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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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정환은 1899년 서울에서 태어나, 아동문학가이자 어린이 인권 운동가로 활동하며 한국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보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통해 아동심리학과 아동문학을 공부했으며, 3·1 운동 참여와 천도교와의 인연을 통해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키웠다. 1923년 한국 최초의 아동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색동회를 조직하여 아동 운동을 전개하며, 어린이날 제정을 주도하는 등 아동 권익 신장에 힘썼다. 33세의 젊은 나이에 신부전으로 사망했지만, 그의 업적을 기려 소파상, 방정환문학상 등이 제정되었으며, 묘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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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방정환 |
한글 이름 | 방정환 |
한자 이름 | 方定煥 |
로마자 표기 | Bang Jeong-hwan |
다른 이름 | 잔물 금파리 쌍 S 물망초 목성 북극성 몽중인 몽견초 소파 |
출생 및 사망 | |
출생일 | 1899년 11월 9일 |
출생지 | 서울, 대한제국 |
사망일 | 1931년 7월 23일 |
사망지 | 경성부, 일제강점기 조선 |
직업 및 활동 | |
직업 | 소설가 아동문학가 독립운동가 |
국적 | 대한제국 |
활동 시기 | 1918년 – 1931년 |
장르 | 소설 수필 아동문학 |
주요 작품 | 사랑의 선물 |
학력 | |
교육 | 동양대학교 |
가족 | |
기타 | |
데뷔 작품 | 1918년 『청춘』에 수필 "관화" 발표 |
관련 인물 | 윤극영 |
기념 | 어린이날 제정 |
2. 일생
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 서울에서 태어나 1931년 7월 23일 신부전으로 사망했다.[2]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동학에 입교하여 손병희의 사위가 되었으며, 보성전문학교 (고려대학교)에서 수학했다. 3·1운동 당시 조선독립신문을 배포하다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도요 대학 철학과에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1923년 조선 최초의 아동문화 단체인 색톤회를 조직하고, 순수 아동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는 등 아동 운동에 힘썼다. 방정환의 문학 활동은 일제강점기 봉건주의와 일본 제국의 탄압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데 기여한 독립운동이자 민족 운동이었다.
1931년 7월 23일, 과로와 스트레스로 건강이 악화되어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16] 그는 "어린이를 두고 떠나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겼다.[16]
2. 1. 성장기
1899년 한성부 서부 적선방(積善坊) 야주현계(夜珠峴契)(지금의 서울 종로구 당주동과 신문로1가 경계)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온양 방씨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후손으로, 친할아버지 방한룡에게 한문을 배웠다.[9]어린 시절에는 개구쟁이로, 4대가 함께 사는 부유한 대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병약한 어머니에게서 자랐고, 집안이 망한 후 일찍 출가한 누이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었다. 1905년 일곱 살 때 3촌을 따라갔다가 우연히 만난 김중환(金重煥) 교장의 설득으로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하였다. 보성소학교에서는 입학생은 댕기를 자르고 머리를 깎아야 했는데, 이를 본 친할아버지 방한룡은 진보 지식인들의 급진성에 대한 거부감을 보였다. 하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손주의 뜻을 존중하여 학교에 다니는 것을 묵인하였다. 1907년, 방정환의 집안은 작은할아버지(1857 후 ~ 1907 후)의 사업 실패로 가난해졌다. 1908년에는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동화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의 활동을 하였다.
2. 2. 문학 등단
1913년 서울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한 방정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이 맞지 않아 상업학교 공부보다는 신문화 흡수를 위한 독서에 주력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로 최남선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올 때에 가지고 온 인쇄 자모와 인쇄 노동자 2명과 함께 서울에서 운영한 출판사에서 발간한 어린이 잡지인 《소년》, 《붉은 저고리》를 탐독했다고 한다.1917년 최남선이 펴내던 잡지 《청춘》에 보낸 글이 현상문예 선외가작에 뽑힘으로써 등단하였다. 그러던 중 졸업을 1년 앞두고, 당시 담임교사와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적성에 맞지 않는 선린상업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모처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며 독학하였다. 훗날 소파는 "선린상업학교를 계속 다녔다면 조선은행 서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회고할 정도로 그의 인생을 바꾼 결정이다.
2. 3. 천도교와의 만남
1915년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국에서 서류 필사 업무를 하며 유광렬과 함께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활동했다.[14] 1917년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던 천도교인 권병덕의 천거로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셋째 딸 손용화와 결혼하면서 천도교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보성전문학교 법학과에 입학하고,[14] 천도교청년회의 핵심 활동가로 활동하며 청년 운동과 문학 활동에 전념했다.소파 방정환은 권병덕의 천거로 손병희의 사위가 되었는데, 이는 그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손용화에 따르면, 손병희는 천도교 신자와 결혼을 시키고자 권병덕에게 사윗감을 추천받았고, 권병덕은 방정환을 추천했다. 손병희는 방정환의 마른 체형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권병덕이 "사람은 똑똑하나 어릴 적에 너무 굶주려서 마른 것이니 잘 먹으면 괜찮을 것입니다."라고 설득하며 방정환의 부지런함, 미래에 대한 포부, 지도력 등의 장점을 강조하여 결국 사위로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10][11]
당시 방정환은 19세, 손용화는 17세였으며, 결혼식은 1917년 음력 4월 초파일(손병희의 생신)에 이루어졌다.
장인과 장모의 배려 덕분에 방정환은 건강을 회복하고 보성전문학교 (고려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처가의 지원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면서, 청춘 잡지에 단편소설과 수필을 투고하는 등 작가로 활동할 수 있었고, 이는 훗날 아동문학가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10][11]
2. 4. 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이 일어나자, 보성학교 교장 윤익선(尹益善)이 천도교 보성사에서 인쇄한 조선독립신문을 배포하다 체포되었다. 방정환은 직접 등사기로 조선독립신문 2호를 인쇄하여 중학생들의 도움으로 배포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경찰이 들이닥치기 전에 등사기를 우물에 버려 일주일 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1] 그러나 독립신문 발행에 함께 참여한 청년구락부 동료들은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옥사하였으며, 방정환도 고문을 당했다.[1]2. 5. 일본 유학
1920년 9월 중순, 개벽사 도쿄부 특파원이자 천도교청년회 도쿄 지회장의 임무를 띠고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했다. 1921년 4월 도요 대학에 신설된 문화학과에 보통청강생으로 정식 입학하여 철학과 신문화, 아동 문학, 아동 심리학 등을 공부하였다. 당시 일본 경찰은 독립 운동 경력이 있는 유학생 방정환에게 형사를 보내 감시하였는데, 일본 경찰 형사들도 지시를 받고 일하는 처지인 터라 이들에게 존중하여 대해서 형사들도 소파를 존중했다고 한다.[13]1920년~1923년 사이 유학 기간에 천도교에서 문화사업을 위해 펴내고, 사회주의자들인 김기진, 박영희가 발행한 잡지인 《개벽》에 수필, 번역동화, 민족적·계급적 색채가 강한 풍자기 등을 발표하였다. 1920년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였는데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중국 유학 기간인 1921년에 외국 동화를 번역하여 1922년 7월 개벽사에서 번역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출판하였다.《사랑의 선물》은 방정환이 살아있을 때 출판한 유일한 단행본이다.[13]
2. 6. 어린이 운동
방정환은 어린이 인권 보호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22년 5월 1일 어린이날 행사를 노동절에 색동회 회원들과 함께 주최했는데, 이는 당시 어린이들이 아동 노동과 같은 자본주의의 오랜 악습으로 억압과 착취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정환은 이들을 해방시키고자 했다.[3]어린이 인권선언에는 어린이에게 높임말을 사용할 것, 위생에 힘쓸 것, 잘못을 했더라도 차근차근 설명할 것, 잡지를 통해 건강한 정서를 갖도록 할 것, 소풍을 통해 건강한 몸과 정신을 가지도록 할 것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방정환이 조직한 소년구락부에서도 문화재 관람, 연극 공연 및 관람, 밤 줍기 행사, 서로 높임말 쓰기 등의 활동과 규칙이 있었다.
1923년에는 김기전, 이정호와 함께 조선 최초의 아동문화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여 아동 문제 연구와 아동 문화 운동을 주도했다.
방정환의 이러한 활동은 일제강점기 봉건주의와 일본 제국의 탄압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데 기여한 독립운동이자 민족 운동이었다.
2. 6. 1. 어린이 잡지 창간
1923년 어린이 (1923년 3월 20일 창간, 1934년 3월 통권 122호를 마지막으로 발간 중지)를 창간하였다.[14] 방정환은 한국 아동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어린이》를 통해 아동문학을 독립적인 장르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3]처음에는 엽서로 신청을 받아 무료로 배포했으나 18명만이 신청할 정도로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방정환은 동화, 독자 응모 등 어린이와 학부모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싣는 창의성을 발휘하여 널리 읽히게 되었다.[14] 윤동주 시인도 어린 시절에 《어린이》를 읽었다고 한다.
《어린이》는 마해송, 고한승, 정순철, 윤극영뿐만 아니라 독자였던 이원수, 윤석중, 윤복진, 최순애 등이 작품을 투고하여 아동문학가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고, 한국 아동문학계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2. 7. 요절
1931년 7월 23일, 잡지 발행·편집, 동화 구연, 소년문제 강연회, 집필 중 일제의 가중되는 탄압과 개벽사의 재정난, 민족운동과 사회주의로 갈라진 소년운동 진영의 분열 등 과로와 스트레스, 비만으로 건강이 악화된 방정환은 누적된 피로로 쓰러져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現.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향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16] 병원에 입원해서도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동화를 들려 줄 만큼 성격이 밝았던 그는 '문간에 검은 말이 끄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으니 떠나야겠소. 어린이를 두고, 떠나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16]3. 사후
방정환이 사망한 후 유해는 홍제동의 납골당에 안장되었으나 1936년 7월 23일, 그의 기일에 망우 역사 문화공원으로 이장되었다.
1957년 방정환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소파상'이 제정되었다. 1958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이 추서되었으며, 이후 1978년 금관문화훈장, 1980년 3월 1일 건국포장,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각각 추서되었다.
1971년에는 색동회가 주관하고 전국 어린이들의 성금을 모아 2년간 제작한 동상이 남산 어린이회관 옆에 세워졌다.[17] 1983년 어린이날, 망우 역사 문화공원에 있는 방정환의 묘소에 「소파방정환 선생의 비(碑)」가 세워졌으며,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에 그가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되었다.
1998년 설립된 한국방정환재단은 소파 방정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올바른 어린이 문화 지평을 넓히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방정환의 정신과 가치를 연구하고(방정환연구총서), 사료를 수집, 정리하는 사료 편찬 사업(정본 방정환전집)을 진행하며, 한국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 국제비교 조사 연구와 함께 다양한 작은물결 프로젝트(책 지원 사업인 작은물결문고, 미디어 격차 해소 지원 사업인 작은물결미디어꿈나무, 작은물결 장학금, 작은물결책나눔터, 작은물결 어린이 인문도서출판사업 등)를 통해 창의적인 어린이 청소년 공익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는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에게 10년을 투자하라'고 했던 소파 방정환 선생의 유훈을 계승하는 것이다.
2017년 망우 역사 문화공원에 있는 방정환의 묘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4. 평가
방정환은 한국 아동 문학의 선구자이자 어린이 인권 운동의 선각자로 평가받는다. 1923년부터 1934년까지 발행된 아동문학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여 아동문학을 독립적인 장르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3] 방정환의 작품들은 삶의 경제적 어려움이 어린이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어린이의 순수성을 왜곡하는 방식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며, 선이 결국 악을 이기고 아동기의 순수함을 회복시킨다는 견해를 강화한다.[3]
방정환은 연극제와 공개 낭독회를 조직하고, 1922년 5월 1일에 처음으로 기념된 한국의 어린이날 제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3] 또한 천도교소년회와 색동회를 포함한 여러 아동 단체를 설립했다.[3] 김기전, 이정호와 함께 한국 아동 권리의 초기 옹호자로 여겨진다.[3]
1967년 5월호 《신동아》에 실린 윤극영의 글에 따르면, 일본 고등계 경찰관 미와 와사부로는 방정환을 "흉측하지만 밉지 않은 놈"이라고 평가하며, "일본 사람이었더라면 .. 든든히 한 자리 잡을 만한 놈"이라고 언급했다.[18]
방정환의 문학 활동은 민족을 근대화하여 빼앗긴 주권을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이자 민족 운동이었다. 색동회를 통한 활동은 봉건주의와 일본 제국의 탄압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의 창작 동요 등은 천사주의적인 아동관에 기반한 감상적인 동심주의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는 전통적인 유교 사상 속에서 인권이 보장되지 않던 아동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5. 작품
방정환은 동화, 동요, 소설, 수필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대표작으로는 번안 동요집 《사랑의 선물》, 소년 소설 《칠칠단의 비밀》, 동요 〈형제별〉, 수필 〈어린이 찬미〉 등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어린이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3]
- 어린이날
- 형제별
- 개똥벌레(동요)
- 어린이 찬미(수필)
- 칠칠단의 비밀(어린이탐정소설), 동생을 찾아서(어린이 탐정소설). 사계절출판사에서 사계절 아동문고로 펴냄.
- 그 외 만년셔츠 등 '어린이'에 연재한 창작동화. 민담 즉, 민중들이 창작하여 입으로 입으로 전한 전래동화를 각색하거나 소파 선생이 어린이들이 읽기 좋도록 창작한 동화들이다. 도서출판 에세이에서 펴냈다.
- 1922년, 번안 동요집 『사랑의 선물』(愛のプレゼント)[7]
- 1940년, 『소파전집』(小波全集)
- 1947년, 『소파 동화독본』(小波の童話読本)
- 1974년, 『소파 아동문학전집 전8권』(小波の児童文学全集全8巻)
- 1962년, 소년소설 『칠칠단의 비밀』(77段の秘密)
- 1962년, 순정소설 『동생을 찾으러』(弟を捜しに)
한국문학번역원(The Literature Translation Institute of Korea)은 방정환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Bang Jeonghwan was the father of Korean children’s literature. He founded the children’s literature magazine, Eorini, which was published from 1923 to 1934, and helped establish children’s stories, songs, and plays as independent genres of literature. The original stories, adaptations, and translations that Bang contributed to the magazine reveal his deep understanding of the impact of life’s economic hardships on children and the way they distort the innocence of children. Rich in moral lessons, these works reinforce the view that good ultimately triumphs over evil and that the purity of childhood is restored. In addition to these literary activities, Bang was constantly seeking ways to improve the lives of children culturally and materially. He organized theater festivals and public readings as part of a larger cultural movement for children, and was instrumental in establishing Korea’s Children’s Day, which was first celebrated on May 1, 1922. He also founded several children’s organizations, including the Cheondogyo Children’s Association and the Saekdong Association. Bang, along with Kim Gijeon and Lee Jeongho, is considered an early advocate of children’s rights in Korea.영어 방정환은 한국 아동문학의 아버지였다. 그는 1923년부터 1934년까지 발행된 아동문학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여 아동문학의 이야기, 노래, 연극을 독립적인 장르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 방정환이 잡지에 기고한 창작 이야기, 각색 작품, 번역 작품들은 삶의 경제적 어려움이 어린이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어린이의 순수성을 왜곡하는 방식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교훈이 풍부한 이 작품들은 선이 결국 악을 이기고 아동기의 순수함을 회복시킨다는 견해를 강화한다. 이러한 문학적 활동 외에도 방정환은 문화적, 물질적으로 아동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그는 아동을 위한 더 큰 문화 운동의 일환으로 연극제와 공개 낭독회를 조직했으며, 1922년 5월 1일에 처음으로 기념된 한국의 어린이날 제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천도교소년회와 색동회를 포함한 여러 아동 단체를 설립했다. 방정환은 김기전, 이정호와 함께 한국 아동 권리의 초기 옹호자로 여겨진다.[3]
6. 방정환문학상
한국문학번역원은 방정환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방정환은 한국 아동문학의 아버지였다. 그는 1923년부터 1934년까지 발행된 아동문학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여 아동문학의 이야기, 노래, 연극을 독립적인 장르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 방정환이 잡지에 기고한 창작 이야기, 각색 작품, 번역 작품들은 삶의 경제적 어려움이 어린이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어린이의 순수성을 왜곡하는 방식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교훈이 풍부한 이 작품들은 선이 결국 악을 이기고 아동기의 순수함을 회복시킨다는 견해를 강화한다. 이러한 문학적 활동 외에도 방정환은 문화적, 물질적으로 아동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그는 아동을 위한 더 큰 문화 운동의 일환으로 연극제와 공개 낭독회를 조직했으며, 1922년 5월 1일에 처음으로 기념된 한국의 어린이날 제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천도교소년회와 색동회를 포함한 여러 아동 단체를 설립했다. 방정환은 김기전, 이정호와 함께 한국 아동 권리의 초기 옹호자로 여겨진다.[3]
참조
[1]
웹사이트
Author Database - Korea Literature Translation Institute
https://web.archive.[...]
2013-09-03
[2]
웹사이트
Author Database - Korea Literature Translation Institute
https://web.archive.[...]
2013-09-03
[3]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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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3
[4]
웹사이트
Bang Jeong-hwan's 117th Birthday
https://doodles.goog[...]
2016-11-09
[5]
웹사이트
(115)온양 방씨(溫陽方氏)-64,128명
http://www.seoulecon[...]
2014-11-17
[6]
웹사이트
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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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한국현대문학대사전
http://terms.naver.c[...]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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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사랑의 선물-소파 방정환의 생애
한림출판사
2005-12
[9]
간행물
온양 방씨 대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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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방정환
시공주니어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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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어린이 인권운동가 소파 방정환
스타북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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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방정환
시공주니어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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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사랑의 선물
경향신문
1973-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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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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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사계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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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빙수를 좋아하던 小波
경향신문
1962-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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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方定煥선생銅像 제막
경향신문
1971-07-23
[18]
뉴스
동화처럼 떠나 간 식민지 아이들의 산타 소파 방정환
https://news.naver.c[...]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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