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하이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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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스타프 하이네만은 1899년 독일에서 태어나 법학, 경제학, 역사학을 전공했다. 그는 변호사, 기업 임원, 정치인으로 활동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에센 시장을 역임했다. 기독교민주연합(CDU)에서 활동하다가 탈당하여 전독일 국민당(GVP)을 창당했으나, 이후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했다. 1966년부터 법무장관을 지냈고, 1969년에는 서독의 제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시민 중심의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는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했으며, 특히 과거사 반성과 핵무기 없는 세상을 주창했다. 하이네만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교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74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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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하이네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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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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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구스타프 발터 하이네만 |
출생일 | 1899년 7월 23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슈벨름 |
사망일 | 1976년 7월 7일 |
사망지 | 서독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에센 |
자녀 | 4명 |
서명 | Signatur Gustav Heinemann.png |
정치 경력 | |
직책 | 서독 대통령 |
임기 시작 | 1969년 7월 1일 |
임기 종료 | 1974년 6월 30일 |
총리 |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빌리 브란트 헬무트 슈미트 |
전임 | 하인리히 뤼프케 |
후임 | 발터 셸 |
기타 정치 경력 | |
직책 | 법무부 장관 |
임기 시작 | 1966년 12월 1일 |
임기 종료 | 1969년 3월 26일 |
총리 |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
전임 | 리하르트 예거 |
후임 | 호르스트 엠케 |
직책 | 내무부 장관 |
임기 시작 | 1949년 9월 29일 |
임기 종료 | 1950년 10월 11일 |
총리 | 콘라트 아데나워 |
전임 | 사무실 설립 |
후임 | 로베르트 레어 |
직책 | 에센 시장 |
임기 시작 | 1946년 10월 30일 |
임기 종료 | 1949년 10월 19일 |
전임 | 하인츠 레너 |
후임 | 한스 투생 |
소속 정당 | |
소속 정당 | 기독교 사회 인민 봉사 (1930–1933)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 (1945–1952) 전독일 인민당 (1952–1957) 독일 사회민주당 (1957–1976) |
학력 및 훈장 | |
학위 | 정치학 박사 법학 박사 |
훈장 | 독일 연방 공로 훈장 특등 대십자장 |
2. 어린 시절과 전문적 경력
구스타프 하이네만은 1899년 프로이센 왕국의 슈벨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급진적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성향을 지녔으며, 특히 외할아버지와 아버지 오토 하이네만(크루프 제철소 관리자)의 영향을 받아 1848년 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외증조부는 1848년 혁명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하이네만은 이러한 가족적 배경 속에서 모든 종류의 굴종에 맞서 싸우고 지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태도를 길렀다.[1]
하이네만은 학생 시절부터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지지했으며,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등 초기부터 뚜렷한 정치적 입장을 보였다.[4]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영국 군정 당국에 의해 에센 시장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선거를 통해 시장직을 연임하며 전후 독일 재건에 참여했다. 그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서 기독교민주연합(CDU) 창립에 참여했으며, 주 의회 의원과 주 법무장관을 역임하며 정치 경력을 쌓았다.
1917년 엘리트 고등학교 과정인 아비투어를 마친 후 제1차 세계 대전에 군인으로 잠시 복무했으나, 심장병 등 건강 문제로 인해 전선에는 투입되지 못하고 3개월 만에 제대했다.
전후 학업으로 돌아와 1918년부터 뮌스터, 마르부르크, 뮌헨, 괴팅겐, 베를린의 대학교들에서 법학, 경제학, 역사학을 공부했다. 학창 시절 빌헬름 뢰프케, 에른스트 렘머, 빅토르 아가르츠 등 다양한 정치적 성향의 친구들과 교류했다. 1921년 마르부르크 필립스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22년에 대학 공부를 마쳤다. 1926년에는 제2차 국가 사법 시험(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으며, 1929년에는 뮌스터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26년, 루돌프 카를 불트만 밑에서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공부한 힐다 올데만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본래 종교가 없었던 하이네만은 아내와 스위스 신학자 카를 바르트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이는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적 입장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문 경력은 1926년 에센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며 시작되었다. 1929년에는 의료계의 법적 문제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 같은 해부터 1949년까지 에센의 철강 회사인 라인슈타르베르케(Rheinische Stahlwerke)에서 법률 고문으로 일했으며, 1936년부터는 이사회 이사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이 회사는 전쟁 필수 물자 생산 업체로 간주되어 하이네만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징집되지 않았다.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쾰른 대학교 법과대학에서 강사로 활동했으나, 나치당 가입을 거부했기 때문에 학문적 경력이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2] 또한 1936년에는 라인-베스트팔렌 석탄 신디케이트 이사회로부터 이사직 제안을 받았으나, 나치에 비판적인 고백교회에서의 활동을 중단하라는 요구 때문에 제안이 철회되기도 했다.[8] 이는 그가 나치 정권 하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했음을 시사한다.
3. 정치 생활
1949년 독일 연방 공화국의 초대 연방총리 콘라트 아데나워 내각에서 내무장관으로 발탁되었으나, 아데나워가 각료들과의 상의 없이 비밀리에 추진하던 서독의 재무장 계획에 강력히 반대하며 1년 만인 1950년 10월 장관직을 사임했다.[6] 그는 서독의 재무장이 독일 통일의 가능성을 저해하고 오히려 전쟁의 위험을 높일 뿐이라고 판단했다. 사임 후에는 다시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치적, 종교적 소수자들을 변호하고 동독 지역 포로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3]
아데나워와의 정책적 갈등 끝에 1952년 CDU를 탈당하고, 독일의 비무장 중립과 재통일을 목표로 하는 전독일 국민당(Gesamtdeutsche Volksparteide) (GVP)을 창당했다. GVP는 NATO와 동구권 사이에서의 중립을 주장하며 소련과의 협상을 통한 통일을 모색했으나, 1953년 총선에서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며 실패했다. 결국 1957년 GVP를 해산하고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했다. SPD 내에서 그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개신교 신자들과 중산층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당이 국민정당으로 발돋움하는 데 기여했다. SPD 소속 연방의회 의원으로서 아데나워 정부의 핵무기 도입 계획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1966년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CDU) 총리와 빌리 브란트(SPD)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이끄는 대연정 내각이 출범하자, 하이네만은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69년까지 법무장관으로 재직하며 형법을 중심으로 여러 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했다.[3][7]
이러한 정치 활동과 병행하여 하이네만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교회 활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독일복음주의교회(EKD) 설립에 참여하고 1949년부터 1955년까지 초대 의장을 역임했으며, 나치 시대 교회의 과오를 반성하는 슈투트가르트 죄책 고백 서명에도 참여했다. 또한 1948년부터 1961년까지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국제적인 교회 협력에도 기여했다.
3. 1. 초기 정치 활동
학생 시절 하이네만은 자유주의적인 독일 민주당(DDP)의 학생 단체인 ''라이히스분트 도이처 데모크라티셔 슈투덴텐''에 속해 활동했으며, 이 단체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1920년 뮌헨에서 히틀러의 연설을 듣던 중, 그의 유대인에 대한 격렬한 비난에 항의하다가 연설장에서 쫓겨난 경험이 있다.[4]
1930년에는 ''크리스틀리히-소치알러 폴크스디엔스트''(기독교 사회 국민봉사단, CSVD)에 가입했으나, 나치당(NSDAP)의 집권을 막기 위해 1933년 총선거에서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투표했다.[3]
나치 정권이 들어선 후, 하이네만은 나치의 교회 정책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 가까운 목사가 나치가 내세운 '독일 기독교인' 운동 세력에 의해 직위에서 쫓겨나자, 지역 신도 대표이자 법률가로서 히틀러 총리에게 직접 항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법률 지식을 활용하여 개신교 저항 조직인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 활동에 참여했으며, 한때는 홍보 담당자로서 자택 지하에서 항의 전단을 인쇄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 내부의 갈등 등으로 인해 1939년 관련 직책에서 물러났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에게 법률 상담을 제공하고 유대인들을 숨겨주는 등 위험을 감수한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1936년부터 1950년까지 에센의 기독교청년회(YMCA) 대표를 맡기도 했다. 이러한 저항 활동에도 불구하고 신중하게 행동하여 나치 정권 하에서 체포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3. 2. 전후 정치 활동과 CDU 탈당
제2차 세계 대전 후, 영국 군정 당국은 하이네만을 에센 시장으로 임명했고, 1946년에는 선거를 통해 시장으로 선출되어 1949년까지 재직했다. 그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서 기독교민주연합(CDU) 창립자 중 한 명이었으며, 이를 나치즘에 반대한 사람들의 종교를 초월한 민주적인 협회로 여겼다. 그는 주의회(1947~1950년) 의원이었으며, 1947년부터 1948년까지는 CDU 소속 카를 아르놀트 주총리 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역임했다.
1949년 새로 수립된 독일 연방 공화국의 초대 연방총리가 된 콘라트 아데나워는 자신의 정부에 CDU 내 프로테스탄트 대표를 포함시키기를 원했다. 당시 독일복음주의교회(EKD) 총회 의장이었던 하이네만은 산업계 경력을 재개할 계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데나워의 요청을 받아들여 내무장관직을 수락했다.[5] 이는 CDU 간부회가 가톨릭계 인사들에게 장관직을 편중시킨다는 비판을 피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이네만은 EKD 대표직을 유지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정계 전망이 불투명하다고 판단하여 퇴임 후 에센 제철소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약을 받고서야 취임했다.
그러나 1년 후인 1950년 8월, 아데나워 총리가 각료들과의 상의나 여론 수렴 없이 비밀리에 서방 연합국과 서독의 '''재무장'''에 관해 협상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이네만은 이에 강력히 반대하며 같은 해 10월 내무장관직을 사임했다. 그는 아데나워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독의 어떠한 형태의 군비 증강도 독일 통일의 가능성을 저해하고 전쟁의 위험을 높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전쟁 발발 시 독일은 동서 진영의 충돌지가 되어 파괴될 뿐이며, 군대 창설은 사회적 가능성을 제약한다고 비판했다.[6]
내무장관 사임 후 1950년 10월, 하이네만은 다시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법정에서 주로 정치적, 종교적 소수자들을 변호했으며, 동독에 수감된 포로들의 석방을 위해서도 노력했다.[3]
아데나워의 재무장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 차이로 인해 하이네만은 결국 1952년 CDU를 탈당했다. 같은 해 그는 자신의 정당인 전독일 국민당(Gesamtdeutsche Volksparteide, GVP)을 창당했다. GVP는 분단된 독일의 재통일과 군국주의 종식을 목표로 삼았으며, 이를 위해 서독이 NATO와 동구권 사이에서 비무장 중립 노선을 견지하고, 소비에트 연방과의 협상을 통해 통일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하이네만은 서베를린 연설에서 요시프 스탈린이 제안한 독일 비무장화 안(스탈린 노트)을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GVP는 대중적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고, 1953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1.2%의 득표율에 그쳐 하이네만 자신도 의석을 잃었다.
3. 3. 전독일국민당(GVP) 창당과 SPD 입당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비밀리에 서독의 재무장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1950년 알려지자, 하이네만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내무장관직을 사임했다.[6] 그는 서독의 어떠한 형태의 군비 증강도 독일 재통일의 가능성을 저해하고 전쟁의 위험을 높일 뿐이라고 확신했다.[6] 그는 아데나워에게 보낸 편지에서 독일은 무기로 지킬 수 없으며, 전쟁 발발 시 동서 진영의 충돌 지점이 되어 파괴만 남을 뿐 결코 승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독일군 창설이 사회적 가능성을 제한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CDU를 탈당한 하이네만은 1952년 독자적인 정당인 전독일 국민당(Gesamtdeutsche Volkspartei, GVP)을 창당했다. GVP에는 훗날 연방 대통령이 되는 요하네스 라우와 에르하르트 에플러 같은 인물들도 참여했다. GVP는 분단된 독일의 재통일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으며, 이를 위해 NATO와 동구권 사이에서 엄정 중립을 유지하고 소련과의 협상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군비 경쟁을 피하기 위해 당시 재무장하지 않았던 동독과 같이 인민경찰 수준의 최소한의 무력만 보유할 것을 제안했다. 같은 해 서베를린 연설에서는 소련의 스탈린이 제안한 독일 비무장화 통일 방안(이른바 '스탈린 노트')을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발언하여 보수 진영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당시 서독 사회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고, 1953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GVP는 1.2%의 득표율에 그쳐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결국 GVP는 1957년 해산되었고, 하이네만은 자신의 정치적 목표와 비교적 가깝다고 판단한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했다. 그는 SPD 내에서 빠르게 입지를 다져 당 전국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개신교 신자들과 산업 지역의 중산층을 당으로 끌어들임으로써 SPD가 특정 계층의 정당을 넘어 국민정당(Volkspartei)으로 발돋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방의회 의원으로서 하이네만은 아데나워 정부가 추진하던 서독군(Bundeswehr)의 핵무기 획득 계획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는 핵무장이 독일의 안보를 강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전쟁의 위험만 키울 것이라고 비판하며 평화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
3. 4. 법무장관 재임
1966년 CDU과 SPD의 대연정으로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내각이 출범하자, 하이네만은 SPD 당수 빌리 브란트의 추천을 받아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형법 개정이 주요 현안이었기 때문에, 그의 법무장관 취임은 야당으로부터도 환영받았다.[3][7]
법무장관 재임 기간(1966~1969년) 동안 하이네만은 여러 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형법 분야에서 징역형의 기본 방침을 교화형에서 자유형 중심으로 변경하는 데 기여했으며, 나치 전범에 대한 공소시효 연장 결정에도 관여했다. 또한, 간통죄와 남성 간 동성애 행위를 형사 처벌 대상에서 제외하고, 혼인 관계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아동이 동등한 권리를 갖도록 법을 개정했다.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부당하게 처벌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조치 역시 그의 재임 중에 이루어졌다.
한편, 학생운동이 고조되던 1968년에 키징거 내각이 제정한 긴급사태법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하이네만은 이 법이 긴급 상황 발생 시 시민을 정부의 자의적인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고 주장했다. 과격화되는 학생운동에 대해 키징거 총리가 강하게 비판했던 것과 달리, 하이네만은 학생운동을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의 표현으로 이해하려 노력하면서도, 폭력적인 방식에는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4. 대통령 재임
1969년 3월, 빌리 브란트 사민당(SPD) 당수의 지지를 받은 하이네만은 독일 연방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기민련(CDU)은 보수 성향의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후보로 내세웠다. 연방의회에서 세 차례의 투표 끝에, 하이네만은 자유민주당(FDP) 소속 의원 대다수의 지지를 얻어 불과 6표 차이로 당선되었다.[8] 이는 당시 사민당과 자민당의 협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 같은 해 10월 빌리 브란트 총리가 이끄는 사회자유주의 연정(1969년 10월 ~ 1982년 10월) 출범의 예고편으로 여겨졌다.
대통령 취임 후 하이네만은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국가의 대통령"이 아닌 "시민의 대통령"이 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8] 그는 권위주의적인 전통을 깨고, 대통령 관저에서 열리는 신년 인사회에 외교관 대신 평범한 시민들, 특히 직업적으로 차별받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초청하는 관례를 만들었다. 또한 연설을 통해 서독 시민들에게 과거의 권위주의적 복종 문화를 극복하고, 민주적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며 법치주의와 사회 정의를 수호할 것을 강조했다.[8] 1968년 학생 운동에 대한 그의 개방적인 태도는 젊은 세대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한 인터뷰에서 "서독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다. 내 아내를 사랑한다"고 답한 일화는 그의 탈권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9]
하이네만은 대통령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던 국가들을 주로 방문하며 과거사 반성과 화해에 힘썼다. 특히 독일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반독 감정이 남아있던 네덜란드를 방문했다. 그는 빌리 브란트 정부의 동구권과의 화해 정책을 적극 지지했으며, 서독 정상 최초로 동유럽 국가인 루마니아를 방문하기도 했다.[3]
1970년에는 오사카에서 열린 일본 만국박람회의 '독일의 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 이때 그는 독일 외무성의 반대를 무릅쓰고 히로시마를 찾아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인류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며 핵무기 없는 세상을 호소했다. 이후 히로시마 적십자 원폭 병원에 100만엔을 기부하기도 했다.[14] 외국 정상을 맞이할 때는 의전보다는 소규모의 가정적인 분위기를 선호했으며, 대통령으로서 맞이한 마지막 국빈은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 대통령이었다.
국내적으로는 환경 문제와 갈등 및 평화 연구를 장려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3] 또한 1848년 독일 혁명에 참여했던 조상들의 영향으로 독일 해방 운동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를 기념하는 박물관 설립을 제안하여 1974년 라스타트에 관련 시설이 문을 열도록 했다.[10]
하이네만의 재임 기간은 독일 적군(RAF)의 테러와 1972년 뮌헨 올림픽 테러 등 폭력적인 사건들로 얼룩지기도 했다. 그는 "아나키스트는 반동주의자의 가장 큰 조력자"라며 테러 행위를 강력히 비난하면서도, 정부가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과도한 조치를 취하는 것을 경계했다. 1972년 브란트 총리가 급진주의자로 의심되는 인물들을 공직에서 배제하는 이른바 "급진주의자 포고령(Radikalenerlass)"을 발표하자, 하이네만은 "기본법(헌법)의 정신과 목적에 어긋나는 수단으로 기본법을 지켜서는 안 된다"며 공개적으로 비판했다.[11] 그는 이 포고령이 다수의 무고한 시민들을 잠재적 용의자로 취급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자유주의자이자 인권 운동가였던 그는 보수 진영의 우려와 달리 연방군 병사들과 양심적 병역 거부로 대체 복무 중인 젊은이들을 자주 찾아 격려하기도 했다.
의회 구도상 재선이 유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이네만은 고령과 건강 악화를 이유로 1974년 재선에 도전하지 않았다. 그는 기욤 사건으로 브란트 총리가 사임한 직후인 1974년 6월 30일 임기를 마쳤다. 퇴임 후인 1974년 12월에는 감옥에서 단식 투쟁 중이던 독일 적군파 핵심 인물 울리케 마인호프를 직접 찾아가 생명을 존중하여 단식을 중단할 것을 설득했다. 마인호프는 정치범들을 함께 수감할 것을 요구했지만, 하이네만은 이것이 폭력 투쟁을 지속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거부했다. 극좌 세력의 과격화와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시민적 권리가 제약되는 사회 분위기를 우려하던 중, 1976년 7월 7일 뇌졸중과 신부전으로 에센에서 사망했다.
그의 이름을 딴 구스타프 하이네만 평화상(Gustav-Heinemann-Friedenspreis)은 매년 세계 평화 증진에 기여한 어린이 및 청소년 도서에 수여되고 있다.
5. 종교 활동
원래 무신론적 배경에서 자랐으나, 1926년 힐다 오르데만과 결혼하면서 기독교 신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의 아내는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유명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에게 신학을 배운 인물이었다.[2] 아내와 아내의 교구 목사 빌헬름 그레이버, 그리고 처제를 통해 알게 된 스위스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하이네만의 신앙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칼 바르트의 사상은 하이네만이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갖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나치당이 집권한 후 독일 교회를 장악하려 하자, 하이네만은 이에 맞서 적극적으로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 1933년, 그가 속한 에센 교구의 빌헬름 그레이버 목사가 나치에 협력적인 '독일 기독교인'(Deutsche Christen) 운동 세력에 의해 부당하게 해임되자, 하이네만은 교구 장로(''Presbyter'')로서 항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나치에 저항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 조직인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 운동에 참여하여 총회 일원이자 법률 고문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법률 지식을 활용해 교회를 도왔다.[3]
하이네만은 에센 몰트케비어텔에 있는 자택 지하실에서 고백교회의 정보지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독일 전역에 배포하는 등 위험을 무릅쓰고 나치 정권에 저항했다. 또한, 박해받는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법률 자문을 제공하고, 숨어 지내는 유대인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등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3] 그는 고백교회 내부의 일부 노선에는 동의하지 않아 1939년 교회 지도부 직책에서는 물러났지만, 교구 장로직은 계속 유지하며 신앙에 기반한 저항 활동을 이어갔다.[3] 그의 신중함 덕분에 나치 정권 하에서 체포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신념 때문에 그는 나치당 가입을 거부했으며, 이로 인해 쾰른 대학교 강사직을 이어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2] 또한, 고백교회 활동을 중단하라는 요구를 거부하여 1936년 라인-베스트팔렌 석탄 신디케이트 이사직 초청이 철회되기도 했다.[8]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하이네만의 교회 활동은 계속되었다. 그는 1936년부터 1950년까지 에센의 YMCA 책임자를 역임했다.
1945년 8월,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EKD)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나치 시대 교회의 과오와 침묵을 반성하는 슈투트가르트 죄책 고백 발표에 참여했다. 하이네만은 이 선언을 자신의 교회 활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여겼다.
1949년부터 1955년까지는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EKD)의 전 독일 총회 회장직을 수행했다. 그는 독일 프로테스탄트 평신도들의 대규모 신앙 대회인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 대회(''Deutscher Evangelischer Kirchentag'')의 창립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또한, 1949년 고백교회 형제회 의회(Bruderrat)에서 발행한 잡지 ''Die Stimme der Gemeinde''("교구의 목소리")의 창립 편집자로 참여했으며, 세계 교회 협의회(WCC)의 "국제 문제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국제적인 교회 협력에도 기여했다.
그의 종교적 신념과 활동은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딸 우타 랑케-하이네만은 비판적 신학자이자 사회 운동가로 활동했으며, 다른 딸 크리스타는 후에 독일 연방 대통령이 되는 요하네스 라우와 결혼하여 크리스티나 라우가 되었다.
6. 사상과 유산
구스타프 하이네만은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 그리고 평화와 화해를 중요한 가치로 삼았던 정치인이었다. 그는 법무장관으로서 형법의 민주화를 추진하고 나치 전범의 공소시효 연장에 기여했으며, 동성애 비범죄화, 혼외자의 권리 보장 등 사회적 약자의 권익 향상에 힘썼다.[8] 대통령 재임 시에는 스스로를 "시민의 대통령"이라 칭하며 시민들의 민주적 권리 행사와 법치주의 수호를 강조했고, 1968년 학생 운동에 대해서도 비교적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9]
또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평화와 화해를 적극적으로 추구했다. 독일연방군의 핵무기 보유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했으며[11], 대통령으로서 과거 나치 독일 점령 하에 있던 국가들을 방문하며 동방 정책을 지지하고 동유럽 국가들과의 화해를 모색했다.[3] 특히 네덜란드와 일본 히로시마 방문 등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평화 의지를 보여주는 행보였다.[14]
1974년 퇴임 후에도 인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급진주의자 포고령'(Radikalenerlassde)과 같이 시민의 권리를 제약할 수 있는 조치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11] 그의 이러한 신념과 활동은 오늘날에도 '구스타프 하이네만 평화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려지고 있으며, 독일 사회에 민주주의와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6. 1.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
1966년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내각(CDU-SPD 대연정)이 성립되자, 빌리 브란트 SPD 당수의 추천으로 법무장관에 임명되었다. 당시 형법 개정이 주요 과제였는데, 하이네만의 법무장관 취임은 야당에서도 환영받았다. 법무장관으로서 그는 형법의 민주화를 추진하여, 징역형의 목적을 교화에서 자유형으로 변경하고 나치 전범의 공소시효 연장을 결정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간통죄와 남성 간의 동성애가 형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혼인 관계와 상관없이 모든 아동의 권리가 동등하게 보장되었으며,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자가 부당하게 처벌받지 않도록 법이 개정되었다. 한편, 학생운동이 고조되던 시기인 1968년에 제정된 긴급사태법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 법이 오히려 긴급 상황 시 정부의 자의적인 탄압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장치라고 주장했다. 과격해지는 학생운동에 대해 키징거 총리가 "무장한 좌익 급진파에 의한 반의회주의적 행위"라고 비난했을 때도, 하이네만은 학생운동을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의 표현으로 이해하면서도 폭력 사용은 비판하는 입장을 보였다.1969년 3월, 하이네만은 자유민주당(FDP) 다수 대표의 지지를 받아 서독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FDP가 SPD와의 연정(사회자유주의 연정, 1969년 10월 ~ 1982년 10월)을 염두에 둔 정치적 변화의 신호로 해석되었다.
대통령으로서 하이네만은 스스로를 "국가의 대통령"이 아닌 "시민의 대통령"으로 규정했다. 그는 일반 시민들을 대통령 신년 인사회에 초대하는 전통을 시작했으며, 연설을 통해 서독 시민들에게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에서 벗어나 민주적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고 법치주의와 사회 정의를 수호할 것을 촉구했다.[8] 이러한 태도와 1968년 학생 운동에 대한 개방적인 자세는 젊은 세대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서독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에는 국가가 아닌 아내를 사랑한다고 답하기도 했다.[9]
하이네만은 대통령 재임 중 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 점령 하에 있던 국가들을 방문하며, 동유럽 국가들과의 화해를 추구하는 사회자유주의 정부의 동방 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분쟁과 평화의 본질, 그리고 환경 문제에 대한 연구를 장려했다.[3] 또한 독일 해방 운동 기념 박물관 설립을 제안하여 1974년 라스타트에 개관을 실현시켰는데, 이는 그의 조상들이 1848년 독일 혁명에 참여했던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10]
1957년 SPD에 입당한 이후, 하이네만은 새로 창설된 독일연방군의 핵무장에 반대하는 '''반핵 운동'''을 주도했다. 1958년 의회 연설에서는 냉전을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싸움"으로 묘사한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를 향해 “그리스도는 마르크스를 위해 죽지 않았다. 우리 모두를 위해 죽었다”고 비판하며 날을 세웠다. 같은 해, 그는 핵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가 국제법 및 독일 기본법 제25조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며,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언급하며 핵무장에 강력히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1974년 고령과 건강 문제로 연임에 도전하지 않고 퇴임했으며, 1976년 사망했다. 사망 직전에는 1972년 도입된 "급진주의자 포고령"(Radikalenerlassde)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포고령은 교사, 공무원 등 모든 공직 후보자의 정치 성향을 사전에 조사하여 급진주의자로 분류된 인물을 배제하는 제도였는데, 하이네만은 이러한 방식이 다수의 시민을 잠재적 용의자로 취급하여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11]
그의 이름을 딴 "구스타프 하이네만 평화상"(Gustav-Heinemann-Friedenspreisde)은 세계 평화 증진에 기여한 아동 및 청소년 도서에 매년 수여되고 있다.
6. 2. 평화와 화해
구스타프 하이네만은 제2차 세계 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평화와 화해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1957년 새로 창설된 독일연방군의 핵무기 보유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했으며, 사회민주당(SPD) 소속으로 연방의회에 복귀한 이후에도 이 활동을 이어갔다. 1958년 의회 연설에서는 아데나워 총리가 냉전을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싸움"으로 규정한 것을 비판하며, "그리스도는 마르크스를 위해 죽지 않았다. 우리 모두를 위해 죽었다"고 반박했다. 같은 해, 그는 핵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가 국제법 및 연방기본법 제25조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며,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상기시키며 핵무장에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연방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하이네만은 과거 나치 독일이 점령했던 국가들을 주로 방문하며 화해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빌리 브란트 총리가 추진한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정책을 적극 지지했으며, 갈등과 평화의 본질, 그리고 환경 문제에 대한 연구를 장려했다.[3] 그의 제안으로 독일 해방 운동을 기념하는 박물관 건립이 추진되었고, 1974년 라스타트에 공식적으로 개관했다. 이는 그의 조상들이 1848년 혁명에 참여했던 역사적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10]
하이네만은 독일 국가 원수로서 처음으로 과거 독일의 침략으로 인해 반독 감정이 강했던 네덜란드를 방문했다. 또한 1970년에는 일본 만국박람회 참석차 일본을 방문하여 오사카뿐만 아니라, 독일 외무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히로시마를 찾아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인류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파멸을 피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으며, 후에 히로시마 적십자 원폭 병원에 100만엔을 기부했다.[14] 서독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동유럽의 루마니아를 방문하기도 했다.
국내적으로는 인권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독일 적군의 테러나 1972년 뮌헨 올림픽 테러와 같은 폭력 행위를 강력히 비판하면서도, 정부의 과도한 대응에는 경계심을 나타냈다. 특히 1972년 브란트 총리가 발표한 이른바 '급진주의자 포고령'(Radikalenerlass)에 대해, 이는 공직 지원자들을 잠재적 용의자로 취급하는 것으로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며 강하게 비판하는 에세이를 발표하기도 했다.[11] 퇴임 후인 1974년 12월에는 옥중에서 단식 투쟁 중이던 독일 적군 멤버 울리케 마인호프를 직접 찾아가 생명을 존중하여 단식을 중단할 것을 설득하기도 했으나, 정치범 집단 수용 요구에 대해서는 폭력 투쟁의 지속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거절했다.
그의 평화와 화해에 대한 신념은 사후에도 이어져, 세계 평화 증진에 기여한 아동 및 청소년 도서에 수여하는 '구스타프 하이네만 평화상'(Gustav-Heinemann-Friedenspreis)이 제정되어 매년 시상되고 있다.
6. 3. 유산
구스타프 하이네만의 이름을 딴 여러 상과 시설이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구스타프 하이네만 시민상: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1977년 제정하여 수여하고 있다.
- 구스타프 하이네만 어린이·청소년 도서 평화상: 1982년부터 세계 평화에 기여한 아동 및 청소년 도서에 수여되고 있다.
- 구스타프 하이네만 교육·회의 센터: 바트 말렌테-그렘스밀렌에 위치하고 있다.
- 학교: 그의 이름을 딴 여러 학교가 있으며, 특히 장애인을 위한 학교가 다수 설립되었다.
- 옛 군사 막사: 에센에 있었으나 2003년 폐쇄되었다.
- 구스타프 하이네만 다리: 베를린 미테 구역의 슈프레 강 위에 있는 다리로, 2005년부터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하이네만은 1848년 혁명에 참여했던 자신의 증조부 등을 기리기 위해 라슈타트에 독일 역사상 자유주의 운동 참여자들을 위한 기념관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1969년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독일 연방 공화국 공로 훈장 특등 대십자장과 바스 훈장 등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그는 서훈 자체를 비판하며 훈장 수여를 일관되게 거절했고, 독일 연방 공화국 공로 훈장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7. 가족
1926년, 하이네만은 유명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의 제자였던 힐다 오르데만(Hilda Ordemann, 1896~1979)과 결혼했다.[2] 신학을 공부한 힐다는 하이네만이 멀어졌던 기독교 신앙으로 다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 봉사 활동에도 헌신하여 지적 장애인, 여성 수감자, 마약 중독자를 위한 지원 단체를 설립했고 국제앰네스티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아내와 아내의 교구 목사인 빌헬름 그레이버는 하이네만이 멀어졌던 기독교로 그를 다시 이끌었다. 형제의 처를 통해 그는 스위스 신학자 칼 바르트와 친분을 맺었고,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대한 비판과 같은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구스타프와 힐다 하이네만 부부는 슬하에 아들 피터와 딸 우타(우타 랑케-하이네만), 크리스타(크리스티나 라우의 어머니), 바바라 등 1남 3녀를 두었다.
차녀 크리스타의 딸이자 하이네만의 외손녀인 크리스티나 라우는 요하네스 라우와 결혼했다. 요하네스 라우는 본래 GVP 당원이었으나 이후 하이네만과 함께 SPD로 당적을 옮겼고,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주총리를 거쳐 1999년 독일 연방 대통령 선거에 SPD 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야당 PDS이 후보로 내세운 사람은 하이네만의 장녀이자 크리스티나의 고모인 신학자이자 평화 운동가인 우타 랑케-하이네만이었다. 선거 결과, 2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득표한 요하네스 라우가 제8대 독일 연방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8.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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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1차 득표율 | 1차 득표수 | 2차 득표율 | 2차 득표수 | 3차 득표율 | 3차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69년 선거 | 독일의 대통령 | 3대 | 독일 사회민주당 | 49.6% | 514표 | 49.3% | 511표 | 49.4% | 512표 | 1위 | 당선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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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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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esel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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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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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eb.archive.[...]
201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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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BB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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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g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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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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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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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quirinale[...]
2012-10-14
[13]
웹사이트
Reply to a parliamentary question
http://www.parlament[...]
2012-10-14
[14]
뉴스
広島原爆病院に百万円寄付 西独大統領
朝日新聞
1970-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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