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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도리가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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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도리가와 전투는 1577년,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을 받은 하타케야마 씨를 돕기 위해 시바타 가쓰이에가 이끄는 오다 군이 우에스기 겐신의 군대와 교전한 사건이다. 노토의 나나오 성이 함락된 후, 오다 군은 데도리가와 강을 건너려다 우에스기 군의 기습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이 전투로 우에스기 겐신은 호쿠리쿠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했지만, 전투 규모와 피해에 대한 기록은 불분명하여 논쟁의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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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도리가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데도리가와 전투
관련 분쟁센고쿠 시대
시기1577년 11월 3일
장소가가국 데도리강
결과우에스기 가문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 1우에스기 가문
교전 2오다 가문
지휘관 및 지도자
우에스기 가문우에스기 겐신 우에스기 가게토라 우에스기 가게카쓰 시바타 나가노리 사이토 도모노부 조조 마사시게 혼조 시게나가 나오에 가네쓰구 유사 쓰구미쓰
오다 가문오다 노부나가 시바타 가쓰이에 마에다 도시이에 사사 나리마사 아케치 미쓰히데 하시바 히데요시 이케다 쓰네오키 니와 나가히데 다키가와 가즈마스 조소카베 모토치카
병력 규모
우에스기 가문30,000명
오다 가문50,000명
피해 규모
오다 가문1,000명 사망, 다수 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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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위

1574년 노토 나나오 성에서 슈고 하타케야마 요시타카가 죽고 어린 아들 하루오마루가 성주가 되면서, 조 쓰구쓰라를 비롯한 중신들이 실권을 잡았다. 1576년 우에스기 겐신은 노토를 차지하기 위해 2만여 군사를 이끌고 침공했고, 조 쓰구쓰라 등은 견고한 나나오 성에서 농성하며 맞섰다.

1577년 호조 우지마사의 공세로 겐신이 가스가야마 성으로 잠시 물러난 사이, 하타케야마 군은 우에스기 군에게 빼앗겼던 성들을 되찾고 아나미즈 성을 공격했다. 이에 겐신은 다시 노토를 공격했고, 조 쓰구쓰라는 나나오 성으로 후퇴했다.[14]

한편, 오다 노부나가다테 데루무네 등에게 겐신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15]

나나오 성에 백성과 조닌까지 수용한 탓에 분뇨 처리 문제와 역병으로 하타케야마 군은 위기에 몰렸고, 어린 성주 하루오마루마저 사망했다. 조 쓰구쓰라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노부나가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총대장으로 하는 4만 군세를 파견했다.[16]

그러나 오다 군이 도착하기 전, 유사 쓰구미쓰 등의 배신으로 조 일족은 몰살당하고 나나오 성은 함락되었다. 이후 우에스기 군은 스에모리 성을 점령하고 야마우라 구니키요 등을 배치했다.[17]

2. 1. 나나오 성 공방전

덴쇼 2년(1574년) 7월, 노토 나나오 성에서는 슈고 하타케야마 요시타카가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 하루오마루가 성주가 되었다.[14]

덴쇼 4년(1576년), 에치고우에스기 겐신노토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기 위해 2만여 명의 군세를 이끌고 노토로 침공하였다. 당시 노토를 지배하고 있던 노토 하타케야마 씨 가문은 어린 당주를 대신해 중신 조 쓰구쓰라와 쓰나쓰라 부자가 실권을 쥐고 있었으며, 쓰구쓰라 등의 중신들은 호쿠리쿠에서도 손꼽히는 견고함을 자랑하던 나나오 성에서 농성하기로 결정하였다.[14]

덴쇼 5년(1577년) 간토에서 호조 우지마사가 공세를 강화하자, 간토의 여러 무장들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겐신은 노토 공격을 그만두고 가스가야마 성으로 일시 물러났다. 그 해 5월, 하타케야마 씨는 우에스기 군이 전년에 빼앗았던 도미키(冨木) ・ 구마키(熊木) 두 성을 함락시켰다. 7월 18일에는 조 쓰나쓰라가 아나미즈 성으로 쳐들어 오자, 우에스기 가의 중신 고야마 성의 히라코 이즈미는 구쓰와다 히고(轡田肥後) ・ 도진 시키부(唐人式部)를 아나미즈 성 구원으로 보냈으나, 조 쓰라타쓰가 수군을 거느리고 맞아 싸워 오토가자키 합전(乙ヶ崎合戦)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구쓰와다 히고 ・ 도진 시키부 ・ 가타쿠라 젠고에몬(板倉伝右衛門, 훗날 다이쇼지 성에서 전사하였다)은 배도 놓치고 헤엄쳐서 아나미즈 성으로 도망쳐야 했다. 조 쓰나쓰라는 다시금 아나미즈 성으로 공격해 왔고, 이에 겐신은 반격을 결의하여 윤7월 노토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에 조 쓰나쓰라는 나나오 성으로 철수하였다.[14]

한편 윤7월 23일, 오다 노부나가는 오슈(奥州)의 다테 데루무네 및 그 가신 엔도 모토노부에게 혼조 시게나가와 모의하여 우에스기 겐신을 칠 것을 도모하게 하였다.[15]

조 쓰구쓰라는 우에스기 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백성과 조닌까지도 성 안에 수용하였는데, 갑작스런 인구 증가로 인한 분뇨 처리 능력이 한계에 달하여 전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성 안 여기저기에 분뇨가 방치되는 비위생적인 상태로 역병이 창궐하여, 어린 당주 하타케야마 하루오마루마저 전염병으로 숨지는 등, 하타케야마 군은 위기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14]

이에 조 쓰구쓰라는 평소 친분을 맺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에게 구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아들 조 쓰라타쓰를 사자로 삼아 노부나가의 거성 아즈치성에 파견하였다. 노부나가로서도 겐신의 세력 확장을 저지할 필요성이 있었으므로, 그 자리에서 구원군 파견을 결정하여 중신 시바타 가쓰이에를 총대장으로 하는 18,000여 명의 군세를 선발대로 보내고 노부나가 자신도 3만 명의 군세를 이끌고 출진하였다.[14]

노부나가가 보낸 원군은 시바타 가쓰이에를 총대장으로 하고 다키가와 가즈마스[16][14]하시바 히데요시[16][14]니와 나가히데[16][14] ・ 사이토 도시하루(斎藤利治)[16][14] ・ 우지 ಬಿಜೆ 나오마사[16][14] ・ 안도 모리나리[16][14] ・ 이나바 요시미치[16][14] ・ 후와 미쓰하루[16][14]마에다 도시이에[16][14]삿사 나리마사[16][14] ・ 하라 나가요리(原長頼)[16][14] ・ 가네모리 나가치카[16][14]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14] ・ 도쿠야마 노리히데(徳山則秀)[14]호리 히데마사[14] 및 와카사슈(若狭衆)[16]에 의한 4만 명의 군세[14]로 8월 8일에 홋코쿠(北国)를 향해 출진하였다고 한다.[16]

그러나 오다 군이 도착하기도 전인 그해 9월 15일(10월 26일), 이전부터 쓰구쓰라가 실권을 잡은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유사 쓰구미쓰, 누쿠이 가게타카 등 친 우에스기 파가 우에스기 군에 내응하여 모반을 일으켜, 쓰구쓰라를 비롯한 조 일족은 몰살당하고 나나오 성도 함락되었다.[14]

나아가 우에스기 군세는 9월 17일 가가와 노토 사이에 위치한 스에모리 성을 공략하고, 야마우라 구니키요와 사이토 도모노부를 배치하였다.[17]

2. 2. 오다 노부나가의 개입

덴쇼 5년(1577년) 윤7월 23일, 오다 노부나가오슈다테 데루무네와 그의 가신 엔도 모토노부에게 에치고의 혼조 시게나가와 모의하여 우에스기 겐신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15]

조 쓰구쓰라는 우에스기 군에 대항하기 위해 백성과 조닌(상공업자)까지 나나오 성 안에 수용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인구 증가로 분뇨 처리 능력이 한계에 도달했고, 전투로 인해 미처 손을 쓰지 못하면서 성 안 곳곳에 분뇨가 방치되는 비위생적인 상태가 되었다. 결국 역병이 발생하여 어린 당주 하타케야마 하루오마루마저 전염병으로 사망하는 등, 하타케야마 군은 위기에 처했다.

이에 조 쓰구쓰라는 이전부터 연락을 취하던 오다 노부나가에게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아들 조 쓰라타쓰를 사자로 삼아 노부나가의 거성 아즈치성에 파견했다. 노부나가 역시 겐신의 세력 확장을 저지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 자리에서 구원군 파견을 결정했다. 시바타 가쓰이에를 총대장으로 하여 다키가와 가즈마스[16][14], 하시바 히데요시[16][14], 니와 나가히데[16][14], 사이토 도시하루(斎藤利治)[16][14], 우지이에 나오마사[16], 안도 모리나리[16][14], 이나바 요시미치[16][14], 후와 미쓰하루[16][14], 마에다 도시이에[16][14], 삿사 나리마사[16][14], 하라 나가요리(原長頼)[16], 가네모리 나가치카[16][14],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14], 도쿠야마 노리히데(徳山則秀)[14], 호리 히데마사[14]와카사의 무사들[16]로 구성된 4만 군세[14]를 선발대로 보냈다. 노부나가 자신도 3만 군세를 이끌고 8월 8일에 홋코쿠를 향해 출진했다.[16]

그러나 오다 군이 도착하기도 전인 9월 15일(10월 26일), 이전부터 쓰구쓰라가 실권을 잡은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유사 쓰구미쓰, 누쿠이 가게타카 등 친 우에스기 파가 우에스기 군에 내응하여 모반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쓰구쓰라를 비롯한 조 일족은 몰살당하고 나나오 성도 함락되었다.

2. 3. 나나오 성 함락

1574년 7월 노토 나나오 성에서는 슈고 하타케야마 요시타카가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 하루오마루(春王丸)가 성주가 되었다. 1576년 우에스기 겐신노토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기 위해 2만여 군세를 이끌고 노토를 침공했다. 노토 하타케야마 씨 가문은 중신 조 쓰구쓰라와 쓰나쓰라(綱連) 부자가 실권을 쥐고 있었으며, 이들은 견고한 나나오 성에서 농성하기로 결정했다.

1577년 간토에서 호조 우지마사가 공세를 강화하자 겐신은 가스가야마 성으로 일시 물러났다. 그해 5월 하타케야마 씨는 우에스기 군이 점령했던 도미키, 구마키 두 성을 함락시켰고, 7월 18일 조 쓰나쓰라가 아나미즈 성을 공격하자 우에스기 군은 구원군을 보냈으나 오토가자키 합전에서 패배했다. 겐신은 반격을 결의하여 윤 7월 노토로 공격해 들어갔고, 조 쓰나쓰라는 나나오 성으로 철수하였다.[14]

한편 윤 7월 23일, 오다 노부나가다테 데루무네와 엔도 모토노부에게 우에스기 겐신을 칠 것을 도모하게 하였다.[15]

조 쓰구쓰라는 백성과 조닌까지 성 안에 수용했는데, 분뇨 처리 문제와 역병으로 어린 당주 하타케야마 하루오마루마저 사망하는 위기에 몰렸다. 이에 조 쓰구쓰라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구원을 요청, 아들 조 쓰라타쓰를 아즈치성에 파견하였다. 노부나가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총대장으로 하는 18,000여 군세를 선발대로 보내고 자신도 3만 군세를 이끌고 출진하였다.

노부나가가 보낸 원군은 시바타 가쓰이에를 총대장으로, 다키가와 가즈마스,[16][14] 하시바 히데요시,[16][14] 단바 나가히데,[16][14] 사이토 도시하루,[16][14] 우지이에 나오마사,[16] 안도 모리나리,[16][14] 이나바 요시미치,[16][14] 후와 미쓰하루,[16][14] 마에다 도시이에,[16][14] 삿사 나리마사,[16][14] 하라 나가요리,[16] 가네모리 나가치카,[16][14] 하세가와 히데카즈,[14] 도쿠야마 노리히데,[14] 호리 히데마사[14] 및 와카사슈(若狭衆)로[16] 구성된 4만 군세로[14] 8월 8일에 홋코쿠를 향해 출진하였다.[16]

그러나 오다 군이 도착하기 전인 9월 15일(10월 26일), 유사 쓰구미쓰, 누쿠이 가게타카 등 친 우에스기 파가 모반을 일으켜 조 일족은 몰살당하고 나나오 성은 함락되었다.

우에스기 군은 9월 17일 가가와 노토 사이에 위치한 스에모리 성을 공략하고 야마우라 구니키요와 사이토 도모노부를 배치하였다.[17]

나가시노 전투 승리 이후, 우에스기 겐신은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1575년 이시야마 혼간지, 다케다 가쓰요리와 동맹을 맺었다.

데도리가와 전투는 오다의 종속국노토국의 하타케야마 씨 영내에 대한 우에스기 씨의 개입으로 시작되었다. 친 오다 장군인 조 시게쓰라가 주도한 쿠데타로 노토의 영주 하타케야마 요시노리가 살해되고, 꼭두각시 통치자인 하타케야마 요시타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에 우에스기 겐신은 군대를 동원하여 노토로 진격했다.

겐신은 조 시게쓰라(쓰나쓰라)를 나나오 성에 가두었다. 이어진 돌파 과정에서 시게쓰라가 사망했고, 그 결과 하타케야마 씨 (노토)는 우에스기 측으로 전향했다.

3. 전투

시바타 가쓰이에가 이끄는 오다 군 선발대는 나나오 성 함락을 알지 못한 채 진군을 계속하였으나, 하시바 히데요시가 독단적으로 진영을 이탈하는 등 내부 통제가 흐트러져 있었다. 우에스기 겐신은 오다 군의 접근을 알고 즉시 나나오 성에서 출진하여 데도리가와 부근 맛토 성에 입성하였다. 가쓰이에는 전군이 데도리강 도하를 마친 후에야 나나오 성 함락과 우에스기 군의 맛토 성 입성 소식을 알게 되었고, 즉시 철수를 명하였다. 그러나 겐신이 직접 이끄는 우에스기 군이 철수하는 오다 군을 추격했고, 도하에 신경 써야 했던 오다 군은 제대로 반격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공격당해 큰 피해를 보았다.[17]

3. 1. 오다 군의 진군과 혼란

시바타 가쓰이에가 이끄는 오다 군 선발대는 나나오 성 함락을 알지 못한 채 진군을 계속하였으나, 가게하시 강(梯川)・데도리강을 넘어 고마쓰 촌(小松村), 모토오리 촌(本折村), 아다카(노미 군能美郡), 도가시(이시카와 군石川郡)을 불태웠다.[16] 그러나 그 도중에 미즈시마(가가 군加賀郡)에서 이전부터 가쓰이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하시바 히데요시가 의견 대립을 이유로 독단적으로 진영을 이탈하는[14] 등 내부 통제가 흐트러져 있었다. 히데요시의 이러한 무단 군진 이탈은 오다 노부나가의 분노를 일으켰고, 오타 규이치는 큰일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16]

한편, 오다 군의 접근을 알게 된 우에스기 겐신은 즉시 나나오 성에서 출진하여, 데도리강 부근에 있는 맛토 성에 입성하였다.[14] 이에 대하여, 가쓰이에는 전군이 데도리강 도하를 마쳤을 때에야 비로소 나나오 성 함락과 우에스기 군의 맛토 성 입성 소식을 알게 되었고, 즉시 철수를 명하였다.

3. 2. 우에스기 겐신의 대응

오다 군의 접근을 알게 된 우에스기 겐신은 즉시 나나오성에서 출진하여 데도리가와 부근의 맛토 성에 입성하였다.[14] 이에 시바타 가쓰이에는 전군이 데도리가와 도하를 마쳤을 때에야 비로소 나나오 성 함락과 우에스기 군의 맛토 성 입성 소식을 알게 되었고, 즉시 철수를 명하였다. 그러나 철수 도중에 겐신이 직접 이끄는 우에스기 군 8천의 추격을 받았다(9월 23일 밤).[14] 도하에 신경을 써야 하는 사정도 있어 이렇다 할 반격도 하지 못한 오다군은 추격군에게 일방적으로 공격당하였다. 그 결과 오다 군은 나마즈에 사다토시[18]를 비롯한 1천여 명의 전사자를 냈고, 더욱이 데도리강의 불어난 물에 많은 병력이 익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17]

우에스기 겐신은 에치젠의 마루오카 성 시모사카이 군으로 진출하였다[19]고 한다. 9월 26일에는 나나오 성으로 돌아와 보청(普請)을 행하였다. 이때 성에 오른 겐신은 조망해 보니 소문에 들은 대로 명지이며, 가가 ・ 노토 ・ 엣추의 합치점이고, 요해는 바다와 일체가 되어 있고, 섬의 모습은 그림에 담을 수 없는 경치라고 적고 있다.[20][17] 이어 오쿠노토의 마쓰나미 성을 함락시키고 노토를 거의 평정하였다.[20] 『만간지 소장 마쓰나미 요시치카 초상찬』에는 덴쇼 5년 9월 25일 노토 스즈 군의 마쓰나미 성의 무장 마쓰나미 요시치카가 우에스기 겐신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라는 기술이 있다.[20]

10월 25일, 겐신은 노토 각 성에 아지사카 나가자네 ・ 유사 모리미쓰 연서(連署)로 13개 조의 제찰(制札)을 내걸었다. 대략 아지사카 나가자네를 나나오 성, 유사 모리미쓰와 노토 하타케야마 씨 출신으로 겐신의 양자가 되어 우에스기 일문의 가미조 가를 이은 가미조 마사시게를 노토에 배치하고, 엣추 마스야마에는 요시에 가게스케를 들인다는 것이었다. 겐신은 노토 스즈 군내 등지의 지행(知行)을 행한다거나, 노토 안의 지행을 파악하고 정리를 행한다는 것 등이었다.[20]

3. 3. 전투의 결과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가 이끄는 오다 군은 나나오 성 함락을 모른 채 진군을 계속했다. 데도리 강을 건너 고마쓰 촌(小松村), 모토오리 촌(本折村), 아다카(阿多賀, 노미 군能美郡), 도가시 촌(富樫村, 이시카와 군石川郡)을 불태웠다.[16] 그러나 미즈시마(水島, 가가 군加賀郡)에서 하시바 히데요시가 가쓰이에와의 의견 대립으로 독단적으로 진영을 이탈하면서 내부 통제가 흐트러졌다.[14] 히데요시의 무단 이탈은 오다 노부나가의 분노를 샀다.[16]

한편, 오다 군의 접근을 알게 된 우에스기 겐신은 나나오 성에서 출진하여 데도리 강 부근의 맛토 성(松任城)에 입성하였다.[14] 가쓰이에는 데도리 강 도하를 마친 후에야 나나오 성 함락과 우에스기 군의 맛토 성 입성 소식을 듣고 철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철수 도중 겐신이 직접 이끄는 우에스기 군 8천의 추격을 받았다(9월 23일 밤). 오다 군은 제대로 반격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공격당했다. 그 결과, 나마즈에 사다토시(鯰江貞利)를[18] 포함한 1천여 명이 전사하고, 불어난 강물에 많은 병력이 익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17]

우에스기 겐신은 에치젠의 마루오카 성(丸岡城) 시모사카이 군(下坂井郡)으로 진출하였다.[19] 9월 26일, 나나오 성으로 돌아온 겐신은 성의 조망이 훌륭하며 가가, 노토, 엣추를 아우르는 요지라고 기록했다.[20][17] 겐신은 오쿠노토(奥能登)의 마쓰나미 성(松波城)을 함락시키고 노토를 거의 평정하였다.[20] 『만간지 소장 마쓰나미 요시치카 초상찬』에는 덴쇼 5년(1577년) 9월 25일, 노토 스즈 군(珠洲郡) 마쓰나미 성의 마쓰나미 요시치카(松波義親)가 우에스기 겐신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20]

10월 3일, 시바타 가쓰이에 등은 미유키즈카(御幸塚) 성채에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 다이세이지 성(大聖寺城)에 자신의 군세를 남기고 가가에서 돌아왔다.[16]

10월 25일, 겐신은 노토 각 성에 아지사카 나가자네(鰺坂長実)와 유사 모리미쓰(遊佐盛光)의 연서(連署)로 13개 조의 제찰(制札)을 내걸었다. 아지사카 나가자네를 나나오 성, 유사 모리미쓰와 노토 하타케야마 씨(能登畠山氏) 출신으로 겐신의 양자가 된 가미조 마사시게(上条政繁)를 노토에 배치하고, 엣추 마스야마(越中増山)에는 요시에 가게스케(吉江景資)를 배치하는 내용이었다.[20]

4. 전투의 영향

이 전투를 노래한 "우에스기에게 맞서면 오다도 데도리가와에서 튀는 겐신 도망치는 노부나가"라는 낙수(속요)가 남아있다.[21] "튀는", "도망치는"이라는 말은 기세를 몰아 추격하는 우에스기 군세와 나는 듯이 도망치는 오다 군세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 낙수에는 노부나가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이 합전에 참전하지 않았다.

대국적으로는 이 상황을 틈타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시기 산성에서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다(시기 산성 전투). 다케다 신겐 사후 거의 와해되어 있던 노부나가 포위망도 겐신의 죽음까지 일시적으로 기세를 올렸다.

에치젠국에서는 1577년 10월에도 우에스기 세력에 대한 잇코잇키 무리와 오다 세력과의 싸움이 있었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어, 우에스기 세력이 가가 남부에서 에치젠까지 그 세력을 뻗친 것으로 추정된다.[22]

오다군의 시바타 가쓰이에 등 유력 무장은 모두 무사하였으나, 이 패전으로 노부나가는 겐신의 존재를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승리로 노토에서 가가국 대부분을 지배하고 오다 가문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 겐신은 대동원령을 발하여 다음 해 3월 대규모 원정을 개시하려고 하였다. 원정 목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노부나가 타도와 상락을 위한 긴키 출병, 또는 호쿠리쿠에서 우위를 확보하여 여유가 생겼으므로 후방 걱정 없이 간토로 출진하여 호조 우지마사를 정벌하기 위한 간토 출병이다. 근년에는 간토 출병 설이 유력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겐신이 갑자기 병사하여 원정은 실현되지 않았다.

야다(矢田)의 저서 『우에스기 겐신』에 따르면 1578년 1월 9일, 겐신은 가즈사(下総)의 유우키 하루토모로부터 거듭 월산(越山) 요청을 받았고, 노토 ・ 엣추 ・ 가가와 에치젠 절반까지 우에스기 측에 속하였으므로 간토로 출진하라는 재촉을 받았다. 이 재촉은 엣추까지 이르러, 엣추에서 우오쓰(魚津)의 성주 대리(城代) 가와타 나가치카와 마스다 성(増山城) 성주 대리 요시에 나가스케에서 고지마 모토시게를 비롯한 영주 ・ 고쿠슈(国衆) 층까지 걸쳐 있었다.

1577년 12월 23일, 겐신은 『동원명부』(역대고안)라는 문서를 작성했는데, 여기에 가가슈(加賀衆) 후지마루 신스케(가쓰토시勝俊)의 이름이 있다. 또한 『나카조 가 문서』에서 시바타 가쓰이에의 우오즈성 공격 때 와카바야시 구로자에몬 등 가가슈가 우오쓰 농성전에서 분전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이 시기에 우에스기 측이 노토 ・ 가가를 장악하고 고쿠진(国人) ・ 잇키슈(一揆衆)를 휘하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가가의 도미즈카 장(富塚荘)을 다스리던 시바야마 씨가 후에 미조구치 히데카쓰에 속하여 에치고(越後) ・ 시바타(新発田)에 따랐다고 하여, 가가의 국시(国侍) 가운데서도 오다를 따르는 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23] 1578년 4월 23일 『고묘지 문서』에는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가가 잇코잇키(加賀一向一揆)에 우에스기 겐신과 함께 노부나가에 저항할 것을 권했다는 기술이 보인다.

우에스기 겐신은 군대를 노토 지방으로 돌려보내 나나오성 수리를 명령한 뒤 에치고의 본거지로 돌아갔다. 우에스기는 데도리가와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고, 그 결과 중앙 북부의 세력 분배가 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갔으며, 우에스기는 잠시나마 가가국까지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겐신의 다음 행보에 대한 논쟁이 있지만, 우에스기 겐신이 쓴 편지를 보면 겐신은 당시 오다를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겐신의 진정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을 수도 있다. 간토의 사무라이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겐신은 교토(京都)가 아닌 간토의 고호조씨를 공격할 계획이었음을 시사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우에스기가 교토로 진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북부 지방 전체를 우에스기에게 양도할 의향이 있다는 편지를 썼다.

1578년, 겐신은 어떤 계획도 시작하기 전에 사망했다. 이후 우에스기의 후계자 문제는 오타테의 난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1582년까지 오다군은 우에스기 씨족을 에치고국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5. 전투 규모에 관한 논쟁

데도리가와 전투에 대한 기록은 부족하여 그 실체는 명확하지 않으며, 전투 결과(우에스기 군의 대승)와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신장공기』에는 "시바타 가쓰이에 등의 출진 및 하시바 히데요시의 전선 이탈"에 대한 내용은 있지만, 전투 자체에 대한 내용은 없다. 『초케 가후』에는 "나나오 성으로 원군으로서 오다 군 4만이 출진했으나,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히데요시는 싸우지 않고 돌아갔다"라고 적혀 있다.

메이지 시대에 편찬된 『대일본사료』에는 데도리가와에서 전투가 벌어져 오다 측 군세가 대패했다는 내용은 채택되지 않았다. 대신 "덴쇼 5년(1577년) 9월 23일, 우에스기 겐신, 가가 미나토가와(湊川)에 출진, 이에 오다 노부나가의 장수 시바타 가쓰이에 등이 병사를 돌려보냄, 이날 겐신이 이를 추격했다" (역대고안 ・ 사소 문서笹生文書 ・ 원본 신장기原本信長記 ・ 호쿠에쓰 군기(北越軍記) ・ 월등가삼주지(越登賀三州志) ・ 상산기담(常山紀談))라는 기록이 있다.

일본 사학자 이노우에 도시오는 저서 『잇코잇키의 연구』(깃카와 고분칸吉川弘文館)에서 덴쇼 5년(1577년) 9월 25일(이노우에 주석 있음)에 겐신 측의 시모쓰마 라이렌이 노미 군의 하타모토인 우쓰로 단바의 내자 호리 사이조에게 보낸 편지에 '야습'에 대한 내용이 있어, 오다와 우에스기 양측 간에 야간 전투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6. 전투 관련 서장

우에스기 겐신의 9월 19일자 편지(역대고안)[17]에는 9월 18일 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오다 군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겐신은 이 승리를 "여러 해 동안의 신심 관희"라 표현하며 기뻐했고, 오다 군이 의외로 약하여 앞으로의 천하 싸움도 안심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6]

시모쓰마 라이슌, 시모쓰마 라이렌, 하마 요리노부의 서장(북징유문)은 가가노토엣추 3개 구니의 문서들을 모은 것으로, 전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시모쓰마 라이렌과 하마 요리노부의 서장은 야간 기습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노우에 데쓰오는 시모쓰마 라이렌 서장의 5월을 9월의 오기로 보고 덴쇼 5년의 일로 추정하기도 했다.[23] 하지만, 5월을 9월의 오기로 보는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북징유문에 실려 있는 시모쓰마 라이슌, 시모쓰마 라이렌, 시모쓰마 요리노부의 서장 일람은 다음과 같다.

style="text-align:left"|
번호문서 이름연대월일발송지수신지교전 장소(문서 중 유출)
10001시모쓰마 라이슌 서장덴쇼 8년인월(卯月) 삭일(朔日)侍従法橋頼純判堀五兵衛殿가나자와 표
10002시모쓰마 라이슌 서장덴쇼 5년?9월 14일侍従法橋頼純判宇丹内堀才介殿아와즈구치
10003시모쓰마 라이렌 서장
시모마 요리노부 서장
연대 미상 6505월 25일頼介(廉)判
요스케 (요리노부) 판
堀才介殿
호리 사이스케 님
교전 장소 불명, 기재 없음
10004시모쓰마 라이렌 서장
시모마 요리노부 서장
덴쇼 5년?
덴쇼 5년경
12월 8일刑部卿法眼頼介(廉)判
형부경 법안 요스케 (요리노부) 판
堀五兵衛殿
호리 고베에 님
가가 江沼郡 대성사(大聖寺) 인근
10005시모쓰마 라이렌 서장
시모마 요리노부 서장
덴쇼 5년?
덴쇼 5년경
12월 8일刑部卿法眼頼介(廉)判
형부경 법안 요스케 (요리노부) 판
堀五兵衛殿
호리 고베에 님
가가 노미군 ・ 고마쓰 시


6. 1. 역대고안

우에스기 겐신의 9월 19일자 편지(역대고안)[17]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9월 18일, 겐신은 가슈 미나가와까지 진군하여 직접 말을 몰며 오다 군을 공격했다. 9월 23일 밤, 오다 군을 덮쳐 천여 명을 죽이고 남은 병사들은 모두 강으로 몰아넣었다. 이때 홍수가 나서 많은 사람이 휩쓸려 떠내려갔다. 겐신은 이 승리를 "여러 해 동안의 신심 관희"라 표현하며 기뻐했고, 오다 군이 의외로 약하여 앞으로의 천하 싸움도 안심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6]

6. 2. 북징유문

시모쓰마 라이슌(일본어: 下間頼純|しもつま らいじゅん일본어)의 편지(북징유문에서)

> 本文「今度夜討之刻、首討捕高名之旨、具遂披露候。御感被思召候通、能々可申舌旨被仰出候。向後弥々可被抽忠節事 肝要候。恐々謹言。五月廿五日 頼介判 堀才介殿」[23]

본 문서는 작성된 해를 알 수 없고 날짜는 5월 25일로 되어 있는데(『北徴遺文文書目録』), 이노우에 데쓰오는 5월은 9월을 잘못 쓴 것이라고 보아 그 편지가 작성된 해를 덴쇼 5년으로 비정하였다.[23] 다만 5월을 9월의 오기로 보는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고, 이 문서 안의 25일의 5와 5월의 5는 필적이 거의 같다는 것으로, 시모쓰마 라이슌의 서장에 표기된 9월과 비교해도 5월과 9월은 확실하게 그 쓴 것을 알아 볼 수 있어 편자인 모리타(森田)가 필사한 것이 틀렸다는 근거로는 확실하지 못하다.

다음은 북징유문에 실려 있는 시모쓰마 라이슌 ・ 시모쓰마 라이렌의 서장 일람(권말의 문서 목록)이다.

style="text-align:left"|
번호문서 이름연대월일발송지수신지교전 장소(문서 중 유출)
10001시모쓰마 라이슌 서장덴쇼 8년인월(卯月) 삭일(朔日)侍従法橋頼純判堀五兵衛殿가나자와 표
10002시모쓰마 라이슌 서장덴쇼 5년?9월 14일侍従法橋頼純判宇丹内堀才介殿아와즈구치
10003시모쓰마 라이렌 서장연대 미상 6505월 25일頼介(廉)判堀才介殿교전 장소 불명, 기재 없음
10004시모쓰마 라이렌 서장덴쇼 5년12월 8일刑部卿法眼頼介(廉)判堀五兵衛殿가가 江沼郡 대성사(大聖寺) 인근
10005시모쓰마 라이렌 서장덴쇼 5년?12월 8일刑部卿法眼頼介(廉)判堀五兵衛殿가가 노미군 ・ 고마쓰 시


  • 교전 상대는 문서에 일절 기재되어 있지 않다.
  • 10003-10005의 시모쓰마 라이렌의 서장은 모두 야간 기습(夜討ちの)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북징유문』은 일본의 향토역사연구가 모리타 시엔(일본어: 森田柿園|모리타 시엔일본어, 1823년 - 1908년)이 평생에 걸쳐 가가노토엣추 3개 구니의 지샤(寺社) ・ 여러 집안에 전래되어 오던 문서들을 필사하여 전10권의 책으로 엮은 문서집이다. 일본 중세 전기부터 에도 막부 번정(藩政) 시기에 걸쳐 811점의 문서가 서사되어 있는데, 제각기 편자 모리타의 해설 ・ 추정 연호 ・ 인물 비정 ・ 사료 소장처 등이 기록되어 있다. 서체나 벌레먹은 자국, 종이의 이음매 하나까지 충실하게 모사되어 있는 점이나, 현재는 그 원본이 소실되어 버린 문서까지 담겨 있어서 중요한 사료를 많이 게재하고 있는 것으로 가치가 평가되고 있다.[24]

  • --

하마 요리노부(일본어: 下間頼延|하마 요리노부일본어)의 서장 (北徴遺文)

> 본문: "이번 야습 시에, 수급을 베어 포획한 공적에 대해, 자세히 아뢰었습니다. 감탄하시어, 잘 말씀드리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더욱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삼가 말씀드립니다. 5월 25일 요스케 날인 호리 사이스케 님께"

연도는 미상이며 5월 25일로 게재되어 있지만 (『北徴遺文文書目録』), 이노우에 토시오는 5월은 9월의 오기일 것이라 하여, 연도 미상을 덴쇼 5년에 비정하고, 덴쇼 5년 9월 25일의 일로 보고 있다.[12] 그러나, 5월을 9월의 오기로 하는 근거는 아무것도 제시되지 않았으며, 동 문서 중의 25일의 5와 5월의 5는 필적이 전혀 같으며, 시모마 요리즈미 서장의 9월과 비교해도, 5월과 9월은 확실히 구분되어 있으며, 편자인 모리타의 필사 실수로 하는 근거는 불명이다.

北徴遺文에 수록된 시모마 요리즈미・시모마 요리노부의 서장 일람 (권말의 문서 목록)이다.

style="text-align:left"|
번호문서명연도월일발신자수신자교전 장소 (문서에서 추출)
10001시모마 요리즈미 서장덴쇼 8년묘월 삭일시지후 법교 요리즈미 판호리 고베에 님가나자와 표
10002시모마 요리즈미 서장덴쇼 5년경9월 14일시지후 법교 요리즈미 판우탄 내 호리 사이스케 님아와즈구치
10003시모마 요리노부 서장연도 미상 6505월 25일요스케 (요리노부) 판호리 사이스케 님교전 장소 불명, 기재 없음
10004시모마 요리노부 서장덴쇼 5년경12월 8일형부경 법안 요스케 (요리노부) 판호리 고베에 님가가 에누마 군 다이쇼지 부근
10005시모마 요리노부 서장덴쇼 5년경12월 8일형부경 법안 요스케 (요리노부) 판호리 고베에 님가가 노미 군・고마쓰 시


  • 교전 상대는 문서에 일절 기재되어 있지 않다.
  • 10003-10005의 시모마 요리노부 서장은 모두 야습에 대한 기술이 있다.

7. 기타

겐신은 군대를 노토 지방으로 돌려보내 나나오성 수리를 명령한 뒤 에치고의 본거지로 돌아갔다. 데도리가와 전투에서 우에스기 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결과 중앙 북부의 세력 분배가 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갔고, 우에스기는 잠시나마 가가까지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1]

학자들 사이에서는 겐신의 다음 행보에 대한 논쟁이 있지만, 겐신이 쓴 편지에 따르면 겐신은 당시 오다를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겐신의 진정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을 수도 있다. 간토의 사무라이들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겐신은 당시 교토가 아닌 간토의 호조를 공격할 계획이었음을 시사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쓴 편지에서는 우에스기가 교토로 진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북부 지방 전체를 우에스기에게 양도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1]

1578년, 겐신은 어떤 계획도 시작하기 전에 사망했다. 이후 우에스기의 후계자 문제는 오타테 전투로 이어졌다. 그 결과 1582년까지 오다군은 우에스기 씨족을 에치고로 몰아낼 수 있었다.[1]

참조

[1] 웹사이트 Uesugi Kenshin https://web.archive.[...] 2007-12-20
[2] 서적 Rekishi Gunzô Shirizu , Uesugi Kenshin Gakken
[3] 문서 『長家家譜』
[4] 문서 『伊達家文書』『建勲神社文書』
[5] 문서 『信長公記』
[6] 문서 『[[#参考文献|歴代古案]]』
[7] 서적 織田信長家臣人名辞典 吉川弘文館
[8] 서적 日本の武将・上杉謙信 人物往来社
[9] 서적 上杉謙信-政虎一世中忘失すべからず候- ミネルヴァ書房
[10] 서적 上杉謙信傳 謙信文庫, 兵書出版社
[11] 문서 『福井県史』
[12] 서적 一向一揆の研究 吉川弘文館
[13] 문서 『石川県立図書館解説』引用
[14] 문서 『長家家譜』
[15] 문서 『伊達家文書』『建勲神社文書』
[16] 문서 『信長公記』
[17] 문서 『[[#참고 문헌|역대고안]]』
[18] 서적 織田信長家臣人名辞典 吉川弘文館
[19] 서적 日本の武将・上杉謙信 人物往来社
[20] 서적 上杉謙信-政虎一世中忘失すべからず候- ミネルヴァ書房
[21] 서적 上杉謙信傳 謙信文庫, 兵書出版社
[22] 문서 『福井県史』
[23] 서적 一向一揆の研究 吉川弘文館
[24] 문서 『石川県立図書館解説』引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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