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카와 마사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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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일본의 경제학자이자 일본은행 총재를 역임했다. 1949년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나 도쿄 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시카고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2년 일본은행에 입행하여 여러 직책을 거쳐 2002년 이사가 되었으며, 2006년 교토 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2008년 일본은행 부총재를 거쳐 총재에 취임했지만, 리먼 브라더스 파산, 동일본 대지진 등 어려운 시기를 겪으며 금융 완화를 추진했다. 그는 제로 금리 정책과 양적 완화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2013년 사임 후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교수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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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카와 마사아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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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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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일본어: 白川 方明 로마자 표기: Shirakawa Masaaki |
출생일 | 1949년 9월 27일 |
출생지 |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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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 |
직함 | 일본은행 총재 |
대수 | 30대 |
임기 시작 | 2008년 4월 9일 |
임기 종료 | 2013년 3월 19일 |
총리 |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노다 요시히코 아베 신조 |
이전 | 후쿠이 도시히코 |
후임 | 구로다 하루히코 |
일본은행 부총재 | 임기 시작: 2008년 3월 20일 임기 종료: 2008년 4월 9일 |
이전 부총재 | 무토 도시로 이와타 가즈마사 |
후임 부총재 | 니시무라 기요히코 |
부총재 | 야마구치 히로히데 니시무라 기요히코 |
학력 | |
학력 | 도쿄 대학 경제학부 졸업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 수료 |
2. 생애
1972년 일본은행에 입행하여[2] 1990년 신용기구국 신용기구과장, 1993년 기획국 기획과장, 1994년 오이타지점장, 1995년 뉴욕 주재 참사, 1996년 금융연구소 참사, 1997년 심의를 거쳐 2002년 일은 이사에 취임했다.[2] 4년 임기 후 퇴사, 2006년 7월 교토 대학 대학원 공공정책교육부 교수로 2008년 3월까지 재직하며 도쿄 대학 금융교육연구센터 객원연구원을 겸임했다.[2]
후쿠이 도시히코 총재 임기 만료를 앞두고 정부는 후임 총재를 선임하려 했으나, 총재는 중의원과 참의원 동의가 모두 필요했다. 중의원은 자유민주당, 참의원은 민주당이 과반을 점해 인사 동의안 통과가 불투명했다. 정부 지명 무토 도시로, 다나미 고지 인사 동의안이 참의원에서 부결되고 후쿠이 총재 임기가 끝나면서 일본은행은 신헌법 발효 후 처음으로 총재 공석 사태를 맞았다.[2]
정부는 시라카와를 후임 총재로 지명, 참의원 동의 전까지 임시 부총재로 임명해 총재 직무대행을 맡겼다. 민주당의 국정 발목 잡기 비판 속에 민주당은 시라카와 인사 동의안을 통과시켰고, 4월 9일 정식 총재에 취임했다.[2]
취임 후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등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동일본 대진재, 유럽 국가 부채 위기가 연이어 발생했다. 시라카와 임기 동안 리먼 쇼크 2년 후부터 15차례 금융 완화를 추진, 5년 임기 동안 자산 매입액을 101조 엔까지 증액했다. 중앙은행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상장투자신탁, 부동산투자신탁까지 매입자산을 확대했다.[2]
시라카와는 제로 금리 정책, 양적 완화 효과에 비판적이었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 유동성 공급 확대에도 불구, 물가 상승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2013년 3월 7일 기자회견에서 금융 완화 효과를 위해 중장기적 재정 규율이 중요하며 정부의 재정 재건 노력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2]
2013년 3월 19일 임기(4월 8일)를 남기고 사임했다. 이후 9월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국제정치경제학부 국제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2016년 미쓰비시지쇼 이사가 되었다.[2]
2. 1. 초기 생애
1949년 9월 후쿠오카현 고쿠라시(현 기타큐슈시)에서 태어났다. 후쿠오카현립 고쿠라 고등학교를 거쳐 도쿄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2][3][10] 도쿄 대학 재학 시절 옛 민사당 계열 싱크탱크인 민주사회주의연구회의에서 활동했으며, 경제학부 고미야 류타로 세미나에 소속되었다.2. 2. 학력
후쿠오카현립 고쿠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2][10] 도쿄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2][10]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3] 도쿄대 재학 시절 고미야 류타로 세미나에 소속되었으며, 옛 민사당 계열 싱크탱크인 민주사회주의연구회에서 활동했다.[10]3. 경력
- 1949년 - 후쿠오카현 고쿠라시(현 기타큐슈시)에서 출생
- 후쿠오카현립 고쿠라 고등학교 졸업
- 도쿄 대학 경제학부 졸업
-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전공
- 민주사회주의연구회 활동 (도쿄 대학 재학 시절)
- 2012년 12월 3일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수훈[16]
- 2013년 10월 - Promontory Financial Group(본사: 미국)의 수석 고문(비상근) 취임
연도 | 내용 |
---|---|
1972년 | 일본은행 입행 |
1990년 | 신용기구국 신용기구과장 |
1993년 | 기획국 기획과장 |
1994년 | 오이타 지점장 |
1995년 | 뉴욕 주재 참사 |
1996년 | 금융연구소 참사 |
1997년 | 심의역(국제자본시장 담당) |
2000년 | 심의역(기획조사 담당) |
2002년 | 일본은행 이사 |
2006년 | 교토 대학 대학원 공공정책교육부 교수 |
2008년 3월 20일 | 일본은행 부총재(총재 대행) |
2008년 4월 9일 | 일본은행 총재 |
2011년 1월 | 국제결제은행(BIS) 부의장 |
2013년 3월 19일 | 일본은행 총재 사임 |
2013년 9월 1일 |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국제정치경제학부 국제경제학과 교수(임기 1년) |
2016년 | 미쓰비시 지쇼 이사[17] |
3. 1. 일본은행
1972년 4월에 일본은행에 입행했다.[3][11] 1990년에 신용기구국 신용기구과장, 1993년에 기획국 기획과장, 1994년에 오이타지점장, 1995년에 뉴욕 주재 참사, 1996년에 금융연구소 참사, 1997년에 심의를 맡았으며 2002년에는 일본은행 이사에 취임했다.[3] 임기 4년을 끝낸 뒤 일본은행에서 퇴사했다.이 무렵 일본은행 총재였던 후쿠이 도시히코의 임기 만료가 다가오자 정부는 후임 총재를 선임하고자 했다. 그런데 일본은행 총재는 중의원과 참의원의 동의를 모두 받아야 했는데 중의원은 자유민주당이, 참의원은 민주당이 각각 과반을 점하고 있어 인사 동의안이 참의원을 통과할지가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실제로 정부가 총재로 지명한 무토 도시로와 다나미 고지의 인사 동의안이 모두 참의원에서 부결되고 그 사이 후쿠이의 총재 임기가 끝나면서 일본은행은 신헌법 발효 이래 처음으로 총재 공석 사태를 맞이하였다.
정부는 후임 총재로 새롭게 시라카와를 지명한 뒤 참의원에서 인사 동의안이 통과될 때까지 임시로 부총재로 임명해 시라카와에게 총재 직무대행을 맡겼다. 유례가 없는 사태 속에서 민주당이 국정 발목을 지나치게 잡는다는 비판이 나오자 민주당은 시라카와의 인사 동의안을 통과시켰고 4월 9일자로 시라카와는 정식 총재에 취임했다.[4]
취임 이후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등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동일본 대진재, 유럽 국가 부채 위기 등이 연달아 일어나는 등 시라카와의 임기는 편안치 못했다. 리먼 쇼크 2년 후부터 15차례에 걸쳐 금융 완화를 추진해 5년 임기 동안 자산 매입액을 101조 엔까지 증액했다. 특히 중앙은행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상장투자신탁이나 부동산투자신탁에까지 매입자산을 확대했다.
시라카와는 제로 금리 정책이나 양적 완화의 효과가 한정적이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가 유동성 공급을 확대하고 있지만 물가를 끌어올리는 건 한계가 있다고도 주장했다. 2013년 3월 7일 기자회견에서 금융 완화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중장기적인 재정 규율이 중시되어야 한다며 정부가 재정 재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본디 시라카와의 임기는 4월 8일까지지만 3월 19일에 사임했다.
3. 2. 교토 대학
2006년 7월, 교토 대학 대학원 공공정책연계연구부·공공정책교육부 (공공 정책 대학원) 교수로 취임하여 2008년 3월까지 재직했다.[3] 이 기간 동안 도쿄 대학 금융교육연구센터 객원연구원을 겸임했다.3. 3. 일본은행 부총재 (총재 직무대행)
2008년 3월 13일, 일본은행 부총재로 국회의 동의를 얻었으며, 3월 19일 돌려막기 각의를 통해 일본국 정부로부터 일본은행 부총재로 정식 임명되었다.[12]과거 일본은행 총재는 대장성 출신과 일본은행 출신이 교대로 맡는 "교차 인사"가 이어졌지만, 28대 하야미 마사루, 29대 후쿠이 도시히코와 같이 2대 연속 일본은행 출신이 취임했었다.[12] 후쿠이의 임기 만료에 따른 차기 총재 인사에서 일본은행의 독립성이 확보될지가 쟁점이 되는 가운데, 일본국 정부가 국회에 제시한 무토 도시로 (일본은행 부총재) 및 다나미 고지 (국제협력은행 총재)의 총재 인사안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야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참의원에서 부결되었다.[12] 이에 3월 19일 총재직에서 물러난 후쿠이는 3월 20일자로 부총재에 취임하는 시라카와를 "차기 일본은행 총재가 취임할 때까지, 총재의 직무를 대행하는 자"로 지명하여, 시라카와는 부총재 취임과 동시에 일본은행 총재 직무 대행자가 되었다.
학자적인 면모를 보였으며, 과거의 일본은행 총재와 비교하여 정계, 관계 및 재계와의 연결이나 협상력 등은 미지수라는 평도 있었지만, 대학 교수 시절에도 현장 복귀를 열망했다고 한다. 금융 정책을 담당하는 기획국 근무가 길어, 갑작스러운 취임에도 일본은행 수장으로서 위화감이 없다고 여겨진다.
금융 정책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거나, "일본은행의 일은 재밌다"고 말하는 등 주변에서 "취미는 금융 정책"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19] 후배 오키나 쿠니오에 따르면 "취미는 금융 정책이라기보다는 중앙은행 그 자체"이며, 좁은 의미의 금융 정책을 넘어 일본은행 기능 강화와 같은 과제에도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고 한다.[20]
3. 4. 일본은행 총재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2008년 4월 9일 일본은행 총재로 취임했다.[4] 이전에는 교토 대학 공공정책대학원 교수였으며, 2008년에 일본은행으로 복귀했다.[3]일본은행 총재 지명은 국회에서 승인되었으며, 뉴스위크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6위에 벤 버냉키(4위), 장클로드 트리셰(5위)와 함께 이름을 올렸다.[4]
총재 취임 이후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등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동일본 대진재, 유럽 국가 부채 위기 등 여러 경제 위기를 겪었다. 리먼 쇼크 이후 15차례에 걸쳐 금융 완화를 추진하여 5년 임기 동안 자산 매입액을 101조 엔까지 늘렸다. 특히 중앙은행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상장투자신탁이나 부동산투자신탁에까지 매입 자산을 확대했다.
시라카와는 제로 금리 정책이나 양적 완화의 효과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가 유동성 공급을 확대하고 있지만 물가 상승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2013년 3월 7일 기자회견에서는 금융 완화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중장기적인 재정 규율이 중요하며 정부가 재정 재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당초 임기는 2013년 4월 8일까지였으나, 3월 19일에 조기 사임했다.[15]
일본은행 총재의 역할은 일본의 물가 안정을 실현하고 금융 시스템의 안정을 보장하여 지속 가능한 성장과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5]
모건 스탠리 증권의 로버트 펠드먼은 일본은행 총재 인사와 관련하여 "특정 기준에 비추어 열린 논의"가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며, 중앙은행 관계자, 관료, 재계 인사 등 19명을 평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13] 이 보고서에서는 다케나카 헤이조와 시게하라 구미하루가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14] 결국 시라카와가 총재로 취임했다.
2011년 1월부터는 국제결제은행(BIS) 부의장으로 취임했다. 이는 1939년 가노 히사로 이후 일본인으로는 처음이며, 일본은행 총재로서는 최초였다.
아베 신조는 2012년 11월 인플레이션 목표 2%를 달성할 때까지 무제한적인 금융 완화를 해야 한다고 공약했으며,[50] 정권 획득 후 시라카와 일본은행과는 다른 노선의 양적 금융 완화를 실행시켰다.[50] 그 결과, 엔고가 시정되고 주가가 개선되었다.[51][52]
3. 5. 일본은행 총재 퇴임 이후
시라카와는 2013년 4월 8일까지였던 일본은행 총재 임기를 채우지 않고, 3월 19일에 사임했다.[15] 이후 9월에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국제정치경제학부 국제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6] 2016년에는 미쓰비시지쇼 이사가 되었다.2011년에는 블룸버그 마켓 매거진의 가장 영향력 있는 50인 순위에 포함되기도 했다. 그는 30인 그룹의 회원이기도 하다.
4. 금융 정책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1972년 일본은행에 입행하여 오이타 지점장, 뉴욕 지점 미주 지역 총괄 매니저 등을 역임했다.[3] 2006년 교토 대학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다 2008년 일본은행으로 복귀했다.[3] 2008년 4월 9일 일본은행 총재로 지명되었으며, 뉴스위크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6위에 벤 버냉키, 장클로드 트리셰와 함께 올랐다.[4]
그의 임무는 일본의 지속 가능한 성장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상황 변화에 유연하고 시기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이었다.[5] 다시 말해, 일본은행 총재의 역할은 일본의 물가 안정을 실현하고 금융 시스템의 안정을 보장하는 것이다. 2011년 블룸버그 마켓 매거진의 가장 영향력 있는 50인 순위에 포함되었으며, 30인 그룹의 회원이었다.
4. 1. 금융 완화 정책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일본은행 총재 취임 후 4년 동안 리먼 쇼크, 동일본 대지진, 유럽 채무 위기를 겪었다. 리먼 쇼크 2년 후부터 15차례의 금융 완화를 단행, 5년의 재임 기간 동안 자산 매입액을 101조엔까지 증액했다(2013년 말까지의 잔고 목표).[23][24] 중앙은행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상장 투자 신탁(ETF)과 부동산 투자 신탁(J-REIT)까지 매입 자산을 확대했다.[25]동일본 대지진 직후인 2011년 3월 14일 정례 기자 회견에서 "전대미문의 대지진이 일어난 것에 비해 기금 증액 규모나 내역이 초라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결코 초라하지 않다"고 반박했다.[11]
제로 금리 정책, 양적 완화 정책에 대해서는 효과가 "제한적"이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26] 교토 대학 교수 시절 저서 『현대의 금융 정책』에서 양적 금융 완화에 대해 "경기·물가에 대한 자극이라는 점에서 중심적인 효과는 시간축 효과이며, 양의 확대는 거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27] 또한 "FRB는 유동성 공급을 확대하고 있지만, 물가를 끌어올리는 힘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28]
일본 은행의 통화 기반 증가 방식은 선진국 중 최대이며, 이만큼 금융 완화를 해도 경제가 성장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며, 인구 감소와 고령화 속에서 성장력을 어떻게 높일지가 과제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29]
2013년 3월 7일, 금융 정책 결정 회의 후 기자 회견에서 금융 완화가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중장기적인 재정 규율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정부에 재정 재건 노력을 촉구했다.[30]
2009년 11월 3일, 강연에서 "인플레이션 유도 정책을 채택하면 다양한 문제가 발생한다", "중앙은행은 그러한 정책을 결코 시행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44]
2012년 11월 12일, 도내 강연에서 인플레이션 목표제에 대해 "물가도 임금도 오르지 않는 상황이 오래 지속된 일본 경제에서는 현실적이지 않다"고 말하며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또한, 일본의 소비자나 기업에서는 "물가는 오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감각"이 정착되어 있다고 언급했다.[45]
아베 신조 자유민주당 총재는 2012년 11월에 인플레이션 목표 2%를 달성할 때까지 무제한적인 금융 완화를 해야 한다고 선거 공약했으며, 정권을 잡자마자 시라카와 일본은행 총재와는 노선이 크게 다른 양적 금융 완화를 일본은행에 실행시켰다.[50] 이로 인해 급격한 엔고가 시정되었고, 노다 요시히코가 중의원 해산을 표명한 지 5개월 만에 20엔의 엔저가 진행되었다.[51] 또한, 주가도 급속히 개선되어 2013년 5월 15일에는 5년 4개월 만에 닛케이 평균 주가가 15,000엔대를 회복했다.[52]
4. 2. 제로 금리 및 양적 완화에 대한 비판적 입장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제로 금리 정책과 양적 완화 정책에 대해 그 효과가 "제한적"이라며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26] 교토 대학 교수 시절 저서 『현대의 금융 정책』에서 양적 금융 완화에 대해 "경기·물가에 대한 자극이라는 점에서 중심적인 효과는 시간축 효과이며, 양의 확대는 거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27] 또한, "FRB는 유동성 공급을 확대하고 있지만, 물가를 끌어올리는 힘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28]일본은행의 통화 기반 증가 방식이 선진국 중 최대임에도 불구하고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며, 인구 감소와 고령화 속에서 성장력을 높이는 것이 과제라는 지론을 펼쳤다.[29] 2013년 3월 7일 금융 정책 결정 회의 후 기자 회견에서는 금융 완화의 효과를 위해서는 "중장기적인 재정 규율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정부에 재정 재건 노력을 촉구했다.[30]
4. 3. 재정 건전성 강조
白川方明일본어는 2013년 3월 7일 금융 정책 결정 회의 후 기자 회견에서 금융 완화가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중장기적인 재정 규율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정부에 재정 재건 노력을 촉구했다.[30] 중앙은행이 국채를 인수하지 않는 것은 "나라의 모습"이라 표현하며, 인수했을 경우의 부작용을 엄격히 경계했다.[29]2013년 1월 9일 경제재정자문회의에서는 "일본은행이 재정 파이낸스(적자 보전)를 하고 있다는 우려를 받지 않도록, 재정 재건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49]
5. 디플레이션에 대한 견해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디플레이션에 대해 다양한 정의가 있으며,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28] 그는 일본의 디플레이션 원인으로 다음을 들었다.
# 규제 완화 등으로 인한 내외 가격 차이 축소
# 노사 간의 고용 확보 중시로 인한 서비스 산업 등의 임금 하락
# 버블 붕괴 이후 국민의 자신감 상실로 인한 수요 부족[31]
2009년 11월 20일, 금융 정책 결정 회의 후 기자 회견에서 "지속적인 물가 하락은 거시적 수요 균형이 완화되고 있다는 것, 바꿔 말하면 수요 약화의 결과"라고 지적하며 "수요 자체가 부족할 때에는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만으로는 물가가 올라가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혔다.[33]
2012년 4월 21일, 미국 워싱턴 강연에서 "중앙 은행의 방대한 통화 공급은 결국 통제 불가능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35] 다만, 중앙은행 총재라는 입장에서 하이퍼인플레이션 가능성에 대한 언급은 부적절하다고 밝혔다.[36]
2013년 3월 19일 퇴임 기자 회견에서는 시장의 기대에 작용하여 물가 상승을 목표로 하는 리플레이션 정책에 대해 "중앙 은행이 말로 시장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라면, 그러한 시장관이나 정책관에 나는 위태로움을 느낀다"고 비판했다.[38][39][40]
시라카와는 "통화 기반을 늘리면 물가가 상승한다는 상관 관계는 단절되었다"고 지적하며, "모든 경제 현상을 화폐 현상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금융 완화와 공급 측면, 구조적 측면에서의 노력이 어우러져야 디플레이션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처할 수 있다고 보았다.[38][39][41]
2014년 5월 13일, 미국 다트머스 대학교 강연에서는 "일본 경제의 주요 문제는 디플레이션이 아니라 인구 동태"이며, "디플레이션은 극히 낮은 실업률의 이면"이라고 주장했다.[42]
5. 1. 디플레이션 탈피를 위한 노력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일본은행 총재 재임 기간(2008년-2013년) 동안 리먼 쇼크, 동일본 대지진, 유럽 채무 위기 등 잇따른 경제 위기를 겪으며, 디플레이션 탈피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23]제로 금리 정책과 양적 완화 정책에 대해서는 그 효과가 제한적이라고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26] 교토 대학 교수 시절 저서 『현대의 금융 정책』에서 "경기·물가에 대한 자극이라는 점에서 중심적인 효과는 시간축 효과이며, 양의 확대는 거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27] 또한, FRB의 유동성 공급 확대에 대해서도 "물가를 끌어올리는 힘은 부족하다"고 평가했다.[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라카와는 15차례의 금융 완화를 단행하여 자산 매입액을 101조엔까지 증액했다.[23][24] 이는 2013년 말까지의 잔고 목표였다.[23][24] 중앙은행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상장 투자 신탁(ETF)과 부동산 투자 신탁(J-REIT)까지 매입 자산을 확대하기도 했다.[25]
동일본 대지진 직후인 2011년 3월 14일 기자 회견에서는 피해 규모에 비해 금융 지원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대해 "결코 초라하지 않다"고 반박하기도 했다.[11]
시라카와는 일본의 통화 기반 증가 방식이 선진국 중 최대 수준이며, 이 정도의 금융 완화에도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 속에서 성장력을 높이는 것이 과제라는 지론을 펼쳤다.[29]
2013년 3월 7일 금융 정책 결정 회의 후 기자 회견에서는 "중장기적인 재정 규율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정부에 재정 재건 노력을 촉구했다.[30]
시라카와는 일본의 디플레이션 원인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했다.
# 규제 완화 등으로 인한 내외 가격 차이 축소
# 노사 간의 고용 확보 중시로 인한 서비스 산업 등의 임금 하락
# 버블 붕괴 이후 국민의 자신감 상실로 인한 수요 부족[31]
그는 디플레이션 탈피를 위해서는 생산성 향상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민간 기업과 정책 당국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정부는 기업들이 치열한 글로벌 경쟁 환경에 놓여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다양한 제도와 시스템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2]
2009년 11월 20일 기자 회견에서는 "지속적인 물가 하락은 거시적 수요 균형이 완화되고 있다는 것, 즉 수요 약화의 결과"라며, "수요 자체가 부족할 때는 유동성 공급만으로는 물가가 올라가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혔다.[33]
2009년 11월 4일 강연에서는 "물가 하락이 기점이 되어 경기를 끌어내릴 가능성은 작다"고 진단했다.[34]
2012년 4월 21일 미국 워싱턴 강연에서는 "중앙 은행의 방대한 통화 공급은 결국 통제 불가능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35] 다만, 중앙은행 총재라는 입장에서 하이퍼인플레이션 가능성에 대한 언급은 부적절하다고 밝혔다.[36]
2013년 2월 28일, 일본은행 총재 재임 중 마지막 강연에서는 금융 완화에 따른 물가 상승으로 인한 실질 소득 감소 등 부작용을 우려하며, "많은 국민들은 단순히 물가만 오르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37]
2013년 3월 19일 퇴임 기자 회견에서는 시장의 기대에 작용하여 물가 상승을 목표로 하는 리플레이션 정책에 대해 "중앙 은행이 말로 시장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라면, 그러한 시장관이나 정책관에 나는 위태로움을 느낀다"고 비판했다.[38][39][40]
시라카와는 "통화 기반을 늘리면 물가가 상승한다는 상관 관계는 단절되었다"고 지적하며, 디플레이션 극복은 금융 정책뿐만 아니라 공급 측면, 구조적 측면에서의 노력이 함께 이루어져야 가능하다고 강조했다.[38][39][41]
2014년 5월 13일 미국 다트머스 대학교 강연에서는 "일본 경제의 주요 문제는 디플레이션이 아니라 인구 동태"이며, "디플레이션은 극히 낮은 실업률의 이면"이라고 주장했다.[42]
5. 2. 인플레이션 목표제에 대한 부정적 견해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제로 금리 정책 및 양적 완화 정책에 대해 그 효과가 "제한적"이라며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26] 교토 대학 교수 시절 저술한 『현대의 금융 정책』에서는 양적 금융 완화에 대해 "경기·물가에 대한 자극이라는 점에서 중심적인 효과는 시간축 효과이며, 양의 확대는 거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27] 또한, FRB의 유동성 공급 확대에도 불구하고 "물가를 끌어올리는 힘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28]일본은행이 설정한 중장기적인 물가 안정 목표 1%에 대해서도 "플러스 2%로 정책을 운영하면 과거에 경험이 없는 사태가 발생하여 매우 불확실성이 높고, 경제 활동에 악영향을 미친다", "해외가 2%라고 해서 일본도 2%를 목표로 삼는 것은 잘못이다"라며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6. 환율 정책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환율은 금융 정책에 의해 변동한다"는 통화주의적 접근 방식을 지지했다.[18] 그는 해리 G. 존슨, 제프리 프랭클의 논문을 인용하며,[46][47] 1970년대에 통화주의적 접근 방식에 기초한 환율 실증 분석 논문을 발표했다.[48] 이 논문에서 그는 "환율 변동 등 경제 현상에 대해 일본은행의 금융 정책이 유효하다"고 주장했다.[47]
6. 1. 양적 완화와 엔화 가치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일본은행 총재 재임 기간(2008년-2013년) 동안 리먼 쇼크, 동일본 대지진, 유럽 채무 위기 등 잇따른 경제 위기를 겪었다. 이에 대응하여 15차례의 금융 완화를 단행, 자산 매입액을 101조엔까지 증액했다(2013년 말까지의 잔고 목표).[23][24] 중앙은행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상장 투자 신탁(ETF)과 부동산 투자 신탁(J-REIT)까지 매입 자산을 확대했다.[25]동일본 대지진 직후인 2011년 3월 14일 정례 기자 회견에서는 기금 증액 규모에 대한 비판에 "결코 초라하지 않다"고 반론했다.[11]
시라카와는 제로 금리 정책 및 양적 완화 정책에 대해 그 효과가 "제한적"이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26] 교토 대학 교수 시절 저서 『현대의 금융 정책』에서는 "경기·물가에 대한 자극이라는 점에서 중심적인 효과는 시간축 효과이며, 양의 확대는 거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27] 또한, FRB의 유동성 공급 확대에도 불구하고 물가 상승 효과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28]
일본은행의 통화 기반 증가 방식은 선진국 중 최대 수준이지만, 이러한 금융 완화에도 불구하고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점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그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 속에서 성장력을 높이는 것이 과제라는 지론을 펼쳤다.[29]
2013년 3월 7일 금융 정책 결정 회의 후 기자 회견에서는 금융 완화 효과를 높이기 위해 정부의 재정 재건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30]
시라카와는 "환율은 금융 정책에 의해 변동한다"는 통화주의적 접근 방식을 지지했다.[18] 그는 해리 G. 존슨, 제프리 프랭클의 논문을 인용하며,[46][47] 1970년대에 통화주의적 접근 방식에 기초한 환율 실증 분석 논문을 발표했다.[48] 논문에는 "환율 변동 등 경제 현상에 대해 일본은행의 금융 정책이 유효하다"고 기록했다.[47]
2012년 5월 24일 중의원 특별위원회에서는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실시된 양적 완화 정책 경험을 바탕으로 "통화 기반이 증가할 때 엔고가 되고, 양적 완화 해제 후에 오히려 엔저가 되었다"고 지적하며, 양과 환율 간 명확한 상관 관계를 찾기 어렵다는 인식을 보였다.[27]
2013년 2월 28일, 일본은행 총재 임기 중 마지막 강연에서는 "과거 15년간 여러 번 찾아온 엔저 국면에서도 잠재 성장률은 상승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37]
7. 평가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일본은행 총재 재임 기간 동안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뉴스위크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6위로 선정했고,[4] 블룸버그 마켓 매거진의 가장 영향력 있는 50인 순위에 포함되기도 했다.[3] 2012년에는 금융 경제 부문의 뛰어난 리더로서 일본인 최초로 미국의 "외교 협의회(FPA) 메달"을 수상했으며,[24] 같은 해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에 서임되었다.[53]
그러나 그의 정책에 대해서는 잃어버린 20년을 초래하고 디플레이션 탈출에 실패했다는 비판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7. 1. 세계 언론의 평가
- 2011년 9월 24일,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시라카와를 "새로운 경제 위기를 회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세계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소개하며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에서 일관된 정책을 외치고 있다"고 평가했고, 급격한 엔고 시정을 위한 외환 시장 개입을 담당한 중심 인물로 꼽았다.[54][55]
- 2012년 8월, 미국의 글로벌 파이낸스지가 매년 공개하는 세계 중앙은행 총재의 평가에 따르면, 시라카와는 "C-"였다.[56]
- 2012년 12월, 월스트리트 저널이 미국 등의 경제 평론가에게 세계 5대 중앙은행 총재의 등급 평가를 의뢰한 결과, 시라카와는 압도적으로 최하위의 평가를 받았다.[57]
- 2013년 3월 8일, 중화민국(대만)의 중앙사 상정망은 시라카와를 가리켜 "무능"하다고 평가하며, 시라카와가 임기를 채우지 않고 사임한 것은 시라카와의 능력 부족이 원인이라고 했다.[58]
-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지는 "일본은행의 자산(대차대조표)을 50% 확대하고 인플레이션 목표를 도입하여 충격으로부터 국가 은행 시스템을 지켰다"고 평가하며 "최소한 1982년 이래 가장 적극적인 총재", "일본은행 130년 역사상 가장 대담했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하는 한편, 같은 기간에 대차대조표를 250% 확대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나 두 배로 확대한 유럽 중앙 은행(ECB)에 비해 "뒤처져" 상대적으로 엔고를 초래했다고 지적하고 있다.[59]
7. 2. 학계 및 경제 전문가의 견해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일본은행 총재 재임 기간 동안 여러 경제학자와 전문가들로부터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모건 스탠리 증권의 로버트 펠드먼은 일본은행 총재 인사와 관련하여 "특정 기준에 비추어 열린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시라카와를 포함한 19명의 후보를 "거시 경제학과 독립성", "정책 결정 기관의 수장을 역임한 경험", "국내외 네트워크"의 3가지 지표로 평가했다. 그 결과, 다케나카 헤이조와 시게하라 구미하루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고, 시라카와는 낮은 순위에 머물렀다.[13][14]
경제학자 하마다 코이치는 학생 시절 시라카와를 "수학과 그래프를 사용하여 경제학을 생각하는 것을 잘하는 인물"이었다고 회상했다.[18] 그러나 일본은행 총재로서의 시라카와에 대해서는 "세계로부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일본은행류 이론'을 말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61] 하마다는 시라카와가 디플레이션 탈출을 실현하지 못했다며 최저 평가인 C를 매겼고,[64] "실업, 도산의 고통보다 일본은행의 조직 방어가 더 중요해진 것일까"라고 비판했다.[63]
이와타 키쿠오, 와카타베 마사즈미, 다카하시 요이치 등 다른 경제학자들도 시라카와의 금융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이와타는 시라카와가 "부작용을 두려워하여 디플레이션을 감수한다"고 지적했고,[66] 와카타베는 시라카와가 "디플레이션의 원인에는 금융 정책은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67] 다카하시는 시라카와가 "디플레이션 타겟을 설정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정책을 반복해왔다"고 비판했다.[68]
전 일본은행 심의위원 나카하라 노부유키는 시라카와가 "'잃어버린 20년'을 낳았다"고 비판하며, "자신의 이론에 얽매여 다른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겸손함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69]
반면,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전 일본은행 정책위원 미즈노 아츠시는 시라카와가 금융 시스템 확보에 훌륭한 일을 했다고 평가했다.[59] 이코노미스트 무라시마 키이치는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어려운 시기에 총재직을 맡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71] 오바타 세키는 시라카와가 장기적으로 일본 경제에 최선의 정책을 목표로 했다고 평가했다.[70]
나카노 타케시는 시라카와의 "(디플레이션 탈출에는) 민간 기업·금융기관·정부·일본은행이 각자의 역할에 맞춰 노력을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발언에 이해를 표하며, 디플레이션 탈출은 금융 정책뿐만 아니라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2]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은 일본은행의 소극적인 디플레이션 대응을 강하게 비판하며, "지금 일본은행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 책임자인 총재는) 총살에 처해야 한다"고까지 언급했다.[60]
7. 3. 일본 내 언론의 평가
일본 내 언론은 시라카와 마사아키 총재의 정책과 리더십에 대해 다양한 평가를 내놓고 있다.- 긍정적 평가
- 니혼게이자이 신문: 리먼 쇼크, 동일본 대지진, 유럽 채무 위기 등 어려운 시기에 금융 시스템의 안정을 지켜냈다고 평가한다. 특히, 일본 금융기관이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여 성장 전략을 이끌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것을 시라카와의 공적으로 꼽는다.[69]
- 마이니치 신문: 시라카와가 정통 경제학의 이론에 충실하며, 리먼 쇼크와 유럽 통화 위기로부터 일본 경제를 지켜낸 것은 큰 공적이라고 평가한다. 또한, 정부와 일본은행의 2% 물가 목표 합의를 통해 일본은행의 독립성을 유지한 것을 "예술의 극치"라고 표현하며, 정치권의 압력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고 평가한다.[74][75]
- 일본경제단체연합회 요네쿠라 히로마사 회장: 시라카와가 경제 활성화에는 부족했지만, 조직 운영, 기동적인 금융 정책, 재정에 대한 국제적 신뢰 유지에 힘썼다고 평가한다. 또한, 국제 회의에서 일본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73]
- 비판적 평가
- 산케이 신문 타무라 히데오 특별기자: 시라카와가 인플레이션율 0% 이하를 추구하는 금융 정책을 고수하고, 금융 완화에 소극적이었던 점을 비판한다. FRB가 과감한 금융 완화로 경기 회복에 성공한 것과 대조적으로, 시라카와의 정책이 "15년 디플레이션"을 초래했다고 주장한다.[77] 또한, 시라카와가 통화 공급 확대가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것이라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며, 정부 부채 증가가 소비 감소와 디플레이션을 초래한다는 주장도 근거가 부족하다고 비판한다.[76]
이처럼 시라카와 총재에 대한 평가는 그의 정책 방향과 경제 상황에 대한 관점에 따라 엇갈리고 있다.
8. 저서
- 図説日本銀行일본어(도설 일본은행)(1993)
- ''금융 시장 세계화: 현재와 미래''(1997)
- ''자산 가격 거품과 통화 정책: 1980년대 후반 일본의 경험과 교훈''(2000)
- "양적 완화 하에서의 1년"[8] (2002)
- ''일본의 디플레이션, 금융 시스템의 문제 및 통화 정책''(2005)
- ''레버리지 축소와 성장: 선진국은 일본의 길고 험난한 길을 따르고 있는가?''(2012)
- ''격동의 시대: 위기 시대의 중앙 은행''(2021)
- 『버블과 금융 정책 - 일본의 경험과 교훈』(일본경제신문사, 고자이 야스시, 오키나 구니오와 공동 편집, 2001년)
- 『현대의 금융 정책 - 이론과 실제』(일본경제신문사, 2008년)
- 『중앙 은행: 센트럴 뱅커가 경험한 39년』(도요케이자이신보사, 2018년)
- : 제32회 와지 테츠로 문화상 수상 (2019년도・일반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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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経済新聞
2013-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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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コラム:円安・株高の持続力決める5つの世界標準化政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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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uters
2014-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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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1ドル=100円までの経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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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
2013-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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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東京株337円高、5年4カ月ぶり1万5000円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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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ニュース
201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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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日銀の白川方明総裁がレジオン・ドヌール勲章を受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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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危機回避の指導者の一人に日銀総裁 米ワシントン・ポスト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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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経済新聞
2011-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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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日銀総裁の白川方明氏を世界的指導者に選出=米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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サーチナ
2011-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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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バーナンキ議長の成績は「B」、白川総裁「C-」-米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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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mberg
2012-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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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世界のエコノミストはアベノミクスに満足=WSJ調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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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 Real Time
2013-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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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無能抗通膨 白川功難抵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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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社商情網
2013-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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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外紙、白川総裁を「大胆」と評価 指摘する意外な弱点と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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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phere(ニュースフィア)
2013-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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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ノーベル賞経済学者 P・クルーグマ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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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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勝間和代×浜田宏一×若田部昌澄 「ハーバード大やイェール大にあって東大に足りないものは何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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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ftyニュース (SAPIO 2010年8月4日号掲載)
2010-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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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銀が国民を苦しめている」浜田宏一イェール大教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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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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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経済の死角 浜田宏一イェール大学教授「日銀の政策は"too little,too late"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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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ビジネス
2011-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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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安倍総裁ブレーン・浜田氏:日銀新総裁は数カ月以内のデフレ脱却可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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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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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白川総裁は誠実だったが、国民を苦しめ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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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経済オンライン
2013-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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デフレ脱却を問う:日銀法改正で物価目標に責任を=岩田教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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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イター
201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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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道徳的な就職競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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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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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高橋洋一の民主党ウォッチ 日銀に軽んじられた菅財務相 でもインフレ目標悪く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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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CASTニュース
2010-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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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さらば白川総裁! 祭り上げられた5年間の評価は「何もでき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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ビジネスジャーナル
2013-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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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行動ファイナンス小幡績 白川総裁は安倍政権の圧力をかわせるの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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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経済オンライン
2013-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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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さよなら白川総裁、資産市場は歓迎-評価は歴史家に委ねること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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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mberg
2013-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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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レジーム・チェンジ-恐慌を突破する逆転の発想
NHK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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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白川日銀総裁に経済界からねぎらいの声、相次ぐ 「大過なし」「最後までベス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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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N産経ニュー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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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水説:白川日銀のアート=潮田道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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毎日jp(毎日新聞)
2013-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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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제목 없음)
毎日新聞
2013-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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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デフレの“元凶”日銀にあり!白川発言にがく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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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KZAK
2012-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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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白川日銀」いったい何だったのか 築き上げた莫大な負の遺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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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keibiz
201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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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日銀の白川総裁、悲しい幕引き 最後まで学者…金融市場は退場歓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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サンケイビズ
2013-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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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FRBのバーナンキ議長、現代の中央銀行家の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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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B Press
201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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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浜田宏一「いま日本の未来が見えてき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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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ビジネス
2013-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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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無期限緩和、前倒し 脱デフレ「何でも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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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経済新聞
2013-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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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物価上昇にインフレ期待の効果、4月以降は企業の価格政策が動向左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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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uters
2014-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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