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럼 (노스캐롤라이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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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더럼은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위치한 도시로, 1853년 철도역 설치를 계기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담배 산업의 성장과 듀크 대학교 설립을 통해 도시가 확장되었으며,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를 중심으로 하이테크 산업이 발전했다. 현재 듀크 대학교와 듀크 대학교 의료 시스템이 주요 고용주이며, 시민권 운동의 중심지이자 문화 예술의 도시로 자리 잡았다. 202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인구는 283,506명이며, 듀크 대학교, 노스캐롤라이나 센트럴 대학교 등 교육 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대중교통으로는 자가용 외에 버스, 기차, 항공편이 제공되며, 다양한 자매 도시를 두고 있다.
더럼의 역사는 1853년 롤리와 힐즈버러를 잇는 철도 노선에 바틀렛 S. 더럼 박사가 기증한 부지에 역이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남북 전쟁 이전까지는 더딘 성장을 보였으나, 전쟁 말기 더럼역 인근 베넷 플레이스에서 남부 연합군이 항복하고, 이 과정에서 병사들이 접한 지역 담배가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2. 역사
전쟁 후, 퇴역 군인들의 수요에 힘입어 담배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특히 '불 더럼 담배 회사'와 워싱턴 듀크 가문의 '듀크 앤 선스 담배 회사'의 성공은 1869년 더럼이 정식 시(市)로 승격되고 빠르게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담배 산업에 이어 섬유 산업도 발전하며 도시 성장을 뒷받침했다. 1890년대부터 1930년대 사이에 많은 상업 및 주거 건물이 세워졌다.
1924년, 제임스 뷰캐넌 듀크는 아버지 워싱턴 듀크를 기리기 위해 트리니티 칼리지를 후원하여 듀크 대학교로 발전시켰다. 또한, 더럼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커뮤니티가 크게 발전하여, 특히 헤이티(Hayti) 지역은 '흑인의 월가'로 불릴 정도로 번성했으며, 이는 훗날 강력한 시민권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도 더럼을 방문하여 시민권 운동을 독려했다.
20세기 중반, 주력 산업이던 담배와 섬유 산업이 쇠퇴하면서 더럼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1958년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RTP)가 조성되면서 하이테크 산업의 연구 개발 중심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RTP와 듀크 대학교는 더럼 경제의 새로운 핵심 동력이 되었고, 시는 재개발과 성장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5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헤이티 헤리티지 센터가 설립되었다.[159]
2. 1. 초기 정착과 발전 (1700년대 ~ 1860년대)
이노족과 오코니치족은 수족 및 샤코리족과 관련된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으로, 현재의 더럼 지역에 'Adshusheer'(또는 Ajusher)라는 마을을 세웠을 가능성이 있다.[16] 중요한 교역로이자 통로였던 오코니치 길이 이 지역을 통과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곳에 정착촌과 상업적 수송로를 건설하며 지역을 발전시켰다.[17][18]
1701년, 영국의 탐험가 존 로슨은 이 지역을 탐험하고 기록하며 훗날 "캐롤라이나의 꽃"이라 칭했다. 로슨은 Adshusheer 마을이 오코니치 타운에서 약 약 22.53km 떨어져 있다고 기록했다.[19] 1700년대 중반에는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영국 출신 이주민들이 잉글랜드의 찰스 1세가 조지 카터렛 경에게 하사한 땅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 토지 소유권은 그의 증손자인 존 카터렛, 제2대 그랜빌 백작에게 상속되었다. 초기 정착민들은 농장과 웨스트 포인트 밀 같은 제분소를 건설하며 생활 터전을 마련했다.[17][18]
미국 독립 전쟁 이전 시기, 이 지역 개척자들은 영국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규제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왕당파 민병대는 1771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콘월리스 로드를 이용해 이 지역을 통과했다. 지역 농부이자 상점 주인이었던 윌리엄 존스턴은 대륙군을 위해 탄약을 제조했으며, 1775년 노스캐롤라이나 지방 의회에서 활동하고 대니얼 분의 서부 탐험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등 독립 운동에 기여했다.[17][18]
철도가 건설되기 전, 현재의 더럼 지역은 오렌지 군 동부에 속한 농업 지대였다. 힐스보로 로드(Hillsborough Road)를 따라 가축 몰이꾼 등 여행자들을 위한 소규모 상점들이 있었을 뿐이다. 이 도로는 훗날 US Route 70의 일부가 되었으며, 주간 고속도로가 건설되기 전까지 식민지 시대부터 노스캐롤라이나의 주요 동서 교통로 역할을 했다.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록스보로와 페이엣빌을 잇는 도로와의 교차점이 생기면서 우편 서비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827년에는 하던(Prattsburg)에, 1836년에는 플라츠버그(Plattsburg)라는 작은 마을에 우체국이 생기기도 했다.[20]
남북 전쟁 이전 시대에는 하드스크래블, 페어린토시 농장, 립스콤, 월넛 홀, 패터슨, 리 농장 등 대규모 농장들이 설립되었다. 특히 1860년경 스태그빌 농장은 미국 남부에서 가장 큰 농장 지대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대농장 운영을 위해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끌려와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노예 거주지는 공예, 사회적 관계, 생활 의례, 음악, 춤 등 독특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 전통이 형성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한편, 이 지역에는 독립 전쟁에 참전했던 이들을 포함한 자유 흑인들도 거주하고 있었다.
더럼의 본격적인 성장은 19세기 철도 건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던 증기 기관차는 자주 연료(나무)와 물을 보충해야 했기 때문에, 노스캐롤라이나 철도는 롤리와 힐스보로 사이에 새로운 역이 필요했다. 하지만 현재의 다운타운 더럼 지역 주민들은 가축 몰이꾼을 상대하는 기존 사업이 "철도 같은 새로운 유행"보다 더 전망이 밝다고 생각하여 역 부지 판매나 임대를 거부했다.[21] 이에 내과 의사였던 바틀렛 S. 더럼 박사가 1849년 자신의 땅 4에이커를 역 부지로 기증했고, 이를 기념하여 역 이름이 '더럼역(Durham's Station)'으로 명명되었다.[22] 1853년 4월 26일에는 더럼역에 미국 우체국이 설립되었는데, 이 날짜는 현재 더럼 시의 공식적인 탄생일로 여겨진다.[22]
더럼역은 초기 20년 동안 간간이 여객이나 소포를 취급하는 작은 역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국 남북 전쟁 말기인 1865년 4월, 윌리엄 T. 셔먼 장군이 이끄는 북군(연방군)이 인근 주도인 롤리를 점령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당시 남부 연합군의 마지막 주력 부대는 조지프 E. 존스턴 장군 지휘 아래 서쪽으로 약 약 80.47km 떨어진 그린스보로에 주둔하고 있었다. 1865년 4월 9일 로버트 E. 리 장군이 애포매톡스에서 항복하자, 존스턴 장군도 항복 조건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셔먼 장군과 존스턴 장군은 4월 17일, 18일, 그리고 최종적으로 26일에 더럼역에서 서쪽으로 약 약 4.83km 떨어진 제임스와 낸시 베넷 부부의 작은 농가인 베넷 플레이스에서 만나 항복 협상을 벌였고, 이곳에서 남부 연합군의 주요 병력이 항복하게 된다.
2. 2. 철도 시대와 남북 전쟁 (1849년 ~ 1865년)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더럼은 1853년 롤리와 힐즈버러를 잇는 철도 건설 계획이 세워지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연료로 장작을 사용하던 증기 기관차는 자주 연료를 보급해야 했기 때문에, 장작과 물을 공급할 역이 약 40.23km에서 약 48.28km 간격으로 필요했다.
이 지역에는 이전에 1827년 하던(Hardin's) 우체국이 있었고, 1836년에는 프래츠버그(Prattsburg)라는 작은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프래츠버그의 지주는 철도 부지로 자신의 땅을 파는 것을 거부했다. 이에 당시 오렌지군에 속했던 지역에 살던 의사 바틀렛 S. 더럼(Bartlett S. Durham) 박사가 철도 부지로 자신의 땅을 기증했다. 이 기증된 땅에 세워진 역은 그의 이름을 따 '더럼역(Durham Station)'으로 명명되었다. 철도가 놓이기 전, 현재의 더럼 지역은 대부분 농지였으며, 힐즈버러 로드(Hillsborough Road)를 따라 가축 몰이꾼 등을 대상으로 하는 몇몇 상점만 있었다. 이 도로는 훗날 미국 국도 70호선의 일부가 되었고, 20세기 후반 주간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노스캐롤라이나를 동서로 잇는 주요 교통로 역할을 했다.
더럼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 사회의 성장은 남북 전쟁 이전까지는 더디게 진행되었다. 전쟁 말기인 1865년 4월, 남군이 패배할 무렵에는 더럼역 인근의 베넷 플레이스(Bennett Place) 근처에 북군과 남군 양측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곳 베넷 플레이스는 이후 남부 연합군 존스턴 장군이 북군 셔먼 장군에게 항복하는 협상이 이루어진 장소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2. 3. 재건 시대와 담배 산업의 부흥 (1865년 ~ 1900년대 초)
남북 전쟁 이전 더럼(Durham)은 느리게 성장했지만, 전쟁 이후 급격히 확장되었다. 이러한 성장의 상당 부분은 번성하는 담배 산업 덕분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간 참전 용사들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맛보았던 담배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이 지역 담배는 다른 담배에 비해 풍미가 가벼운 특징이 있었다. 존 러핀 그린(John Ruffin Green)의 담배 회사에는 더럼의 담배를 주문하는 요청이 쇄도했다. 그린은 W.T. 블랙웰(W.T. Blackwell)과 파트너 관계를 맺고 회사의 이름을 "불 더럼 담배 공장(Bull Durham Tobacco Factory)"으로 변경했다.[22] '불 더럼(Bull Durham)'이라는 이름은 블랙웰이 영국 콜먼(Colman's) 머스타드 로고에 있는 황소를 보고 따온 것인데, 그는 이 머스타드가 영국 더럼(Durham)에서 제조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24]
더럼역 주변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이 지역은 마을로 발전했고, 1869년 4월 10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일반 의회의 법령에 따라 정식으로 시(市)가 되었다. 시의 이름은 역 건설을 위해 토지를 기부했던 바틀렛 더럼(Bartlett Durham) 박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시 설립 당시 더럼은 오렌지 카운티(Orange County)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사업 활동 증가와 토지 거래 등으로 인해 힐즈버러(Hillsborough)에 있는 카운티 청사까지 오가는 것이 불편해졌다. 결국 12년 후인 1881년 4월 17일, 케일럽 B. 그린(Caleb B. Green)이 발의한 더럼군 설립 법안이 일반 의회에서 비준되었다. 이로써 오렌지 카운티 동부와 웨이크군 서부 지역을 합쳐 더럼군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불 더럼 담배 회사와 함께 워싱턴 듀크(Washington Duke)와 그의 아들들이 세운 듀크 앤 선스 담배 회사(Duke & Sons Tobacco Company)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더럼 시는 급속한 발전을 이끌었다. 초기 더럼의 성장을 이끈 것은 담배 산업이었지만, 곧 섬유 산업도 뒤따라 발전했다. 더럼의 서쪽과 동쪽에는 여러 섬유 공장이 세워졌다. 또한 1890년경부터 1930년경까지 상업 및 주거 건물을 포함한 초기 더럼의 많은 건축물이 이 시기에 지어졌다.
2. 4. 20세기 초 성장과 듀크 대학교 설립 (1900년 ~ 1970년)
금권 시대와 20세기 초, 더럼은 불 도럼 담배 회사와 워싱턴 듀크의 W. 듀크 앤 선스 담배 회사(W. Duke & Sons Tobacco Company)의 성공에 힘입어 빠르게 성장했다. 조지 워싱턴 와츠, 존 스프런트 힐, 줄리안 S. 카 같은 더럼의 산업가들은 서머싯 빌라, 하우드 홀, 존 스프런트 힐 하우스, 그레이스톤 매너와 같은 호화로운 저택을 지었다. 워싱턴 듀크의 아들들은 사업 수완이 뛰어나 1900년까지 미국 담배 시장에서 사실상의 독점적 지위를 구축했다. 그러나 1910년대 초, 연방 정부는 반독점법에 따라 듀크 가문의 사업을 여러 회사로 분할하도록 명령했다. 그럼에도 듀크 가문은 더럼에 제조 시설을 둔 주요 기업인 아메리칸 담배를 계속 소유했다.
담배 산업에 대한 추가 투자가 제한되자, 듀크 가문은 1890년대부터 투자해 온 전력 생산 산업으로 눈을 돌렸다. 이들은 듀크 파워(현 듀크 에너지)를 설립하여, 노스캐롤라이나 서부 산맥의 수력 발전 댐에서 생산된 전기를 고전압 전력선 기술을 이용해 공급했다. 당시 대부분의 도시는 지역의 석탄 화력 발전소에 의존했지만, 듀크 파워는 빠르게 이들 지역의 전기 공급권을 확보하며 노스캐롤라이나 중서부 지역에 전기를 공급했고, 이는 담배 사업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25] 듀크 파워는 또한 20세기 중후반까지 버스와 트롤리 같은 대중교통 운영에도 관여했으며, 더럼의 버스 시스템(고더럼)은 1991년까지 듀크 파워가 운영했다.
담배 산업의 성공과 초기 전기 공급은 성장하는 섬유 산업을 더럼으로 유치하는 데 기여했다. 섬유 공장들은 주로 도시 외곽에 자리 잡았고, 농촌 지역의 노동력을 흡수하며 더럼의 인구를 크게 늘렸다. 이 공장 지대들은 이후 더럼시에 편입될 때까지 이스트 더럼(East Durham)과 웨스트 더럼(West Durham)으로 불렸다. 도시의 상업 및 주거 건축물 대부분은 1890년대에서 1930년대 사이에 지어졌다. 1914년 3월 23일, 더럼은 역사상 가장 큰 화재를 겪어 도심 상업 지구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이 화재 당시 소방 용수 공급에 문제가 드러나자, 시는 자체적인 상수도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다.[26]
한편, 더럼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커뮤니티가 눈부시게 발전했다. 특히 도심 남쪽의 헤이티(Hayti) 지역은 20세기 초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흑인 소유 기업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노스캐롤라이나 뮤추얼 생명 보험 회사와 메카닉스 앤 파머스 은행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이 모여 있던 패리시 스트리트(Parrish Street)는 "블랙 월 스트리트"(Black Wall Street)라는 별칭으로 불렸다.[27] 1910년에는 제임스 E. 셰퍼드 박사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위한 미국 최초의 공립 자유 예술 대학인 노스캐롤라이나 센트럴 대학교를 설립했다.
1924년, 제임스 뷰캐넌 듀크는 아버지 워싱턴 듀크를 기리기 위해 자선 재단을 설립하고 더럼의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를 후원했다. 이에 대학은 듀크 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기존 트리니티 칼리지(현 듀크 이스트 캠퍼스)에서 서쪽으로 약 약 1.61km 떨어진 곳에 대규모 캠퍼스와 병원을 건설했다.[28]
그러나 20세기 중반부터 더럼의 제조업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섬유 공장들은 1930년대부터 문을 닫았고, 담배 산업 역시 다른 회사와의 경쟁 심화와 1960년대 이후 흡연율 감소로 인해 수익성이 악화되었다. 이러한 제조업의 쇠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950년대 후반 듀크 대학교는 채플 힐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롤리의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와 협력하여 노스캐롤라이나 주의회에 더럼군 남부의 미개발 지역을 매입하여 미국 최초의 과학 연구 단지인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 설립을 제안했다. 이 연구 단지의 성공과 듀크 메디컬 센터 및 듀크 대학교의 성장은 이후 더럼 경제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29][30]
2. 5. 시민권 운동과 도시 재개발 (1950년대 ~ 1970년대)
더럼은 상당한 규모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커뮤니티와 많은 활동가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시민권 운동이 두드러지게 전개된 도시였다. 여러 차례 시위가 열렸으며, 마틴 루터 킹 주니어도 평등권 투쟁 기간 동안 더럼을 방문했다. 1935년 C.C. 스폴딩, 루이스 오스틴, 콘래드 피어슨, 제임스 E. 셰퍼드가 조직한 '흑인 문제 더럼 위원회'는 흑인 투표권 쟁취에 기여한 공로로 전국적으로 언급되었으며, 투표의 힘을 이용하여 아프리카계 미국인 및 다른 소수 민족 집단의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추구했다.
1957년, 더럼의 애스버리 템플 감리교회 목사였던 더글러스 E. 무어는 다른 종교 및 지역 사회 지도자들과 함께 백인에게만 서비스를 제공하는 식당 카운터에서의 차별에 항의하기 위해 노스캐롤라이나 전역에서 시위를 조직했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시민권 운동의 첫 번째 시위로 널리 알려진 1957년 6월 23일, 무어와 다른 6명의 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로열 세븐)은 인종 분리 정책을 시행하던 로얄 아이스크림 가게의 백인 전용 좌석을 점거하는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이들은 관리자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의해 불법 침입 혐의로 기소되었고, 3년 후의 그린스보로 4인과는 달리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60년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스보로의 울워스 매장에서 시작되어 6개월간 이어진 그린스보로 시위는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이 시위가 시작된 지 일주일 안에 더럼에 있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와 듀크 대학교의 학생들도 더럼 시내에서 연좌 시위를 벌이며 운동에 동참했다. 약 일주일 후,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더럼에서 무어 목사를 만났고, 화이트 록 침례 교회에서 열린 연설에서 그의 유명한 구호인 "Fill up the jails|감옥을 채우자eng"를 처음으로 외쳤다. 그는 차별적인 법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을 강조하며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만약 당국이 우리의 권리를 위해 일어서는 것에 대해 우리를 체포하겠다고 위협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남부의 감옥을 채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대답해야 합니다."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 사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후반 더럼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아프리카계 미국인 커뮤니티의 중심지였던 헤이티 지역의 일부가 철거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이 고속도로 건설은 헤이티뿐만 아니라 모어헤드 힐, 웨스트 엔드, 웨스트 더럼 등 다른 역사적인 지역에도 피해를 입혔다. 도시 재개발 자금을 동원한 대규모 철거로 인해 더럼은 역사적인 건축 기반에 심각한 손실을 겪었다.
1975년에는 헤이티 커뮤니티가 이룩한 유산을 보존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세계 문화에 대한 공헌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헤이티 헤리티지 센터가 설립되었다.[159]
2. 6. 현대 더럼 (1970년대 ~ 현재)
1970년 인구조사국 통계에 따르면 더럼 인구는 흑인 38.8%, 백인 60.8%로 구성되었다.[35] 더럼의 성장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와 가까운 도시 남부에 여러 주택 단지가 건설되었고, 시내 활성화 노력이 시작되었다. 1975년에는 헤이티 헤리티지 센터의 세인트 조셉 역사 재단이 설립되어 "옛 헤이티 커뮤니티의 유산을 보존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경험과 세계 문화에 대한 기여에 대한 이해와 감사를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36]
1987년 아메리칸 담배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더럼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도시 이미지도 하락했다.[37] 이후 시내 재개발 노력이 이어졌다. 1994년에는 더럼 불스 야구팀을 위한 새로운 시내 야구장이 건설되었다. 더럼 공연 예술 센터(DPAC)는 현재 미국 내 극장 티켓 판매량 기준으로 상위 10위 안에 드는 주요 공연장으로 자리 잡았다. B.B. 킹, 윌리 넬슨 등 유명 음악가들이 이곳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담배 산업이 떠난 자리에 역사적인 공장 건물들을 사무실, 콘도미니엄, 레스토랑 등으로 대대적으로 개조하면서 시내 풍경이 변화하기 시작했다.[38] 이러한 시내 활성화 노력은 계속되고 있지만, 1990년 이후 더럼의 주거 및 상업 성장은 주로 더럼 카운티 남부의 I-40 도로변을 따라 이루어졌다.[39]
현재 더럼의 주요 고용주로는 듀크 대학교와 듀크 메디컬 센터(직원 약 39,000명, 학생 약 14,000명), 그리고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 내 기업들(직원 약 49,000명)이 있다. 듀크 관련 시설은 기존 시내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약 약 3.22km 거리에,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는 남동쪽으로 약 약 16.09km 거리에 위치한다. 이들 주요 지역은 더럼 프리웨이(NC 147)를 통해 연결된다.
3. 지리
더럼은 (35.99, -78.9)에 위치하며[54], 미국 남동부 피드몬트 지역의 동부-중앙부에 자리 잡고 있다.[54] 이 지역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지형은 일반적으로 평탄하며 완만한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54] 토양은 주로 점토질이어서 농업에는 적합하지 않다. 네우스강의 지류인 이노강과 여러 작은 개울이 더럼 북부를 통과한다. 더럼 중심부는 네우스강 유역과 케이프피어강 유역을 나누는 능선 위에 위치하는데, 이곳에서 물은 동쪽 팜리코 해협 방향 또는 남쪽 윌밍턴 인근 대서양 방향으로 흐른다.
미국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도시의 총 면적은 약 300.93km2이며, 이 중 약 298.78km2가 육지이고 약 2.12km2(0.71%)가 수역이다.[9] 도시의 일부는 웨이크 카운티에 속해 있다.
더럼은 인근 주요 도시들과 가깝게 위치해 있다. 채플힐에서 북동쪽으로 약 약 16.09km,[55] 주도인 롤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약 33.80km 떨어져 있다. 또한 그린즈버러에서는 동쪽으로 약 80.47km, 샬럿에서는 북동쪽으로 약 194.73km, 리치먼드에서는 남서쪽으로 약 215.65km 거리에 있다. 더럼은 롤리, 채플힐과 함께 리서치 트라이앵글이라고 불리는 도시권(공식 명칭: 롤리-더럼-캐리 광역 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3. 1. 기후
더럼의 기후는 습윤 아열대 기후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Cfa'')로 분류된다. 여름은 덥고 습하며, 겨울은 서늘하고, 봄과 가을은 따뜻하거나 온화한 날씨를 보인다. 강수량은 연중 풍부한 편이며, 특히 여름철에는 뇌우가 자주 발생한다. 여름 기온은 보통 약 26.7°C에서 약 37.8°C 사이를 오간다.[167][168][169]
연평균 강설량은 약 약 17.78cm로 많지 않으며, 눈이 내리더라도 대개 며칠 안에 녹는다.[167][168][169]
더럼 지역은 계절성 알레르기가 심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인해 미국 내에서 살기 어려운 지역 상위 10위 안에 꾸준히 포함되기도 한다.[56]
최근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더럼의 극한 강수일수가 증가하고 기온도 다소 상승할 것으로 예측된다. 피드몬트 지역의 내륙 홍수 발생 가능성도 커지고 있어, 더럼 시의 미래 홍수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57] 고강도 단기 폭풍의 빈도는 2100년까지 연간 9일 이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며,[58] 이러한 내륙 홍수는 특히 노인 등 취약 계층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된다.[59]
4. 인구
2020년 미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더럼 시의 인구는 283,506명이었다. 2023년 추정 인구는 296,186명으로[6],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4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2019년 추정치 기준으로는 미국에서 50번째,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는 캐리에 이어 2번째로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로 나타났다.[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