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신민당 후보 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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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신민당 후보 경선은 1970년 9월 29일 열린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치러졌다. 40대 기수론이 대두되며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등 젊은 후보들이 경쟁했고, 유진산 대표는 김영삼을 지명했으나, 김대중 후보가 2차 투표에서 승리하여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김대중의 선거 전략, 비주류 결집, 호남 표 결집 등이 김대중의 승리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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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라북도 유권자들은 높은 투표율을 보였으며, 김대중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1위를 차지했고, 이는 지역주의와 개발 격차에 대한 불만이 반영된 결과로 분석된다.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신민당 후보 경선 | |
---|---|
선거 정보 | |
국가 | 대한민국 |
득표1 | 458 |
득표2 | 410 |
득표율1 | 51.8% |
득표율2 | 46.4% |
1차 득표1 | 382 |
1차 득표2 | 421 |
1차 득표율1 | 43.2% |
1차 득표율2 | 47.6% |
정당색 | yes |
색1 | 신민당 |
색2 | 신민당 |
선거명 |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신민당 후보 경선 |
선거일 | 1970년 9월 29일 |
선거전 | 윤보선 |
선거후 | 김대중 |
유형 | 대통령 |
![]() | |
이전 선거 |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 신민당 후보 선출 |
이전 선거 연도 | 1967년 |
직책 | 대통령 후보 |
차기 선거 |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선거 민주한국당 후보 선출 |
차기 선거 연도 | 1981년 |
후보1 | 김대중 |
후보2 | 김영삼 |
![]() | |
선거인단 | 대의원 904명 중 884명 참석, 당선을 위해 443표 필요 |
참고 자료 |
2. 배경
3선 개헌 국민투표에서 신민당이 패배한 후, 당내에서는 쇄신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다.[2] 고흥문, 김재광 등 40대 의원들이 이미 정국을 주도하고 당을 이끌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당권은 50~60대 이상의 원로 인사들이 독점하고 있어 당내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9년 11월 8일, 42세의 김영삼 의원이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김대중, 이철승 등 다른 40대 후보들도 잇따라 출마하여 당내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2] 이들의 등장은 쇄신을 요구하는 당내 여론에 힘입어 큰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신민당 지도부는 40대 돌풍에 부정적이었다. 이들은 유진오 전 당수, 이범석 전 총리, 김홍일 의원 등 원로 인사를 추대하는 것만이 당을 살리는 길이라고 주장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유진산 당수는 40대 대망론을 막을 수 없게 되자, 최소한 세 40대 후보들 중 누가 후보가 되느냐에 대해서라도 영향력을 행사할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유진오 당수의 사임으로 1970년 1월 26일 개최된 신민당 임시 전당대회는 대선 후보 지명 대회의 전초전 성격을 띄었다.[3] 새 당 대표는 대선 후보 경선에 투표할 대의원 선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기 때문에, 대선 주자들은 당 대표 선거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40대 후보들은 당수 선거와 함께 대선 후보도 선출하자고 주장했으나, 당 지도부는 당수 선거만 진행하기로 하였다.[4] 결국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유진산이 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유진산 대표는 40대 주자들에게 구상유취(口尙乳臭)하다며 출마 철회를 종용하고, 세 후보가 한 명으로 단일화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세 후보는 단일화에 실패했고, 유진산 대표는 만약 40대 단일화가 성사되지 못할 시 자신이 후보로 나서겠다고 밝혔다. 유진산 대표는 결국 당 대표가 40대 후보 중 한 사람을 단일 후보로 지명하는 방법을 제안했고, 김영삼 후보와 이철승 후보가 이를 수용했다. 그러나 김대중 후보는 당 대표의 후보 추천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1]
결국 유진산은 전라북도 출신이자 민주당 신파였던 이철승 대신, 구파 출신이자 범진산계로 분류되던 김영삼을 지명하였다. 이철승은 사전 약속대로 후보직을 사퇴했지만, 배신감과 당혹감을 느끼고 전당대회 당일 김대중 지지로 선회하였다.
2. 1. 40대 기수론
1969년 11월 8일, 42세의 김영삼 의원이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김대중, 이철승 등 40대 젊은 후보들이 잇따라 출마하여 당내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2]1969년 3선 개헌 국민투표 참패 이후, 신민당 내에서는 쇄신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고흥문, 김재광 등 젊은 40대 의원들이 이미 정국을 주도하고 당을 유지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당권은 50~60대 이상의 원로 인사들이 독점하고 있어 당내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40대 후보들의 등장은 큰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가부장적인 당풍으로 유명했던 신민당 지도부는 40대 바람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들은 원로 인사를 추대하는 것만이 당을 살리는 길이라고 주장하며, 유진오 전 당수, 이범석 전 총리, 김홍일 의원, 박기출 의원, 이재형 의원, 유진산 당수 등을 대선 후보로 밀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40대 대망론을 막을 수 없게 되자, 유진산 당수는 최소한 세 40대 후보들 중 누가 후보가 되느냐에 대해서라도 영향력을 행사할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2. 2. 유진산 대표 체제 출범
유진오 당수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신민당의 신임 당수를 선출하기 위해 1970년 1월 26일 개최된 신민당 임시 전당대회는 그해 6월 24일로 예정되어 있던 대선 후보 지명 대회의 전초전 성격을 띄었다.[3] 40대 후보들은 이날 당수 선거와 함께 대선 후보도 선출하자고 주장했으나, 당 지도부는 당수 선거만 진행하기로 하였다.[4]유진오가 당수직을 수행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면서, 강력한 차기 대선 후보로 예상되던 유진오는 대권 주자에서 제외되고 40대 후보론은 더 힘을 얻게 되었다.
새 당 대표는 대선 후보 경선에 투표할 전당대회 대의원 선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따라서 대선 주자들은 당 대표 선거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40대 대선 후보들 중 김대중은 당 대표로 같은 신파 계열의 정일형을 총력 지지하였다.[5] 반면 김영삼과 이철승은 사실상 유진산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 이재형 부총재도 출마를 선언하여, 신파는 정일형과 이재형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결국 전당대회가 개막하였고,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유진산이 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유진산 대표는 이후 대선 후보 경선에 투표할 대의원들의 선임 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당내 반진산계의 반발 및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분당 추진 등을 의식한 유진산 대표는 취임 후 범계파적 당직 인사를 공약하고, 자유당, 한국독립당 등 군소 보수 정당들과의 합당을 성사시키는 등 당의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노력하였다.[6]
대선 후보 지명 대회는 1970년 6월 24일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당내 분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9월 29일로 연기되었다.[7]
2. 3. 당 대표 후보 지명권 논란
유진산 대표는 40대 주자들에게 구상유취(口尙乳臭)하다며 출마 철회를 종용하고, 세 사람과 여러 차례 회담을 가지며 경선불가론을 천명, 세 후보가 한 명으로 단일화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세 후보는 활발한 단일화 교섭을 벌였으나, 누구 하나 양보하는 이가 없어 지지부진했다. 유진산 대표는 만약 40대 단일화가 성사되지 못할 시 자신이 후보로 나서겠다고 밝혔는데, 당내 최대 계파의 수장인 유진산 대표가 나설 경우 대의원 투표에서 필패할 것이라고 판단한 40대 후보들에게는 긴장감이 감돌았다.[1]유진산 대표는 결국 당 대표가 40대 후보 중 한 사람을 단일 후보로 지명하는 방법을 제안했고, 김영삼 후보와 이철승 후보가 이를 수용해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김대중 후보는 당 대표의 후보 추천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해, 김영삼·이철승 두 후보 중 유진산 대표가 선택하는 한 사람과 김대중 후보가 대의원 투표에서 경합할 것이 사실상 확정되었다.[1] 전당대회 불과 며칠 전 위의 합의가 성사됨에 따라 수개월 동안 출마를 저울질하던 유진산 대표는 드디어 불출마를 공식 선언하게 되었다. 하도 잦은 출마 및 불출마 번복으로 진산계 일부가 불출마 선언의 진의를 의심, 여전히 유진산에게 투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유진산 대표는 혹여 자신이 당선된다 하더라도 수락하지 않겠다고 밝혀야 했다.[1]
2. 4. 유진산 대표의 김영삼 지명
이철승은 유진산이 자신의 숙부인 이석주 전 의원과 각별한 사이였고, 같은 전라북도 출신이라는 점에서 자신이 선택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철승은 민주당 신파 출신이었지만, 유진산은 민주당 구파의 영수 격이었다. 두 사람은 오랜 기간 정치적으로 충돌해 온 앙숙 관계였기 때문에, 이철승이 유진산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8]결국 구파 출신이자 범진산계로 분류되던 김영삼이 유진산의 지명을 받게 되었다. 이철승은 사전 약속대로 후보직을 사퇴했지만, 배신감과 당혹감을 느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철승은 전당대회 당일 김대중 지지로 선회하여, 김대중 당선의 1등 공신이 되었다. 김대중은 이철승에게 당 대표 선거 때 지지를 약속하고 이철승의 지지를 얻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3. 후보자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는 김대중, 김영삼 두 후보가 참여하였다.
경선 외에도 이철승, 유진산, 유진오, 박기출, 정일형 등이 후보로 거론되었으며, 이범석 전 총리 등 외부 인사 영입도 논의되었다.[4]
3. 1. 경선 참여 후보자
3. 2. 사퇴 후보자
이철승 전 의원은 민주당 신파 및 재야 세력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고, 경선 출마를 위해 입당했으나, 유진산 대표가 지명하는 후보를 지지하기로 한 약속에 따라 전당대회 전날인 9월 28일, 유진산 대표가 김영삼을 지명함에 따라 경선을 포기했다. 그러나 이후 김영삼을 지지하지 않고 김대중과 연합하였다.[1]유진산 대표는 전당대회 불과 며칠 전까지도 스스로 출마해 40대 후보들과 표 대결을 벌일 것을 고려했으나, 결국 후보 지명권을 받는 것을 대가로 불출마를 선언하고, 투표 날 과반수 대의원들이 자신에게 투표해 당선되더라도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확실히 불출마했다.[2]
유진오 전 총재, 박기출 의원, 정일형 의원 등 원로급 인사들은 당초 경선이 아닌 추대를 전제 조건으로 출마를 고려했으나, 당 지도부에서 40대 후보 중 한 사람을 밀기로 결정하고 출마 포기를 부탁하자 모두 불출마했다.[3]
당내 일각에선 범야권 통합의 의미로 이범석 전 총리 등 외부 인사를 영입 및 추대하는 안도 있었으나, 당내 호응도 약하고 이범석 전 총리 등 거론된 인사들도 고사해 유야무야되었다.[4]
4. 전당대회
대선 후보는 대의원들의 투표로 결정하되, 1차 투표에서 과반을 득표한 후보가 없을 경우 2차 투표를 실시하고, 2차 투표에서도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으면 3차 결선 투표를 실시하여 최고 득표자를 당선자로 하도록 되어 있었다. 1970년 9월 29일 전당대회에서 1차 투표에서는 김영삼이 과반에 조금 못 미치는 1위를 하였으나, 2차 투표에서는 이철승의 지지를 얻은 김대중이 역전하여 제7대 대통령 후보로 공식 선출되었다.
4. 1. 투표 결과
1970년 9월 29일 전당대회에서 1차 투표에서는 김영삼이 과반에 조금 못 미치는 1위를 하였으나, 2차 투표에서는 이철승의 지지를 얻은 김대중이 역전하여 제7대 대통령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1]
4. 2. 무효표
1차 투표에서 무효표 82표 중 2표는 이철승, 2표는 유진산에게 투표되었고, 나머지 78표는 백지 투표였다. 백지 투표 20표 정도는 박기출 지지, 나머지는 이철승 지지표로 분석되었다.[10] 2차 투표에서는 무효표 16표 중 "이대삼"에게 투표된 표가 있었다. 이재형 당 고문은 "이 기명을 한 대의원은 누가 후보가 돼도 좋다는 의미에서 후보 세 명의 이름을 조합하여 쓴 것 같다, 앞으로 세 명의 40대는 운명 공동체라 알고 굳게 단결하라"고 말했다.[11]4. 3. 당권 재신임
유진산 대표는 전당대회에서 자신에 대한 재신임을 묻겠다고 공언한 바 있었는데, 대선 후보 경선 결과가 이같이 나오자 유진산 대표 체제는 위기에 빠졌다.[1] 그러나 김대중 후보가 당의 통합 차원에서 주류 대표와 비주류 후보 체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해 유진산 대표는 대표직을 계속 수행해갔다.[1]5. 결과 분석
신민당의 후보 경선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당시 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전통적인 보수 정당에서 40대 대통령 후보가 나왔다는 점, 당 대표의 지원을 받은 후보가 경선에서 패배했다는 점 등은 혁명과도 같은 일로 평가되었다. 당을 이끌어가는 주역들은 40대였지만, 50~60대 이상의 원로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경쟁보다는 계파 간 협상으로 정치를 해온 보수 야당에 처음으로 변화의 조짐이 보인 것이다. 이러한 보수 야당 사상 초유의 이변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었다.[12]
- 비주류 결집 및 진산계 분열: 유진산 당 대표에 대한 당내 반대 세력이 예상보다 컸고, 당내 최대 계파였던 진산계가 분열하면서 표 단속에 실패했다.
- 호남 표 결집: 유진산 대표가 영남 출신 후보를 지명하면서 호남 출신 대의원들의 표심이 김대중에게 쏠렸다.
- 김대중의 선거 전략: 김대중은 개개인의 말단 대의원들을 조직적으로 공략하는 전략을 사용했고, 이는 효과를 발휘했다.
5. 1. 비주류 결집 및 진산계 분열
신민당 당 대표 유진산에 대한 당내 비토 세력이 생각보다 컸다. 구파의 맹주로서 신파의 견제를 받고 있던 유진산은 경선 국면 동안 사실상 후보를 자기가 결정하겠다고 고집했다. 또한 전당대회 일주일 전인 22일에도 출마를 확언했다가 사흘 뒤인 25일엔 후보 추천권을 대가로 불출마하는 등 이랬다 저랬다 하는 태도를 보여 공분을 샀다.[2]신파의 이철승계와 이재형계가 유진산에게 예상 밖의 반기를 들고 반란표를 던진 것도 한몫했다. 이렇듯 당내 최대 계파인 진산계가 분열하며 反진산 여론에 편승, 표 단속에 처참히 실패하게 된 것이다.
이 경선으로 진산계는 당장의 당권마저 위협받는 처지가 되었다.
5. 2. 호남 표 결집
유진산 당 대표는 호남 출신이었으나 영남 출신 후보를 지명했고, 이에 따라 호남 출신이 많은 진산계는 분열되었다. 김대중은 반진산계의 고정표뿐만 아니라 이철승의 지지 덕분에 전라도와 충남 등 호남 지방 출신 대의원들의 표심을 장악했다.[12] 전라도 지역 대의원들은 대부분 계파에 상관없이 김대중에게 몰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졌다. 일례로 전남 광주시를 지역구로 둔 진산계 정성태 국회부의장이 전남 지역 대의원들을 만나 유진산이 지지하는 김영삼에게 투표할 것을 종용했으나, 도리어 대의원들에게 "광주에서 다시 출마하고 싶으면 중립이나 지키라"며 호된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12]김영삼은 훗날 "2차 투표를 하는데 그때 소석(이철승의 호)하고 DJ(김대중의 약칭)한테서 나온 말이 '우리가 남이여 시방?'이었다, 그러면서 소석 지지자들이 전부 DJ한테 몰아줘서 내가 졌다"라며, 김대중 측이 경선에서 이기기 위해 지역 감정을 부추겼다고 비판했다.[13]
5. 3. 김대중의 선거 전략
김대중은 국회의원이나 지구당 위원장을 포섭하는 일반적인 방식 대신, 책사 엄창록의 주도로 개개인의 말단 대의원들을 조직적으로 공략하는 데 총력을 다하였다.[2] 김대중 캠프는 이를 "적의 수족을 묶는 작전"이라 불렀는데, 이 전략은 효과를 발휘하여 충남 청양·홍성 지구당에서는 김영삼 후보의 직계인 복진풍 위원장이 김영삼 후보 지지를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의원들은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다.[2] 이처럼 김대중은 다른 후보들이 위에서부터 다져놓은 조직을 밑에서부터 침투해 들어가는 방식을 사용했다.[2] 이러한 방식에 전통적인 민주당 신파 세력의 조직표가 합쳐지고, 당내 유진산에 대한 비판 세력까지 김대중을 중심으로 단합하면서 458표라는 기적적인 결과가 만들어졌다.[2]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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