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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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는 1967년 5월 3일에 치러졌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재선과 윤보선 후보의 재도전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박정희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윤보선은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양자 대결 구도를 형성했다. 선거 결과, 박정희가 51.4%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윤보선은 40.9%를 얻었다. 이번 선거는 경제 개발에 대한 기대감과 지역별 지지 성향의 차이를 보여주며, 양당 체제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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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수립된 군사 정권 기구로, 헌법 일부 조항 효력 정지, 국회 해산 등 권위주의적 통치를 펼치며 경제 개발을 추진했으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비판을 받았고, 1963년 제3공화국 출범과 함께 해산되었다.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 | |
---|---|
지도 | |
![]() | |
선거 정보 | |
선거명 |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 |
국가 | 대한민국 |
국기 연도 | 1949 |
선거 유형 | 대통령 |
이전 선거 |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63년 |
선거일 | 1967년 5월 3일 |
차기 선거 |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
차기 선거 연도 | 1971년 |
투표율 | 83.6% (1.4%p 감소) |
후보 정보 | |
![]() | |
정당 1 | 민주공화당 |
득표수 1 | 5,688,666 |
득표율 1 | 51.44% |
![]() | |
정당 2 | 신민당 |
득표수 2 | 4,526,541 |
득표율 2 | 40.93% |
정당 3 | 통한당 |
득표수 3 | 264,533 |
득표율 3 | 2.39% |
대통령 | |
선거 전 대통령 | 박정희 |
선거 전 정당 | 민주공화당 |
선거 후 대통령 | 박정희 |
선거 후 정당 | 민주공화당 |
2. 배경
대통령 4년 임기 만료에 따라 실시된 선거이다. 7명(그중 1명은 중도 사퇴)이 출마했지만, 사실상 이전 선거(1963년)와 마찬가지로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대통령과, 민중당과 신한당이 통합하여 결성된 야당 신민당의 윤보선 간의 대결이었다.
이전 선거에서 박정희는 15만 표의 근소한 차이로 윤보선을 누르고 당선되었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박 후보가 유효 투표수의 51.4%를 획득하여 윤 후보(41.0%)를 큰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어 재선에 성공했다.
2. 1. 선거 과정
박정희 정부는 한일기본조약의 졸속처리와 월남파병으로 야권과 학생, 그리고 재야의 거센 저항에 직면해 있었다. 반면에 신한당과 민중당으로 분열되었던 야당은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으로 통합하는 등 단결된 모습으로 출전하였다.이같이 야당이 단일 진영을 구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에는 서민호를 비롯하여 무려 5명의 군소 정당 후보가 출마하였는데, 이를 두고 신민당은 박정희가 야권을 분열시키기 위해 군소 정치인들을 매수하여 출마시킨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장준하는 4월 22일 "박정희 씨가 모든 야당을 돈으로 매수하고 군소 정당을 만들어 어떤 군소 정당의 후보에게는 2500만원의 정치 자금을 주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8]
그러나 군소 후보들은 선거전 내내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으며, 지방 조직 등이 미약하여 제대로 된 선거 운동조차 벌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유일하게 일정 부분 이상의 지지세를 보이던 서민호 대중당 후보는 막판에 사퇴를 선언하여, 제6대 대통령 선거는 사실상 양당 구도로 진행되었다.

제6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의 1차 방어전이자 윤보선의 설욕전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4년간의 집권으로 유권자들에게 친숙해져 있던 반면, 윤보선은 시간의 흐름으로 인하여 역사의 한편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윤보선은 대통령 권한 축소 개헌을 공약하는 등 박정희 정권의 독재성을 지적하는 전략을 썼는데, 박정희는 "(야당이) 말로만 민주주의, 민주주의 하는데 민주주의만 먹고 사느냐, 배가 불러야 산다"며 이에 대응하였다.[9]
그러나 신민당과 민주공화당이 둘 다 보수 정당이라서 제시하는 공약 및 정책에 큰 차이가 없었던 데다가, 뚜렷한 선거 쟁점이 없어 선거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졌다. 결국 제6대 대통령 선거는 83.6%라는 역대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하게 되었다.
3. 후보
1967년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에는 총 7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민주공화당에서는 박정희를, 신민당에서는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 대중당은 서민호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으나, 서민호는 야권 단일화를 위해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이 외에도 통한당의 오재영, 민중당의 김준연, 한국독립당의 전진한, 정의당의 이세진 후보가 출마하였다.
이번 선거는 박정희와 윤보선의 재대결로 주목받았다. 선거 결과, 박정희 후보가 51.4%의 득표율로 윤보선 후보(41.0%)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3. 1. 민주공화당
민주공화당은 1967년 2월 2일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당의 총재인 박정희를 제6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3]3. 2. 신민당
민중당과 신한당으로 분당돼있던 야당은 1967년 2월 7일 신민당으로 합당하고, 신한당 총재인 윤보선 전 대통령을 제6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4][5]1965년 윤보선이 이끄는 국민당의 급진파가 탈당하여 1966년 신한국당(NKP)을 결성했고, 신한국당은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국민당의 나머지 온건파는 고려대학교 전 총장 유진오를 후보로 지명했다.
두 후보가 모두 출마할 경우 박정희가 쉽게 승리할 것을 우려하여, 두 당은 2월 7일에 합쳐 새민주당(NDP)을 결성하고 윤보선을 후보로 지명하기로 합의했다.
3. 3. 대중당
민주사회당 등 군소 정당들은 1967년 3월 9일 대중당으로 통합하고 서민호 전 민의원 부의장을 대선 후보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서민호 후보는 4월 28일 야권 단일화를 위해 후보직 사퇴를 선언하였다. 서민호 후보는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군소 정당 후보들 중 가장 강력한 지지세를 보이고 있었는데, 신민당은 서민호 후보가 완주할 경우 야권 지지표를 상당 부분 빼앗길 것으로 보고 수차례에 걸쳐 서민호 후보를 설득해 사퇴를 이끌어낸 것이었다.[4]3. 4. 군소 후보
민주사회당 등 군소 정당들은 1967년 3월 9일 대중당으로 통합하고 서민호 전 민의원 부의장을 대선 후보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서민호 후보는 4월 28일 야권 단일화를 위해 후보직에서 사퇴하였다. 서민호 후보는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군소 정당 후보들 중 가장 강력한 지지세를 보이고 있었는데, 신민당은 서민호 후보가 완주할 경우 야권 지지표를 상당 부분 빼앗길 것으로 보고 수차례에 걸쳐 서민호 후보를 설득해 사퇴를 이끌어낸 것이었다.[4]추풍회는 제6대 총선에서 입후보자 전원이 낙선하는 등 군소 정당으로 전락한 상태였으나, 1967년 3월 25일 당명을 통한당으로 개정하고 오재영 전 의원을 대선 후보로 추대하여 대통령 선거전에 나설 태세를 갖췄다.[4]
제5대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를 지원한 신민회는 1967년 2월 25일 김준연 전 법무부 장관을 대선 후보로 추대하였으며, 3월 10일에는 당명을 민중당으로 개정하였다.[4]
한국독립당은 1967년 3월 16일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전진한 전 사회부 장관을 대선 후보로 추대하였다.[4]
정민회는 1967년 3월 30일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당명을 정의당으로 개정하고 이세진 당 대표를 대선 후보로 추대하였다.[4]
4. 선거 결과
1967년 5월 3일에 치러진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의 총 유권자 수는 13,935,093명이었고, 이 중 11,645,215명이 투표하여 83.6%의 투표율을 기록했다.[6]
이번 선거에는 7명의 후보가 출마했으나, 1명은 중도 사퇴하여 실질적으로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야당 신민당의 윤보선 후보 간의 대결로 진행되었다.
지난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15만 표 차이로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지만, 이번에는 유효 투표수의 51.4%를 획득하여 윤보선 후보(40.9%)를 큰 차이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끄는 여당 민주공화당은 대통령 선거에서의 대승에 이어, 다음 달 치러진 총선에서도 3분의 2가 넘는 의석을 확보하며 압승하였다.
4. 1. 전국 결과
제6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의 1차 방어전이자 윤보선의 설욕전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4년간의 집권으로 유권자들에게 친숙해져 있던 반면, 윤보선은 시간의 흐름으로 인하여 역사의 한편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9]
윤보선은 대통령 권한 축소 개헌을 공약하는 등 박정희 정권의 독재성을 지적하는 전략을 썼는데, 박정희는 "(야당이) 말로만 민주주의, 민주주의 하는데 민주주의만 먹고 사느냐, 배가 불러야 산다"며 이에 대응하였다.[9]
그러나 신민당과 민주공화당이 둘 다 보수 정당이라서 제시하는 공약 및 정책에 큰 차이가 없었던데다가, 뚜렷한 선거쟁점이 없어 선거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졌다. 결국 제6대 대통령 선거는 83.6%라는 역대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하게 되었다.
당락 | 후보자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
당선 | 박정희 | 민주공화당 | 5,688,666 | 51.4 |
윤보선 | 신민당 | 4,526,541 | 40.9 | |
오재영 | 통한당 | 264,533 | 2.5 | |
김준연 | 민중당 | 248,369 | 2.2 | |
전진한 | 한국독립당 | 232,179 | 2.1 | |
이세진 | 정의당 | 98,433 | 0.9 | |
시·도 | 박정희 (민주공화당) | 윤보선 (신민당) | ||
---|---|---|---|---|
득표수 | 득표율 | 득표수 | 득표율 | |
서울특별시 | 595,513 | 45.2% | 675,716 | 51.3% |
경기도 | 525,676 | 41.6% | 674,964 | 52.6% |
강원도 | 429,589 | 51.3% | 349,807 | 41.7% |
충청북도 | 269,830 | 46.6% | 252,469 | 43.6% |
충청남도 | 489,516 | 45.4% | 505,076 | 46.8% |
전라북도 | 392,037 | 42.3% | 451,611 | 48.7% |
전라남도 | 652,847 | 44.6% | 682,622 | 46.6% |
부산직할시 | 338,135 | 64.2% | 164,077 | 31.2% |
경상북도 | 1,083,939 | 64.0% | 447,082 | 26.4% |
경상남도 | 838,426 | 68.6% | 281,545 | 23.0% |
제주도 | 73,158 | 56.5% | 41,572 | 32.1% |
박정희 후보의 압도적 승리는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고,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는 여당이 계속 집권해야 한다는 여론이 작용한 결과이다. 지역별 득표수를 보면 4년 전 선거와는 달리, 대통령의 출신 지역인 영남 지역(경상도)에 경제 개발을 위한 집중 투자가 이루어진 것에 대한 호남 지역(전라도)의 반발로, 서부 지역(서울특별시,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4. 2. 지역별 결과
시도 | 박정희 (민주공화당) | 윤보선 (신민당) | 오재영 (대한민국당) | 김준연 (국민당) | 전진한 (한국독립당) | 이세진 (정의당) | 합계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
서울특별시 | 595,513 | 45.2% | 675,716 | 51.3% | 11,447 | 0.9% | 13,142 | 1.0% | 14,242 | 1.1% | 7,635 | 0.6% | 1,317,695 | |
경기도 | 525,676 | 41.0% | 674,964 | 52.6% | 22,383 | 1.7% | 23,248 | 1.8% | 25,306 | 2.0% | 11,029 | 0.9% | 1,282,606 | |
강원도 | 429,589 | 51.3% | 349,807 | 41.7% | 18,211 | 2.2% | 17,757 | 2.1% | 15,400 | 1.8% | 7,310 | 0.9% | 838,074 | |
충청남도 | 489,516 | 45.4% | 505,076 | 46.8% | 17,662 | 1.6% | 27,295 | 2.5% | 28,809 | 2.7% | 10,560 | 1.0% | 1,078,918 | |
충청북도 | 269,830 | 46.6% | 252,469 | 43.6% | 15,058 | 2.6% | 14,526 | 2.5% | 20,345 | 3.5% | 7,114 | 1.2% | 579,342 | |
전라남도 | 652,847 | 44.6% | 682,622 | 46.6% | 42,249 | 2.9% | 46,721 | 3.2% | 28,156 | 1.9% | 11,774 | 0.8% | 1,464,369 | |
전라북도 | 392,037 | 42.3% | 451,611 | 48.7% | 21,527 | 2.3% | 23,945 | 2.6% | 28,943 | 3.1% | 8,325 | 0.9% | 926,388 | |
부산광역시 | 338,135 | 64.2% | 164,077 | 31.2% | 9,922 | 1.9% | 6,866 | 1.3% | 4,556 | 0.9% | 3,028 | 0.6% | 526,584 | |
경상남도 | 838,426 | 68.6% | 281,545 | 23.0% | 45,325 | 3.7% | 30,740 | 2.5% | 16,065 | 1.3% | 9,895 | 0.8% | 1,221,996 | |
경상북도 | 1,083,939 | 64.0% | 447,082 | 26.4% | 56,328 | 3.3% | 40,884 | 2.4% | 45,482 | 2.7% | 19,647 | 1.2% | 1,693,362 | |
제주도 | 73,158 | 56.5% | 41,572 | 32.1% | 4,421 | 3.4% | 3,245 | 2.5% | 4,875 | 3.8% | 2,116 | 1.6% | 129,387 |
박정희 후보는 경상도 지역에서 높은 지지율을 얻었으며, 윤보선 후보는 서울특별시,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도에서 우세했다.
5. 평가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는 4년 임기의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7명의 후보가 출마했으나(그중 1명은 중도 사퇴), 실질적으로는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대통령과 야당 신민당의 윤보선 후보 간의 대결이었다.
지난 제5대 대선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15만 표 차이로 이겼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유효 투표의 51.4%를 얻어 윤보선 후보(41.0%)를 큰 차이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5. 1. 영향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는 여당인 민주공화당 후보와 제1야당인 신민당 후보가 도합 전체 유효표의 92.4%를 차지해 양당제의 확립을 보여주었다. 박정희는 영남에서만 1,367,796표 차로 윤보선을 누르며 재선에 성공하였다.[1]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추풍령을 기준으로 북쪽은 윤보선, 남쪽은 박정희를 지지하는 '남북 현상'을 보여줬다면,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은 윤보선, 동쪽은 박정희를 지지하는 '동서 현상'이 나타났다. 부산, 경상북도, 경상남도 등 영남 지방에서 박정희의 지지가 두드러졌으며, 4년 전 윤보선이 승리했던 강원도와 충청북도는 여권으로 돌아섰다.[1]
반면에 전라남도, 전라북도 등 호남 지방에서는 근소하지만 야당이 우세를 보였다. 전통적으로 보수 정당의 지지세가 강한 호남은 4년 전에는 박정희를 지지했으나, 제6대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야당세로 돌아섰다. 서울특별시, 경기도, 충청남도에서는 4년 전과 마찬가지로 윤보선이 승리하였다.[1]
참조
[1]
서적
Elections in Asia: A data handbook, Volume II
2001
[2]
서적
[3]
웹사이트
e영상역사관 » 영상보기
http://www.ehistory.[...]
2018-04-21
[4]
웹사이트
민중당(民衆黨)
http://encykorea.aks[...]
2018-04-21
[5]
뉴스
신민당 통합창당{{!}}대통령후보 윤보선·당수 유진오씨
http://news.joins.co[...]
JoongAng Ilbo
1967-02-07
[6]
서적
韓国政治の研究
三一書房
[7]
간행물
歴代選挙情報システム
한국중앙선거관리위원회
[8]
웹인용
야 대통령 후보 소환 - 검찰, 장준하 씨 발언 확인 위해
https://newslibrary.[...]
1967-05-12
[9]
웹인용
서 후보 사퇴에 여야 희비
https://newslibrary.[...]
1967-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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