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오와리국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와리국(尾張国)은 일본의 옛 행정 구역으로, 현재의 아이치현 서부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일본 구석기 시대부터 정착이 이루어졌으며, 고대에는 야마토 씨족과 연관된 오와리 씨족이 거대한 고분을 축조했다. 아쓰타 신궁은 일본 삼종신기 중 하나인 쿠사나기의 검을 보관하고 있으며, 오와리국은 야요이 시대부터 고분 시대, 아스카 시대를 거쳐 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중세에는 가마쿠라 가도를 통해 동서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고, 센고쿠 시대에는 오다 씨가 실력을 키웠다. 근세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남이 영주가 되어 기요스 번이 성립되었고, 에도 시대에는 오와리 번이 도카이도의 중요한 거점으로 발전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나고야시가 지방 통치 거점 도시가 되었으며, 현재는 나고야시, 이치노미야시, 카스가이시 등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교통의 요충지이자 다양한 산업과 문화를 가진 지역으로 남아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와리국 - 기요스성
    기요스성은 시바 요시시게가 축성한 성으로 오다 가문의 거성이 되었으며, 오다 노부나가의 주요 활동 무대이자 기요스 회의가 열렸던 역사적인 장소이지만, 기요스 고에시로 인해 폐성된 후 일부 유적과 복원된 천수각을 통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오와리국 - 오케하자마 전투
    오케하자마 전투는 1560년 오다 노부나가가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기습하여 승리한 전투로, 이마가와 가문을 몰락시키고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 확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 도카이도 - 무사시국
    무사시국은 현재의 도쿄도, 사이타마현, 가나가와현에 걸쳐 있던 일본의 옛 행정 구역으로, 게노국과 통합되어 성립되었으며, 중세에는 무사 집단이 등장했고 근세에는 에도 막부의 중심지였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3개 현으로 나뉘었다.
  • 도카이도 - 이세국
    이세국은 현재의 미에현을 중심으로 아이치현과 기후현 일부를 포함하는 일본의 옛 행정 구역으로, 야마토 정권 시대부터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이세 신궁을 중심으로 신토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 나고야시의 역사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가마쿠라 막부를 개창하고 최초의 세이이타이쇼군이 된 무장으로, 헤이지의 난 이후 유배되었다가 반 다이라 씨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막부를 설립했으나, 권력 다툼과 낙마 사고사 등 논란 속에 일본 봉건 사회의 기틀을 마련했다.
  • 나고야시의 역사 - 도쿠가와 요시나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홉 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나오는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초대 당주로서, 오와리 번주 재임 동안 경제 발전, 문화 사업, 무예 연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오와리국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오와리국
일본어 표기尾張国 (おわりのくに)
별칭비슈 (尾州)
로마자 표기Owari no Kuni
소속
지역동해도
현재 지역아이치현 서부
국력상국
거리근국
행정 구역
8군 69향
주요 시설
국부아이치현이나자와시
국분사아이치현 이나자와시 (오와리국분사 터)
국분니사(추정) 아이치현 이나자와시
일궁마스미다 신사(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
오가미 신사(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

2. 역사

오와리국은 나라 시대 기록인 『구지기(古事記)』에 처음 언급되지만, 일본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오랜 역사를 가진 지역이다. 초기 기록에는 야마토 씨족과 연관된 강력한 "오와리 씨족"이 언급되며, 이들은 여러 지역에 고분(古墳)을 축조했다. 아쓰타 신사(熱田神宮)는 이세 신궁(伊勢神宮)과 중요성을 겨루며, 일본 삼종신기(三種の神器) 중 하나인 쿠사나기노츠루기(草薙剣)를 보관하고 있다.

가야쓰 신사


우쓰쓰 신사


『연희식(延喜式)』에 따르면, 오와리국은 해부군, 나카시마군, 하구리군, 단바군, 가스가이군, 야마다군, 아이치군, 지타군의 8개 군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이는 에도 시대까지 행정 구역으로 유지되었다. 국부(國府)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전통적으로 현재 이나자와시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치노미야(一宮)는 현재 이치노미야시에 위치해 있다.

헤이안 시대에는 지역 사무라이 씨족이 통제하는 장원(荘園)으로 나뉘었다. 센고쿠 시대에는 오다 씨(織田氏)가 지배하는 여러 작은 영토로 분열되었으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치하에서 재통합되었다. 노부나가는 기요스 성(清洲城)을 거점으로 일본 통일을 위한 원정을 시작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를 포함한 많은 가신들이 오와리 출신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오와리 지역을 아들 도쿠가와 요시나오(徳川義直)에게 봉토로 주었고, 619500곡의 오와리 번이 성립되었다. 요시나오는 오와리 도쿠가와 씨족을 창시했으며, 고산케(御三家) 중 하나로 쇼군(将軍)직 계승권을 가졌다. 나고야(名古屋)는 성곽 도시로 번영했고, 오와리 지역은 도자기 산업으로 유명했다.

동본업요(세토야키)


도영요(도코나메야키)


오와리 국분사 유적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오와리 번(尾張藩)과 이누야마 번(犬山藩)은 나고야 현(名古屋県)으로 개편되었고, 누카타 현(額田県)과 합쳐져 1872년 아이치 현(愛知県)이 되었다. 오와리라는 명칭은 1894년 일본과 미국, 영국 간의 조약에서 명시적으로 인정되었다.[3]

2. 1. 고대

오와리국은 적어도 일본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정착한 지역이다. 초기 기록에는 야마토 씨족과 연관된 강력한 "오와리 씨족"이 언급되어 있다.

7세기 후반의 목간에서는 오와리국(尾張国)과 오지국(尾治国)의 두 가지 표기가 보인다.[4] 헤이안 시대에 만들어진 『일본서기』 천손본기의 오와리씨(尾張氏) 계보에도 "오지(尾治)"라고 적혀 있다. 704년국인이 주조될 때 오와리(尾張)로 정해진 것으로 추정된다.[5]

『고사기전(古事記傳)』에는 "오와리국(尾張國), 지명의 유래를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어, 오와리라는 지명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

진청田신사(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


『연기식신명장』에는 대사 8좌 8사, 소사 113좌 113사의 총 121좌 121사가 기록되어 있다(「오와리국의 식내사 일람」참조). 대사 8사는 모두 명신대사이며, 다음과 같다.

군명신사명비고
나카지마군오오가미신사이치노미야시 하나이케에 위치
나카지마군오오진자이치노미야시 야마토초 오보에 위치
나카지마군진청다신사이치노미야시 마스미다에 위치
니와군오오카타신사이누야마시 미야야마에 위치
아이치군아츠타신궁나고야시 아쓰타구 신궁에 위치
아이치군히와리미코신사나고야시 아쓰타구 신궁에 위치, 아쓰타신궁 섭사
아이치군마고와키미코신사나고야시 아쓰타구 신궁에 위치, 아쓰타신궁 섭사
아이치군타카쿠라무스비미코신사나고야시 아쓰타구 타카쿠라초에 위치, 아쓰타신궁 섭사



『중세 제국 일궁제의 기초 연구』에 근거한 일궁 이하는 다음과 같다.[22]


  • 총사: 오와리 오오쿠니레이 신사(이나자와시 고후궁)
  • 일궁: 진청다신사(이치노미야시 마스미다) - 『십육야일기』에 “일궁이라는 신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이치노미야시의 오오가미신사도 오와리국 일궁을 자칭한다.
  • 이궁: 오오카타신사(이누야마시 미야야마)
  • 삼궁: 아츠타신궁(나고야시 아쓰타구 신궁) - 고대부터의 대사이지만, 일궁이 되지는 않았다고 여겨진다.[23]

2. 1. 1. 야요이 시대

아사히 유적 등 대규모 환호취락이 나타났다.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조상신으로 하는 오와리 씨가 이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야마토 왕권과 혼인 관계를 맺어 지배를 확립했다.

2. 1. 2. 고분 시대(야마토 시대)

야마토 씨족과 모호하게 연관되거나 동맹을 맺은 강력한 “오와리 씨족”이 여러 지역에 거대한 고분(古墳)을 축조하였다.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4세기에 해당하는 청동 유물과 거울을 발굴했다. 아쓰타 신사(熱田神宮)는 매우 오래된 기원을 가진 신사로, 이세 신궁(伊勢神宮)과 그 중요성을 겨루며, 일본 삼종신기(三種の神器) 중 하나인 쿠사나기노츠루기(草薙剣)를 보관하고 있다.

2. 1. 3. 아스카 시대


  • 645년(다이카 원년) 7월 14일 - 효토쿠 천황이 신에게 바칠 폐를 부과했다.[4]
  • 7세기에 조정에 의해 율령제가 시행되면서 오와리국조의 영역이 영제국인 오와리국의 범위가 된다.[4]
  • 660년대에는 국과 에 의한 지방 행정 구획이 시행되었으나, 본격적인 지방 행정 제도는 8세기 초에 지역을 국·군·리의 3단계로 구분하였다. 『연희식』 민부식에 따르면 오와리는 해부군, 나카시마군, 하구리군, 단바군, 가스가이군, 야마다군, 아이치군, 지타군의 8군이었다.
  • 663년 백강 전투 이후, 국제적인 위기에 직면하면서 국방력 증강을 위한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서쪽 지역으로 향하는 방인의 통행로가 되기도 했다.[4]


『절용집』에 따르면 오와리국은 비옥(지후토비)한 대상국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대부터 스에키, 도사기 등의 도자기 생산이 성행하였다. 그 풍부한 농업 생산력과 기나이로의 지리적 근접성을 배경으로 조정을 지탱하는 율령국으로 성장했다.

2. 1. 4. 나라 시대

741년(덴표 13년) 쇼무 천황의 국분사 건립의 칙령에 따라 오와리 국분사가 건립되었다. 속일본기에는 덴표쇼호 원년(749년) 5월 15일 조, 신고케이운 원년(767년) 5월 20일 조, 신고케이운 3년(769년) 9월 8일 조, 호케이 6년(775년) 8월 22일 조에 각각 관련 기록이 있다.[12]

일본기략 겐케이 8년(884년) 8월 26일 조에는 오와리 국분사가 소실되어 그 기능을 아이치군 정액사의 간코지(현재의 나고야시 나카구 오와리 겐코지 유적)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12] 발굴 조사에서도 소실 이후 존속은 확인되지 않았다.

  • 오와리 국분사터 (이나자와시 야아이정 시이노키): 국가 사적. 추정 사찰 영역은 동서 약 200m, 남북 약 300m 이상이며, 금당, 강당, 탑 유구가 확인되었다.


오와리 국분니사터는 이나자와시 호케지정으로 추정되나,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불명확하다.

2. 2. 중세

고대부터 기소가와(木曽川)·나가라가와(長良川) 유역을 중심으로 수리 사업이 진행되어 농지 개발이 이루어졌다. 이웃 나라인 미노국과 함께 농지 개발이 진행되면서, 오와리 국은 국토 면적은 작았지만 쌀 생산량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일찍부터 향상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교토에서 가마쿠라로 가는 가마쿠라 가도가 정비되면서 동서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6] 주요 경유지는 다음과 같다.

지역
구로다 (이치노미야시)
카야즈 (아마시)
후루와타 (나고야시 나카구)
나루미 (나고야시 미도리가오카구)



무로마치 시대 초기에는 미노국의 수호였던 도키씨 등이 오와리 국의 수호를 맡았다.[13] 1400년경 스바 요시시게(요시노리)가 오와리 수호에 취임했고, 1405년 기요스성(청주성)이 축성되었다.[13]

청주성(아이치현 청수시)
이후 센고쿠 시대에 이르는 150년간, 오와리는 아시카가 일문 수호이자 삼관령인 스파씨의 영토가 되었다.

1391년 치타군이, 1395년 카이토군의 분군 수호에 잇시키씨가 임명되었는데, 이는 당시 수호였던 도키씨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1430년 잇시키 요시쓰라가 아시카가 요시노리와 대립하여 카이토군이 몰수되었고, 오닌의 난에서 잇시키 요시나오가 서군에 가담했을 때 치타군도 무로마치 막부에 몰수되었다.[13]

센고쿠 시대에는 오닌의 난(応仁の乱)으로 오다(織田)씨 가문이 "야마토노카미(大和守)가(청주 오다씨(清洲織田氏))"와 "이세노카미(伊勢守)가(이와쿠라 오다씨(岩倉織田氏))"로 분열되어 오와리 지배를 놓고 다투었다.[5]

스바(斯波)씨는 양측을 교묘하게 조종했지만 실력을 잃었고, 스루가(駿府)의 이마가와(今川)씨 이마가와 우지치카(氏親)가 동오와리에 침공하여 나고야(那古野)성은 이마가와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5]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 시대에 "야마토노카미(大和守)가"의 가로(家老) 일족에서 갈라져 나온 "단조추(弾正忠)가"가 급성장하여 이마가와 우지토요(今川氏豊)로부터 나고야(那古野)성을 빼앗는 등 공적을 세웠다.[5]

2. 2. 1. 헤이안 시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생탄지로 여겨지는 아쓰타 신궁 다이구지 후지와라 씨의 별저 터 ()

2. 2. 2. 가마쿠라 시대

교토에서 가마쿠라가 있는 동국으로 가는 왕환도로서 가마쿠라 가도가 정비되면서 동서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6] 주요 경유지는 다음과 같다.

지역
구로다 (이치노미야시)
카야즈 (아마시)
후루와타 (나고야시 나카구)
나루미 (나고야시 미도리가오카구)


2. 2. 3. 무로마치 시대

무로마치 시대 초기에는 미노국의 수호였던 도키씨 등이 오와리 국의 수호를 맡았다.[13] 1400년경 스바 요시시게(요시노리)가 오와리 수호에 취임한다. 스바 요시시게의 아버지 스파 요시마사는 에치젠(후쿠이현)과 에치고(토야마현)의 수호였으며, 아버지로부터 에치젠 수호직을 물려받은 후, 오와리(아이치현)와 토토미(시즈오카현)의 수호가 된다. 그때 에치젠 시대부터의 측근인 카이씨, 오다씨, 니노미야씨 등이 오와리로 보내져 장원·공령에 급인으로 배치되었다. 1405년, 요시시게에 의해 기요스성(청주성)이 축성되었다.[13]

이후 센고쿠 시대에 이르는 150년간, 오와리는 아시카가 일문 수호이자 삼관령인 스파씨의 영토가 되었다.

1391년 치타군이, 1395년 카이토군의 분군 수호에 잇시키씨가 임명되었는데, 이는 당시 수호였던 도키씨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카이토군은 1430년 잇시키 요시쓰라가 아시카가 요시노리와 대립하여 몰수되었고, 치타군도 오닌의 난에서 잇시키 요시나오가 서군에 가담했을 때 무로마치 막부에 몰수되었다.[13]

2. 2. 4. 센고쿠 시대

오닌의 난(応仁の乱)으로 오다(織田)씨 가문은 "야마토노카미(大和守)가(청주 오다씨(清洲織田氏))"와 "이세노카미(伊勢守)가(이와쿠라 오다씨(岩倉織田氏))"로 분열되어 오와리(尾張) 지배를 놓고 다투었다.[5]

스바(斯波)씨는 양측을 교묘하게 조종했지만 실력을 잃었고, 스루가(駿府)의 이마가와(今川)씨 이마가와 우지치카(氏親)가 동오와리(東尾張)에 침공하여 나고야(那古野)성은 이마가와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5]

"야마토노카미(大和守)가"의 가로(家老) 일족에서 "단조추(弾正忠)가"가 갈라져 나왔고,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 시대에 급성장하여 이마가와 우지토요(今川氏豊)로부터 나고야(那古野)성을 빼앗는 등 공적을 세웠다.[5]

2. 3. 근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그의 아홉 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나오(徳川義直)에게 오와리 지역을 봉토로 주었다. 이로써 공식 수입 619,500 곡(石)의 오와리 번이 성립되었는데, 이는 막부 자체를 제외한 도쿠가와 씨 소유지 중 가장 큰 영지였다.[3] 요시나오는 오와리 도쿠가와 씨족을 창시했으며, 고산케(御三家) 중 하나로, 본가가 단절될 경우 쇼군(将軍)직을 계승할 상속권을 가지고 있었다.

도쿠가와 요시나오가 오와리에 입성한 후, 도카이도(東海道)의 중요 거점으로서 재정비가 이루어졌다. 1609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의향에 따라 폐성이 되어 있던 나고야성(名古屋城) 터에 나고야 성을 새로 축성하기로 결정되었다. 기요스 성(清洲城) 아래 마을은 통째로 이전되었고, 기요스 성의 자재는 나고야 성 축성에 재활용되었다(기요스고시). 오와리 번(尾張藩)은 도쿠가와 고산케의 으뜸으로 쇼군(将軍)가에 이은 특별한 지위에 놓였으며, 그 성 아래 마을인 나고야는 에도 시대 중기 무렵에는 삼도에 버금가는 대도시가 되었다.

나고야(名古屋)는 이 기간 동안 번영했고, 오와리 지역은 특히 도자기 산업으로 유명했다. 1730년, 7대 오와리 번주 도쿠가와 무네하루(徳川宗春)는 축제를 장려하고 시바이야(연극 극장)와 유곽을 만드는 것을 허가하여 다양한 문화가 성행했다. 산업 면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요시나오에게 혼례 축하 선물로 기소 산맥(木曽山脈)이 주어졌던 것에 의해 목재가 나고야에 집적되어 목공 산업이 성행했다. 지타반도(知多半島)에서는 양조업이 성행하여, 나다(灘)에 버금가는 술 생산지였다고 한다. 동시에 해운업도 발전하여 오슈카이센(尾州廻船)이 활약했다.

오와리 번의 표면적인 녹봉은 약 62만 석이지만, 실질적인 녹봉은 100만 석 이상이었다고 여겨지며, 전국적으로 보아도 매우 부유한 번이었다. 그러나 잇따른 기근과 재해 등의 천재로 인해 적자 체질이 되어 갔다.

1849년(가에이(嘉永) 2년), 지번(支藩)・다카스번(高須藩)에서 14대 번주 도쿠가와 요시카쓰(徳川慶勝)가 취임한다. 요시카쓰는 존황양이(尊皇攘夷)를 주장하고, 질소검약으로 번정을 개혁했다.

2. 3. 1.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시바 씨(斯波氏)를 후원하고 오다 가문을 통일했다. 1560년(에이로쿠 3년) 6월 12일,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를 패배시켰다. 1582년(덴쇼(天正) 10년),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이 발생하고 노부나가와 노부타다는 함께 전사했다.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서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를 무찌른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와 오다 가 중신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가 기요스 회의(清洲会議)에서 대립했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카쓰(織田信雄)를 주군으로 옹립하고, 이에 이의를 제기한 고베 노부타카(神戸信孝)와 시바타 가쓰이에는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멸망했다. 노부카쓰는 히데요시에게 퇴거당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동맹을 맺었다.

도요토미 정권하의 오와리 국은 당초 오다 노부카쓰가 통치했다. 1586년(덴쇼 13년) 1월 18일, 노부카쓰는 나가시마 성(長島城)을 본거지로 하고 있었지만, 덴쇼 지진(天正地震)에 의해 나가시마 성이 붕괴됨에 따라 기요스 성(清洲城)을 대규모로 개수하여 본거지로 삼았다. 1590년(덴쇼 18년), 노부카쓰는 간토로의 전봉을 거부했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서 개역되었다.

1586년(덴쇼 14년) 기소가와(木曽川)의 "덴쇼 대홍수"로 미노 국과의 경계를 흐르던 기소가와가 하기리 군(葉栗郡) 내의 거의 중앙을 흐르게 되었다. 1589년(덴쇼 1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새로운 기소가와를 오와리 국과 미노 국의 경계로 했다.

1600년(게이초(慶長) 5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가 발생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공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사남 마쓰다이라 다다요시(松平忠吉)가 영주가 되고, 오와리 국 전역과 미노의 일부를 영지로 하는 기요스 번(清洲藩)이 성립했다.

2. 3. 2. 에도 시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치하에서 이 지역은 그의 아홉 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나오(徳川義直)에게 봉토로 할당되었으며, 공식 수입은 619,500 곡(石)로, 막부 자체를 제외한 도쿠가와 씨 소유지 중 가장 큰 영지였다.[3] 요시나오는 오와리 도쿠가와 씨족을 창시했으며, 이는 고산케(御三家) 중 하나로, 본가가 단절될 경우 쇼군(将軍)직을 계승할 상속권을 가지고 있었다. 성곽 도시 나고야(名古屋)는 이 기간 동안 번영했고, 오와리 지역은 특히 도자기 산업으로 유명했다.

도쿠가와 요시나오 입부 후, 도카이도(東海道)의 중요 거점으로서 재정비가 이루어졌다. 1609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의향에 따라 폐성이 되어 있던 나고야성(名古屋城) 터에 신성으로 나고야성의 축성이 결정되었다. 기요스 성(清洲城)하마을이 통째로 이전되었고, 기요스 성의 자재는 나고야 축성에 재활용되었다(기요스고시). 오와리 번(尾張藩)은 도쿠가와 고산케의 으뜸으로 쇼군(将軍)가에 이은 특별한 지위에 놓여, 그 성하마을인 나고야는 에도 시대 중기 무렵에는 삼도에 이은 대도시가 되었다.

1730년 9월, 7대 오와리 번주 도쿠가와 무네하루(徳川宗春)가 취임하자, 축제를 장려하고 시바이야와 유곽을 만드는 것을 허가하여 다양한 문화가 성행했다. 산업 면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요시나오에게 혼례 축하 선물로 기소 산맥(木曽山脈)이 주어졌던 것에 의해 목재가 나고야에 집적되어 목공 산업이 성행했다. 지타반도(知多半島)에서는 양조업이 성행하여, 나다(灘)에 이은 술의 생산지였다고 한다. 동시에 해운업도 발전하여 오슈카이센(尾州廻船)이 활약했다. 현대에도 나고야는 미소 문화로 여겨지며, 독특한 식문화로 인식되고 있다.

오와리 번의 표면적인 녹고는 약 62만 석이지만, 실질적인 녹고는 100만 석 이상이었다고 여겨지며, 전국적으로 보아도 매우 부유한 번이었다. 잇따른 기근과 재해 등의 천재에 의해 적자 체질이 되어 갔다. 10대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徳川斉温)에서 13대 번주 도쿠가와 요시타다(徳川慶恕)까지 쇼군가 주변으로부터의 양자가 계속되었다.

1849년(가에이(嘉永) 2년), 지번(支藩)・다카스번(高須藩)에서 14대 번주 도쿠가와 요시카쓰(徳川慶勝)가 취임한다. 요시카쓰는 존황양이(尊皇攘夷)를 주장하고, 질소검약으로 번정을 개혁한다. 1858년(안세이(安政) 5년) 안세이 대옥(安政の大獄)에서 은거금신을 명령받고, 실제 동생인 도쿠가와 시게토쿠(徳川茂徳)에게 번주의 자리를 양보한다.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사쿠라다몬 밖의 변(桜田門外の変)에서 사망하자 요시카쓰는 14대 쇼군・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의 보좌역으로 발탁되어, 시게토쿠 은거에 따라 요시카쓰의 실자 도쿠가와 요시타다가 16대 번주가 된다. 공무합체파의 중진이 된 요시카쓰는 유한 연합으로 이루어지는 산쥬회의의 일원으로 선택되었지만 사퇴한다. 제1차 장수정벌에서는 정토군 총독(대참모에 사쓰마번사・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을 명령받고,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교토(京都)에 개선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제2차 장수정벌에는 반대 입장을 취한다.

2. 4. 근대

1868년 2월 17일(게이오 4년 1월 24일) - 어붙가로 나리세씨 영지가 이나야마 번, 다케고시씨 영지가 미노 이마오 번으로 각각 입번하였다.[3]

1871년 8월 29일(메이지 4년 7월 14일) - 폐번치현에 의해, 나고야현, 이나야마현, 이마오현이 설치되었다.[3]

1872년

  • 1월 2일(메이지 4년 11월 22일) - 제1차 부현 통합에 의해, 오와리 국 전역이 나고야현의 관할이 되었다.[3]
  • 5월 8일(메이지 5년 4월 2일) - 아이치현으로 변경되었다.[3]

2. 4. 1. 메이지 시대

메이지 유신으로 중앙집권 국가가 형성되면서 나고야시는 메이지 정부의 지방 통치 거점 도시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1867년 11월 9일(경응 3년 10월 14일) 대정봉환이 이루어지자 도쿠가와 게이쇼는 신정부 의정으로 임명되어, 도쿠가와 15대 쇼군 도쿠가와 케이키에게 관직 사퇴와 영지 반환을 통고하는 역할을 맡았다.[3]
  •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구막부군이 패전한 후에는 신정부의 일원으로 오사카성을 수령했다. 이후, 번 내부에서 조정파와 막부파의 대립이 격화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번으로 돌아와 막부파를 탄압했다.(청송엽 사건) 1870년(메이지 3년) 초대 나고야 번주가 되었으나, 이듬해 폐번치현으로 면직되었다.[3]
  • 1875년(메이지 8년) 도쿠가와 기요스케가 병사하자 게이쇼가 오와리 도쿠가와가를 계승하여 제17대 당주가 되었다. 이처럼 삼가의 으뜸이면서 최고 권력자였던 도쿠가와 케이카쓰가 초기부터 메이지 신정부에 참여함으로써 오와리 국은 보신 전쟁의 참화를 입지 않았다.[3]

참고로 나고야성은 게이쇼의 제안으로 파괴 및 금붕어의 헌상이 신청되었다.

이후, 나고야 별궁은 1930년(쇼와 5년)에 폐지되어 궁내성에서 나고야시에 하사되었다. 한편, 성 내에는 1872년(메이지 5년) 도쿄진대 제3분영이 설치되었다. 1873년(메이지 6년)에는 나고야진대가 되었고, 1888년(메이지 21년)에는 제3사단으로 개편되어 태평양 전쟁 패전까지 주로 병기고로 활용되었다. 이 때문에 미군의 나고야 대공습에서 소이탄의 직격탄을 맞아 소실되었다. 천수각은 지역 상점가의 노력과 전국 각지의 기부로 1959년(쇼와 34년)에 재건되어 복원된 금붕어와 함께 나고야시의 상징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3]

  • 1868년 2월 17일(게이오 4년 1월 24일) - 어붙가로 나리세씨 영지가 이나야마 번, 다케고시씨 영지가 미노 이마오 번으로 각각 입번하였다.[3]
  • 1871년
  • * 8월 29일(메이지 4년 7월 14일) - 폐번치현에 의해, 나고야현, 이나야마현, 이마오현의 관할이 된다.[3]
  • * 1872년 1월 2일(메이지 4년 11월 22일) - 제1차 부현 통합에 의해, 전역이 나고야현의 관할이 된다.[3]
  • 1872년 5월 8일(메이지 5년 4월 2일) - 아이치현의 관할이 된다.[3]

3. 영역

메이지 유신 직전의 오와리국 영역은 현재의 아이치현 나고야시, 세토시, 오와리아사히시, 나가쿠테시, 닛신시, 아이치군 (도고정), 도요아케시, 이누야마시, 고마키시, 가스가이시, 니시카스가이군 (도요야마정), 니와군 (후소정·오구치정), 고난시, 이와쿠라시, 기타나고야시, 기요스시, 아마시, 쓰시마시, 가이후군 (오지정·가니에정·도비시마촌), 오부시, 한다시, 도카이시, 지타시, 도코나메시, 지타군 (히가시우라정·아쿠히정·무토요정·미하마정·미나미치타정) 전역, 이치노미야시의 대부분(동가가노이 일부 제외[7]), 이나자와시의 대부분(소부에정 주마치노·소부에정 우마카이 및 소부에정 소부에 일부 제외[8]), 아이사이시의 대부분(후쿠하라신덴정 일부 제외[9]), 야토미시의 대부분(고메이·고메이정·고지마정·가와라케·가이나·가이나쿠로지정·미요시·미요시정·도미시마·도미시마정·나카하라·나카하라정·이나리자키·가이나야마정·이나리자키정·사카이정 및 가와히라 일부·에비에 일부·에이나미정 일부 제외[10]), 기후현 가이즈시 일부(가이즈정 고마가에 일부[11])에 해당한다.

4. 군


  • 지타군(知多郡). 원래는 지타군(智多郡)이라 적었다.
  • 아이치군(愛知郡). 원래는 아이치군(愛智郡)이라 적었다.
  • 春日井郡|가스가이군일본어(春日井郡). 원래는 "가스가베군"(春部郡)이다.
  • 니와군(丹羽郡)
  • 葉栗郡|하구리군일본어(葉栗郡)
  • 中島郡|나카시마군일본어(中島郡)
  • 海東郡|가이토군일본어(海東郡). 메이지 시대에 아마군(海部郡)이 되었다.
  • 海西郡|가이사이군일본어(海西郡). 메이지 시대에 아마군이 되었다.
  • 山田郡 (尾張国)|야마다군일본어(山田郡). 전국 시대에 가스가이군과 아이치군으로 분할 편입되어 소멸되었다.

5. 시설



'''엔기시키내사'''

:『엔기시키신명장』에는 대사 8좌 8사, 소사 113좌 113사의 총 121좌 121사가 기록되어 있다(오와리국의 식내사 일람 참조). 대사 8사는 모두 명신대사로, 아래 표와 같다.

군명신사명비정사비고
나카지마군오가미신사오가미 신사 (이치노미야시 하나이케)
나카지마군타이신사오진자 (이치노미야시 야마토초 오보)
나카지마군마스미다신사마스미다 신사 (이치노미야시 마스미다)
니와군오가타신사오가타 신사 (이누야마시 미야야마)
아이치군아쓰타신사아쓰타 신궁 (나고야시 아쓰타구 신궁)
아이치군히와리미코신사히와리미코신사 (나고야시 아쓰타구 신궁)아쓰타 신궁 섭사
아이치군마고와키미코신사마고와키미코신사 (나고야시 아쓰타구 신궁)아쓰타 신궁 섭사
아이치군타카쿠라무스비미코신사다카쿠라무스비미코 신사 (나고야시 아쓰타구 타카쿠라초)아쓰타 신궁 섭사



'''총사・일궁 이하'''

:『중세 제국 일궁제의 기초 연구』에 근거한 일궁 이하의 목록은 아래 표와 같다.[22]

구분신사명비고
총사오와리 오쿠니레이 신사(이나자와시 고후궁)
일궁마스미다 신사(이치노미야시 마스미다)초견은 1165년의 사료. 『십육야일기』에 “일궁이라는 신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이치노미야시의 오가미 신사도 오와리국 일궁을 자칭한다.
이궁오가타 신사(이누야마시 미야야마)초견은 1143년의 사료. 일궁도 이 무렵 정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삼궁아쓰타 신궁(나고야시 아쓰타구 신궁)고대부터의 대사이지만, 일궁이 되지는 않았다고 여겨진다. 그 이유에는 여러 설이 있다[23].


5. 1. 국부

국가(國衙)는 나카시마군(中島郡)에 있었다. 여러 후보지가 있으나, 현재는 이나자와시(稲沢市) 마쓰시타(松下)・고쿠후궁(国府宮) 지역이 유력시된다.

오와리(尾張) 국(國)가(衙) 터 비석(이나자와시(稲沢市) 마쓰시타(松下))


오와리 다이코쿠레이진자(尾張大国霊神社)(이나자와시(稲沢市))


지명을 단서로 다음 두 곳이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 이나자와시(稲沢市) 마쓰시타(松下)·고쿠후궁(国府宮)
  • : "국가(國衙)"라는 소지(小字)가 있으며(현재는 마쓰시타(松下) n丁目, 고쿠후궁(国府宮) n丁目), 근처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차례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목간이나 동인 등은 출토되었지만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추정 국(國)가(衙) 지역은 미야케가와(三宅川)의 자연 제방 위에 위치하며, 거의 정북 방향을 향하고 있다. 현재 마쓰시타(松下) 시민회관 부근에는 "오와리(尾張) 국(國)가(衙) 터" 비석이 세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소샤(総社)의 오와리 다이코쿠레이진자(尾張大国霊神社)가 있다. 덴포(天保) 15년의 마쓰시타무라(松下村) 그림에는 "나카시마군(中島郡) 국가(國衙) 쇼(庄) 마쓰바라고(松原郷) 마쓰시타무라(松下村) 그림"이라고 적혀 있으며, 중앙에는 "적염문(赤染衛門) 성터, 지금은 국가(國衙) 저택의 신당이라 부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20]
  • 이나자와시(稲沢市) 시모쓰마정(下津町)
  • : "히가시고쿠후(東国府)""니시고쿠후(西国府)"라는 소지(小字)가 있으며, 근처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 단계에서는 발굴 조사가 부족하기 때문에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21] 고고학·고대사학적으로는 마쓰시타(松下)설이 유력시되지만, 중세 무렵의 홍수로 인해 마쓰시타(松下)에서 시모쓰마(下津)(무로마치 시대에는 수호소도 있었다)로 이동했다고 추측하는 설도 있다.[21]

참고로 『세쓰요슈(節用集)』 에크린본(易林本)에는 해부군(海部郡)에 "부(府)"라고 기록되어 있다.

5. 2. 국분사・국분니사


  • 오와리 국분사터 (이나자와시 야아이정 시이노키): 국가 사적이다. 추정 사찰 영역은 동서 약 200m, 남북 약 300m 이상이며, 금당, 강당, 탑의 유구가 확인되고 있다. 『일본기략』 겐케이 8년(884년) 조에 따르면, 오와리의 본금광명사에 화재가 발생했기 때문에 아이치군 정액사인 원흥사(현 나고야시 나카구의 오와리 원흥사터)를 국분사로 했다고 한다. 이 오와리 원흥사는 10세기에 쇠퇴하여 폐사되었고, 그 후 국분니사가 승사로 전용되었다는 설도 있다.[4]
  • 이후 중세기의 변천은 불명이다. 현재는 창건 당시의 유구 북쪽에, 메이지 시대에 "엔쿄지"에서 개칭한 스즈오키야마 국분사(이나자와시 야아이정)가 법등을 계승한다.[4]
  • 오와리 국분니사터: 이나자와시 호케지정으로 추정되고 있다.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불명확하며, 호케지가 그 흔적이라는 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오와리 국분사터#오와리 국분니사 참조).[4]

5. 3. 신사



'''엔기시키내사'''

:『엔기시키신명장』에는 대사 8좌 8사, 소사 113좌 113사의 총 121좌 121사가 기록되어 있다(오와리국의 식내사 일람 참조). 대사 8사는 아래와 같으며, 모두 명신대사이다.

군명신사명비정사비고
나카지마군오가미신사오가미 신사 (이치노미야시 하나이케)
나카지마군타이신사오진자 (이치노미야시 야마토초 오보)
나카지마군마스미다신사마스미다 신사 (이치노미야시 마스미다)
니와군오가타신사오가타 신사 (이누야마시 미야야마)
아이치군아쓰타신사아쓰타 신궁 (나고야시 아쓰타구 신궁)
아이치군히와리미코신사히와리미코신사 (나고야시 아쓰타구 신궁)아쓰타 신궁 섭사
아이치군마고와키미코신사마고와키미코신사 (나고야시 아쓰타구 신궁)아쓰타 신궁 섭사
아이치군타카쿠라무스비미코신사다카쿠라무스비미코 신사 (나고야시 아쓰타구 타카쿠라초)아쓰타 신궁 섭사



'''총사・일궁 이하'''

:『중세 제국 일궁제의 기초 연구』에 근거한 일궁 이하의 일람[22]

구분신사명비고
총사오와리 오쿠니레이 신사(이나자와시 고후궁)
일궁마스미다 신사(이치노미야시 마스미다)초견은 1165년의 사료. 『십육야일기』에 “일궁이라는 신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같은 이치노미야시의 오가미 신사도 오와리국 일궁을 자칭한다.
이궁오가타 신사(이누야마시 미야야마)초견은 1143년의 사료. 일궁도 이 무렵 정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삼궁아쓰타 신궁(나고야시 아쓰타구 신궁)고대부터의 대사이지만, 일궁이 되지는 않았다고 여겨진다. 그 이유에는 여러 설이 있다[23].


5. 4. 수호소

가마쿠라 시대의 수호소 위치는 불명확하지만, 쇼군의 숙소로 반드시 가야즈가 지정되었고, 수호가 그 접대를 했다는 점에서 그 근처였다는 설이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무로마치 시대에는 시모쓰(이나자와시)에 있었다.

6. 현대의 오와리 지방

현대에도 "오와리(尾張)"를 지역명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며, 그 범위는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 오와리국(尾張国)과 같은 범위
  • 나고야시(현청 소재지)를 제외한 오와리국(尾張国) 범위: 수적 규모 등에서 나고야시를 별도로 기술하거나 조직을 편성할 때 "'''나고야·오와리'''(나고야 제외)" 등으로 구분한다.
  • 나고야시지타반도를 제외한 오와리국(尾張国) 범위: 지역성이나 문화 등에서 "'''나고야·오와리·지타'''"로 구분한다. 이 경우 오와리국(尾張国)을 세분화하면 지역 구분이 반드시 일정하지는 않지만, 구분 표기에는 오와리(尾張) 앞에 방향을 붙이거나 "오토(尾東)", "오사이(尾西)", "오호쿠(尾北)"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지타반도를 "남오와리(南尾張)"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오난(尾南)"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 지타반도만을 제외한 오와리국(尾張国) 범위: 기상주의보·경보의 지역 구분이나 지타 지역 안내 등에서 볼 수 있다. 이 경우 "'''오와리·지타(아이치현 서부·지타)'''"로 구분한다.


가스가이시(특례시)


한다시(계량특정시)

6. 1. 자치체

나고야시정령지정도시이다. 이치노미야시(기소가와 동쪽 기슭의 히가시카가노이 지역[24] 일부 제외)는 중핵시이다. 카스가이시는 특례시이며, 한다시는 계량특정시이다.

그 외의 자치체는 다음과 같다.

세토시, 오와리아사히시, 닛신시, 도요아케시, 오부시, 도카이시, 지타시, 도코나메시, 고마키시, 이누야마시, 고난시, 이와쿠라시, 이나자와시(소부에정 일부 제외), 쓰시마시, 아이사이시(기소가와 서쪽 기슭 일부 제외), 야토미시(나베타가와 유역 일부 제외), 아마시, 기타나고야시, 기요스시, 나가쿠테시, 아이치군 도고정, 지타군 히가시우라정, 아쿠히정, 무토요정, 미하마정, 미나미치타정, 니와군 오구치정, 후소정, 니시카스가이군 도요야마정, 가이후군 도비시마촌, 오지정, 가니에정

6. 2. 교통

현재는 나고야에서 도카이 지방, 긴키 지방(오사카 등), 간토 지방(도쿄 등)과 호쿠리쿠 지방(도야마 등)으로 향하는 도로와 철도 노선이 분기되어 교통의 요충지가 되고 있다.

6. 2. 1. 공항

6. 2. 2. 철도

6. 2. 3. 도로

; 유료도로

  • 동명고속도로
  • 명신고속도로
  • 중앙자동차도
  • 나고야고속도로
  • 나고야 제2환상자동차도
  • 동명한신자동차도
  • 도카이호쿠리쿠자동차도
  • 이세만간자동차도
  • 치타반도도로
  • 남치타도로
  • 치타반도횡단도로
  • 나고야세토도로


; 국도

국도 번호
국도 1호선
국도 19호선
국도 22호선
국도 23호선
국도 41호선
국도 153호선
국도 154호선
국도 155호선
국도 247호선
국도 248호선
국도 302호선
국도 363호선
국도 366호선


6. 2. 4. 항구

나고야항

6. 2. 5. 시외국번

시외국번
052 (나고야MA)
0561 (세토MA)
0562 (요코스카MA)
0567 (쓰시마MA)
0568 (카스가이MA)
0569 (한다MA)
0586 (이치노미야MA)
0587 (이치노미야MA)


6. 2. 6. 자동차 번호판


참조

[1] 서적 Owari Google books 2005
[2] 웹사이트 Kiyosu Castle http://www.city.kiyo[...] 2010-11-07
[3] 서적 A digest of international law as embodied in diplomatic discussions, treaties and other international agreements https://books.google[...] US Department of State 1906
[4] 논문 『古事記』と木簡に見える国名表記の対比 2012
[5] 논문 律令制国名表記の成立 塙書房 2001
[6] 논문 尾張国はもと東山道か 国書刊行会 1986
[7] 문서 1887년(明治20년)에 尾張国에 편입 1887
[8] 문서 1887년(明治20년)에 尾張国에 편입 1887
[9] 문서 1880년(明治13년)에 尾張国에 편입 1880
[10] 문서 1880년(明治13년)에 尾張国에 편입 1880
[11] 문서 1887년(明治20년)에 美濃国로 이관 1887
[12] 문서 願興寺比定地の尾張元興寺跡(名古屋市中区)の発掘調査では、10世紀以降に出土品は激減するため、この頃願興寺は廃寺に至ったと見られる。一方、国分尼寺は史料上で11世紀初頭までの存続が確認されるため、10世紀以降は尾張国分尼寺が国分寺に転用されたとする説がある 1989
[13] 논문 一色氏の分国・分郡における守護・〈郡主〉在職期間 戎光祥出版 2016
[14] 문서 これを記念して名古屋城前に加藤清正像が置かれている。一度も城主になったことのない人物が銅像として設置されている珍しい例
[15] 서적 尾張名古屋大百科 名古屋開府400年記念事業実行委員会
[16] 서적 知多半島なんでも事典 新葉館出版
[17] 웹사이트 知多の山車館 http://dashi-matsuri[...]
[18] 문서 茂徳と同様に慶勝の実弟。高須四兄弟の一人。
[19] 문서 幼少時の徳川家康を預かった圧田の名家(東加藤家)。
[20] 서적 近世村絵図-解説図 稲沢市教育委員会 1982
[21] 서적 中世諸国一宮制の基礎的研究 岩田書院 2000
[22] 서적 中世諸国一宮制の基礎的研究 岩田書院 2000
[23] 문서 当初、伊勢国における伊勢神宮と同様に別格で一宮とされなかったが、一宮・二宮が定められた後に三宮として追加されたという説、単に国府から遠かったためとする説、真清田神社の積極的な運動によって一宮になったとする説、一宮制度導入時に国司と熱田神宮が対立していた説など。
[24] 문서 旧中島郡加賀野井村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