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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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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당 전투는 1885년 2월 23일, 프랑스군이 청나라 광서군을 격퇴하고 랑선 점령 이후 통킹에서 잔당을 몰아내기 위해 벌인 전투이다. 프랑스 제2여단은 2,900명 규모로, 동당 서쪽의 석회암 고원에 구축된 청나라군의 강력한 방어선을 공격했다. 프랑스군은 서부 요새를 점령하고 동당을 장악했으며, 청나라 관문까지 진출했다. 전투 결과 프랑스군은 비교적 적은 피해를 입었지만, 청나라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프랑스군은 청나라 국경에 진입하여 중국 관문을 폭파하고, "청나라는 국경을 지키는 것은 돌담이 아니라, 성실한 조약 이행"이라는 메시지를 새긴 간판을 세웠다. 이후 프랑스군은 랑선으로 철수하고, 동당에는 소규모 수비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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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당 전투
기본 정보
분쟁동당 전투
전체청불전쟁, 통킹 원정
동당 근처의 진남관
날짜1885년 2월 23일
장소베트남 북부 랑선 북쪽의 동당
결과프랑스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파일:Flag of France.svg|25px]] 프랑스
교전국 2[[파일:Flag of China (1862–1889).svg|25px]] 청나라
지휘관
지휘관 1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폴 에르빈제
지휘관 2반정신
풍자재
병력 규모
병력 12,000명
병력 26,000명
사상자 규모
사상자 19명 사망
46명 부상
사상자 2미상
기타

2. 배경

이 전투는 랑선 원정(1885년 2월 3일 ~ 2월 13일)의 부속으로 치뤄진 전투이며, 프랑스는 랑선에서 광서군 기지를 점령했다.[1]

1885년 2월 16일, 통킹 원정군의 사령관인 루이 브리에르 드 리즐 장군은 로랑 조바니넬리의 제1여단과 함께 랑선을 떠나 투옌꽝의 포위망을 해제시켰다.[2] 출발하기 전에, 리즐 장군은 제2여단과 함께 랑선에 머물러 있는 드 네그리에 장군에게 청나라 국경을 향해 밀고 나가, 광서군 잔당을 통킹 땅에서 추방하도록 명령했다.[2] 제2여단에 식량과 탄약을 재보급한 이후, 드 네그리에는 동당의 광서군을 공격하기 위해 진군했다.[2]

3. 병력 규모

1885년 2월, 드 네그리에가 지휘하는 제2여단은 약 2,9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보병과 포병 전력으로, 동당으로 진격한 부대와 랑선 및 보급선 경계를 담당한 부대로 나뉘었다.[19][2][3]

3. 1. 프랑스군

1885년 2월, 드 네그리에의 2여단은 2,900명 미만의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여단의 전투 부대는 다음과 같았다.[19][2]

부대지휘관
제3 행군 연대중령 에르빈제
제23 보병 대대중령 고다르
제111 보병 대대대대장 포르
제143 보병 대대대대장 파레
제4 행군 연대중령 도니에르
제2 외인부대 대대대대장 디구에
제3 외인부대 대대중령 쇼에프
제2 아프리카 경보병 대대대대장 세르비에르
통킹 소총 1연대 제1대대대대장 조나 라깔르
3개 포병대대위 로페, 드 싹시, 마르탱



드 네그리에는 에르빈제 대대의 3개 분대, 2개의 외인부대, 통킹 소총 1연대 1개 중대, 로페와 드 싹시의 포병대와 함께 동당으로 진군했다. 세르비에르의 제2 아프리카 경보병 대대는 랑선과 추(Chu) 지역의 여단 보급선을 지키기 위해 남겨졌다. 마르탱의 포병대도 랑선에 남아있었다.[19][3]

3. 2. 청나라군

청나라군은 만다린 로드[20] 서쪽, 300m 높이의 석회암 고원을 중심으로 매우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석회암 고원은 동당에서 북쪽으로 청나라 관문까지 뻗어 청나라 본토까지 이어졌다. 이 고지대는 동당과 청나라 관문으로 향하는 접근로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남동쪽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을 이루고 있었다. 고원은 서쪽에서만 등반이 가능했고, 청나라군은 정상, 동당 바로 뒤에 은폐된 포병 진지를 구축하여 공격자가 올라와야 하는 가파른 서쪽 비탈을 사정권에 두었다. 정상에는 여러 개의 보병 막사와 다른 포병 진지들이 건설되어 있었다.

청나라군 방어선의 좌익은 만다린 로드 동쪽의 구릉지대를 따라 형성되었는데, 이곳은 석회암 고지대에 있는 고지의 보병 및 포병 진지의 지원을 받았다. 고지대 자체가 청나라군 수중에 있는 한, 이러한 진지는 정면 공격에 상당히 안전했다. 프랑스군이 석회암 고지대를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려면, 먼저 그들의 진로에 바로 위치한 동당을 점령해야 했다. 청나라군은 동당과 그 주변에 우익을 배치했다. 낮고 작은 동당 마을은 중국군 방어선에서 가장 약한 지점이었지만, 중국군은 동티엔(Dong Tien)과 포 부(Pho Bu) 마을과 탓 케(That Ke) 계곡을 내려다보는 서쪽 구릉에 세 개의 강력한 요새를 건설하여 방어를 강화했다. 이러한 요새들, 이른바 ‘서쪽 요새들’은 동당 자체를 포함하는 방어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또한 중국군은 방어선 전체 전면을 가로지르는 빠르게 흐르는 도랑인 동당 시내(Đồng Đăng stream)를 해자로 이용하여 프랑스군의 공격을 지연시킬 수 있었다.[21]

4. 전투

1885년 2월 16일, 통킹 원정군 사령관 루이 브리에르 드 리즐 장군은 로랑 조바니넬리의 제1여단과 함께 랑선을 떠나 투옌꽝 포위망을 해제하려 했다. 출발 전, 리즐 장군은 2여단과 함께 랑선에 남아 있던 드 네그리에 장군에게 청나라 국경으로 진격하여 광서군 잔당을 통킹 땅에서 몰아내라고 명령했다. 드 네그리에는 2여단에 식량과 탄약을 재보급한 후, 동당의 광서군을 공격하기 위해 진군했다.

청나라군은 만다린 로드 서쪽에 300m 높이로 솟아 있는 석회암 고원을 중심으로 강력한 요새를 구축했다. 석회암 고원은 북쪽으로 동당에서 청나라 관문까지 뻗어 있었고, 동당을 내려다보며 남동쪽으로 깎아지른 절벽 면을 가지고 있었다. 서쪽 면으로만 올라갈 수 있었으며, 청나라군은 동당 뒤의 정상에서 공격자가 올라와야 할 가파른 서쪽 경사면을 통제하는 안전한 포병 진지를 구축했다. 정상에는 여러 개의 보병 진지와 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청나라군 진지의 왼쪽은 만다린 로드 동쪽 언덕을 따라 배치되어 있었고, 석회암 대산괴 위에 솟아난 보병과 포병 진지로 덮여 있었다. 이 진지들은 대산괴 자체가 청나라군 수중에 있는 한 정면 공격에 대해 안전했다. 대산괴를 공격하려면 프랑스군이 먼저 동당을 점령해야 했다. 청나라군은 우익을 동당 내부와 주변에 배치했다. 저지대는 청나라군 진지의 약점이었지만, 청나라군은 동티엔과 포부, 탓케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서쪽 언덕에 세 개의 튼튼한 포대를 건설하여 방어력을 강화했다. 이러한 '서구식 요새'는 동당 자체를 포함하는 방어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청나라군은 협곡 사이로 전선을 가로지르는 물살이 빠른 개울을 방어선으로 활용하여 프랑스군의 공격을 늦출 수 있었다.[20][21]

동당 전투의 지도, 1885년 2월 23일


드 네그리에의 작전은 3단계로 이루어졌다. 먼저 동당을 점령하기 위해 서부 요새를 점령하고, 그 후 동당을 점령한 뒤, 마지막으로 석회암 산악 지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동당에서 청나라군이 패배한 중요한 요인은 사령관 반정신이 프랑스군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군대를 제대로 집결하지 못한 점이었다. 풍자재가 지휘하는 상당한 규모의 새로운 부대가 동당 동쪽 수 킬로미터 지점에 배치되어 전투에 아예 참가하지 않았다.[31][14]

4. 1. 프랑스군의 초기 진격

프랑스군은 1885년 2월 23일 오전 8시에 랑선을 출발하여 만다린 로드를 따라 동당으로 향했다. 길은 가파른 산들 사이의 좁은 골짜기를 따라 이어졌고, 여러 작은 버려진 마을들을 지나갔다. 청나라군의 기습 공격을 막기 위해 대대장 토노가 디구에의 외인부대 대대, 드 싹시의 포대, 베트남인 척후병과 기병대로 구성된 전위대를 이끌었다. 에르빈제는 나머지 보병과 로페의 포대를 이끌고 뒤따랐다. 143대대는 작전을 위해 각 중대로 나뉘었다. 한 중대는 본대와 함께 행군했고, 두 번째 중대는 후위대를 구성했으며, 나머지 두 중대는 두 포병대를 호위했다.[22]

오전 9시 30분, 프랑스 선봉대는 탐론 마을에 들어가 근처 반빈 마을 위에 비어있는 청나라 요새를 발견했다. 얼마 후, 청나라군 척후병들이 프랑스군의 접근을 알리기 위해 사격을 시작하며 교전이 벌어졌다. 프랑스군은 계속 압박했고, 청나라군은 퇴각하여 도로 왼쪽 고지를 점령했다. 다른 부대가 합류하여 프랑스군 선봉을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프랑스군 선봉대는 만다린 로드 양쪽에 있는 언덕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드 네그리에는 프랑스 부대 선두에 있는 토노 부대와 합류했다. 반빈 마을 북쪽 1km 지점에는 청나라군이 참호를 파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당 계곡을 잘 볼 수 있는 높은 언덕이 있었다. 드 네그리에는 베라르의 외인부대 중대를 보내 언덕을 확보했다. 청나라군 척후병들이 언덕을 점령하고 있었지만, 외인부대원들이 그들을 몰아냈다. 드 네그리에는 로페에게 '베라르 언덕'이라 명명한 언덕 꼭대기에 포대를 배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로페는 대포를 언덕 정상까지 올리려고 애를 썼다. 게일 대위의 통킹 소총병들은 도로 오른쪽에 배치되어 베라르의 중대와 연결되었다. 반면, 디구에의 나머지 3개 대대는 왼쪽에 배치되어 있었다.[23]

4. 2. 청나라군의 방해 공격

토노의 선봉대가 여단의 주력 부대가 접근하여 배치될 공간을 확보하자, 드 네그리에르는 부대의 절반을 왼쪽으로, 나머지 절반을 오른쪽으로 보냈다. 디구에의 외인부대원과 게일의 통킹 소총병은 프랑스군 전열의 중심을 맡게 되었다. 드 네그리에르는 포병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베라르 마운드를 확보하기 위해 우익을 앞으로 보냈고, 좌익을 뒤로 물려 만다린 로드 위에 서로를 받쳐주는 세 개의 사선진으로 여단을 대각선으로 배치했다. 그러나 언덕이 많은 지형에서 이러한 배치는 필연적으로 속도를 늦추었고, 정오쯤에 청나라군은 프랑스군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이기를 바라면서 양쪽 측면을 포위하려 했다.[24][7]

드 네그리에르가 뒤로 물렸던 프랑스군 좌익에 대한 청나라군의 공격은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프랑스군 좌익은 만다린 로드의 남서쪽 뒤편과 디구에의 외인부대원들 왼쪽에 있는 언덕을 점령하고 있던 23대대가 지원하고 있었다. 서부 요새에서 많은 병력을 동원한 청나라군은 23대대와 교전하기 위해 반빈을 향해 계곡을 올라가려 했다. 그들은 2km가 넘는 거리를 행군해야 했고, 이 거리의 절반도 채 가기 전에 프랑스군 대포와 만다린 로드 왼쪽에 배치된 외인부대 3개 중대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공격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 분명해지자, 청나라군은 퇴각했다. 23대대는 이 작전에서 총을 한 발도 쏠 필요가 없었지만, 청나라군은 프랑스군 좌익에 대해 더 이상의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25][8]

반면, 로페의 포대와 호위대, 외인부대 중대가 점령한 베라르 마운드를 지키고 있는 프랑스군 우익에 대한 청나라군의 공격은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청나라군 보병은 상당한 병력이 있었으며, 이때는 포병의 지원도 충분히 받았다. 동당 뒤의 절벽 위 진지에서 로페의 포대와 교전을 시작한 적 포병은 곧 포대의 위치를 찾아냈고, 청불 전쟁 중 특이하게도 프랑스군은 잘 조준된 포격을 받았다. 청나라군 포격의 속도와 정확성에 당황한 로페는 포대 위치를 변경해야 했다. 드 네그리에르는 베라르 마운드에 슈에프를 보내 자신의 외인부대 대대 소속의 라스꼼브와 고쉐롱의 중대로 수비진을 보강하게 했다. 그러자 라스꼼브와 베라르는 프랑스군 진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반격을 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갔다. 베라르는 이 반격으로 가슴에 총상을 입고 중상을 입었지만, 드 프로디 중위가 즉시 그의 중대 지휘를 맡아 프랑스군을 이끌고 진격했다. 청나라군은 무질서하게 퇴각했다.[26][9]

4. 3. 서부 요새 공격

프랑스군은 청나라의 측면 공격을 모두 물리치고 공세를 계획했다. 드 네그리에의 작전은 3단계로, 먼저 동당을 점령하기 위해 서부 요새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드 네그리에는 서부 요새 공격을 준비하며 청나라군 진지에 포격을 가했다. 드 싹시와 주르디의 포대는 오후 1시까지 석회암 대산괴의 청나라 대포를 침묵시켰다. 이후 프랑스 포대는 만다린 로드 동쪽 언덕의 청나라 요새로 목표를 변경했다. 프랑스군 보병대는 전진하지 않았고, 청나라군은 포격에 대응하지 못하고 후방 경사면으로 대피했다.

오후 3시 직전, 드 네그리에는 에르빈제에게 111대대와 외인부대 5개 대대, 게일의 통킹 소총병의 엄호를 받으며 서부 요새를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청나라군은 요새를 포기하고 탓케로 퇴각했다. 에르빈제는 디구에의 병사들에게 후퇴하는 청나라군을 추격하여 요새를 설치하라고 명령하고, 나머지 부대는 동당 공격을 위해 재편성했다.

4. 4. 111대대, 동당 점령

도시 남쪽에 있는 대부분의 집들은 프랑스군 대포 포격으로 인해 불탔으며, 현재 그 진지에는 소수의 청나라 척후병들만 지키고 있었다. 에르빈제는 도시에 대한 주요 공격은 111대대가 해야 하며, 통킹 소총병과 쇼에프 외인부대 대대의 브루네와 미쉘의 중대의 보조를 받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111대대는 석회암 대산괴 정상 양쪽에서 퍼붓는 총격 속에서 1km의 개활지를 가로질러 전진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동당에 있는 청나라군 척후병 무리에게서도 총격을 받아야 했다. 프랑스군 징집병들은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 결국 마을 외곽에서 200m 떨어진 동당 개울에 이르렀다. 여기서 그들은 망설였다. 병사들은 적의 총격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중대 장교들은 모범을 보이기 위해 개울로 뛰어들어, 허리 높이의 물길을 뚫고 반대쪽으로 건너갔다. 일단 마른 땅으로 나온 후, 군인들은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을 했다. 즉, 동당의 대피소에 도달하여 석회암 대산괴에서 쏟아지는 총격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었다. 완전히 무질서하게, 최대한 빨리 거리를 좁히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111 대대의 젊은 병사들은 활활 타오르는 마을로 마구 돌진했다. 놀란 중대 장교들은 이 즉흥적인 돌진 앞에 칼을 머리 위로 흔들며 그들의 부하들에게 더 힘을 내서 돌진하라고 촉구하며 달려갔다. 이 급격한 공격 속도와 분노는 청나라의 척후병을 놀라게 했다. 그들은 동당을 철수하려 했지만, 프랑스군의 속도에 대처하지 못했다. 111대대 병사들은 길거리나 집 안쪽에 있는 뒤처진 사람들을 가두어 놓고 몽둥이로 치거나 총칼로 찔러 죽였다. 그 후 111 대대는 석회암 대석괴에 청나라군이 잘 엄호하고 있었던 동당 안에서 재집결했다.[27][10]

4. 5. 석회암 대산괴 공격

지금까지 전투를 제대로 보지 못한 23대대는 프랑스군 좌익의 위치에서 공격에 무게를 더하기 위해 앞으로 나갔다. 그 후 에르빈제는 2개 대대를 이끌고 대석괴 서쪽 경사면을 향해 전진했다. 쇼에프의 외인부대 2개 중대가 뒤따라 가며 계속 지원했다. 게일의 통킹 소총병은 111대대와 함께 동당에 돌입했고, 에르빈제는 프랑스군이 청나라 전열의 핵심 지점을 공격할 때 동당을 확보하라고 명령했다.[28]

111대대가 동당에서 물러나자, 대산괴 정상에서 집중 포화가 쏟아졌다. 다시 대대가 최대한 빨리 비탈길을 기어오르자 병사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포르는 대대의 4개 중대에 교전을 하도록 배치했으며, 3개 중대를 위로 올리고, 1개 중대를 지원하게 했다. 청나라 진지에서 가장 가까운 오른쪽에 있는 전위 중대는 사상자 수가 가장 많았으며, 2연대 에밀 포르티에 중위는 전진 도중 사망했다. 그런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111대대는 경사를 올라가며 압박 공격을 가했다. 드 콜롬 중위는 중대와 함께 가장 큰 청나라 참호를 점령했지만, 저항은 더 거세졌고, 대대 전체가 점령하기 전에 청나라군 주둔지에서 내동댕이쳐야만 했다.

청나라군 우익이 탓께 쪽으로 돌아오면서, 프랑스군은 석회암 대산괴 정상에서 여전히 버티고 있는 청나라군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111대대와 외인부대 2개 지원 중대는 남쪽 끝에서 이미 정상에 도달했으며, 이제 동쪽 끝을 따라 이동하면서 만다린 로드의 유리한 지점에서 적을 제거했다. 소규모의 청나라군은 몇 개의 고립된 바위에 달라붙었지만, 곧 프랑스 보병들에 의해 이러한 위치에서 이탈하게 되었다.[29]

4. 6. 작전 마무리

동당 북동쪽 언덕에는 강력한 적군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청나라 국경으로 이어지는 계곡 입구를 내려다보고 있어 프랑스군이 만다린 로드로 진출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게일(Geil)은 통킹 소총병을 이끌고 동당에서 앞으로 나아가 청나라군을 정면에 묶어두었다. 드 싹시(de Saxcé)의 포병대는 포부(Pho Bu) 바로 북쪽에 있는 언덕을 차지했고, 거기서 가까운 거리에서 청나라군을 공격했다. 라스꼼브(Lascombes)와 드 페로디(de Féraudy)의 외인부대 중대는 청나라군의 측면을 돌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곧 진지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청나라군은 퇴각했다.

드 네그리에는 디구에 대대의 최전방 2개 중대에게 탓케(That Ke)로 가는 길을 지키라고 명령하고, 111대대에게는 석회암 대석괴를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나머지 여단에게는 끄어아이(Cua Ai) 마을과 청나라 관문을 폐쇄하게 했다. 청나라 관문에 가장 먼저 도착한 부대는 슈에프 대대의 브루네(Brunet)와 미쉘(Michel) 중대였는데, 이들은 석회암 대산괴 정상에 111대대만 남겨두고 평원으로 내려왔다. 관문은 두 개의 측면 요새로 보호받았고, 인근 언덕 비탈을 따라 참호도 파여 있었다. 그러나 이 방어선을 점령한 청나라군은 전투 중에 동당 주변의 전우들과 합류하기 위해 전진 배치된 상태였다. 프랑스군이 청나라군을 바싹 뒤쫓아 전열이 돌파되면서, 청나라군은 이 자리에 집결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외인부대원들이 청나라 관문을 점령했고,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국경을 넘어 청나라 땅으로 진출했다.

나머지 여단 병력은 점차 끄어아이에 집결했다. 만다린 로드 동쪽 언덕에 있던 라스꼼브와 드 페로디의 중대가 동당 계곡으로 내려와 슈에프의 부하들 바로 뒤에 청나라 관문에 도착했다. 오른쪽 끝에서 슈에프는 오후 내내 측면 방어를 맡았던 고쉐롱(Gaucheron) 중대를 불러들였다. 마지막으로, 게일의 통킹 소총병 부대와 23대대가 길을 따라왔다. 해질 무렵, 2여단 대부분이 청나라 관문에 집결했다.[30]

동당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중요한 요인은 사령관 반정신이 프랑스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군대를 집결하지 못한 것이었다. 풍자재가 지휘하는 상당한 규모의 새로운 부대가 동당의 동쪽에서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국경을 담당하기 위해 남겨졌으며 전투에는 아예 참가하지도 못했다.[31]

5. 결과 및 영향

동당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9명이 사망하고 46명이 부상당하는 비교적 가벼운 피해를 입었다.[32][15] 반면 청나라군은 훨씬 더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장군 3명이 포함되었다. 반정신과 동리고(董履高)가 부상을 당했고, 동리고는 중상을 입었으며, 양옥과(楊玉科)가 사망했다.

프랑스군이 통킹 영토에서 청나라군을 몰아낸 후 광서 지방으로 잠깐 넘어갔다는 소식은 룽저우(龍州)와 베트남 국경 근처의 다른 지방 도시에서 공황을 일으켰다. 많은 청나라 민간인들이 고향을 떠나 서강을 타고 도망쳐 피난처를 찾았다.[33]

2월 25일, 프랑스군은 진남관의 통킹-광서 국경에 있는 정교한 청나라식 건물인 ‘중국 관문’을 폭파했다. 드 네그리에는 청나라 국경의 폐허에 한자로 “청나라는 국경을 지키는 것은 돌담이 아니라, 성실한 조약 이행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나무 간판을 세웠다. 이 메시지는 1884년 6월 박레 매복을 겨냥한 것으로, 프랑스군은 1884년 5월 11일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서명된 톈진 협약의 조건을 청나라군이 심각하게 위반했다고 주장했다.[34][16]

2여단은 청나라 본토로 진출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했다. 2월 말, 드 네그리에는 여단 대부분을 데리고 랑선으로 돌아왔다. 에르빈제 중령의 지휘 하에 소규모 프랑스 수비대가 광서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해 동당에 남겨졌다.[35][17]

3주 후 청나라는 동당 주둔지를 공격하여 진남관 전투(1885년 3월 24일)에서 프랑스를 패퇴시킴으로써 청불 전쟁의 종결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세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36][18]

참조

[1] 서적 (서적 제목 미상)
[2] 서적 (서적 제목 미상)
[3] 서적 (서적 제목 미상)
[4] 서적 (서적 제목 미상)
[5] 서적 (서적 제목 미상)
[6] 서적 (서적 제목 미상)
[7] 서적 (서적 제목 미상)
[8] 서적 (서적 제목 미상)
[9]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0]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1]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2]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3]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4] 서적 (서적 제목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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