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남 (15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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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제남은 1562년에 태어나 1613년에 사망한 조선 시대의 문신이다.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의 아버지이며, 광해군 때 역모 혐의로 사사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활약했으며, 159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인목왕후가 왕비로 간택되면서 벼슬이 높아져 연흥부원군에 봉해졌으나,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사후 인조 반정으로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제남(金悌男, 1562년 ~ 161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이다. 본관은 연안이다.
2. 생애
아버지는 부사정을 지내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된 김오(金祦)이며, 어머니는 권성복(權成福)으로 권상(權常)의 장녀이다. 종조부는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희락당 김안로이고, 증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김전이다. 또한 김전의 아들이자 윤원형의 장인인 김안수 또한 그의 종조부였다. 조부 김안도(安道)는 현령(縣令)을 지냈으며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그는 3세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 강씨(姜氏)에게서 양육되었다.
1585년(선조 18) 식년과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4년 의금부도사, 공조좌랑을 거쳐 1596년 연천현감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맞서 싸웠으며, 평양성 탈환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 뒤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159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다시 연천현감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00년에야 연천현감직을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1601년 사간원 정언, 헌납, 사헌부 지평을 거쳐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
1597년(선조 31년)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그의 둘째 딸이 선조의 계비로 간택되면서 특별 승진하여 돈녕부도정에 제수되었다.[1] 얼마 뒤 자헌대부 지중추부사로 승진했다가 그 해 가을에 책례(冊禮)가 이루어지자 품계가 보국숭록대부에 올라 연흥부원군에 봉해지고 영돈녕부사가 되었다.[1]
광해군 즉위 후 1613년 손자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이이첨 등의 모함으로 서소문 밖 자택에서[1] 사약을 받고 죽었다. 김제남의 아들 셋도 화를 입었고, 부인과 며느리 정씨, 어린 손자 천석(天錫) 등만이 화를 면하여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618년 폐모론이 대두되어 딸 인목왕후가 폐비되자 이이첨 등의 주도로 부관참시되었으며,[1] 부인 노씨에게는 위리안치형이 내려졌다.
1623년 인조 반정 직후 관작이 복구되었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유배되었던 부인 노씨,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며느리 정씨(鄭氏)와 손자 김천석(金天錫) 등은 극적으로 생존, 한성으로 돌아왔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서산에 안장되었다가 강원도 원주군 지정면 안창리(현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산67-1 능촌마을)로 이장되었다. 인조는 특명을 내려 묘소 입구 좌측에 김제남의 사당 의민사와 그의 신도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사당은 그 후 두 차례 소실되었고, 현재의 사우는 1964년에 다시 재건하였다. 그의 신도비는 인조 때인 1624년에 세워졌으며, 글은 신흠이 지었다. 현재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산 67-3 흥법사지 근처에 있으며, 신도비는 후일 1984년 6월 2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되었다.
2. 1. 생애 초반
아버지는 부사정(副司正)을 지내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된 김오(金祦)이며, 어머니는 권성복(權成福)으로 권상(權常)의 장녀이다. 종조부는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희락당 김안로이고, 증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김전이다. 또한 김전의 아들이자 윤원형의 장인인 김안수 또한 그의 종조부였다.
조부 김안도(安道)는 현령(縣令)을 지냈으며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그는 3세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 강씨(姜氏)에게서 양육되었다.
2. 2. 관료 생활
1585년(선조 18) 식년과 사마시를 거쳐 1594년 의금부도사, 공조좌랑을 거쳐 1596년 연천현감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맞서 싸웠으며, 평양성 탈환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 뒤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159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다시 연천현감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00년에야 연천현감직을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1601년 사간원 정언, 헌납, 사헌부 지평을 거쳐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
2. 3. 왕실과의 인연
1597년(선조 31년)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그의 둘째 딸이 선조의 계비로 간택되면서 특별 승진하여 돈녕부도정에 제수되었다.[1] 얼마 뒤 자헌대부 지중추부사로 승진했다가 그 해 가을에 책례(冊禮)가 이루어지자 품계가 보국숭록대부에 올라 연흥부원군에 봉해지고 영돈녕부사가 되었다.[1]
2. 4. 계축옥사와 죽음
광해군 즉위 후 1613년 손자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이이첨 등의 모함으로 서소문 밖 자택에서[1] 사약을 받고 죽었다. 김제남의 아들 셋도 화를 입었고, 부인과 며느리 정씨, 어린 손자 천석(天錫) 등만이 화를 면하여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618년 폐모론이 대두되어 딸 인목왕후가 폐비되자 이이첨 등의 주도로 부관참시되었으며,[1] 부인 노씨에게는 위리안치형이 내려졌다.
2. 5. 사후 복권과 평가
1623년 인조 반정 직후 관작이 복구되었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유배되었던 부인 노씨,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며느리 정씨(鄭氏)와 손자 김천석(金天錫) 등은 극적으로 생존, 한성으로 돌아왔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서산에 안장되었다가 강원도 원주군 지정면 안창리(현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산67-1 능촌마을)로 이장되었다. 인조는 특명을 내려 묘소 입구 좌측에 김제남의 사당 의민사와 그의 신도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사당은 그 후 두 차례 소실되었고, 현재의 사우는 1964년에 다시 재건하였다. 그의 신도비는 인조 때인 1624년에 세워졌으며, 글은 신흠이 지었다. 현재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산 67-3 흥법사지 근처에 있으며, 신도비는 후일 1984년 6월 2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되었다.
3. 가계
구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장남 | 김내(金琜) | 1576년 | 1613년 | 김수항의 외조부 |
며느리 | 초계 정씨(草溪 鄭氏) | 1575년 | 1640년 | 정묵의 딸 |
자녀 | ||||
손자 | 김천석(金天錫) | 1604년 | 1673년 | |
손자 | 김군석(金君錫) | |||
손녀 | 김광찬의 처, 최극량의 처, 이후연의 처 |
구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장녀 | 연안 김씨(延安 金氏) | 1581년 | 1604년 | |
사위 | 심정세(沈挺世) | 1579년 | 1613년 | 서인의 초대 영수 심의겸의 손자, 구사맹의 외손자, 인조의 이종 사촌형 |
자녀 | ||||
외손자 | 심진(沈榗) | 1602년 | 1690년 | |
외손녀 | 백홍일의 처 |
- '''3남''': 김선(金瑄, 1599 ~ 1614)
4. 김제남에 대한 상반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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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한국사대사전
고려출판사
2004
[2]
문서
세종-정의공주 계보
[3]
문서
임영대군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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