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질 (14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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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질(1422년)은 조선 개국 공신 김사형의 증손으로,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다.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사육신의 난을 고변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예종과 성종 초기에 원상으로 국정 운영에 참여했다. 그는 세조의 국방 정책 수립에 참여하여 군역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으나, 사육신의 난 고변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말년에는 《고려사절요》 증보,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했으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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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질 (1422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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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김질 |
한자 이름 | 金礩 |
자 | 가안(可安) |
호 | 쌍곡(雙谷) |
시호 | 문정(文靖) |
관직 정보 | |
직책 | 조선의 상급 국상 |
임기 시작 | 1477년 1월 25일 |
임기 종료 | 1478년 1월 7일 |
임금 | 조선 성종 |
정당 | 무소속(골수 비당파 세력) |
전임 | 조석문 |
후임 | 김국광 |
생애 정보 | |
출생일 | 1422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478년 2월 24일 (향년 57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거주지 | 조선 한성부 |
국적 | 조선 |
가족 정보 | |
아버지 | 김종숙 |
배우자 | 정씨 부인 |
자녀 | 김의동, 김예동, 김성동, 김지동 |
친인척 | 정창손 (장인), 영모당 김질(종증손) |
관력 정보 | |
우의정 임기 시작 | 1474년 9월 27일 |
우의정 임기 종료 | 1475년 8월 2일 |
우의정 전임 | 성봉조 |
우의정 후임 | 윤사흔 |
좌의정 임기 시작 | 1468년 8월 4일 |
좌의정 임기 종료 | 1469년 1월 3일 |
좌의정 전임 | 강순 |
좌의정 후임 | 윤사분 |
좌의정 임기 시작2 | 1468년 12월 20일 |
좌의정 임기 종료2 | 1469년 3월 23일 |
좌의정 전임2 | 박원형 |
좌의정 후임2 | 홍윤성 |
2. 생애
김질은 1422년 조선 개국 공신 김사형(金士衡)의 증손이며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증 의정부영의정 김종숙의 아들로 태어났다. 음서제로 관직에 입문하여 충의위(忠義衛) 부사직 등을 지냈다. 1447년(세종 29년) 식년과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고, 1450년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당시 전례가 없어 성균관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의정부의 특별 건의로 입학이 허락되었다.[4] 그의 성균관 수학은 이후 참상관의 성균관 수학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5] 후에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의 딸과 혼인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사직(司直) 재직 중, 추장문과에 응시하여 정과로 급제, 성균관주부가 되었다. 이후 집현전 학사가 되었으며, 사간원우정언, 병조좌랑을 지내며 집현전 학사를 겸임하였다. 김질은 글씨를 잘 썼고 고전에 능하였으며 지식이 해박하였다. 성삼문(成三問), 박팽년, 최항(崔恒), 신숙주(申叔舟), 김문기(金文起)등 몇몇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52년(문종 2)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 등을 거쳐 1459년(세조 5년) 대신들과 군정의 점고를 의논하였다.[20] 그는 여진족의 약탈에 대한 강경 대응과 북방 성곽 축조, 정병 파견을 통한 침략 대비를 주장하였다. 또한 삼남의 남해안, 동해안에도 병력을 배치하고 성곽을 개보수하여 왜구 침입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1453년(계유정난) 이조낭관을 거쳐 1454년 수양대군의 추천[9]으로 승진하였다. 1455년(세조 찬위)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다. 1456년 성삼문 등의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였으나, 마음을 바꾸어 세조에게 알렸다.[13] 이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으로 승급되었으며[15] 상락군(上洛君)에 봉작되었다.
1459년 세자시강원 우부빈객이 되었다.[1] 1461년 판중추원사 겸 병조판서로 승진하여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1463년 좌찬성, 1466년 우의정에 임명되었다.[1] 1467년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영의정이 되었다.[1]
예종 즉위 후 남이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공을 세워 좌의정이 되었다.[1] 성종 때 《고려사절요》의 증보 편집,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하였다.[1]
1477년(성종 8년) 병으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성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478년(성종 9년) 2월 24일 사망하였다.[24]
2. 1. 생애 초기
1422년 조선 개국 공신 김사형(金士衡)의 증손이며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증 의정부영의정 김종숙의 아들로 태어났다.음서제로 관직에 입문하여 충의위(忠義衛) 부사직 등을 지냈다. 1447년(세종 29년) 식년과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1450년 부사직으로 재직 중 휴가를 얻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당시 전례가 없어 성균관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의정부의 특별 건의로 입학이 허락되었다.[4] 그의 성균관 수학은 이후 참상관의 성균관 수학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5]
후에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의 딸과 혼인하였다.
2. 1. 1. 출생과 소년기
1422년 조선 개국 공신 김사형(金士衡)의 증손이며 동지중추부사 증 의정부영의정 김종숙의 아들로 태어났다.음서제로 관직에 입문하여 충의위(忠義衛) 부사직 등을 지냈다. 1447년(세종 29년) 식년과의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1450년 부사직으로 재직 중 휴가를 얻어 성균관에 입학,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가 성균관에 수학하려 하자 전례가 없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의정부의 특별 건의로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4] 그의 성균관 수학으로부터 참상관의 성균관 수학제도가 비롯되었다는 의견도 있다.[5]
뒤에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의 딸 정씨와 결혼하였다.
2. 1. 2. 청년 시절
쌍곡 김질은 1422년 조선 개국 공신 김사형(金士衡)의 증손이며 동지중추부사 증 의정부영의정 김종숙의 아들로 태어났다.음서제로 관직에 입문하여 충의위(忠義衛) 부사직 등을 지냈다. 그 뒤 부사직으로 재직 중 1447년(세종 29년) 식년과의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1450년 부사직으로 재직 중 휴가를 얻어 성균관에 입학,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가 성균관에 수학하려 하자 전례가 없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의정부의 특별 건의로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4] 그의 성균관 수학으로부터 참상관의 성균관 수학제도가 비롯되었다는 의견도 있다.[5]
뒤에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의 딸 정씨와 결혼하였다. 음보로 출사하여 충의위(忠義衛)가 되었으며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충의위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을 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청원했다가, 특별히 허락받았다. 그는 과거 급제자가 아닌데도 참상관의 자격으로 사가독서를 청하여 세종대왕이 이를 허락했다. 그가 과거 급제자가 아닌데도 사가독서를 한 일은 후일 성균관에서 참상관의 수학제도의 전례가 되었다. 그 뒤 사직(司直)으로 승진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사직(司直) 재직 중, 추장문과에 응시하여 정과로 급제, 바로 성균관주부가 되었다. 그 뒤 집현전 학사가 되었으며, 사간원우정언, 병조좌랑을 지내며 집현전 학사를 겸임하였다. 김질· 김문기는 글씨를 잘 썼고 고전에 능하였으며 지식이 해박하였다. 그 무렵 성삼문(成三問), 박팽년, 최항(崔恒), 신숙주(申叔舟), 김문기(金文起)등 몇몇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문종의 각별한 사랑과 총애를 받았다.
2. 2.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
1452년(문종 2) 2월 정기인사 때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 등을 지냈다. 그 무렵 그는 성삼문, 최항, 신숙주, 김문기 등과 함께 문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같은 해 2월 헌납(獻納) 조원희(趙元禧)가 관직 제수의 형평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우정언 임명을 문제삼기도 했으나[6] 왕이 무마시켰다. 그러나 조원희의 계속된 탄핵으로 체직되었다.[7]1452년 다시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그해 8월 왕명으로 진무(鎭撫) 남육(南陸)과 함께 대행대왕(문종)의 현궁을 공사하는 역부들을 구료하게 했다.[8]
1459년(세조 5년) 7월 대신들과 군정의 점고를 의논하였다.[20] 그는 여진족의 약탈에 대한 강경 대응과 북방 성곽 축조, 정병 파견을 통한 침략 대비를 주장하였다. 또한 삼남의 남해안, 동해안에도 병력을 배치하고 성곽을 개보수하여 왜구 침입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1459년 8월 병조참판 상락군(上洛君)이 되어 세조의 국방정책 수립에 참여하였고, 그 뒤 다시 상락군에 봉해졌다. 그해 12월 이조판서 구치관, 예조판서 홍윤성과 함께 무경(武經)과 병서(兵書), 진법 등을 강론하였다. 1460년 한명회의 처가 병이 들자 그와 임무를 교체하라는 명을 받았다.[21]
그해 2월 평안도와 황해도의 도순찰사를 겸직하여 파견되었다.[22] 이어 함경도의 도순찰사를 겸하고 서북면 도체찰사가 되어, 서북면 도체찰사 겸 평안, 황해, 함경도 순찰사가 되어 부임하였다. 그해 세조의 서쪽 지방 순행 시 도체찰사 겸 평안, 황해도 도순찰사로 수행하였다.
그는 세조의 병력 증강책 추진에 앞장섰으며,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적 순찰사(軍籍巡察使)가 되어 병역을 면제받거나 회피하는 양반과 평민들을 단속하여 군역을 부과했다. 양반이나 평민 면제자에게 군역을 부과하려는 세조의 뜻을 잘 받들고 군액(軍額)과 병력 충원에 힘써서, 한산(閑散)한 문무과(文武科) 출신과 생원(生員)·진사(進士)들도 모두 군역에 편입하였으며, 비록 심한 폐질이 있는 자라도 혹 면제되지 못하는 수가 있었다. 그의 종사관(從事官) 양진손(梁震孫)은 더욱 각박하였으므로, 사관은 그의 졸기에 이 때문에 "원망이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14]"고 하기도 하였다.
1460년 10월에는 대장으로서 각지의 병마를 점고하여 관리가 허술한 방백들을 탄핵하기도 하였다. 1460년(세조 6년) 세조가 두 차례에 걸쳐 서도(西道) 지역을 순행할 때, 김질은 왕의 서도 순시를 위해 특별히 황해도도순찰사와 평안도도순찰사가 되었고, 그해 7월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다. 1461년 1월 다시 평안도도순찰사 겸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2월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다. 그해 5월에 평안도 도관찰사로 나갔다.
1463년(세조 9년) 3월 공조판서로 승진하고 이후 병조판서·형조판서를 거쳐 11월 도진무(都鎭撫)가 되었다가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다. 1464년 2월 우상 대장(右廂大將), 3월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다. 1464년 8월 도진무(都鎭撫), 9월 형조판서, 1465년 4월 다시 병조판서, 1466년 의정부 우참찬 등을 지내고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467년 행 좌참찬(行左參贊)이 되었다가 그해 7월 겸 의금부 판사(兼義禁府判事)를 겸임하였다. 그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468년(세조 14년) 다시 상락군에 봉해진 뒤 예종이 즉위하자 의정부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세조의 능침을 정하는 산릉 도감 제조(右議政山陵都監提調)를 겸임하였다. 그 뒤 겸 경연 영사(兼經筵領事)를 겸하다가 곧 좌의정으로 승진했다. 이어 상락군에서 상락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이때 세종대왕의 능침을 이장할 때 천릉 도감 제조(左議政遷陵都監提調)의 한사람으로 선발되었고, 1469년 1월 평안도 도체찰사(左議政平安道都體察使)로 다시 부임하였다. 그해 2월 다시 좌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다.
영의정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院相)으로서 서정을 주관하였다. 이들 원상세력과 함께 나이 어린 예종과 성종 초기에 국정 서무를 주관하여 권력 공백기의 혼란을 차단하였으나, 예종 말년 자을산군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왕족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제거하고 자을산군의 즉위를 지지하였다.
2. 2. 1.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
1453년(계유정난) 이조낭관을 거쳐 1454년 8월 수양대군의 추천[9]으로 6품에서 4품으로 특별 승진하였다.[10] 뒤에 단종이 김질을 6품에서 4품으로 특별 승진시킨 것을 수양대군에게 문제삼자 수양대군은 이를 극력 변호하였다.[9]金礩중국어(김질), 金命中중국어(김명중), 鄭守忠중국어(정수충) 등이 비록 6품으로서 정 4품의 직사(職事)를 제수받았으나, 신이 모두 교지를 받아 제수한 것이니, 헌부(憲府)에서 비록 서관(庶官) 을 규찰(糾察)하고, 신이 또한 교지를 받들어 백료(百寮)를 규찰한다 하여도, 어찌 그 사이에 사사로운 뜻이 있겠습니까?[9]
이후 그는 수양대군의 심복이 되어 활약하였다. 1455년(세조 찬위)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다. 사정전(思政殿)의 정사를 마친 뒤 술좌석에 참석하였다. 이때 집의(執義) 이예(李芮)가 술이 취하여 어탑(御榻)으로 올라가 당나라 태종의 고사(故事)를 끌어서 금성대군 이유(李瑜) 등의 죄를 강력히 청하자 이를 불쾌하게 여긴 세조는 김질과 한계미(韓繼美), 박수미(朴壽彌), 김석제(金石梯)에게 술을 남용했다는 이유로 파면하였다.[11] 그해 12월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12]
2. 2. 2. 사육신의 난 고변
단종 폐위 이후 1456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 등과 함께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하였으나 김질만 마음을 바꾸어, 이를 세조에게 알렸다.[13]1456년 성삼문 등의 단종복위운동에 김질이 가담하자, 장인 정창손은 이를 설득하였다. 김질은 거사가 성공하지 못할 줄로 알고 장인인 정창손에게 달려가 수시로 상의하였다. 그해 6월 운검 설치가 취소되면서 일이 여의치 않자 불안감을 느꼈던 김질은 전향, 이 사실을 정창손에게 알렸다.
김질은 장인 정창손에게 일부 집현전 학자들의 단종 복위 계획을 알리고, 정창손은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 단종의 외삼촌인 권자신, 성승 등이 가담했음을 확인하였다. 정창손은 이를 바로 세조에게 알렸다.
그해 6월 2일 김질은 의정부우찬성인 장인 정창손과 함께 궐로 찾아가 사육신의 거사를 폭로하였다.[13] 정창손은 김질과 같이 대궐로 달려가 고변하며 '신은 실로 모르고 김질만 혼자 참여하였는데, 김질의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하니, 세조가 특별히 김질을 사면하였다.
그러나 그가 중간에 사육신의 고변을 밀고한 점을 들어 여러 신하가, 김질이 함께 모반하였는데 성패를 관망하다가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어서야 고한 것이라 하여 주살하기를 청하였으나, 세조는 듣지 않고 그를 신뢰하였다.[14]
2. 2. 3. 사육신의 난 진압 직후
사육신의 거사를 고변한 공으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 승진했고 세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원종공신에서 정공신인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으로 승급되었으며[15] 특별히 말 한필을 선물로 받았고[16] 상락군(上洛君)에 봉작되었다.9월 사육신가문의 부녀자를 하사할 때, 민보흥(閔甫興)의 아내 석비(石非), 이윤원(李潤源)의 아내 대비(大非)를 하사받았다.[17]
1456년 10월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11월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 이인손(李仁孫)·병조 판서(兵曹判書) 홍달손(洪達孫)·좌승지(文承旨) 조석문(曹錫文)·좌부승지(左副承旨) 한계미(韓繼美)·우부승지(右副承旨) 권지(權摯)·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이극배(李克培)를 명소(命召)하여 속로 첩목아(速魯帖木兒)와 마흥귀(馬興貴) 등이 서로 싸워서 소란을 일으킨 일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12월 다시 승정원동부승지가 되고, 12월 14일 공신 대표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1457년 1월 세자가 환구에 나가 의식을 익히는데 대동하였고, 1월말 임금이 성균관의 유생들을 시험할 때 대독관(對讀官)의 한사람으로 임명되어 시험을 주관하였다.
2. 2. 4. 양반에게 군역 부과
1459년(세조 5년) 7월 대신들과 함께 군정의 점고를 의논하였다.[20] 그는 변방을 약탈하는 여진족에 대한 강경 대응을 건의하는 한편 북방에 성곽을 쌓고 정병을 파견하여 미구에 있을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또한 삼남의 남해안, 동해안에도 병력을 배치하고 성곽을 개보수하여 왜구의 침입과 노략질에 방비할 것을 건의하였다.2. 2. 5. 국방, 군사 활동
1459년 8월 병조참판 상락군(上洛君)이 되어 세조의 국방정책 수립에 참여하였고, 그 뒤 다시 상락군에 봉해졌다. 그해 12월 이조판서 구치관, 예조판서 홍윤성과 함께 무경(武經)과 병서(兵書), 진법 등을 강론하였다.1460년 한명회의 처가 병이 들자 그와 임무를 교체하라는 명을 받았다.[21]
그해 2월 평안도와 황해도의 도순찰사를 겸직하여 파견되었다.[22] 이어 함경도의 도순찰사를 겸하고 서북면 도체찰사가 되어, 서북면 도체찰사 겸 평안, 황해, 함경도 순찰사가 되어 부임하였다. 그해 세조의 서쪽 지방 순행 시 도체찰사 겸 평안, 황해도 도순찰사로 세조의 서북 지방 순찰을 수행하였다.
그는 세조의 병력 증강책 추진에 앞장섰으며,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적 순찰사(軍籍巡察使)가 되어 병역을 면제받거나 회피하는 양반과 평민들을 단속하여 군역을 부과했다. 양반이나 평민 면제자에게 군역을 부과하려는 세조의 뜻을 잘 받들고 군액(軍額)과 병력 충원에 힘써서, 한산(閑散)한 문무과(文武科) 출신과 생원(生員)·진사(進士)들도 모두 군역에 편입하였으며, 비록 심한 폐질이 있는 자라도 혹 면제되지 못하는 수가 있었는데, 그의 종사관(從事官) 양진손(梁震孫)은 더욱 각박하였으므로, 사관은 그의 졸기에 이 때문에 "원망이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14]"고 하기도 하였다.
1460년 10월에는 대장으로서 각지의 병마를 점고하여 관리가 허술한 방백들을 탄핵하기도 하였다.
2. 2. 6. 관료 생활
1460년(세조 6년) 세조가 두 차례에 걸쳐 서도(西道) 지역을 순행할 때, 김질은 왕의 서도 순시를 위해 특별히 황해도도순찰사와 평안도도순찰사가 되었고, 그해 7월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다. 1461년 1월 다시 평안도도순찰사 겸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2월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다. 그해 5월에 평안도 도관찰사로 나갔다.1463년(세조 9년) 3월 공조판서로 승진하고 이후 병조판서·형조판서를 거쳐 11월 도진무(都鎭撫)가 되었다가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다. 1464년 2월 우상 대장(右廂大將), 3월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다.
1464년 8월 도진무(都鎭撫), 9월 형조판서, 1465년 4월 다시 병조판서, 1466년 의정부 우참찬 등을 지내고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467년 행 좌참찬(行左參贊)이 되었다가 그해 7월 겸 의금부 판사(兼義禁府判事)를 겸임하였다. 그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468년(세조 14년) 다시 상락군에 봉해진 뒤 예종이 즉위하자 의정부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세조의 능침을 정하는 산릉 도감 제조(右議政山陵都監提調)를 겸임하였다.
그 뒤 겸 경연 영사(兼經筵領事)를 겸하다가 곧 좌의정으로 승진했다. 이어 상락군에서 상락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이때 세종대왕의 능침을 이장할 때 천릉 도감 제조(左議政遷陵都監提調)의 한사람으로 선발되었고, 1469년 1월 평안도 도체찰사(左議政平安道都體察使)로 다시 부임하였다. 그해 2월 다시 좌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다.
1468년 세조가 붕어하였을 때 한명회(韓明澮)·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원상이 됐고, 1469년 예종이 죽었을 때도 한명회·신숙주와 함께 원상직을 수행하였다.[23]
영의정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院相)으로서 서정을 주관하였다. 이들 원상세력과 함께 나이 어린 예종과 성종 초기에 국정 서무를 주관하여 권력 공백기의 혼란을 차단하였으나, 예종 말년 자을산군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왕족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제거하고 자을산군의 즉위를 지지하였다.
2. 3. 생애 후반
김질은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1459년 세자시강원 우부빈객이 되었다.[1] 1461년 판중추원사 겸 병조판서로 승진하여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1463년 좌찬성, 1466년 우의정에 임명되었다.[1] 1467년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영의정이 되었다.[1]예종 즉위 후 남이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공을 세워 좌의정이 되었다.[1]
2. 3. 1. 서적 편찬 활동
성종 때 《고려사절요》의 증보 편집, 《경국대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1]2. 3. 2. 최후
1477년(성종 8년) 병으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성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478년(성종 9년) 2월 24일 병으로 사망하였으며,[24] 향년 56세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3. 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할아버지 | 김승(金陞) | |
아버지 | 김종숙(金宗淑) | 동지중추부사 역임, 좌의정에 추증 |
어머니 | 이씨 | 이양직(李良直)의 딸 |
형제 | 김작(金碏) | |
형제 | 김적(金磧) | |
형제 | 김무(金碔) | |
부인 | 정씨(鄭氏) | 정창손의 딸, 1458년 음력 9월 5일 사망[25] |
아들 | 김의동(金義童) | |
아들 | 김예동(金禮童) | |
아들 | 김지동(金智童) | 부사 역임 |
아들 | 김성동(金誠童) | 대사헌 역임 |
아들 | 김이동(金利童) | 목사 역임 |
손자 | 김언(金漹) | |
손자 | 김려(金濾) | |
외할아버지 | 이양직(李良直) |
4. 평가와 비판
정창손의 강압을 받아 그의 사실을 고변하여 훼절하기도 하였으나 세조의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
김질은 풍의(風儀)가 아름답고 언론(言論)을 잘하였으며,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를 우애(友愛)로 대하였다.[14]고 평가받았다.
실록의 사신은 김질이 양반, 생원, 진사시 합격자들에게도 모두 군역을 부과하여 원망이 심했다고 평하였다. “김질의 사람됨은 기국(器局)이 관후하고,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비를 좋아해서 재상의 풍도가 있었으나, 나라를 경륜하는 것은 능한 바가 아니었다. 일찍이 하이도(下二道)의 군적 순찰사(軍籍巡察使)가 되었는데, 세조의 뜻이 사려(師旅)를 확장하는 데 있는 것을 알고 오직 받들어 순종하여 군액(軍額)을 늘리기에만 힘써서, 한산(閑散)한 문무과(文武科) 출신과 생원(生員)·진사(進士)를 다 군열(軍列)에 편입하여 비록 심한 폐질이 있는 자라도 혹 면제되지 못하는 수가 있었으며, 종사관(從事官) 양진손(梁震孫)은 더욱 각박하였으므로, 원망이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14]”
다른 집현전의 학사들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 거사에 참여하였으나 신숙주와 함께 세조의 편에 가담함으로써, 세조 말기 이후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
5. 관련 작품
1994년 KBS2 드라마 한명회에서 배우 김정훈이, 1998년부터 2000년까지 KBS1에서 방영된 드라마 왕과비에서 배우 김경하가, 2011년부터 2012년까지 JT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인수대비에서 배우 정현석이 김질 역을 연기하였다.
5. 1. 드라마
6. 기타
무예에 재주가 있어 여러 번 활쏘기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상과 칭찬을 받았고, 무경과 병법, 진법 등을 유창하게 강론하였다.
동명이인인 효자 영모당 김질은 그의 종증손이었다.
참조
[1]
실록
윤사로와 정창손에게 품계를 더하고, 박중손·성봉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http://sillok.histor[...]
1456-06-25
[2]
실록
좌익 공신을 정하다
http://sillok.histor[...]
1455-09-05
[3]
실록
윤사흔·조석문·김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http://sillok.histor[...]
1459-08-25
[4]
실록
참상직도 성균관에 거처하도록 허락하다
1450-05-18
[5]
웹인용
김질
http://people.aks.ac[...]
2011-12-03
[6]
실록
헌납 조원희가 이숭지·윤서 등에게 임의로 관직을 제수한 이조를 국문토록 청하다
1452-02-07
[7]
실록
헌납 조원희가 윤잠과 김질을 탄핵하기를 청하다
1452-02-12
[8]
실록
영역관으로 하여금 순시하여 역부를 구료(救療)하도록 하게 할 것을 명하다
1452-08-17
[9]
실록
세조가 김질 등에게 4품의 직사를 제수한 사유를 아뢰다
1454-08-11
[10]
실록
조혜·강맹경·이인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1454-08-05
[11]
실록
술자리에서 집의 이예가 취하여 어탑에 올라가 이유 등의 죄를 청하다
1455-11-20
[12]
실록
의정부에 전지하여 연창위 안맹담 등을 원종 공신에 녹훈하다
1455-12-27
[13]
실록
성균 사예 김질과 우찬성 정창손이 성삼문의 불궤를 고하다
1456-06-02
[14]
실록
상락 부원군 김질의 졸기
1478-02-24
[15]
실록
좌익 3등 공신 정창손을 2등으로 올리고, 김질을 3등으로 기록하게 하다
1456-07-03
[16]
실록
좌익 공신 김질에게 말 한필을 하사하다
1456-07-10
[17]
실록
의금부에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다
1456-09-07
[18]
실록
후원에서 활쏘는 것을 구경하고 김질 등에게 돌솥 1벌씩을 하사하다
1458-01-20
[19]
실록
연탁을 종2품 이상의 문관과 무관에게 내리다
1459-04-12
[20]
실록
강맹경 등과 군정의 점고를 의논하고, 이계전·김연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1459-07-02
[21]
실록
서북면 도체찰사 한명회에게 처의 병을 알리고 상경할 것을 유시하다
1460-02-10
[22]
실록
평안 황해도 도순찰사 김질이 하직하니 물건을 내려 주다
1460-02-10
[23]
백과사전
김질 - Daum 백과사전
http://enc.daum.net/[...]
[24]
실록
상락 부원군 김질의 졸기
http://sillok.histor[...]
1478-02-24
[25]
실록
우부승지 김질의 처가 죽으니 부의를 내리다
1458-09-05
[26]
문서
김억령의 손자이며 인조의 후궁 조귀인 소생 효명옹주의 시조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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