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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현 (대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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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현은 전한 애제의 총애를 받아 대사마에 오른 인물이다. 태자사인으로 시작하여 애제의 눈에 띄어 승진을 거듭했으며, 그의 가문 또한 혜택을 받아 아버지 동공은 운중후에 봉해지고, 여동생은 소의가 되었으며, 처가도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건평 4년에는 유운의 모반을 고발한 공로로 고안후에 봉해졌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대사마가 되었으나, 애제가 후사 없이 죽자 몰락하여 자결했다. '단수' 고사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으며, 권력 남용과 가문 득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애제를 보좌한 충성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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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현 (대사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진구량의 무쌍보에 묘사된 동현
진구량의 무쌍보 (無雙譜, Table of Peerless Heroes)에 묘사된 동현
출생일기원전 22년
사망일기원전 1년 8월 16일 (21세)
배우자기혼
상대한 애제
직업군사령관

2. 생애

태자사인을 지내던 중 애제의 눈에 들어 남색(남성 간의 동성애) 상대가 되었고, 총애를 받아 대사마까지 승진했다.[18] 동현의 영달은 가문 전체에 영향을 미쳐, 아버지 동공운중(雲中侯)에 봉해지고 구경의 반열에 올랐으며, 여동생은 소의(昭儀)가 되어 입궁했다. 또한 처가 역시 혜택을 받아 장인은 장작대장에, 처남은 집금오에 임명되었다.[18]

건평 4년(기원전 3년), 동평양왕의 모반을 고발한 공로로 고안후(高安侯)에 봉해져 식부궁·손총과 함께 열후가 되었다.[18] 애제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승상 왕가는 이를 만류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비록 중상시 왕굉의 만류로 무위에 그쳤으나, 애제는 요임금·순임금의 고사를 따른다며 선양을 고려하기도 했다.[18] 동현의 봉읍은 2천 호에 달했다.[18]

원수 2년(기원전 1년), 애제는 동현에게 새수(璽綬)를 넘겨주고[18] 사망했다. 그러나 왕태후의 동의를 얻어 궁에 들어온 왕굉에게 새수를 빼앗겼고, 왕태후는 동현이 어리다는 이유로 대사마에서 해임했다.[18] 동현은 해임 조서가 당도한 날에 아내와 함께 자결했으며,[18] 재산은 몰수되고 일족들은 유배되었다.[18]

원수 2년(기원전 1년) 정월, 흉노선우인 대곤미가 한나라에 방문했다. 애제는 연회를 열어 환영했고, 여러 신하들도 함께 했다. 대곤미는 동현의 나이가 젊은 것을 이상하게 여겨 통역에게 질문했고, 애제는 "대사마(동현)는 매우 현명하여 젊은 나이에도 이 지위에 있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대곤미는 일어나 경의를 표하며 한나라가 훌륭한 신하를 얻은 것을 축하했다.[18]

과거 승상 공광어사대부였을 때, 동현의 아버지 동공은 어사로 근무했다. 동현이 대사마가 되어 공광과 삼공의 자리에 나란히 오르게 되자, 동현은 애제의 명으로 공광의 저택을 방문했다. 공광은 애제가 동현을 총애하는 것을 알고 공손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맞이하고 정중하게 배웅하며 동현과 대등하게 예를 갖추지 않았다. 동현이 돌아가 보고하자 애제는 기뻐하며 공광 형의 아들 두 명을 간대부 상시로 임명했다. 이로써 동현은 애제와 권력을 동등하게 나누는 위치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18]

2. 1. 초기 경력

동현은 좌풍익 운양현 출신으로, 어사였던 동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태자사인으로 시작했으나, 수화 2년(기원전 7년) 애제 즉위 후 낭으로 옮겨갔다. 그 후 2년여 동안 낭으로서 애제를 계속 보좌했다. 동현은 타고난 미모를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여겼다.[18]

건평 2년(기원전 5년), 동현은 현재의 시각을 알리기 위해 애제를 알현했다. 애제는 동현의 뛰어난 미모를 보고 "이 사람이 사인의 동현인가?"라고 말을 걸었다. 애제는 동현을 발탁하여 전상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황문랑으로 임명하여 이로부터 애제에게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동현의 아버지 동공이 운중후임을 알게 되자, 그 날로 패릉 현령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윽고 광록대부로 전임되었다.[18]

애제가 동현에게 쏟는 총애는 날마다 심해졌고, 동현은 부마도위 · 시중에 임명되었다. 애제가 외출할 때는 수레에 함께 탔고, 궁정에 있을 때는 좌우에 머물렀다. 10개월 동안 주어진 은상은 1억에 달했고, 그 존귀함은 조정을 뒤흔들었다.[18]

동현은 항상 애제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어느 날, 함께 낮잠을 자던 중 애제가 먼저 눈을 떴지만, 옆에는 자신의 옷의 큰 소매 위에서 동현이 아직 곤히 잠들어 있었다. 여기서 자신이 일어나면 동현을 깨우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것은 차마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 애제는, 사람을 시켜 동현이 누워 있던 쪽의 소매를 잘라내게 했다. 이 고사남색(동성애)의 별칭 중 하나인 '단수'(斷袖)의 유래가 되었다.[18]

동현은 부드러운 성격으로, 다른 사람의 뜻을 헤아리고 아첨하는 데 능숙하여 자신의 입장을 지켰다. 세탁 휴가를 받았을 때도 궁궐 밖으로 나가지 않고 궁궐에 머물면서 의약에 관한 것을 조사했다.[6]

기원전 4년, 18세의 나이에 그는 시중과 부마도위, 즉 황실 말 관리를 감독하는 직책을 맡았다. 애제와의 관계는 그의 권력과 명성을 급격히 증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 2. 애제와의 관계와 권력 상승

애제는 태자사인(太子舍人)을 지내던 동현의 뛰어난 미모에 반해[1] 남색(남성 간의 동성애) 상대로 삼았다.[18] 동현은 애제의 총애를 바탕으로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애제는 동현에게 막대한 재물을 하사하고[1], 동현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마다 동행하게 했으며, 궁으로 돌아오면 그를 보좌하게 했다.[1]

동현의 아내는 궁궐 출입에 전례 없는 허가를 받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고, 동현과 함께 궁 안에 거처를 마련했다.[1] 애제는 동현의 누이를 황후 바로 아래 지위인 '소의(昭儀)'라는 칭호를 주어 황실 후궁으로 삼았다.[1] 동현의 아버지 동공소부가 되었고, 관내후 작위를 받았다.[1] 나아가 애제는 황실 건축가에게 명령하여 동현을 위해 미앙궁 바로 바깥에 호화로운 저택을 짓게 했는데, 그 저택은 황궁과 같을 정도로 컸다고 전해진다.[1] 또한 애제는 황실 창고에서 가장 좋은 무기와 가장 값진 보물을 동현에게 하사했고[1], 동현의 사후 장례에 사용할 도구들을 미리 하사했으며, 동현의 묘는 애제의 묘 바로 옆에 지어졌다.[1]

동현은 애제와 함께 낮잠을 자던 중, 애제가 먼저 깨었으나 동현이 자신의 옷소매 위에서 잠들어 있자 소매를 자르고 동현을 깨우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이 고사는 남색의 별칭 중 하나인 '단수'(斷袖)의 유래가 되었다.[6]

기원전 4년, 동평양왕 유운(劉雲)이 주술을 사용했다는 보고가 있자, 애제는 이 음모가 동현을 통해 보고되었다고 발표한 후, 기원전 3년에 동현을 고안후(高安侯)에 봉했다.[1] 승상 왕가는 애제의 행동에 반대하다가 목숨을 잃었다.[18] 애제는 임금·임금의 고사를 따른다며 선양을 고려하기도 했으며[18], 동현의 봉읍은 2천 호에 이르렀다.[18]

기원전 1년 1월 30일,[3] 애제는 22세(동아시아식 나이)의 동현을 삼공 중 하나인 대사마에 임명했다.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4]

: "하늘이 그대를 한나라의 조력자로 주셨소. 그대의 충성을 알고 있기에, 그대가 제국의 대사를 이끌고 선을 따르기를 바라오."

이 조서의 문구는 요가 순에게 제위를 넘겨줄 때 사용되었다고 전해지는 문구를 따른 것으로, 이 조서를 읽은 모든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4]

2. 3. 권력 남용과 주변 인물들의 비판

애제가 동현에게 지나치게 권력을 몰아주자, 이를 견제하려 한 많은 관리들이 애제에게 간언했지만, 오히려 그들이 처벌받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러한 관리들의 노력과 그에 따른 결과는 다음과 같다.

  • 정숭: 태중대부였던 정숭은 애제에게 동현에 대한 과도한 포상을 자제할 것을 요청했으나, 기원전 3년에 체포되어 옥사했다.[1]
  • 손보: 경조윤이었던 손보는 정숭을 석방하려 시도하다가 스스로 면직되었다.[1]
  • 무장륭: 장안의 치안 책임자였던 무장륭은 동현에게 무기를 넘겨주기를 거부했다가 패군의 치안 책임자로 좌천되었다.[1]
  • 왕가: 승상이었던 왕가는 동현의 제후 봉작과 승진을 여러 차례 막으려 했다. 기원전 2년에 옥에 갇혀 자결했다.[1] 애제의 외삼촌 정명은 왕가와 친분이 있었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면직되고 봉지로 돌아갔다.[1]
  • 왕굉: 시중이었던 왕굉은 애제에게 동현을 지나치게 포상하지 말 것을 간청했지만, 애제는 그의 용기에 감명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


이처럼 동현의 권력 남용에 대한 주변 인물들의 비판은 대부분 좌절되거나, 오히려 비판한 인물들이 처벌받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당시 애제가 동현에게 얼마나 깊이 빠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 4. 대사마 임명

원수 2년 1월 30일,[3] 애제는 22세(동아시아식 나이)의 동현을 삼공 중 하나인 대사마에 임명하고 수도의 치안 책임자로 삼았다. 이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4]

:"하늘이 그대를 한나라의 조력자로 주셨소. 그대의 충성을 알고 있기에, 그대가 제국의 대사를 이끌고 선을 따르기를 바라오."

이 조서의 문구는 요가 순에게 제위를 넘겨줄 때 사용되었다고 전해지는 문구를 따른 것으로, 이 조서를 읽은 모든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하고 충격을 주었다.

이처럼 중대한 지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동현은 자신의 직책에서 수행해야 할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지 않고, 항상 애제와 함께 궁궐에 머물렀다. 동시에 그의 아버지 동공은 명예직으로 승진했고, 그의 동생 동관신은 동현의 뒤를 이어 부마도위가 되었다. 동씨 일족은 모두 시중, 제조, 봉조청이 되었으며, 그 총애는 애제의 생모 일족인 정씨, 생조모 일족인 부씨를 능가했다.

원수 2년(기원전 1년) 정월, 흉노선우인 대곤미가 내조했다. 애제는 이를 환영하여 연회를 열었고, 여러 신하들도 함께 했다. 대곤미는 (대사마) 동현의 나이가 젊은 것을 이상하게 여겨 통역에게 질문했고, 애제는 통역을 통해 "대사마(동현)는 매우 현명한 인물이므로, 젊은 나이에도 이 지위에 있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대곤미는 일어나서 배례하며, 한나라가 훌륭한 신하를 얻은 것을 축하했다.

과거, 승상 공광어사대부였을 때, 동현의 아버지 동공은 어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동현이 대사마가 되어 공광과 나란히 삼공이 되었다. 동현은 애제의 명을 받아 개인적으로 공광의 저택을 방문하게 되었다. 공광은 애제가 동현을 총애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동현의 방문 소식을 듣고 공손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맞이했다. 공광은 동현을 정중하게 배웅하며, 감히 동현과 대등한 예로 대하지 않았다. 동현이 돌아가 보고하자, 애제는 기뻐하며 곧바로 공광의 형의 아들 두 명을 간대부 상시로 임명했다. 이로 인해 동현은 애제와 권력을 동등하게 나누는 지위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3. 몰락과 죽음

원수 2년(기원전 1년), 애제가 새수(璽綬)를 동현에게 넘겨주고[18] 붕어하였다. 왕태후는 왕굉을 시켜 동현에게서 새수를 빼앗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대사마에서 해임하였다. 동현은 해임 조서가 당도한 날에 아내와 함께 자결하였고,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일족들은 유배되었다.

애제 사후, 왕굉은 왕정군에게 동현에게서 황제 옥새를 빼앗을 것을 청하여 허락받고 미앙궁 선덕전으로 갔다. 왕굉은 동현을 꾸짖었고, 동현은 무릎을 꿇고 황제 옥새를 넘겨주었다. 왕굉은 왕정군에게 황제 옥새를 바쳤고, 궁정에서는 왕굉의 용기와 결단력을 칭찬했다[16].

동현은 왕정군에게 불려가 애제의 장례에 대해 질문받았지만, 걱정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사죄하였다. 왕정군은 왕망에게 동현을 보좌하도록 명했다. 왕망은 상서를 통해 동현이 애제 병환 중에 의약을 권하지 않았다고 탄핵하게 했고, 동현은 궁궐 출입이 금지되었다. 동현은 맨발로 사죄했지만, 왕망은 왕정군의 조서를 전달하여 동현에게 대사마 인수를 반납하고 사임할 것을 명했다. 그날 동현과 그의 아내는 자결했고, 동현의 집에서는 두려워하며 밤에 동현 부부를 매장했다.

3. 1. 애제 사후 권력 상실

원수 2년(기원전 1년), 애제가 새수(璽綬)를 동현에게 넘겨주고[18]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동현은 크게 당황했다.[1] 왕태후는 즉시 미앙궁으로 가서 황제의 옥새를 확보하고 동현을 소환했다. 왕태후는 조카인 왕망을 불러 황실 경호대의 지휘권을 넘겨받게 했다.

왕망은 동현이 애제를 제대로 보살피지 않았다는 혐의로 탄핵 상소를 올리게 했고, 동현은 궁궐 출입을 금지당하고 다음 날 해임되었다.[1] 해임 소식을 들은 동현은 그날 아내와 함께 자결했고, 밤에 매장되었다.[1] 왕망은 동현의 죽음을 의심하여 시신을 발굴하여 확인한 후 감옥에 다시 매장했다. 동현의 일족은 합포군(지금의 광시 베이하이시 일대)로 유배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3. 2. 사후 조치

왕망은 동현이 죽은 뒤에도 그 시신을 파내어 확인하고 감옥에 다시 매장하는 잔혹함을 보였다.[1] 왕망은 대사도 공광을 통해 동현과 그 가족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국가 재정을 탕진했다고 비난하며,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동현의 일족은 합포군으로 유배되었고,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다.[1]

동현의 아버지 동공과 동생 동관신 등 일족은 합포군으로 유배되었고, 어머니는 고향인 거록군으로 돌아갔다. 장안의 백성들은 동현의 호화 저택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려 소동을 일으켰다. 동씨의 재산은 43억에 달했다. 동현의 시체는 부관참시되어 검시를 받은 후, 감옥 안에 매장되었다.

동현을 장례 지내준 주후는 왕망에 의해 다른 핑계로 매질당해 죽었다.[17] 이는 왕망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이다.

4. 일화

애제와 동현이 함께 낮잠을 잤는데, 동현이 애제의 옷소매를 베고 자고 있었다. 먼저 깨어난 애제는 동현을 깨우지 않으려고 자신의 옷소매를 자르고 일어났다. 여기서 '''단수'''(斷袖)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였다.[6]

4. 1. 단수(斷袖) 고사

애제와 동현이 함께 낮잠을 자던 중, 동현이 애제의 옷소매를 베고 자고 있었다. 먼저 깨어난 애제는 동현을 깨우지 않으려고 자신의 옷소매를 자르고 일어났다. 여기서 '''단수'''(斷袖)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였다.[6] 애제는 동현이 자신의 옷소매 위에서 곤히 잠든 것을 보고, 차마 깨울 수 없어 소매를 잘랐다고 한다. 이 고사는 남색, 즉 동성애를 뜻하는 '단수'라는 말의 기원이 되었다.[6]

5. 평가

동현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으로 나뉜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동현은 좌풍익 운양현 출신으로 어사였던 동공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준수한 외모를 지녔다고 한다.[6] 건평 2년(기원전 5년), 애제의 눈에 띄어 황문랑으로 임명된 후 애제의 총애를 받으며 부마도위 · 시중에 올랐고, 짧은 기간 동안 막대한 재산을 받았다.[6] 성격이 부드러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렸다고도 한다.[6]

반면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동현은 애제의 총애를 바탕으로 권력을 남용하고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18] 동현의 가문은 막대한 부를 쌓고 요직을 차지하며 권력을 휘둘렀는데,[12] 이는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결국 왕망이 권력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5. 1. 긍정적 평가

동현은 좌풍익 운양현 출신으로, 어사였던 동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태자사인으로 시작했으나, 수화 2년(기원전 7년) 애제 즉위 후 낭으로 옮겨갔다. 동현은 타고난 미모를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겼다.[6]

건평 2년(기원전 5년), 동현은 시각을 알리기 위해 애제를 알현했다. 애제는 동현의 뛰어난 미모를 보고 그를 발탁하여 황문랑으로 임명하였다. 애제가 동현에게 쏟는 총애는 날마다 심해졌고, 동현은 부마도위 · 시중에 임명되었다. 애제가 외출할 때는 수레에 함께 탔고, 궁정에 있을 때는 좌우에 머물렀다. 10개월 동안 주어진 은상은 거만(巨萬)에 달했고, 그 존귀함은 조정을 뒤흔들었다.[6]

동현은 항상 애제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어느 날, 함께 낮잠을 자던 중 애제가 먼저 눈을 떴지만, 옆에는 자신의 옷의 큰 소매 위에서 동현이 아직 곤히 잠들어 있었다. 여기서 자신이 일어나면 동현을 깨우지 않을 수 없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 애제는, 사람을 시켜 동현이 누워 있던 쪽의 소매를 잘라내게 했다. 이 고사가 남색의 별칭 중 하나인 '단수'(斷袖)의 유래가 되었다.[6]

동현은 부드러운 성격으로, 다른 사람의 뜻을 헤아리고 아첨하는 데 능숙하여 자신의 입장을 지켰다. 세탁 휴가를 받았을 때도 궁궐 밖으로 나가지 않고 궁궐에 머물면서 의약에 관한 것을 조사했다.[6]

5. 2. 부정적 평가

동현은 뛰어난 외모와 처세술을 바탕으로 애제의 총애를 얻어 권력의 정점에 올랐으나, 지나친 사치와 권력 남용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18] 특히, 그의 가문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요직을 차지하며 전횡을 일삼았다.[12] 이러한 동현의 행태는 백성들의 원성을 샀으며, 왕망이 권력을 잡는 배경이 되었다.

왕망은 동현 일족을 숙청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동현의 죽음을 철저히 확인하고, 그의 시신을 부관참시하는 가혹한 조치를 취했다.[1] 이는 동현의 권력 남용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와 왕망의 정치적 의도가 결합된 결과로 해석된다.

일부에서는 동현의 죽음이 왕조의 안정을 가져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현의 몰락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외척 세력의 발호와 권력 투쟁, 그리고 왕조 교체라는 역사적 격변의 전조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6. 등장 작품


  • 시치미로 『킨과 켄 1』, 이스트 프레스, 2021.3
  • 시치미로 『킨과 켄 2』, 이스트 프레스, 2021.5

참조

[1] 간행물 jiwei day of the 6th month of the 2nd year of the Yuan'shou era Zizhi Tongjian
[2] 서적 Passions of the Cut Sleev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3] 간행물 gengzi day of the 12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Yuan'shou era Zizhi Tongjian
[4] 간행물 "建尔于公,以为汉辅!往悉尔心,匡正庶事,允执其中!" Zizhi Tongjian
[5] 문서 『漢書』佞幸伝 s:zh:漢書/卷093
[6] 문서 哀帝は病弱であったため、その関係で調べていたものと考えられる。
[7] 문서 『漢書』食貨志上 s:zh:漢書/卷024上
[8] 문서 『漢書』哀帝紀及び『漢書』佞幸伝 s:zh:漢書/卷011, s:zh:漢[...]
[9] 문서 『漢書』何武王嘉師丹伝 s:zh:漢書/卷086
[10] 문서 『漢書』哀帝紀 s:zh:漢書/卷011
[11] 문서 『漢書』何武王嘉師丹伝』及び『漢書』佞幸伝 s:zh:漢書/卷086, s:zh:漢[...]
[12] 문서 『漢書』何武王嘉師丹伝 s:zh:漢書/卷086
[13] 문서 『漢書』哀帝紀及び『漢書』何武王嘉師丹伝 s:zh:漢書/卷011, s:zh:漢[...]
[14] 서적 王莽―改革者の孤独
[15] 문서 王閎は王政君の弟の王譚の子であり、王政君の甥にあたる。
[16] 문서 『後漢書』巻12王劉張李彭盧列伝
[17] 문서 朱詡の子が朱浮であり、後漢において大司馬となっている。
[18] 문서 다음 황제를 결정할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19] 문서 애제기에 따르면 3월, 외척은택후표에 따르면 8월 신묘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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