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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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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준연은 1895년 전라남도 영암 출생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언론인과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동경제국대학 졸업 후 조선일보 기자, 신간회 발기인,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하며 언론 활동을 펼쳤다. 3·1 운동에 참여하고 ML당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고, 반민특위 조사위원,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이후 민주국민당, 통일당을 거치며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196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는 임시정부 지지를 철회하고 남북협상을 비판하며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했다. 1971년 사망했으며, 낭산 김준연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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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준연
원래 이름金俊淵
김준연
출생일1895년 3월 14일
출생지조선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면 교동리
국적대한민국
사망일1971년 12월 31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정당신민당
종교유교(성리학) → 불교개신교(감리회) → 천주교(세례명: 요셉)
학력독일 베를린 대학교 대학원 법학석사
직책대한민국 법무부 장관
별명호 낭산(朗山)
자녀슬하 1남 3녀
장남 김규식(金圭植)
장녀 김자옥(金子玉)
차녀 김자향(金子香)
삼녀 김자선(金子善, 김홍섭과 결혼)
부모김상경(부), 청주 한씨 부인(모)
경력
경력조선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최고위원
한국민주당 대표최고위원
민주국민당 대표최고위원
호헌동지회 특임고문
민주당 상임고문
통일당 전임고문
자유민주당 특임위원
신민당 고문

2. 생애

2. 1. 생애 초기

2. 1. 1. 출생과 성장

김준연은 1895년 3월 14일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187에서 아버지 김상경(金相逕)과 어머니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908년 14살 가을에 영암보통학교 보습과(補習科)에 입학하여 신학문에 접하게 되었다.[1] 영암보통학교 보습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10년 4월 서울로 올라가 한성고등보통학교(경기중·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1] 한일합방 이후 교명이 한성고등보통학교에서 경성고등보통학교로 변경되어 경성고보를 졸업했다. 1914년 3월 23일 경기공립고등보통학교를 전교 6등으로 졸업하였다.[1]

2. 1. 2. 일본 유학과 귀국

1914년 4월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바로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의 3학년에 편입했다.[2] 그러나 그는 수업 진도를 따라가지 못해 고생하였다. 영여공부에는 학비가 적고 조용하고 시골이 좋다는 동경제국대학 학생 김우영에 권유에 따라 1914년 7월 일본 오카야마 제6고등학교 독법과에 편입학하였다. 편입학 시험에서 그는 당초 불합격하였으나 그를 눈여겨본 일본인 선생의 특별 배려로 입학할 수 있었다. 이때 그는 김성수, 송진우, 김도연, 김상덕, 신익희, 안재홍, 여운홍, 윤치영 등을 만난다. 1919년 유학중에 조선기독교청년회(朝鮮基督敎靑年會)의 부회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2·8독립선언에 주동적으로 참가하였다.[3] 1919년 11월 여운형의 도일(渡日) 때에는 신인회(新仁會)를 중심으로 하여 그의 환영회를 조직하고 조선독립을 선전하였다.[3]

1917년 일본 오카야마(岡山) 제6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독법과(獨法科)에 진학했다.

1921년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독법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동경제국대학 대학원 정치학과로 진학, 정치학과의 조수로서 일하였다. 1922년 독일로 건너가 1922년1924년에는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정치와 법률학을 연구하였다. 이후 영국 런던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 뒤 귀국, 1925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기자가 되었다.

2. 2. 일제 강점기 활동

2. 2. 1. 언론 활동과 독립운동

김준연은 한국 최초의 해외 특파원(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1925년의 소련을 시찰했고 1925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생활했으며, 동시에 조선일보 논설위원, 전 조선공산당 당수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1926년부터 민족주의자의 통합단체인 신간회(新幹會) 조직 준비에 참여하였다.

1927년 2월 신간회의 발기인이 되고 신간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3]

1927년 보성전문학교의 강사로서 교단에도 섰다. 1927년 《현대평론》이 창간되자 그 창간호에 이관용(李冠鎔)·안재홍·이순탁(李順鐸)·백남운(白南雲)·홍명희·이긍종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4]

2. 2. 2. ML당 사건과 투옥

그 뒤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조선일보를 그만둔 뒤 1928년김성수의 배려로 동아일보사에 입사했다. 얼마뒤 동사 편집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조직에 관여했다가 안광천을 몰아내고 당수가 된다.

김준연은 안광천일본경찰에 매수된 사람이라고 보았다.[5]

김철수는 제3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한 직후 코민테른에 보고하기 위해 1926년 12월 서울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6] 그러면서 안광천에게 책임비서 자리를 넘겼다. 안광천 책임비서 시대는 1927년 9월까지 계속되었다. 이어 김준연 책임비서 시대가 시작됐는데,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자 김준연은 물러서고 1927년 11월 김세연(金世淵)이 책임비서가 된다.[6]

그러나 1928년 2월 마침내 간부들이 검거되어 제3차 조선공산당은 해체된다.[6] 1928년 그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할 때 제3차공산당사건(세칭 ML당 사건)에 관련되어 투옥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에 아들 희종(喜鐘)이 병으로 사망하는 불행이 있었다.

2. 2. 3. 석방과 언론 활동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 후 1934년 동아일보에서 주필을 지냈다. 1936년 동아일보사 주필로 활동하다가 손기정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사임했다.[7] 1936년 손기정의 우승을 보도한 기사에 일장기가 말소된 일장기 말소 사건에 관련되어 조선총독부동아일보에 압력을 넣어 그를 해고하라고 하였으나 김성수의 특별 배려로 사임한 뒤, 그는 시골에 내려가 조용히 농사나 지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하였는데 이에 김성수가 경기도 연천군 전곡에서 보성전문학교 소유 해동농장(海東農場)을 관리하도록 주선해주었다. 그는 해동농장에서 1945년 광복할 때까지 거주하였다.[8]

2. 3. 광복 이후

2. 3. 1. 한민당 창당과 조직 활동

1945년 8월 11일 조선총독부는 경기도지사를 통해 송진우에게 '행정위원회' 구성을 요청했으나, 송진우는 중경 임시정부 봉대(奉戴)와 연합군의 승인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1945년 8월 14일 송진우와 가까운 김준연에게도 부탁했으나, 김준연은 송진우의 참여 없이는 응하지 않겠다고 하여 무산되었다고 한민당측에서 주장했다. 그러나 1957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었던 엔도 류사쿠는 인터뷰를 통해 '한민당의 그 같은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9]

이후 송진우, 장택상 등과 함께 국민대회 준비회를 조직하였고,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 10월에는 남한에 주둔한 미군정 환영식에 참석하였다. 이후 송진우, 윤보선 등과 함께 임시정부 법통 운동을 하였다.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위원회를 조직하고 11월 임시정부 귀국 환영회를 주관하였다.

1945년 12월 8일 서울특별시장 고문관에 임명되었다.[10]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11]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12] 곧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11] 이어 한민당 내 신탁통치 반대론자의 한사람으로 활동하였다. 그 과정에서 조선이 자력으로 독립하지 못한 이상 신탁통치는 불가피하다는 지론을 펼치던 송진우, 장덕수 등과는 갈등하면서 거리를 두었다.

2. 3. 2. 민주의원, 과도입법위원

1946년 2월 민주의원 창설에 참여하였고, 민주의원(民主議院)의원과 한국민주당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46년 3월 16일 발표한 '소련에 반성을 촉구'힌 방송 요지와 미국무성의 친소세력을 규탄하는 기사를 동아일보에 게재했다.[13] 이후 강연 활동을 다니며 신탁통치 반대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다녔다.

10월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해 12월에 개원한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에서 그는 한민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좌우합작운동과 미소공동위원회 개최에 부정적이던 김준연은 과도입법위원회 의장 김규식(金奎植)과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 일부 사회주의자 출신 전향 인사들이 김규식에게 앙심을 품고 김규식이 미군정과 짜고 일제의 적산을 공짜로 절취했다고 주장하자 그는 이 소문을 근거로 공개 성명서를 내고 김규식에게 사실여부 해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1947년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반탁투쟁회 지도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과도입법의원의 기독교계 인사들은 기독교인 의장 김규식을 지지하였다. 기독교인 의원들은 기독교인 의장 김규식 박사를 환영하는 연회를 서울시내 안국동 윤보선의 집을 빌려서 베풀었다.[14] 여기에서 김규식은 당시 미국으로 방문외교를 펼치는 이승만을 조롱했다.

김규식이 '이박사를 비난하였다.[14]'고 확신한 김준연은 즉시 항의하였고 언쟁이 벌어졌으나 겨우 수습되었다.

그에 대하여 김준연은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김규식을 공격하는 글을 여러 편 발표했다.[14] 이어 김규식과 손잡은 김구도 남북한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며 남북협상 주장을 하자 그는 김구도 맹렬히 비난하였다.[14]

1947년 1월 과도입법위원회 신년사

2. 3. 3. 단정 수립론 지지와 김구, 김규식 공격

과도입법의원의 기독교계 인사들은 기독교인 의장 김규식을 지지하였다. 김규식미국에서 방문외교를 펼치는 이승만을 조롱하자,[14] 김준연은 김규식이 이승만을 비난하였다고 확신, 즉시 항의하며 언쟁을 벌였으나 겨우 수습되었다. 김준연은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김규식을 공격하는 글을 여러 편 발표했다.[14] 이어 김규식과 손잡은 김구가 남북협상 주장을 하자 그는 김구도 맹렬히 비난하였다.[14]

1947년 12월 김성수한민당 당수가 되면서 김준연은 한민당 부당수로 선임되었다. 1948년 1월 총선거의 성격을 놓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과 남·북한 총선거 주장이 대립하였다. 김준연은 북조선인민위원회측이 UN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입북을 거절하는 점을 들어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한민당의 선전부장이던 김준연은 김구·김규식 등 남북협상파가 공산당과 내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발언을 하여 정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15] 김준연은 김구가 남북협상차 이북에 다녀온 이후 두문불출하고 있는 것이 우익진영의 눈을 속여 암암리에 공산당과 모종의 연락을 취하기 위한 제스처라고 판단했다. 그가 경교장의 동태를 이렇게 판단한 것은 김지웅(金志雄)이 그에게 제공한 정보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15]

미군수사기관으로부터 전해들었다는 그의 정보는 공산당원이 김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38선을 넘나든다는 것이었다.[15] 그의 주장에 김구는 노발대발했지만 결국 그를 처벌하지는 못했다.[14]

2. 4.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2. 4. 1. 반민특위와 법무부 장관

국회의원 재임시, 국회 내의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19] 그러나 반민특위는 강제로 해산되었다.

1949년 한민당신익희, 지청천 등 대한국민당 탈당파가 연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 조직하자 참여하였으며, 그는 바로 민주국민당 상임당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0년 5월 30일의 총선거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서울로 올라갔다.[20]

6월 한국 전쟁 때는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 조병옥 내무장관과 함께 빈약한 장비로 무장한 경찰 병력과 함께 대구 사수에 임했고, 1·4후퇴 때 법무장관으로서 안전한 철수를 위한 계획을 입안하기도 했다(참고로, 이때 대구는 백선엽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 미 8사단 10연대, 미 25사단 27연대, 국군 8사단 10연대가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을 막아내어 지켜냈다.).

2. 4. 2. 호헌동지회와 정당 활동

1954년 5월 실시된 제3대 민의원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전남 영암에서 출마하여 당선, 제3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해 민주국민당을 탈당하여 통일당을 조직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고, 1955년 동아일보사 중역이 되었다. 1955년 통합 야당 민주당이 출범하자 민주당 상무위원에 선출되고, 유엔 한국대표의 한사람으로 파견되었다. 1956년 신익희가 유세 도중 사망하자 5월 5일 민주당 구파 몫의 대표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56년 5월 10일 제4대 민의원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여 당원들과 갈등하였다. 1957년 민주당에서 제명되자 이승만 대통령 지지를 선언하고, 통일당을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다.

1960년 3·15 부정 선거 이후 이기붕에게 사퇴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1960년 무임소 장관으로 추천되었다. 그러나 같이 무임소장관 후보자로 추천된 윤보선이 취임을 거절하자 그도 무임소장관직을 사퇴했다. 4월 이승만대통령에서 하야하고 이화장으로 물러나자 그를 찾아갔다. 이후 이승만허정에 의해 하와이로 떠날 때까지 그를 찾아가 문안인사를 드렸다.

제4대 국회의원 총선거 무렵, 왼쪽 맨끝이 김준연, 중절모를 쓰고 선 인물은 당시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박영종


오른쪽

2. 4. 3. 제2공화국 기간

1960년 3월 3·15 선거에 통일당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며, 대통령 후보는 내지 않는 대신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의 지지를 천명하였으나 3월 15일의 부정선거 개표 조작으로 낙선하였다.

5월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통일당 후보자로 민의원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으나 윤보선측이나 장면측 양측과 모두 일정 부분 거리를 두고 정국의 추이를 관망하였다.

2. 5. 생애 후반

2. 5. 1. 대통령 선거 낙선과 정계 은퇴

1967년 민중당 총재로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였으나 낙선되었다. 이후 그는 사실상 정계를 은퇴하였다.

2. 5. 2. 최후

1971년 신민당에 입당하였으나,[29] 같은 해 12월 31일 오후 11시 50분에 서울 성동구 금호동 자택에서 향년 76세로 타계했다. 1972년 1월 7일 서울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영결식이 열렸고,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현 양주시 양주읍) 천주교묘지에 안장되었다.[30]

3. 사후

1998년 낭산 기념사업회가 구성된 뒤, 2009년 공식 출범하였다. 2009년 고향인 전라남도 영암군에 낭산김준연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자녀는 아들 한명, 딸 세 명이 있다.

4. 사상과 평가

4. 1. 임시정부 지지 철회와 남북협상 비판

김준연은 8.15 광복 직후 국내파인 건준세력과 해외파인 임정파가 대립하고 있을 때 해외파를 적극 지지했다.[15] 그러나 임정에서 앞으로 수립될 통일정부 요인의 자격 규정으로 대통령은 30년 이상, 국무총리는 20년 이상, 장관은 10년 이상 독립운동을 유일한 천직으로 하여 계속 투쟁한 인사에 한한다고 주장하자,[31] 그는 이러한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반박했다. 김준연은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는 해당 자격에 동의했지만, 장관까지 그런 규정을 두는 것은 한민당의 정부 요직 참여를 제한하는 것이라 판단하여 받아들일 수 없었다.[31] 이후 임정 측은 김성수 등을 임정 국무위원(장관급)으로 입각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그는 임정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김준연은 임정을 반대하는 선봉에 섰고, 임정 요인이 일부 중심이 된 좌우 합작이나 남북협상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당초 임시정부 지지를 철회하고 1946년 이후부터는 임시정부 세력을 건국 방해 세력으로 규정했다. 1947년 12월 김성수한민당 당수가 되면서 그는 한민당 부당수로 선임되었다.[14]

1948년 1월 총선거의 성격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북조선인민위원회 측이 UN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입북을 거절하는 점을 들어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주장했다. 한민당의 선전부장이던 김준연은 김구·김규식 등 남북협상파가 공산당과 내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발언을 하여 정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15] 그는 김구가 남북협상차 이북에 다녀온 이후 두문불출하고 있는 것이 우익진영의 눈을 속여 암암리에 공산당과 모종의 연락을 취하기 위한 제스처라고 판단, 미군수사기관으로부터 공산당원이 김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38선을 넘나든다는 정보를 들었다고 주장했다.[15]

김준연은 김구를 정점으로 하는 남북협상파와 김규식을 정점으로 하는 좌우합작파를 모두 공산주의 노선과 비슷할 뿐 아니라 정부 수립에 크나큰 방해인물들로 단정했다.[31]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김규식을 공격하고,[14]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론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는 김규식은 한때 공산당 당원이었고,[33] 김구는 토지의 국유화를 주장했으니만큼 공산당 노선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며, 이들이 공산당과 손을 잡고 다시 남북협상을 기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32] 며칠 후 한민당도 당의 이름으로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32]

김준연과 한민당의 성명을 보고 김학규는 분노하여 김구에게 항의했고, 김구는 '小人閑居爲不善(소인한거위불선, 소인이 한가하면 옳지 못한 일을 한다)'라는 글귀를 쓰며 분노와 울분을 표현했다.[34] 김준연과 한민당의 남북협상파 공격 성명은 정부수립파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34] 한편, 김학규는 김준연과 한민당을 극도로 증오하게 되었고, 이후 김준연과 윤보선박정희에게 사상 검증 공세를 할 때 박정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4. 2.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옹호

4. 3. 비판적 시각

5. 저서 및 논문

5. 1. 저서


  • 《나의 소전》 (동아일보사, 1954)
  • 《나의 길》(1966)
  • 《나의 편력》(1969)
  • 《낭산 김준연 : 건국의 원훈》 (낭산 김준연 기념사업회, 허도산 편저, 자유지성사, 1998)

5. 2. 논설

《독립노선》(獨立路線) (1947)

6. 상훈

김준연은 1963년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6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건국공로훈장도 받았다.

7. 가족 관계

증조부는 김주효(金胄斅, 1811 - 1872)이며, 조부는 김흥재(金興載, 1838 - 졸년미상)이다. 아버지는 김상경(金相逕, 1879 - 1945)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 1875 - 1910.7.21)이다. 계모는 조씨(曺氏, 1891 - 졸년미상)이다. 동생으로는 김준오(金俊梧, 1896 - ?), 김준량(金俊亮, 1900 - ?)이 있고, 이복 동생으로 김준설(金俊卨), 김준병(金俊炳), 김준철(金俊喆)이, 이복 여동생으로 김순정(金順貞), 김봉정(金奉貞), 김경정(金璟貞)이 있다. 부인은 김옥성(金玉聲, 1891 - 졸년미상)이다.[30]

장남은 김희종(金喜鐘, 1914 - 1932)이며, 장녀는 김자옥(金子玉 1917 - 1985)으로 사위는 조규찬(曺圭瓚, 1909 - 1997)이다. 차녀는 김자향(金子香, 1919 - 2017)으로 사위는 이종만(李鐘漫)이다. 삼녀는 김자선(金子善, 1926 -)이며[30] 사위는 김홍섭(金洪燮, 1915 - 1965)이다. 양자는 김규식(金圭植, 1934 - 2000)이며, 며느리는 이춘기(李春技)이다.[30]

8. 기타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도 수시로 동아일보 등에 칼럼과 평론, 사설을 기고하기도 했다.

참조

[1] 서적 나의 길 동아출판사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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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웹사이트 http://en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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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서적 나의 길 동아출판사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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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서적 한국정치론 오름 2004
[23] 뉴스 경향신문 1963-04-03
[24] 뉴스 경향신문 1963-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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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서적 그해 5월 3 한길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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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서적 송건호 전집 13 한길사 2002
[32] 서적 송건호 전집 13 한길사 2002
[33] 문서 1921년 모스크바의 극동인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전력이 있다. 김준연도 한때 국내의 조선공산당 당원으로 있었다.
[34] 서적 송건호 전집 13 한길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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