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팽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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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팽은 프랑스 왕위 계승자에게 부여된 칭호이다. 이 칭호는 원래 비엔 백작 가문의 별칭에서 유래했으며, 1349년 도피네 지역이 프랑스 왕실에 귀속되면서 왕위 계승자에게 사용되었다. 도팽 칭호는 프랑스 혁명으로 폐지되었다가 부르봉 왕정 복고기에 잠시 부활했으나, 부르봉 왕가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다. 칭호는 왕세자(Prince Royal)로 변경되었다. 이후 스페인 정통주의자 계승자들이 사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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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팽 (칭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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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 |
설명 | 프랑스 왕국의 추정 상속인에게 주어지는 칭호이다. |
역사 | |
기원 | 비에누아 백작 기욤 4세가 1349년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에게 자신의 영지를 팔면서, 그의 손자인 샤를에게 '도팽' 칭호를 넘겨주었다. 이후 프랑스 왕국의 왕위 계승자에게 자동으로 주어지는 칭호가 되었다. |
사용 중단 |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잠시 폐지되었다가 왕정복고 후 부활했으나, 1830년 칭호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
칭호 | |
프랑스어 | Dauphin de France |
한국어 | 도팽 |
어원 | '도팽(Dauphin)'은 프랑스어로 '돌고래'를 의미한다. 비에누아 백작의 문장에 돌고래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
역할 및 권한 | |
상징적 의미 | 프랑스 왕위 계승 서열 1위. |
공식 직함 | 왕세자에 해당하며, 왕이 승하하면 자동으로 왕위를 계승한다. |
기타 권한 | 왕의 대리인으로서 특정 의례에 참석하거나, 국정을 수행하기도 했다. |
기타 | |
관련 용어 | 도핀(Dauphine): 도팽의 배우자 도핀(Dauphine): 오베르뉴 도팽의 아내 |
2. 역사
비엔의 기그 4세가 문장에 돌고래를 그려넣고 "르 도팽"(le Dauphin프랑스어)이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도팽 칭호가 시작되었다. 이 칭호는 1349년까지 그의 가문에 전해졌으며, 앙베르 2세가 자신의 영지인 도피네를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매각하면서 프랑스 왕위 계승자가 "르 도팽"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도팽의 아내는 "라 도핀"으로 알려졌다.[1]
최초의 프랑스 왕자 도팽은 현명왕 샤를이었다. 이 칭호는 아스투리아스 공, 브라질 공, 웨일스 공, 로세이 공작과 유사했다. 1461년 이전 프랑스 도팽의 공식 명칭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비엔누아의 도팽, 발렌티누아 및 디아 백작"이었다. 프랑스의 도팽은 돌고래가 그려진 도피네의 문장과 프랑스의 백합 문장을 결합했으며, 필요에 따라 다른 문장과도 결합할 수 있었다.
원래 도팽은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 있던 도피네의 통치를 개인적으로 책임졌으나, 도팽들이 종종 미성년자이거나 다른 문제에 관여했기 때문에 14세기와 15세기 도피네는 무정부 상태에 시달렸다. 샤를 7세의 아들 루이는 도팽 시절 아버지에게 반항했고, 1461년 왕위에 오른 후 도피네를 프랑스 왕실에 통합시켰다.
도팽 칭호는 왕위 계승 서열에 따라 자동적으로 수여되었다. 프랑스 왕의 아들들은 "프랑스의 아들"(fils de France), 손자들은 "프랑스의 손자"(petits-enfants de France)라는 칭호를 받았고, 도팽의 아들과 손자들은 더 높은 지위를 가졌다.
1791년 헌법으로 도팽 칭호는 "왕세자"(Prince Royal)로 변경되었다. 부르봉 왕정 복고 시대에 잠시 복원되었으나, 부르봉 왕가 몰락 이후 사용되지 않고 있다.
2. 1. 기원
비엔의 기그 4세는 비엔 백작으로, 그의 문장에 돌고래를 그려 넣었고, "르 도팽"(le Dauphin프랑스어, 프랑스어로 돌고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 도팽 드 비엔누아 칭호는 1349년까지 그의 가문에 전해졌다.[1] 앙베르 2세가 자신의 영지인 도피네를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매각하면서, 프랑스의 상속자가 "르 도팽"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조건이 붙었다.[1]한편, 비엔 백작가의 분가인 오베르뉴 백작의 자손들은 "오베르뉴의 도팽"(도팽 도베르뉴, dauphin d'Auvergne) 칭호를 계속 사용했으며, 이는 프랑스 혁명까지 이어졌다.[2]
2. 2. 프랑스 왕정 시대
현명왕 샤를은 최초의 프랑스 왕자 도팽이었다. 도팽 칭호는 아스투리아스 공, 브라질 공, 웨일스 공, 로세이 공작 등과 유사했다. 1461년 이전 프랑스 도팽의 공식 명칭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비엔누아의 도팽, 발렌티누아 및 디아 백작"이었다.프랑스의 도팽은 도피네의 문장과 프랑스의 백합 문장을 결합하여 사용했으며, 필요에 따라 다른 문장과도 결합했다. 예를 들어 프랑수아 1세의 아들 프랑수아는 브르타뉴 공작이었으므로, 이 지방의 문장을 일반적인 도팽의 문장과 결합했다. 프랑수아 2세는 도팽이면서 메리 1세와의 결혼을 통해 스코틀랜드의 왕이었으므로 스코틀랜드 왕국의 문장을 도팽의 문장에 추가했다.
원래 도팽은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 있던 도피네의 통치를 개인적으로 책임졌다. 그러나 도팽들이 종종 미성년자이거나 다른 문제에 관여했기 때문에 14세기와 15세기 도피네는 무정부 상태에 시달렸다.
샤를 7세의 아들 루이는 도팽 시절 아버지에게 반항했다. 그는 아버지의 허락보다 더 오래 도피네에 머물면서 프랑스보다 도피네에 더 유리한 개인적인 정치를 펼쳤다. 예를 들어 그는 아버지의 뜻에 반하여 사부아의 샤를로트와 결혼했다. 사부아는 전통적으로 도피네의 동맹국이었으며, 루이는 그 동맹을 재확인하여 지방의 반군과 강도를 진압하고자 했다. 루이는 1456년 샤를 7세의 군인들에게 도피네에서 쫓겨났고, 이 지역은 다시 무질서 상태로 돌아갔다. 1461년 프랑스의 루이 11세로 즉위한 후, 루이는 도피네를 프랑스와 통합하여 왕실의 통제하에 두었다.
도팽 칭호는 군주가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왕위 계승 서열에 따라 자동적으로 수여되었다. 프랑스 왕의 아들들과 손자들이 "프랑스의 아들"(fils de France), "프랑스의 손자"(petits-enfants de France)라는 칭호와 지위를 받았으며, 도팽의 아들과 손자들이 더 높은 지위를 가졌다.
2. 3. 프랑스 혁명과 그 이후
1791년 헌법에 의해 도팽 칭호는 폐지되고 "왕세자"(Prince Royal)로 변경되었다. 헌법에 따라 왕위 상속자(당시 도팽 루이-샤를)는 "왕세자"로 변경되었으며, 이 칭호는 1791년 10월 1일 입법 의회가 시작되면서 효력을 발휘했다.[1]부르봉 왕정 복고 시대인 루이 18세 때 "잠재적으로" 복원되었으나, 루이 18세 사후까지는 또 다른 도팽이 나타나지 않았다. 루이 18세의 동생 샤를 10세가 즉위하면서 샤를의 아들 겸 상속자인 앙굴렘 공작 루이-앙투안은 자동으로 도팽이 되었다.[1]
부르봉 왕가가 몰락하면서 이 칭호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고, 루이-필리프의 상속자는 "왕세자"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샹보르 백작 앙리가 사망한 후 카를로스, 마드리드 공작은 정통주의자의 계승자였던 몬티손 백작 후안의 상속자였으며, 그 이후로 스페인의 정통주의자 계승자들이 이 칭호를 사용했다.[1]
3. 도팽의 문장
프랑스 도팽의 문장은 돌고래가 그려진 도피네의 문장과 프랑스의 백합 문장을 결합한 형태였다. 필요에 따라 다른 문장과 결합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프랑수아 1세의 아들 프랑수아는 브르타뉴 공작이었기 때문에 브르타뉴 공국의 문장을, 프랑수아 2세는 메리 1세와의 결혼으로 스코틀랜드 왕국의 왕이었으므로 스코틀랜드 왕국의 문장을 도팽의 문장에 추가했다.
3. 1. 변천사
기그 4세는 비엔 백작으로, 그의 문장에는 돌고래가 그려져 있었고, 별명은 "르 도팽"이었다. 도팽 드 비엔누아 칭호는 1349년까지 그의 가문에 전해졌으며, 당시 앙베르 2세는 자신의 영지인 도피네를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매각하면서 프랑스의 상속자가 "르 도팽"이라는 칭호를 사용한다는 조건을 걸었다.1461년 이전 프랑스 도팽의 공식 명칭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비엔누아의 도팽, 발렌티누아 및 디아 백작"이었다. 프랑스의 도팽은 돌고래가 그려진 도피네의 문장과 프랑스의 백합 문장을 결합했으며, 필요에 따라 다른 문장과도 결합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 프랑수아 (브르타뉴 공작)는 브르타뉴 공작이었으므로, 이 지방의 문장을 일반적인 도팽의 문장과 결합했다.
- 프랑수아 2세는 도팽이면서 메리 1세와의 결혼을 통해 스코틀랜드 왕국의 왕이었으므로, 스코틀랜드 왕국의 문장을 도팽의 문장에 추가했다.
이 칭호는 1791년 헌법에 의해 폐지되었으며, 왕위 상속자(당시 도팽 루이-샤를)는 "왕세자"(Prince Royal)로 변경되었다. 부르봉 왕정 복고 시대인 루이 18세 때 "잠재적으로" 복원되었지만, 그의 사후까지는 또 다른 도팽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동생 샤를 10세가 즉위하면서 샤를의 아들 겸 상속자인 앙굴렘 공작 루이-앙투안은 자동으로 도팽이 되었다.
부르봉 왕가가 몰락하면서 이 칭호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고, 루이-필리프의 상속자는 "왕세자"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4. 역대 도팽 목록
(왕위 즉위)

(왕위 즉위)




(왕위 즉위)

(왕위 즉위)
사보이의 샤를로트

(왕위 즉위)




(왕위 즉위)

(왕위 즉위)

(왕위 즉위)

(왕위 즉위)




(왕위 즉위)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왕위 즉위)


(왕세자로 개칭)

(왕위 퇴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