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나 요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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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시나 요시오는 일본의 물리학자로, "일본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1890년에 태어나 도쿄 제국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유럽 유학을 통해 양자역학을 연구했다. 닐스 보어와 함께 클라인-니시나 공식을 발표했으며, 일본으로 돌아와 이화학연구소에 니시나 연구실을 설립하여 양자론, 원자핵, X선, 우주선 등을 연구했다. 그는 일본 최초의 사이클로트론을 개발했으며, 유카와 히데키, 도모나가 신이치로 등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또한, 일본의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으나, 1951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니시나 기념 재단이 설립되어 니시나 기념상을 수여하고 있으며, 달의 크레이터와 이화학연구소의 기념실 등으로 그의 이름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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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나 요시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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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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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仁科 芳雄 |
원어 이름 (언어) | ja |
로마자 표기 | Nishina Yoshio |
출생일 | 1890년 12월 6일 |
사망일 | 1951년 1월 10일 |
출생지 | 오카야마현 아사쿠치군 사토쇼정 |
국적 | (일본) |
학력 | |
모교 | 도쿄제국대학 |
경력 | |
직장 | 이화학연구소 |
분야 | 물리학 |
업적 | |
주요 업적 | 사이클로트론 건설 클라인-니시나 공식 |
수상 | |
수상 내역 | 아사히상 (1944년) 문화훈장 (1946년) |
영향 | |
영향을 준 인물 | 유카와 히데키 도모나가 신이치로 사카타 쇼이치 |
2. 생애
1930년 11월 도쿄대학교에서 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3] 박사 학위 논문은 "석(50)에서 텅스텐(74)에 이르는 여러 원소의 L 흡수 스펙트럼 및 그 원자 구조와의 관계에 관하여" (제목의 숫자는 원자 번호)였다.[15][16] 1931년 7월, 이화학연구소(RIKEN)에 '니시나 연구실'을 설치하고, 당시 일본에서는 드물었던 양자론, 원자핵, X선 등을 연구했다. 1932년 중성자가 발견되자 연구 대상을 우주선으로 넓혔다.
1937년 사이클로트론(핵 입자 가속 장치)을 완성했고,[18] 1944년에는 대형 사이클로트론을 완성하여 실험을 시작했다.
1941년 일본군의 요청으로 원자 폭탄의 이론적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1942년 해군 기술 연구소가 원폭 연구를 시작하자, 니시나는 이화학연구소 대표로 참여했다. 원폭 개발은 '니시나'의 앞글자 '니'가 일본어로 숫자 '2'와 같다는 점에 착안해 '2호 연구'로 불렸다.[30] 이 연구는 1945년 미군의 공습으로 중단되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8월 8일 정부 조사단의 일원으로 현지 피해를 조사하여 원자폭탄임을 확인하고 정부에 보고했다.[23]
일본에서 양자역학의 기초를 다졌으며, 우주선 및 입자 가속기 연구에서 업적을 남겼다. 유카와 히데키, 도모나가 신이치로 등 훗날 노벨상 수상자들을 길러내 "일본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1945년 11월 22일, 미군 점령군은 그의 사이클로트론을 해체하여 도쿄 만에 버렸다.[6] 1946년 이화학연구소 소장이 되었고,[9] 1948년에는 주식회사 과학연구소(현 카켄제약)를 설립하여 초대 사장이 되었다. 또한 일본학술회의 제1기 부회장을 역임했다.
1951년 간암으로 사망했다.[10]
그가 사망한 지 4년 후인 1955년에 원자물리학과 그 응용 분야의 발전을 위해 니시나 기념 재단 (仁科記念財団) 이 설립되었으며, 이 재단에서는 일본에서 매년 원자물리학과 그 응용에 관해 뛰어난 업적을 올린 연구자에게 니시나 기념상을 수여하고 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890년 12월 6일, 오카야마현 아사쿠치군 사토쇼정 하마나카에서 아버지 니시나 아리마사와 어머니 쓰네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13]. 형제로는 세 명의 형과 네 명의 누나, 한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어릴 적에는 양갱을 좋아하여, 밤중에 일어나 어머니에게 만들어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신조 심상소학교(현: 사토쇼 니시 초등학교), 이키시 고등소학교 (수석 졸업)를 거쳐, 1905년 오카야마현립 오카야마 중학교(현: 오카야마현립 오카야마 아사히 고등학교)에 입학했다[13]. 중학교 재학 중에는 테니스부에 소속되어, 5학년 때는 주장을 맡기도 했다. 1910년 오카야마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성적이 우수하여 무시험으로 구제 제6고등학교(현: 오카야마 대학) 이과 갑류에 합격하여 9월에 입학했다[13].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늑막염으로 고생하여, 2학년 때는 1년간 휴학하고[13] 고향에서 요양했다. 3학년 때는 2부(공과, 이과, 농과)의 운동부 감독을 맡았고, 특대생이 되기도 했다.1914년, 구제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도쿄 제국 대학 공과 대학(현: 도쿄 대학 공학부)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13]. 이듬해 2월 오카야마현 출신 학생들을 위한 세이기주쿠에 입주했지만, 4월 5일 발열하여 2학년 진급을 포기했다. 그 후, 도쿄시시바구 조야마초(현: 미나토구도라노몬)에 있던 둘째 형의 집으로 이사하여 졸업할 때까지 지냈다. 3학년 때의 시바우라 제작소에서의 실지 연수와 도쿄 제국 대학 공과 대학 교수 오토리 슈타로의 지도하에 전기 기계 관계 졸업 논문을 작성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전기) 화학적인 방면의 연구를 하기로 결심한다. 1918년7월 9일에 도쿄 제국 대학 공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13], 다음 날부터 이화학연구소 (이켄)의 연구생이 되었다[13]. 도쿄 제국 대학 공과 대학 조교수 겸 이화학연구소 연구원 쿠지라이 츠네타로의 연구실에 소속되어, 물리를 시작하려고 생각했다. 같은 날, 도쿄 제국 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13], 도쿄 제국 대학 이과 대학 교수 겸 이화학연구소 물리부장 나가오카 한타로의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면서 도쿄 제국 대학 이과 대학(현: 도쿄 대학 이학부)에서 이과 강의를 들었다.
2. 2. 유럽 유학
1921년부터 1928년까지 유럽 유학을 떠났다. 4월 5일 고베항을 출발하여 일본우선의 "기타노마루"를 타고 남프랑스의 마르세유로 건너갔다.[13] 5월에는 영국 런던에 도착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1년간 어니스트 러더퍼드에게 배웠다.[13] 1922년 11월에는 독일의 괴팅겐 대학교로 옮겼다.[13] 11월 12일에 어머니 츠네가 사망했는데, 이것이 유학 기간 연장을 뒷받침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덴마크의 닐스 보어의 강연을 듣고 물리학의 새로운 분야에 대한 연구에 흥미를 느껴, 1923년 3월에 보어에게 편지를 써서 유학을 희망하는 뜻을 전했고, 그 해 4월에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교의 보어 연구소로 옮겼다.[13] 코펜하겐에서 닐스 보어와 함께 연구를 진행했고, 그들은 좋은 친구가 되었다. 여기서 연구원으로 5년 반을 보냈고, 1927년 11월부터는 보어의 배려로 독일의 함부르크 대학교에서도 공부했으며, 미국의 물리학자 이시도어 아이작 라비와 친한 친구가 되었다.[13] 1928년에는 오스카르 클라인과 함께 컴프턴 산란의 유효 단면적을 계산하여 클라인-니시나 공식을 도출했다.[10][13] 그 해 10월 1일에 코펜하겐을 떠나 귀국길에 올라, 런던과 프랑스의 수도 파리, 그리고 미국을 거쳐 12월 21일에 귀국했다.[13]
닐스 보어의 연구소에서는, 도쿄 제국 대학의 기무라 겐지로와 함께 있었던 시기가 있었으며, 공동으로 연구도 진행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중에 인공 방사능에 관한 공동 연구를 진행하여,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14]
2. 3. 일본 귀국 및 연구 활동
1929년 일본으로 돌아와 양자역학 연구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귀국 후에는 초청해 주는 대학이 없어, RIKEN의 나가오카 한타로 연구실에 소속되었다. 해군 기술계 장교였던 절친한 나와 타케시의 여동생인 미에와 1929년 2월 23일에 결혼했다.[13] 같은 해 9월에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폴 디랙을 일본에 초청하여, 그 강연 요지를 각 대학에 배포했다.[13] 1930년 11월, 도쿄 제국대학에서 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3] 박사 학위 논문은 "On the L-absorption spectra of the elements from Sn(50) to W(74) and their reration to the atomic constitution" (석(50)에서 텅스텐(74)에 이르는 여러 원소의 L 흡수 스펙트럼 및 그 원자 구조와의 관계에 관하여, 제목의 숫자는 원자 번호)이다.[15][16]1931년 7월 RIKEN에 니시나 연구실을 설립하고, 하이젠베르크, 디랙, 보어 등 서양 학자들을 일본으로 초청했다. 1931년 교토에서 디랙 이론에 대한 강의를 했는데, 이때 유카와 히데키와 토모나가 신이치로를 만났다.[3] 같은 해 7월, 이화학연구소 최연소 주임 연구원이 되어[13] 니시나 연구실을 설립하고, 당시 일본 내에서는 전례가 없었던 양자론, 원자핵, X선 등을 연구했다. 이듬해 중성자가 발견되자 X선 대신 우주선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1937년 4월에는 보어를 일본에 초청했다.[13]
니시나는 클라인-니시나 공식을 공동 저술했다. 그의 연구는 우주선과 입자 가속기 개발에 관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RIKEN에서 여러 개의 사이클로트론을 제작했다. 특히 그는 우주선에서 뮤온을 발견했는데, 이는 앤더슨 외의 연구와는 별개였다.[10] 그는 또한 우라늄-237 동위원소를 발견했으며, 우라늄에 대한 고속 중성자 조사가 일어나는 대칭 핵분열 현상 연구를 개척했고(1939–1940), 최초의 초우라늄 원소인 넵투늄 발견을 아쉽게 놓쳤다.[12]
1937년 4월에는 소형 27인치 사이클로트론(핵 입자 가속 장치)을 완성했고, 1939년 2월에는 200톤의 대형 사이클로트론 본체를 완성하여, 1944년 1월부터 실험을 시작했다.


1935년, RIKEN에 원자핵과 방사선 생물학을 연구하기 위한 원자핵 실험실이 미쓰이 보은회, 도쿄 전등 주식회사, 일본 무선 전신 주식회사 등의 기부로 설립되었다.[17] 1937년에 니시나가 주도하여 일본 최초의 26인치 소형 사이클로트론이 완성되었고[18], 조금 늦게 오사카 제국대학에서도 24인치 사이클로트론이 완성되었다. 교토 제국대학에서도 건설이 계획되었다.[19]
RIKEN에서는 소형 사이클로트론을 사용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연구자 그룹이 분담하여 주기율표상의 원소를 경(輕) 및 중(重)핵종, 희토류 핵종, 중핵종으로 나누어 중성자로 조사하여 방사성 핵종의 성질을 조사했다. 우라늄 237의 존재를 발견했고[21][22], 우라늄 235의 대칭 핵분열을 발견했다.[23][24] 또한, 다른 그룹은 누에에 중성자와 감마선의 혼합 방사선을 쏘아 생물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다.
니시나는 소형 사이클로트론이 완성될 무렵부터, 더 고에너지의 입자 빔을 얻을 수 있는 대형 사이클로트론의 건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 중인 1943년 11월경부터 조정을 시작하여, 1944년 2월 15일, 공기 중에 끌어낸 양성자 빔이 보라색으로 빛나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조정을 계속하여, 7월경부터 실제 연구를 시작했다.
1945년 4월 13일의 도쿄 대공습으로 RIKEN의 대부분의 시설이 피해를 입었다. 니시나의 집도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피해를 면한 RIKEN의 연구실로 거처를 옮겼다. 대형 사이클로트론은 피해를 면했고, 운전을 계속했지만 8월 15일 종전과 함께 정지했다. 그 해 11월, 대소 2대의 사이클로트론은 일본의 점령 통치를 담당한 연합군 최고 사령부 (GHQ/SCAP)에 의해 도쿄 만에 투기되었다.
2. 4. 일본 핵무기 프로그램 (2호 연구)
仁科 芳雄일본어는 1940년대 일본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2호 연구'를 주도했다. 1940년 4월, 야스다 다케오 육군 항공 기술 연구소 소장은 핵분열에 주목하여, 육군 항공 본부 소속의 스즈키 신자부로 중좌에게 우라늄을 사용한 신형 폭탄 개발 연구를 명령했다. 스즈키 중좌는 사가네 료키치 교수의 지도를 받아 1940년 10월 보고서를 제출했고, 야스다 중장은 오코치 마사토시 소장에게 연구를 의뢰, 최종적으로 니시나 연구실에 연구 과제가 위탁되었다.[23] 1941년 봄, 니시나 연구실에서 원자폭탄의 이론적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23]1942년 해군 기술 연구소에서도 원폭 연구를 시작하자, 니시나는 나가오카 한타로와 함께 이화학연구소 대표로 참여했다. 1941년 12월 8일, 육군에 의뢰를 받은 니시나는 이화학연구소의 다케우치 마사 연구원을 원자 폭탄 연구에 참여시켰다. 1943년 2월 28일, 다케우치 연구원은 수치 계산 보고서를 제출하여 이론을 실현에 가깝게 만들었다.
1943년 5월, 니시나 연구실은 우라늄 분리에 의한 원자폭탄 제조 가능성을 군에 제시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육군은 이 보고서에 따라 육군 항공 본부 직할로 연구를 계속했다. 니시나는 젊고 우수한 과학자들을 징집 해제 특권을 통해 모아 일본 원자 폭탄 개발을 진행했다. 이 개발은 니시나의 "니"를 따서 "2호 연구"라고 불렸다.[30]
1945년 미군의 공습으로 연구 설비가 소실되어 일본의 원폭 개발은 중단되었다. 같은 해 8월 6일, 히로시마시에 "신형 폭탄"이 투하되자, 8월 8일 정부 조사단의 일원으로 현지 피해를 조사하고, 렌트겐 필름이 감광된 것을 통해 원자폭탄임을 확인하고 정부에 보고했다. 이 조사 노트는 "니시나 노트"로 불린다.[23] 계속해서 8월 9일에 나가사키에 투하된 두 번째 원폭도 8월 14일 현지 조사를 통해 원폭임을 확인했다.
2. 5. 전후 활동
1945년 11월 22일 미군 점령군은 그의 사이클로트론을 해체하고 부품을 도쿄 만에 버렸다. 이 사건은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6] 니시나는 이후 사이클로트론 파괴에 대한 자신의 반응에 대한 기사를 발표했다.[7]미국 물리학자 해리 C. 켈리(Harry C. Kelly)와 제럴드 폭스(Gerald Fox)가 점령군에 합류했다. 켈리는 1950년까지 머물며 영어를 구사하는 니시나와 친구가 되었다. 미군은 니시나의 이름을 포함한 일본 과학자들의 숙청 명단을 작성했으나, 켈리는 니시나를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국제적인 학자"이자 "전쟁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인물로 평가하며 숙청에 반대했다.[8]
니시나는 전후 일본 과학 재건을 위해 노력했고, 켈리에게서 동지를 찾았다. 니시나는 비군사적 목적의 연구를 위한 방사성 동위원소 확보와 이화학연구소(RIKEN) 보존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1946년 이화학연구소 소장이 되었고,[9] 1948년에는 주식회사 과학연구소(현 카켄제약)를 설립하여 초대 사장이 되었다. 또한 일본학술회의 제1기 부회장을 역임했다.
1951년 간암으로 사망했다.[10] 니시나의 장례는 도쿄 다마 묘지에서 치러졌으며, 그의 친구이자 동료인 해리 켈리도 니시나의 묘 옆에 안장되었다.[11]
3. 연구 업적
1930년 11월 도쿄대학교 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1년 7월 리켄에 '니시나 연구실'을 설치하고, 양자론, 원자핵, X선 등을 연구했다. 1932년 중성자가 발견되자 X선 대신 우주선을 연구 대상에 추가했다.
클라인-니시나 공식을 공동 저술했으며, 우주선과 입자 가속기 개발을 위해 RIKEN에서 여러 개의 사이클로트론을 제작했다. 특히 우주선에서 칼 데이비드 앤더슨과는 별개로 뮤온을 발견했다.[10]
1938년 3월부터 삼산화우라늄(천연 우라늄)에 고속 중성자를 조사하는 연구를 시작하여[23], 1940년에 우라늄-237을 발견하고, 93번 원소인 넵투늄 237이 생성됨을 보였다. 또한 루테늄(Ru), 로듐(Rh), 팔라듐(Pd), 은(Ag), 카드뮴(Cd), 인듐(In), 주석(Sn)의 7원소 생성물로 대칭 핵분열을 발견했다.[30] 넵투늄 237은 핵무기의 폭발에 의해 생성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31]
일본에서 양자역학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우주선 및 입자 가속기 관련 연구로 실적을 올렸다. 니시나는 유카와 히데키, 도모나가 신이치로 등, 후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길러내 "일본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1955년 원자물리학과 그 응용 분야의 진흥을 목적으로 한 니시나 기념 재단 (仁科記念財団) 이 설립되었으며, 이 재단에서는 매년 원자물리학과 그 응용에 관해 뛰어난 실적을 올린 연구자에게 니시나 기념상을 수여하고 있다.
3. 1. 클라인-니시나 공식
니시나는 클라인-니시나 공식을 공동 저술했다.[10] 타마키 히데히코는 이를 "디랙의 상대론적 전자론에 의해 X선의 콤프턴 산란의 유효 단면적을 계산한 것으로, 이는 디랙 이론의 난점으로 여겨지던 음에너지 상태를 고려해야 할 필요성을 최초로 예시한 것으로 큰 의의를 가진다"라고 평가했다.3. 2. 사이클로트론 개발
1937년 4월, 니시나 요시오는 일본 최초의 소형 27인치 사이클로트론(핵 입자 가속 장치)을 완성하고 실험을 시작했다.[18] 1939년 2월에는 200톤의 대형 사이클로트론 본체를 완성했으며, 1944년 1월부터 실험을 시작했다.[10]1935년, 미쓰이 보은회, 도쿄 전등 주식회사, 일본 무선 전신 주식회사 등의 기부로 리켄(理研)에 원자핵 실험실이 설립되어 원자핵과 방사선 생물학 연구를 수행하였다.[17] 리켄의 소형 사이클로트론은 주기율표 상의 원소를 중성자로 조사하여 방사성 핵종의 성질을 연구하고, 우라늄 237의 존재[21][22] 및 우라늄 235의 대칭 핵분열을 발견[23][24]하는 등 많은 성과를 냈다. 또한, 누에에 중성자와 감마선을 쏘아 생물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기도 했다.
니시나는 소형 사이클로트론 완성 무렵부터 대형 사이클로트론 건설을 구상했다.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어니스트 로렌스도 대형 사이클로트론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전자석은 미국 해군에 2대 묶어서 주문하는 것이 저렴하여 로렌스에게 의뢰했다.[17] 1938년 중반 전자석이 리켄에 도착했지만, 예상 성능이 나오지 않아 1940년 리켄 연구원들이 로렌스에게 파견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미일 관계 악화로 인해 로렌스를 만나지 못하고, 설계도 복사 약속도 취소되었다.[25]
리켄은 연구원들이 가져온 정보를 바탕으로 대개조를 진행했다. 진공 기술 미숙과 전자 결합 방식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상대성 이론에 따른 입자 질량 증가를 고려하여 Dee에 더 높은 전압을 걸 수 있는 구조를 채택했다.[28][29]
태평양 전쟁 중인 1944년 2월, 대형 사이클로트론 조정을 통해 양성자 빔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7월부터 실제 연구를 시작했다. 이 연구는 2호 연구의 일부였다.[27] 당시 연구는 다음과 같다.[28]
제목 | 연구자 |
---|---|
방사성 동위 원소의 야광 도료에의 응용 | 신마 케이조 |
알파선원으로서 인공 폴로늄의 연구 | 스기모토 아사오 |
중성자에 의한 U-235 의 존재비 측정 | 야마자키 후미오 |
열중성자에 의한 U-235 분열의 연구 | 신마 케이조 |
U에 의한 늦은 중성자의 포획 연구 | 타지마 에이조 |
U에 의한 열중성자의 흡수 연구 | 스기모토 아사오 |
1945년 도쿄 대공습으로 리켄 시설 대부분이 피해를 입었으나, 대형 사이클로트론은 피해를 면하고 운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종전 후 연합군 최고 사령부(GHQ/SCAP)에 의해 도쿄 만에 투기되었다.[25]
3. 3. 핵물리학 연구
1930년 11월 도쿄대학교에서 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1년 7월, 리켄에 '니시나 연구실'을 설치하고 양자론, 원자핵, X선 등을 연구했다. 1932년 중성자가 발견되자, X선 대신 우주선을 연구 대상에 추가했다.[10]니시나는 클라인-니시나 공식을 공동 저술했으며, 우주선과 입자 가속기 개발을 위해 RIKEN에서 여러 개의 사이클로트론을 제작했다. 특히 우주선에서 뮤온을 발견했는데, 이는 앤더슨 외의 연구와는 별개였다.[10]
1938년 3월부터 삼산화우라늄(천연 우라늄)에 고속 중성자를 조사하는 연구를 시작하여[23], 1940년에 우라늄-237을 발견하고, 93번 원소인 넵투늄 237이 생성됨을 보였다. 또한 루테늄(Ru), 로듐(Rh), 팔라듐(Pd), 은(Ag), 카드뮴(Cd), 인듐(In), 주석(Sn)의 7원소 생성물로 대칭 핵분열을 발견했다.[30] 넵투늄 237은 핵무기의 폭발에 의해 생성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31] 그는 우라늄-237 동위원소를 발견했으며, 우라늄에 대한 고속 중성자 조사가 일어나는 대칭 핵분열 현상 연구를 개척했다(1939–1940).[12]
3. 4. 우주선 연구
1932년 중성자가 발견되자 X선 대신 우주선을 연구 대상에 추가했다. 그는 우주선에서 칼 데이비드 앤더슨과는 별개로 뮤온을 발견했다.[10]4. 니시나 요시오와 한국
니시나 요시오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과학 발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의 물리학 연구에 영향을 주었으며, 해방 이후 한국 과학자들의 일본 유학 및 연구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1940년 11월, 이화학연구소는 황기 2600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구단의 군인회관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를 열었다. 이 강연회에서 니시나 요시오는 "방사성 인간" 공개 실험을 진행했다. 사이클로트론으로 중수소 원자핵을 가속하여 암염에 충돌시켜 얻은 방사성 나트륨 24(니시나는 "식염 인공 라듐"이라고 표현)를 물에 녹여, 니시나 연구실 직원에게 마시게 한 뒤 가이거 계수기로 방사선을 측정하는 실험이었다.[33] 이 실험은 "과학 마술"과 같은 평이한 과학 강연으로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았다.[33]
하지만, 니시나는 대일본제국 육군의 일본 원자 폭탄 개발 계획인 '2호 연구'에 참여했기에 일제의 전쟁 범죄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하위 섹션 내용 참고)
4. 1. 비판적 시각
니시나 요시오는 대일본제국 육군의 일본 원자 폭탄 개발 계획인 '2호 연구'에 참여했다.[4] 이 연구는 우라늄 분리를 통해 원자 폭탄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니시나는 이 연구에서 젊고 우수한 과학자들을 징집에서 해제하는 특권을 얻어 연구를 진행했다.[4]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된 후, 니시나는 현지 조사를 통해 원자 폭탄임을 확인하고 정부에 보고했다.[4]
이러한 니시나의 행적은 일제의 전쟁 범죄에 협력한 것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5. 유산
유카와 히데키, 도모나가 신이치로 등 노벨상 수상자들을 길러내 "일본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2]
1955년 원자물리학과 그 응용 분야의 진흥을 목적으로 한 니시나 기념 재단 (仁科記念財団) 이 설립되었으며, 이 재단에서는 일본에서 매 해마다 원자물리학과 그 응용에 관해 뛰어난 실적을 올린 연구자에게 니시나 기념상을 수여하고 있다.
달의 크레이터 "Nishina"는 그를 기려 명명되었다. Nishina의 직경은 약 65km로, 위도 44.6S, 경도 170.4W에 위치한다. 또한 이화학연구소가 3번의 생성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113번 원소에 대해, 명명권을 얻게 될 경우의 안으로 니시나를 기린 '니시나늄' 등이 검토되었다[38]。
이화학연구소에는 니시나 요시오 기념실이 설치되어 있다.
6.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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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元素113番、日本の発見確実に 合成に3回成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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