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섭 (19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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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명섭은 1938년생으로,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며 영등포에서 성장했다. 중앙대학교 약학대를 졸업하고, 약사, 제약회사 CEO, 국회의원, 사회복지 활동가로 활동했다. 대한약사회 회장을 역임하고, 구주제약을 인수하여 CEO로 활동했으며, 국민당, 민주정의당, 신한국당,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등 여러 정당을 거치며 국회의원을 지냈다. 13대, 15대,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11대, 14대,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했다. 또한, 장애인 복지 증진과 마약 퇴치 운동에도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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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섭 (1938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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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김명섭 |
출생일 | 1938년 7월 27일 |
사망일 | 2013년 6월 21일 |
사망 장소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43길 88 서울아산병원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대학 교수, 기업가, 정치가 |
학력 | |
경력 | |
병역 | |
군 복무 | 대한민국 육군 병장 제대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안정자 |
자녀 | 3남 |
의정 활동 | |
의원 선수 | 3 |
의원 대수 | 13·15·16 |
정당 | 무소속 |
지역구 | 서울 영등포구 을(13) 서울 영등포구 갑(15·16) |
2. 생애
일제강점기 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며 영등포에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중앙대학교 약학대학에 진학하여 약사의 길을 걷게 되었고, 대학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쳤다.
제대 후에는 개국약사로 활동하며 영등포구약사회장, 서울시약사회장, 대한약사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약업계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1978년에는 경영난을 겪던 구주제약을 인수하여 CEO로서 회사를 중견 제약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등 기업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1980년대 정계에 입문하여 11대 총선에 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5공 정권 하에서 집권 여당인 민정당의 견제와 탄압으로 인해 낙선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민정당의 제안을 받아들여 13대 총선에 다시 출마하여 당선되었지만, 평화민주당 측이 제기한 선거무효 소송으로 의원직을 상실하는 등 정치적으로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다.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당선되어 국회에 재입성했으나, 이후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등으로 당적을 옮기며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정치 및 약업 활동 외에도 사회복지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장애인부모회 회장,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이사장 등을 맡았으며, 중증장애인 시설인 송천 한마음의 집을 설립하여 운영하는 등 사회 공헌 활동에도 힘썼다.
2. 1. 어린 시절
한 평생을 영등포에서 살았던 그는 일제강점기 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며 가난과 불안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8살 되던 해인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이했고 거리에는 태극기가 물결쳤다.초등학교 5학년이던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친구 집에서 숙제를 하던 중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불안한 마음에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학교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학생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의 가족은 처음에는 피난을 가지 않았으나, 1950년 6월 27일 새벽 한강 다리가 폭파되는 소리를 듣고 아버지의 직장이었던 OB맥주 공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조선인민군이 빠르게 남하하자, 가족들은 다시 뱀새마을(현 광명시 철산동), 공군본부 근처, 낙골(현 서울 난곡동) 등으로 옮겨 다니며 피난 생활을 이어갔다.
1950년 9월 28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이 서울을 되찾으면서 힘겨운 피난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3개월 뒤, 북진하던 국군과 UN군이 빠르게 후퇴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미 첫째 형은 방위군 장교로, 둘째 형은 제2국민병으로 입대한 상태였다. 그와 아버지, 어머니, 셋째 형, 여동생, 남동생 두 명, 총 일곱 식구는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영등포역에서 간신히 석탄 화차 지붕에 올라타 출발했지만, 수원역에 정차했을 때 미군 병사가 총을 쏘며 사람들을 내려오게 했다. 이 과정에서 가족들은 흩어졌고, '대구에서 만나자'는 약속만 남긴 채 헤어졌다. 대구역에 도착한 그는 며칠을 헤매다 서문시장 근처에서 극적으로 아버지와 나머지 가족들을 다시 만났다. 대구 피난 시절,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구두를 닦아 집안 살림을 도왔다.
힘든 생활 속에서도 아버지는 서울로 돌아갈 기회를 엿보았고, 당시 일반인의 서울 진입은 불법이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비공식적인 경로로 서울로 향하던 흐름에 따라 가족들은 우여곡절 끝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전쟁과 피난으로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아버지는 '배움'만이 살길이라며 엄하게 교육했고, 그와 형제들은 다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2. 2. 약대 진학
대학 진학을 앞두고, 김명섭은 사회의 억울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신문기자가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생각이 달랐다. 당시 신문기자들은 정부로부터 돈을 받고 편향된 기사를 쓰는 경우가 많아 사회적으로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인식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는 그에게 약사가 될 것을 엄명하며, 약사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깨끗한 직업이며,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직업이 가장 좋은 직업"이라고 말했다. 한편, 전쟁을 겪으며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려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경험 역시 그가 약사의 길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는 1957년 2월 중앙대학교 약학대학에 입학했다.2. 3. 군대 생활
대학을 졸업한 후 1961년 5월에 입대했다. 당시 군 복무 기간은 3년이었으며, 대학 재학 중 입대하면 복무 기간을 6개월 단축해주는 제도가 있었으나, 학업을 마치고 싶었던 그는 졸업 후 입대를 선택했다. 그 시절에는 대학 졸업자가 군에 많지 않았는데, 이는 대학 교육을 받을 정도의 집안은 상당한 재력을 갖추고 있어 돈이나 권력을 이용해 병역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논산훈련소에서 기초 군사 훈련을 받고 마산군의학교에서 교육을 이수한 뒤, 수도육군병원(현재의 국군수도병원)에 배치되어 근무했다. 이후 카투사에 지원하여 화학창의 교환수로 복무하던 중, 우연히 미군 212후송병원의 인원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2개월 후, 그는 미군 212후송병원 병리실험실로 자리를 옮겨 남은 약 2년간의 군 복무를 마쳤다.
2. 4. 약업 활동
그는 제대 후 1964년 영등포약국을 개업하며 개국약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973년 영등포구약사회 회장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약사회 활동을 시작했고, 1978년에는 구주제약을 인수하여 제약회사 CEO로 취임하며 기업인으로서의 길도 걷게 되었다.1980년 제21대 서울시약사회 회장에 당선되었고, 1983년에는 제22대 회장으로 연임하며 약사회 내에서 입지를 다졌다. 1982년에는 대한약사회 회장 직무대행을 맡으며 중앙 약사회 활동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1985년, 길병전 전임 대한약사회 회장의 별세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제25대 대한약사회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1986년 제26대, 1989년 제27대 대한약사회 회장에 연이어 당선되어 총 8년간 회장직을 수행하며 약업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약업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8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대한약사회 회장 임기를 마친 후인 1992년에는 대한약사회 총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2. 5. 구주제약
김명섭이 영등포약사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시기, 알고 지내던 선배의 부탁으로 구주제약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처음에는 선배의 영업을 돕고 출자하는 형태로 동업에 참여했으나, 1년 뒤 회사는 경영난에 부딪혀 설립 4년 만에 폐업 위기에 놓였다. 1978년, 김명섭은 폐업 직전의 구주제약을 인수하며 제약회사 CEO로 나서게 되었다. 이전까지 부실하게 운영되던 회사를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운영하던 약국 3개를 정리하는 등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의 노력으로 구주제약은 성장을 거듭하여 2013년 기준으로 직원 300명, 연 매출 600억원 규모의 중견 제약회사로 자리 잡았다.2. 6. 정치 입문
서울시약사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1980년, 당시 국민당 서울시당 책임자였던 정의섭 전 보건사회부 장관으로부터 국민당 공천과 함께 정계 입문 제의를 받았다. 처음에는 정계 진출을 망설였으나, 약사 출신으로서 보건 및 복지 분야의 제도적 취약점을 개선하고자 하는 생각에 정계 입문을 결심했다.40대 초반의 나이로 정계에 도전하며, 5공 정권 시절 민정당의 창당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과 불법 행위, 공화당의 가락동 연수원 대지 강탈 등을 비판하며 주목받았다. 지역 주민, 동문, 약사들의 지지를 받으며 언론에서도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로 평가받았고, 소속 정당인 국민당 역시 당선을 확신했다.
그러나 선거가 다가오면서 5공 당국과 여당인 민정당의 탄압이 심해졌다. 그를 지지하던 지역 약사들이 불법선거 혐의로 경찰서에 강제 연행되어 자인서 작성을 강요당했으며, 경찰은 그의 아내 핸드백을 빼앗기도 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 직접 영등포를 방문하여 민정당 후보를 격려하며 여당의 영향력 강화를 시도했다.
선거 5일 전에는 영등포 남부지청 수사관들이 지역당 사무실에 들이닥쳐 그를 연행하고 선거 관련 서류를 압수했다. 수사관들은 '선물 공세를 했다는 민정당 사무국의 제보가 있었다'고만 밝혔으며, 별다른 조사 없이 8시간 동안 불법 억류한 뒤 풀어주었다. 설상가상으로 다음 날부터는 선거사무실장이 민정당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가 출근하지 않았고, 선거 조직은 와해되었다. 선거 당일에는 참관인마저 매수당해 참관인 없이 선거를 치렀고, 결국 3,000여 표 차이로 낙선했다.
집권 여당의 혹독한 정치 공세에 실망한 그는 정치에 다시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6.29 선언 이후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고 민주화 요구가 높아지면서 정치 상황이 변화했다. 과거 야당을 탄압했던 민정당의 위세는 약화되었고, 사회적으로 비판받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정당은 지난 11대 총선에서 김명섭이 보여준 지역 내 영향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공천을 제안했다.
11대 총선 당시 민정당에게 겪었던 어려움 때문에 정계 은퇴를 고려했지만, 변화된 정치 상황 속에서 여당 내에서 건전한 비판 세력 역할을 하여 정치 개혁에 기여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민정당의 공천 제안을 수락했다.
이후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민정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평민당의 이용희 부총재를 465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어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2. 7. 정치 활동
1980년, 서울시약사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중 당시 국민당 서울시 책임자였던 정의섭 전 보건사회부 장관으로부터 정계 입문 제안을 받았다.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약사 출신으로서 보건 및 복지 분야의 제도적 취약점을 개선하고자 정계 진출을 결심했다.11대 총선에서 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5공 정권의 민정당 창당 과정에서의 부정과 비리를 비판하며 주목받았다. 언론에서는 그의 당선 가능성을 높게 점쳤고, 소속 정당인 국민당 역시 당선을 확신했다. 그러나 선거가 다가오면서 민정당과 전두환 정권의 탄압이 심화되었다. 그를 지지하던 지역 약사들이 불법선거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고, 경찰은 그의 아내의 핸드백을 빼앗는 등 위압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직접 영등포를 방문해 민정당 후보를 격려하는 등 노골적인 선거 개입을 했다. 선거 5일 전에는 '선물 공세를 했다'는 민정당 측 제보를 빌미로 영등포 남부지청 수사관들에게 연행되어 선거 서류를 압수당하고 8시간 동안 별다른 조사 없이 불법 구금되었다. 또한 선거사무실장은 민정당의 협박과 회유에 매수되어 선거 운동을 중단했고, 선거 당일에는 참관인까지 매수당해 제대로 된 감시 없이 선거를 치러야 했다. 결국 그는 당선자와 3,000여 표 차이로 낙선했으며, 집권 여당의 혹독한 정치 공작을 경험하고 정치에 환멸을 느껴 정계 은퇴를 다짐했다.
6.29 선언 이후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고 민주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5공 시절 야당을 탄압하고 무리한 선거를 치렀던 민정당의 위상은 크게 실추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민정당은 지난 선거에서 김명섭이 보여준 지역 내 영향력을 인정하여 그에게 공천을 제안했다. 11대 총선에서 민정당에게 겪었던 치욕에도 불구하고, 그는 변화된 정치 환경 속에서 여당 내 건전한 비판 세력으로서 역할을 하고자 제안을 수락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민정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평화민주당 이용희 부총재를 465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어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13대 국회의원 당선 이후, 평화민주당 측이 제기한 선거무효 소송으로 인해 의원직을 상실했다. 당시 여소야대 정국에서 민정당의 의석수는 부족했고, 야당의 공세가 거셌다. 평화민주당은 그가 비누, 수건 등 대가성 물품을 제공했다고 주장했으나, 그는 결백을 주장했다. 대법원은 정국 상황을 고려하여 평화민주당 측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는 의원직을 상실했다. 대법원 판결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반발 여론 속에 치러진 재보궐 선거에서는 민정당 소속 나웅배 후보가 평화민주당 이용희 후보를 10,098표 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후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소속으로 영등포 지역구에 다시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정계에 복귀했다. 하지만 이전부터 비리, 부패 등으로 문제가 많았던 신한국당에 정치적 환멸을 느껴 1998년 신한국당의 후신인 한나라당 (1997년)을 탈당하고 새정치국민회의로 당적을 옮겼다. 이후 새정치국민회의의 후신인 새천년민주당 사무총장을 맡아 노무현 대통령 후보 비토론자로 활동했으며, 열린우리당 창당에 가담해 중앙위원 및 상임고문을 맡았다. 다만, 이러한 여러 차례의 당적 변경은 정치적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 8. 사회복지 활동
서울시약사회장 재직 시절 '심장병 어린이 돕기 행사'를 진행하며 사회복지 활동에 참여했다. 이후 장애인 복지 분야에서도 활동했는데, 1997년 한나라당 장애복지위원장, 1998년 한국장애인부모회 회장, 1999년 국민회의 장애인위원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는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이사장을 맡아 마약 퇴치 운동 및 사회 복지 향상에 기여했다. 또한, 2003년에는 중증장애인을 위한 시설인 송천 한마음의 집을 설립하여 작고 직전까지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장애인들의 삶의 질 개선에 힘썼다.3.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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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선거 종류 | 대수 | 직책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1981년 | 총선 | 11대 | 국회의원 | 서울 영등포구 | 한국국민당 | 39,123표 (21.38%) | 3위 | 낙선 | |
1988년 | 총선 | 13대 | 국회의원 | 영등포구 을 | 민주정의당 | 31,888표 (29.15%) | 1위 | 당선 | 초선 |
1992년 | 총선 | 14대 | 국회의원 | 영등포구 갑 | 민주자유당 | 32,082표 (33.98%) | 2위 | 낙선 | |
1996년 | 총선 | 15대 | 국회의원 | 영등포구 갑 | 신한국당 | 35,141표 (43.89%) | 1위 | 당선 | 재선 |
2000년 | 총선 | 16대 | 국회의원 | 영등포구 갑 | 새천년민주당 | 33,050표 (45.85%) | 1위 | 당선 | 3선 |
2004년 | 총선 | 17대 | 국회의원 | 영등포구 갑 | 열린우리당 | 35,584표 (35.32%) | 2위 | 낙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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