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단 (일본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군단(일본사)은 701년 다이호 율령에 규정된 일본의 군사 조직으로, 7세기 중반까지 호족이 무장시켜 편성한 국조군과 달리 국가가 징병한 군인으로 구성되었다. 군단은 당나라와 신라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창설되었으나, 실제 침공은 없었고 과도한 군사력 유지에 따른 재정 부담과 백성의 고통으로 인해 792년 간무 천황 시기에 무쓰국, 데와국, 사도국, 사이카이도를 제외한 지역에서 폐지되었다. 군단 폐지 후에는 겐지제가 도입되었으며, 치안 악화로 인해 무사 계급이 성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군단은 국사 아래에 배치되었으며, 군의가 지휘하고 대의, 소의, 주장 등의 지휘 체계를 갖추었다. 병사들은 개인 장비를 자급하고, 관급 장비와 함께 훈련을 받았으며, 각 군단에는 인장이 존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군단 (일본사) - 이와키단
이와키단은 일본 율령 시대에 무쓰노쿠니에 설치되어 에미시와의 전쟁에 대응한 군단으로, 고닌 연간에 신설되었으며, 지방 통치 정책의 일환으로 지역 호족 등용과 백성들의 생활 안정에 기여했고, 보신 전쟁 때에는 아이즈 번 출신 무사들로 구성된 부대가 신정부군에 저항하며 이와키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 군단 (일본사) - 아사카단
아사카단은 8세기부터 11세기 초 일본 육오국에 설치되어 에미시 침략에 대비하고 다조성에 주둔하며 국방을 담당했던 군사 조직으로, 병력 증강과 이와키단 증설을 통해 무쓰국의 방어 체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으나, 11세기 초 정치적 불안정 등으로 쇠퇴하여 멸망했다. - 부병제 - 위소제
위소제는 명나라의 기본적인 군사 조직 체계로, 전국에 위와 소를 설치하여 군사를 주둔시키고 평시에는 둔전을 통해 군량을 확보했으나, 군적 고착화 및 군호 세습 등의 문제와 군호의 몰락으로 쇠퇴하였다. - 부병제 - 속오군
속오군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시대에 창설된 지방군 조직으로, 삼수병을 중심으로 오를 기본 단위로 하는 편제를 갖추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요역에 동원되는 천예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군단 (일본사) | |
---|---|
군단 정보 | |
군단 (고대 일본) 명칭 | 군단 (軍団, ぐんだん) |
군단 (일본사) 명칭 | 군단 (軍団, ぐんだん) |
설치 시기 | 7세기 후반 |
폐지 시기 | 8세기 말 ~ 9세기 초 |
존속 기간 | 약 100년 ~ 150년 |
목적 | 변경 방위 및 국내 진압 |
군사 조직 | |
최고 지휘관 | 진수부 장군 또는 절도사 |
편제 | 군단 (軍団) 군아 (軍衙) 병단 (兵団) 초 (哨) 화 (火) |
병력 구성 | 정병 (正兵): 농민 출신 징병병 해사정병 (解仕正兵): 교대 복무 마친 정병 번사 (番士): 변경민 출신 병사 건아 (健児): 군단 내 정예병 |
주요 임무 | 변경 경비 국내 반란 진압 수도 방위 |
설치 지역 | |
거점 지역 | 규슈 이세 미노 에치젠 에치고 무쓰 데와 |
역사적 배경 | |
배경 | 백촌강 전투 패배 이후 야마토 조정의 방위력 강화 필요성 증대 임신왜란 이후 쓰시마 방비 강화 |
연혁 | 7세기 후반: 군단 설치 시작 8세기: 군단 정비 및 강화 8세기 말 ~ 9세기 초: 군단 폐지, 모노노베 제도 도입 |
영향 | 일본 초기 군사 제도 확립에 기여 변경 지역 방위력 강화 지방 세력 성장 억제 |
2. 역사적 배경
일본의 군단(軍団)은 율령제를 기반으로 중앙 정부가 백성을 직접 징병하여 편성한 대규모 보병 중심의 군사 조직이었다. 이는 당나라를 모방한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당나라나 신라와 같은 외부 세력에 대항하며, 나아가 신라를 복속시키거나 에미시를 정벌하려는 정치적, 군사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당나라나 신라에 대항하고 필요시 출병할 수 있는 군사력 확보는 고분 시대부터 이어져 온 일본의 대외 정책 기조를 따른 것이었다.
군단은 민정을 담당하는 군(郡)과는 별도로 조직되었으며, 전국 각지에 주둔지가 설치되었다. 각 군단은 주둔지의 지명 뒤에 '군단' 또는 '단'을 붙여 불렸다.
그러나 8세기 말에 이르러 정치 방침이 변화하면서 군단을 유지할 명분이 약해졌다. 결국 엔랴쿠 11년(792년), 무쓰국, 데와국, 사도국, 사이카이도 등 일부 국경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 군단 제도는 폐지되었다. 폐지된 지역의 치안 유지는 지방의 유력자 자제들로 구성된 건아(健児) 제도가 대신하게 되었다. 이후 826년에는 사도국과 사이카이도 지역의 군단마저 폐지되면서, 군사력의 중심은 점차 지방 행정 기구인 고쿠가(国衙)와 수령(受領)에게 넘어가 고쿠가 군제(国衙軍制)로 이행되었다.
2. 1. 국조군(国造軍)
고분 시대와 아스카 시대 일본의 군대는 역사학에서 국조군国造軍|고쿠조군일본어이라고 불린다. 이 군대는 중앙과 지방의 호족들이 자신들의 종자와 예속된 백성들을 무장시켜 편성한 형태였다. 국조군은 7세기 중반까지 유지되었으며, 왜・고구려 전쟁이나 663년에 벌어진 백강 전투에도 참전하였다.2. 2. 군단의 성립
군단(軍団)은 다이호 원년(701년)에 제정된 다이호 율령에 규정되어 있다.[10][1] 그러나 군단이 정확히 언제 성립되었는지를 직접적으로 기록한 사료는 없다.7세기 중반까지 일본의 군대는 중앙과 지방의 호족들이 자신의 종자나 예속된 백성들을 무장시켜 편성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를 역사학계에서는 국조군(國造軍)이라고 부른다. 군단은 이러한 국조군과 비교했을 때 두 가지 주요한 특징을 가진다. 첫째는 병사를 국가가 직접 징병했다는 점이고[11][2], 둘째는 군사 조직을 지방 행정 기구와 분리했다는 점이다.[12][3]
군단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늦게 보는 설은 다이호 율령이 반포되면서 군단도 함께 설치되었다는 것이고, 좀 더 이른 시기로 보는 설은 지토 천황 3년(689년)의 아스카키요미하라령에 의해 설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6]
국가가 병사를 징병하기 위해서는 개별 주민의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호적 작성이 필수적이다. 일본에서 호적 제도는 덴지 천황 9년(670년)의 경오년적(庚午年籍)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군단 성립의 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경오년적이 불충분했다고 보고, 지토 천황 4년(690년)의 경인년적(庚寅年籍)을 그 기준으로 삼는 설도 있다.[13][2]
국가에 의해 징병된 병사들이 처음부터 다이호 율령 시대의 군단과 같은 형태로 편성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초기에는 고리(評, 이후의 군(郡))를 단위로 부대를 이루어 고리의 관리가 통솔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이러한 형태는 평제군(評制軍) 또는 고리조군(評造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군사 조직이 지방 행정 기구로부터 분리되는 과정과 관련하여, 군대의 지휘관인 군의(軍毅)의 성립과 고리의 역할 변화가 중요한 기준으로 주목받는다. 덴무 천황 14년(685년) 11월 4일, 군대 지휘용 도구와 대형 무기를 개인이 보관하지 않고 군가(郡家, 실제로는 고리의 관청)[4]에 납부하도록 명령한 조칙은 이 시기에 군사 지휘권이 고리에게 있었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증거로 여겨진다.[14][5] 이러한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군단의 성립 시기는 아스카키요미하라령(689년) 또는 다이호 율령(701년) 제정 시기가 유력한 후보로 좁혀진다.[15]
중앙 정부는 율령제의 틀 안에서 백성들로부터 병사를 징병하여 대규모 집단 보병전을 상정한 군대를 정비했다. 이러한 대규모 군대 정비의 목적은 당나라를 모방한 국가 체제를 갖추고, 당나라나 신라와 같은 외부 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군사력을 확보하며, 나아가 신라를 복속시키려는 정치적 의도와 에미시 정벌 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당나라나 신라에 대항하고 필요시 출병할 수 있는 군사력 확보는 고분 시대부터 이어져 온 일본의 대외 정책 기조를 따른 것이었다.
이론적으로 당시 일본의 인구는 약 400만 명 전후로 추정되며, 최대 20만 명 정도의 병력 동원이 가능했을 것으로 계산된다. 이러한 대규모 군사력 확보의 배경에는 백강 전투(663년)에서 국조군(또는 고리조군)이 대패한 충격이 군제 개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당이나 신라의 침공 가능성에 대비하려는 목적이 컸다고 여겨진다.[7] 그러나 실제로 당이나 신라의 침공은 일어나지 않았고,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역시 실행되지 않았다. 국내적으로도 하야토 정벌, 에미시 정벌, 후지와라노 히로쓰구의 난, 에미노 오시카쓰의 난과 같은 충돌이나 내란이 있었지만, 국가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의 규모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당시 일본은 필요 이상으로 과대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재정 부담과 병역 및 납세 부담은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 때문에 평시에도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고 전시에 즉각 대응한다는 율령제 군사 체제의 이상은 장기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웠다.[7]
2. 3. 군단 제도의 변화와 폐지
고분 시대부터 이어져 온 대외 정책과 당나라를 모방한 국가 체제 정비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군단이었지만, 현실적으로 당이나 신라의 침공은 일어나지 않았고,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도 실행되지 않았다. 국내에서 하야토나 에미시 정벌, 후지와라노 히로쓰구의 난이나 에미노 오시카츠의 난 같은 내란이 있었으나 국가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론상으로는 당시 일본 인구 약 400만 명 중 최대 20만 명까지 동원 가능했다고 추정되지만[7], 이는 결과적으로 필요 이상의 과도한 군사력이었다. 이 거대한 군사 조직을 유지하는 데는 막대한 재정 부담이 따랐고, 백성들은 병역과 납세라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결국 평시에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고 전시에 즉시 대응한다는 율령제 군사 체제의 이상은 장기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웠다.[7]8세기 말에 이르러 정치 방침이 바뀌면서 군단 유지의 명분이 희미해졌다. 엔랴쿠 11년(792년) 6월, 간무 천황은 현실과 맞지 않게 된 율령제를 재정비하기 위한 대규모 행정 개혁의 하나로 군단 제도를 폐지했다. 다만 국경 지역인 무쓰국, 데와국, 사도국과 사이카이도 여러 쿠니(国)는 예외로 남겨두었다. 군단이 폐지된 지역에서는 건아(健児) 제도를 도입하여 무예가 뛰어난 자들을 선발해 군사 업무를 맡겼다. 이 조치로 백성들이 짊어졌던 병역의 부담은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이후 826년에는 에미시와의 전쟁이 계속되던 무쓰와 데와를 제외하고 사도국과 사이카이도 지역의 군단도 폐지되었다. 군사력의 중심은 점차 지방 행정 기구(고쿠가, 수령)로 넘어가 고쿠가 군제(国衙軍制)가 자리 잡게 되었고, 각 지역의 치안은 이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군단 폐지는 중앙 조정이 국가적인 군사력을 사실상 포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각지의 치안 악화로 이어졌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한 유력 농민들이 점차 무사 계층으로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한편, 조정은 치안 유지를 위해 새로운 군사·경찰 조직으로 게비이시(検非違使)를 설치했다.
3. 징병
요로 율령과 양로율령의 군방령(軍防令)에 따르면, 정정(丁丁, 21세에서 60세 사이의 건강한 남성) 3명당 1명을 병사로 징발하도록 규정했다. 이 규정대로라면 국가 전체 정정 인구의 3분의 1이라는 막대한 인원이 군단에 복무해야 하지만, 실제 징병 비율은 이보다 낮아 한 집(호, 戶)에서 1명 정도가 징병되는 것이 실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6][8]
징병된 병사는 식량과 무기를 스스로 마련해야 했으며, 평상시에는 교대로 군단에 소집되어 훈련을 받고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16][8]
또한, 군단 병사 중에서 일부는 위사로 선발되어 도읍으로 보내져 위사부나 위문부에 소속되어 근무하기도 했다. 특히 동국 지역 군단의 병사들은 방인(防人)이나 진병(鎮兵)으로 선발되어 국경 지역인 규슈 지방이나 도호쿠 지방으로 파견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병역 부담은 매우 가혹했기 때문에 임무 수행 중 사망하거나 도망가는 병사도 적지 않았다.[16][8] 이즈모국의 행정 기록인 「계회장」(計會帳)에는 덴표 6년(734년) 한 해에만 이즈모국에서 규슈 북부 방위를 위한 방인의 교대 요원을 세 차례나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6][8]
율령제에서 '병사'(兵士)라는 용어는 군단에 소속된 병사만을 가리키며, 그 외의 전투 조직의 병력은 각각 고유한 명칭으로 불렸다.[16][8]
4. 규모와 지휘 체계
평시의 군단은 국사(国司) 아래에 소속되었다. 표준적인 군단의 정원은 1,000명이었으나, 이후 병력 축소가 이루어지면서 작은 국에서는 규모가 줄어들거나 아예 폐지되기도 했다. 축소된 군단은 100명 단위로 적절한 크기로 편성된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나타난 1개 군단의 병력 수는 적게는 200명에서 많게는 1,00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무쓰국(陸奥国)의 경우처럼 시대에 따라 10,000명의 병력을 6개 군단으로 나누거나, 8,000명의 병력을 7개 군단으로 편성하는 등 1개 군단의 병력이 표준 정원인 1,000명을 넘는 예외적인 경우도 존재했다.
군단의 지휘는 군기(軍毅)가 담당했으며, 대기(大毅), 소기(小毅), 주장(主帳) 등의 직책이 있었다. 그 아래로는 교위(校尉), 려솔(旅帥), 대정(隊正) 등이 병사들을 통솔했다. 전쟁 시에는 장군이 전체 지휘의 정점에 섰다.
군단은 규모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뉘었으며, 지휘관 구성도 달랐다.
구분 | 병력 | 지휘관 |
---|---|---|
대단(大団) | 1,000명 | 대기(大毅) 1명, 소기(小毅) 2명 |
중단(中団) | 600명 이상 | 대기(大毅) 1명, 소기(小毅) 1명 |
소단(小団) | 500명 이하 | 군기(軍毅) 1명 |
- ''참고: 500명 초과 600명 미만에 대한 규정은 명확하지 않지만, 군단 편제가 100명 단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실제 운용에는 큰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의 이하의 지휘 계통과 편제는 다음과 같다.
직책 | 통솔 병력 / 역할 | 비고 |
---|---|---|
교위(校尉) | 200명 | 이백장(二百長)이라고도 불림 |
려솔(旅帥) | 100명 | 백장(百長)이라고도 불림 |
대정(隊正) | 50명 (1개 대(隊)) | 대장(隊長)이라고도 불림. 대는 기본적인 전투 단위였다. |
화장(火長) | 10명 (1개 화(火)) | 화는 병사들의 생활, 행동, 보급의 기본 단위로, 한 번 불을 피워 10인분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에서 유래했다. |
오장(伍長) | 5명 (1개 오(伍)) |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명확한 규정이 없고 발굴된 자료에서도 확인되지 않아 그 존재를 의심하는 견해도 있다. |
주장(主帳) | 사무 처리 | 군단의 행정 및 기록 업무를 담당했다. |
따라서 일반적인 지휘 계통은 대기 - 소기 - 교위 - 려솔 - 대정 - 화장 - (오장) 순서로 구성되었다.
각 군단에는 구리로 만든 인장이 지급되었다. 지쿠젠국(筑前国)에 설치되었던 오카단과 미카사단의 인장이 각각 1899년과 1927년에 다자이후(大宰府) 주변(현재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시)에서 출토된 바 있다.[9]
5. 장비
주2: 화(火)는 병사 10명으로 구성된 분대 단위이다.
주3: 대(隊)는 병사 50명으로 구성된 소대 단위이다.
주4: 단(団)은 군단의 기본 단위이다.
주5: 북, 각(뿔나팔), 쇠뇌는 군단에만 소지가 허용되었고 일반 소지는 금지되었다.
주6: 쇠뇌는 체격과 완력이 뛰어난 자를 대(隊)별로 2명씩 선발하여 쇠뇌수 교육을 시켰다.
갑주는 군단의 기본 장비에 포함되지 않았다. 갑주는 제작에 높은 비용과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에 당시 생산량이 매우 적었고, 모든 병사에게 지급되는 표준 장비가 될 수 없었다. 대규모 동정(東征)과 같이 특별한 군사 작전이 있을 경우, 지휘관의 요청에 따라 별도로 지급되기도 했지만, 상시 주둔하며 경비 임무를 맡는 성격이 강했던 군단 병력에게 갑주가 지급된 사례는 많지 않다.
6. 배치
군단은 한 국에 최소 하나씩 배치되었고, 규모가 큰 국에는 여러 군단이 배치되었다. 군단의 지휘 계통은 군(郡) 이하의 지방 조직에 대응했으며, 지휘관인 대의(大毅)와 소의(少毅)는 군사(郡司) 계층에서 선발되었다.[1] 복수의 군단이 배치될 경우, 여러 개의 군(郡)당 하나 정도의 비율로 군단이 존재했다. 1개 군단은 국부(國府)가 소재하는 군의 군가(郡家) 근처에 주둔했고, 다른 군단들도 다른 군가 근처에 주둔하며 훈련했다.[1]
다음 3개 국가는 배치된 모든 군단과 그 소재지가 밝혀졌다.
국명 | 군단명 |
---|---|
무쓰국 | 타마츠쿠리단(玉造団), 시라카와단(白河団), 나토리단(名取団), 나메카타단(行方団), 아사카단(安積団), 오다단(小田団), 이와키단(磐城団) |
데와국 | 데와단(出羽団) (명칭은 추정)[2] |
이즈모국 | 오우단(意宇団), 구마가야단(熊谷団), 진몬단(神門団) (『이즈모 국풍토기』 기록)[2] |
아래는 일부 군단만 밝혀진 국가들이다.
국명 | 군단명 |
---|---|
사가미국 | 요료단(餘綾団), 오스미단(大住団) |
스루가국 | 아베단(安倍団) |
오미국 | 시가단(志賀団), 쿠리타단(栗太団) (소재 및 명칭 추정)[2] |
사도국 | 사와타단(雑太団) |
야마토국 | 타카이치단(高市団), 소에카미단(添上団) |
에치젠국 | 뉴우단(丹生団) |
아키국 | 사이키단(佐伯団) |
다지마국 | 케타단(気多団) |
나가토국 | 토요우라단(豊浦団) |
지쿠젠국 | 온가단(遠賀団), 미카사단(御笠団) |
히젠국 | 키이단(基肄団) |
히고국 | 마시키단(益城団) |
또한, 군단의 수와 병력이 밝혀진 예는 다음과 같다. 병력 수는 고닌 4년(813년) 8월 9일 감원 이전의 수치이며, 괄호 안은 감원 이후의 병력이다.[2]
국명 | 군단 수 | 병력 (감원 전) | 병력 (감원 후) |
---|---|---|---|
지쿠젠국 | 4개 | 4,000명 | 2,000명 |
지쿠고국 | 3개 | 3,000명 | 1,500명 |
부젠국 | 2개 | 2,000명 | 1,000명 |
분고국 | 2개 | 1,600명 | 1,000명 |
히젠국 | 3개 | 2,500명 | 1,500명 |
히고국 | 4개 | 4,000명 | 2,000명 |
7. 군단 제도의 의의와 영향
중앙 정부는 율령제에 따라 백성 중에서 병사를 징병하여 대규모 집단 보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군대를 조직했다. 이러한 대규모 군대 정비는 당나라를 모방한 국가 체제 구축, 당나라와 같은 외부 세력에 대한 군사력 확보, 신라를 복속시키려는 정치적 목적, 그리고 에미시 정벌 등을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당나라나 신라에 대항하고 필요시 출병할 수 있도록 군사력을 갖추는 것은 고분 시대부터 이어져 온 일본의 대외 정책 기조를 따른 것이었다.
군단은 행정 구역인 군과는 별개로 운영되는 군사 조직이었으며, 전국 각지에 주둔지가 설치되었다. 각 군단은 주둔지 이름 뒤에 '군단' 또는 '단'을 붙여 불렸다.
그러나 8세기 말, 정치 방침의 변화로 군단 유지의 명분이 사라지게 되었다. 엔랴쿠 11년(792년)에 이르러 무쓰국, 데와국, 사도국, 사이카이도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군단 제도는 폐지되었다. 이후 각 지역의 치안 유지는 지방 군사력인 건아 제도가 맡게 되었다. 826년에는 사도국과 사이카이도 지역의 군단마저 폐지되었다. 군사력의 중심은 점차 지방 행정 기구인 고쿠가와 수령으로 넘어가 고쿠가 군제가 형성되었고, 각 지역의 치안 유지를 담당하게 되었다.
참조
[1]
서적
律令国家の軍事制
[2]
논문
律令制軍団の成立について
[3]
논문
軍毅についての一考察
[4]
문서
[5]
서적
日本書紀
[6]
논문
軍毅についての一考察
[7]
간행물
白村江敗戦と軍事力の組織化-軍防令の理念と実像-
八木書店
[8]
서적
島根県の歴史
[9]
웹사이트
軍団印出土地[御笠団印・遠賀団印]|日本遺産太宰府 古代日本の「西の都」~東アジアとの交流拠点~
https://www.dazaifu-[...]
2022-01-02
[10]
서적
律令国家の軍事制
[11]
논문
律令制軍団の成立について
[12]
논문
軍毅についての一考察
[13]
논문
律令制軍団の成立について
[14]
서적
日本書紀
[15]
논문
軍毅についての一考察
[16]
서적
島根県の歴史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