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쿠라노 후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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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쿠라노 후쿠신은 무사시국 출신으로, 스모 실력으로 조정에 알려져 관직에 진출했다. 쇼무 천황, 고켄 천황, 준닌 천황, 도쿄 정권, 고닌 천황, 간무 천황 시대에 걸쳐 요직을 역임하며 실각 없이 활약한 인물이다. 덴표 10년(738년) 종육위상으로 시작하여 종3위까지 올랐으며, 법왕궁 대부를 겸임하기도 했다. 엔랴쿠 8년(789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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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쿠라노 후쿠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씨족 | 배나 공 → 왕 → 고려 아손 → 다카쿠라 아손 |
부모 | 아버지: 불명, 조부: 배나 후쿠토쿠 |
자녀 | 다카쿠라노 이시마로 |
상세 정보 | |
시대 | 나라 시대 |
출생 | 와도 2년 (709년) |
사망 | 엔랴쿠 8년 10월 8일 (789년 10월 30일) |
관위 | 종3위・탄정윤 |
주군 | 쇼무 천황 → 고켄 천황 → 준닌 천황 → 쇼토쿠 천황 → 고닌 천황 → 간무 천황 |
2. 경력
다카쿠라노 후쿠신은 쇼무 천황 때부터 간무 천황 때까지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활약한 인물이다. 그의 경력은 크게 조정 내에서의 승진과 지방관으로서의 활동으로 나눌 수 있다.
조정 내 경력후쿠신은 쇼무 천황의 총애를 받으며 덴표 10년(738년) 종육위상에서 외종오위하로 승진한 것을 시작으로, 덴표 20년(748년)에는 정오위상에 이르렀다.[2] 고켄 천황 즉위 후에도 종사위하·주에이쇼쇼 겸 시비쇼히에 임명되는 등[1] 요직을 두루 거쳤다. 준닌 천황 시대에는 신베 다이후와 나이쇼료를 역임했고, 도쿄 정권 하에서는 종삼위·조궁쿄에 서임되어 공경의 반열에 올랐다.[1] 진고케이운 원년(767년)에는 호오궁직의 장관인 호오궁 대부에 임명되었다.[1] 고닌 천황 시대에도 조궁쿄 직을 유지하며 요메이궁을 완성하는 데 공헌했다.[1]
지방관 경력후쿠신은 덴표쇼호 8년(756년) 무사시노카미에 임명되어, 공사가 지연되던 무사시국분사를 단기간에 완공하고 신라군을 설치하는 등[4] 뛰어난 행정 능력을 발휘했다. 덴표호지 7년(763년)에는 다지마노카미로 전임되었다.[1] 진고케이운 4년(770년)에는 무사시노카미에 재임명되었으며,[1] 호키 2년(771년) 무사시국을 도산도에서 도카이도로 이관하는 데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7] 엔랴쿠 2년(783년)에는 세 번째로 무사시노카미를 겸임했다.[1]
말년호키 10년(779년) 후쿠신은 '''고마'''라는 호칭 대신 다카쿠라노 아손으로 개성하기를 청하여 허락받았다.[1] 덴오 원년(781년) 단조인으로 옮겼으며, 엔랴쿠 4년(785년)에는 치사를 상표하여 은퇴했다. 엔랴쿠 8년(789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2. 1. 출신 배경 및 초기 활동
무사시국 고마군 출신으로, 소년 시절에 숙부 세나노 교몬을 따라 상경했다. 상경한 지 얼마 안 되어 저녁에 동료와 이소노카미 거리(이소노카미노 치마타, 가미쓰미치와 다쓰타 길의 갈림길, 야마토국야마베군 이소노카미 향 근처)에서 스모를 했는데, 힘을 교묘하게 써서 상대를 잘 넘어뜨렸다. 그 소문은 조정에까지 알려져, 소환되어 나이주쇼에 근시할 것을 명령받았기 때문에 후쿠신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1]。처음 우에이지 다이지에 임명되었고, 쇼무조 덴표 10년(738년) 종육위상에서 세 계단 승진하여 외종오위하에, 이듬해 덴표 11년(739년) 내위의 종오위하에 서임되었다. 덴표 15년(743년) 정오위하·슌구료에 서임되어 황태자 아베 내친왕을 섬겼다. 덴표 19년(747년)에는 동족 7명과 함께 공 성에서 왕(고니키시) 성으로 개성했다. 쇼무조에서는 천황의 총애를 받아 순조롭게 승진을 거듭하여[2], 덴표 20년(748년)에는 정오위상에 이르렀다.
2. 2. 쇼무 천황 시대
쇼무 천황 시대에 우에이지 다이지에 임명되었고, 덴표 10년(738년) 종육위상에서 세 계단 승진하여 외종오위하에 서임되었다.[1] 이듬해인 덴표 11년(739년)에는 내위의 종오위하에 서임되었다. 덴표 15년(743년) 정오위하·슌구료에 서임되어 황태자 아베 내친왕을 섬겼다. 덴표 19년(747년)에는 동족 7명과 함께 공 성에서 왕(고니키시) 성으로 개성했다.[2] 쇼무 천황의 총애를 받아 순조롭게 승진을 거듭하여[2], 덴표 20년(748년)에는 정오위상에 이르렀다.2. 3. 고켄 천황 시대
덴표 쇼호 원년(749년) 7월, 슌구료로서 섬겨온 아베 내친왕이 고켄 천황으로 즉위하자, 종사위하·주에이쇼쇼 겸 시비쇼히에 서임되었다.[1] 같은 해 11월 다이조사이에서 유키스기 국사에게 서위가 행해졌을 때, 스기국인 미노국의 원외개였던 후쿠신은 종사위상으로 승진하는 등 급속하게 승진했다.[1] 덴표 쇼호 2년(750년)에는 동족 5명과 함께 세나노 왕에서 고마노 아손으로 개성했다.[1]덴표 쇼호 8년(756년) 쇼무 상황이 붕어하자 산사쿠시를 맡았다.[1] 같은 해 지방관 겸무가 야마시로 수에서 무사시노카미로 옮겨졌는데, 무사시노카미 재임 중에[3] 당시 공사가 지연되어 미완성이었던 무사시국분사를 짧은 기간 안에 완공하고, 덴표 호지 2년(756년)에는 무사시 국내에 신라군을 설치했다.[4] 후쿠신은 레이키 2년(716년) 고마군 설치 당시 군사였던 고마노 와카미치와 동족으로 여겨졌으며, 후쿠신 자신도 무사시국 내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1] 덴표 호지 원년(757년) 정사위하에 서임되었다.[1]
같은 해 발생한 다치바나 나라마로의 난에서는, 반란 실행 시 적 측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치바나 나라마로 파의 가모노 가쿠다리가 사전에 무용이 뛰어난 자를 저택에 불러 술자리를 가졌는데, 후쿠신은 사카노우에노 가리타마로 등과 함께 초대되었다.[5] 결국 후쿠신은 후지와라 나카마로를 따라, 다치바나 나라마로 파의 오노노 아즈히토·고토모노 다다요리 등을 추포하여 사에이지후에 구금했다.[6]
2. 4. 준닌 천황 시대
덴표쇼호 원년(749년), 쇼무 천황의 총애를 받던 후쿠신은 슌구료로서 섬겨온 아베 내친왕이 고켄 천황으로 즉위하자 종사위하·주에이쇼쇼 겸 시비쇼히에 임명되었다.[1] 같은 해 11월 다이조사이에서 유키스기 국사에게 서위가 행해졌을 때, 스기국인 미노국의 원외개였던 후쿠신은 종사위상으로 승진했다.[1] 덴표쇼호 2년(750년)에는 동족 5명과 함께 세나노 왕에서 고마노 아손으로 개성했다.덴표호지 원년(757년) 다치바나 나라마로의 난에서는 후지와라 나카마로를 따라 다치바나 나라마로 파의 오노노 아즈히토, 고토모노 다다요리 등을 체포하여 사에이지후에 구금했다.[6]
준닌 천황 치세에는 덴표호지 4년(760년) 신베 다이후에 임명되었고, 이후 나이쇼료도 맡았다. 덴표호지 7년(763년) 다지마노카미로 지방관에 부임하여 덴표호지 8년(764년)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난에는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난이 끝난 직후 다지마노카미에 재임명되었다.
2. 5. 도쿄 정권 시대
쇼무조 덴표 10년(738년) 종육위상에서 세 계단 승진하여 외종오위하에, 이듬해 덴표 11년(739년) 내위의 종오위하에 서임되었다. 덴표 15년(743년) 정오위하·슌구료에 서임되어 황태자 아베 내친왕을 섬겼다. 덴표 19년(747년)에는 동족 7명과 함께 공 성에서 왕(고니키시) 성으로 개성했다. 쇼무조에서는 천황의 총애를 받아 순조롭게 승진을 거듭하여[2], 덴표 20년(748년)에는 정오위상에 이르렀다.덴표쇼호 원년(749년) 7월에 슌구료로서 섬겨온 아베 내친왕이 즉위(고켄 천황)하자, 종사위하·주에이쇼쇼 겸 시비쇼히에 서임되었고, 이어서 같은 해 11월의 다이조사이 때 유키스기 국사에게 서위가 행해져, 스기국인 미노국의 원외개였던 후쿠신은 종사위상으로 승진하는 등 급속하게 승진했다. 덴표쇼호 2년(750년) 동족 5명과 함께 세나노 왕에서 고마노 아손으로 개성했다.
덴표쇼호 8세(756년)에 쇼무 상황의 붕어에 따라 산사쿠시를 맡았다. 같은 해 지방관의 겸무가 야마시로 수에서 무사시노카미로 옮겨졌지만, 무사시노카미 재임 중에[3] 당시 공사가 지연되어 미완성이었던 무사시국분사를 짧은 기간 안에 완공하고, 덴표호지 2년(756년)에는 무사시 국내에 신라군을 설치했다[4]。후쿠신은 레이키 2년(716년)의 고마군 설치 당시의 군사였던 고마노 와카미치와 동족이라고 여겨졌으며, 후쿠신 자신도 동국 내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덴표호지 원년(757년) 정사위하에 서임되었다. 같은 해에 발생한 다치바나 나라마로의 난에서는 반란 실행 시 적 측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치바나 나라마로 파의 가모노 가쿠다리가 사전에 무용에 뛰어난 자를 저택에 불러 술자리를 가졌지만, 후쿠신은 사카노우에노 가리타마로 등의 무인과 함께 초대되었다[5]。결국, 후쿠신은 후지와라 나카마로를 따라, 다치바나 나라마로 파의 오노노 아즈히토·고토모노 다다요리 등을 추포하여, 사에이지후에 구금했다[6]。
준닌조에 들어가, 덴표호지 4년(760년)에 신베 다이후에 임명되었고, 이후 나이쇼료도 맡았다. 덴표호지 7년(763년) 다지마노카미로서 지방관으로 전임했기 때문에, 덴표호지 8년(764년)에 발생한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난에서의 동정은 분명하지 않으며,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지마노카미에 재임명되었다.
도쿄 정권 하의 덴표진고 원년(765년) 종삼위·조궁쿄에 서임되어 공경에 올랐다. 진고케이운 원년(767년) 호오궁직이 설치되자 그 장관(호오궁 대부)에 임명되었다. 진고케이운 4년(770년) 8월의 쇼토쿠 천황 붕어에 즈음하여 소쇼쿠시를 맡았다. 같은 해 무사시노카미에 재임명되었지만, 이듬해 호키 2년(771년) 무사시국의 도산도에서 도카이도로의 이관에 대해[7], 국수였던 후쿠신이 관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2. 6. 고닌 천황 시대
고닌조에서도 계속 조궁쿄를 맡았고, 호키 4년(773년) 조궁쿄로서 담당했던 요메이궁을 완성한 공적으로 인해, 적남·이와마로가 종오위하에 서작되었다.[1] 호키 10년(779년) 오래된 관습으로 사용하고 있던 '''고마'''의 호를 없애고 싶다는 상표를 올려, 다카쿠라노 아손으로 개성했다.2. 7. 간무 천황 시대
덴표 10년(738년) 종육위상에서 세 계단 승진하여 외종오위하에, 이듬해 덴표 11년(739년) 내위의 종오위하에 서임되었다. 덴표 15년(743년) 정오위하·슌구료에 서임되어 황태자 아베 내친왕을 섬겼다. 덴표 19년(747년)에는 동족 7명과 함께 공 성에서 왕(고니키시) 성으로 개성했다. 쇼무조에서는 천황의 총애를 받아 순조롭게 승진을 거듭하여[2], 덴표 20년(748년)에는 정오위상에 이르렀다.덴표 쇼호 원년(749년) 7월에 슌구료로서 섬겨온 아베 내친왕이 즉위(고켄 천황)하자, 종사위하·주에이쇼쇼 겸 시비쇼히에 서임되었고, 이어서 같은 해 11월의 다이조사이 때 유키스기 국사에게 서위가 행해져, 스기국인 미노국의 원외개였던 후쿠신은 종사위상으로 승진하는 등 급속하게 승진했다. 덴표 쇼호 2년(750년) 동족 5명과 함께 세나노 왕에서 고마노 아손으로 개성했다.
덴표 쇼호 8세(756년)에 쇼무 상황의 붕어에 따라 산사쿠시를 맡았다. 같은 해 지방관의 겸무가 야마시로 수에서 무사시노카미로 옮겨졌지만, 무사시노카미 재임 중에[3] 당시 공사가 지연되어 미완성이었던 무사시국분사를 짧은 기간 안에 완공하고, 덴표 호지 2년(756년)에는 무사시 국내에 신라군을 설치했다[4]。후쿠신은 레이키 2년(716년)의 고마군 설치 당시의 군사였던 고마노 와카미치와 동족이라고 여겨졌으며, 후쿠신 자신도 동국 내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덴표 호지 원년(757년) 정사위하에 서임되었다. 같은 해에 발생한 다치바나 나라마로의 난에서는 반란 실행 시 적 측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치바나 나라마로 파의 가모노 가쿠다리가 사전에 무용에 뛰어난 자를 저택에 불러 술자리를 가졌지만, 후쿠신은 사카노우에노 가리타마로 등의 무인과 함께 초대되었다[5]。결국, 후쿠신은 후지와라 나카마로를 따라, 다치바나 나라마로 파의 오노노 아즈히토·고토모노 다다요리 등을 추포하여, 사에이지후에 구금했다[6]。
준닌조에 들어가, 덴표 호지 4년(760년)에 신베 다이후에 임명되었고, 이후 나이쇼료도 맡았다. 덴표 호지 7년(763년) 다지마노카미로서 지방관으로 전임했기 때문에, 덴표 호지 8년(764년)에 발생한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난에서의 동정은 분명하지 않으며,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지마노카미에 재임명되었다.
도쿄 정권 하의 덴표 진고 원년(765년) 종삼위·조궁쿄에 서임되어 공경에 올랐다. 진고 게이운 원년(767년) 호오궁직이 설치되자 그 장관(호오궁 대부)에 임명되었다. 진고 게이운 4년(770년) 8월의 쇼토쿠 천황 붕어에 즈음하여 소쇼쿠시를 맡았다. 같은 해 무사시노카미에 재임명되었지만, 이듬해 호키 2년(771년) 무사시국의 도산도에서 도카이도로의 이관에 대해[7], 국수였던 후쿠신이 관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고닌조에서도 계속 조궁쿄를 맡았고, 호키 4년(773년) 조궁쿄로서 담당했던 요메이궁을 완성한 공적으로 인해, 적남·이와마로가 종오위하에 서작되었다. 호키 10년(779년) 오래된 관습으로 사용하고 있던 '''고마'''의 호를 없애고 싶다는 상표를 올려[1], 다카쿠라노 아손으로 개성했다.
덴오 원년(781년) 5월에 단조인으로 옮겨졌고, 같은 해 12월의 고닌 상황 붕어에 즈음하여 산사쿠시에 임명되었다.
3. 인물
도래인 계 지방 호족 출신이면서도 고켄 천황(쇼토쿠 천황)의 측근으로서 다치바나노 모로에,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도쿄의 각 정권에서 요직을 맡으면서 실각하지 않고 간무 천황 시대까지 활약한 이색적인 인물이었다.
4. 관력
시기 | 직위 |
---|---|
시기 미상 | 종6위상. 우위대지 |
덴표 10년(738년) 3월 3일 | 외종5위하 |
덴표 11년(739년) 7월 5일 | 종5위하(내위) |
덴표 15년(743년) 5월 5일 | 정5위하 |
6월 30일 | 춘궁료(황태자・아베 내친왕) |
덴표 19년(747년) 6월 7일 | 공성을 왕성으로 개성 |
덴표 20년(748년) 2월 19일 | 정5위상 |
덴표쇼호 원년(749년) 7월 2일 | 종4위하 |
8월 10일 | 겸자미소필, 중위소장 |
11월 29일 | 종4위상, 미노원외개 겸임[8] |
덴표쇼호 2년(750년) 정월 27일 | 배내왕성에서 고려조신성으로 개성 |
덴표쇼호 3년(751년) | 위사좌 겸임, 산배수 겸임[9] |
덴표쇼호 8년(756년) 5월 3일 | 산작사(성무 상황 붕어) |
6월 21일 | 산배수 겸임[10] |
7월 8일 | 무장수 겸임[10] |
덴표호지 원년(757년) 5월 20일 | 정4위하 |
덴표호지 4년(760년) 정월 16일 | 신부대보 |
덴표호지 6년(762년) 12월 14일 | 내탁두 겸임[11] |
덴표호지 7년(763년) 정월 9일 | 단바수 |
덴표호지 8년(764년) 10월 20일 | 단바수 |
덴표진고 원년(765년) 정월 7일 | 종3위. 조궁경[1] |
진고케이운 원년(767년) 3월 20일 | 겸법왕궁대부, 조궁경, 단바수 |
진고케이운 4년(770년) 8월 4일 | 장속사(쇼토쿠 천황 붕어) |
8월 28일 | 무장수 겸임 |
호키 7년(776년) 3월 6일 | 오미수 겸임 |
호키 10년(779년) 3월 17일 | 고려조신성에서 다카쿠라조신성으로 개성 |
덴오 원년(781년) 5월 7일 | 탄정윤 |
12월 23일 | 산작사(고닌 상황 붕어) |
엔랴쿠 2년(783년) 6월 21일 | 무장수 겸임 |
엔랴쿠 4년(785년) 2월 정미 | 치사(탄정윤 겸 무장수 사임) |
엔랴쿠 8년(789년) 10월 8일 | 사망(산위종3위) |
5. 계보
참조
[1]
서적
続日本紀
0789-11-28
[2]
서적
公卿補任
[3]
문서
本務は京官(紫微少弼兼中衛少将)であったこと、および天平宝字元年(757年)に発生した橘奈良麻呂の乱に関与していたことから、武蔵守としては遥任であったと考えられている。
[4]
서적
続日本紀
0758-09-27
[5]
서적
続日本紀
0757-07-04
[6]
서적
続日本紀
0757-07-02
[7]
서적
続日本紀
0771-12-05
[8]
논문
宇治谷
1992
[9]
문서
東大寺開田図
[10]
문서
東大寺献物帳
[11]
서적
大日本古文書(編年文書)
[12]
서적
百家系図稿
高麗
[13]
서적
続日本紀
077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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