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라노 다다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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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라노 다다모리는 헤이안 시대 후기의 무장으로, 시라카와 법황과 도바 상황을 섬기며 권력을 얻었다. 그는 1108년부터 1129년까지 시라카와 인세이 시기에 검비위사, 호키노카미 등을 역임하며 교토의 치안 유지와 해적 토벌에 기여했다. 1129년 도바 인세이 시기에는 도바 상황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비젠노카미, 하리마노카미 등을 거쳐 구교 승진을 눈앞에 두었으나 1153년 사망했다. 그의 아들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이후 헤이케 정권을 수립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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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라노 다다모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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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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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다이라노 다다모리 (平 忠盛) |
출생 | 1096년 |
사망 | 1153년 2월 10일 |
국적 | 일본인 |
아버지 | 다이라노 마사모리 |
배우자 | 기온노 뇨고 |
자녀 | 다이라노 기요모리 다이라노 쓰네모리 다이라노 노리모리 다이라노 다다노리 |
관직 정보 | |
주군 | 시라카와 천황 호리카와 천황 도바 천황 스토쿠 천황 고노에 천황 |
가문 | 간무 헤이시고레히라류 반도 헤이시계 이세 헤이시 |
아버지 | 다이라노 마사모리 |
형제자매 | 다다모리 사다마사 다다마사 도키모리 노리노부 미나모토노 요시타다 부인 후지와라노 기요타카 부인 다이라노 마사코 (와카사노 쓰보네) 야마토 히고 |
정실 | 후지와라노 무네코(이케젠니) |
부인 | 기온 뇨고의 여동생?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생모?) 미나모토노 노부마사의 딸 후지와라노 이에타카의 딸 후지와라노 다메타다의 딸 (미네노 다카나리의 딸) |
자녀 | 기요모리 (시라카와인의 양자?) 이에모리 쓰네모리 교모리 요리모리 다다노리 기타 후지와라노 지카마사 부인 미나모토노 아리후사 부인 후지와라노 다카노리 부인 후지와라노 아키토키 부인 미나모토노 마사시게 부인 |
관위 | 정4위상, 형부경 |
2. 생애
다이라노 마사모리의 아들로 태어난 다이라노 다다모리는 덴닌 원년(1108년) 13세에 사에몬노쇼조가 된 것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쳤다. 덴에이 4년(1113년)에는 도적을 잡아 종5위하에 서임되었고, 겐에이 2년(1119년)에는 가모 임시 축제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호안 원년(1120년) 에치젠노카미로 재임 중 엔랴쿠지와 갈등을 겪었으나, 시라카와 법황의 옹호로 무사히 넘어가기도 했다.
다이지 2년(1127년) 종4위하에 서임된 후 비젠노카미가 되었고, 다이지 4년(1129년)에는 산요도·난카이도의 해적 추토사로 발탁되어 시라카와 법황의 후원을 받았다. 시라카와 법황 붕어 후에는 도바 상황의 원정에서 정4위하에 서임되었고, 덴쇼 2년(1132년)에는 도쿠초주인 낙성 공양에 기여하여 내승전을 허가받았다. 나카미카도 무네타다는 이를 파격적인 대우라고 평했다.[8]
호엔 원년(1135년) 세토 내해 해적 토벌에 공을 세웠고,[11] 덴요 원년(1144년) 정4위상에 서임되어 오와리노카미가 되었다. 규안 2년(1146년) 하리마노카미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아들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기온 투란 사건으로 위기를 겪었지만 도바 법황의 도움으로 무마되었다. 닌페이 원년(1151년) 교부쿄가 되었고,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그의 경력을 인정했다.[12] 닌페이 3년(1153년), 다다모리는 공경 승진을 앞두고 58세로 사망했다.
다다모리의 관직 이력은 다음과 같다.
시기 | 관직 |
---|---|
덴닌 원년(1108년) | 사에몬노쇼조 |
덴에이 2년(1111년) | 검비위사 겸임 |
덴에이 4년(1113년) | 종5위하 서위 |
에이큐 5년(1117년) | 호키노쿠니 카미, 우마노곤노카미 겸임 |
호안 원년(1120년) | 에치젠노카미 |
다이지 2년(1127년) | 종4위하, 비젠노카미, 사마노곤노카미 겸임 |
다이지 4년(1129년) | 종4위상 |
다이지 5년(1130년) | 정4위하 |
덴쇼 2년(1132년) | 내승전 허가 |
초쇼 4년(1135년) | 나카쓰카사다이후 전임, 해적 토벌 명 받음 |
호엔 2년(1136년) | 미사카노카미 |
덴요 원년(1144년) | 오와리노카미, 우쿄노다이부 겸임, 정4위상 |
큐안 원년(1145년) | 하리마노카미 |
큐안 4년(1148년) | 도바인 집사별당 |
큐안 5년(1149년) | 나이조노카미 겸임 |
닌페이 원년(1151년) | 교부쿄 전임 |
닌페이 3년(1153년) | 사망 |
2. 1. 시라카와 인세이 시기 (1108년 ~ 1129년)
다이라노 마사모리는 시라카와 법황을 북면 무사로서 섬기며, 미나모토노 요시치카 추토에서 무명을 떨쳤다. 한편으로 미나모토노 요시타다에게 딸을 시집보내는 등, 선행하는 군사 귀족인 가와치 겐지와도 연계를 도모했으며, 요시타다는 다다모리의 관례의 후견인이 되었다. 요시타다 사후에 가와치 겐지가 쇠퇴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이세 헤이시는 겐지의 세력을 따르면서 세력을 확장해 갔다.덴닌 원년(1108년), 다다모리는 13세에 사에몬노쇼조가 되었고, 덴에이 2년(1111년)에는 검비위사를 겸임하여, 교토의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 덴에이 4년(1113년)에는 도적인 나츠야키 다이후를 추포한 공으로 종5위하에 서임되었다. 같은 해 에이큐의 강소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우지로 출동하여 고후쿠지의 대중의 입경을 저지했다. 에이큐 2년(1114년), 시라카와 원의 총애를 받는 후궁인 기온노 뇨고에게 신선한 새를 헌상했고, 아버지에 이어 이 뇨고를 섬겼다. 그 후, 검비위사의 직을 떠나 호키노카미가 되었고, 우마노곤노카미도 겸임한다.
겐에이 5년(1117년), 도바 천황에게 입내한 후지와라 쇼시(다이켄몬인)의 만도코로 벳토가 된다. 다른 벳토에는 후지와라 나가자네나 후지와라 아키타카 등 시라카와 법황의 유력한 측근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었고, 법황의 두터운 신뢰를 엿볼 수 있다. 겐에이 2년(1119년) 11월 14일 가모 임시 축제에서는 신마이진으로 선발되었고, 그 화려한 모습은 "길에 꽃을 드리우고, 모든 일에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한다. 참으로 희대의 훌륭한 일이다"라며 주변을 경탄하게 했다. 호안 원년(1120년) 에치젠노카미로 전임되었는데, 재임 중에 에치젠국 쓰루가 군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여, 범인인 히에이 산사신인을 체포하여 검비위사에게 넘겨주는 과정에서, 엔랴쿠지의 악승이 범인의 신병을 탈취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조정이 악승을 체포하자 엔랴쿠지의 강소로까지 확대되었지만, 시라카와 법황은 타다모리를 옹호했다. 이때 원의 승전을 허락받고, 후지와라 무네코(이케노젠니)를 정실로 맞이한다.
다이지 2년(1127년), 종4위하에 서임되었고, 비젠노카미가 된다. 또한 사마노곤노카미를 겸임하고, 원의 우마 관리를 담당하는 인고노우마야시가 되었다. 마료와 인고노우마야는 직무 내용이 공통되기 때문에 겸임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전투에서의 기마의 중요성 관점에서 보면, 군사 귀족인 타다모리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 다이지 4년(1129년) 3월, 타다모리는 산요도·난카이도의 해적 추토사로 발탁된다. 이것은 정식 선지가 아닌 인젠과 검비위사 벳토센(벳토는 다이켄몬인의 오빠인 산조 사네유키)에 의한 것이며, 시라카와 법황의 강압적인 후원이었다고 생각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7월 7일, 시라카와 법황이 77세로 붕어했다. 타다모리는 법황의 장례에서 다른 측근들과 함께 입관역을 맡았고, 산사쿠쇼(화장장) 설치도 담당했다.
2. 2. 도바 인세이 시기 (1129년 ~ 1153년)
도바 상황(鳥羽上皇)이 원정(院政)을 시작하자 다이라노 다다모리(平忠盛)는 어급(御給)에 따라 정4위하(正四位下)에 서임되었다. 시라카와인(白河院)의 근신 대부분은 도바인의 근신으로 갈아탔고, 다다모리도 도바 상황 및 다이켄몬인(待賢門院)의 북면무사(北面武士)가 되었다. 원어구사(院御厩)의 직무도 그대로 맡는 것이 허락되었다. 시라카와 법황(白河法皇)이 붕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앞서 사망했다고 알려진 미나모토노 요시치카(源義親)를 자처하는 사람이 교토(京都)에 나타나 후지와라노 다다자네(藤原忠実)의 저택에서 보호를 받았는데 누군가의 습격으로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다다모리에게도 그 혐의가 추궁되었으나 진범은 미노 겐지(美濃源氏)의 미나모토노 미쓰노부(源光信)로 판명되었다.덴에이(天永) 2년(1132년) 상황 칙원(勅願)으로 세워진 관음당(観音堂)인 도쿠초주인(得長寿院)의 낙경공양(落慶供養)에 즈음하여 천체관음(千体観音)을 기진하였다. 그 공적으로 내승전(内昇殿)이 허가되었다.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에서는 무사인 다다모리가 덴조비토(殿上人, 당상관堂上官)가 된 것을 고깝게 본 구교(公卿)들에 의해 밤에 기습이 기도되었는데, 다다모리는 은박을 입힌 나무 칼로 구교들을 을러서 재치 있게 막아냈고 도바 상황으로부터 칭찬받았다(殿上闇討)는 일화가 실려 있다. 또한 도바 상황 앞에서 춤을 출 때 다다모리가 사시(斜視)인 것을 두고 구교들이 이세국(伊勢国)의 특산품인 「술 담는 질그릇」(酢瓶の瓶子)에 빗대어 사방에서 놀려댔으나 훌륭한 춤을 선보여 도리어 칭찬받았다는 이야기를 적고 있다. 한편 내승전(内昇殿)은 무사로써는 셋칸(摂関) 시기 미나모토노 요리미쓰(源頼光)의 전례가 있었을 뿐 이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인 대우였다. 나카미카도 무네타다(中御門宗忠)는 「이 사람(다다모리)의 승전이란 미증유의 일」(この人の昇殿猶未曾有の事なり, 『中右記』 3월 22일조)이라고 평하였다.[8]
이윽고 도바 법황의 총애가 후지와라노 도쿠시(藤原得子, 비후쿠몬인美福門院)으로 옮겨가고 후지와라노 이에나리(藤原家成)가 인의 근신의 필두 지위를 확립하게 되자 다다모리는 아내 무네코가 이에나리의 사촌 형제라는 점을 통하여 긴밀한 관계를 쌓았고, 도바 인세이 시기가 되어 장원(荘園) 정리가 전혀 실시되지 않아 각지에서 장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다다모리도 지방 고쿠시(国司)으로써 장원 확립에 관여하여 인 소유 장원인 히젠국(肥前国) 간자키 장원(神埼荘)의 예소(預所, 마름)가 되었고, 조쇼(長承) 2년(1133년) 송나라(宋)의 주신(周新)의 배가 일본으로 들어오자 인젠(院宣)을 칭하여 장원 내의 다자이후(大宰府)의 임검(臨検)을 배제시키게 하였다(『長秋記』 8월 13일조).[9]
니치소 무역(日宋貿易)은 당시 일본에서 민간에서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하카타(博多)에는 송에서 온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에치젠국(越前国)의 쓰루가(敦賀)까지 송의 배가 오기도 하였다. 다다모리는 에치젠노카미(越前守) 재임 중에 송과의 교역에서 오는 막대한 이익에 주목하였고 사이고쿠(西国) 방면으로의 진출을 지향하게 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호엔(保延) 원년(1135년) 주무쇼(中務省) 다이후(大輔)로 임명되었을 무렵, 일본의 내해로 송과의 교역로이기도 했던 세토 내해(瀬戸内海)에서의 해적(海賊)의 발호가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들 해적은 유력 재지영주, 신인(神人) ・ 봉어인(供御人) 특권을 얻은 연안 주민 등이 경제 활동의 와중에 약탈을 벌이는 케이스가 많았는데 고쿠가(国衙)의 힘만으로는 추토가 곤란하였다. 4월 8일 일본 서해의 해적 추토에 대해 다다모리와 미나모토노 다메요시(源為義) 가운데 누가 적당할 것인가에 대한 의론이 이루어졌는데 비젠노카미(備前守)를 지냈던 경험도 있는 데다 「서해에 그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다」(西海に有勢の聞こえあり)라는 이유로 다다모리가 추토사로 임명되었다(『中右記』『長秋記』).[10] 8월에는 히다카 젠시(日高禅師)를 수령으로 하는 70명의 해적들을 연행하여 교토로 개선하였다. 원래 그 대부분은 다다모리의 게닌(家人)이 아닌 자들을 도적으로 몰았던 것이라고 전한다(『中右記』 및 『長秋記』 8월 19일조).[11] 그리고 다다모리는 항복한 해적들을 자신의 게닌으로 조직화시켰다.
그 뒤 미마사카노카미(美作守)로 임명되었다. 호엔 5년(1139년) 벳토(別当) ・ 류가쿠(隆覚)의 임무 정지를 요구하여 고후쿠지(興福寺) 승도들이 강소(強訴)를 일으키자 우지시(宇治)로 출진하여 고후쿠지 승도들의 입경을 저지하였다. 덴요(天養) 원년(1144년) 정4위상으로 서임되었고 오와리노카미(尾張守)가 되었다. 다다모리는 도바 인초(院庁)의 4위 벳토(別当)로써도 활동하였다. 동료 후지와라노 다다타카(藤原忠隆)는 귀족이면서도 승마의 달인으로 의기투합한 바가 있는 자였는데 그 다다타카의 아들인 다카노리(隆教)는 다다모리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다다타카의 아내 ・ 에이코(栄子)는 스토쿠 천황(崇徳天皇)의 유모였고 다다모리의 처 ・ 무네코는 스토쿠 상황의 아들인 시게히토 친왕(重仁親王)의 유모였다. 도바 법황이 와카(和歌)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당시 일본의 와카 가단(歌壇)은 상대적으로 와카를 좋아했고 재능도 뛰어났던 스토쿠 상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다다모리 자신도 와카에 통달하여 자주 스토쿠 상황이 주최한 와카 모임에도 참가하였다. 스토쿠 상황에게 있어서 다다모리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규안(久安) 2년(1146년) 다다모리는 하리마노카미(播磨守)로 임명되었다. 하리마노카미는 일본에서 지방 수령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지위였고, 수령에서 구교(公卿)로 승진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이듬해(1147년) 6월 15일 아들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의 노토(郎党)가 기온샤(祇園社) 신인(神人)과 다툼이 벌어졌고 다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기온 투란 사건祇園闘乱事件). 다다모리는 곧 하수인을 게비이시(検非違使)로 인도하였는데 기온샤의 본사(本寺)인 엔랴쿠지(延暦寺)는 이를 받아 들이지 않고 다다모리 ・ 기요모리 부자의 유배를 요구하며 강소를 일으켰다. 다다모리에게 있어서는 큰 위기였으나 도바 법황은 다다모리가 가진 군사적 ・ 경제적 실력을 중시하여 엔랴쿠지의 요구를 듣지 않았다. 사건 뒤 다다모리는 이세국(伊勢国)에 있는 자신의 영지를 기온샤에 기진하여 엔랴쿠지와의 관계 수복을 도모하였다.
규안 4년(1148년) 후지와라노 다다타카가 구교로 승진하고 다다모리는 4위의 최상위자가 되어 이듬해인 규안 5년(1149년)에는 다다모리의 후임으로 내장두(内蔵頭)가 되었다. 그 해 3월 구마노(熊野) 참예 도중에 둘째 아들 이에모리(家盛)가 급서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다다모리는 이에모리의 죽음을 한탄하고 슬퍼하는 노래를 남겼다. 닌표(仁平) 원년(1151년) 형부경(刑部卿)이 되었다. 이 때 도바 법황에게 의견을 요구받은 좌대신 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頼長)는 「태생이 천하기는 하오나 정4위상 ・ 내장두 ・ 하리마노카미를 역임한 적이 있으니 괜찮으리다」(生まれは卑しいものの、正四位上・内蔵頭・播磨守を歴任しているので問題はない)라는 견해를 보였다(『台記別記』).[12]
닌표 3년(1153년) 다다모리는 구교(公卿) 승진을 눈앞에 두고 5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요리나가는 『우매기초』(宇槐記抄)에서 「여러 나라의 관리를 거쳐 부유함이 거만(巨万)을 쌓았고 거느린 노복이 나라에 가득하였으며 무위(武威)로 사람을 바로잡았다. 사람됨이 공검하여 일찍이 사치를 행하지 않아, 오늘날 사람들이 이를 애도한다」(数国の吏を経、富巨万を累ね、奴僕国に満ち、武威人にすぐ。人となり恭倹、いまだかつて奢侈の行いあらず、時人これを惜しむ)라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다이라노 마사모리 |
어머니 | 불명 |
정실 | 후지와라 무네코 (1104?-1164?) - 후지와라 무네카네의 딸 |
처 | 기온노 뇨고의 여동생? -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생모 추정 |
처 | 미나모토노 노부마사의 딸 |
처 | 후지와라 이에타카의 딸 |
처 | 후지와라 타메타다의 딸 |
처 | 요시미네노 타카나리의 딸 |
적자 | 다이라노 기요모리 (1118-1181) - 시라카와 원의 양자 추정 |
차남 | 다이라노 이에모리 (1123?-1149) |
삼남 | 다이라노 쓰네모리 (1124?-1185) |
사남 | 다이라노 노리모리 (1128-1185) |
오남 | 다이라노 요리모리 (1133-1186) |
육남 | 다이라노 다다노리 (1144-1184) - 요시미네노 타카나리의 딸의 자식이라고도 함 |
여자 | 미나모토노 마사시게의 아내 |
남자 | 다이라노 타다시게 |
여자 | 후지와라 친마사의 아내 |
여자 | 미나모토노 아리후사의 아내 |
여자 | 후지와라 타카무로의 아내 |
여자 | 후지와라 아키토키의 아내 |
4. 관련 작품
- 영화
- * 신·헤이케 이야기(1955년, 다이에이) - 배우: 오야 이치지로
- 텔레비전 드라마
- * 신·헤이케 이야기(1972년, NHK 대하드라마) - 배우: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 * 타이라노 키요모리(1992년, TBS) - 배우: 탄바 테츠로
- * 역사기행 헤이케 이야기의 사람들(2009년, TV 오사카) - 배우: 노무라 만사이
- * 타이라노 키요모리(2012년, NHK 대하드라마) - 배우: 나카이 키이치
- 라디오 드라마
- * 신·헤이케 이야기(1957년) - 배우: 시미즈 마사오
- 인형극
- * 인형 역사 스펙터클 헤이케 이야기(1993년) - 성우: 미타니 노보루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ford University Press
[2]
문서
源平盛衰記』によると、忠度のすぐ上の兄である六男の平忠重|忠重がいたと述べている。
[3]
문서
母親は藤原為忠の娘で忠度の同母姉妹。
[4]
문서
「'''忠'''」の字は義忠から与えられた偏諱と考えられる。
[5]
문서
『長秋記』3月14日条
[6]
문서
『中右記』11月19日条
[7]
문서
『朝野群載』巻11
[8]
문서
『中右記』3月22日条
[9]
문서
『長秋記』8月13日条
[10]
문서
『中右記』『長秋記』同日条
[11]
문서
『中右記』『長秋記』8月19日条
[12]
문서
『台記』別記
[13]
웹사이트
아자이 나가마사 항목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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