이다.[3]
수인은 석가여래는 항마촉지인을, 좌우 협시불상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양 손을 대칭적으로 표현하였다. 손은 대체로 두텁고 손가락은 짧은 편이며,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맞댄 손짓은 다소 부자연스럽다.[4]
삼불상은 머리와 상·하체의 연결이 자연스럽고 안정되어 조화로운 형태미를 보이지만, 석가모니불상의 비대칭적 어깨 표현이나 다소 부자연스러운 수인 등은 아쉬운 점이다. 비례면에서 보면, 장대한 신체에 비해 얼굴은 작고 무릎은 넓고 낮아, 큰 불상이 아님에도 장대한 느낌을 준다. 이는 불단 위에 앉은 불상이 더 장엄하게 보이도록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불상은 절제된 듯 고요하고 차분한 호남형(好男形)의 얼굴, 오른쪽 어깨로 수직의 3단 주름, 자연스럽게 접은 수평의 승각기, 무릎 좌우에 표현된 수평의 3단 주름, 왼쪽 팔꿈치 측면에 율동적으로 표현된 ∩형의 주름, 발목 아래로 대롱 모양의 띠 주름을 길게 드리우고 그 좌우로 수평의 주름을 표현하였고, 무릎을 낮추고 어깨를 건장하게 표현하여 예배자의 시선이 얼굴에 집중되도록 의도한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논산 쌍계사 대웅전 석가여래삼불좌상》(1605년), 《군산 상주사 석가여래삼불좌상》(17세기 초), 《익산 숭림사 목조석가여래좌상》(1614년), 《김제 귀신사 비로자나삼불좌상》(1626~1633년 경) 등 17세기 초·전반에 제작된 불상들과 양식적으로 유사하다. 따라서 이 삼불상은 1606년이라는 제작 시기를 통해 17세기 불상 양식 형성은 물론, 조선 후기 불상의 선구적인 위치에 있는 중요한 불상으로 평가된다.
2. 3. 양식적 특징
이 삼불좌상은 절제된 듯 고요하고 차분한 호남형(好男形)의 얼굴, 오른쪽 어깨로 수직의 3단 주름, 자연스럽게 접은 수평의 승각기, 그리고 무릎 좌우에 표현된 수평의 3단 주름, 왼쪽 팔꿈치 측면에 율동적으로 표현된 ∩형의 주름, 발목 아래로 대롱 모양의 띠 주름을 길게 드리우고 그 좌우로 수평의 주름을 더했다. 또한 무릎을 낮추고 어깨를 건장하게 표현하여 예배자의 시선이 얼굴에 집중되도록 의도한 점이 특징이다.[2]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이 삼불상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논산 쌍계사 대웅전 석가여래삼불좌상》(1605년), 《군산 상주사 석가여래삼불좌상》(17세기 초), 그리고 이보다 약간 늦은 《익산 숭림사 목조석가여래좌상》(1614년)이나 《김제 귀신사 비로자나삼불좌상》(1626~1633년 경) 등 17세기 초․전반에 제작된 불상들과 양식적으로 상통한다.[3]
이 삼불상의 제작 시기는 1606년으로, 17세기 불상의 양식 형성은 물론 나아가 조선 후기 불상의 선구적인 위치에 있는 대단히 중요한 불상으로 평가된다.[4]
3. 복장유물
삼불상의 복장에서는 1606년 불상 제작 당시와 1883년 중수 및 개금 시에 봉납된 것으로 추정되는 후령통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전적, 다라니, 공양물 등이 발견되었다.[2][3][4]
3. 1. 석가여래 복장유물
석가여래 복장유물은 15건 15점으로, 1606년에 제작된 후령통, 발원문, 그리고 조선 후기에 제작된 장식편, 동경, 묘법연화경 등이 있다.[1]번호 | 명칭 | 재질/판종 | 수량 | 연대 | 크기(cm) | 비고 |
---|---|---|---|---|---|---|
1 | 후령통 | 동 | 1점 | 1606년 | 11×4 | 황초폭자에 싸여 있고 남쪽만에 남쪽을 나타내는 범자를 주서로 썼음 |
2 | 발원문 | 종이 | 1점 | 1606년 | 29×176. | 필사 |
3 | 장식편 | 금동 | 1점 | 조선 후기 | 6.5×8.3×1.8 | 斧鉞(부월)모양의 장식편 |
4 | 동경 | 동 | 1점 | 조선 후기 | 5.6×3.5×1 | 만자와 육자대명왕진언을 양각함. |
5 | 묘법연화경 권제6~7 | 목판본 | 1책 | 1555년 | 36.2×24.8 | 선장, 앞뒤 표지와 본문 몇장이 결락되었음. 을해자본계. 광덕사 |
6 | 묘법연화경 권3~4 | 목판본 | 1책 | 조선시대 | 32.1×20.8 | 선장, 전후 표지 일실, 대자본계, 8행 13자. |
7 |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 | 목판본 | 1첩 | 1415년 | 31.4×225.3 | 절첩장, 현존유일본, 약사불에 후반부 있음. 훼손이 심함. |
8 | 묘법연화경 권5~7 | 목판본 | 1책 | 1565년 | 29.2×16.7 | 가철, 앞뒤 표지 없고, 거의 해책 상태임, 복천사. |
9 | 묘법연화경 권5~7 | 목판본 | 1책 | 1536년 | 34.7×22 | 가철, 마지막2~3장은 부분적으 |
10 | 묘법연화경 권4~7 | 목판본 | 1책 | 14세기 후반 | 25.6×16.1 | 가철, 표지 전후 일부 일실. 소자본. |
11 | 묘법연화경 권5~7 | 목판본 | 1책 | 1536년 | 36.5×24 | 선장, 앞뒤의 표지가 없고, 권7의 말미가 결락되었으며, 권제5 낱장을 여기에 통합시켜야 함. 갑인자본계. |
12 | 묘법연화경 권2~3 | 목판본 | 1책 | 1555년 | 35.9×25 | 선장, 앞뒤의 표지 없음, 을해자 본계, 광덕사. |
13 | 묘법연화경 권5~7 | 목판본 | 1책 | 1565년 | 32.5×19 | 가철, 복천사, 표지 전후 일부 일실. 갑인자본계. |
14 | 묘법연화경 권6~7 | 목판본 | 1책 | 1405년 | 27.8×15.8 | 가철, 안심사, 표지 전후 일부일실. 성달생본계, 권6은1~6장이 결락됨. |
15 | 묘법연화경 권3~4 | 목판본 | 1책 | 조선 전기 | 36×21.2 | 가철, 전후 표지 일실, 권3의 52~68장만 있음. 권3은 1~51장은 약사불에 있음. 갑인자본계. |
총 15건 15점 |
3. 2. 약사여래 복장유물
개금중수봉안원문은 1883년에 종이에 필사한 것으로, 크기는 51×58.5cm이다.[5] 후령통 일괄은 1606년에 제작되었으며, 황초폭자로 싼 후령통과 발원문을 범자다라니 여러 장으로 감싸고 청색 끈으로 묶은 형태이다. 크기는 5.8×4cm이다.[5]동경(銅鏡)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동 재질의 거울로, 크기는 19×11.2×0.5cm이다. 뒷면에 “정의관존첨시(整衣冠尊瞻視)”라는 글귀가 양각되어 있다.[5] 황색주(黃色紬)와 흑색주(黑色紬)는 각각 조선시대 명주로 만든 직물이다. 황색주는 39.5×487.5cm, 흑색주는 7×4×3cm 크기이다.[5]
구슬류는 옥과 수정으로 만든 6개의 구슬로, 조선시대 유물이다. 크기는 1.0~2.5cm이다.[5] 봉함목은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묵서로 “좌(左)”라고 적고 주서다라니를 적었다. 크기는 11.7×14×3cm이다.[5] 목재편은 나무 조각으로, 묵서로 “동(東)”이라고 적혀 있다. 왼쪽 손목 부근에서 발견되었는데, 왼손을 지지하던 지지목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10.5×4.5×3.5cm이다.[5]
묘법연화경은 여러 권이 발견되었다.
권 | 판본 | 제작 시기 | 책 수 | 형태 | 간행처 | 특징 | 크기(cm) |
---|---|---|---|---|---|---|---|
권1~2 | 목판본 | 14세기 후반 | 1책 | 가철 | - | 표지 후반 일부 일실 | 27.7×16.8 |
권5~7 | 목판본 | 15세기 | 1책 | 가철 | - | 앞뒤 표지 없고 앞부분 결락 | 27.8×16.7 |
권4~7 | 목판본 | 1405년 | 1책 | 선장 | 안심사 | 전후 표지 일실, 성달생본계 | 28.1×16.8 |
권4~7 | 목판본 | 1477년 | 1책 | 선장 | 화암사 | 전후 표지 일실, 성달생본계 | 28.2×19.5 |
권4~7 | 목판본 | 1539년 | 1책 | 선장 | 심원사 | 표지 전후 일부 일실, 화암사본계 | 28.8×17.4 |
권5~7 | 목판본 | 1537년 | 1책 | 선장 | 보광사 | 표지 전후 일부 일실, 갑인자본계 | 34.8×20.5 |
권2 | 목판본 | 13세기 후반 | 1책 | 절첩장 | - | 표지 전반 일부 일실, 접장본 | 28.5×846.2 |
권4~5 | 목판본 | 1555년 | 1책 | 선장 | 광덕사 | 전후 표지 일실, 을해자본계 | 36×25 |
권5~7 | 목판본 | 1493년 | 1책 | 선장 | 무량사 | 전후 표지 일실, 갑인자본계 | 38.1×21.9 |
권3~4 | 목판본 | 15세기 | 1책 | 선장 | - | 전후 표지 일실, 갑인자본계 | 35.1×22.1 |
권5~7 | 목판본 | 1470년 | 1책 | 선장 | - | 전후 표지 일실, 대자본 | 32.4×20.4 |
권3 | 목판본 | 1537년 | 1책 | 선장 | 보광사 | 표지 전후 일부 일실, 갑인자본계 | 36.3×21.9 |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경은 1415년 목판본 1첩으로, 현존 유일본이며 석가불에 전반부가 있다. 크기는 31.5×846.6cm이다.[5] 범망경노사나불설보살심지계품 재10권 하는 16세기 필사본 1책으로, 전후 표지가 없고 증도가 합철되어 있다. 크기는 31×18cm이다.[5]
삼경합부는 15세기 목판본 1책으로, 금강반야바라밀경 외에 대방광불화엄경입불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과 대불정수능엄신주를 합철한 것이다. 금사사에서 간행되었으며, 크기는 28.6×17.3cm이다.[5]
육경합부는 1424년과 1465년에 각각 목판본으로 간행된 2종이 있다.
간행 연도 | 형태 | 간행처 | 특징 | 크기(cm) |
---|---|---|---|---|
1424년 | 선장 | 안심사 | 전후 표지 일실 | 26.6×16 |
1465년 | 가철 | - | 대불정수능엄신주, 금강경, 보현행원품, 관세음보살예문,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편, 불설아미타경 순으로 제책, 장차가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음 | 24.6×15.3 |
감지금니묘법연화경은 15세기 금사경 1첩으로, 접장본이며 배면은 은사경이다. 크기는 22.1×290.4cm이다.[5]
총 27건 31점의 복장유물이 있다.[5]
3. 3. 아미타여래 복장유물
阿彌陀|아미타중국어여래 복장유물은 1606년 불상 조성 당시의 조성발원문과 1883년 개금중수 때 작성된 개금중수봉안원문, 후령통 일괄, 소색주, 직물편, 구슬류, 금강반야바라밀경 등 25건 31점이다.[1]번호 | 명칭 | 재질 | 수량 | 연대 | 크기(cm) | 비고 |
---|---|---|---|---|---|---|
1 | 조성발원문 | 종이 | 1 | 1606년 | 27.2×214.7 | 필사 |
2 | 개금중수봉안원문 | 종이 | 1 | 1883년 | 49.3×56.9 | 필사 |
3 | 후령통 일괄 | 동, 비단 | 1 | 1606년 | 8.3×4.6 | 내부에 오보병, 양면원경, 심주 등이 남아 있음. |
4 | 소색주 | 명주 | 1 | 조선시대 | 24.8×269 | |
5 | 직물편 | 비단 | 3 | 조선시대 | 백색 : 14.3×8.6, 흑색 11.6×6.5, 적색 19.5×8.2 | 흑색 직물편에는 주서로 오륜 종자를 적었음. 적색 직물편은 적색과 감색을 바느질로 겹쳐붙였음. |
6 | 구슬류 | 옥, 수정 | 5 | 조선시대 | 0.7~2.5 | 붉은색 구슬 2점, 수정구슬 2점 |
7 | 봉함목 | 나무 | 1 | 조선시대 | 10.5×4.5×3.5 | 묵서로 “阿彌陁佛|아미타불중국어”이라고 적음 |
8 | 금강반야바라밀경 | 목판본 | 1책 | 1387년 | 24.3×14.3 | 가철, 강인부, 전후 표지 일실, 천로해본, 6~30장 존재. |
9 | 묘법연화경 권3~4 | 목판본 | 1책 | 15세기 | 35.2×22.3 | 가철 |
10 | 묘법연화경 권3~4 | 목판본 | 1책 | 15세기 | 35.4×21 | 가철, 권3은 1~2장 결락. |
11 | 묘법연화경 권5~7 | 목판본 | 1책 | 1451년 | 28×17.7 | 가철, 전후 표지 일실, 명빈김씨 발원. |
12 | 묘법연화경 권3~4 | 목판본 | 1책 | 조선전기 | 27×16.4 | 가철 |
13 | 대방광불화엄경입불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 | 목판본 | 1첩 | 14세기 | 22.8×14.8 | 선장, 전후 표지 일실, 현존 유일본, 석가불에 전반부 있음. |
14 | 제경합부 | 목판본 | 1책 | 1563년 | 25.1×16 | 포배장, 전후 표지, 감로사, 梅竹|매죽중국어헌발문. |
15 | 묘법연화경 권1~3 | 목판본 | 1책 | 14세기 후반 | 26.8×16 | 선장, 표지 후반 일부 일실, 소자본. |
16 | 금광명경 권1 | 목판본 | 1첩 | 14세기 | 30×228.7 | 절첩장, 후반부 일실. 1~4장 존재. |
17 |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 | 목판본 | 1첩 | 1378년 | 30.1×159.2 | 절첩장, 전후 표지 1첩, 1~3장 존재. |
18 | 범망경노사나불설보살심지계품 제10권 하 | 목판본 | 1책 | 14세기 | 25.5×15 | 선장, 표지 전반 일부 일실. |
19 | 오등 권6 | 목활자본 | 1책 | 15세기 | 29.6×19.4 | 가철, 표지 전반 일부 일실, 현존 유일본. |
20 | 묘법연화경 권5~7 | 목판본 | 1책 | 1536년 | 34.7×22.1 | 선장, 서대사, 전후 표지 일실, 갑인자본계. |
21 | 묘법연화경 권4~7 | 목판본 | 1책 | 1405년 | 27.5×15 | 선장, 안심사, 성달생본(원간본). |
22 | 화엄신중 | 목판본 | 1책 | 1462년 | 27.6×19.9 | 선장, 화암사, 전후 표지 일실, <사미수계문> 필사 합철 |
23 | 금강반야바라밀경 | 목판본 | 1책 | 14세기 | 15.5×21.5 | 선장. |
24 | 묘법연화경 권1 | 목판본 | 1책 | 15세기 | 26.3×14.8 | 가철, 표지 전후 일부 일실, 화암사본계. |
25 | 육경합부 | 목판본 | 1책 | 1462년 | 26×16.5 | 가철, 화암사, 전후 표지 일실. |
4. 문화재 지정 가치
이 삼존불상은 복장(腹藏)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을 통해 1606년이라는 정확한 조성 시기, 제작자, 제작에 참여한 제작 주체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어 조선 중·후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기준이 되는 자료이다.[2] 이 불상을 조각한 석준(釋俊), 각민(覺敏) 등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한 조각승으로 추정되는데, 1600년을 전후한 시기의 화승(畵僧)들의 활동과 교류사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불상으로 평가된다.[3] 특히 이 석가여래삼불상은 16세기 조각 전통을 계승하면서 17세기 새롭게 대두된 대중적인 평담(平淡)한 미의식도 반영하고 있고, 석준이나 각민의 문하에서 수학한 조각승들이 17세기 불교 조각계를 주도하고 있는 만큼, 조선 중·후기 불교조각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또한 도상적(圖像的)으로 임진왜란 이후 비로자나삼불상과 함께 크게 유행한 석가여래삼불 형식을 정확히 보여주며, 발원문에 정확한 존상 명칭을 기록하고 있어 이후 전개될 석가여래삼불상 도상 연구에도 기준이 된다. 종합적으로 평가할 때, 이 석가여래삼불좌상은 복장유물과 함께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 보호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참조
[1]
간행물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http://gwanbo.mois.g[...]
문화재청장
2011-09-05
[2]
문서
釋俊은 1599년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을 개금하였고, 1600년에는 김제 금산사 대장전 재건에 참여한 승려화원이다.
[3]
문서
각민은 1614년 전남 순천 송광사 대웅전 삼존불상 제작에 수화승으로 참여하였다.
[4]
문서
행사는 1614년 전남 순천 송광사 대웅전 삼존불상(수화승 각민)과 1648년 해남 도장사 목조석가 여래삼존상(수화승 해심) 제작에 참여하였다.
[5]
문서
관보 확인결과 누락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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