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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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충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 명종, 선조 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관직을 역임했다. 1528년 생원시에 장원, 1531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1541년 영월군수로 재직하며 단종의 묘에 제사를 지내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후 여러 차례 승지와 판서를 거쳐, 1567년에는 대제학에 올랐다. 1581년 75세로 사망했으며, 1758년 문경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541년(중종 36) 영월군수로 나갔다. 당시 3명의 군수가 연이어 죽어서 민심이 흉흉했는데, 박충원이 제문을 지어 단종의 묘에 제사를 지낸 후 사람을 시켜 지키니, 5년 동안 재직하면서 탈이 없었다고 한다.
박충원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다. 1989년 10월 23일 고양시의 향토유적 제26호로 지정되었다.
[1]
서적
박충원 신도비명
2. 생애
상을 마친 후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을 거쳤다.
2. 1. 초기 생애 및 수학
일찍이 외숙부 기준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28년(중종 23) 생원시에 장원으로, 진사시에 부장원으로 합격했으며, 1531년(중종 26) 문과에 급제했다.[1]
2. 2. 중종조 관직 활동
1533년(중종 28) 주서(注書)로서 무과 실시 방법에 대해 건의했다.[2] 이듬해 봉교(奉敎), 전적(典籍), 정언(正言)을 거쳤고, 1535년(중종 30)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역임했다.[1]
1536년(중종 31) 4월 다시 정언에 임명되었고, 11월에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자리를 옮겼다. 12월에는 병을 앓고 있던 임억령(林億齡)을 대신하여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었다.[2]
1537년(중종 32) 병조정랑(兵曹正郞),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역임했다. 이후 조부 박광영(朴光榮)의 상을 당했을 때,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 박조(朴藻)를 대신하여 상복을 입었다.
2. 3. 명종조 관직 활동
1545년(명종 즉위년) 원접사 정사룡(鄭士龍)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직강(直講),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사성(司成)을 거쳤다.[1]
이듬해 성천부사(成川府使)로 임명되었으나 사직했으며, 중시(重試)에 뽑혀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승진했다가 우통례(右通禮)·교서관판교(校書館判校)로 옮겼다.[1]
1548년(명종 3) 좌통례(左通禮)로서 경상우도(慶尙右道)에 파견되어 백성을 구휼했으며, 영의정(領議政) 홍언필(洪彦弼)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는 교서(敎書)를 지었다.[3]
1550년(명종 5)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대사성(大司成)을 거쳤다.[3]
어머니의 상을 당해 여묘(廬墓)살이를 했으며, 상을 마친 후인 1553년(명종 8) 대사성, 황해도(黃海道)도관찰사(黃海道都觀察使), 이듬해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쳤다.[1]
1556년(명종 11) 우부승지로 임명되었으며, 1558년(명종 13) 좌승지(左承旨)로서 의주(義州)의 기근이 심함을 보고했다.
도승지(都承旨), 우윤(右尹), 병조참판(兵曹參判)을 거쳤으며[3], 이후 밀원군(密原君)으로 봉해졌다.[1]
1560년(명종 15) 예조참판(禮曹參判), 대사헌(大司憲)을 거쳤다가 이듬해 전라도(全羅道)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로 나갔는데, 1562년(명종 17) 옥구현(沃溝縣)의 공물을 견감(蠲減)해 줄 것을 청해 3분의 2를 감면받게 했다.
좌윤(左尹), 우윤, 청홍도(淸洪道)도관찰사(淸洪道都觀察使),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병조참판, 대사헌을 거쳤다가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임명되었다.[3]
1565년(명종 20) 홍섬(洪暹)·윤춘년(尹春年)과 함께 성균관(成均館)에서 제술 시험을 주관했으며, 호조판서(戶曹判書),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쳤다.
민기(閔箕)와 함께 새 대제학(大提學) 후보로 정해졌는데, 박충원이 양관(兩館)[4]의 대제학으로 간택되었다.
1567년(명종 22) 예조판서(禮曹判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쳤으며, 원접사로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했다.[3]
2. 4. 선조조 관직 활동 및 사망
1567년(선조 즉위년) 예조판서를 지냈다.[3] 1569년(선조 2) 윤6월 이조판서로 옮겼으나,[5] 7월 대사헌 백인걸이 탄핵하려 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6]
이듬해 예조판서, 1571년(선조 4) 1월 이조판서, 6월 우찬성, 12월 우참찬, 1572년(선조 5) 11월 형조판서, 12월 공조판서를 역임했다.[5]
1576년(선조 9) 7월 다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홍문관과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왕이 탄핵을 윤허하지 않았지만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6]
1577년(선조 10) 9월 왕이 문묘를 배알할 때 호가했으나, 병으로 귀가한 후 두문불출했다.
1581년(선조 14) 75세로 사망했으며,[1] 1758년(영조 34) 문경(文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7]
3. 사후
4. 가족 관계
관계 이름 출생 - 사망 비고 증조부 박미 1433년 ~ 1491년 예조참의 조부 박광영 1463년 ~ 1537년 경주부윤, 밀성군 아버지 박조 1482년 ~ 1521년 귀후서별제, 증이조판서[8] 어머니 부응교, 증이조참판 기찬(1424년 ~ 1492년)의 딸[8][9] 동생 박효원 1511년 ~ ? 의금부경력[8] 부인 첨정 이인수의 딸[8] 장남 박계현 1524년 ~ 1580년 지중추부사 차남 박응현 전함사별제[1] 3남 박용현 한성부참군[1] 4남 박호현 1550년 ~ ? 생원, 박안행(1578년 ~ 1656년)의 아버지[1] 첫째 사위 이원성 수군절도사, 이정규(1587년 ~ 1643년)의 조부[1] 둘째 사위 윤의로 [1] 셋째 사위 신사정 주부[1]
참조
[2]
서적
중종실록
[3]
서적
명종실록
[4]
문서
홍문관·예문관을 함께 지칭하는 말
[5]
서적
선조실록
[6]
서적
선조수정실록
[7]
서적
승정원일기
[8]
서적
박광영 묘갈명
[9]
문서
기진(1487~1555) 묘지명 여섯 살에 부친 기찬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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