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동 (인권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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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복동은 1926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14~15세의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어 성 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다. 해방 후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개하고, 1993년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며 인권 운동에 헌신했다. 2012년에는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나비기금'을 발족하여 전쟁 중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했으며, 예술 활동을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였다. 2019년 사망했으며, 장례는 수요 시위 현장에서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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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동 (인권 운동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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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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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복동 |
로마자 표기 | Gim Bok-dong |
출생일 | 1926년 4월 19일 |
출생지 | 양산, 한국 |
사망일 | 2019년 1월 28일 (92세) |
사망지 | 서울, 대한민국 |
국적 | 대한민국 |
알려진 이유 | 인권 운동 |
수상 | |
수상 내역 | 제22회 국제앰네스티 언론상 특별상 |
2. 생애
김복동은 1993년 유엔인권위원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처음으로 파견되어 피해 사실을 증언한 후, 미국, 일본, 유럽 등지에서 증언을 이어갔다. 2012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길원옥과 함께 '나비기금'을 발족했다. 나비기금은 일본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금 전액을 전 세계 전쟁 중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해 기부하는 기금이다.[39][40][41][42][43]
2013년 5월, 길원옥과 함께 일본을 방문하여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와 함께 오카야마, 나라, 오사카 등에서 집회에 참석했다.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과의 회견은 당일 아침에 중지되었다. 김복동은 일본 정부에 사실 인지, 사죄, 배상을 요구했으며, 피해자 지원 기금 설립을 제창했다.[12] 2013년 9월 18일, 프랑스 파리 샤이요 궁 앞에서 일본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22]
2015년 4월, 일본 외국 특파원 협회 기자 회견을 위해 방일했다.[23] 독일 베를린 일본 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활동을 했다.[24]
2018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정의기억재단이 합병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를 출범하자, 해당 단체로 이적했다. 2019년 1월 28일 사망 후, 수요 시위가 열리던 서울 일본 대사관 앞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 박상기 법무부 장관,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 문희상 국회의장 등 여야 의원들이 조문했고,[25] 문재인 대통령도 조문하여 경의를 표했다.[26]
2019년 2월 1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산하 재일본조선인인권협회 성차별 철폐 부회가 일본 총리 관저 앞에서 추도 집회를 열었다.[27] 2019년 8월 8일,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이 공개되었다.[20][28]
2. 1. 어린 시절과 강제 동원
1926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소작농이자 좌익 운동가의 딸로 태어났다.[6]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3] 1940년대 초, 만 14-15세의 나이에 일본 당국에 속아 군복 공장으로 위장한 '위안소'로 강제 동원되었다.[3] 광둥, 홍콩,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일본 점령지를 전전하며 8년간 일본군의 성 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다.[3] 특히 일요일에는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성관계를 강요당했다고 한다.[4]김복동은 다른 두 소녀와 함께 알코올 중독으로 자살을 시도했지만, 일본 군인들에게 발견되어 위세척을 받고 열흘 후 깨어났다.[4] 그녀는 아버지가 살아있었다면 이렇게 끌려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5]
2. 2. 해방 이후의 삶
21세가 되어 전쟁이 끝난 후, 김복동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위안부'로 끌려간 사실에 괴로워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한 후였다.[4]한국 전쟁 이후, 김복동은 언니들이 살고 있던 부산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했다.[5] 김복동은 한 남성과 결혼했지만, '위안부' 피해로 인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했다. 남편이 사망한 후에야 김복동은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증언하기 시작했다.[6][2]
3. 인권 운동
김복동은 남편이 사망한 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로서 공식적인 인정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92년 김학순이 처음으로 이 문제에 대해 침묵을 깨뜨린 지 1년 후, 자신의 경험을 공개하고 수요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93년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세계 인권 회의"와 일본, 미국 등에서 증언했다.
김복동은 "증언을 함으로써, 나는 자아를 되찾고 다른 여성들과 지지하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9]라고 말하며, 일본의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수요 집회에 참석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일반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피해자들과 다음 세대를 위해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9]
3. 1.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
1992년, 김학순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 증언한 지 1년 후, 김복동은 자신의 피해 경험을 공개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7] 같은 해,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9] 1993년 유엔인권위원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처음으로 파견되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39][40][41][42][43]김복동은 "고국에 돌아왔지만, 나에게 진정한 해방은 없었다."[7]라고 말하며,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수요 집회에 꾸준히 참석했다. 또한 미국, 일본, 유럽 등 전 세계를 돌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며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고,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9]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일반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피해자들과 다음 세대를 위해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9]
3. 2. 나비기금 설립
2012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나비기금'을 발족했다. 나비기금은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함께 이뤄질 법적 배상금 전액을 전 세계 전쟁 중 성폭력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각종 폭력에 고통받는 여성들을 위해 기부하는 기금이다.[39][40][41][42][43] 김복동은 "활동가인 우리는 피해자들이 고치에서 막 나온 나비처럼 고통스러운 과거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9]나비기금은 개인 기부금으로 시작되었으며, 초기 단계에서 김복동과 길원옥은 일본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으로 고통받은 다른 여성들에게 기부하겠다고 선언했다.[8] 이후, 한국여성단체연합은 길원옥과 김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나비 기금"을 설립했다.
이 기금은 2012년 7월 콩고의 피해자 지원 단체에 매달 500USD를 지원하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이 기금의 첫 번째 수혜자는 레베카 마시카 카추바였다. 김복동은 "할머니의 이름으로 많은 여성 전쟁 피해자들에게 해방의 나비가 되어 높이 날아오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9]
나비기금의 핵심 아이디어는 창립자와 동일한 지리적 공간의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의 성폭력 피해자들을 돕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이 기금은 베트남 전쟁 중 1964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 군인에게 강간당한 베트남 여성들을 돕는 데 사용되었다. 김복동은 또한 한국 역시 자국민이 저지른 전쟁 범죄를 인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9]
3. 3. 예술 활동
김복동은 자신의 이야기를 구두로 전달하는 것 외에도, 대중과 공유하기 위해 예술 작품을 창작하기도 했다. 1992년 부산에서 외로운 삶을 살다가 나눔의 집에서 생활을 시작했으며, 요양원에서 지내는 동안 미술 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했다.[10] 그녀의 미술 작품은 미래 세대에게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나눔의 집에서 제작된 미술 작품들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세계 대중을 교육하기 위한 캠페인에 포함되었다.[11]그녀의 예술적 주제는 어린 시절의 기억, 일본군 위안부 경험, 그리고 현재의 삶과 감정을 담고 있었으며, 페인트, 목판화, 연필을 사용하여 작업했다. 그녀의 작품으로는 ''14살 소녀가 끌려가던 날'' (1998), ''청춘은 가고, 어느덧 나는 늙어버렸네'' (1998), ''일본은 침범하지 마세요 - 독도는 우리 땅'' (1998), 그리고 ''저 앙상한 나무의 잎도 언젠가는 피어나리'' (1998) 등이 있다.[6]
4. 발언
5. 사회적 영향 및 평가
김복동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제 사회에 알리고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과 진상 규명을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용기 있는 증언과 인권 운동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5. 1. 한국 사회의 추모
2019년 1월 28일 김복동 할머니가 사망하자, 수요 시위가 열리던 서울 일본 대사관 앞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25] 문재인 대통령은 빈소를 찾아 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으며,[26] 강경화 외교부 장관, 박상기 법무부 장관,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 문희상 국회의장을 비롯한 여야 다수의 국회의원들이 조문하여 김복동 할머니의 넋을 기렸다.[25]5. 2. 논란
2020년 5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 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기금 운용 및 회계 부정 의혹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었다.[30] 특히, '김복동 장학금'의 수혜 대상이 시민단체 활동가 자녀로 제한된 점에 대해 비판이 제기되었다.[30] 정의연은 시민단체 활동가 자녀에게만 장학금을 지급하는 이유로 고인의 의사를 들었지만, 구체적인 유언 내용 등은 공개하지 않았다.[30]우간다에 '김복동 센터'를 건립하려던 계획은 2019년 6월 발표되어 모금 활동이 시작되었으나, 우간다 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당초 계획은 김복동 추모 시설,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역사관, 우간다 내전 역사관, 학교, 공동 경작지 등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이후 미국 워싱턴 D.C.에 센터 건립을 추진했으나, 기부금 부족과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사업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기부금 사용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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