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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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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라나다 전쟁은 1482년부터 1492년까지 이어진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연합왕국(가톨릭 군주)이 이베리아 반도 최후의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 토후국을 정복한 전쟁이다. 내부 분열과 경제적 쇠퇴를 겪던 그라나다 토후국은 카스티야-아라곤 연합군의 공세에 직면했고, 주요 전투와 공성전을 거치며 1492년 그라나다 함락으로 종결되었다. 이 전쟁은 레콩키스타를 완성하고, 스페인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무슬림들의 개종과 추방, 반란을 초래하는 등 스페인 사회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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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 전쟁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그라나다 전쟁
일부레콩키스타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오르티스의 《그라나다의 항복》.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오르티스의 《그라나다의 항복》. 무함마드 12세 (아부 압달라)가 페란도 2세이사벨 1세에게 항복하는 모습을 그렸다.
날짜1482년 2월~1492년 1월 2일
장소이베리아반도 남부
결과기독교군의 승리
결과 설명레콩키스타 완수
교전국
교전국 1[[파일:Bandera de la Corona de Castilla.svg|23px]] 카스티야 연합왕국
[[파일:Armas del soberano de Aragón.svg|22px]] 아라곤 연합왕국
교전국 2[[파일:Royal Standard of Nasrid Dynasty Kingdom of Grenade.svg|30px]] 그라나다 토후국
지휘관
지휘관 1[[파일:Armas del soberano de Aragón.svg|22px]] 페란도 2세
[[파일:Bandera de la Corona de Castilla.svg|23px]] 이사벨 1세
지휘관 2[[파일:Royal Standard of Nasrid Dynasty Kingdom of Grenade.svg|30px]] 아부이하산 알리
[[파일:Royal Standard of Nasrid Dynasty Kingdom of Grenade.svg|30px]] 무함마드 13세
[[파일:Royal Standard of Nasrid Dynasty Kingdom of Grenade.svg|30px]] 무함마드 12세
병력
병력 1불명
병력 2불명
사상자
사상자 1불명
사상자 2100,000명 전사 / 노예화 (민간인 포함)
기타
로마자 표기Guerra de Granada
오스파니아어 표기paria

2. 배경

레콩키스타가 진행되면서, 그라나다 토후국은 200년 넘게 이베리아 반도에 존속해 온 마지막 이슬람 국가였다. 한때 강력했던 코르도바 칼리파국알안달루스 국가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기독교 세력에게 정복당했다. 1400년 이슬람 작가 이븐 후다일은 "그라나다는 거친 바다와 끔찍한 적군 사이에 갇혀 있지 않은가? 둘 다 밤낮으로 백성들을 압박하고 있다"라며 비관적인 평가를 내렸다.[46] 그럼에도 그라나다는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로 남아 있었고, 이베리아 북부의 기독교 왕국들은 분열되어 서로 전쟁을 벌였다.

1417년 유수프 3세가 사망하면서 그라나다의 내부 상황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왕위 계승 다툼으로 내전에 가까운 혼란이 계속되었고, 에미르에 대한 충성심보다 지역 호족들의 세력이 더 강해 권력 통합도 어려웠다. 에미르가 실제로 다스리는 영토는 그라나다시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도시 전체를 통제하지 못하고 경쟁자끼리 알람브라 궁전과 알바이신을 나눠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다.[47]

내부 투쟁으로 국력이 약화되면서 경제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한때 고품질로 유명했던 그라나다 도자기 산업은 아라곤 왕국 발렌시아 인근 마니세스의 도자기에 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나다 정부는 방어선과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높은 세율을 유지했고, 백성들은 카스티야 백성보다 3배나 많은 세금을 내야 했다.[48] 이로 인해 아부이하산 알리 에미르에 대한 원성이 높아졌지만, 징수된 세금은 군사력 강화에 기여하여 기독교도 반란을 진압하는 데 사용되었다. 당시 아부이하산은 7,000명의 기병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49]

그라나다와 카스티야 왕국의 안달루시아 영토 사이 국경지대는 "평화도 전쟁도 아닌 상태"가 지속되었다.[50] 양측의 습격이 빈번했고, 지역 귀족들 간의 동맹도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가끔 휴전을 맺거나 공물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중앙 정부는 국경 분쟁에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49]

1474년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4세가 사망하자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이사벨 사이에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아라곤 연합왕국, 포르투갈 왕국, 프랑스 왕국까지 가담하며 1479년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그라나다와의 국경은 사실상 무시되었고, 여러 차례 휴전 협상이 이루어졌다. 1479년 이사벨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고, 아라곤 국왕 페란도 2세와의 결혼으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통합되면서, 그라나다 토후국의 운명에도 변화가 예고되었다.[51]

15세기 나스르 왕조의 영토. 밝은 연두색으로 칠해진 부분은 13세기 이래 스페인의 기독교 왕국이 차지한 영역이다.

2. 1. 15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정세

레콩키스타가 진행되면서, 그라나다 토후국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200년 넘게 존속해 온 마지막 이슬람 국가였다. 한때 강력했던 코르도바 칼리파국알안달루스 국가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기독교 세력에게 정복당했다. 1400년 이슬람 작가 이븐 후다일은 "그라나다는 거친 바다와 끔찍한 적군 사이에 갇혀 있지 않은가. 둘 다 밤낮으로 백성들을 압박하고 있다"라며 비관적인 평가를 내렸다.[46] 그럼에도 그라나다는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로 남아 있었고, 이베리아 북부의 기독교 왕국들은 분열되어 서로 전쟁을 벌였다.

1417년 그라나다의 에미르였던 유수프 3세가 사망하면서 그라나다의 내부 상황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유수프 3세의 왕위를 놓고 후계자 간의 투쟁으로 인해 내전에 준하는 혼란 정국이 계속되었다. 에미르에 대한 충성심보다 각 지역 호족들에 대한 충성심이 더 강해 권력 통합도 어려웠으며, 에미르가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영토는 그라나다 시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에미르가 도시 전역을 다스리지 못한 경우도 있었는데, 에미르 후계자 한 명이 알람브라 궁전을 차지하면 다른 후계자는 그라나다의 요충지인 알바이신을 차지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47]

그라나다의 내부 투쟁은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한때 고품질로 이름났던 그라나다의 도자기 산업도 아라곤 왕국 발렌시아 인근의 마니세스에서 생산되는 도자기 상품에 밀려나면서 경제가 쇠락하기 시작했다. 악화된 경제에도 불구하고 그라나다 정부는 드넓은 방어선과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높은 세율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그라나다 백성이 내는 세금은 카스티야 백성이 내는 세금의 3배에 달했으며,[48] 고세율 정책을 유지한 에미르 아부이하산 알리에 대한 원성이 높았다. 다만 이렇게 거둔 세금은 군사 분야에 큰 보탬이 되어, 아부이하산이 기독교도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아부이하산이 기병을 7,000명이나 동원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49]

그라나다 토후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안달루시아 영토 간의 국경지대는 "평화도 전쟁도 아닌 상태"로 유동적이었다.[50] 양측에서 국경을 넘어 습격하는 일이 다반사였으며, 지역 귀족들 간의 동맹군이 뒤섞이기도 했다. 가끔 양측 간에 휴전을 맺기도 했고, 상대측의 여력을 넘어선 것으로 보이면 공물을 요구하는 식으로 관계를 이어나갔다. 두 국가의 중앙정부는 국경지대의 충돌에 대대적으로 개입하거나 통제하려 들지 않았다.[49]

1474년 12월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4세가 사망하자 엔리케의 딸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와 엔리케의 이복누이 이사벨 사이에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이사벨을 지지하는 세력에는 아라곤 연합왕국이, 후아나를 지지하는 세력에는 포르투갈 왕국프랑스 왕국이 합류하면서, 왕위 계승전쟁은 1475년부터 1479년까지 최고조에 이르렀다. 왕위 계승전쟁으로 그라나다와의 국경은 사실상 무시되었다. 1477년에는 그라나다 측이 카스티야를 습격했지만 카스티야 측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1475년, 1476년, 1478년 세 차례에 걸쳐 그라나다와의 휴전 협상이 이뤄졌다. 1479년 왕위 계승전쟁이 이사벨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사벨은 1469년 아라곤 국왕 페란도 2세와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두 왕국은 통합왕국이 되었으며, 기독교 세력 간의 분쟁으로 존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그라나다 토후국의 운명에 변화가 있음을 예고하였다.[51]

2. 2. 그라나다 토후국의 내부 상황

나스르 왕조그라나다 토후국은 200년 넘게 존속해 온 이베리아 반도 최후의 이슬람 국가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 세력에게 알-안달루스 영토를 빼앗기면서, 1400년 이슬람 작가 이븐 후다일은 "그라나다는 거친 바다와 끔찍한 적군 사이에 갇혀 있다"는 비관적인 평가를 내렸다.[46]

1417년 유수프 3세가 사망하면서 그라나다의 내부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왕위 계승 다툼으로 내전에 가까운 혼란이 계속되었고, 에미르에 대한 충성심보다 지역 호족들의 세력이 더 강해 권력 통합도 어려웠다. 에미르가 실제로 다스리는 영토는 그라나다시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도시 전체를 통제하지 못하고 경쟁자끼리 알람브라 궁전과 알바이신을 나눠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다.[47]

내부 투쟁으로 국력이 약화되면서 경제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한때 고품질로 유명했던 그라나다 도자기 산업은 아라곤 왕국 발렌시아 인근 마니세스의 도자기에 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나다 정부는 방어선과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높은 세율을 유지했고, 백성들은 카스티야 백성보다 3배나 많은 세금을 내야 했다.[48] 이로 인해 아부이하산 알리 에미르에 대한 원성이 높아졌지만, 징수된 세금은 군사력 강화에 기여하여 기독교도 반란을 진압하는 데 사용되었다. 당시 아부이하산은 7,000명의 기병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49]

그라나다와 카스티야 왕국의 안달루시아 영토 사이 국경지대는 "평화도 전쟁도 아닌 상태"가 지속되었다.[50] 양측의 습격이 빈번했고, 지역 귀족들 간의 동맹도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가끔 휴전을 맺거나 공물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중앙 정부는 국경 분쟁에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49]

1474년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4세가 사망하자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이사벨 사이에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아라곤 연합왕국, 포르투갈 왕국, 프랑스 왕국까지 가담하며 1479년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그라나다와의 국경은 사실상 무시되었고, 여러 차례 휴전 협상이 이루어졌다. 1479년 이사벨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고, 아라곤 국왕 페란도 2세와의 결혼으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통합되면서, 그라나다 토후국의 운명에도 변화가 예고되었다.[51]

3. 전개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왕국이사벨 1세페란도 2세의 결혼으로 연합하여 그라나다에 공동으로 맞서게 되었다.[52] 1481년 12월 그라나다가 사하라를 기습 공격하면서, 1478년 카스티야-그라나다 휴전 조약은 깨졌다. 이 공격으로 사하라 마을은 파괴되고 주민들은 노예가 되었으며, 카스티야는 이를 도발로 간주했다. 결국 카스티야 군은 알라마를 점령하고 왕실 승인을 받으면서, 그라나다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51]

1482년 3월, 아부 하산은 알라마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4월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 지원군이 도착하여 그라나다의 탈환 시도를 막았다. 페란도 2세는 5월 14일 알라마에서 군대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같은 날, 그라나다의 에미르 아부 하산의 아들 아부 압달라 (보아브딜)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를 무함마드 12세로 칭했다.[53] 1483년, 알자갈이 아하르키아 언덕에서 카스티야 군을 격파했지만, 루세나에서 카스티야 군은 아부 압달라의 군대를 물리치고 그를 포로로 잡았다.

페란도 2세와 이사벨 1세는 아부 압달라를 이용하여 그라나다를 완전히 정복하기로 결정했다. 1483년 8월, 페란도 2세는 "그라나다를 분열시키고 파괴하기 위해 그를 석방하기로 했다... 그는 아버지와 전쟁을 할 것이다"라는 편지를 썼다.[53] 아부 압달라는 카스티야의 협력자로 위장하여 석방되었고, 그라나다 내전은 재개되었다.

1490년 바사 함락과 알자갈의 포로 수감으로 전쟁이 끝난 듯 보였고,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도 그렇게 생각했다.[15] 그러나 무함마드 12세는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와의 동맹에 대한 보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15] 무함마드 12세는 맘루크 왕조의 술탄 카이트바이와 와타스 왕조의 페스 술탄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북아프리카는 전쟁 내내 카스티야에 을 계속 팔았고, 좋은 무역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더욱이 그라나다는 해안 영토를 상실하여 해외 원조를 받을 수 있는 해안선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라나다에는 아무런 도움도 오지 않았다.[16]

3. 1. 카스티야-아라곤 연합군의 공세

이사벨 1세 (사진)와 페란도 2세의 결혼은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왕국의 연합을 이룩하고 그라나다에 공동으로 맞서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왕국이사벨 1세페란도 2세의 결혼으로 연합하여 그라나다에 공동으로 맞서게 되었다.[52] 1478년 카스티야-그라나다 휴전 조약은 명목상 유지되었으나, 1481년 12월 그라나다가 사하라를 기습 공격하면서 깨졌다. 이 공격으로 사하라 마을은 파괴되고 주민들은 노예가 되었다. 카스티야는 이를 도발로 간주, 안달루시아 정복 지지 세력은 반격을 주장하며 확전을 꾀했다. 결국 카스티야 군은 알라마를 점령하고 왕실 승인을 받으면서, 그라나다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51]

1482년 3월, 아부 하산은 알라마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4월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 지원군이 도착하여 그라나다의 탈환 시도를 막았다. 페란도 2세는 5월 14일 알라마에서 군대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카스티야 군은 로하 시를 포위했지만 점령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같은 날, 그라나다의 에미르 아부 하산의 아들 아부 압달라 (보아브딜)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를 무함마드 12세로 칭했다.[53] 1483년, 알자갈이 아하르키아 언덕에서 카스티야 군을 격파했지만, 루세나에서 카스티야 군은 아부 압달라의 군대를 물리치고 그를 포로로 잡았다.

페란도 2세와 이사벨 1세는 처음에는 그라나다 정복 의사가 없었지만, 아부 압달라를 포로로 잡자 그를 이용해 그라나다를 완전히 정복하기로 결정했다. 1483년 8월, 페란도 2세는 "그라나다를 분열시키고 파괴하기 위해 그를 석방하기로 했다... 그는 아버지와 전쟁을 할 것이다"라는 편지를 썼다.[53] 아부 압달라는 카스티야의 협력자로 위장하여 석방되었고, 그라나다 내전은 재개되었다. 그라나다 측 기록에서는 아부 압달라의 생포를 "조국을 파멸로 이끈 원인"이라 평가했다.[53]

3. 2. 주요 전투 및 공성전

1487년 카스티야군은 그라나다의 주요 항구인 말라가를 주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에미르 알자갈이 지휘하는 그라나다군은 포위전을 피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 행군해야 했고, 내전 중이었기 때문에 카스티야군을 교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알자갈은 알람브라를 떠날 때도 아부 압달라와 추종자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병력을 남겨두어야 했다.[57]

카스티야군은 현지 아부 압달라 지지 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벨레스말라가 (Vélez-Málaga)를 포위, 1487년 4월 27일 함락시켰다.[58] 1487년 5월 7일 말라가 시에 대한 포위전이 시작되었으나, 말라가 군사령관은 항복 대신 죽음을 택하겠다는 각오로 전투에 임했다. 아프리카 출신 이슬람 수비대와 이슬람으로 개종한 기독교도들도 패전을 두려워하며 끈질기게 저항했다. 페란도 2세는 두 차례 관대한 항복 조건을 제시했으나 말라가는 이를 거부했고, 이후 말라가가 항복을 제안했을 때는 페란도 2세가 이전 제의가 무시당했다며 거부했다.[59] 1487년 8월 18일 도시가 함락되자 페란도 2세는 끝까지 저항한 시민 대다수를 노예로 삼고, 배교자들은 산 채로 불태우거나 장대에 찔러 처형했다. 그러나 말라가에 살던 유대인들은 카스티야 측 유대인들이 몸값을 지불해 주어 목숨을 건졌다.[56]

역사학자 윌리엄 프레스콧은 말라가 공성전을 그라나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았다. 그라나다는 주요 항구인 말라가를 잃으면서 독립국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60]

바사는 알자갈이 지배하는 또 다른 주요 거점이었다. 바사는 1489년에 함락되었다.

3. 3. 그라나다 포위전과 함락 (1491년~1492년)

1491년 4월, 카스티야 군은 8개월에 걸친 그라나다 포위전을 시작했다. 포위 공격을 막아낼 아군 병력이 줄어들고, 대신들은 서로 음모를 꾸미는 등 그라나다 측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고위 관리들의 뇌물 수수가 만연했고, 무함마드 12세의 최고 고문 중 적어도 한 명은 카스티야의 간첩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66]

그라나다 함락 직후 알함브라에 머물던 무함마드 12세 (아부 압달라) 일가를 묘사한 그림


결국 1491년 11월 25일, 그라나다 조약이 체결되어 그라나다 시는 2개월의 유예 기간을 얻게 되었다.[67] 항복이 지연된 이유는 양측의 완고함 때문이라기보다는, 도시를 휩쓴 혼란과 소동 속에서 그라나다 정부가 제대로 협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현지 무슬림 주민들에게 상당히 관대한 조건이 협상된 후, 1492년 1월 2일 그라나다는 정식으로 항복했다. 항복 당일, 카스티야군은 혹시 모를 저항에 대비해 알람브라 궁전에 병력을 몰래 잠입시켰으나, 저항은 일어나지 않았다.[68] 이로써 그라나다의 저항은 막을 내렸다.

1490년 바사 함락과 알자갈의 포로 수감으로 전쟁이 끝난 듯 보였고,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도 그렇게 생각했다.[15] 그러나 무함마드 12세는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와의 동맹에 대한 보상에 불만을 품었는데, 아마도 약속받았던 영토를 카스티야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봉신 관계를 끊고 그라나다 시와 알푸하라스 산맥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군주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15] 장기적으로 그러한 입장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무함마드 12세는 외부의 지원을 절박하게 요청했다.

당시 무함마드 12세가 지원을 요청했던 주변국 중 이집트를 다스리던 맘루크 왕조의 술탄 카이트바이는 그라나다 전쟁에 대해 페르난도 2세를 완곡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맘루크 왕조는 오스만 제국과 거의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오스만 제국의 공동의 적이었기 때문에 술탄은 오스만 제국과의 동맹을 깨고 싶어하지 않았다. 무함마드 12세는 와타스 왕조의 페스 술탄국에도 도움을 요청했으나, 역사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16] 북아프리카는 전쟁 내내 카스티야에 을 계속 팔았고, 좋은 무역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더욱이 그라나다는 해안 영토를 상실하여 해외 원조를 받을 수 있는 해안선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라나다에는 아무런 도움도 오지 않았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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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략과 기술

그라나다 전쟁이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는 사석포대포공성전의 소요 시간을 크게 단축시키며 그 위력을 드러낸 전쟁이기 때문이다.[69] 전쟁 초기 아라곤과 카스티야 연합군은 포병이 극소수였지만, 페르난도 2세의 주도로 프랑스와 부르고뉴의 화약 전문가를 포섭하여 포병 병력을 공격적으로 늘려나갔다.[70] 반면 그라나다군은 포병 사용에 있어 훨씬 뒤처져 있었으며, 적군에게서 포획한 대포들을 가끔씩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71] 역사학자 웨스턴 F. 쿡 주니어(Weston F. Cook Jr.)는 "그라나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화약의 화력과 포병의 공성 작전이었으며, 다른 요인들은 부차적이거나 그로부터 유래한 것이 전쟁의 실상이었다"고 평가한다.[72] 1495년 아라곤과 카스티야군은 총 179대의 대포를 운용하였는데, 이는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에 투입됐던 미약한 규모에 비해 상당히 증가한 것이다.[73]

원시 화승총도 그라나다 전쟁에서 활용되었으나 그 정도는 미미했다.[74] 이전 전쟁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중기병 기사들의 비중은 훨씬 줄어들었으며,[75] 대신 경기병(히네테)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기병의 역할이 절실한 야외 전투는 드물게 치러졌는데, 이는 수적으로 열세였던 그라나다 측에서 공성전 위주로 전투를 유도했기 때문이었다.[76] 카스티야군은 자원병도 많이 고용하였는데, 1483년에는 엄청난 수의 노동자들이 소집되어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대신 농작물을 파괴하고 시골을 약탈하는 임무를 맡았다.[77] 한편 그라나다 특유의 산악 지형으로 인해 카스티야군의 조직 편성과 병참은 어려운 실정이었으나, 식량과 보급품의 원활한 전달을 위하여 산맥을 통과하는 일련의 도로를 부지런히 건설하기도 하였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각 귀족들은 자신의 군대를 직접 지휘하겠다고 나서는 경우가 많았으나,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는 군대 전체를 지휘할 수 있는 상당한 통솔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반대로 그라나다군은 내전으로 인해 지휘권 통합에 어려움을 겪었다.[78] 가톨릭 세력 측의 군대는 거의 대부분이 카스티야군이었으며, 아라곤군과 외국 용병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79] 카스티야의 각 지역 가운데 안달루시아는 가장 많은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인구 대부분이 전쟁에 징집되었다. 카스티야 귀족들도 값비싼 기병대를 거리낌 없이 전장에 내보냈다.[79]

1차 사료에 따르면, 카스티야군이 대대적인 군사작전에 나선 시기(1482~1483년, 1486~1487년, 1489년, 1491년)에 동원한 병력은 50,000명~70,000명에 이르렀으며, 큰 전투를 벌이지 않았던 시기(1484~1485년, 1488년, 1490년)에는 10,000명~29,000명 수준이었다. 이는 라데로 케사다(Ladero Quesada)를 비롯한 오늘날 학자들도 관련 연구를 통해 인정하는 수치다.[80]

그러나 가르시아 데 가비올라(García de Gabiola)는 이 정도의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고, 군 예산을 투입하며 식량을 공급하는 것은 현대 국가들도 쉽지 않은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탈리아 전쟁 (1494년-1498년)에 투입된 스페인군 병력이 최대 5,000명에서 9,000명~15,000명으로 추산되는데, 그보다 5~10년 전에 치른 전쟁에서 이 정도 병력을 동원했다는 것은 의외이며, 당시 카스티야의 연간 수입이 1억 3000만~2억 마라베디였음을 감안하면 카스티야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8,000명~20,000명 수준으로 보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보았다.[81]

가비올라는 케사다의 연구에서 드러난 전쟁 시기 카스티야가 계약한 곡식 물량을 바탕으로, 전체 병력의 20%를 기병으로 가정한 뒤 그 곡식 물량으로 먹일 수 있는 병력 규모를 계산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하였다.[82]

전투병력 규모
1482년 로하 공성전12,000명
1483년~1484년 그라나다 영토 약탈전8,000명
1485년 론다 공성전10,000명
1486년 제2차 론다 공성전10,000명~12,000명
1487년 말라가 공성전12,000명
1488년 제1차 바사 공성전10,000명~12,000명
1489년 제2차 바사 공성전20,000명 (최대 곡물 수송량 감소, 전쟁 당시 카스티야의 최대 수입인 약 2억 마라베디와 맞먹음)
1490년~1491년 그라나다 최후 공성전10,000명~12,000명



한편 무슬림군의 병력 규모는 1차 사료에서 보병 15,000명~50,000명, 기병 4,500명~7,000명 수준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가비올라는 이 역시도 현실적이지 않은 수치로 본다.[83] 그는 기병의 경우 실제로는 1482년 3,000명에서 1483년~1487년 1,000명~1,500명 수준이었으며 1489년~1491년에는 300~400명 수준으로 급격히 줄었다고 본다. 데 미구엘 모라(De Miguel Mora)는 바사 포위전 당시 포로로 잡힌 무슬림군이 수비대의 실제 보병 전력이 15,000명이 아니라 4,000명이라고 털어놓았다고 전한다.[84] 따라서 무슬림군의 보병 규모도 최대 4,000명 수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쟁이 끝날 무렵 카스티야군과 무슬림군의 병력 차는 2:1에서 3:1 수준으로 카스티야군이 우세했다.

5. 결과 및 영향

비센테 바르네토 이 바스케스의 그림 《그라나다의 항복》


그라나다 항복은 이슬람 세력에게 큰 타격을 주고 기독교 세력이 승리한 사건으로 여겨졌다. 다른 기독교 국가들은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보냈고, 이슬람 작가들은 절망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에서는 승전식과 투우가 열렸고, 백성들은 기뻐하며 거리로 나섰다.[85] 기독교계는 그라나다를 이슬람 통치에서 되찾은 것을 40년 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튀르크에 함락된 것에 대한 균형 회복으로 보았다.[86]

그라나다 항복 조약 조건은 무슬림에게 관대했다.[87] 3년간 자유로운 이주 및 귀환, 총기를 제외한 무기 소지(한 달 후 폐지), 종교 개종 강요 금지 등의 조건이 제시되었다. 아부 압달라에게는 알푸하라스의 작은 봉토와 보상금이 주어졌다.[87] 그러나 아부 압달라는 1493년 모로코로 떠났고, 카스티야는 시스네로스 주도로 무슬림 대량 개종, 아랍어 필사본 소각 등 강경책을 시행했다.[88]

이는 1499년 알푸하라스 반란을 야기했고, 무슬림은 세례, 추방, 처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후에도 긴장은 지속되었고, 카스티야는 그라나다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사벨 1세는 스페인 이단심문소를 강화했고, 페르난도 2세는 아라곤에도 도입했다.

카스티야는 그라나다 전쟁에 막대한 예산([90])과 인력을 소모했지만, 그라나다 합병으로 전쟁의 수혜자가 되었다. 아라곤은 전략적 이득은 없었지만, 이탈리아 전쟁 등에서 카스티야의 지원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89]

기독교로 개종한 무어인 (모리스코)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고, 1568년 알푸하라스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 진압 후, 스페인은 거의 모든 모리스코를 스페인 내 다른 지역으로 추방했다.

5. 1. 그라나다 전쟁의 종결과 [[레콩키스타]]의 완성

1491년 카스티야 군은 8개월에 걸친 그라나다 포위전을 시작했다. 그라나다 측은 병력 소모와 대신들의 반목, 뇌물 수수, 카스티야 간첩 활동 등으로 상황이 악화되었다.[66] 결국 1491년 11월 25일 그라나다 조약이 체결되어 그라나다 시는 2개월의 유예 기간을 얻었다.[67] 이는 양측의 비타협적인 자세 때문이 아니라, 도시 내 혼란으로 그라나다 측이 제대로 협력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492년 1월 2일, 그라나다는 정식으로 항복했다. 현지 무슬림 시민들에게는 관대한 조건이 제시되었지만, 카스티야 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알람브라 궁전에 군대를 배치했으나 저항은 없었다.[68]

그라나다의 항복은 이슬람 세력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기독교 세력에게는 승리로 여겨졌다. 기독교 국가들은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에게 축하를 보냈고, 이슬람 작가들은 절망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에서는 승전식과 투우가 열렸고, 백성들은 기뻐했다.[85] 기독교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대한 균형을 되찾은 것으로 보았다.[86]

항복 조약은 무슬림들에게 관대했다.[87] 3년간 자유로운 이주 및 귀환, 무기 소지(총기 제외, 한 달 후 폐지), 종교 개종 강요 금지 등의 조건이 제시되었다. 아부 압달라에게는 알푸하라스의 작은 봉토와 보상금이 제공되었다.[87] 그러나 무함마드 12세는 1493년 모로코로 떠났고, 카스티야는 시스네로스 주도로 무슬림 대량 개종, 아랍어 필사본 소각 등 강경책을 시행했다.[88]

이는 1499년 알푸하라스 반란을 야기했고, 무슬림들은 세례, 추방, 처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후에도 긴장은 지속되었고, 카스티야는 그라나다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사벨 1세는 스페인 이단심문소를 강화했고, 페르난도 2세는 아라곤에도 도입했다.

카스티야는 그라나다 전쟁에 막대한 예산([90])과 인력을 소모했지만, 그라나다 합병으로 전쟁의 수혜자가 되었다. 아라곤은 전략적 이득은 없었지만, 이탈리아와 프랑스 진출에 카스티야의 지원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89]

개종한 무어인(모리스코)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어 1568년 알푸하라스 반란을 야기했고, 이후 거의 모든 모리스코들이 스페인 내 다른 지역으로 추방되었다.

5. 2. 이후 에스파냐에 미친 영향

그라나다의 항복은 이슬람 세력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기독교 세력에게는 큰 승리로 여겨졌다. 다른 기독교 국가들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보냈지만, 이슬람 학자들은 절망하였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에서는 축하 행사와 투우가 열렸고, 사람들은 거리에서 환호했다.[85] 기독교 세계는 이슬람 통치로부터 그라나다를 되찾은 것을 40년 전 오스만 제국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대한 균형을 되찾은 것으로 보았다.[86]

항복 조약의 조건은 무슬림들에게 상당히 관대했다.[87] 3년 동안 자유롭게 이주하고 돌아올 수 있었으며, 총기를 제외한 무기를 소지할 수 있었으나 이 조항은 한 달 후에 폐지되었다. 무함마드 12세에게는 알푸하라스의 작은 봉토와 보상금이 제공되었다.[87] 처음에는 정복된 그라나다의 대부분이 존중받았고, 7년 동안 대체로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아부 압달라는 1493년 10월 모로코로 떠났고, 카스티야는 항복 조약의 일부 조항을 철회하기 시작했다. 시스네로스 대주교의 주도로 대량 개종, 아랍어 필사본 소각 등 이교도에 대한 적대 조치가 이루어졌다.[88]

이는 1499년 알푸하라스 반란을 일으켰고, 많은 무슬림들은 배교, 추방, 처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후로도 기독교도와 무슬림 간의 긴장은 높게 유지되었으며, 카스티야는 그라나다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다. 이사벨 1세는 스페인 종교재판을 강화했고, 페르난도 2세는 아라곤에 종교재판을 도입했다.

카스티야는 그라나다 전쟁에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소모하였으므로 그라나다를 완전히 합병함으로서 전쟁의 수혜자가 되었다. 아라곤은 그라나다 정복으로 전략적 이득은 없었으나, 이탈리아 전쟁 등에서 카스티야의 지원을 확보하는 계기로 삼았다.[89] 그라나다 전쟁에 투입된 예산은 총 4억 5천만 마라베디로 추산된다.[90]

기독교로 개종한 무어인 (모리스코)들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고, 결국 1568년 알푸하라스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 진압 후, 스페인은 거의 모든 모리스코들을 스페인 내 다른 지역으로 추방했다.

5. 3. [[모리스코]] 문제

아부 압달라는 결국 자신의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1493년 10월 모로코로 떠나 그곳에서 40년 뒤 사망했다.[88] 이후 카스티야는 항복 조약에 명시되었던 관대한 조건 중 일부를 철회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카스티야 대주교 시스네로스의 주도로 이루어진 조치였다. 시스네로스는 무슬림을 대량 개종시키고 아랍어 필사본을 불태우는 등 이교도에 대한 적대적인 조치를 취했다.[88]

이러한 강압적인 조치로 인해 무슬림들은 배교, 추방, 처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결국 1499년 알푸하라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88] 이후에도 기독교도와 무슬림 간의 긴장은 계속되었으며, 카스티야는 반란 가능성을 막기 위해 그라나다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다. 이사벨 1세 여왕은 스페인 종교 재판의 권한을 강화했고, 페르난도 2세도 아라곤에 종교 재판 제도를 도입하여 종교계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라나다에 살던 무어인 중 기독교로 개종한 '신기독교도' (모리스코)들도 있었으나, 이들에 대한 탄압은 수십 년간 지속되어 1568년 알푸하라스 반란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스페인은 무어인의 반란을 어렵게 진압한 후, 그들 대부분을 스페인 내 다른 지역으로 추방하는 조치를 내렸다.

6. 문화적 영향

그라나다 함락 기념일(Día de la Toma de Granada)은 매년 1월 2일 그라나다에서 열리는 시민 및 종교 축제이다. 21세기에 들어 좌파 정당들은 이 기념일을 비판하고 거부하며, 그라나다의 축제를 19세기 여걸인 마리아나 데 피네다 무뇨스의 기념일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40][41] 2019년과 2020년, 국민당은 스페인 국기를 배포하고 참석자들이 스페인 정체성을 찬양하는 구호를 외치는 행사를 개최했으며, 복스와 호가르 소셜도 참석했다. 반면 혁명적 반자본주의 좌파와 같은 다른 단체들은 이 행사에 반대하며 정복을 집단 학살이라고 규정했다.[42] 축제 기간 동안 스페인 군단이 군악대와 함께 행진하는데, 이는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사건을 일으킨 극우 및 민족주의 단체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스페인 사회당은 축제를 없애는 입장에서 "문화적 만남"의 표시로 무어스 앤 크리스티아노스 행렬도 추가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43]

6. 1. 문학

새로운 장르인 "국경 로맨스(romances fronterizos)"가 발전했는데, 이는 그라나다 함락과 국경 분쟁을 다룬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한다. 히네스 페레스 데 이타는 『그라나다 내란(Guerras civiles de Granada)』을 저술했는데, 이는 전쟁을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양측의 기사도와 영웅심을 강조한 역사 소설(historical fiction)의 초기 사례이다. 오랜 투쟁에서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왕실 정부의 후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많은 이야기와 노래들이 있다. 1479년에 쓰인 시 「바사(Sobre Baza)」는 장기간의 포위 공격에서의 끈기를 독려하는 내용이다. 1484년에 쓰인 노래 "세테닐, 아 세테닐(Setenil, ay Setenil)"은 페르난도 2세가 "예루살렘까지" 정복하기를 바라는 내용이다.[39] 후안 델 엔시나의 노래 "우나 사뇨사 포르피아(Una sañosa porfía)"는 보압딜 왕 자신의 입을 통해 전쟁을 묘사한다.

스페인 바로크 시대 극작가 칼데론 데 라 바르카는 그라나다 정복에 관한 희곡 「죽음 후의 사랑(Amar despues de la Muerte)」을 썼다. 이 작품은 1853년 데니스 플로렌스 맥카시에 의해, 그리고 1959년 로이 캠벨에 의해 "죽음 후의 사랑(Love After Death)"으로 번역되었다(칼데론 희곡 영어 번역 목록 참조). 영국 극작가 존 드라이든은 1672년에 출판된 영웅극(heroic drama)인 『그라나다 정복(The Conquest of Granada)』을 썼는데, 이 작품은 그라나다의 두 적대 세력 사이의 낭만적인 삼각 관계와 충돌하는 충성심에 초점을 맞추고, 포위 공격을 하는 카스티야 군대는 배경으로 남겨둔다.

6. 2. 기타

스페인 바로크 시대 극작가 칼데론 데 라 바르카는 그라나다 정복에 관한 희곡 《죽음 후의 사랑(Amar despues de la Muerte)》을 썼다. 이 작품은 영어로도 번역되었다(칼데론 희곡 영어 번역 목록 참조). 영국 극작가 존 드라이든은 1672년에 출판된 영웅극인 《그라나다 정복(The Conquest of Granada)》을 썼는데, 이 작품은 그라나다의 두 적대 세력 사이의 낭만적인 삼각 관계와 충돌하는 충성심에 초점을 맞추고, 포위 공격을 하는 카스티야 군대는 배경으로 남겨둔다.

그라나다 함락 기념일(Día de la Toma de Granada)은 매년 1월 2일 그라나다에서 열리는 시민 및 종교 축제이다. 21세기에 들어 좌파 정당들은 이 기념일을 비판하고 거부하며, 그라나다의 축제를 19세기 여걸인 마리아나 데 피네다 무뇨스의 기념일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40][41] 2019년과 2020년, 국민당은 스페인 국기를 배포하고 참석자들이 스페인 정체성을 찬양하는 구호를 외치는 이 행사를 개최했으며, 복스와 호가르 소셜도 참석했다. 반면 혁명적 반자본주의 좌파와 같은 다른 단체들은 이 행사에 반대하며 정복을 집단 학살이라고 규정했다.[42] 축제 기간 동안 스페인 군단이 군악대와 함께 행진하는데, 이는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사건을 일으킨 극우 및 민족주의 단체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스페인 사회당은 축제를 없애는 입장에서 "문화적 만남"의 표시로 무어스 앤 크리스티아노스 행렬도 추가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4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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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뉴스 La Toma de Granada: año nuevo, polémica vieja https://www.eldiario[...] 2015-01-02
[42] 뉴스 Una trifulca marca la Toma de Granada más tensa de los últimos años https://www.eldiario[...] 2020-01-02
[43] 웹사이트 La Toma de Granada: entre gritos de "yo soy español" y "no hay nada que celebrar" https://www.eldiario[...] 2019-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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