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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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만중은 조선 숙종 시대의 문신이자 문장가로, 한글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작가이다. 그는 서인 노론 계열의 중신으로, 당쟁에 휘말려 두 차례 유배를 겪었으며, 특히 숙종의 총애를 받던 장희빈을 비판하다가 파직되기도 했다. 김만중은 한글 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국문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의 작품은 당시 사회 현실을 풍자하고 불교적 사상을 담고 있다. 그의 대표작인 《구운몽》은 어머니를 위해 쓴 작품으로, 인생의 무상함을 주제로 다루고 있으며, 《사씨남정기》는 숙종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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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만중 - 사씨남정기
사씨남정기는 김만중이 지은 고전 소설로, 사씨가 첩의 모함으로 쫓겨나는 과정을 통해 권선징악을 보여주며, 숙종 시대의 정치 상황을 풍자하고 가부장제를 비판한다. - 김만중 - 남해유배문학관
남해유배문학관은 경상남도 남해군의 유배 문학을 연구,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2010년 개관한 문학관으로, 향토역사실, 유배문학실, 유배체험실, 남해유배문학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김만중의 《서포만필》 필사본과 송시열의 문집 《송자대전》 등의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 1692년 사망 - 헨드릭 하멜
헨드릭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선원으로, 제주도 표류 후 13년간 조선에 억류된 경험을 바탕으로 하멜 표류기를 통해 조선의 모습과 풍습을 유럽에 상세히 소개하여 네덜란드와 대한민국 간의 교류에 기여했다. - 1692년 사망 - 왕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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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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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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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만중 |
한자 이름 | 金萬重 |
로마자 표기 | Gim Manjung |
호 | 서포 |
자 | 중숙 |
출생일 | 1637년 3월 6일 |
사망일 | 1692년 6월 14일 |
사망지 | 조선 경상도 남해 적소 |
국적 | 조선 |
시호 | 문효 |
직업 | 소설가, 정치가 |
학력 | 1665년 정시문과에 급제 |
분야 | 성리학 |
소속 정당 | 노론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김익겸 |
어머니 | 해평 윤씨 부인 |
배우자 | 연안 이씨 |
형제 | 김만기(형) |
자녀 | 아들 김진화 딸 김수혜 |
친인척 | 김익훈(숙부) 인경왕후(조카) |
큰할아버지 | 김장생 |
관직 정보 | |
직책 | 조선의 홍문관 대제학 |
임기 | 1685년~1686년 |
임금 | 조선 숙종 |
기타 정보 |
2. 주요 이력
그는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의 동생이며, 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에 가담했던 김익훈의 배다른 조카이기도 하다.[6] 숙종이 장희빈을 총애할 때 숙종의 면전에다 조사석의 베갯머리 송사냐고 물었다가 바로 파직되기도 했다. 기사환국 이후 남인의 정치보복으로 유배된 후 배소에서 사망한다.
1680년(숙종 6년) 보사원종공신 1등(保社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서인 노론계열 중신으로, 한글 소설인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는 그의 대표작이다. 김장생의 증손이고, 신독재 김집은 그의 종조부였다. 또한 김춘택의 종조부가 된다.[7]
그의 증조부는 문원공 김장생으로 저명한 성리학자이자 서인예학의 태두였다. 그는 조광조에서 시작되어 백인걸을 거쳐 이이, 성혼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후에 김집, 안방준 등을 거쳐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윤선거, 윤문거 등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신독재 김집은 그의 종조부로 할아버지 김반의 형이었다.
아버지 김익겸은 일찍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했기에, 김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 윤씨로부터 형 김만기와 함께 자상하고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윤씨는 한문 실력을 갖추고 있어 직접 아들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김만중은 형 김만기와 함께 오직 어머니 윤씨만을 의지하고 살았고, 부인 윤씨는 두 형제가 아비 없이 자라는 것에 대해 걱정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해 모든 정성을 기울였다.[8]
일찍이 아버지가 순절하여 무심한 동리 아이들로부터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 놀림당하였으나, 어머니 윤씨는 지극정성을 쏟아 형제를 가르쳤다. 그는 후일 소설을 좋아하는 늙은 어머니를 위해 저서인 사씨남정기, 구운몽 등을 언문(한글)으로 지었다.
양반 계급 출신인 김만중은 국가 시험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라 숙종(肅宗) 시대에 학사(學士)와 대신을 지냈다. 그는 당시의 정치적 당파싸움에 연루되어 두 차례나 유배되었다.[1]
문장가로서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사씨남정기(蛇氏南征記)』와 『구운몽(九雲夢)』이다. 전자는 중국을 배경으로 한 가족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당시의 정치 현실을 풍자적으로 그려냈으며 특히 숙종을 비판하고 있다. 후자는 한국 전통 소설 중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이다. 김만중이 두 번째 유배 중에 『구운몽』을 지었다고 전해진다.[2] 인생사를 다룬 이상적인 소설로 영웅의 고난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세상의 영광과 쾌락의 무상함을 강조하는 불교적 색채가 짙다.
명문 가문인 광산 김씨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김익겸은 그가 태어나기 전 병자호란에 분노하여 자결하였으므로, 대대로 재상 가문인 외가 윤씨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29세에 과거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을 순찰하고, 왕의 비서 역할인 승지를 역임하며, 공조 판서, 대사헌, 대제학(정이품)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47세에 숙종이 궁녀 장씨를 총애하는 것을 경연의 자리에서 간했기 때문에 숙종의 노여움을 사 평안도선천으로 유배되었고, 또한 서인 계열이었던 그는 당쟁에 휘말려 경상도남해도에서 죽었다.
조선 국어 문학 발전의 선구자로, 그곳에서 지었다고 전해지는 한글 소설 『구운몽』, 『사씨남정기』는 한문을 중시하던 당시 풍조 속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 외에도 『윤씨행장기』, 시문집 『서포집』, 수필집 『서포만필』 등이 있다. 대표작인 『구운몽』은 어머니를 위해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공명과 부귀도 한때의 춘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불교적 깨달음을 양소유라는 귀족의 일생을 통해 그린다. 『사씨남정기』는 숙종이 왕비를 폐위시킨 사건을 귀족 가문의 처첩 간 갈등에 비유하여 표현한 작품이다.
2. 1. 가계와 유년 시절
김만중은 명문 가문인 광산 김씨 출신으로, 아버지 김익겸은 그가 태어나기 전 병자호란에 분노하여 자결하였다.[9][10] 이로 인해 김만중은 대대로 재상 가문인 외가 윤씨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어머니 해평 윤씨(1617–1689)는 궁색한 살림에도 자식 교육에 필요한 서책 구입에 힘썼으며, 이웃의 홍문관 서리를 통해 책을 빌려 손수 등사해 교본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소학≫·≪사략≫·≪당시≫ 등을 직접 가르쳤다.[9][10]1649년 12세에 이미 과문(科文)을 쓸 만큼 글재주가 향상되었고, 1650년 14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1652년 사마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러한 가통과 어머니 윤씨의 희생적 가르침은 훗날 김만중의 생애와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9][10]
2. 2. 관료 생활과 유배
1665년(현종 6) 정시문과에 장원,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에 임명되고,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옮겼다. 이후 사간원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를 지냈다. 그 뒤 시강원 사서(侍講院 司書)에 임명되었다. 1667년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으로 옮겼다가 문학(文學 : 세자 시강원의 정5품 벼슬)으로 전직되었고, 바로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11]1671년(현종 12)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삼남의 진정(賑政)을 조사하였다. 1672년 겸문학·헌납(獻納)을 역임하고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1674년 인선왕후가 작고하여 자의대비(장렬왕후)의 복상문제, 즉 권력의 정통성 논란(제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당하였다.[11]
이판(吏判) 김수항이 제2차 예송 논쟁으로 임금의 뜻을 거슬리자 임금은 교서(敎書)를 내리어 박절한 책망을 했었다. 이때 남인들은 김수항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하였고, 김만중은 관료(館僚)와 더불어 차자(箚子)를 올리어 간하니, 임금은 엄중한 비답을 내리자 또 관료로 더불어 상소 사직했다.[11]
그 후 다시 등용되어 1679년(숙종 5) 예조참의, 1680년 사간원대사간이 되었다. 1680년(숙종 6년) 보사원종공신 1등(保社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1683년(숙종 9) 공조판서, 이어 대사헌이 되었으나 조지겸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1685년 홍문관 대제학, 예조판서, 병조판서, 1686년 좌참찬, 지경연사로 있으면서 김수항이 아들 김창협(金昌協)의 비위(非違)까지 도맡아 처벌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에 유배되었다.[11]
1687년 판의금부사가 되었다가, 예문관 제학, 장악원 제조를 겸임했다. 이 해 여름에 조사석이 우의정에 임명되자, 당초에 사석의 매복(枚卜)을 명할 때 대신 김수항, 이단하 등의 건의로 임명되었다. 이때 헌납 민진주는 상소로 그의 도착된 거조와 해괴한 소문을 의논하니, 임금은 엄한 책망을 가했다. 이때 조사석의 추문[11] 등을 지적한 언관들을 보호하였다.[11]
조사석과 장희빈의 어머니 윤씨의 내연관계에 대한 사실을 발설한 언관들에 대한 탄압이 가해지자, 그는 경연장에 직접 나서서 숙종의 면전에서 "조사석이 정승이 된 것은 희빈 장씨 때문은 아니냐"며 항의하였다. 그러나 숙종의 진노를 얻어 도리어 파직, 바로 유배당했다가 1688년 방환되었다. 1689년 박진규(朴鎭圭)·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도에 유배되어 병사하였다.[11]
김만중은 당시의 정치적 당파싸움에 연루되어 두 차례나 유배되었다.[1] 명문 가문인 광산 김씨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김익겸은 그가 태어나기 전 병자호란에 분노하여 자결하였으므로, 대대로 재상 가문인 외가 윤씨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29세에 과거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을 순찰하고, 왕의 비서 역할인 승지를 역임하며, 공조 판서, 대사헌, 대제학(정이품)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47세에 숙종이 궁녀 장씨를 총애하는 것을 경연의 자리에서 간했기 때문에 숙종의 노여움을 사 평안도선천으로 유배되었고, 또한 서인 계열이었던 그는 당쟁에 휘말려 경상도남해도에서 죽었다.[11]
2. 3. 사후
비석을 세울 때, 형 김만기의 아들인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가 직접 행장을 지었다. 또한 김진규는 그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서 후세에 전하였다.[12]1698년(숙종 24) 관직이 복구되고 1706년(숙종 32) 효행에 대해 정표(旌表)가 내려졌다.[12]
1968년부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서포집과 구운몽 등의 한글 번역화되어 국역본이 간행되었다.[12]
2001년 1월 10일 그의 조카 죽전 김진규가 그린 그의 초상화가 대전광역시 문화재위원회에서 심의 의결되어 대전광역시 지정 문화재로 등록되었다.[12]
3. 작품과 사상
《구운몽》은 자신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조선 숙종 때 소설 문학 및 서민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편,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였다. 김만중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사씨남정기》에 대해 당시 인현왕후를 옹호하기 위해서 쓴 정치소설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역사 속의 《사씨남정기》는 명나라 때 있었다는 이야기를 소설로 만든 역사소설이라고 한다.
김만중은 주자주의가 지배하는 조선 왕조에서 집권 세력의 일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당연히 주자주의로 일관했을 법하다. 하지만 훌륭한 가문이라서 언론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때문인지, 주자주의에 대한 회의를 내비치기도 하고 불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하기도 함으로써 진보적인 성향을 보였다. 당시의 보편 문어였던 한문으로 써야만 글로 여겼던 당대 분위기에서 김만중의 이 같은 자각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양반 계급 출신인 김만중은 국가 시험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라 숙종 시대에 학사(學士)와 대신을 지냈다. 그는 당시의 정치적 당파싸움에 연루되어 두 차례나 유배되었다.[1]
문장가로서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이다. 전자는 중국을 배경으로 한 가족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당시의 정치 현실을 풍자적으로 그려냈으며 특히 숙종을 비판하고 있다. 후자는 한국 전통 소설 중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이다. 김만중이 두 번째 유배 중에 『구운몽』을 지었다고 전해진다.[2] 인생사를 다룬 이상적인 소설로 영웅의 고난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세상의 영광과 쾌락의 무상함을 강조하는 불교적 색채가 짙다.
광산 김씨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김익겸은 그가 태어나기 전 병자호란에 분노하여 자결하였으므로, 대대로 재상 가문인 외가 윤씨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29세에 과거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을 순찰하고, 왕의 비서 역할인 승지를 역임하며, 공조 판서, 대사헌, 대제학(정이품)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47세에 숙종이 궁녀 장씨를 총애하는 것을 경연의 자리에서 간했기 때문에 숙종의 노여움을 사 평안도선천으로 유배되었고, 또한 서인 계열이었던 그는 당쟁에 휘말려 경상도남해도에서 죽었다.
조선 국어 문학 발전의 선구자로, 그곳에서 지었다고 전해지는 한글 소설 『구운몽』, 『사씨남정기』는 한문을 중시하던 당시 풍조 속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 외에도 『윤씨행장기』, 시문집 『서포집』, 수필집 『서포만필』 등이 있다. 대표작인 『구운몽』은 어머니를 위해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공명과 부귀도 한때의 춘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불교적 깨달음을 양소유라는 귀족의 일생을 통해 그린다. 『사씨남정기』는 숙종이 왕비를 폐위시킨 사건을 귀족 가문의 처첩 간 갈등에 비유하여 표현한 작품이다.
3. 1. 《구운몽》
김만중은 문장가로서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이 가장 유명하다.[2] 전자는 중국을 배경으로 한 가족 이야기로, 당시 정치 현실, 특히 숙종을 비판하고 있다.[1][2] 『구운몽』은 한국 전통 소설 중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김만중이 두 번째 유배 중에 지었다고 전해진다.[2]『구운몽』은 인생사를 다룬 이상적인 소설로 영웅의 고난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세상의 영광과 쾌락의 무상함을 강조하는 불교적 색채가 짙다.[2] 어머니를 위해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공명과 부귀도 한때의 춘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불교적 깨달음을 양소유라는 귀족의 일생을 통해 그린다.
3. 2. 《사씨남정기》
김만중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사씨남정기(蛇氏南征記)』와 『구운몽(九雲夢)』이다.[2] 『사씨남정기』는 중국을 배경으로 한 가족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당시의 정치 현실을 풍자적으로 그려냈으며 특히 숙종을 비판하고 있다.[1][2] 숙종이 왕비를 폐위시킨 사건을 귀족 가문의 처첩 간 갈등에 비유하여 표현한 작품이다.3. 3. 기타 저서
광산 김씨 명문 가문 출신인 김만중은 아버지 김익겸이 병자호란에 분노하여 자결하였기 때문에, 대대로 재상 가문인 외가 윤씨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29세에 과거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을 순찰하고, 왕의 비서 역할인 승지를 역임하며, 공조 판서, 대사헌, 대제학(정이품)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47세에 숙종이 궁녀 장씨를 총애하는 것을 경연의 자리에서 간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평안도선천으로 유배되었고, 서인 계열이었던 그는 당쟁에 휘말려 경상도남해도에서 죽었다.조선 국어 문학 발전의 선구자인 김만중은 한글 소설 구운몽, 사씨남정기를 집필하여 한문을 중시하던 당시 풍조 속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 외에도 『윤씨행장기』, 시문집 『서포집』, 수필집 『서포만필』 등을 남겼다. 대표작인 『구운몽』은 어머니를 위해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공명과 부귀도 한때의 춘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불교적 깨달음을 양소유라는 귀족의 일생을 통해 그린다. 『사씨남정기』는 숙종이 왕비를 폐위시킨 사건을 귀족 가문의 처첩 간 갈등에 비유하여 표현한 작품이다.
4. 가족 관계
- 조부 : 김반(1580 ~ 1640)
- 조모 : 김진려(金進礪)의 딸 구 안동 김씨
- 부친 : 김익겸(1614 ~ 1636)
- 외조부 : 윤지(尹墀, 1600 ~ 1644)[13]
- 외조모 : 홍명원의 딸 홍선원(洪善媛, 1601 ~ ?)
- 모친 : 해평 윤씨(1617 ~ 1689)
- 형 : 김만기(1633 ~ 1687)
- 부인 : 이은상(李殷相)의 딸 연안 이씨(1639 ~ 1705)
- * 아들 : 김진화(金鎭華, 1655 ~ ?)
- * 며느리 : 이합(李柙)의 딸 덕수 이씨
- ** 손자 : 김용택(金龍澤, ? ~ 1722)
- ** 손자 : 김광택(金光澤)
- ** 손녀 : 이익지(李翊之)의 처
- * 딸 : 김수혜(金秀惠, 1657 ~ ?)
- * 사위 : 전주 이씨 이이명(1658 ~ 1722)
- ** 외손녀 : 경주 김씨 김정운(金鼎運)의 처
- ** 외손녀 : 안동 김씨 김시발(金時發)의 처
- ** 외손녀 : 나주 임씨 임상익(林象翼)의 처
- ** 외손녀 : 김신겸(金信謙)의 처
- ** 외손녀 : 김원조(金遠祚)의 처
- ** 외손자 : 이기지(李器之, 1690 ~ 1722)
5. 평가 및 영향
1968년부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서포집과 구운몽 등의 한글 번역화되어 국역본이 간행되었다.[12] 2001년 1월 10일 그의 조카 죽전 김진규가 그린 초상화가 대전광역시 문화재위원회에서 심의 의결되어 대전광역시 지정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6. 관련 작품
7. 김만중문학상
김만중문학상에 대해서는 김만중문학상 문서를 참고하라.
참조
[1]
서적
A Bibliographic Guide to Traditional Korean Sources
Asiatic Research Center
1976
[2]
서적
A Bibliographic Guide to Traditional Korean Sources
Asiatic Research Center
1976
[3]
날짜
음력 2월 10일
[4]
날짜
음력 4월 30일
[5]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
[6]
설명
[7]
설명
[8]
웹사이트
지만지 사씨 남정기 책소개
http://zmanz.blogi.k[...]
[9]
웹사이트
지만지 사씨 남정기 책소개
http://zmanz.blogi.k[...]
[10]
서적
서포집
[11]
설명
[12]
뉴스
서포 김만중 영정 문화재 자료로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1-10-08
[13]
설명
[14]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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