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함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동양함대는 1880년대부터 1914년까지 동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한 독일 제국 해군 함대이다. 1861년 톈진 조약 이후 독일 군함의 중국 해역 활동이 가능해지면서 해군력 증강이 시작되었고, 1894년 청일 전쟁 발발 이후 동아시아 순양함 사령부를 창설하여 칭다오를 기지로 삼았다. 의화단 운동 당시에는 다구 포대 전투 등에 참여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에는 일본, 호주 해군에 비해 열세인 상황에서 통상 파괴전을 벌였으나, 엠덴 침몰, 코로넬 해전, 포클랜드 해전 등에서 주력 함대가 파괴되었다. 칭다오 기지는 일본에 점령되었으나, 1922년 중화민국에 반환되었다.
1861년 프로이센 왕국과 청나라 간에 체결된 톈진 조약으로 독일 군함이 중국 해역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1] 이후 독일 통일과 더불어 동아시아의 경제적, 정치적 중요성이 커지면서, 1881년 독일은 이 지역에 해군 비행대를 편성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은 아프리카 식민지를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1885년 아프리카 순양함대를 창설하고 동아시아 지역의 해군력은 2척의 소형 포함으로 축소했다.
1894년 청일 전쟁 발발은 독일 제국이 중국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빌헬름 2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독일 해군은 동아시아 순양함 사령부(Kreuzerdivision in Ostasien)를 창설하고, 파울 호프만 제독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호프만은 독일의 이익을 보호하고 중국 내 독일 기지 후보지를 조사하라는 임무를 받았다.[3][4]
2. 역사적 배경
2. 1. 초기 독일 해군의 동아시아 진출
1861년 프로이센 왕국과 중국 사이의 톈진 조약으로 프로이센 전함이 중국 연안에서 활동하는 것이 허용되었다.[1] 통일 직후 독일에서 극동이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해짐에 따라, 1881년 비행대가 제독의 명에 의해 이 지역에 설립되었다.[1] 그러나 독일에서는 아프리카 식민지들을 더 가치 있게 보았으므로, 1885년에는 아프리카 순양함대가 영구적인 지위로 만들어졌고, 직후 독일 해군은 2대의 작은 포함으로 동아시아에서 군사력을 축소시켰다.[1] 아프리카 순양함대는 1893년 독일 북부 항구도시 킬로 복귀하여 해산되었다.[1]
2. 2. 라이프치히 함의 활동 (1888-1892)
1888년부터 1892년까지 SMS 라이프치히는 독일 동아시아 함대의 기함 역할을 수행했다. 처음에는 카를 아우구스트 데인하르트 해군 소장의 지휘를 받았다.[1] 그는 1888년 7월 14일 아덴에서 함선의 지휘권을, 8월 2일 잔지바르에서, 8월 31일 케냐 만다 베이에서 함대 지휘권을 인수했다. 원래 계획되었던 남해로의 항해는 동아프리카에서 발생한 문제로 인해 취소되었다. 그 결과, 라이프치히는 아부시리 반란 진압에 참여하게 되었다. 1889년 5월 8일, 함선의 상륙 부대는 바가모요 근처 부쉬리 야영지 습격에 참여했고, 7월 8일에는 팡가니 점령에도 참여했다.[2]
반란 진압 후, 라이프치히는 정비를 위해 8월과 9월에 걸쳐 케이프타운으로 이동했다. 9월 초, 데인하르트는 빌헬름 2세 황제로부터 동지중해에 있는 자신의 함선에 보고하라는 전보를 받았다. 10월 28일, 지중해에 진입한 라이프치히는 11월 1일 미틸리니섬 부근에서 훈련 함대에 합류했다. 황제는 11월 6일 콘스탄티노플에서 돌아온 데인하르트를 만나 동아프리카 순양함 함대 구성원에게 특별 내각 칙령을 수여했다. 모든 독일 선박은 이탈리아로 이동하여 11월 12일 베네치아에 정박, 케이프타운에서 중단되었던 수리를 계속했다. 12월 15일 이후, 이들은 몰타 해역을 거쳐 포트사이드로 이동하여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그곳에서 보냈다.[2]
1890년 1월 27일, 라이프치히는 단독 항해를 시작하여 SMS 카롤라, SMS 슈발베, SMS 슈페르버와 함께 극동으로 출발했다. SMS 일티스와 SMS 볼프 포격함은 동아프리카로 돌아갔다. 3월 16일, 빅토르 발루아 해군 소장이 함대의 새로운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라이프치히는 인도 코친(3월 20일)을 방문하고, 중국과 일본 항구들을 순방했다. 발루아는 나가사키에서 기함과 합류했다. 그 후, 이들은 홍콩, 마닐라를 거쳐 싱가포르로 이동하여 SMS 소피와 만났다. 7월에는 인도네시아, 댐피어 해협, 비스마르크 제도, 오스트레일리아의 뉴캐슬, 시드니(9월 15일), 저비스 베이를 방문했다. 호주에서는 SMS 알렉산드리네와 합류했고, 수에즈 운하에서 발생한 손상으로 라이프치히가 수리된 후 사모아와 뉴질랜드(11월)를 방문했다. 1891년 초에는 홍콩(2월 14일)과 중국 항구들을 방문했고, 우쑹에서는 좌초되기도 했다.[2]
1891년 5월, 요코하마에서 발루아는 1891년 칠레 내전으로부터 칠레의 독일 권익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칠레로 가는 도중 석탄이 부족하여 97시간 동안 예인되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잠시 들른 후, 7월 9일 발파라이소에 도착했다. 7월과 8월에는 이키케와 코킴보를 방문했다. 전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인 8월 20일, 발파라이소로 돌아온 라이프치히는 영국 코르벳 HMS 챔피언과 함께 도시의 영국 및 독일 구역을 보호하기 위해 합동 상륙 부대를 발파라이소에 파견했다. 내전이 끝날 무렵, 라이프치히는 여러 남아메리카 항구를 방문한 후 케이프타운을 방문했다. 1892년 3월, 딜라고아 만에 정박한 라이프치히의 새로운 사령관 프리드리히 폰 파벨스츠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새로운 대통령 폴 크루거에게 대표단을 이끌었다. 아프리카 순양함 함대는 1893년 킬에서 해체되기 위해 독일로 귀환했다.[2]
3. 동아시아 함대의 성립
호프만은 함대가 임무 수행에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해군에 함선 교체를 요청했고,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져 장갑 프리깃함 카이저, 경순양함 프린체스 빌헬름 및 소형 순양함 코르모란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기지가 없었던 호프만은 함선의 기술 및 물류 지원을 위해 홍콩의 영국, 상하이의 중국, 나가사키의 일본에 의존해야 했다. 빌헬름 2세와 독일 정부는 동아시아에 기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5]
1896년 6월,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이 호프만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기지 부지를 물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티르피츠는 자오저우만을 선호했지만, 다른 후보지들도 거론되었고 티르피츠 자신도 최종 보고서에서 결정을 망설였다. 이후 티르피츠는 본국으로 소환되어 동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티르피츠의 후임으로 오토 폰 디에데리히스 제독이 순양함 사령관이 되었다. 해군은 기지 부지를 확정하지 못했지만, 디데리히스는 "자오저우만이 나의 노력의 목표이다."라고 단언했다.[6]
3. 1. 칭다오 기지 확보
1897년 11월 1일, 산둥성에서 독일인 선교사 2명이 살해된 사건(차오저우 교안)은 디데리히스에게 "독일인 선교사 보호"라는 상륙 명분을 제공했다.[7] 11월 14일, 디데리히스는 산둥성 교주만(현 칭다오)을 점거했다. 1898년 1월, 방호순양함 "카이저린 아우구스타"(:en:SMS Kaiserin Augusta)가 도착하고 칭다오 주둔 부대인 해병대대(Seebatallion)가 상륙할 때까지 제국 해군의 지배는 비교적 불안정했다.
1898년 3월 6일, 독일 대사와 청나라 총독은 교주만을 99년간 조차하는 독청 조약에 서명했고, 이 지역의 식민지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8] 가난한 어촌이었던 칭다오는 해군 기지와 지원 시설을 갖춘 독일 제국 해군의 동양 기지로 건설되었다.
1899년 디데리히스는 해군 본부 참모장으로 전임되어 베를린으로 돌아갔고, 후임으로 해군 소장 하인리히 황자가 부임했다. 이후 동양 함대 사령관은 쿠르트 폰 프리트비츠 소장, 펠릭스 폰 벤데만 소장, 프리드리히 폰 인게놀 소장, 에리히 귈러 소장, 귄터 폰 크로지크 소장, 막시밀리안 폰 슈페 백작 순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동양 함대는 확충·근대화 계획에 따라 근대적 함정이 배치되었다.
3. 2. 역대 사령관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 제독이 1899년 동아시아 순양함 전대의 지휘관으로 부임한 이후, 쿠르트 폰 프리트비츠, 펠릭스 폰 벤데만, 알프레드 브로이징, 카를 쾨르퍼, 프리드리히 폰 인게놀, 에리히 귈러, 귄터 폰 크로시크, 막시밀리안 폰 슈페 제독이 차례로 지휘를 맡았다.[8]
4. 의화단 운동
1900년 의화단 운동 발발 당시 동양함대는 제대로 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펠릭스 폰 벤데만 제독은 황해 작전을 위해 러시아와 영국으로부터 각각 해도와 지도를 빌려야 했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데만은 다구 포대 점령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독일 함선들은 다구 포대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0]
4. 1. 톈진 전투와 세이무어 원정
1900년 6월 8일, 벤데만 제독은 대형 순양함 SMS ''Hansa'', SMS ''Hertha''와 소형 순양함 SMS ''Gefion'', SMS ''Irene''을 다른 국가의 군함들과 함께 다구 포대 앞에 배치하여 톈진에 있는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해병대(''Seebatallione'')를 상륙시켰다.[9] 같은 해 6월, SMS ''Gefion''의 지휘관인 오토 베니거 중위는 500명의 해병 상륙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고, 세이무어 원정에 참여하여 베이징 외교단을 구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10]5.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막시밀리안 폰 슈페 백작이 지휘하는 동양함대는 연합국 해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다. 특히 일본 제국 해군과 오스트레일리아 왕립 해군을 경계했는데,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왕립 해군의 기함인 순양전함 오스트레일리아 한 척이 자신의 함대 전체보다 우월하다고 평가했다.[11]
당시 동양함대는 다음 5척의 주력 군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함급 | 함명 |
---|---|
샤른호르스트급 |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 |
드레스덴급 | 엠덴 |
브레멘급 | 라이프치히 |
쾨니히스베르크급 | 뉘른베르크 |
이 외에도 낡은 부사르급 순양함 가이어와 Cormorande, 어뢰정 SMS ''S90''과 SMS ''Taku'', 그리고 다양한 포함들이 함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슈페는 함대가 처한 곤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완전히 집이 없다. 독일로 갈 수 없다. 우리에게는 다른 안전한 항구가 없다. 나는 탄약이 다 떨어질 때까지, 또는 힘에서 훨씬 우월한 적이 나를 잡을 때까지 할 수 있는 한 많은 악행을 저지르며 세계의 바다를 항해해야 한다."[11]
엠덴의 초기 성공에 힘입어, 슈페는 엠덴을 인도양으로 보내 통상 파괴 작전을 수행하게 했다. 주력 함대는 동쪽 태평양과 독일 우호적인 중립국이 있는 남아메리카 해안(특히 칠레)으로 이동하여 보급을 확보하려 했다.[12] 엔진 상태가 좋지 않았던 순양함 ''Cormoran''은 뒤쳐졌고, 나포된 러시아 선박 ''랴잔''을 개조하여 코르모란으로 개명, 통상 파괴선으로 활용했다.
5. 1. 엠덴의 통상 파괴전
경순양함 엠덴은 인도양 전역에서 통상 파괴를 수행하여 영국 또는 그 동맹국 선적의 함선 29척을 매복하여 격침했다.[12] 페낭 해전에서 엠덴은 페낭 항을 기습하여 러시아 해군의 방호순양함 젬추크와 프랑스 해군의 구축함 무스케를 격침했다.[12] 마드라스에서는 함포 사격으로 유조소를 파괴했다.[12] 1914년 11월 9일, 코코스 해전에서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의 경순양함 시드니와의 전투에서 대파, 좌초되었다.[12]5. 2. 주력 함대의 이동과 최후
1914년 11월 1일, 슈페 제독이 이끄는 동양함대는 코로넬 해전에서 영국 북아메리카 및 서인도 제도 함대와 교전하여 영국 순양함 굿 호프와 먼마우스를 격침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13]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함대를 이끌고 독일로 귀환하려던 슈페 제독은 1914년 12월 8일 포클랜드 해전에서 훨씬 강력한 영국 해군과 마주쳤다.[13] 이 해전에서 영국 순양전함과 순양함에 의해 동양함대의 주력 함선 대부분이 파괴되었다.[13]

경순양함 드레스덴과 몇 척의 보조 함선은 포클랜드 해전에서 파괴를 피하고 태평양으로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13] 하지만, 이들 역시 결국 운명을 피하지는 못했다. 보조 함선들은 칠레 항구에 억류되었고,[13] ''드레스덴''은 마스 아 티에라 해전에서 자침했다.[13]
6. 칭다오 함락과 일본의 조차지 점령
1897년 11월 1일, 산둥성에서 독일인 선교사 살인 사건(차오저우 교안)이 발생하자, 디데리히스는 이를 "독일인 선교사 보호"라는 명분으로 삼아 11월 14일 산둥성 교주만(현 칭다오)을 점거했다.[3] 1898년 1월에는 방호순양함 "카이저린 아우구스타"가 도착하여 칭다오 주둔 부대가 되는 해병대대(Seebatallion)가 상륙했다.
1898년 3월 6일, 독일 대사와 청나라 총독은 교주만을 99년간 조차하는 독청 조약에 서명하여, 이 지역의 식민지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전까지 가난한 어촌이었던 칭다오에는 독일 제국 해군의 동양 기지가 건설되었다.
1899년 디데리히스는 해군 본부 참모장으로 전임되어 베를린으로 돌아갔고, 후임으로 하인리히 황자가 부임했다. 이후 동양 함대의 사령관은 여러 차례 교체되었다. 이 시기 동양 함대는 확충 및 근대화 계획에 따라 근대적 함정이 배치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일본 제국은 영일 동맹을 근거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칭다오를 공격했다. (→ 칭다오 전투)
1915년 일본은 중화민국에 "대 중화 21개조 요구"를 제출하여 조차권 이양을 인정받았다.[3]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도 이를 승인했지만, 중국에서는 5·4 운동 등 격렬한 반일 운동이 일어났고, 중국 정부는 조약 조인을 거부했다.[3] 1922년 산둥 현안 해결에 관한 조약에 따라 일본은 자오저우만 조차권을 포기하고 해당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했으며, 일본군도 철수했다.[3]
6. 1. 칭다오 전투
1899년에 건조되어 칭다오에서 수리 중이던 구식 순양함 코르모란 외에 4척의 소형 포함 이르티스, 야구알, 티거, 룩스와 어뢰정 S90, 타쿠는 성능상 장기간의 해상 행동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칭다오에 잔류했다.[3] S90은 칭다오 전투에서 일본의 해방함(구 방호 순양함) 다카치호를 격침시켰지만, 대부분의 함선은 육상 포대의 증강이나 가상 순양함의 정비를 위해 무장과 병력을 제공하여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고, 1914년 11월 일본군에 의한 칭다오 요새 함락 직전 각 함선의 승무원에 의해 자침되었다.[3]6. 2. 일본의 조차지 점령과 반환
1912년에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외교권을 계승한 중화민국(위안스카이 정권)에 대해 1915년에 "대 중화 21개조 요구"를 제출하여, 조차권의 이양을 그대로 인정하게 했다.[3] 1919년의 파리 강화 회의에서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의 산둥 조항에 의해, 대전 후에 성립한 독일국(바이마르 공화국)도 이를 승인했지만, 중화민국에서는 5·4 운동 등 격렬한 반일 민중 운동이 일어났고, 중화민국 정부도 베르사유 조약 조인을 거부했다.[3] 구미 제국의 반발도 있어, 1922년에 일중간에 체결된 산둥 현안 해결에 관한 조약에 의해 일본은 자오저우만 조차권을 포기하고, 해당 지역은 중화민국으로 반환되어, 일본군도 철수했다.[3]7. 평가 및 영향
동아시아 함대는 독일 제국이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만든 핵심적인 도구였다. 칭다오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의 국제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97년 산둥성에서 독일인 선교사가 피살된 사건(차오저우 교안)을 계기로, 1898년 독일은 칭다오를 점령하고 조차하였다. 이후 칭다오는 독일 해군의 주요 기지가 되었고, 동양 함대는 근대화 계획에 따라 함정을 확충해 나갔다.
동아시아 함대의 활동은 일제강점기 이전 한국의 국제 정세에도 영향을 미쳤다.
7. 1.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평가
동아시아 함대의 활동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적인 행태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1897년 산둥성에서 발생한 독일인 선교사 피살 사건(차오저우 교안)을 구실로 1898년 칭다오를 무력으로 점거하고, 이를 조차한 것은 주권 국가에 대한 명백한 침해 행위였다.1898년 3월 6일, 독일과 청나라 간에 체결된 독청 조약은 99년간 칭다오를 독일에 할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이는 제국주의 열강이 무력을 앞세워 약소국의 영토를 강탈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이후 독일은 칭다오에 독일 제국 해군의 동양 기지를 건설하고, 해군 기지와 지원 시설을 확충하며 본격적인 식민지 경영에 나섰다.
이러한 독일의 칭다오 강점은 이후 일본이 독일의 칭다오 조차권을 승계하고, 이를 발판으로 한국을 식민지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는 제국주의 열강 간의 야합과 그로 인한 약소국의 피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동아시아 함대의 역사는 강대국의 이익 추구 과정에서 발생하는 약소국의 희생과 주권 침해의 문제를 되새기게 하며, 국제 관계에서 정의와 평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참조
[1]
서적
By Order of the Kaiser
[2]
서적
[3]
문서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문서
[8]
서적
Castles of Steel
[9]
서적
By order of the Kaiser: Otto von Diederichs and the rise of the Imperial German Navy, 1865–1902
Institute Press
2003
[10]
서적
The origins of the Boxer War: a multinational study
Routledge
2003
[11]
서적
[12]
서적
[13]
웹사이트
中國海軍史上第一次戰利艦
http://60-250-180-26[...]
2013-04-1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