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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창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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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엄창록은 한국 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심리전 담당 하사관이었으며, 이후 김대중의 비서로 활동하며 정치에 관여했다. 그는 김대중의 대통령 선거 출마를 도왔으나, 박정희 정권에 의해 중앙정보부에 채용되어 김대중 진영을 교란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태우 측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고 노태우의 당선을 예측했으며, 1988년에 사망했다. 엄창록은 김대중의 책사이자 박정희 정권의 이중간첩으로 평가받으며, 지역 감정 조장 논란과 관련된 인물로 언급된다.

2. 생애

엄창록은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읍에서 태어났다.[2] 한국 전쟁에 참전 후 강원도 인제군에서 한약재상을 하다가 1961년 재보궐선거부터 김대중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 측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며, '양김(김영삼, 김대중)의 단일화 실패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13대 대선 직후인 1988년에 사망했다.[3]

2. 1. 김대중의 책사

엄창록은 한국 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심리전 담당 하사관이었고, 전쟁 후 강원도 인제군에서 한약재상으로 살다가 1961년부터 김대중의 비서가 되었다. 1971년 제7대 대선을 앞두고 점 조직을 가동해 김대중의 약점을 보강했고, 1970년 김영삼을 이기고 제7대 대통령 선거 신민당 후보 경선에서 대선 후보가 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2]

김대중이 1961년 재보궐선거에서 첫 당선되고 1963년 총선에서 재선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재선 국회의원 김대중박정희에게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1967년 총선에서 박정희김대중을 반드시 낙선시켜야 했는데, 박정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육군 소장 출신 공화당 후보 김병삼을 이기고 김대중이 당선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이후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에 의해 중앙정보부에 특별 채용되어 김대중 진영을 교란시키는 데 성공하여 박정희가 제7대 대통령이 되는 데도 주된 역할을 했다.[3][4]

2. 2. 박정희 정권의 이중간첩

엄창록은 한국 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심리전 담당 하사관으로 참전했다. 전쟁 이후 강원도 인제군에서 한약재상을 하다가 1961년부터 김대중의 비서로 활동했다. 1971년 제7대 대선을 앞두고 점 조직을 가동하여 김대중의 약점을 보강했고, 1970년 김대중이 김영삼을 제치고 신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2]

김대중은 1961년 재보궐선거에서 처음 당선되었고, 1963년 총선에서 재선되었는데, 엄창록은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김대중박정희 대통령에게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성장하면서, 1967년 총선에서 박정희김대중을 낙선시키려 했다. 박정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김병삼 후보를 이기고 김대중이 당선되는 데 엄창록이 크게 기여했다. 이후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엄창록을 중앙정보부에 특별 채용했고, 엄창록은 김대중 진영을 교란시켜 박정희가 제7대 대통령이 되는 데 주된 역할을 했다.[3][4]

2. 3. 노태우 정권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 측에서 엄창록을 영입하려 했으나, 엄창록은 이를 거절했다. 그는 '어차피 양김(김영삼, 김대중)이 단일화에 실패한 상황이라 노태우가 당연히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엄창록은 13대 대선 직후인 1988년에 사망했다.[3]

3. 지역감정 조장 논란

엄창록은 대한민국의 지역감정과 관련하여 여러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지역감정이 1971년 대통령 선거부터 본격화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1967년 제6대 대선 당시 신민당 후보들이 먼저 '호남 푸대접론'을 제기한 것으로 밝혀졌다.[5][6]

김대중은 1987년 야권 후보 단일화 결렬, 평화민주당 창당, 4자 필승론 등을 통해 지역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은 "지역 감정의 원인은 김대중이 제공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8]

한편,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정권이 김대중의 출신지를 이용해 지역감정을 부추겼다는 주장도 제기된다.[12] 199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직전에는 초원복집 사건이 발생하여 관권 선거 논란이 일기도 했다.[14]

3. 1. 1967년 대선과 호남 푸대접론

2000년대 초반까지는 대한민국의 지역감정은 엄창록이 김대중과 결별한 직후 선거가 본격적으로 과열되었던 1971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연구 자료들에 의하면, 엄창록이 김대중 캠프에서 활동하던 1967년 제6대 대선 때부터 신민당 후보들이 먼저 '호남 푸대접'론을 조장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5][6]

1967년 4월 26일 전남 영광·나주·목포 유세에서 윤보선 신민당 후보는 “호남 푸대접 문제를 철저히 시정하겠다”면서 목포를 대(大)어업기지, 무역항, 공업중심지로 발전시키겠다고 공약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다음 날 광주 유세에서 “호남 지방이 푸대접 지역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면서 “분배식으로 공장을 건설하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반박했다. 제6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4년 전 54대 46으로 승리했던 전북에서는 46대 54, 62대 38로 승리했던 전남에서는 49대 51로 패했다. 당시 김대중신민당 대변인으로 윤보선의 참모 중 하나로 활동했다.[5]

1969년 당시 신민당과 3선 개헌 반대 범투위 소속으로 유세에 참여한 김대중은 다른 연사들과 더불어 "영남 지방은 고속도로까지 개설해주는 정부가 호남선은 복선마저 제대로 않고 푸대접하고 있다."며 경상도 정권 타도를 주장한 바 있다.[7]

3. 2. 김대중의 지역감정 조장 논란

2000년대 초반까지는 대한민국의 지역감정은 엄창록이 김대중과 절연한 직후 선거판이 본격적으로 격해졌던 1971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 자료들에 의하면 엄창록이 김대중 캠프에서 활약하던 1967년 제6대 대선 때부터 신민당 후보들이 먼저 '호남 푸대접'론을 조장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5][6]

1967년 4월 26일 전남 영광·나주·목포 유세에서 윤보선 신민당 후보는 “호남 푸대접 문제를 철저히 시정하겠다”면서 목포를 대(大)어업기지, 무역항, 공업중심지로 발전시키겠다고 공약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다음 날 광주 유세에서 “호남 지방이 푸대접 지역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면서 “분배식으로 공장을 건설하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반박했다. 제6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4년 전 54대 46으로 승리했던 전북에서는 46대 54, 62대 38로 승리했던 전남에서는 49대 51로 패했다. 당시 김대중신민당 대변인으로 윤보선의 참모 중 하나로 활약했다.[5]

1969년 당시 신민당과 3선 개헌 반대 범투위 소속으로 유세에 참여한 김대중은 다른 연사들과 더불어 "영남 지방은 고속도로까지 개설해주는 정부가 호남선은 복선마저 제대로 않고 푸대접하고 있다."며 경상도 정권 타도를 주장한 바 있다.[7] 1987년 야권 후보 단일화 합의를 깨고 통일민주당을 탈당,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것도 지역감정에 기댄 정치적 행보라는 비판이 있다. 김대중과 단일화 합의를 했던 김영삼은 "지역 감정의 원인은 김대중이 제공했다"라고 주장하였다.[8]

1987년 대선에 평화민주당 김대중은 4자 필승론을 주장하며 대선에 출마하였는데, 이는 노태우(TK 대구경북), 김영삼(PK 부산경남), 김종필(충청), 김대중(호남)이 각자 그 지역을 가져가면 수도권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후보인 자신이 당선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대선 결과 수도권에서 노태우, 김영삼 후보에 이어 김대중 후보가 3위를 차지하였고 전국 투표수에서도 3위를 차지하여 4자 필승론은 무위로 끝났다.[10][11]

3. 3. 박정희 정권의 지역감정 이용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정권이 김대중 후보의 출신지가 호남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지역 감정을 부추겼다는 주장이 정치학계 일각에서 제기된다.[12] 당시 영남 지역에는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건을 사지 않기로 했다"는 식의 흑색선전이 나돌았다.[13]

그러나 최근 연구 자료들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지역감정은 김대중신민당 후보의 참모로 활약하던 1967년 제6대 대선 때부터 신민당 후보들이 먼저 '호남 푸대접'론을 주장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5][6]

1967년 4월 26일, 윤보선 신민당 후보는 전남 영광·나주·목포 유세에서 "호남 푸대접 문제를 철저히 시정하겠다"고 공약했다. 박정희는 다음 날 광주 유세에서 "호남 지방이 푸대접 지역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반박했다. 당시 김대중신민당 대변인으로 윤보선의 참모 중 하나였다.[5]

1969년 김대중은 "영남 지방은 고속도로까지 개설해주는 정부가 호남선은 복선마저 제대로 않고 푸대접하고 있다"며 경상도 정권 타도를 주장했다.[7]

3. 4. 초원복집 사건

199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를 앞둔 12월 11일 오전 7시, 부산 초원복집에서 김기춘 법무부 장관, 김영환 부산직할시장, 박일용 부산지방경찰청장, 이규삼 국가안전기획부 부산지부장, 우명수 부산직할시 교육감, 정경식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등 부산 지역 유지들이 모여 민주자유당 후보였던 김영삼을 당선시키기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기자는 논의를 하였다.[14] 이들은 김대중 등 야당 후보들을 비방하는 내용을 유포시키자는 관권 선거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14]

4. 엄창록이 등장하는 작품

엄창록을 소재로 한 영화로는 2022년 개봉한 《킹메이커》가 있으며, 이선균이 엄창록을 연기했다.

4. 1. 영화

참조

[1] 뉴스 한국의 선거 전략가 https://www.chosun.c[...] 조선일보 2004-11-04
[2] 뉴스 "「여우」엄창록을 잡아라”(비화 김영삼의 사람들:7) http://news.kmib.co.[...] 국민일보 1994-03-18
[3] 뉴스 마타도어 전문가에서 시작 https://news.naver.c[...] 내일신문 2004-07-26
[4] 뉴스 역대 '킹메이커'는 누가 있었나? https://radio.ytn.co[...] YTN 2021-11-19
[5] 웹사이트 박정희 정권 시절 인사편중도는 YS–DJ정권보다 낮아 http://monthly.chosu[...]
[6] 웹사이트 중앙일보 - 신지역주의 5.지역감정 주범은 정치 https://www.joongang[...]
[7] 뉴스 푸대접을막자 新民,光州 유세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69-10-13
[8] 간행물 '[대담] 김영삼 전 대통령: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 http://www.sdjs.co.k[...] 계간 시대정신 2007
[9] 뉴스 경향신문 - 푸대접을 막자 https://newslibrary.[...]
[10] 웹사이트 새 정치의 열망, 부동산 넘지 못했고 세대만 가르다. http://www.mediaus.c[...] 미디어스 2012-12-28
[11] 뉴스 "[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49> '2단계투쟁론'에 따라 김대중의 양보 촉구"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10-06-20
[12] 서적 만들어진 현실: 한국의 지역주의,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 후마니타스 2009
[13] 뉴스 "[분수대] 흑색선전"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2010-06-01
[14] 웹사이트 초원복집 "안 좋은 일로 회자돼 유감"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5-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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