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오카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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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가오카쿄는 784년 일본 간무 천황이 헤이조쿄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건설한 수도이다. 가쓰라강, 우지강, 요도가와가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수운을 통한 물자 수송에 유리했으며, 후지와라노 다네쓰구 가문의 지지 기반이자 도래인 세력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수도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후지와라노 다네쓰구 암살 사건과 사와라 친왕의 원령에 의한 재앙으로 인해 794년 헤이안쿄로 천도하게 되었다. 이후 나가오카쿄는 잊혀졌으나, 1954년부터 시작된 고고학 발굴을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났으며, 현재는 나가오카쿄시라는 행정 구역명으로 그 이름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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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오카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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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 | |
기본 정보 | |
이름 | 나가오카쿄 (長岡京) |
로마자 표기 | Nagaoka-kyō |
위치 | 무코, 교토부, 일본 |
지역 | 기나이 지역 |
역사 | |
시대 | 나라 시대 - 헤이안 시대 |
건축 정보 | |
일반 공개 | 예 (시설 없음) |
기타 지정 | 일본 국가 사적 |
추가 정보 | |
공식 웹사이트 | |
참고 | 일본 국가 사적 |
2. 역사적 배경
간무 천황은 헤이조쿄(平城京)의 지리적, 정치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헤이조쿄 북쪽 40km 지점에 새 수도를 건설하도록 지시했다. 나가오카쿄는 가쓰라강(桂川)과 우지강(宇治川)이 합류하여 요도가와(淀川)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하여, 수운을 통한 물자 수송에 유리했다.[2] 야마자키쓰(Yamazakitsu)라는 항구에서 전국 각지의 물품을 하역하여 소형 선박으로 옮겨 싣는 방식으로 효율적인 물자 수송이 가능했다.[2]
고고학 발굴 결과 나가오카쿄의 거의 모든 집에 우물이 있었고, 하수 처리를 위한 조치도 취해졌다. 이는 모두 헤이조쿄에서 문제가 되었던 점이다.[2] 도로변의 흐르는 물을 집으로 끌어들여 배설물을 씻어냈고, 나가오카쿄 북서쪽의 천연 샘물은 완만한 경사면을 통해 도시를 청결하게 유지했다.[2] 황궁은 도시보다 15미터 높은 곳에 위치하여 황제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었다.[2]
오사카 나니와구의 주요 항구 나니와쓰(Naniwa-tsu)는 세토 내해의 매립으로 점차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나가오카쿄는 간자키 강을 통해 비와호와 오미 국으로 향하는 새로운 노선 개발을 용이하게 했다.[2]
새로운 수도는 헤이조쿄의 정치적 약점을 바로잡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간무 천황은 후지와라노 다네쓰구와 긴밀히 협의했다. 나가오카는 다네쓰구 가족의 고향이자 후지와라 씨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다.[2] 헤이조쿄의 정치화된 대규모 불교 시설 승려들과 거리를 두고, 야마시로 국의 경제적으로 강력한 도래인 이민자 씨족과의 관계 개선 또한 새로운 수도 건설의 이유였다.[2]
785년 정월 초하루, 나가오카쿄 황궁에서 신년 행사가 거행되었다. 이는 수도 건설 시작 6개월 만에 황궁이 완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헤이조쿄의 건물은 그대로 남겨두고, 나니와쿄의 황궁을 대신 이전했다.[2]
같은 해 9월, 후지와라노 다네쓰구가 암살당했고, 도다이지와 관련된 여러 관리들이 연루되었다. 간무 천황의 동생 사와라 친왕도 투옥되어 유배되었고, 유배 가는 길에 원한을 품은 채 죽었다. 이후 792년 가뭄으로 인한 기근과 전염병, 황후와 간무 천황 친척들의 연이은 죽음, 이세 신궁 본전 방화, 태자의 병 등 여러 사건이 발생했다. 온묘지는 이러한 재난이 사와라 친왕의 온령(원한 맺힌 영혼)에 의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친왕의 영혼을 달래려 했으나, 폭우로 인한 홍수가 나가오카쿄에 큰 피해를 입혔다. 와케노 키요마로는 수도 이전을 제안했고, 793년 북동쪽에 새로운 지역이 선정되었으며, 794년 수도가 헤이안쿄로 이전되었다.[2]
수도 이전 후, 옛 나가오카쿄 지역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영지가 되었고, 901년 그의 유배 이후 나가오카 덴만구 신사가 건설되었다. "나가오카"라는 지명은 남아 있었지만, 황궁의 실제 위치는 여러 세기 동안 잊혀졌다. 1954년에야 황궁 위치가 재발견되었고, 이후 광범위한 고고학 발굴이 진행되었다.[2]
2. 1. 헤이조쿄의 문제점
관무 천황은 헤이조쿄의 지리적, 정치적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나가오카쿄로 수도를 이전했다.지리적 한계: 헤이조쿄는 육로를 통해서만 물자 수송이 가능하여 물류 효율성이 떨어졌다. 전국에서 물자를 하역하는 항구인 "야마자키쓰(山崎津)"를 설치하여, 여기서 작은 배로 옮겨 싣고, 거기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직접 도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가오카쿄에는 이러한 강이 3개 흐르고 있어 배로 효율적으로 물자를 운반할 수 있었고, 육로를 이용해야만 했던 헤이조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2]
정치적 문제: 헤이조쿄에서는 불교 세력의 과도한 정치 개입과 귀족 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관무 천황은 이러한 문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를 펼치고자 나가오카쿄로 수도를 옮겼다.[2]
2. 2. 나가오카쿄 천도의 배경
간무 천황은 헤이조쿄(平城京)의 지리적, 정치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자 했다. 나가오카쿄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선택된 새로운 수도였다.나가오카쿄는 가쓰라 강(桂川)과 우지 강(宇治川)이 합류하여 요도가와(淀川)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하여, 수운을 통한 물자 수송에 유리했다.[2] 전국 각지에서 온 물품을 야마자키쓰(Yamazakitsu)라는 항구에서 하역하여 소형 선박으로 옮겨 싣는 방식으로 효율적인 물자 수송이 가능했다.[2] 반면, 헤이조쿄는 육로로만 접근할 수 있어 물자 수송에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간자키 강(Kanzaki River)을 통해 비와호(Lake Biwa)와 오미 국(Omi Province)으로 향하는 새로운 노선 개발이 용이해졌다는 점도 나가오카쿄가 선택된 이유 중 하나였다.[2]
정치적인 배경으로는, 헤이조쿄의 정치화된 대규모 불교 시설 승려들과 거리를 두고, 후지와라 씨(Fujiwara clan)의 강력한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2] 『속일본기(Shoku Nihongi)』에 따르면, 간무 천황은 새로운 수도의 위치에 대해 후지와라노 다네쓰구(Fujiwara no Tanetsugu)와 긴밀히 협의했으며, 나가오카는 다네쓰구 가족의 고향이었다.[2]
더불어, 간무 천황의 어머니가 야마시로 국(Yamashiro Province) 출신의 도래인(toraijin) 이민자 씨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들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경제적으로 강력한 도래인 세력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2]
종합하면, 나가오카쿄 천도는 수운의 편리함, 새로운 정치 세력 구축, 도래인 세력과의 관계 강화 등 복합적인 요인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3. 나가오카쿄의 건설
간무 천황의 명으로 헤이조쿄(평성경)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진 나가오카 지역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였다.[4][5] 나가오카쿄는 가쓰라 강, 우지가와 강 등 3개의 큰 강이 요도가와 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야마자키쓰"라는 항구를 통해 전국 각지에서 물자를 효율적으로 수송할 수 있었다. 이는 육로 수송에 의존했던 헤이조쿄의 문제점을 해결한 것이었다. 또한, 건설지 남동쪽에 있던 거목지도 물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거의 모든 집에서 우물이 발견되어 주민들이 풍부한 물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헤이조쿄에서 문제가 되었던 하수 처리 문제도 도로변의 흐르는 물을 집 안으로 끌어들여 배설물을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개선되었다. 나가오카쿄 북서쪽에서 솟아나는 풍부한 물이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자연스럽게 남동쪽으로 흘러 오물이 강으로 배출되어 도성은 청결을 유지했다.
간무 천황은 자신의 궁궐을 도시보다 15m 정도 높은 곳에 지어 천황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강조했다.
3. 1. 입지 선정
간무 천황은 측근인 후지와라노 종계와 긴밀히 협의하여 나가오카 지역을 새로운 수도로 선정하였다.[4][5] 「일본후속기」에 따르면, 간무 천황이 물자 수송에 편리한 큰 강이 있는 곳을 찾자 종계가 자신의 친가이자 지지 기반이 있던 나가오카를 추천했다고 한다.나가오카 선정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었다.
- 후지와라 가문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다.
- 기존 불교 세력 및 귀족 세력과의 거리 두기
- 신경의 주변 지역 장악, 귀화인 세력과의 관계
- 아버지 광인천황 때부터 천지계로 황통이 돌아온 것에 따른 인심 쇄신
- 난파항의 토사 퇴적으로 외항으로 삼아왔던 야마토국이 동서 간 교통의 접점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대신 요도가와-산성국-비와호·오미국 경로가 형성됨 (나가오카 천도와 난바궁 폐지가 동시에 결정됨)[6]
3. 2. 건설 과정
785년(연력 4년) 정월, 나가오카쿄 황궁에서 신년 행사가 거행되었는데, 이는 수도 건설 시작 6개월 만에 황궁이 완공되었음을 의미한다.[4] 헤이조쿄의 건물을 그대로 두고, 나니와쿄(難波京)의 황궁을 이전하여 건설 기간을 단축하였다.[5]4. 나가오카쿄의 구조
간무 천황은 평성경의 지리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평성경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진 장옥 지역에 나가오카쿄를 건설하도록 칙명을 내렸다.[4][5] 나가오카쿄 근처에는 가쓰라가와 강, 우지가와 강 등 3개의 큰 강이 요도가와 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이 있었고, 전국에서 물자를 하역하는 "야마자키쓰(山崎津)" 항구를 설치하여 물자 운송의 효율성을 높였다. 이는 육로 운송에 의존해야 했던 평성경의 문제점을 해결한 것이었다. 또한, 건설지 남동쪽에는 거목지(巨椋池)가 있어 물류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발굴 조사 결과, 거의 모든 집에서 우물이 발견되어 주민들이 풍부한 물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평성경에서 문제가 되었던 하수 처리 문제도 도로변의 물을 집 안으로 끌어들여 배설물을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나가오카쿄 북서쪽에서 솟아나는 물은 완만한 경사를 따라 자연스럽게 남동쪽으로 흘러 오물을 강으로 배출하고 도시를 청결하게 유지했다.
간무 천황은 자신의 궁궐을 도시보다 15m 정도 높은 곳에 지어 천황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나가오카쿄가 천황의 도성임을 강조했다.
4. 1. 도시 계획
나가오카쿄는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 형태였으며, 중앙에는 주작대로가 뻗어 있었다. 도시 북쪽에는 황궁인 대내리가 위치하였고, 그 안에는 정전인 대극전과 조정(朝廷)의 주요 관청들이 배치되었다.간무 천황의 칙명에 따라 평성경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진 장옥 지역[4]에 천도하여 건설되었으며,[5] 평성경의 지리적 약점을 극복하려는 도시였다. 장옥경 근처에는 가쓰라가와 강과 우지가와 강 등 3개의 큰 강이 요도가와 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이 있었다. 전국에서 물자를 하역하는 항구인 "야마자키쓰(山崎津)"를 설치하여, 여기서 작은 배로 옮겨 싣고, 거기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직접 도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장옥경에는 이러한 강이 3개 흐르고 있어 배로 효율적으로 물자를 운반할 수 있었고, 육로를 이용해야만 했던 평성경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건설지의 남동쪽에는 당시 거목지(巨椋池)가 존재하여 이곳도 물류 거점으로 기대되었다.
발굴 조사에서 거의 모든 집에서 우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거기에 사는 사람들도 풍부한 물의 혜택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평성경에서 문제가 되었던 하수에도 대책이 세워졌다. 도로변의 흐르는 물을 집 안으로 끌어들여 배설물을 흘려 보냈다. 장옥경의 북서쪽에서 솟아나는 풍부한 물은 완만한 경사면에 만들어진 도성 안을 자연스럽게 남동쪽으로 흘러, 이로 인해 오물은 강으로 흘러가고 도성은 청결함을 유지했다.
간무 천황은 자신의 궁궐을 도시보다 15m 정도 높은 곳에 지어, 천황의 권위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보여주고 장옥경이 천황의 도성임을 강조했다.
4. 2. 수리 시설
발굴 조사에서 거의 모든 집에 우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풍부한 물의 혜택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평성경에서 문제가 되었던 하수에도 대책이 세워졌다. 도로변의 흐르는 물을 집 안으로 끌어들여 배설물을 씻어내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나가오카쿄의 북서쪽에서 솟아나는 풍부한 물은 완만한 경사면에 만들어진 도성 안을 자연스럽게 남동쪽으로 흘러, 이로 인해 오물은 강으로 흘러가고 도성은 청결함을 유지했다.[4]5. 후지와라노 다네쓰구 암살 사건
785년(연력 4년) 9월, 나가오카쿄 건설을 주도하던 후지와라노 다네쓰구가 암살당했다. 배후에는 헤이조쿄의 불교 세력인 도다이지와 관련된 관리도 여러 명 있었다. 간무 천황의 동생 사와라 친왕도 이 반란에 가담했다고 여겨져 유폐·배류되었고, 친왕은 배류지로 향하는 도중 원한을 품은 채 죽었다.[7]
6. 사와라 친왕의 원령과 천도
785년(연력 4년) 정월, 나가오카쿄의 궁궐에서 신년 의식을 거행했다. 이는 도성 건설 시작 반 년 만에 궁궐이 완공되었음을 의미한다. 궁궐 건설은 반대 세력과 백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헤이조쿄의 궁궐을 옮기는 대신 난바궁의 궁궐을 이축하는 방식을 택했다. 간무 천황은 천도와 함께 조정 개혁을 단행하여 후지와라 종계와 그 일족을 중용하고 반대 세력을 멀리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종계 암살 사건이 발생했다. 간무 천황의 황태제였던 사와라 친왕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아 유폐되었고, 결국 원한을 품은 채 죽었다. 이후 여러 변고가 발생하자 792년(연력 11년) 음양사에게 점을 치게 했더니 사와라 친왕의 원령 때문이라는 결과가 나왔다.[7][8]
이에 치수 담당자였던 와케노 기요마로의 건의로 793년(연력 12년) 재천도를 위한 공식 조사가 이루어졌다. 결국 나가오카쿄 천도 10년 만인 794년(연력 13년) 헤이안쿄로 다시 천도하게 된다. 다만, 이미 791년(연력 10년) 시점에서 나가오카쿄 폐지와 새로운 도성 계획이 진행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9]
헤이안쿄 천도 후, 옛 나가오카쿄 지역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영지가 되었다. 901년(쇼타이 4년) 미치자네가 실각한 쇼타이(昌泰)의 변 이후, 아리와라노 요리히라가 증정한 목상을 신체로 한 나가오카 덴만구[10][11]에 “나가오카(長岡)”라는 이름이 남게 되었다.[12]
6. 1. 사와라 친왕의 죽음
785년(연력 4년) 9월, 조나가오카궁사(造長岡宮使) 다네쓰구가 암살되었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헤이조쿄의 불교 세력인 동대사와 관련된 관리들이 있었으며, 간무 천황의 황태제였던 사와라 친왕도 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아 유폐되었다. 결국 사와라 친왕은 유배지로 향하던 중 원한을 품고 죽었다.[7]6. 2. 원령의 저주
785년(연력 4년) 사와라 친왕이 원한을 품은 채 죽은 뒤, 가뭄으로 인한 기근과 역병이 크게 유행하고, 황후를 비롯한 간무 천황 친족들이 연이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한 이세 신궁 정전 방화, 황태자의 발병 등 여러 변고가 일어났다.[7][8] 792년(연력 11년) 6월 10일, 음양사에게 그 원인을 점치게 하자 사와라 친왕의 원령 때문이라는 결과가 나왔고, 친왕의 영혼을 달래는 의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그 직후와 2개월 후 두 차례의 큰 비로 도성을 흐르는 강이 범람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7][8]6. 3. 헤이안쿄 천도
785년(연력 4년) 후지와라 종계 암살 사건이 발생하고, 사와라 친왕이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유폐되었다가 원한을 품고 사망했다.[7] 친왕 사후 가뭄, 기근, 역병, 황후 등 간무 천황 친족들의 연이은 죽음, 이세 신궁 정전 방화, 황태자의 발병 등 여러 변고가 일어났다.[7] 792년(연력 11년) 음양사에게 점을 치게 한 결과, 사와라 친왕의 원령 때문이라는 결과가 나오자 영혼을 달래는 의식을 거행했다.[7] 그러나 그 직후와 2개월 후 두 차례 큰 비로 강이 범람하여 도성에 큰 피해를 입었다.[7][8] 이에 와케노 기요마로의 건의로 793년(연력 12년) 재천도를 위한 조사가 실시되었고, 794년(연력 13년) 헤이안쿄로 천도하게 된다.[7]7. 발굴 조사
1954년 서경고등학교 교사였던 나카야마 슈이치와 그의 제자 소데오카 마사키요를 중심으로 발굴이 시작되었다.[13][14] 1955년 대내리 조당원의 문터가 발견되었고, 1962년 대극전 터가 발견되는 등 발굴 조사가 진행되어, 1964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5]
발굴 결과, 난바궁(難波宮)이나 다른 옛 궁궐, 헤이조쿄(平城京)의 건물을 이축하여 상당히 완성된 모습이었으며, 헤이조쿄, 헤이안쿄(平安京)와 견줄 만한 경역을 가진 도읍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7. 1. 발굴 경과
1954년부터 서경고등학교 교사였던 나카야마 슈이치와 그의 제자였던 소데오카 마사키요를 중심으로 발굴이 시작되었다.[13][14] 1955년 대내리 조당원의 문터가 발견되었고, 1962년 대극전 터가 발견되는 등 발굴 조사가 진행되어, 1964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5] 1967년에는 내리 내곽 축지 회랑 북서부가 확인되었고, 1979년에는 내리 남쪽의 중요 관아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구로서 대규모 축지벽이 발견되었다.발굴 결과, 난바궁(難波宮)이나 다른 옛 궁궐, 헤이조쿄(平城京)의 건물을 이축하여 상당히 완성된 모습이었으며, 헤이조쿄, 헤이안쿄(平安京)와 견줄 만한 경역을 가진 도읍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03년에는 일본전산(현 니덱)의 본사 건설에 앞서 사전 조사가 실시되었다. 출토된 묵서토기의 글씨를 통해 간무 천황(桓武天皇)이 헤이안쿄로 옮기기 1년 남짓 동안 머물렀던 장옥경 동원(東院)임이 밝혀졌다. 일본전산은 학회 등의 보존 요청에 따라 지하에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 당초 설계를 대폭 변경하여 시공하였으며, 사옥에서는 발굴된 출토품 일부를 전시하고 있다.[16]
7. 2. 발굴 성과
나가오카쿄는 오랫동안 '환상의 도읍'으로 알려졌으나, 1954년부터 서경고등학교 교사였던 나카야마 슈이치(교토문교단기대학 명예교수)와 그의 제자 소데오카 마사키요를 중심으로 발굴이 시작되었다.[13][14] 1955년 대내리 조당원의 문터가 발견되었고, 1962년에는 대극전 터가 발견되는 등 발굴 조사가 꾸준히 진행되어 1964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5] 1967년에는 내리 내곽 축지 회랑 북서부가 확인되었고, 1979년에는 내리 남쪽의 중요 관아 유구인 대규모 축지벽이 발견되었다.발굴 결과, 기존의 정설과는 달리 나가오카쿄는 난바궁(難波宮)이나 다른 옛 궁궐, 헤이조쿄(平城京)의 건물을 옮겨와 상당 부분 완성된 도시였음이 밝혀졌다. 또한, 헤이조쿄, 헤이안쿄(平安京)와 견줄 만한 규모의 도시였음이 확인되었다.
2003년에는 일본전산(현 니덱) 본사 건설에 앞서 사전 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출토된 묵서토기를 통해 간무 천황이 헤이안쿄로 옮기기 전 1년 남짓 머물렀던 나가오카쿄 동원(東院)임이 밝혀졌다. 일본전산은 유적 보존을 위해 설계를 변경하여 지하에 유적을 보존하고, 사옥에 출토품 일부를 전시하고 있다.[16]
8. 나가오카쿄와 한국
나가오카쿄는 1954년부터 서경고등학교 교사였던 나카야마 슈이치와 그의 제자 소데오카 마사키요를 중심으로 발굴이 시작되었다.[13][14] 1955년 대내리 조당원의 문터가 발견되고, 1962년 대극전터가 발견되는 등 발굴 조사가 진행되어 1964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5] 1967년에는 내리 내곽 축지 회랑 북서부가 확인되었고, 1979년에는 내리 남쪽의 중요 관아 유구인 대규모 축지벽이 발견되었다.
발굴 결과, 나가오카쿄는 난바궁이나 다른 옛 궁궐, 헤이조쿄의 건물을 옮겨와 상당히 완성된 모습이었으며, 헤이안쿄와 견줄 만한 규모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03년에는 니덱(일본전산) 본사 건설에 앞서 실시된 사전 조사에서 출토된 묵서토기를 통해, 간무 천황이 헤이안쿄로 옮기기 전 1년 남짓 머물렀던 나가오카쿄 동원(東院)임이 밝혀졌다. 일본전산은 유적 보존을 위해 설계를 변경하여 시공하였고, 사옥에 출토품 일부를 전시하고 있다.[16]
참조
[1]
웹사이트
長岡京跡
https://kunishitei.b[...]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
서적
(国指定史跡事典) National Historic Site Encyclopedia
学生社
2012
[3]
뉴스
長岡京跡から貴族の邸宅 寝殿造りに似た配置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9-03-01
[4]
문서
現在の西京区と向日市の境界を南北に延びる西ノ岡丘陵(向日丘陵、長岡丘陵とも)は自然の土壇で、「長岡」の地名もこれに由来する。
[5]
문서
宮域は丘陵上に、右京は段丘上に、左京は桂川氾濫上に立地する。
[6]
논문
長岡平城遷都の史的背景
吉川弘文館
2013
[7]
문서
この水害に関し、京都工芸繊維大学出身の松尾秀明は、長岡京の裾野の高さが巨椋池の水面と近いため、巨椋池までなだらかな下り傾斜が続く平安京と比較すると水害の可能性が高く、都市規模拡大の可能性も平安京の方が大きかったと論じている。
[8]
웹사이트
京都の自然と歴史 (2)京都の南には巨大な巨椋池があった
http://www.matugasak[...]
京都工芸繊維大学色染物質会
2022-10-06
[9]
서적
平安京造営過程に関する総合的考察
塙書房
2011
[10]
웹사이트
長岡天満宮
https://www.city.nag[...]
長岡京市
2022-10-06
[11]
웹사이트
御祭神・御由緒
https://nagaokatenma[...]
長岡天満宮
2022-10-06
[12]
문서
ただし、木像を作ったのは道真自身で、その従者が道真自身から託された像を祀った祠が長岡天満宮の元だという異説がある。
[13]
문서
複廊によって囲われ、背後には後殿が独立している。
[14]
서적
長岡宮跡
同朋舎出版
1991
[15]
문서
当該地域で急速な宅地化、工業地化が進み、緊急調査を強いられ続けた側面もある
[16]
보고서
社会・環境報告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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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dec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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