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따나꼬신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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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따나꼬신 왕국은 1782년부터 1932년까지 현재 태국 영토를 통치했던 시암의 왕국이다. 이 시기에는 버마, 베트남, 라오스와의 전쟁이 있었고, 서구 열강과의 교류를 통해 식민 지배를 피했다. 내정에서는 중앙집권제 강화, 노예제 폐지, 교육 확대를 통해 사회적 발전을 이루었지만, 1932년 군사 쿠데타로 멸망했다. 이 왕조는 아유타야의 예술과 건축을 계승했으며, 중국과 서양의 영향을 받았다. 사회는 국왕, 귀족, 평민, 노예 계급으로 구성되었고, 상좌부 불교가 주요 종교였다. 이 시기에 언어, 문학, 교육, 군사 분야에서도 변화가 있었고, 1909년에는 말레이 반도의 일부 영토를 영국에 할양하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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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따나꼬신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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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역사 | |
주요 사건 | 건국 9군 전쟁 (1785–1786) 버니 조약 (1826년 6월 20일) 라오 반란 (1826–1828) 베트남-시암 전쟁 (1841–1845) 서구화 및 민족주의 (1851–1932) 보링 조약 (1855년 4월 18일) 전왕궁 위기 (1874–1875) 1893년 프랑스-시암 위기 (1893년 7월–10월) 궁궐 반란 (1912년 4월 1일)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선전 포고 (1917년 7월 22일) 시암 혁명 |
정치 | |
정치 체제 | 만달라 군주국 (1782–1892) 전제군주제 (1892–1932) |
국가원수 | 군주 |
주요 지도자 | Phutthayotfa Chulalok (풋타욧파 출랄록) (1782–1809) Phutthaloetla Naphalai (풋탈뢰틀라 나팔라이) (1809–1824) Nangklao (낭끌라오) (1824–1851) 몽꿋 (라마 4세) (1851–1868) 쭐랄롱꼰 (라마 5세) (1868–1910) 와치라웃 (라마 6세) (1910–1925) 프라차티뽁 (라마 7세) (1925–1932) |
부통령 | Maha Sura Singhanat (마하 수라 싱하나트) (1782–1803) Wichaichan (위차이찬) (1868–1885) |
입법부 | 없음 (1925년부터 1932년까지 시암 최고 국가 평의회가 있었으나 입법 권한은 없었음) |
영토 및 인구 | |
수도 | 방콕 |
사용 언어 | 중앙 태국어 남부 태국어 북부 태국어 라오어 크메르어 말레이어 다양한 중국어 |
종교 | 다수: 상좌부 불교 (국교) 소수: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 |
인구 | 1800년대 초: 1,000,000–4,000,000명 1929년: 11,506,207명 |
문화 | |
국가 모토 | (Sabbesaṃ Saṅghabhūtānaṃ Sāmaggī Vuḍḍhi Sādhikā) "단결하는 자들에게는 화합이 성공과 번영을 가져온다." |
국가 | Chom Rat Chong Charoen (1852–1871) Bulan Loi Luean (1871–1888) Sansoen Phra Barami (1888–1932) |
통화 | |
통화 | Photduang (폳두앙) (1904년까지) Baht (바트/티칼) (1860년부터) |
기타 정보 | |
시간대 | ICT (+07:00) |
자동차 통행 방향 | 좌측 통행 |
전화 코드 | +66 |
현재 국가 | 태국 말레이시아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베트남 |
국기 및 문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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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786년부터 1932년까지 현재의 태국 영토는 시암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처음에는 톤부리를 수도로 하다가 이후 라따나꼬신으로 천도하였다. 이 두 곳은 현재 방콕의 범위 안에 존재한다. 초기에는 왕조의 통치를 굳건히 하고 버마, 베트남, 라오스와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후반기에는 대영 제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과의 교류를 통해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 통치를 받지 않은 국가로 남았다. 내부적으로는 중앙집권제 왕정을 강화하고 서구 열강과의 협상을 통해 국경선을 정했다.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중산층을 통합한 교육 확대로 사회적, 경제적 진보를 이루었다. 그러나 정치 개혁이 뒤따르지 못해 1932년 군사 쿠데타로 전복되었다.[12]
=== 초기 라따나꼬신 시대 (1782년–1855년) ===
==== 방콕 건설 ====
짜끄리 왕조는 라마 1세로 즉위하여 왕실을 차오프라야강 서쪽 톤부리에서 동쪽 방 마콕( 올리브 자두/Spondias영어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 이는 서쪽의 버마 침략에 대한 방어와 더 나은 전략적 위치 때문이었다. 이 지역은 서쪽의 강과 북쪽, 동쪽, 남쪽에 있는 운하로 보호받았다.[12] 동쪽 강변은 중국인들이 거주하는 낮은 습지대였고, 라마 1세는 그들에게 삼펭으로 이주하도록 명령했다. 방콕의 공식적인 건립일은 1782년 4월 21일이며, 도시 기둥이 의식에서 축성되었다. 라마 1세는 1782년에 약식 대관식을 치렀다.[12] 그는 짜끄리 왕조를 창건했고, 그의 남동생 짜오프라야 수라시를 전궁의 왕나, 즉 프린스 수라 싱하낫으로 임명했다. 1783년, 방콕 성벽은 아유타야 유적에서 가져온 벽돌의 일부로 건설되었다.[12][125] 라오스와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도시 해자를 파는 데 배정되었다.[125] 대왕궁과 왓 프라깨우는 1784년에 완공되었고, 에메랄드 불상은 왓 아룬에서 왓 프라깨우로 옮겨졌다. 1785년, 라마 1세는 정식 대관식을 거행하고 새로운 도시의 이름을 "라따나꼬신( 인드라의 보석/Rattanakosin영어)"이라고 지었는데, 이는 에메랄드 불상을 가리킨다.[134]
==== 버마와의 전쟁 ====
버마는 시암 왕국의 존립에 위협이 되었다. 1785년, 버마 꼰바웅 왕조의 보도파야 왕은 아홉 군대의 전쟁 동안 5개 방향으로 시암을 침공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보냈다. 시암은 수십 년간의 전쟁으로 인구 감소를 겪었고, 시암 궁정은 버마 침략군 144,000명에 맞서 총 70,000명의 병력을 겨우 소집했다.[125] 그러나 버마군은 합류할 수 없었다. 수라 싱하낫 왕자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1786년 깐짜나부리의 랏야 전투에서 보도파야 왕의 주력을 격파했다. 북쪽에서는 버마군이 란나 람빵을 포위했다. 람빵의 통치자인 까윌라는 방콕에서 구원군이 올 때까지 4개월 동안 포위를 견뎌냈다. 남쪽에서는 찬 부인과 묵 부인이 1786년 푸껫에 대한 버마의 공격을 막아냈다. 보도파야 왕은 아들 우빠라자 타도 민쏘를 파견하여 깐짜나부리에 단일 방향으로 집중 침공을 감행했다. 라마 1세와 그의 형제 수라 싱하낫 왕자는 1786-1787년 타 딘댕 작전에서 버마군을 격파했다.
이러한 승리 이후, 시암은 옛 아유타야 영토였던 테나세림 해안에 공세를 펼쳤다.[125][13][14] 라마 1세는 1788년에 시암 군대를 이끌고 타보이를 포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125] 1792년, 타보이와 메르귀의 버마 총독이 시암으로 귀순했다.[125][14] 시암은 테나세림 해안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게 되었다. 그러나 궁정이 하부 버마 침공을 준비하면서,[125] 보도파야 왕은 그의 아들 타도 민쏘를 파견하여 테나세림을 되찾게 했다.[13] 시암군은 1793년 타보이 전투에서 버마군에게 크게 패배하여 테나세림 해안을 영구적으로 버마에 할양했고,[14] 이는 현대의 따닌따리 주가 되었다.
까윌라 경은 1797년 치앙마이를 란나의 중심지로 재건했다. 보도파야 왕은 란나에 대한 버마의 통제권을 되찾고 싶어했다.[13] 버마는 1797년과 1802년에 치앙마이를 침공했고,[12] 두 번 모두 까윌라가 도시를 방어했고 수라 싱하낫 왕자가 북쪽으로 진군하여 치앙마이를 구원했다.[125] 시암군과 란나군은 1804년에 란나에서 버마 권위의 거점인 치앙샌을 점령하여 해당 지역에서 버마의 영향력을 제거했다.[125][15] 란나에서 시암이 버마군을 상대로 거둔 승리는 시암이 북쪽으로 가장 북쪽에 위치한 타이 군주국인 껭 퉁과 치앙훙으로 지배력을 확장할 수 있게 했다. 치앙마이의 까윌라는 1802년에 껭 퉁을 공격하여 몽양, 므앙 루앙 푸카, 그리고 1805년에 치앙훙을 복속시켰다.[12]
수라 싱하낫 왕자는 1803년에 사망했다. 라마 1세는 1806년에 자신의 아들인 이싸라순톤 왕자를 다음 전궁 왕자로 임명했다.[12] 라마 1세는 1809년에 사망했고, 이싸라순톤 왕자는 왕위에 올라 라마 2세가 되었다.[12] 보도파야 왕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안다만 해안에서 탈랑에 대한 버마 침공을 시작했다. 방콕의 궁정은 탈랑을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탈랑은 1810년 버마에 함락되었다.[125][17] 그러나 시암은 여전히 버마군을 탈랑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1809-1810년의 푸껫에 대한 버마 침공은 태국 역사상 시암 영토에 대한 마지막 버마 침략이었다. 시암은 1810년대에도 버마의 침공 가능성을 경계했다. 버마가 제1차 영국-버마 전쟁 이후 1826년 얀다보 조약에서 테나세림을 영국에 할양했을 때 비로소 버마의 위협이 종식되었다.[12]
==== 베트남과의 관계 ====
1779년 시암 군이 비엔티안을 점령하면서 루앙프라방 왕국, 비엔티안 왕국, 참파삭 왕국 세 라오스 왕국은 모두 시암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라오스 왕자 난타센, 인타봉, 아누봉은 방콕으로 인질로 잡혀갔다.[18] 1782년, 라마 1세는 난타센을 비엔티안의 왕으로 임명했으나, 난타센은 인타봉을 지지하며 떠이선 왕조와 외교적 접근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1795년에 폐위되었다.[129] 1804년 인타봉 왕이 죽자, 아누봉이 비엔티안 왕위를 계승했다.[19]
시암을 지지하는 캄보디아 귀족 윰레아치 바엔은 1783년 캄보디아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친 베트남 성향의 캄보디아 총리 톨라하 무를 제거했다. 윰레아치 바엔은 어린 왕 앙 응을 방콕으로 데려갔고, 라마 1세는 윰레아치 바엔을 차오프라야 아파이푸베트로 임명했다. 같은 해, 응우옌 푹 아잉이 방콕으로 피신했고, 1784년 시암군은 응우옌 푹 아잉을 복위시키기 위해 사이공을 침공했으나 락감-소아이뭇 전투에서 패배했다. 1789년, 아파이푸베트는 캄보디아 섭정이 되었고, 응우옌 푹 아잉은 사이공을 점령했다. 1794년, 라마 1세는 앙 응에게 캄보디아 통치를 허락하고, 바탐방과 시엠립은 아파이푸베트가 시암의 직접 통치 하에 다스리도록 했다.
1796년 캄보디아의 앙 응 왕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앙 찬 2세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는 친 베트남 성향이었다.[12] 1811년, 친 시암 성향의 앙 찬 2세의 동생 앙 스응운 왕자는 반란을 일으켰다. 시암군은 우동으로 진군했고, 앙 찬 2세는 사이공으로 피신했다.[20] 시암군은 우동을 약탈하고 돌아갔다.[12] 레 반 두엣은 앙 찬 2세를 프놈펜으로 데려와 베트남의 영향력 하에 통치하게 했다.[21]
1827년, 비엔티안의 아누봉 왕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라오스 군대를 이끌고 나콘 라차시마와 사라부리를 점령했으며,[12] 그의 아들 락사붓 냐오는 참파삭 남부를 침공했다. 레이디 모는[22] 삼릿 들판 전투에서 라오스 감시인에 맞서 봉기했다. 라마 3세는 삭디폰라셉과 프라야 랏차수파와디[12] (나중의 차오프라야 보딘데차)를 보내 아누봉과 락사붓 냐오를 제압했다. 아누봉은 응에안 성의 베트남으로 도망쳐 민 망 황제의 보호를 받았다.[23] 민 망은 아누봉을 비엔티안으로 돌려보냈으나, 아누봉은 1828년에 다시 패배했다. 아누봉은 결국 체포되어 방콕으로 보내져 1829년에 사망했다.[12]
아누봉의 반란 이후, 시암-베트남 관계는 악화되었다. 1832년 레 반 두엣 사망 후, 1833년 사이공에서 레 반 코이 반란이 일어났다. 라마 3세는 차오프라야 보딘데차와[24] 차오프라야 프라클랑에게 캄보디아와 사이공 침공을 명령했으나, 시암군은 패배했다.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쩐떠이 성으로 병합하고 쯔엉 민 장을 총독으로 임명했다. 민 망은 앙 메이를 캄보디아의 꼭두각시 여왕으로 임명했다.[25] 1840년, 캄보디아인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보딘데차는 1841년에 시암 군대를 이끌고 풀삿과 캄퐁 스바이를 공격했다. 티에우 트리 황제는 베트남군에게 퇴각을 명령했고, 시암이 캄보디아를 장악했다. 1845년 전쟁이 재개되었고, 응우옌 트리 프엉이 프놈펜을 점령하고 우동을 포위했다. 수개월 후, 시암과 베트남은 앙 두옹 왕자와 평화 협상을 맺고, 1848년 앙 두옹은 캄보디아의 왕으로 즉위했다.[12]
==== 서구 열강과의 접촉 ====
15세기부터 시암 왕실은 ''Phra Khlang Sinkha''[30] (พระคลังสินค้าth) 또는 왕립 창고를 통해 대외 무역 독점권을 유지해 왔다.[30][31] 외국 상인들은 관세를 부과하고 왕립 창고에서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선박과 상품을 ''Phra Khlang Sinkha''에 제출해야 했다. 외국인들은 정부가 제한한 중요한 수익성 있는 상품을 시암 원주민과 직접적이고 사적으로 거래할 수 없었다.
1821년, 영국령 인도 총독은 시암과의 무역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존 크로퍼드(John Crawfurd)를 방콕으로 파견했다.[31] 크로퍼드는 1822년 방콕에 도착하여 술탄 아흐마드 타주딘에 대한 영국의 우려와 무역 양보 요구를 전달했지만 협상은 악화되었다. 시암은 제1차 영국-버마 전쟁에서 타닌타리 지역의 영국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분쟁으로 인해 라마 3세는 버마에서 시암군을 철수시켰다.
1825년, 영국은 헨리 버니(Henry Burney)가 이끄는 또 다른 사절단을 방콕으로 보냈다.[31] 버니 조약(Burney Treaty)은 1826년에 체결되었으며,[110] 이로써 수 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서구 무역에 대한 시암 왕실의 독점이 종식되었으며,[110] 영국은 시암에서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조약은 또한 케다에 대한 시암의 주장을 인정했다.[112] 그러나 ''Phasi Pak Ruea'' (ภาษีปากเรือth) 또는 측정 관세를 포함한 일부 무역 제한은 여전히 유지되었다.[38]
시암은 또한 1833년에 미국과 유사한 "시암-미국 우호 통상 조약(Roberts Treaty)"을 체결했다.[123][124]
아편 전쟁 이후, 대영 제국은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해상 강국으로 부상했으며 더 유리한 무역 협정을 갈망했다. 1840년대까지 시암은 중국 세금 징수 시스템을 통해 무역 관세를 다시 부과했다.[35] 영국과 미국 모두 조약 개정을 제안하기 위해 대표단 (제임스 브룩(Brooke)과 조셉 발레스티어(Balestier))을 1850년 방콕으로 보냈지만 강력하게 거부당했다.[35] 1855년의 보링 조약(Bowring Treaty)을 통해서야 이러한 목표가 달성되어 시암 경제가 자유화되고[36] 태국 역사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라마 3세는 1851년 임종 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 베트남과 버마와의 전쟁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방과만 전쟁을 치를 것입니다."[12]
=== 근대 시암 (1855년–1909년) ===
==== 보링 조약과 그 영향 ====
몽쿳 국왕과 짜오프라야 시 수리웡세는 지정학적 상황으로 인해 영국의 양보 요구에 시암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홍콩 총독이었던 존 보링 경은 런던의 영국 정부 대표로[12] 1855년 방콕에 도착했다.[37] 1855년 4월에 체결된 보링 조약은[37][38] 관세를 3%로 인하 및 표준화하고[12] ''파시 팍 루아''(측정 의무)를 폐지했다.[36] 이 조약은 시암 내 영국인에게 치외 법권을 부여하여, 서구인들이 시암의 ''나콘반'' 방식의 사법 고문에서 벗어나 영국 영사 당국과 영국법의 적용을 받도록 했다. 또한 방콕에 영국 영사관을 설립하도록 규정했다.
보링 조약 이후 미국(타운젠드 해리스, 1856년 5월),[39] 프랑스(샤를 드 몽티니, 1856년 8월), 덴마크(1858년),[40] 포르투갈(1858년), 네덜란드(1860년) 및 프로이센(오일렌부르크 원정, 1861년)[41] 등 다른 서방 국가와 불평등 조약과 유사한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몽쿳 국왕의 이복 동생인 웡사 디라지 스니드 왕자와 짜오프라야 시 수리웡세가 주요 협상가였다. 몽쿳 국왕은 또한 1858년 국민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다.[42]
보링 조약은 시암에 큰 사회경제적 영향을 미쳤고, 시암 경제는 신자유주의화되었다. 자급자족 경제에서 수출 지향 경제로 전환하기 시작했고[138] 세계 경제에 편입되었다.[31] 이전에 제한되었던 쌀 수출의 자유화는 쌀 농장의 급격한 성장과 생산 증가로 이어졌고,[136] 쌀은 시암의 주요 수출 품목이 되었다.[138] 생산 규모가 증가함에 따라 산업에 인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전통적인 부역 제도가 덜 유용해짐에 따라 사회적 변화가 필요해졌다. 1855년의 보링 조약은 대부분의 역사에서 '근대' 시암의 시작을 알린다.[138] 그러나 이러한 상업적 양보는 국가 안보[12] 와 무역 자유화를 명분으로 정부 수입에 극심한 영향을 미쳤다. 정부는 수입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중국인 세금 징수 시스템에 의존하여 수많은 새로운 세금을 징수했다. 시암의 세금 제도의 혼란은 1873년 재정 개혁으로 이어졌다.
시암은 유럽 정부와 자체 식민 행정부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했다.[12] 몽쿳 국왕은 1857년 런던에, 1861년 파리에 시암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 사절단은 아유타야 시대인 1688년에 마지막 사절단을 파견한 이후 유럽에 파견된 최초의 시암 사절단이었다. 분낙 가문이 왕국의 외교를 지배했다. 프랑스는 1862년 코친차이나를 획득했다. 프랑스는 적대적인 새로운 이웃으로 드러났다. 캄보디아의 앙두옹 국왕은 1860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노로돔과 시 보타[43] 사이의 내전이 발생하여 노로돔은 프랑스의 도움을 구했다. 프랑스 해군 제독 피에르 폴 드 라 그랑디에르는 노로돔에게 시암의 승인 없이 캄보디아를 프랑스 보호령으로 두는 조약을 체결하도록 했고, 프랑스는 1864년 노로돔을 캄보디아 국왕으로 옹립했다.[43] 칼라홈인 시 수리야웡은 노로돔에게 캄보디아에 대한 시암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또 다른 반대 조약을 체결하도록 하고, 1864년 ''스트레이츠 타임스''에 이를 게재하여[43] 프랑스 영사인 가브리엘 오브레에게 큰 곤란을 안겨주었다.[44] 프랑스는 오브레가 방콕에 군함을 가져오면서 반대 조약을 무효화하려 했다.[43] 캄보디아 문제에 대한 프랑스-시암 타협 초안이 1865년에 서명되었지만, 프랑스가 '시암 라오스'에 대한 시암의 주장을 받아들일 가능성 때문에 파리에서 비준이 지연되었다.[43][45] 시암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파리에 또 다른 사절단을 보냈다. 이 조약은 마침내 1867년 7월 파리에서 비준되었고,[45] 시암은 캄보디아를 공식적으로 양도했지만, 1907년에 양도될 바탐방과 시엠립을 포함한 북서부 캄보디아를 유지했다.
서구 제국주의는 시암에 국경 획정과 영토 선언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근대 이전 동남아시아에서는 정치체 간의 국경이 불분명했다. 전통적인 시암 정부는 도시, 마을 및 농업 지역에서만 권한을 가졌고, 산과 숲은 당국이 접근하기 어려워 대체로 방치되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국경 주장과 지도 제작이 식민 침략에 맞선 시암의 입지를 유지하는 열쇠였다. 영국과 시암 대표는 1866년 테나세림 구릉에서 만나 시암과 영국령 버마 사이의 영국-시암 국경을 살윈 강에서 안다만 해까지 탐사하고 정의했으며, 이는 1868년에 조약이 서명되면서 현대의 미얀마-태국 국경이 되었다.[46]
==== 몽쿳 왕의 개혁 ====
몽쿳 왕은 1851년 4월 3일에 즉위하여 1868년 10월 1일까지 통치하였다. 그의 통치 철학은 백성을 다스리는 10가지 덕목인 '십선정법(十善正法)'에 기반을 두었으며, 이는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했다.
몽쿳 왕은 왕권 강화에 힘썼다. 왕자 시절 승려로 지내면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정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불교 교리를 강조했다.
또한, 몽쿳 왕은 불교 개혁을 단행했다. 승려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존 불교 종단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새로운 종파인 '탐마윳띠까니카이'를 창설하여 불교의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이는 태국 불교의 현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몽쿳 왕은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응하고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구의 과학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는 서구식 교육 제도를 도입하고, 서구의 과학 기술을 연구하는 기관을 설립했다. 이러한 노력은 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몽쿳 왕의 개혁은 라따나꼬신 왕국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통치 철학과 정책은 왕국을 안정시키고 근대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특히 불교 개혁과 서구 문물 수용은 태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 쭐랄롱꼰 왕의 개혁 ====
쭐랄롱꼰 대왕은 1883년 솜뎃 짜오프라야 시 수리웡세가 사망한 후, 1880년대 중반부터 정부를 통제하고 개혁을 시행했다.[57] 수십 년 동안 강력한 귀족들이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쭐랄롱꼰은 자신의 형제와 아들을 포함한 많은 왕족들을 정부 요직에 임명했다.[31] 이들은 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었다. 왕은 1885년에 아들들을 유럽에서 교육받도록 보냈다. 많은 왕자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았는데, 특히 외교를 담당한 데와웡세와 내정을 담당한 담롱이 대표적이었다. 데와웡세 왕자의 제안으로,[12] 쭐랄롱꼰 대왕은 1888년에 수 세기 동안 무질서하게 운영되던 '차투사돔' 중앙 정부를 대체하기 위해 현대적인 부서를 만들기 시작했다.[110] 1892년 4월에는 왕족들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현대적인 시암 내각이 구성되었다.[57] 담롱 왕자는 1892년에 '마하타이' 내무부 장관이 되었다. 담롱은 현대적인 관료제를 도입했고, 1893년에는 반독립적인 통치자들이 지배하던 전통적인 조공 네트워크를 중앙에서 임명한 위원이 관할하는 여러 단계의 지역 기반 행정 단위로 대체하는 '몬톤' 시스템의 설립을 발표했다.
이러한 개혁 중에 프랑스는 1893년에 방콕을 위협하기 위해 군함을 보냈고, 시암은 메콩강 동쪽의 라오스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할양해야 했다. 1893년 10월 조약 조건에 따라 메콩강을 따라 25km 비무장 지대가 설치되었지만, 시암 측에만 해당되었다. 시암 궁정의 가장 큰 걱정은 1893년 프랑스의 침략으로 현실화되었고, 시암의 주권 유지는 영불 갈등에 맡겨졌다.[58] 영국이 시암에 대한 프랑스의 진출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자, 1896년 영불 협정은 시암의 독립을 시암 핵심 영토에만 해당하는 "완충 국가"로 보장하여, 영국은 남부 시암에, 프랑스는 동부 시암에 개입할 수 있도록 했다.[12][58] 쭐랄롱꼰 대왕은 1897년에 자신의 왕국을 식민지화의 대상이 아닌 문명화되고 서구화된 국가로 홍보하기 위해 섭정 사오바파 왕비를 섭정으로 삼고 유럽 순방에 나섰다. 한편, 프랑스가 시암 내 프랑스 '아시아인'들, 즉 라오스인, 캄보디아인, 베트남인들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장기간의 해결되지 않은 협상[38]과 짠타부리의 지속적인 프랑스 점령으로 이어졌다.
1893년 이후, 여러 시암 개혁이 가속화되었다. 쭐랄롱꼰 대왕의 벨기에 고문인 구스타브 롤랭-자크민스는 서구 열강이 시암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은 시암의 법률과 법체계가 아유타야 시대부터 구식이었고 현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시암 정부를 설득했다.[56] 쭐랄롱꼰 대왕은 1897년에 입법 의회를 임명하여 서구 법률 전문가들로 구성하여 민법 시스템을 기반으로 현대적인 시암 법률을 제정하도록 했다. '몬톤'은 계속해서 형성되었고, 예전 지방 영주들의 권한을 종식시켰다. 란나의 통합은 1893년에 시작되었고, 1899년에는 완전한 '몬톤'인 몬톤 파야프가 되었다. 메콩강 서쪽의 코랏 고원에 있는 나머지 라오스 마을들은 4개의 '몬톤'으로 편성되었다. 1897년 지방 행정법은 '몬톤' 시스템의 구조를 정의했다. 그러나 중앙집권화 정책은 저항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901~1902년 성자 반란 동안에는 초자연적인 힘을 주장하는 이산의 많은 부족 지도자들이 일어났다. 마지막 파타니 라자였던 술탄 압둘 카디르는 싱가포르에서 영국의 지원을 구했고,[12] 반란을 계획했지만 1902년에 일곱 개의 파타니 말레이 술탄국
2. 1. 초기 라따나꼬신 시대 (1782년–1855년)
짜끄리 왕조는 라마 1세 국왕으로 즉위하여 왕실을 차오프라야강 서쪽 톤부리에서 동쪽 방 마콕( 올리브 자두/Spondias영어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 이는 서쪽의 버마 침략에 대한 방어와 더 나은 전략적 위치 때문이었다. 이 지역은 서쪽의 강과 북쪽, 동쪽, 남쪽에 있는 일련의 운하로 보호받았다.[12] 동쪽 강변은 중국인들이 거주하는 낮은 습지대였고, 라마 1세는 그들에게 삼펭으로 이주하도록 명령했다. 방콕의 공식적인 건립일은 1782년 4월 21일이며, 도시 기둥이 의식에서 축성되었다. 라마 1세는 1782년에 약식 대관식을 치렀다.[12] 그는 짜끄리 왕조를 창건했고, 그의 남동생 짜오프라야 수라시를 전궁의 왕나, 즉 프린스 수라 싱하낫으로 임명했다. 1783년, 방콕 성벽은 아유타야 유적에서 가져온 벽돌의 일부로 건설되었다.[12][125] 라오스와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도시 해자를 파는 데 배정되었다.[125] 대왕궁과 왓 프라깨우는 1784년에 완공되었고, 에메랄드 불상은 왓 아룬에서 왓 프라깨우로 옮겨졌다. 1785년, 라마 1세 국왕은 정식 대관식을 거행하고 새로운 도시의 이름을 "라따나꼬신( 인드라의 보석/Rattanakosin영어)"이라고 지었는데, 이는 에메랄드 불상을 가리킨다.[134]버마는 시암 왕국의 존립에 위협이 되었다. 1785년, 버마 꼰바웅 왕조의 보도파야 왕은 아홉 군대의 전쟁 동안 5개 방향으로 시암을 침공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보냈다. 시암은 수십 년간의 전쟁으로 인구 감소를 겪었고, 시암 궁정은 버마 침략군 144,000명에 맞서 총 70,000명의 병력을 겨우 소집했다.[125] 그러나 버마군은 합류할 수 없었다. 수라 싱하낫 왕자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1786년 깐짜나부리의 랏야 전투에서 보도파야 왕의 주력을 격파했다. 북쪽에서는 버마군이 란나 람빵을 포위했다. 람빵의 통치자인 까윌라는 방콕에서 구원군이 올 때까지 4개월 동안 포위를 견뎌냈다. 남쪽에서는 찬 부인과 묵 부인이 1786년 푸껫에 대한 버마의 공격을 막아냈다. 보도파야 왕은 아들 우빠라자 타도 민쏘를 파견하여 깐짜나부리에 단일 방향으로 집중 침공을 감행했다. 라마 1세와 그의 형제 수라 싱하낫 왕자는 1786-1787년 타 딘댕 작전에서 버마군을 격파했다.
이러한 승리 이후, 시암은 옛 아유타야 영토였던 테나세림 해안에 공세를 펼쳤다.[125][13][14] 라마 1세는 1788년에 시암 군대를 이끌고 타보이를 포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125] 1792년, 타보이와 메르귀의 버마 총독이 시암으로 귀순했다.[125][14] 시암은 테나세림 해안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게 되었다. 그러나 궁정이 하부 버마 침공을 준비하면서,[125] 보도파야 왕은 그의 아들 타도 민쏘를 파견하여 테나세림을 되찾게 했다.[13] 시암군은 1793년 타보이 전투에서 버마군에게 크게 패배하여 테나세림 해안을 영구적으로 버마에 할양했고,[14] 이는 현대의 따닌따리 주가 되었다.
까윌라 경은 1797년 치앙마이를 란나의 중심지로 재건했다. 보도파야 왕은 란나에 대한 버마의 통제권을 되찾고 싶어했다.[13] 버마는 1797년과 1802년에 치앙마이를 침공했고,[12] 두 번 모두 까윌라가 도시를 방어했고 수라 싱하낫 왕자가 북쪽으로 진군하여 치앙마이를 구원했다.[125] 시암군과 란나군은 1804년에 란나에서 버마 권위의 거점인 치앙샌을 점령하여 해당 지역에서 버마의 영향력을 제거했다.[125][15] 란나에서 시암이 버마군을 상대로 거둔 승리는 시암이 북쪽으로 가장 북쪽에 위치한 타이 군주국인 껭 퉁과 치앙훙으로 지배력을 확장할 수 있게 했다. 치앙마이의 까윌라는 1802년에 껭 퉁을 공격하여 몽양, 므앙 루앙 푸카, 그리고 1805년에 치앙훙을 복속시켰다.[12]
수라 싱하낫 왕자는 1803년에 사망했다. 라마 1세는 1806년에 자신의 아들인 이싸라순톤 왕자를 다음 전궁 왕자로 임명했다.[12] 라마 1세는 1809년에 사망했고, 이싸라순톤 왕자는 왕위에 올라 라마 2세가 되었다.[12] 보도파야 왕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안다만 해안에서 탈랑에 대한 버마 침공을 시작했다. 방콕의 궁정은 탈랑을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탈랑은 1810년 버마에 함락되었다.[125][17] 그러나 시암은 여전히 버마군을 탈랑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1809-1810년의 푸껫에 대한 버마 침공은 태국 역사상 시암 영토에 대한 마지막 버마 침략이었다. 시암은 1810년대에도 버마의 침공 가능성을 경계했다. 버마가 제1차 영국-버마 전쟁 이후 1826년 얀다보 조약에서 테나세림을 영국에 할양했을 때 비로소 버마의 위협이 종식되었다.[12]
1779년 시암 군이 비엔티안을 점령하면서 루앙프라방 왕국, 비엔티안 왕국, 참파삭 왕국 세 라오스 왕국은 모두 시암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라오스 왕자 난타센, 인타봉, 아누봉은 방콕으로 인질로 잡혀갔다.[18] 1782년, 라마 1세는 난타센을 비엔티안의 왕으로 임명했으나, 난타센은 인타봉을 지지하며 떠이선 왕조와 외교적 접근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1795년에 폐위되었다.[129] 1804년 인타봉 왕이 죽자, 아누봉이 비엔티안 왕위를 계승했다.[19]
시암을 지지하는 캄보디아 귀족 윰레아치 바엔은 1783년 캄보디아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친 베트남 성향의 캄보디아 총리 톨라하 무를 제거했다. 윰레아치 바엔은 어린 왕 앙 응을 방콕으로 데려갔고, 라마 1세는 윰레아치 바엔을 차오프라야 아파이푸베트로 임명했다. 같은 해, 응우옌 푹 아잉이 방콕으로 피신했고, 1784년 시암군은 응우옌 푹 아잉을 복위시키기 위해 사이공을 침공했으나 락감-소아이뭇 전투에서 패배했다. 1789년, 아파이푸베트는 캄보디아 섭정이 되었고, 응우옌 푹 아잉은 사이공을 점령했다. 1794년, 라마 1세는 앙 응에게 캄보디아 통치를 허락하고, 바탐방과 시엠립은 아파이푸베트가 시암의 직접 통치 하에 다스리도록 했다.
1796년 캄보디아의 앙 응 왕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앙 찬 2세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는 친 베트남 성향이었다.[12] 1811년, 친 시암 성향의 앙 찬 2세의 동생 앙 스응운 왕자는 반란을 일으켰다. 시암군은 우동으로 진군했고, 앙 찬 2세는 사이공으로 피신했다.[20] 시암군은 우동을 약탈하고 돌아갔다.[12] 레 반 두엣은 앙 찬 2세를 프놈펜으로 데려와 베트남의 영향력 하에 통치하게 했다.[21]
1827년, 비엔티안의 아누봉 왕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라오스 군대를 이끌고 나콘 라차시마와 사라부리를 점령했으며,[12] 그의 아들 락사붓 냐오는 참파삭 남부를 침공했다. 레이디 모는[22] 삼릿 들판 전투에서 라오스 감시인에 맞서 봉기했다. 라마 3세는 삭디폰라셉과 프라야 랏차수파와디[12] (나중의 차오프라야 보딘데차)를 보내 아누봉과 락사붓 냐오를 제압했다. 아누봉은 응에안 성의 베트남으로 도망쳐 민 망 황제의 보호를 받았다.[23] 민 망은 아누봉을 비엔티안으로 돌려보냈으나, 아누봉은 1828년에 다시 패배했다. 아누봉은 결국 체포되어 방콕으로 보내져 1829년에 사망했다.[12]
아누봉의 반란 이후, 시암-베트남 관계는 악화되었다. 1832년 레 반 두엣 사망 후, 1833년 사이공에서 레 반 코이 반란이 일어났다. 라마 3세는 차오프라야 보딘데차와[24] 차오프라야 프라클랑에게 캄보디아와 사이공 침공을 명령했으나, 시암군은 패배했다.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쩐떠이 성으로 병합하고 쯔엉 민 장을 총독으로 임명했다. 민 망은 앙 메이를 캄보디아의 꼭두각시 여왕으로 임명했다.[25] 1840년, 캄보디아인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보딘데차는 1841년에 시암 군대를 이끌고 풀삿과 캄퐁 스바이를 공격했다. 티에우 트리 황제는 베트남군에게 퇴각을 명령했고, 시암이 캄보디아를 장악했다. 1845년 전쟁이 재개되었고, 응우옌 트리 프엉이 프놈펜을 점령하고 우동을 포위했다. 수개월 후, 시암과 베트남은 앙 두옹 왕자와 평화 협상을 맺고, 1848년 앙 두옹은 캄보디아의 왕으로 즉위했다.[12]
15세기부터 시암 왕실은 ''Phra Khlang Sinkha''[30] (พระคลังสินค้าth) 또는 왕립 창고를 통해 대외 무역 독점권을 유지해 왔다.[30][31] 외국 상인들은 관세를 부과하고 왕립 창고에서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선박과 상품을 ''Phra Khlang Sinkha''에 제출해야 했다. 외국인들은 정부가 제한한 중요한 수익성 있는 상품을 시암 원주민과 직접적이고 사적으로 거래할 수 없었다.
1821년, 영국령 인도 총독은 시암과의 무역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존 크로퍼드(John Crawfurd)를 방콕으로 파견했다.[31] 크로퍼드는 1822년 방콕에 도착하여 술탄 아흐마드 타주딘에 대한 영국의 우려와 무역 양보 요구를 전달했지만 협상은 악화되었다. 시암은 제1차 영국-버마 전쟁에서 타닌타리 지역의 영국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분쟁으로 인해 라마 3세는 버마에서 시암군을 철수시켰다.
1825년, 영국은 헨리 버니(Henry Burney)가 이끄는 또 다른 사절단을 방콕으로 보냈다.[31] 버니 조약(Burney Treaty)은 1826년에 체결되었으며,[110] 이로써 수 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서구 무역에 대한 시암 왕실의 독점이 종식되었으며,[110] 영국은 시암에서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조약은 또한 케다에 대한 시암의 주장을 인정했다.[112] 그러나 ''Phasi Pak Ruea'' (ภาษีปากเรือth) 또는 측정 관세를 포함한 일부 무역 제한은 여전히 유지되었다.[38]
시암은 또한 1833년에 미국과 유사한 "시암-미국 우호 통상 조약(Roberts Treaty)"을 체결했다.[123][124]
아편 전쟁 이후, 대영 제국은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해상 강국으로 부상했으며 더 유리한 무역 협정을 갈망했다. 1840년대까지 시암은 중국 세금 징수 시스템을 통해 무역 관세를 다시 부과했다.[35] 영국과 미국 모두 조약 개정을 제안하기 위해 대표단 (제임스 브룩(Brooke)과 조셉 발레스티어(Balestier))을 1850년 방콕으로 보냈지만 강력하게 거부당했다.[35] 1855년의 보링 조약(Bowring Treaty)을 통해서야 이러한 목표가 달성되어 시암 경제가 자유화되고[36] 태국 역사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라마 3세는 1851년 임종 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 베트남과 버마와의 전쟁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방과만 전쟁을 치를 것입니다."[12]
2. 1. 1. 방콕 건설
짜끄리 왕조는 라마티보디라는 이름으로 통치했지만 일반적으로 라마 1세 국왕으로 알려졌으며, 왕실의 자리를 차오프라야강 서쪽 강변의 톤부리에서 동쪽 강변의 방 마콕 마을( 올리브 자두/Spondias영어의 장소)로 옮겼다. 이는 서쪽에서 온 버마의 침략에 대한 방어에서 더 나은 전략적 위치 때문이었으며, 이 지역은 서쪽의 강과 북쪽, 동쪽, 남쪽에 있는 일련의 운하로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았다.[12] 동쪽 강변은 중국인들이 거주하는 낮은 습지대로 둘러싸여 있었고, 라마 1세 국왕은 그들에게 삼펭으로 이주하도록 명령했다. 방콕의 공식적인 건립일은 1782년 4월 21일로, 도시 기둥이 의식에서 축성되었다. 라마 1세는 1782년에 약식 대관식을 치렀다.[12] 그는 짜끄리 왕조를 창건했고, 그의 남동생 짜오프라야 수라시를 전궁의 왕나, 즉 프린스 수라 싱하낫으로 임명했다. 1783년, 방콕 성벽은 아유타야 유적에서 가져온 벽돌의 일부로 건설되었다.[12][125] 라오스와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도시 해자를 파는 데 배정되었다.[125] 대왕궁과 왓 프라깨우는 1784년에 완공되었고, 에메랄드 불상은 왓 아룬에서 왓 프라깨우로 옮겨졌다. 1785년, 라마 1세 국왕은 정식 대관식을 거행하고 새로운 도시의 이름을 "라따나꼬신"( 인드라의 보석/Rattanakosin영어)이라고 지었는데, 이는 에메랄드 불상을 가리킨다.[134]2. 1. 2. 버마와의 전쟁
버마는 시암 왕국의 존립에 계속해서 큰 위협이 되었다. 1785년, 버마 꼰바웅 왕조의 보도파야 왕은 아홉 군대의 전쟁 동안 5개 방향으로 시암을 침공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보냈다. 수십 년간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시암은 인구 감소를 겪었고, 시암 궁정은 버마 침략군 144,000명에 맞서 총 70,000명의 병력을 겨우 소집했다.[125] 그러나 버마군은 너무 팽창하여 합류할 수 없었다. 수라 싱하낫 왕자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1786년 깐짜나부리의 랏야 전투에서 보도파야 왕의 주력을 격파했다. 북쪽에서는 버마군이 란나 람빵을 포위했다. 람빵의 통치자인 까윌라는 방콕에서 구원군이 람빵을 구출하기 위해 올 때까지 4개월 동안 포위를 견뎌냈다. 남쪽에서는 찬 부인과 묵 부인이 1786년 푸껫에 대한 버마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보도파야 왕은 아들 우빠라자 타도 민쏘를 파견하여 깐짜나부리에 단일 방향으로 집중 침공을 감행했다. 라마 1세와 그의 형제 수라 싱하낫 왕자는 1786-1787년 타 딘댕 작전에서 버마군을 격파했다.
버마 침략군에 대한 이러한 승리 이후, 시암은 옛 아유타야 영토였던 테나세림 해안에 공세를 펼쳤다.[125][13][14] 라마 1세는 1788년에 시암 군대를 이끌고 타보이를 포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125] 1792년, 타보이와 메르귀의 버마 총독이 시암으로 귀순했다.[125][14] 시암은 테나세림 해안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게 되었다. 그러나 궁정이 하부 버마 침공을 준비하면서,[125] 보도파야 왕은 그의 아들 타도 민쏘를 파견하여 테나세림을 되찾게 했다.[13] 시암군은 1793년 타보이 전투에서 버마군에게 크게 패배하여 테나세림 해안을 영구적으로 버마에 할양했고,[14] 이는 현대의 따닌따리 주가 되었다.
까윌라 경은 마침내 1797년 치앙마이를 란나의 중심지로 재건할 수 있었다. 보도파야 왕은 란나에 대한 버마의 통제권을 되찾고 싶어했다.[13] 버마는 1797년과 1802년에 치앙마이를 침공했고,[12] 두 번 모두 까윌라가 도시를 방어했고 수라 싱하낫 왕자가 북쪽으로 진군하여 치앙마이를 구원했다.[125] 시암군과 란나군은 1804년에 란나에서 버마 권위의 거점인 치앙샌을 점령하여 해당 지역에서 버마의 영향력을 제거했다.[125][15] 란나에서 시암이 버마군을 상대로 거둔 승리는 시암이 북쪽으로 가장 북쪽에 위치한 타이 군주국인 껭 퉁과 치앙훙으로 지배력을 확장할 수 있게 했다. 치앙마이의 까윌라는 1802년에 껭 퉁을 공격하여 몽양, 므앙 루앙 푸카, 그리고 1805년에 치앙훙을 복속시켰다.[12]
수라 싱하낫 왕자는 1803년에 사망했다. 라마 1세는 1806년에 자신의 아들인 이싸라순톤 왕자를 다음 전궁 왕자로 임명했다.[12] 라마 1세는 1809년에 사망했고, 이싸라순톤 왕자는 왕위에 올라 라마 2세가 되었다.[12] 보도파야 왕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안다만 해안에서 탈랑에 대한 버마 침공을 시작했다. 한편, 방콕의 궁정은 탈랑을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물류 문제에 직면했고, 탈랑은 1810년 버마에 함락되었다.[125][17] 그러나 시암은 여전히 버마군을 탈랑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1809-1810년의 푸껫에 대한 버마 침공은 태국 역사상 시암 영토에 대한 마지막 버마 침략이었다. 시암은 1810년대에도 버마의 침공 가능성을 경계했다. 버마가 제1차 영국-버마 전쟁 이후 1826년 얀다보 조약에서 테나세림을 영국에 할양했을 때 비로소 버마의 위협이 효과적으로 종식되었다.[12]
2. 1. 3. 베트남과의 관계
1779년 시암 군이 비엔티안을 점령하면서 루앙프라방 왕국, 비엔티안 왕국, 참파삭 왕국 세 라오스 왕국은 모두 시암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라오스 왕자 난타센, 인타봉, 아누봉은 방콕으로 인질로 잡혀갔다.[18] 1782년, 라마 1세는 난타센을 비엔티안의 왕으로 임명했으나, 난타센은 인타봉을 지지하며 떠이선 왕조와 외교적 접근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1795년에 폐위되었다.[129] 1804년 인타봉 왕이 죽자, 아누봉이 비엔티안 왕위를 계승했다.[19]시암을 지지하는 캄보디아 귀족 윰레아치 바엔은 1783년 캄보디아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친 베트남 성향의 캄보디아 총리 톨라하 무를 제거했다. 윰레아치 바엔은 어린 왕 앙 응을 방콕으로 데려갔고, 라마 1세는 윰레아치 바엔을 차오프라야 아파이푸베트로 임명했다. 같은 해, 응우옌 푹 아잉이 방콕으로 피신했고, 1784년 시암군은 응우옌 푹 아잉을 복위시키기 위해 사이공을 침공했으나 락감-소아이뭇 전투에서 패배했다. 1789년, 아파이푸베트는 캄보디아 섭정이 되었고, 응우옌 푹 아잉은 사이공을 점령했다. 1794년, 라마 1세는 앙 응에게 캄보디아 통치를 허락하고, 바탐방과 시엠립은 아파이푸베트가 시암의 직접 통치 하에 다스리도록 했다.
1796년 캄보디아의 앙 응 왕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앙 찬 2세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는 친 베트남 성향이었다.[12] 1811년, 친 시암 성향의 앙 찬 2세의 동생 앙 스응운 왕자는 반란을 일으켰다. 시암군은 우동으로 진군했고, 앙 찬 2세는 사이공으로 피신했다.[20] 시암군은 우동을 약탈하고 돌아갔다.[12] 레 반 두엣은 앙 찬 2세를 프놈펜으로 데려와 베트남의 영향력 하에 통치하게 했다.[21]
1827년, 비엔티안의 아누봉 왕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라오스 군대를 이끌고 나콘 라차시마와 사라부리를 점령했으며,[12] 그의 아들 락사붓 냐오는 참파삭 남부를 침공했다. 레이디 모는[22] 삼릿 들판 전투에서 라오스 감시인에 맞서 봉기했다. 라마 3세는 삭디폰라셉과 프라야 랏차수파와디[12] (나중의 차오프라야 보딘데차)를 보내 아누봉과 락사붓 냐오를 제압했다. 아누봉은 응에안 성의 베트남으로 도망쳐 민 망 황제의 보호를 받았다.[23] 민 망은 아누봉을 비엔티안으로 돌려보냈으나, 아누봉은 1828년에 다시 패배했다. 아누봉은 결국 체포되어 방콕으로 보내져 1829년에 사망했다.[12]
아누봉의 반란 이후, 시암-베트남 관계는 악화되었다. 1832년 레 반 두엣 사망 후, 1833년 사이공에서 레 반 코이 반란이 일어났다. 라마 3세는 차오프라야 보딘데차와[24] 차오프라야 프라클랑에게 캄보디아와 사이공 침공을 명령했으나, 시암군은 패배했다.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쩐떠이 성으로 병합하고 쯔엉 민 장을 총독으로 임명했다. 민 망은 앙 메이를 캄보디아의 꼭두각시 여왕으로 임명했다.[25] 1840년, 캄보디아인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보딘데차는 1841년에 시암 군대를 이끌고 풀삿과 캄퐁 스바이를 공격했다. 티에우 트리 황제는 베트남군에게 퇴각을 명령했고, 시암이 캄보디아를 장악했다. 1845년 전쟁이 재개되었고, 응우옌 트리 프엉이 프놈펜을 점령하고 우동을 포위했다. 수개월 후, 시암과 베트남은 앙 두옹 왕자와 평화 협상을 맺고, 1848년 앙 두옹은 캄보디아의 왕으로 즉위했다.[12]
2. 1. 4. 서구 열강과의 접촉
15세기부터 시암 왕실은 ''Phra Khlang Sinkha''[30] (พระคลังสินค้าth) 또는 왕립 창고를 통해 대외 무역 독점권을 유지해 왔다.[30][31] 외국 상인들은 관세를 부과하고 왕립 창고에서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선박과 상품을 ''Phra Khlang Sinkha''에 제출해야 했다. 외국인들은 정부가 제한한 중요한 수익성 있는 상품을 시암 원주민과 직접적이고 사적으로 거래할 수 없었다.
1821년, 영국령 인도 총독은 시암과의 무역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존 크로퍼드(John Crawfurd)를 방콕으로 파견했다.[31] 크로퍼드는 1822년 방콕에 도착하여 술탄 아흐마드 타주딘에 대한 영국의 우려와 무역 양보 요구를 전달했지만 협상은 악화되었다. 시암은 제1차 영국-버마 전쟁에서 타닌타리 지역의 영국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분쟁으로 인해 라마 3세는 버마에서 시암군을 철수시켰다.
1825년, 영국은 헨리 버니(Henry Burney)가 이끄는 또 다른 사절단을 방콕으로 보냈다.[31] 버니 조약(Burney Treaty)은 1826년에 체결되었으며,[110] 이로써 수 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서구 무역에 대한 시암 왕실의 독점이 종식되었으며,[110] 영국은 시암에서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조약은 또한 케다에 대한 시암의 주장을 인정했다.[112] 그러나 ''Phasi Pak Ruea'' (ภาษีปากเรือth) 또는 측정 관세를 포함한 일부 무역 제한은 여전히 유지되었다.[38]
시암은 또한 1833년에 미국과 유사한 "시암-미국 우호 통상 조약(Roberts Treaty)"을 체결했다.[123][124]
아편 전쟁 이후, 대영 제국은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해상 강국으로 부상했으며 더 유리한 무역 협정을 갈망했다. 1840년대까지 시암은 중국 세금 징수 시스템을 통해 무역 관세를 다시 부과했다.[35] 영국과 미국 모두 조약 개정을 제안하기 위해 대표단 (제임스 브룩(Brooke)과 조셉 발레스티어(Balestier))을 1850년 방콕으로 보냈지만 강력하게 거부당했다.[35] 1855년의 보링 조약(Bowring Treaty)을 통해서야 이러한 목표가 달성되어 시암 경제가 자유화되고[36] 태국 역사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라마 3세는 1851년 임종 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 베트남과 버마와의 전쟁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방과만 전쟁을 치를 것입니다."[12]
2. 2. 근대 시암 (1855년–1909년)
1786년에서 1932년까지 태국의 현 영토는 시암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처음에는 톤부리를 수도로 하다가 이후 라따나꼬신으로 천도하였다. 이 두 곳은 현재 방콕의 범위 안에 존재하고 있다. 이 왕조의 전반기는 왕조의 통치를 굳건히 하는 시대였고, 버마, 베트남, 라오스와 끊임없이 전쟁을 하였다. 후반기는 대영 제국과 프랑스 등과 같은 서구 열강과의 교류를 통해 동남아시아의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식민 통치를 받지 않은 국가로 살아 남았다. 내부적으로는 중앙집권제 왕정을 강화하였으며, 서구 열강과의 협상을 통해 국경선을 정하였다.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중산층을 통합한 교육의 확대로 중요한 사회적, 경제적인 진보를 일구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정치 개혁이 뒤따르지 못해 1932년 군사 쿠데타로 전복되었다.[12]=== 보링 조약과 그 영향 ===
몽쿳 국왕과 짜오프라야 시 수리웡세는 지정학적 상황으로 인해 영국의 양보 요구에 시암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홍콩 총독이었던 존 보링 경은 런던의 영국 정부(동인도 회사가 아닌)의 대표로[12] 1855년 방콕에 도착했다.[37] 1855년 4월에 체결된 보링 조약은[37][38] 관세를 3%로 인하 및 표준화하고[12] ''파시 팍 루아''(측정 의무)를 폐지했다.[36] 이 조약은 시암 내 영국인에게 치외 법권을 부여하여, 서구인들이 시암의 ''나콘반'' 방식의 사법 고문에서 벗어나 영국 영사 당국과 영국법의 적용을 받도록 했다. 또한 방콕에 영국 영사관을 설립하도록 규정했다.
보링 조약 이후 미국(타운젠드 해리스, 1856년 5월),[39] 프랑스(샤를 드 몽티니, 1856년 8월), 덴마크(1858년),[40] 포르투갈(1858년), 네덜란드(1860년) 및 프로이센(오일렌부르크 원정, 1861년)[41] 등 다른 서방 국가와 불평등 조약과 유사한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몽쿳 국왕의 이복 동생인 웡사 디라지 스니드 왕자와 짜오프라야 시 수리웡세(서방 자료에서는 '''칼라홈'''으로 불림)가 주요 협상가였다. 몽쿳 국왕은 또한 1858년 국민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다.[42]
보링 조약은 시암에 큰 사회경제적 영향을 미쳤고, 시암 경제는 신자유주의화되었다. 자급자족 경제에서 수출 지향 경제로 전환하기 시작했고[138] 세계 경제에 편입되었다.[31] 이전에 제한되었던 쌀 수출의 자유화는 쌀 농장의 급격한 성장과 생산 증가로 이어졌고,[136] 쌀은 시암의 주요 수출 품목이 되었다.[138] 생산 규모가 증가함에 따라 산업에 인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전통적인 부역 제도가 덜 유용해짐에 따라 사회적 변화가 필요해졌다. 1855년의 보링 조약은 대부분의 역사에서 '근대' 시암의 시작을 알린다.[138] 그러나 이러한 상업적 양보는 국가 안보[12] 와 무역 자유화를 명분으로 정부 수입에 극심한 영향을 미쳤다. 정부는 수입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중국인 세금 징수 시스템에 의존하여 수많은 새로운 세금을 징수했다. 시암의 세금 제도의 혼란은 1873년 재정 개혁으로 이어졌다.
시암은 유럽 정부와 자체 식민 행정부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했다.[12] 몽쿳 국왕은 1857년 런던에, 1861년 파리에 시암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 사절단은 아유타야 시대인 1688년에 마지막 사절단을 파견한 이후 유럽에 파견된 최초의 시암 사절단이었다. 분낙 가문이 왕국의 외교를 지배했다. 프랑스는 1862년 코친차이나를 획득했다. 프랑스는 적대적인 새로운 이웃으로 드러났다. 캄보디아의 앙두옹 국왕은 1860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노로돔과 시 보타[43] 사이의 내전이 발생하여 노로돔은 프랑스의 도움을 구했다. 프랑스 해군 제독 피에르 폴 드 라 그랑디에르는 노로돔에게 시암의 승인 없이 캄보디아를 프랑스 보호령으로 두는 조약을 체결하도록 했고, 프랑스는 1864년 노로돔을 캄보디아 국왕으로 옹립했다.[43] 칼라홈인 시 수리야웡은 노로돔에게 캄보디아에 대한 시암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또 다른 반대 조약을 체결하도록 하고, 1864년 ''스트레이츠 타임스''에 이를 게재하여[43] 프랑스 영사인 가브리엘 오브레에게 큰 곤란을 안겨주었다.[44] 프랑스는 오브레가 방콕에 군함을 가져오면서 반대 조약을 무효화하려 했다.[43] 캄보디아 문제에 대한 프랑스-시암 타협 초안이 1865년에 서명되었지만, 프랑스가 '시암 라오스'에 대한 시암의 주장을 받아들일 가능성 때문에 파리에서 비준이 지연되었다.[43][45] 시암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파리에 또 다른 사절단을 보냈다. 이 조약은 마침내 1867년 7월 파리에서 비준되었고,[45] 시암은 캄보디아를 공식적으로 양도했지만, 1907년에 양도될 바탐방과 시엠립을 포함한 북서부 캄보디아를 유지했다.
서구 제국주의는 시암에 국경 획정과 영토 선언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근대 이전 동남아시아에서는 정치체 간의 국경이 불분명했다. 전통적인 시암 정부는 도시, 마을 및 농업 지역에서만 권한을 가졌고, 산과 숲은 당국이 접근하기 어려워 대체로 방치되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국경 주장과 지도 제작이 식민 침략에 맞선 시암의 입지를 유지하는 열쇠였다. 영국과 시암 대표는 1866년 테나세림 구릉에서 만나 시암과 영국령 버마 사이의 영국-시암 국경을 살윈 강에서 안다만 해까지 탐사하고 정의했으며, 이는 1868년에 조약이 서명되면서 현대의 미얀마-태국 국경이 되었다.[46]
=== 몽쿳 왕의 개혁 ===
몽쿳 왕은 1851년 4월 3일에 즉위하여 1868년 10월 1일까지 통치하였다. 그의 통치 철학은 백성을 다스리는 10가지 덕목인 '십선정법(十善正法)'에 기반을 두었으며, 이는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했다.
몽쿳 왕은 왕권 강화에 힘썼다. 왕자 시절 승려로 지내면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정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불교 교리를 강조했다.
또한, 몽쿳 왕은 불교 개혁을 단행했다. 승려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존 불교 종단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새로운 종파인 '탐마윳띠까니카이'를 창설하여 불교의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이는 태국 불교의 현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몽쿳 왕은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응하고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구의 과학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는 서구식 교육 제도를 도입하고, 서구의 과학 기술을 연구하는 기관을 설립했다. 이러한 노력은 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몽쿳 왕의 개혁은 라따나꼬신 왕국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통치 철학과 정책은 왕국을 안정시키고 근대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특히 불교 개혁과 서구 문물 수용은 태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 쭐랄롱꼰 왕의 개혁 ===
쭐랄롱꼰 대왕은 1883년 솜뎃 짜오프라야 시 수리웡세가 사망한 후, 1880년대 중반부터 정부를 통제하고 개혁을 시행했다.[57] 수십 년 동안 강력한 귀족들이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쭐랄롱꼰은 자신의 형제와 아들을 포함한 많은 왕족들을 정부 요직에 임명했다.[31] 이들은 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었다. 왕은 1885년에 아들들을 유럽에서 교육받도록 보냈다. 많은 왕자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았는데, 특히 외교를 담당한 데와웡세와 내정을 담당한 담롱이 대표적이었다. 데와웡세 왕자의 제안으로,[12] 쭐랄롱꼰 대왕은 1888년에 수 세기 동안 무질서하게 운영되던 '차투사돔' 중앙 정부를 대체하기 위해 현대적인 부서를 만들기 시작했다.[110] 1892년 4월에는 왕족들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현대적인 시암 내각이 구성되었다.[57] 담롱 왕자는 1892년에 '마하타이' 내무부 장관이 되었다. 담롱은 현대적인 관료제를 도입했고, 1893년에는 반독립적인 통치자들이 지배하던 전통적인 조공 네트워크를 중앙에서 임명한 위원이 관할하는 여러 단계의 지역 기반 행정 단위로 대체하는 '몬톤' 시스템의 설립을 발표했다.
이러한 개혁 중에 프랑스는 1893년에 방콕을 위협하기 위해 군함을 보냈고, 시암은 메콩강 동쪽의 라오스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할양해야 했다. 1893년 10월 조약 조건에 따라 메콩강을 따라 25km 비무장 지대가 설치되었지만, 시암 측에만 해당되었다. 시암 궁정의 가장 큰 걱정은 1893년 프랑스의 침략으로 현실화되었고, 시암의 주권 유지는 영불 갈등에 맡겨졌다.[58] 영국이 시암에 대한 프랑스의 진출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자, 1896년 영불 협정은 시암의 독립을 시암 핵심 영토에만 해당하는 "완충 국가"로 보장하여, 영국은 남부 시암에, 프랑스는 동부 시암에 개입할 수 있도록 했다.[12][58] 쭐랄롱꼰 대왕은 1897년에 자신의 왕국을 식민지화의 대상이 아닌 문명화되고 서구화된 국가로 홍보하기 위해 섭정 사오바파 왕비를 섭정으로 삼고 유럽 순방에 나섰다. 한편, 프랑스가 시암 내 프랑스 '아시아인'들, 즉 라오스인, 캄보디아인, 베트남인들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장기간의 해결되지 않은 협상[38]과 짠타부리의 지속적인 프랑스 점령으로 이어졌다.
1893년 이후, 여러 시암 개혁이 가속화되었다. 쭐랄롱꼰 대왕의 벨기에 고문인 구스타브 롤랭-자크민스는 서구 열강이 시암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은 시암의 법률과 법체계가 아유타야 시대부터 구식이었고 현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시암 정부를 설득했다.[56] 쭐랄롱꼰 대왕은 1897년에 입법 의회를 임명하여 서구 법률 전문가들로 구성하여 민법 시스템을 기반으로 현대적인 시암 법률을 제정하도록 했다. '몬톤'은 계속해서 형성되었고, 예전 지방 영주들의 권한을 종식시켰다. 란나의 통합은 1893년에 시작되었고, 1899년에는 완전한 '몬톤'인 몬톤 파야프가 되었다. 메콩강 서쪽의 코랏 고원에 있는 나머지 라오스 마을들은 4개의 '몬톤'으로 편성되었다. 1897년 지방 행정법은 '몬톤' 시스템의 구조를 정의했다. 그러나 중앙집권화 정책은 저항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901~1902년 성자 반란 동안에는 초자연적인 힘을 주장하는 이산의 많은 부족 지도자들이 일어났다. 마지막 파타니 라자였던 술탄 압둘 카디르는 싱가포르에서 영국의 지원을 구했고,[12] 반란을 계획했지만 1902년에 일곱 개의 파타니 말레이 술탄국이 시암에 통합되면서 사전에 발각되었다. 프래의 샨족 이민자들은 1902년 샨 프래 반란을 일으켜,[12] 란나 전통을 지키고 시암 중앙 관리들을 살해할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차오프라야 수라삭 몬트리는 1902년에 샨 반란을 진압했다. 1905년 4월, 쭐랄롱꼰 대왕은 노예 제도를 완전히 폐지했다.[47] 또한 1905년에 쭐랄롱꼰은 전통적인 부역 노동 시스템을 1905년 8월 군 징집법을 통해 제한된 기간 동안 복무하는 현대적인 보편적 징병 시스템으로 대체했다.[48] 최초의 현대 시암 법인 형법은 1908년에 공포되었다.[59] 현대 시암 법률의 편찬은 거의 40년이 걸렸고, 1935년에야 완료되었다.
파리의 식민지 당의 영향력은 협상 과정에서 시암의 더 많은 양보를 요구했고,[56] 데와웡세 왕자가 시암 대표였다. 1904년, 시암은 프랑스가 짠타부리를 포기하는 대가로 므루프레이, 참파삭 및 메콩강 서쪽의 사이냐부리를 할양해야 했지만, 프랑스는 대신 뜨랏을 점령했다. 1904년 영불 협상은 두 강대국이 시암의 독립을 상호 인정하는 것을 확인했다. 1907년, 프랑스와 시암 대표단은 프랑스-시암 국경을 확정하기 위해 만났고, 프랑스는 뜨랏과 단사이를 시암에 반환하는 대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할양된 바탐방과 시엠립을 포함한 캄보디아 북서부를 얻었고, 프랑스는 또한 시암 내 프랑스 아시아인들에 대한 관할권 행사를 축소하기로 합의했다.[38] 마지막으로, 시암은 1909년 영-시암 조약에서 케다, 클란탄, 트렝가누 및 펄리스를 포함한 북 말레이 술탄국을 영국령 말라야에 할양하기로 결정했고, 그 대가로 영국은 시암에 남부 시암 철도 건설을 위해 4백만 파운드를 대출하고, 시암에서 대부분의 치외법권을 포기했다.[38] 이러한 잃어버린 영토는 시암의 영향력 범위의 가장자리에 있었고, 시암은 어느 정도의 통제만 행사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영토"라는 개념은 1932년 시암 혁명 이후 태국 군국주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60] 쭐랄롱꼰은 긴 통치 기간 동안 정부, 재정 및 사회 개혁을 시행했고, 시암의 조공 주변부를 없애고, 전통적인 '만다라' 네트워크 정치 체제를 중앙 집권화된 관료제와 명확하게 정의된 경계를 가진 보다 콤팩트한 현대 민족 국가[61]로 변모시켰으며, 서쪽으로는 영국령 버마, 동쪽으로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쪽으로는 영국령 말라야와 경계를 이루었다.
=== 서구 열강의 위협과 영토 상실 ===

1864년 중국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진압된 후, 잔존한 중국 반군 세력은 1868년 베트남 북부로 진입하여, 라오스 루앙프라방 왕에게 조공을 바치던 십송추타이와 후아판의 타이 군주국을 약탈하고 점령했다. 시암 사람들은 북부 고지대에서 온 중국인들을 "호"(ฮ่อth)라고 불렀고, 이 때문에 호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호'' 반군은 깃발 군대로 뭉쳤는데, 특히 흑기군과 황기군이 두드러졌다.[51] 1875년, 황기군은 무앙푸안을 공격하여 자르 평원을 점령하고 농카이를 공격했다.[51] 쭐랄롱꼰 국왕은 시암 군대를 파견하여 호족을 일시적으로 산으로 몰아냈다. 황기군은 1875년 중국 당국에 의해 격파되어 소규모의 도적 집단으로 흩어졌지만, 다시 부활하여 자르 평원에 영구 정착했다.

근대 이전의 동남아시아에서는 전통적인 정치 체제가 영토 경계로 정의되지 않고, 만다라 시스템에 의해 정의되는 동맹과 조공 의무의 네트워크와 계층 구조로 정의되었다. 다문화 시암 제국은 조공국인 란나 치앙마이, 라오스 루앙프라방 왕국 및 참파삭, 소규모 라오-란나 족장국, 남부의 무슬림 말레이 술탄국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침략에 직면하면서 영토와 주권은 명확하게 정의되어야 했다. 영국은 상부 미얀마를 획득했고, 프랑스는 1886년에 통킹을 획득했다.[52] 이러한 전개는 시암에 대한 제국주의적 계획을 고조시켰고, 시암 북부 후방 지역에서 서구의 존재감을 증가시켰다. 시암은 제국주의적 위협에 대응하여 중앙 집권화와 내부 구조 조정을 통해 조공국을 시암 본토로 통합하고 자치권을 종식시켰다. 란나 영주들은 광대한 북부 티크 숲에 대한 전통적인 소유권의 혜택을 누렸고, 때로는 영국 벌목업자에게 부여된 상충되는 임업 특허가 영국의 개입을 유발할 수 있었다.[53] 란나는 영국 침략 가능성의 최전선에 서 있었기 때문에 개혁의 첫 번째 대상이 되었다.[53] 1883년 치앙마이 조약은 방콕에 란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것을 촉구했다. 쭐랄롱꼰 국왕은 1883년 치앙마이에 개혁을 시작하기 위해 왕실 사절을 파견했다.[12][53] 중앙 시암 스타일의 통치와 엄격한 과세가 부과되었다. 개혁은 처음에는 유망했지만, 개혁으로 인해 전통적인 특권과 권한이 훼손된 란나 통치자들의 끈기로 인해 점차 쇠퇴했다.
쭐랄롱꼰 국왕은 1884–1885년 자르 평원에 있는 호족을 정복하기 위해 또 다른 시암 원정을 보냈지만, 그 원정은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51] 시암 궁정은 그 후 중국 반군에 대해 더 심각한 접근 방식을 취했다.[54] 새로 현대화된 시암 연대가 호족을 진압하고 1885년 국경을 장악하기 위해 파견되었다.[55] 짜오무엔 와이와라낫(후일 짜오프라야 수라삭 몬트리)는 무앙손에서 지휘권을 잡고 후아판을 진압한 다음 십송추타이의 무앙 태엥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시암군은 데오 반 찌, 무앙 레이의 백 따이 통치자 데오 반 신의 아들로 흑기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데오 반 찌의 저항에 직면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1887년 2월 프랑스 식민주의 옹호자인 오귀스트 파비에가 루앙프라방의 프랑스 영사로 부임하면서 일어났다.[54]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던 와이와라낫은 1887년 4월 원정을 끝내고 호족과 타이족 포로들을, 그 중 데오 반 찌의 형제들을 방콕으로 데려갔다. 분노한 데오 반 찌는 흑기군을 이끌고 1887년 6월 루앙프라방을 점령하고 약탈했다.[54] 오귀스트 파비에는 루앙프라방의 운캄 국왕을 구출하여 그를 카누에 태워[54] 방콕으로 데려갔다. 프랑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시암이 영유권을 주장했던 십송추타이에 진입하여 점령했다. 수라삭 몬트리와 파비에 간의 논쟁 끝에 1888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십송추타이를 차지하고 시암은 후아판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54]

프랑스가 1887년 십송추타이를 점령한 후 프랑스-시암 관계는 악화되었다. 방콕의 프랑스 영사로 전임된 오귀스트 파비에는 1893년 3월 방콕에 군함 ''뤼탱''을 가져와 시암 정부에 메콩강의 왼쪽(동쪽) 강둑에 있는 모든 라오스 땅을 포기할 것을 압박했다. 시암이 이에 따르지 않자 프랑스는 라오스로 군대를 진격시켜 1893년 6월 캄무안의 시암 총독 프라 욧므앙 크왕(พระยอดเมืองขวางth)에게 프랑스 장교 그로구랭이 살해되는 결과를 낳았다. 식민주의적 정서가 지배적인 파리의 프랑스 의회는[56] 시암에 대한 강력한 군사적 보복을 명령했다. 프랑스 군함 2척, ''앵콩스탕''과 ''코메트''가 차오프라야강에 진입하여 방콕으로 진격하여 빡남 사건 동안 프랑스 군함과 시암 출라촘클라오 요새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시암 왕궁을 위협했다. 데와웡세 왕자 외무부 장관은 프랑스 침략군을 '축하'하기 위해 갔지만[12] 파비에는 최후 통첩을 제시하며 시암에 메콩강 동쪽의 땅을 할양하고, 3백만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며, 프라 욧므앙 크왕을 처벌할 것을 촉구했다.[12] 시암이 주저하자 프랑스는 방콕에 해상 봉쇄를 가했다.[56] 시암 궁정은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영국의 지원을 찾기를 희망했지만 영국은 무반응하여 시암은 1893년 7월 프랑스 요구에 무조건 따르기로 결심했다. 프랑스 군함은 1893년 8월 방콕을 떠났지만, 그들의 준수를 보장하기 위해 시암 동부 해안의 찬타부리를 점령했다. 조약은 1893년 10월에 체결되었다.[12] 1779년부터 약 1세기 동안 시암의 지배를 받았던 라오스는 1893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합류했다. 1893년 프랑스-시암 전쟁 또는 112년 위기(วิกฤตการณ์ ร.ศ. ๑๑๒th)는 시암이 서구 제국주의 강대국에 의해 정복될 뻔했던 시기였다.
2. 2. 1. 보링 조약과 그 영향
몽쿳 국왕과 짜오프라야 시 수리웡세는 지정학적 상황으로 인해 영국의 양보 요구에 시암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홍콩 총독이었던 존 보링 경은 런던의 영국 정부(동인도 회사가 아닌)의 대표로[12] 1855년 방콕에 도착했다.[37] 1855년 4월에 체결된 보링 조약은[37][38] 관세를 3%로 인하 및 표준화하고[12] ''파시 팍 루아''(측정 의무)를 폐지했다.[36] 이 조약은 시암 내 영국인에게 치외 법권을 부여하여, 서구인들이 시암의 ''나콘반'' 방식의 사법 고문에서 벗어나 영국 영사 당국과 영국법의 적용을 받도록 했다. 또한 방콕에 영국 영사관을 설립하도록 규정했다.보링 조약 이후 미국(타운젠드 해리스, 1856년 5월),[39] 프랑스(샤를 드 몽티니, 1856년 8월), 덴마크(1858년),[40] 포르투갈(1858년), 네덜란드(1860년) 및 프로이센(오일렌부르크 원정, 1861년)[41] 등 다른 서방 국가와 불평등 조약과 유사한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몽쿳 국왕의 이복 동생인 웡사 디라지 스니드 왕자와 짜오프라야 시 수리웡세(서방 자료에서는 '''칼라홈'''
보링 조약은 시암에 큰 사회경제적 영향을 미쳤고, 시암 경제는 신자유주의화되었다. 자급자족 경제에서 수출 지향 경제로 전환하기 시작했고[138] 세계 경제에 편입되었다.[31] 이전에 제한되었던 쌀 수출의 자유화는 쌀 농장의 급격한 성장과 생산 증가로 이어졌고,[136] 쌀은 시암의 주요 수출 품목이 되었다.[138] 생산 규모가 증가함에 따라 산업에 인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전통적인 부역 제도가 덜 유용해짐에 따라 사회적 변화가 필요해졌다. 1855년의 보링 조약은 대부분의 역사에서 '근대' 시암의 시작을 알린다.[138] 그러나 이러한 상업적 양보는 국가 안보[12] 와 무역 자유화를 명분으로 정부 수입에 극심한 영향을 미쳤다. 정부는 수입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중국인 세금 징수 시스템에 의존하여 수많은 새로운 세금을 징수했다. 시암의 세금 제도의 혼란은 1873년 재정 개혁으로 이어졌다.
시암은 유럽 정부와 자체 식민 행정부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했다.[12] 몽쿳 국왕은 1857년 런던에, 1861년 파리에 시암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 사절단은 아유타야 시대인 1688년에 마지막 사절단을 파견한 이후 유럽에 파견된 최초의 시암 사절단이었다. 분낙 가문이 왕국의 외교를 지배했다. 프랑스는 1862년 코친차이나를 획득했다. 프랑스는 적대적인 새로운 이웃으로 드러났다. 캄보디아의 앙두옹 국왕은 1860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노로돔과 시 보타[43] 사이의 내전이 발생하여 노로돔은 프랑스의 도움을 구했다. 프랑스 해군 제독 피에르 폴 드 라 그랑디에르는 노로돔에게 시암의 승인 없이 캄보디아를 프랑스 보호령으로 두는 조약을 체결하도록 했고, 프랑스는 1864년 노로돔을 캄보디아 국왕으로 옹립했다.[43] 칼라홈인 시 수리야웡은 노로돔에게 캄보디아에 대한 시암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또 다른 반대 조약을 체결하도록 하고, 1864년 ''스트레이츠 타임스''에 이를 게재하여[43] 프랑스 영사인 가브리엘 오브레에게 큰 곤란을 안겨주었다.[44] 프랑스는 오브레가 방콕에 군함을 가져오면서 반대 조약을 무효화하려 했다.[43] 캄보디아 문제에 대한 프랑스-시암 타협 초안이 1865년에 서명되었지만, 프랑스가 '시암 라오스'에 대한 시암의 주장을 받아들일 가능성 때문에 파리에서 비준이 지연되었다.[43][45] 시암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파리에 또 다른 사절단을 보냈다. 이 조약은 마침내 1867년 7월 파리에서 비준되었고,[45] 시암은 캄보디아를 공식적으로 양도했지만, 1907년에 양도될 바탐방과 시엠립을 포함한 북서부 캄보디아를 유지했다.
서구 제국주의는 시암에 국경 획정과 영토 선언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근대 이전 동남아시아에서는 정치체 간의 국경이 불분명했다. 전통적인 시암 정부는 도시, 마을 및 농업 지역에서만 권한을 가졌고, 산과 숲은 당국이 접근하기 어려워 대체로 방치되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국경 주장과 지도 제작이 식민 침략에 맞선 시암의 입지를 유지하는 열쇠였다. 영국과 시암 대표는 1866년 테나세림 구릉에서 만나 시암과 영국령 버마 사이의 영국-시암 국경을 살윈 강에서 안다만 해까지 탐사하고 정의했으며, 이는 1868년에 조약이 서명되면서 현대의 미얀마-태국 국경이 되었다.[46]
2. 2. 2. 몽쿳 왕의 개혁
몽쿳 왕은 1851년 4월 3일에 즉위하여 1868년 10월 1일까지 통치하였다. 그의 통치 철학은 백성을 다스리는 10가지 덕목인 '십선정법(十善正法)'에 기반을 두었으며, 이는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했다.몽쿳 왕은 왕권 강화에 힘썼다. 왕자 시절 승려로 지내면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정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불교 교리를 강조했다.
또한, 몽쿳 왕은 불교 개혁을 단행했다. 승려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존 불교 종단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새로운 종파인 '탐마윳띠까니카이'를 창설하여 불교의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이는 태국 불교의 현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몽쿳 왕은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응하고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구의 과학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는 서구식 교육 제도를 도입하고, 서구의 과학 기술을 연구하는 기관을 설립했다. 이러한 노력은 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몽쿳 왕의 개혁은 라따나꼬신 왕국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통치 철학과 정책은 왕국을 안정시키고 근대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특히 불교 개혁과 서구 문물 수용은 태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2. 2. 3. 쭐랄롱꼰 왕의 개혁
쭐랄롱꼰 대왕은 1883년 솜뎃 짜오프라야 시 수리웡세가 사망한 후, 1880년대 중반부터 정부를 통제하고 개혁을 시행했다.[57] 수십 년 동안 강력한 귀족들이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쭐랄롱꼰은 자신의 형제와 아들을 포함한 많은 왕족들을 정부 요직에 임명했다.[31] 이들은 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었다. 왕은 1885년에 아들들을 유럽에서 교육받도록 보냈다. 많은 왕자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았는데, 특히 외교를 담당한 데와웡세와 내정을 담당한 담롱이 대표적이었다. 데와웡세 왕자의 제안으로,[12] 쭐랄롱꼰 대왕은 1888년에 수 세기 동안 무질서하게 운영되던 '차투사돔' 중앙 정부를 대체하기 위해 현대적인 부서를 만들기 시작했다.[110] 1892년 4월에는 왕족들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현대적인 시암 내각이 구성되었다.[57] 담롱 왕자는 1892년에 '마하타이' 내무부 장관이 되었다. 담롱은 현대적인 관료제를 도입했고, 1893년에는 반독립적인 통치자들이 지배하던 전통적인 조공 네트워크를 중앙에서 임명한 위원이 관할하는 여러 단계의 지역 기반 행정 단위로 대체하는 '몬톤' 시스템의 설립을 발표했다.이러한 개혁 중에 프랑스는 1893년에 방콕을 위협하기 위해 군함을 보냈고, 시암은 메콩강 동쪽의 라오스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할양해야 했다. 1893년 10월 조약 조건에 따라 메콩강을 따라 25km 비무장 지대가 설치되었지만, 시암 측에만 해당되었다. 시암 궁정의 가장 큰 걱정은 1893년 프랑스의 침략으로 현실화되었고, 시암의 주권 유지는 영불 갈등에 맡겨졌다.[58] 영국이 시암에 대한 프랑스의 진출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자, 1896년 영불 협정은 시암의 독립을 시암 핵심 영토에만 해당하는 "완충 국가"로 보장하여, 영국은 남부 시암에, 프랑스는 동부 시암에 개입할 수 있도록 했다.[12][58] 쭐랄롱꼰 대왕은 1897년에 자신의 왕국을 식민지화의 대상이 아닌 문명화되고 서구화된 국가로 홍보하기 위해 섭정 사오바파 왕비를 섭정으로 삼고 유럽 순방에 나섰다. 한편, 프랑스가 시암 내 프랑스 '아시아인'들, 즉 라오스인, 캄보디아인, 베트남인들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장기간의 해결되지 않은 협상[38]과 짠타부리의 지속적인 프랑스 점령으로 이어졌다.
1893년 이후, 여러 시암 개혁이 가속화되었다. 쭐랄롱꼰 대왕의 벨기에 고문인 구스타브 롤랭-자크민스는 서구 열강이 시암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은 시암의 법률과 법체계가 아유타야 시대부터 구식이었고 현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시암 정부를 설득했다.[56] 쭐랄롱꼰 대왕은 1897년에 입법 의회를 임명하여 서구 법률 전문가들로 구성하여 민법 시스템을 기반으로 현대적인 시암 법률을 제정하도록 했다. '몬톤'은 계속해서 형성되었고, 예전 지방 영주들의 권한을 종식시켰다. 란나의 통합은 1893년에 시작되었고, 1899년에는 완전한 '몬톤'인 몬톤 파야프가 되었다. 메콩강 서쪽의 코랏 고원에 있는 나머지 라오스 마을들은 4개의 '몬톤'으로 편성되었다. 1897년 지방 행정법은 '몬톤' 시스템의 구조를 정의했다. 그러나 중앙집권화 정책은 저항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901~1902년 성자 반란 동안에는 초자연적인 힘을 주장하는 이산의 많은 부족 지도자들이 일어났다. 마지막 파타니 라자였던 술탄 압둘 카디르는 싱가포르에서 영국의 지원을 구했고,[12] 반란을 계획했지만 1902년에 일곱 개의 파타니 말레이 술탄국이 시암에 통합되면서 사전에 발각되었다. 프래의 샨족 이민자들은 1902년 샨 프래 반란을 일으켜,[12] 란나 전통을 지키고 시암 중앙 관리들을 살해할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차오프라야 수라삭 몬트리는 1902년에 샨 반란을 진압했다. 1905년 4월, 쭐랄롱꼰 대왕은 노예 제도를 완전히 폐지했다.[47] 또한 1905년에 쭐랄롱꼰은 전통적인 부역 노동 시스템을 1905년 8월 군 징집법을 통해 제한된 기간 동안 복무하는 현대적인 보편적 징병 시스템으로 대체했다.[48] 최초의 현대 시암 법인 형법은 1908년에 공포되었다.[59] 현대 시암 법률의 편찬은 거의 40년이 걸렸고, 1935년에야 완료되었다.
파리의 식민지 당의 영향력은 협상 과정에서 시암의 더 많은 양보를 요구했고,[56] 데와웡세 왕자가 시암 대표였다. 1904년, 시암은 프랑스가 짠타부리를 포기하는 대가로 므루프레이, 참파삭 및 메콩강 서쪽의 사이냐부리를 할양해야 했지만, 프랑스는 대신 뜨랏을 점령했다. 1904년 영불 협상은 두 강대국이 시암의 독립을 상호 인정하는 것을 확인했다. 1907년, 프랑스와 시암 대표단은 프랑스-시암 국경을 확정하기 위해 만났고, 프랑스는 뜨랏과 단사이를 시암에 반환하는 대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할양된 바탐방과 시엠립을 포함한 캄보디아 북서부를 얻었고, 프랑스는 또한 시암 내 프랑스 아시아인들에 대한 관할권 행사를 축소하기로 합의했다.[38] 마지막으로, 시암은 1909년 영-시암 조약에서 케다, 클란탄, 트렝가누 및 펄리스를 포함한 북 말레이 술탄국을 영국령 말라야에 할양하기로 결정했고, 그 대가로 영국은 시암에 남부 시암 철도 건설을 위해 4백만 파운드를 대출하고, 시암에서 대부분의 치외법권을 포기했다.[38] 이러한 잃어버린 영토는 시암의 영향력 범위의 가장자리에 있었고, 시암은 어느 정도의 통제만 행사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영토"라는 개념은 1932년 시암 혁명 이후 태국 군국주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60] 쭐랄롱꼰은 긴 통치 기간 동안 정부, 재정 및 사회 개혁을 시행했고, 시암의 조공 주변부를 없애고, 전통적인 '만다라' 네트워크 정치 체제를 중앙 집권화된 관료제와 명확하게 정의된 경계를 가진 보다 콤팩트한 현대 민족 국가[61]로 변모시켰으며, 서쪽으로는 영국령 버마, 동쪽으로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쪽으로는 영국령 말라야와 경계를 이루었다.
2. 2. 4. 서구 열강의 위협과 영토 상실
1864년 중국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진압된 후, 잔존한 중국 반군 세력은 1868년 베트남 북부로 진입하여, 라오스 루앙프라방 왕에게 조공을 바치던 십송추타이와 후아판의 타이 군주국을 약탈하고 점령했다. 시암 사람들은 북부 고지대에서 온 중국인들을 "호"(ฮ่อth)라고 불렀고, 이 때문에 호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호'' 반군은 깃발 군대로 뭉쳤는데, 특히 흑기군과 황기군이 두드러졌다.[51] 1875년, 황기군은 무앙푸안을 공격하여 자르 평원을 점령하고 농카이를 공격했다.[51] 쭐랄롱꼰 국왕은 시암 군대를 파견하여 호족을 일시적으로 산으로 몰아냈다. 황기군은 1875년 중국 당국에 의해 격파되어 소규모의 도적 집단으로 흩어졌지만, 다시 부활하여 자르 평원에 영구 정착했다.
근대 이전의 동남아시아에서는 전통적인 정치 체제가 영토 경계로 정의되지 않고, 만다라 시스템에 의해 정의되는 동맹과 조공 의무의 네트워크와 계층 구조로 정의되었다. 다문화 시암 제국은 조공국인 란나 치앙마이, 라오스 루앙프라방 왕국 및 참파삭, 소규모 라오-란나 족장국, 남부의 무슬림 말레이 술탄국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침략에 직면하면서 영토와 주권은 명확하게 정의되어야 했다. 영국은 상부 미얀마를 획득했고, 프랑스는 1886년에 통킹을 획득했다.[52] 이러한 전개는 시암에 대한 제국주의적 계획을 고조시켰고, 시암 북부 후방 지역에서 서구의 존재감을 증가시켰다. 시암은 제국주의적 위협에 대응하여 중앙 집권화와 내부 구조 조정을 통해 조공국을 시암 본토로 통합하고 자치권을 종식시켰다. 란나 영주들은 광대한 북부 티크 숲에 대한 전통적인 소유권의 혜택을 누렸고, 때로는 영국 벌목업자에게 부여된 상충되는 임업 특허가 영국의 개입을 유발할 수 있었다.[53] 란나는 영국 침략 가능성의 최전선에 서 있었기 때문에 개혁의 첫 번째 대상이 되었다.[53] 1883년 치앙마이 조약은 방콕에 란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것을 촉구했다. 쭐랄롱꼰 국왕은 1883년 치앙마이에 개혁을 시작하기 위해 왕실 사절을 파견했다.[12][53] 중앙 시암 스타일의 통치와 엄격한 과세가 부과되었다. 개혁은 처음에는 유망했지만, 개혁으로 인해 전통적인 특권과 권한이 훼손된 란나 통치자들의 끈기로 인해 점차 쇠퇴했다.
쭐랄롱꼰 국왕은 1884–1885년 자르 평원에 있는 호족을 정복하기 위해 또 다른 시암 원정을 보냈지만, 그 원정은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51] 시암 궁정은 그 후 중국 반군에 대해 더 심각한 접근 방식을 취했다.[54] 새로 현대화된 시암 연대가 호족을 진압하고 1885년 국경을 장악하기 위해 파견되었다.[55] 짜오무엔 와이와라낫(후일 짜오프라야 수라삭 몬트리)는 무앙손에서 지휘권을 잡고 후아판을 진압한 다음 십송추타이의 무앙 태엥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시암군은 데오 반 찌, 무앙 레이의 백 따이 통치자 데오 반 신의 아들로 흑기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데오 반 찌의 저항에 직면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1887년 2월 프랑스 식민주의 옹호자인 오귀스트 파비에가 루앙프라방의 프랑스 영사로 부임하면서 일어났다.[54]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던 와이와라낫은 1887년 4월 원정을 끝내고 호족과 타이족 포로들을, 그 중 데오 반 찌의 형제들을 방콕으로 데려갔다. 분노한 데오 반 찌는 흑기군을 이끌고 1887년 6월 루앙프라방을 점령하고 약탈했다.[54] 오귀스트 파비에는 루앙프라방의 운캄 국왕을 구출하여 그를 카누에 태워[54] 방콕으로 데려갔다. 프랑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시암이 영유권을 주장했던 십송추타이에 진입하여 점령했다. 수라삭 몬트리와 파비에 간의 논쟁 끝에 1888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십송추타이를 차지하고 시암은 후아판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54]
프랑스가 1887년 십송추타이를 점령한 후 프랑스-시암 관계는 악화되었다. 방콕의 프랑스 영사로 전임된 오귀스트 파비에는 1893년 3월 방콕에 군함 ''뤼탱''을 가져와 시암 정부에 메콩강의 왼쪽(동쪽) 강둑에 있는 모든 라오스 땅을 포기할 것을 압박했다. 시암이 이에 따르지 않자 프랑스는 라오스로 군대를 진격시켜 1893년 6월 캄무안의 시암 총독 프라 욧므앙 크왕(พระยอดเมืองขวางth)에게 프랑스 장교 그로구랭이 살해되는 결과를 낳았다. 식민주의적 정서가 지배적인 파리의 프랑스 의회는[56] 시암에 대한 강력한 군사적 보복을 명령했다. 프랑스 군함 2척, ''앵콩스탕''과 ''코메트''가 차오프라야강에 진입하여 방콕으로 진격하여 빡남 사건 동안 프랑스 군함과 시암 출라촘클라오 요새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시암 왕궁을 위협했다. 데와웡세 왕자 외무부 장관은 프랑스 침략군을 '축하'하기 위해 갔지만[12] 파비에는 최후 통첩을 제시하며 시암에 메콩강 동쪽의 땅을 할양하고, 3백만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며, 프라 욧므앙 크왕을 처벌할 것을 촉구했다.[12] 시암이 주저하자 프랑스는 방콕에 해상 봉쇄를 가했다.[56] 시암 궁정은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영국의 지원을 찾기를 희망했지만 영국은 무반응하여 시암은 1893년 7월 프랑스 요구에 무조건 따르기로 결심했다. 프랑스 군함은 1893년 8월 방콕을 떠났지만, 그들의 준수를 보장하기 위해 시암 동부 해안의 찬타부리를 점령했다. 조약은 1893년 10월에 체결되었다.[12] 1779년부터 약 1세기 동안 시암의 지배를 받았던 라오스는 1893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합류했다. 1893년 프랑스-시암 전쟁 또는 112년 위기(วิกฤตการณ์ ร.ศ. ๑๑๒th)는 시암이 서구 제국주의 강대국에 의해 정복될 뻔했던 시기였다.
2. 3. 근대 시암 (1910년–1932년)
쭐랄롱꼰 국왕에게 프리사당 왕자를 비롯한 유럽 외교관, 시암 공족, 대사, 관료들이 1885년 1월 입헌 군주제 지지를 촉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เหตุการณ์ ร.ศ. ๑๐๓th, 103년 사건).[59][62] 쭐랄롱꼰은 왕국에 개혁이 우선 필요하다고 답했다.[12] 쭐랄롱꼰은 계몽 전제 군주제 하의 절대 군주제를 확립하고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통해 무제한적 왕권을 행사했다. 그의 통치 기간에는 K.S.R. 쿨랍과 같은 평민 출신 자유주의자들이 등장했는데, 그는 1894년 "프라차팁타이"(Prachathippatai, 산스크리트어 "prajā" "people" 및 팔리어 "ādhipateyya" "sovereignty")를 "민주주의"라는 용어로 만들었다. 티안완 와나포는 1905년 왕권 제한을 위한 대의 정부와 의회를 제안했으며, 일부일처제와 여성의 권리를 옹호했다.[138] 시암의 선구자들은 메이지 일본을 아시아 근대화 성공 모델로 삼았다. 쭐랄롱꼰 국왕은 1907년에 "프라 피야 마하라"(Phra Piya Maharaj, พระปิยมหาราชth, "위대한 사랑하는 국왕")로 공식 칭송받았다.
와치룬히스 왕세자는 1895년에 사망했다.[64] 쭐랄롱꼰은 와치라웃을 새 왕세자로 임명했다.[64] 와치라웃은 샌드허스트에서 훈련받고 옥스퍼드에서 역사와 법을 공부했으며, 1903년에 시암으로 돌아왔다.[64] 쭐랄롱꼰 국왕은 와치라웃 후계자가 헌법에 동의할 것이라고 약속했다.[65] 쭐랄롱꼰은 1907년 질병 치료를 위해 유럽을 방문했고, 와치라웃 왕세자가 섭정을 맡았다.[12][64] 쭐랄롱꼰 국왕은 1910년 10월 사망했다.[12] 와치라웃은 라마 6세로 즉위했다.[64] 서구 식민주의 위협은 끝나고, 시암은 입헌 군주제와 민주주의를 향한 도전에 직면했다.

1911년 신해 혁명으로 청나라가 전복되자, 시암은 몇 안 되는 절대 군주국 중 하나가 되었다. 와치라웃은 1911년 5월[64] ''수아 파''(와일드 타이거 군단)을 창설했다.[12] 이로 인해 군 장교에게 신체적 처벌을 가한 것에 불만을 품은 중견 군인 그룹과 소원해졌다.[64] 이들은 1912년 1월 궁궐 반란(กบฏ ร.ศ. ๑๓๐th, 130년의 반란)을 공모했으나, 음모가 유출되어 1912년 4월 체포되었다. 와치라웃은 공모자들에게 사형을 면제하고 최고 지도자들에게만 징역형을 선고했다.[12] 시암 정부는 이 반란을 중국 공화주의 운동과 연관시켰다.[63] 준군사 운동은 1927년경 사라졌지만, 자원 방위 군단( )으로 부활했다.[66] ''수아 파''는 전국 스카우트 기구로 현대 태국에 남아있다.

와치라웃은 자신의 측근들을 선호했으며,[12] 그들은 대부분 젊은 세대 왕자들이었다. 초기 와치라웃 정부는 부왕 통치에서 온 고위 왕자들에게 지배당했다.[12] 1915년 담롱 왕자 사임 후, 차오프라야욤마랏 판 수쿰이 그를 대신했다. 1915년까지 왕실 내각은 국왕 측근들로 채워졌다. 주변부 ''몬톤'' 지방은 더 큰 ''파크''(지역)로 재편되었고, 각 지역에는 ''우파랏''(총독)이 있었다. 국왕의 편애는 왕족 출신이 아닌 일반인들이 더 많은 교육과 기회를 얻게 해주었다.[12]
와치라웃은 비교적 자유주의적 군주였으며,[64] 대중 언론이 의견을 갖도록 허용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시암어, 영어, 중국어[67] 신문과 잡지가 급증했다.[68] 와치라웃 통치는 태국 정치 언론의 출현을 보였다.[67] 신문들은 국왕을 포함한 정부에 대해 직접적이고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고, 여성들을 포함한 모든 계층의 독자들을 확보했다.[67] 와치라웃은 문학적 필명을 사용하여 정치적 논의에 참여했다. 그의 통치는 현대 태국 문학의 풍요로운 시기였으며, 국왕은 서양 작품 번역,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어휘를 사용한 현대 어휘 창조를 통해 추상적 아이디어를 탐구했다. 국왕은 작가이자 연극 배우였다. 와치라웃은 1918년 7월 두싯 타니라는 모의 민주주의 소도시를 실험했다.[64] 언론의 자유가 있었다.[67] 1922년 시암 전기 전차 노선 노동자 파업(태국 최초 노동 투쟁)[69] 후, 와치라웃은 1923년 1월 출판법을 통해 언론 자유를 억제하고, 편집자들이 국왕 모독죄에 책임을 지게 했다.[62] 와치라웃 국왕은 절대 군주제에 헌신했으며, 시암이 불교에 기초한 고유 전통 원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서구 자유주의를 거부했다.[70]
국왕 와치라웃은 와일드 타이거 군단 연설에서 '찻'(국가), '삿사나'(불교), '프라 마하 캇사트'(군주제)의 삼위일체를 제정했는데,[12][68] 이는 영국식 '신, 왕, 국가'에서 따온 시암 국가 본질이었다.[64] 와치라웃 왕은 태국 엘리트 민족주의를 창시했다.[12] 중국 국민당 시암 지부 수장 세오 후첸(蕭佛成)은[63] '치노사얌 와라삽'(Chinosayam Warasap, '중국-시암 잡지')을 편집해[63] 공화주의 혁명 사상을 전파했다. 국왕은 반중국적 입장을 취하며 그들을 '동양의 유대인'이라고 칭했다.[12] 중국 이민자들은 시암 경제 민족주의 표적이 되었다.[12] 1913년 와치라웃은 성씨 제도를 도입하고 태국 혈통에 의한 국적을 정의했다.[63] 와치라웃은 1916년 쭐랄롱꼰 대학교를 설립했다.[12] 1921년 초등 교육법을 통해 중앙 태국어로 전국, 특히 무슬림 말레이 남부까지, 의무 교육을 시행했다.[72]
북부 시암에서, 크루바 시위차이는 1910년대 란나 수도원의 중앙 시암 국가 불교 통합에 대한 소극적 저항을 이끌었다.[50] 방콕 출발 기차 노선은 1919년 파타니, 1922년 치앙마이에 도달했다. 1905년 몬톤 파타니 창설로 무슬림 남부 파타니 말레이족은 징병과 세금에서 면제되었다. 그러나 국가주의적 교육 개혁은 파타니 이슬람 교육에 영향을 미쳤다.[71][73] 인두세 불만과 함께, 농촌 파타니 말레이족은 1922년 남사이 봉기를 계획했지만[73] 저지되었다. 시암 정부는 1923년 6월 욤마랏 판 수쿰이 제안한 '파타니 주 통치를 위한 6가지 원칙'으로 대응, 무슬림 남부 지역을 관대한 세금 조치와 이슬람교 존중을 통해 신중히 처리할 것을 촉구했다.

와치라웃은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시암 중립을 선언했지만, 연합국 지지자였다.[12] 와치라웃은 중립 유지가 시암의 양보를 박탈할 것을 깨달았다. 와치라웃은 1917년 7월 중앙 강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이끌었다.[12] 와치라웃은 프라야 피차이찬릿 지휘 아래 1,284명 자원병으로 구성된 시암 원정군을 파견,[68] 제1차 세계 대전 서부 전선에 참전시켰다. 와치라웃은 1917년 9월 국가 삼위일체를 반영하는 삼색기를 채택했다.[64] 시암은 1918년 6월 프랑스에 항공기 편대를 파견했다.[12] 시암은 자체 공군을 창설, 1913년부터 조종사를 훈련시켰다. 시암군은 1918년 7월 마르세유에 도착, 연합군 라인란트 점령에 맞춰 1918년~1919년 시암군 스스로 참여했다. 시암군은 1919년 7월 파리 승전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시암의 참전은 1919년 베르사유 강화 회의에서 시암의 자리를 확보했고,[12] 1920년 국제 연맹 창립 회원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여를 통해 시암은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과 체결된 '불평등 조약' 폐지를 압박했다. 1920년 미국-시암 조약, 1924년 일본-시암 조약은 서방 국가들과의 조약 갱신 모델 역할을 했다.[38] 와치라웃 왕은 하버드 로스쿨 교수 프랜시스 보스 세이어를 1924년~1926년 유럽 순방에서 유럽 국가들과 조약 재협상 대표로 임명했다.[38][68] 프랑스와 영국은 1925년 시암과 새 조약에 동의했다.[12][38] 시암 내 외국인 치외 법권과 수입품 관세 제한이 폐지되어, 시암의 사법 및 재정 자율성이 회복되었다.[38]
1897년, 태국 국왕 장학금을 통해 시암 왕실 정부는 비왕족 출신 남성들을 유럽에서 교육을 받도록 파견하기 시작했다. 이는 왕자들의 유학을 돕고, 근대화된 시암 정부에서 일할 토착 관리들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이전 하위 귀족 계급과 동화된 중국 이민자들로 구성된 시암의 교육받은 중산층의 형성을 이끌었다.[48] 이들은 현대 교육과 서구의 문명 및 진보에 대한 아이디어에 노출되었다.[74]
라마 6세(King Vajiravudh)는 많은 사업과 개인적 지출에 많은 돈을 썼으며,[12] 총 900만 바트에 달했는데, 이는 연간 국가 예산의 약 10%를 차지했다.[1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과 전후 경제 침체는 시암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라마 6세의 낭비가 시암 재정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했지만,[64] 시암의 취약한 경제도 한몫했다. 시암은 기술 발전의 부족으로 산업화를 겪지 못했고, 수출 지향적인 농업 경제로 남았다. 1920년대 시암의 주요 수출품인 쌀의 세계적인 상품 가격 변동[64]은 1919–1921년의 작황 부진과 결합되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12] 1919년 이후, 시암의 무역 수지와 국가 예산은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고, 많은 양의 은이 왕국에서 유출되면서,[12] 바트 통화가 불안정해졌다.

보수적인 왕자 파벌이 권력을 되찾으면서, 왕실 정부는 라마 6세 치세로부터 물려받은 국가 재정 문제를 긴축과 절약으로 해결하고자 했다.[12] 왕실 정부는 관료제 규모를 줄여 1926–1927 회계 연도 동안 정부 지출을 1,080만 바트에서 680만 바트로 삭감했다.[12] 많은 정부 직책이 통합되었고 불필요한 직책은 폐지되었으며, 많은 수의 관료 해고와 나머지 공무원들의 급여 삭감이 동반되었다. 일부 지방 ''몬톤''도 통합되었다. 이 정책은 시암의 국가 재정이 3년 안에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되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지만,[75] 갑자기 실업자가 된 교육받은 관료 중산층으로부터 왕실 정부에 대한 정치적 불만을 낳았다. 방콕의 신문들은 절대주의적 시암 왕실 정권에 대해 격렬한 의견을 표명했고, 포라데트 정부는 1927년에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여 왕실 모독을 저지른 자는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여 처벌하라고 포고했다.[59] 경제 원리에 대한 학문적 가르침도 금지되었다.

1932년, 국가가 심각한 불황에 빠지자 최고 위원회는 군사 예산을 포함한 지출 삭감을 결정했다. 국왕은 이러한 정책이 특히 군대에서 불만을 야기할 수 있다고 예측하고, 삭감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특별 관료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연설에서 "나 자신은 재정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고,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내가 실수했다면, 시암 국민들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마땅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전의 시암 군주는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프라자디포크가 의도한 대로, 즉 이해와 협력을 위한 솔직한 호소로 이 연설을 해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를 그의 약점의 징후이자, 실수하기 쉬운 독재자의 통치를 영속시키는 체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증거로 보았다. 수도에서 심각한 정치적 소요가 위협받았고, 1932년 4월 국왕은 총리와 권력을 공유하는 헌법을 도입하기로 동의했다. 이는 군대의 급진적인 세력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1932년 6월 24일, 국왕이 해변에 있는 동안 방콕 주둔군은 반란을 일으켜 "카나 라사돈"으로 알려진 49명의 장교 그룹의 지휘 아래 권력을 장악했다. 이로써 800년의 절대 군주제가 종식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서양 동남아시아 학자들은 태국 정치사를 거의 연구하지 않았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유일한 명목상의 "토착" 동남아시아 국가인 태국은 다른 동남아시아의 새롭게 독립한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안정된 것으로 간주되었다.[76] 태국은 군주제와 같은 "전통"에서 충분한 연속성을 유지하여 탈식민화로 인한 혼란과 어려움을 피하고 혁명적인 공산주의의 침략에 저항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76] 이러한 주장은 1932년 혁명이 단순한 쿠데타에 불과하며, 절대 군주제와 귀족을 서구식 교육을 받은 장군과 문관으로 구성된 평민 엘리트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이 사건에 혁명적인 요소는 거의 없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K. 와이어트는 1910년부터 1941년까지의 태국 역사를 "본질적으로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개혁의 사회적 결과가 정치적으로 구현된 것"으로 묘사했다.[77] 1932년 혁명은 일반적으로 "라마 4세와 라마 5세에 의해 시작된 힘의 자연스러운 결과"의 불가피한 결과로 특징지어졌다.[78]
2. 3. 1. 자유주의와 입헌 운동
쭐랄롱꼰 국왕에게 프리사당 왕자를 비롯한 유럽 외교관, 시암 공족, 대사, 관료들이 1885년 1월 입헌 군주제 지지를 촉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เหตุการณ์ ร.ศ. ๑๐๓th, 103년 사건)[59][62] 쭐랄롱꼰은 왕국에 개혁이 우선 필요하다고 답했다.[12] 쭐랄롱꼰은 계몽 전제 군주제 하의 절대 군주제를 확립하고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통해 무제한적 왕권을 행사했다. 그의 통치 기간에는 K.S.R. 쿨랍과 같은 평민 출신 자유주의자들이 등장했는데, 그는 1894년 "프라차팁타이"(Prachathippatai, 산스크리트어 "prajā" "people" 및 팔리어 "ādhipateyya" "sovereignty")를 "민주주의"라는 용어로 만들었다. 티안완 와나포는 1905년 왕권 제한을 위한 대의 정부와 의회를 제안했으며, 일부일처제와 여성의 권리를 옹호했다.[138] 시암의 선구자들은 메이지 일본을 아시아 근대화 성공 모델로 삼았다. 쭐랄롱꼰 국왕은 1907년에 "프라 피야 마하라"(Phra Piya Maharaj, พระปิยมหาราชth, "위대한 사랑하는 국왕")로 공식 칭송받았다.와치룬히스 왕세자는 1895년에 사망했다.[64] 쭐랄롱꼰은 와치라웃을 새 왕세자로 임명했다.[64] 와치라웃은 샌드허스트에서 훈련받고 옥스퍼드에서 역사와 법을 공부했으며, 1903년에 시암으로 돌아왔다.[64] 쭐랄롱꼰 국왕은 와치라웃 후계자가 헌법에 동의할 것이라고 약속했다.[65] 쭐랄롱꼰은 1907년 질병 치료를 위해 유럽을 방문했고, 와치라웃 왕세자가 섭정을 맡았다.[12][64] 쭐랄롱꼰 국왕은 1910년 10월 사망했다.[12] 와치라웃은 라마 6세로 즉위했다.[64] 서구 식민주의 위협은 끝나고, 시암은 입헌 군주제와 민주주의를 향한 도전에 직면했다.
1911년 신해 혁명으로 청나라가 전복되자, 시암은 몇 안 되는 절대 군주국 중 하나가 되었다. 와치라웃은 1911년 5월[64] ''수아 파''(와일드 타이거 군단)을 창설했다.[12] 이로 인해 군 장교에게 신체적 처벌을 가한 것에 불만을 품은 중견 군인 그룹과 소원해졌다.[64] 이들은 1912년 1월 궁궐 반란(กบฏ ร.ศ. ๑๓๐th, 130년의 반란)을 공모했으나, 음모가 유출되어 1912년 4월 체포되었다. 와치라웃은 공모자들에게 사형을 면제하고 최고 지도자들에게만 징역형을 선고했다.[12] 시암 정부는 이 반란을 중국 공화주의 운동과 연관시켰다.[63] 준군사 운동은 1927년경 사라졌지만, 자원 방위 군단( )으로 부활했다.[66] ''수아 파''는 전국 스카우트 기구로 현대 태국에 남아있다.
와치라웃은 자신의 측근들을 선호했으며[12], 그들은 대부분 젊은 세대 왕자들이었다. 초기 와치라웃 정부는 부왕 통치에서 온 고위 왕자들에게 지배당했다.[12] 1915년 담롱 왕자 사임 후, 차오프라야욤마랏 판 수쿰이 그를 대신했다. 1915년까지 왕실 내각은 국왕 측근들로 채워졌다. 주변부 ''몬톤'' 지방은 더 큰 ''파크''(지역)로 재편되었고, 각 지역에는 ''우파랏''(총독)이 있었다. 국왕의 편애는 왕족 출신이 아닌 일반인들이 더 많은 교육과 기회를 얻게 해주었다.[12]
와치라웃은 비교적 자유주의적 군주였으며,[64] 대중 언론이 의견을 갖도록 허용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시암어, 영어, 중국어[67] 신문과 잡지가 급증했다.[68] 와치라웃 통치는 태국 정치 언론의 출현을 보였다.[67] 신문들은 국왕을 포함한 정부에 대해 직접적이고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고, 여성들을 포함한 모든 계층의 독자들을 확보했다.[67] 와치라웃은 문학적 필명을 사용하여 정치적 논의에 참여했다. 그의 통치는 현대 태국 문학의 풍요로운 시기였으며, 국왕은 서양 작품 번역,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어휘를 사용한 현대 어휘 창조를 통해 추상적 아이디어를 탐구했다. 국왕은 작가이자 연극 배우였다. 와치라웃은 1918년 7월 두싯 타니라는 모의 민주주의 소도시를 실험했다.[64] 언론의 자유가 있었다.[67] 1922년 시암 전기 전차 노선 노동자 파업(태국 최초 노동 투쟁)[69] 후, 와치라웃은 1923년 1월 출판법을 통해 언론 자유를 억제하고, 편집자들이 국왕 모독죄에 책임을 지게 했다.[62] 와치라웃 국왕은 절대 군주제에 헌신했으며, 시암이 불교에 기초한 고유 전통 원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서구 자유주의를 거부했다.[70]
국왕 와치라웃은 와일드 타이거 군단 연설에서 '찻'(국가), '삿사나'(불교), '프라 마하 캇사트'(군주제)의 삼위일체를 제정했는데,[12][68] 이는 영국식 '신, 왕, 국가'에서 따온 시암 국가 본질이었다.[64] 와치라웃 왕은 태국 엘리트 민족주의를 창시했다.[12] 중국 국민당 시암 지부 수장 세오 후첸(蕭佛成)은[63] '치노사얌 와라삽'(Chinosayam Warasap, '중국-시암 잡지')을 편집해[63] 공화주의 혁명 사상을 전파했다. 국왕은 반중국적 입장을 취하며 그들을 '동양의 유대인'이라고 칭했다.[12] 중국 이민자들은 시암 경제 민족주의 표적이 되었다.[12] 1913년 와치라웃은 성씨 제도를 도입하고 태국 혈통에 의한 국적을 정의했다.[63] 와치라웃은 1916년 쭐랄롱꼰 대학교를 설립했다.[12] 1921년 초등 교육법을 통해 중앙 태국어로 전국, 특히 무슬림 말레이 남부까지, 의무 교육을 시행했다.[72]
북부 시암에서, 크루바 시위차이는 1910년대 란나 수도원의 중앙 시암 국가 불교 통합에 대한 소극적 저항을 이끌었다.[50] 방콕 출발 기차 노선은 1919년 파타니, 1922년 치앙마이에 도달했다. 1905년 몬톤 파타니 창설로 무슬림 남부 파타니 말레이족은 징병과 세금에서 면제되었다. 그러나 국가주의적 교육 개혁은 파타니 이슬람 교육에 영향을 미쳤다.[71][73] 인두세 불만과 함께, 농촌 파타니 말레이족은 1922년 남사이 봉기를 계획했지만[73] 저지되었다. 시암 정부는 1923년 6월 욤마랏 판 수쿰이 제안한 '파타니 주 통치를 위한 6가지 원칙'으로 대응, 무슬림 남부 지역을 관대한 세금 조치와 이슬람교 존중을 통해 신중히 처리할 것을 촉구했다.
와치라웃은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시암 중립을 선언했지만, 연합국 지지자였다.[12] 와치라웃은 중립 유지가 시암의 양보를 박탈할 것을 깨달았다. 와치라웃은 1917년 7월 중앙 강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이끌었다.[12] 와치라웃은 프라야 피차이찬릿 지휘 아래 1,284명 자원병으로 구성된 시암 원정군을 파견,[68] 제1차 세계 대전 서부 전선에 참전시켰다. 와치라웃은 1917년 9월 국가 삼위일체를 반영하는 삼색기를 채택했다.[64] 시암은 1918년 6월 프랑스에 항공기 편대를 파견했다.[12] 시암은 자체 공군을 창설, 1913년부터 조종사를 훈련시켰다. 시암군은 1918년 7월 마르세유에 도착, 연합군 라인란트 점령에 맞춰 1918년~1919년 시암군 스스로 참여했다. 시암군은 1919년 7월 파리 승전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시암의 참전은 1919년 베르사유 강화 회의에서 시암의 자리를 확보했고,[12] 1920년 국제 연맹 창립 회원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여를 통해 시암은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과 체결된 '불평등 조약' 폐지를 압박했다. 1920년 미국-시암 조약, 1924년 일본-시암 조약은 서방 국가들과의 조약 갱신 모델 역할을 했다.[38] 와치라웃 왕은 하버드 로스쿨 교수 프랜시스 보스 세이어를 1924년~1926년 유럽 순방에서 유럽 국가들과 조약 재협상 대표로 임명했다.[38][68] 프랑스와 영국은 1925년 시암과 새 조약에 동의했다.[12][38] 시암 내 외국인 치외 법권과 수입품 관세 제한이 폐지되어, 시암의 사법 및 재정 자율성이 회복되었다.[38]
2. 3. 2. 경제 위기와 사회 변화
1897년, 태국 국왕 장학금을 통해 시암 왕실 정부는 비왕족 출신 남성들을 유럽에서 교육을 받도록 파견하기 시작했다. 이는 왕자들의 유학을 돕고, 근대화된 시암 정부에서 일할 토착 관리들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이전 하위 귀족 계급과 동화된 중국 이민자들로 구성된 시암의 교육받은 중산층의 형성을 이끌었다.[48] 이들은 현대 교육과 서구의 문명 및 진보에 대한 아이디어에 노출되었다.[74]라마 6세(King Vajiravudh)는 많은 사업과 개인적 지출에 많은 돈을 썼으며,[12] 총 900만 바트에 달했는데, 이는 연간 국가 예산의 약 10%를 차지했다.[1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과 전후 경제 침체는 시암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라마 6세의 낭비가 시암 재정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했지만,[64] 시암의 취약한 경제도 한몫했다. 시암은 기술 발전의 부족으로 산업화를 겪지 못했고, 수출 지향적인 농업 경제로 남았다. 1920년대 시암의 주요 수출품인 쌀의 세계적인 상품 가격 변동[64]은 1919–1921년의 작황 부진과 결합되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12] 1919년 이후, 시암의 무역 수지와 국가 예산은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고, 많은 양의 은이 왕국에서 유출되면서,[12] 바트 통화가 불안정해졌다.
보수적인 왕자 파벌이 권력을 되찾으면서, 왕실 정부는 라마 6세 치세로부터 물려받은 국가 재정 문제를 긴축과 절약으로 해결하고자 했다.[12] 왕실 정부는 관료제 규모를 줄여 1926–1927 회계 연도 동안 정부 지출을 1,080만 바트에서 680만 바트로 삭감했다.[12] 많은 정부 직책이 통합되었고 불필요한 직책은 폐지되었으며, 많은 수의 관료 해고와 나머지 공무원들의 급여 삭감이 동반되었다. 일부 지방 ''몬톤''도 통합되었다. 이 정책은 시암의 국가 재정이 3년 안에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되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지만,[75] 갑자기 실업자가 된 교육받은 관료 중산층으로부터 왕실 정부에 대한 정치적 불만을 낳았다. 방콕의 신문들은 절대주의적 시암 왕실 정권에 대해 격렬한 의견을 표명했고, 포라데트 정부는 1927년에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여 왕실 모독을 저지른 자는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여 처벌하라고 포고했다.[59] 경제 원리에 대한 학문적 가르침도 금지되었다.
2. 3. 3. 1932년 시암 혁명
1932년, 국가가 심각한 불황에 빠지자 최고 위원회는 군사 예산을 포함한 지출 삭감을 결정했다. 국왕은 이러한 정책이 특히 군대에서 불만을 야기할 수 있다고 예측하고, 삭감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특별 관료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연설에서 "나 자신은 재정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고,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내가 실수했다면, 시암 국민들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마땅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전의 시암 군주는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프라자디포크가 의도한 대로, 즉 이해와 협력을 위한 솔직한 호소로 이 연설을 해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를 그의 약점의 징후이자, 실수하기 쉬운 독재자의 통치를 영속시키는 체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증거로 보았다. 수도에서 심각한 정치적 소요가 위협받았고, 1932년 4월 국왕은 총리와 권력을 공유하는 헌법을 도입하기로 동의했다. 이는 군대의 급진적인 세력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1932년 6월 24일, 국왕이 해변에 있는 동안 방콕 주둔군은 반란을 일으켜 "카나 라사돈"으로 알려진 49명의 장교 그룹의 지휘 아래 권력을 장악했다. 이로써 800년의 절대 군주제가 종식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서양 동남아시아 학자들은 태국 정치사를 거의 연구하지 않았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유일한 명목상의 "토착" 동남아시아 국가인 태국은 다른 동남아시아의 새롭게 독립한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안정된 것으로 간주되었다.[76] 태국은 군주제와 같은 "전통"에서 충분한 연속성을 유지하여 탈식민화로 인한 혼란과 어려움을 피하고 혁명적인 공산주의의 침략에 저항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76] 이러한 주장은 1932년 혁명이 단순한 쿠데타에 불과하며, 절대 군주제와 귀족을 서구식 교육을 받은 장군과 문관으로 구성된 평민 엘리트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이 사건에 혁명적인 요소는 거의 없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K. 와이어트는 1910년부터 1941년까지의 태국 역사를 "본질적으로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개혁의 사회적 결과가 정치적으로 구현된 것"으로 묘사했다.[77] 1932년 혁명은 일반적으로 "라마 4세와 라마 5세에 의해 시작된 힘의 자연스러운 결과"의 불가피한 결과로 특징지어졌다.[78]
3. 왕권
라따나꼬신 왕국의 왕권은 태국 군주제와 차크리 왕조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3. 1. 전통 왕권
3. 1. 1. 왕권 개념과 이념
시암은 입법, 행정, 사법 권한을 행사하는 절대 군주제 하에 있었다.[79] 초기 방콕 왕, 즉 차크리 왕조의 처음 세 왕은 앙코르-크메르에서 파생된 '데바라자'[79][80] 또는 신-왕 숭배 형태로 존재했던 아유타야 왕국의 왕권을 물려받았다. 이는 힌두교의 '라자비세카' 즉위식을 통해 왕이 지상에서 신으로 숭배받는 형태였다. 시암의 왕은 '차오 치윗'[79], 즉 생명의 주인이자 '차오 파엔딘'[79], 즉 땅의 주인이 되어 왕국 내 백성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했다. 왕은 백성에게 분배되기 전 왕국 내 모든 토지를 소유했으며, 자신의 판단에 따라 백성에게 사형을 선고할 권한을 가졌다. 왕의 명령은 '프라 라차 옹칸'(산스크리트어 'oṅkāra'에서 유래, 고대 크메르어 'oṅkāra'를 거쳐 전해짐)이라고 불렸으며, 그의 수도는 '크룽 텝'(신의 도시)이라고 불렸다. 다른 동시대 동남아시아 군주와 마찬가지로, 시암의 왕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 차크라바르틴 (영광스러운 보편적 정복자로서 전투에서 군사적 성공을 거두는 측면과, '탐마삿' 즉 도덕적 법률을 옹호하고 보호하는 보편적 정의의 왕[81])의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62]시암 왕의 권위는 어떤 인간의 법으로도 제한할 수 없었지만,[81] 도덕적으로 왕은 십왕의 덕목, 즉 다사비다 라자담마 또는 '토솟핏 라차탐'을 준수하고 '탐마삿' 또는 마누 법전의 길을 따라야 했다.[79] 왕은 또한 왕국의 유일한 입법자였으며, 그의 명령은 법이 되도록 기록되었지만, 이론적으로 그의 법과 명령은 '탐마삿' 또는 확립된 규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79] 아유타야와는 대조적으로, 라마 1세는 그의 왕실 칙령의 근거로 정통 상좌부 불교에서 수사학적 설명과 해석을 구했다.[79] '다르마라자' 즉 달마를 옹호하는 왕의 개념과 관련된 시암 왕권의 불교적 측면은 1804년 세 개의 봉인법의 반포를 통해 '탐마삿'의 원래 순수한 형태를 복원함으로써 재확인되었다.[79][81] 그러나 초기 방콕 왕권은 본질적으로 아유타야의 왕권과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시암의 왕은 백성들에게 지상의 신으로 존경받았고, 그렇게 대우받았다. 왕실 알현에서 왕은 정교한 왕위에 앉아 있었고, 대신과 관료들은 손을 모으고 바닥에 엎드려 왕을 쳐다보지도 않고 상의를 입지 않은 채 맨가슴으로 있었다. 왕족과의 대화에서는 인도 및 크메르어에서 파생된 어휘로 특징지어지는 '라차삽'[162]이라는 특별한 언어 형식이 사용되었다.[80][162] 시암 백성은 왕과의 대화에서 극도의 존경심을 표현하며 자신을 '카 프라 푸타차오'[162] 또는 "부처의 종"[162][143]라고 칭했고, 왕을 '타이파 라-옹 툴리 프라밧'[162] 또는 "왕의 발 아래 먼지"라고 불렀다.[162][143] 왕이 행렬을 위해 왕궁 밖으로 나갈 때마다 왕실 경찰은 평민들에게 집 안으로 들어가 문과 창문을 닫으라고 명령했다.[82] 평민의 눈은 왕의 신성한 몸에 닿아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82] 왕을 직접 쳐다보는 것은 금지되었으며, 만약 그렇게 할 경우 처벌로 흙 탄환을 눈에 맞을 수도 있었고,[79] 또한 안전상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80] 왕의 신체나 왕족의 신체는 어떤 경우에도 만져서는 안 되었다.[80] 강에서 왕실 바지선 행렬이 진행되는 동안, 만약 왕족이 물에 빠져 익사할 경우, 그 왕족을 구하기 위해 헤엄치는 것은 사형에 처해지는 금지된 행위였다.[80]
3. 1. 2. 즉위식


시암의 즉위식은 산스크리트어 ''Raja'' '왕'과 ''Abhisekha'' '성수(聖水)를 붓다'에서 유래한 ''라자비세카''로 알려져 있으며, 베다 시대의 ''라자수야''에서 시작되었다.[80] 힌두교 궁정 바라문교 사제들이 집전하는 이 의식은 주로 다섯 개의 시암 강과 수판부리의 네 개의 연못에서 가져온 성수를 왕에게 붓는 것으로 이루어졌으며,[80] 왕이 무화과 나무로 만든 ''아타디사'' 팔각 옥좌에 앉아 바라문교 사제들에게 팔방에서 각각 여덟 번씩 성수를 받는 바라만교적 축복이 따랐다.[80] 그 후 왕은 ''바드라피타'' 옥좌에 앉아 고위 바라문교 사제 또는 ''프라 마하 라자구루''가 타밀어 ''만트라''를 읊어 카일라사의 문을 열어 힌두교 신 시바를 왕의 인격으로 초청했다.[80] 그리하여 왕은 하늘의 신들의 ''아바타''가 되었다. 고위 바라문교 사제들은 왕에게 왕실 의장과 금판에 새겨진 공식적인 즉위명을 수여했다. 마지막으로, 왕은 그의 첫 번째 명령 또는 ''옴카라''를 전달했다. 시암 왕실의 휘장은 다음과 같았다:[80]
- 왕실 9단 우산
- 대승리관
- 승리의 검
- 왕실 슬리퍼
- 왕실 지팡이
- 왕실 부채와 파리채
3. 1. 3. 왕명
초기 짜끄리 왕조의 통치 기간 동안, 짜끄리 왕들은 구체적인 이름을 갖지 않았다.[80] 시암인들은 그들의 왕을 3인칭 대명사로 ''Phrachao Yuhua''[162] (내 머리 위의 신) 또는 ''Phra Phutthachao Yuhua'' (내 머리 위의 부처님)라고 불렀다.[162] ''Rajabhisekha'' 즉위식 동안, 왕은 금판에 새겨진 길고 완전한 인도식 의례적 이름을 받았다.[80] 그러나 그 이름은 밀봉된 상자에 보관되어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왕의 이름은 일반 백성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80] 게다가, 짜끄리 왕조의 첫 세 왕, 즉 라마 1세, 라마 2세, 라마 3세의 완전한 의례적 이름은 동일했는데, 이는 시암 왕실의 이름이 신분을 나타내기보다는 명예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사망한 왕은 ''Phrachao Yuhua Nai Phra Borommakot'' (왕의 왕실 항아리)로 알려졌다.[80]1842년, 라마 3세는 왓 프라 깨우에 라마 2세와 라마 1세에게 각각 헌정하는 두 개의 부처상 제작을 명령했다.
19세기 중반에 시암인들은 구어체로 과거의 왕들을 라마 1세를 Phaendin Ton[24] (초기 통치), 라마 2세를 Phaendin Klang[24] (중간 통치), 그리고 당시의 왕 라마 3세를 Phaendin Plai (후기 통치)라고 불렀다. 라마 3세 자신은 이러한 대중적인 명칭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여 그의 선임자들에게 공식적인 사후 이름을 부여했다. 1842년, 라마 3세는 그의 할아버지 라마 1세와 그의 아버지 라마 2세에게 헌정하기 위해 왓 프라 깨우 사원에서 두 개의 황금 부처상을 주조하도록 명령했다. 라마 1세는 "Phuttha Yotfa Chulalok"으로, 라마 2세는 그들에게 헌정된 두 부처상의 이름을 따서 "Phuttha Loetla Sulalai"로 알려졌다.
몽꿋 왕은 접미사 ''-klao''를 사용하여 체계적인 재위 명칭 체계를 만들었다. 1851년 즉위한 몽꿋 왕은 재위 명칭 Chomklao를 사용했다.[83] 1852년, 몽꿋 왕은 선임자들에게 사후 이름을 부여했다. 라마 1세는 "Phuttha Yotfa Chulalok"으로 알려졌고, 라마 2세는 "Phuttha Loetla Naphalai"로 알려졌으며, 라마 3세는 Nangklao로 사후 명명되었다.[83] 몽꿋의 아들 쭐랄롱꼰 왕은 1868년에 즉위하여 재위 명칭 Chulachomklao를 사용했다. 단어 ''Ratchakan''은 재위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Ratchakarn Thi Ha는 쭐랄롱꼰 왕에 해당하는 다섯 번째 재위를 의미했다. 와치라웃 왕은 1910년 Mongkutklao 왕으로 즉위했다.
시암 왕실의 이름과 칭호는 서양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64], 와치라웃 왕은 또한 Ratchakarn Thi Hok 또는 여섯 번째 재위라고 불리며, 1916년에 짜끄리 왕조의 모든 왕에게 서양식으로 숫자가 뒤따르는 "라마"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서구화된 왕조 재위 명칭 체계를 채택했다.[64] 따라서 Phuttha Yotfa Chulalok은 라마 1세로, Phuttha Loetla Naphalai는 라마 2세로, Nangklao 왕은 라마 3세로, 몽꿋 또는 Chomklao 왕은 라마 4세로, 쭐랄롱꼰 또는 Chulachomklao 왕은 라마 5세로, 와치라웃 또는 Mongkutklao 왕은 라마 6세로 알려졌다. 프라자디폭 왕은 1925년에 Pokklao 왕으로 즉위했으며, 라마 7세 또는 일곱 번째 재위인 Ratchakarn Thi Chet으로도 알려졌다.
3. 2. 근대화된 왕권
3. 2. 1. 몽쿳 왕의 개혁
몽꿋 왕은 27년 동안 불교 승려로 지내면서 서양 철학을 배웠으며,[12] 1851년에 왕위에 올랐다. 몽꿋 왕은 시암 왕족의 개념과 이념을 크게 개혁했다. 몽꿋은 즉위하기 전부터 궁정 관리들에게 왕실 행사 때 상의를 착용하도록 명령했다.[143] 상체를 노출하는 것은 서양인들에게 무례한 행동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몽꿋 왕은 이전에 주로 힌두교 의식이었던 그의 즉위식인 ''라자비세카''에 불교적 요소를 추가하여[84] 시암 왕족의 불교적 측면을 강조했으며[81] 일반 대중에게 더욱 가시적인 모습을 보였다. 몽꿋은 서양식 '대관식'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승리의 대관을 실제로 착용한 최초의 시암 국왕이었다.[84] 서양 대표들도 처음으로 참석했다. 몽꿋은 "모든 사람의 합의에 의해 선출된"이라는 뜻의 마하 초닉콘 사모손 솜뭇이라는 칭호를 채택하여,[62] 대중이 가장 유능한 사람을 지도자로 선출한다는 마하 솜뭇티라지 또는 위대한 선출된 왕의 불교적 개념을 강조했는데,[62] 비록 그가 현대적 의미에서 실제로 선출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왕권의 기초가 되었다.
몽꿋은 1857년에 눈을 쏘는 관행을 공식적으로 폐지했으며,[85] 일반인들이 왕실 행렬 동안 밖으로 나와 왕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장려했다. 몽꿋은 자신의 백성이 있는 지방을 방문하는 비군사적, 비종교적 여행을 간 최초의 시암 국왕인 것으로 보인다. 1857년 말부터 1858년 초까지 몽꿋 왕은 동부 시암 해안선을 따라 여행하며 촌부리, 라용, 찬타부리, 뜨랏, 코 창을 방문했다. 1859년, 몽꿋 왕은 쁘란부리에서 나콘시탐마랏 및 송클라까지 남 시암으로 왕실 방문을 시작했다. 몽꿋은 1863년에 현대식 증기선을 타고 파타니까지 가는 등 남 시암으로 또 다른 여행을 떠났다. 몽꿋 왕은 또한 자신의 왕국에 대해 '시암'이라는 외래어를 채택한 최초의 시암 국왕이었으며, 시암의 왕/Rex Siamensisla으로 자처했다.[86]
3. 2. 2. 쭐랄롱꼰 왕의 개혁
1868년, 15세의 어린 쭐랄롱꼰 국왕은 짜오프라야 시 수리야웡의 섭정을 받으며 왕위에 올랐다. 쭐랄롱꼰은 1873년 섭정이 끝나면서 친정을 시작했고, 1874년에는 국왕 앞에서 엎드리는 조아례를 폐지했는데, 쭐랄롱꼰은 이를 억압의 상징으로 묘사했다.[88] 이후 시암 국민들은 국왕의 어전에서 서서 서양식으로 허리를 숙여 경의를 표했지만, 엎드리지는 않았다.쭐랄롱꼰은 서구의 영향을 받은[88] 또는 불교에서 영감을 받은 인본주의적 원칙을 국왕의 통치의 기초로 삼았다. 국왕은 신격화된 난해한 인물이 아니라, 대중의 기본적인 필요와 복지를 돌보고 제공하는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전통 또한 옹호했다. 군주는 신성한 권위가 아닌, 인류의 자연스러운 관행에서 비롯된 사회적 필요성으로 존재했다.[88] 쭐랄롱꼰 국왕은 서구의 절대 군주제를 받아들였지만, 종교적 법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무제한적인 왕권과 권위에 대한 전통적인 시암 군주제의 개념도 재확인했다.[88]
국왕과 백성 간의 관계가 재정립되면서, 군주에 대한 범죄 또는 대역죄에 관한 법도 근대화되었다. 1900년, 쭐랄롱꼰 국왕은 현대적인 시암 대역죄 법을 제정했는데, 국왕 또는 왕족을 비방하는 내용의 발언이나 출판물을 게시하는 사람은 투옥 또는 벌금에 처해졌다.[62] 이 현대적인 대역죄 법은 1908년 시암 형법에 포함되었으며, 이는 최초의 근대화된 태국 법전으로, 대역죄는 7년의 징역 또는 벌금에 처해졌다. 이 새로운 시암 왕실 명예 훼손 법은 독일 제국[62] 및 일본을 포함한 다른 당시 군주제의 법과 유사했다.
4. 정부
4. 1. 전통 정부
4. 1. 1. 중앙 정부
라따나꼬신 초기에는 늦은 아유타야로부터 대부분의 관료 기구를 물려받았다. 시암 왕실 관료 기구는 6개의 부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12] 궁정의 두 명의 최고 총리는 ''Samuha Nayok''[89] (사무하나요끄/สมุหนายกth), 즉 ''Mahatthai'' 또는 내무부를 감독하는 북부 시암의 총리[89]와 ''Samuha Kalahom'' (사무하깔라홈/สมุหกลาโหมth), 즉 ''Kalahom'' 또는 군부를 감독하는 남부 시암의 총리[89]였다. 그 아래에는 4개의 부서 또는 ''짜뚜사돔'' (짜뚜사돔/จตุสดมภ์th)이 있었다.
- ''Krom Vieng'' (끄롬위엥/กรมเวียงth) 또는 ''Krom Phra Nakhonban''[89] (끄롬프라나콘반/กรมพระนครบาลth), 즉 경찰청은 짜오 프라야 욤마랏[89] (짜오프라야욤마랏/เจ้าพระยายมราชth)이 이끌었다.
- ''Kromma Wang''[89] (끄롬마왕/กรมวังth), 즉 궁정부, 짜오 프라야 탐마가 이끌었다.
- ''Krom Khlang'' (끄롬클랑/กรมคลังth), 즉 무역 및 재무부, 짜오 프라야 프라클랑 (짜오프라야프라클랑/เจ้าพระยาพระคลังth)이 이끌었다.
- ''Krom Na''[89] (끄롬나/กรมนาth), 즉 농업부, 짜오 프라야 폴라텝[89] (짜오프라야폴라텝/เจ้าพระยาพลเทพth)이 이끌었다.
정부 관리는 ''Bandasak''[134] (반다삭/บรรดาศักดิ์th) 계급과 ''삭디나'' (삭디나/ศักดินาth)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다. ''Bandasak'' 계급은 관료 계층에서 관료의 직위를 결정했다 (태국 귀족 참조). ''Bandasak'' 계급은 높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Chaophraya'', ''Phraya'', ''Phra'', ''Luang'', ''Khun'', ''Meun'', ''Phan'' 및 ''Nai''.
''Sakdina''는 관료 내에서 관직에 부여된 이론적인 토지량과 수치적 지위로, 생산량을 결정하고 범죄에 대한 처벌의 심각성을 결정했다.[90] 모든 정부 직책의 ''Sakdina''는 삼인법에 설명되어 있다. 예를 들어, ''Samuha Nayok'', ''Samuha Kalahom'' 및 ''Chatusadom''의 4부 장관의 ''Sakdina''는 각각 10,000 ''rai''였다.
4. 1. 2. 지방 정부

대략 현대의 태국 중부와 태국 남부에 해당하는 '샴 본토'의 도시와 마을은 '도시 계층'으로 조직되었으며, 작은 마을은 더 큰 도시의 관할 하에 있었다. 도시에는 네 개의 계층이 있었는데, 순서대로 ''므앙 엑''(เมืองเอกth, 1급 도시), ''므앙 토''(เมืองโทth, 2급 도시), ''므앙 트리''(เมืองตรีth, 3급 도시) 및 ''므앙 찻타와''(เมืองจัตวาth, 4급 도시)가 있었다.[91] ''므앙 엑''은 지역 중심지를 나타내는 최고 수준의 도시였다. 라타나코신 시대의 ''므앙 엑''은 남부 샴의 중심지였던 나콘시탐마랏[92]과 북동부의 중심지였던 나콘랏차시마였다. 피싸눌록은 북부 샴의 중심지였으나, 톤부리 시대의 전쟁으로 인해 인구가 대거 감소했으며 북부 미얀마 침략에 대한 전초 기지로서의 역할이 치앙마이로 이전되면서 축소되었다. 북부 샴의 도시와 마을은 ''사무하 나욕''의 관할 하에 있었고, 남부 샴은 ''사무하 칼라홈''의 관할 하에 있었다.
도시의 지사들은 도시의 수준과 중요도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다. ''므앙 엑''의 지사들은 보통 ''차오프라야''로 등급이 매겨졌다.[92] 각 도시의 지방 관료는 지사가 이끌었다. 지사 밑에는 ''팔랏''[91] (ปลัดth) 또는 ''툭카랏'' (ทุกขราษฏร์th)이라고 불리는 부지사가 있었다. 부지사 밑에는 ''욕크라밧''[91] (ยกกระบัตรth)이라고 불리는 부부지사가 있었다. 대도시의 지사직은 일반적으로 해당 지역에서 그 가족의 중요한 역할과 연계 때문에 같은 가문의 대대로 이어졌다.

조공국은 ''쁘라텟사랏''(ประเทศราชth)이라고 불렸으며, 각각은 고유한 권리를 가진 정치적 실체였으며 만다라 시스템의 동남아시아 정치 이념을 통해 샴에 묶여 있었다.[93] 고유 문화와 전통은 대체로 유지되었다. 샴 궁정은 정기적으로 의례적인 금과 은 나무[93]를 바치고 다른 자원을 제공하도록 요구했다. 전쟁 시에는 조공국이 군대를 보내거나 샴을 대신하여 전쟁에 참여하도록 요청했다. 라타나코신의 조공국에는 다음과 같은 국가가 있었다.
- 란나 왕국 (현대 태국 북부), 체톤 왕조의 통치 하에 있는 치앙마이 왕국, 람빵, 람푼으로 세분되었다. 프래와 난은 지역 왕조가 통치하는 다른 군주국이었다.
- 라오 왕국인 루앙프라방 왕국, 비엔티안 왕국 및 참파삭 왕국
- 이산 지역의 반독립 추장국
- 캄보디아 (베트남과 분쟁)
- 파타니 왕국
- 북부 말레이 술탄국: 케다 술탄국 ( 페를리스 및 세툴맘방세가라 왕국 포함), 클란탄 술탄국 및 트렝가누.
대도시의 지사들은 실제로 인접한 조공국의 업무도 담당했다. 나콘랏차시마 지사는 비엔티안과 참파삭의 라오 왕국 업무를 담당했다. 나콘시탐마랏(리고르) 지사는 케다와 클란탄의 업무를 담당했다. 송클라 지사는 파타니와 트렝가누의 업무를 담당했다.
4. 2. 근대화된 정부
4. 2. 1. 중앙 정부
아유타야 헌법(Ayutthayan constitution, 1455년)은 19세기 말까지 4세기 동안 지속된 시암의 중앙 정부 기구를 규정했다. 전통적인 시암 정부는 민정부의 사무하 나요크(Samuha Nayok) 또는 마하타이 (Mahatthai)와 군정부의 사무하 칼라홈 (Samuha Kalahom) 또는 칼라홈(Kalahom)이라는 두 명의 최고 장관이 이끌었다.[89] 그러나 이 기구는 특정 상황에 맞춰 수정되어 왔다. 정부 부서의 기능적 분담이 모호해졌다. 19세기 초가 되자 사무하 나요크와 칼라홈의 구분은 문민-군인의 이중성에서 사무하 나요크가 북부 장관으로, 칼라홈이 남부 장관이 되어 각자 해당 지역의 민정 및 군사 업무를 감독하는 형태로 바뀌었다.[89]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전통적인 시암 중앙 정부 구조는 비효율적이게 되었고,[94] 부서 간의 행정 기능이 모호하고 중복되었다.[94]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 위협과 주권 문제에 직면하여 개혁이 필요했다.이 수 세기 동안 지속된 기구의 첫 번째 변화는 1875년에 일어났는데, 쭐랄롱꼰 국왕(King Chulalongkorn)이 조세 제도를 중앙 집권화하고 강화하기 위한 왕의 재정 개혁의 일환으로 전통적인 프라클랑 (Phrakhlang) 또는 재무 및 외교 부서에서 재무부를 설립했다. 프라클랑 부서는 이후 재무 및 외교 부서로 나뉘었다. 재무부는 1885년에 장관급으로 승격되었다.[94] 1887년, 쭐랄롱꼰 국왕은 이복 동생 데와웡세 왕자를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하여 빅토리아 여왕 즉위 50주년 행사에 참석하도록 런던으로 보냈다. 데와웡세 왕자는 또한 미국과 일본을 방문하여 이들 현대 국가의 행정 구조를 관찰했다. 데와웡세 왕자의 관찰을 바탕으로 쭐랄롱꼰 국왕은 1888년에 각료 회의를 열어 정부 부서의 기능에 대한 실험을 시작했다.[94] 실험적인 각료들은 대부분 왕족, 국왕의 형제 및 이복 형제였다.[94] 국왕은 기능적 분화를 회복하고 각 부서의 행정 업무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구분을 제공하고자 했다.[94]
쭐랄롱꼰 국왕은 1892년 4월에 최초의 현대 시암 왕실 내각을 설립했는데, 여기에는 북부 부(마하타이), 남부 부(칼라홈), 외무부, 수도부, 궁정부, 재무부, 농업부, 법무부, 군사부, 교육부, 공공사업부 및 왕실 비서실 등 12개 부처가 포함되었으며, 담롱 왕자가 마하타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현대적인 기능적 부처가 창설되면서 4세기 전 아유타야 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적인 정부 기구는 현대 내각으로 대체되었다.
마하타이와 칼라홈 사이의 지역적 분할은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 1893년 파크남 사건 이후, 북부 장관 담롱 왕자는 1894년에 지역 정부와 반독립적인 조공국을 주(州) 단위의 영토 행정 단위로 중앙 집권화하고 통합하는 테사피반 (Thesaphiban) 시스템을 제안했다. 1894년 3월 모든 지방 행정이 담롱 왕자의 내무부가 된 마하타이 부처로 이관되면서, 부처 간의 영토 분할이라는 개념은 폐기되었다. 군사부 또는 유타나티칸(Yutthanathikarn)은 국방부가 된 칼라홈 부처에 통합되었다.
4. 2. 2. 법률과 사법 제도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의 멸망으로 시암 법전의 대부분이 유실되었다.[95] 시암 당국은 흩어져 있는 법률 원고에 의존하여 업무를 수행했다. 1804년,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은 여성이 남편과의 이혼 소송에서 승소하자, 남편은 라마 1세에게 항소했다. 라마 1세는 당시 시암의 법률이 부패했다고 판단,[95] 아유타야 법률을 재편찬하여 왜곡된 법률을 바로잡고 정화할 것을 명령했다. '마하타이'(북부), '칼라홈'(남부), '프라클랑'(재무부)의 세 개의 인장이 찍힌 법률 사본은 왕국 전체에 영향을 미쳤고,[95] 다음 세기 동안 시암 왕국에 봉사한 삼인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2] 시암 법은 인도식 마누 다르마샤스트라를 모델로 삼았다.
국왕은 왕국의 유일한 입법자였으며, 그의 말은 기록되고 새겨져 법률이 되었다. 각 부처의 재판 법원이 관련 사안에 따라 사건을 분담했기 때문에 단일한 통일 사법부는 없었다.[95] 예를 들어, 대외 무역 분쟁은 '크롬마 타'(통상부), 토지 분쟁은 '크롬 나'(농업부)에 속했다. '마하타이'는 일심 법원의 사건을 처리하는 항소 법원을 유지했다. 외곽 도시의 해결되지 않은 사건도 방콕으로 항소되었고, 항소 법원에서 해결되지 않으면 국왕에게 직접 전달되었다.
시암 법원은 법적 지식을 갖춘 12명의 브라만 배심원('룩쿤')[95] (ลูกขุน ณ ศาลหลวงth)과 '트라라칸'[95] (ตระลาการth) 또는 '룩쿤'의 제안에 따라 실제 판결을 내리는 평신도 판사로 구성되었다. '나콘반'(경찰청)은 살인, 강도, 간통 등의 형사 사건을 다루었다. '나콘반'은 고통을 통한 재판 또는 두개골 압박, 못 박기, 코끼리가 차는 큰 등나무 공에 들어가는 것을 포함한 사법 고문을 사용했다. 이러한 고문 방법은 '나콘반' 신조(จารีตนครบาลth)로 알려졌으며, 특정 상황에서만 사용되었다.[95] 때로는 피고가 유죄 또는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거나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했다. 서방인들은 이러한 사법 고문 방법에 경악하여 전통적인 시암 심문에서 분리하려 했고, 그 결과 1855년 보링 조약 등을 통해 서방 국가에 치외 법권이 부여되었다.
19세기 초 시암을 방문한 서구인들은 신벌 재판 등이 포함된 전통적인 인도-시암 사법 제도에 경악했고, 특히 형사 사건에서 시암 당국의 관할하에 놓이기를 꺼렸다. 1855년 보링 조약에서 시암 법원은 시암에 거주하는 영국인에게 치외법권을 부여하기로 합의했다.[38] 이는 영국인과 관련된 모든 법적 사건이 영국 영사 재판소에서 영국 법에 따라 재판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은 1856년 해리스 조약을 통해, 프랑스도 1856년에 시암과 유사한 합의를 맺었으며, 다른 서방 국가들도 뒤를 이었다.[38] 이러한 치외법권 합의는 '불평등 조약'의 일부였으며, 시암의 주권을 훼손했다.[38] 시암에서의 법적 지위가 모호했던 중국인 이민자들은 시암의 법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영국 또는 프랑스 국민으로 등록하는 경우가 많았다.

1892년, 쭐랄롱꼰 국왕은 분산된 시암 사법 법원을 단일화하기 위해 현대적인 태국 법무부[62]를 설립했다. 1893년 프랑스-시암 전쟁 중, 구스타브 롤랭-자크민스는 국왕에게 시암의 구식 법률 시스템이 서방의 기준에 맞춰 현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방 열강의 시암 주권 침해가 발생했다고 말했다.[56] 시암 정부는 시암의 주권을 보존하기 위해 서방의 치외법권 관할을 폐지하는 방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1897년, 쭐랄롱꼰은 보통법 체계를 기반으로 현대적인 시암 법률을 제정하기 위해 서구 법률 전문가들로 구성된 입법 의회를 설립했다. 1898년, 일본은 시암에게 치외법권을 요구했고, 시암은 1898년 일본-시암 조약에서 시암이 현대화된 민사 및 형사 법전을 완성하는 즉시 일본의 시암 내 치외법권이 종료된다는 조건으로 일본에 치외법권을 부여하기로 합의했다.[38]
롤랭-자크민스는 1902년 벨기에로 돌아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56] 조르주 파두가 1905년 입법 기구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1893년 사건 이후, 프랑스는 라오스인, 캄보디아인, 베트남인을 포함하여 시암 내 모든 '프랑스 아시아 국민'을 프랑스의 관할 하에 두도록 요구했다.[38] 이는 수십 년간의 프랑스-시암 협상으로 이어졌다. 1907년 프랑스-시암 조약에서 프랑스는 시암 내 기존 프랑스 아시아 국민에 대한 권한을 갖게 되었지만, 새로운 등록된 프랑스 아시아 국민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많은 영토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넘어가는 대가로 시암 관할 하에 두었다.[38] 첫 번째 현대 시암 법인 형법은 1908년에 공포되었다.[38] 1908년 형법에서는 현대적인 군주 모독죄 또는 왕실 명예 훼손 법이 도입되었으며,[62] 왕족 모욕 시 최대 7년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했다.[59][62] 1909년 영국-시암 조약을 통해 영국이 시암에서 보유하던 치외법권의 대부분을 포기했으며, 영국인과 버마인을 포함한 시암 내 모든 영국인은 북 말레이 술탄국이 영국령 말라야에 합류하는 대가로 시암 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38]
와치라웃 국왕은 1913년 태국 국적법(''Sanchat Thai'')을 통해 태국 국적을 정의했으며, 부계 국적을 강조했다.[138][63] 출생지와 상관없이 태국인 아버지를 둔 모든 사람은 태국 법에 따라 태국 시민으로 분류되었다.[63] 시암은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연합국 편으로 참전하여 시암에서 서방의 치외법권을 재협상하고 폐지할 기회를 얻었다. 베르사유 조약(1919년) 제135조에 따라, 시암 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치외법권은 1917년부터 소급하여 종료되었다.[38] 1920년 미국-시암 조약에서 시암 내 미국 시민은 시암 법률 및 법률 체제의 적용을 받게 되었지만, 현대적인 시암 민법의 편찬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공사관은 시암 민법이 완성된 후 최대 5년 동안 시암 법원에서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모든 사건을 소환할 권리를 가졌다. 20세기 초 시암은 언론의 자유와 자유로운 정치적 토론의 시기였다. 1922년, 시암 전력 회사 전차 노선의 태국인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신문 ''Kammakon''('노동자')의 지원을 받아 파업을 벌였다.[69] 와치라웃 국왕은 1923년 서적, 문서 및 저널에 대한 칙령을 통해 언론의 자유를 억제하고 질서를 회복하기로 결정했으며, 이 칙령에서는 문서 편집자가 군주 모독죄를 범했을 때 처벌을 받도록 했다.[59] 군주제에 반하는 정치적, 경제적 이론의 전파 또한 유사한 범죄로 간주되었다.[59]

1924년 일본-시암 조약 또한 일본인을 미국인과 유사한 조건으로 시암 법의 적용을 받도록 했다.[38] 와치라웃 국왕은 프랜시스 보우즈 세이어 시니어를 1924년–1926년 유럽 순방에 파견하여 시암을 대신해 유럽 국가들과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도록 했다.[38] 프랑스는 1925년 시암과 새로운 조약에 합의했으며, 이 조약에 따라 몬톤 우본 및 몬톤 이산 (현대 태국 북동부)을 제외한 시암의 거의 모든 지역에 거주하는 프랑스인은 시암 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38] 프라자디폭 국왕은 1927년, 군주 모독죄를 범한 자는 국가의 적으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칙령을 내렸다.[59] 현대적인 시암 민법의 편찬은 수십 년이 걸려 완료되었다. 1926년에야 시암 민상법의 첫 번째 부분이 발표되었다. 시암 민법은 혁명 이후의 ''카나 라사돈'' 통치 하에 1935년에 마침내 완성되었다.[38]
5. 경제
5. 1. 버니 조약 이전 (1782년–1826년)
라따나꼬신 초기의 시암 경제는 자급자족적인 농업 경제에 기반을 두었으며, 평민들은 자신들의 토지 생산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중앙 정부는 세금을 징수하여 수입을 얻었다. 토지는 풍부했지만 인력은 부족했다.[95] 전통적으로 왕실은 네 가지 종류의 세금을 부과했다. 관세인 *창콥*(จังกอบth)은 내륙 및 외부 검문소에서 *카논*(ขนอนth)이라 불리는 관리들이 상품을 검사하여 징수했다. *카논*은 상품의 10분의 1을 징수하고 들어오는 배의 폭을 측정하여 관세를 부과했다. 이 관세는 *파시 팍 르아*(ภาษีปากเรือth)로 알려졌으며, 왕실 창고인 프라 랑 싱카가 징수를 담당하여 왕실의 주요 수입원이었다.[95] *아콘*(อากรth)은 쌀, 과일, 음료와 같은 특정 상품에 부과되는 세금이었다.[155] 쌀 생산자는 농지 1*라이*당 쌀 2*탕*을 부과받았고,[95] 귀족 소유 경작지는 람마 3세 때까지 면제되었다가 이후 토지 1*라이*당 0.375 바트의 세금이 부과되었다.[95] 다른 상품에도 세금이 부과되었으며, 가장 큰 *아콘* 수입원은 알코올 증류주세, 어업세, 시장세, 도박장세, 과수원세, 보트세였다.[155] *쑤아이*(ส่วยth)는 용역 노동 대신 지역 가치로 세금을 납부하는 *프라이 쑤아이*에게 부과된 세금으로, 코랏 고원과 차오프라야 강 상류 지역에서 금, 옻칠, 초석, 티크, 밀랍 등이 방콕으로 보내졌다.[155] 이러한 삼림 제품은 외국 상인에게 판매되어 왕실에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르차*(ฤชาth)는 법원 심리[95] 및 기타 문서 절차와 같은 정부 절차에서 수수료로 징수되었다.세금은 상품이나 통화 형태로 징수되었다. 왕실의 주요 지출은 행정 관리의 *비아왓* 또는 봉급, 궁궐과 사찰 건설, 화기 구매에 사용되었다. 라타나코신 초기에 왕실 재정은 어려웠다. 1796년, 전궁의 마하 수라 싱하나트 왕자는 자신의 분량이 관리들에게 *비아왓*으로 배분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라마 1세에게 알렸고,[125] 라마 1세는 왕자에게 왕실 정크에 더 투자해야 한다고 답했다.[12] 라마 1세는 *삼파오 루앙*(สำเภาหลวงth) 또는 왕실 정크를 통해 청나라와 개인적인 무역을 수행했으며,[96] 선원을 제공하는 중국 상인과 합작 투자를 했다.[96] 시암의 수출 수요는 주로 침향 및 소목과 같은 산림 제품이었다.
청나라는 아유타야 말기부터 시암의 주요 무역 상대국이었다. 19세기 초, 청나라는 시암으로부터 쌀을 구매해달라고 요청했다. 쌀은 주요 식량이고 왕국의 안정을 위해 중요했기 때문에 금지된 상품이었으나, 라마 2세는 쌀이 과잉 생산되는 해에 쌀을 중국으로 수출하는 것을 허용했다. 중국 정착민 상인들은 라타나코신 초기 시암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10년대에 중국인들은 설탕 생산 기술을 도입하여 시암 중부에 수많은 중국 소유의 사탕수수 농장을 설립했다.[126] 1822년, 시암은 800만 파운드 이상의 설탕을 수출했다.[126] 처음으로 수출 지향적인 시장화가 삼림 제품의 토착 무역을 대체했다. 그러나 이러한 농업 산업의 이익은 중국 부르주아지와 토착 엘리트 계급에게만 국한되었다.[97] 설탕 산업은 19세기 말까지 시암의 주요 수출품으로 남아 있었다.
5. 2. 버니 조약과 그 영향 (1826년–1855년)
라마 2세 치세에 들어서면서, '삼파오 루앙' 또는 왕실 정크선은 성장하는 민간 부문과의 경쟁으로 인해 수익성이 감소했다.[96] 15세기 아유타야 시대부터 시암 왕실은 '프라 클랑 싱카'(프라 클랑 싱카/พระคลังสินค้าth) 또는 왕실 창고를 통해 외국 무역을 독점했다.[30] 모든 외국 선박은 '프라 클랑 싱카'의 검사를 거쳐야 했으며, 상품에 부과되는 일반 8%[108] 관세와 선박 크기에 따라 부과되는 '파시 팍 루아' 또는 측정 관세 등 최소 두 가지 관세를 적용받았다. 이러한 관세는 왕실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게다가 '프라 클랑 싱카'는 외국 상인들이 식용 제비집등의 '제한된 상품'을 사적으로 시암인과 직접 거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격을 깎고 흥정했다.[108]1820년대에 도착했을 때, 영국인들은 전통적인 왕실 독점을 방해 요인으로 간주하고 자유 무역이 더 나은 합의가 되어야 한다고 암시했다. 이것은 1826년 6월 헨리 번이의 도착과 번이 조약의 공포로 이어졌으며, 영국인에게 사적으로 무역할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3세기에 걸친 왕실 독점을 종식시켰다.[38] 그러나 쌀과 탄약의 자유 무역은 허용되지 않는 등 일부 무역 제한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38]

1824년 왕위에 오른 라마 3세는 심각한 재정 문제에 직면했다. 왕실 무역 독점을 종식시킨 1826년의 번이 조약은 왕실 수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라마 3세는 왕실 정크선에 의존하는 대신 왕실이 세금 농장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96]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수입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38개의 새로운 세금이 제정되었다. 새로운 세금 농장에는 경험이 풍부한 징수인이 필요했고, 중국인들이 열정적으로 이 역할을 채우면서 '중국인 세금 징수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세금이 발표되면, 중국 상인들은 왕실을 대신하여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얻기 위해 경쟁했다.[57] 1840년대에 정부 수입이 감소하고 중국 조공 무역이 감소하면서 시암 왕실은 더욱 고립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정책으로 나아갔다.[98] 중국 세금 농장 시스템은 대부분의 무역에 제한과 관세를 다시 부과했다.[35] 번이 조약이 시암에 의해 준수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영국 대표 제임스 브루크 경은 1850년 방콕에 도착하여 시암 왕실이 더 이상의 양보를 반대하는 것을 발견했다.[35] 1850년, 보링 조약이 체결되기 몇 년 전, 시암의 총 수출액은 약 560만 바트였으며, 50% 이상이 천연 제품에서, 15%가 설탕 수출에서 나왔다.[99]
5. 3. 보링 조약과 그 영향 (1855년–1873년)

지정학적 압력에 직면한 자유주의 성향의 몽꿋 국왕[35]과 짜오프라야 씨 수리야웡 아래의 시암 정부는 1855년 보링 조약의 서명으로 영국의 요구에 굴복했다. 일반 수입 관세는 인하되어 3% ''종가세''로 고정되었는데, 이는 아편과 금괴를 제외한 모든 품목에 대해 중국의 5%[100]와 일본의 5%[101]를 포함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낮았다.[36][138] 선박 크기에 따라 부과되던 ''파시 팍 루아''(Phasi Pak Ruea) 또는 척도 관세는 폐지되었고, 수입 또는 수출 여부에 관계없이 무역 벤처 과정에서 한 번만 관세가 부과되었다.[36] 국가 안보에 대한 우려로 이전에 제한되었던 쌀 수출은 자유화되었다.
보링 조약의 혁명적인 효과는 시암 경제가 전례 없이 자유화되어 전통적인 자급자족 경제에서 수출 지향 경제로 전환되고, 시장 규모가 확대[138]되어 세계 경제에 통합되었다는 것이다. 쌀은 최고의 수출 품목으로 부상하여 중부 시암의 논 면적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시암은 1857년에 6만 톤의 쌀을 수출[102]했고, 1860년대에는 쌀이 대부분 홍콩과 싱가포르로 운송되면서 세계 최고의 쌀 수출국 중 하나가 되었다.[99] 쌀 수출의 증가는 더 많은 토지에서 일하고 단순히 자급자족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작물을 생산하는 쌀 생산자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했다.[136] 또 다른 효과는 중부 시암이 새로운 경제로 번창하는 동안, 이전에는 중부 시암을 통한 산림 생산물 거래에 의존했던 내륙 지역은 쇠퇴하면서 중부 시암과 내륙 지역 간의 부의 격차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31] 보링 조약은 또한 1809년부터 불법이었던 시암의 아편 비범죄화를 강요했다.
보링 조약 및 서방 국가와의 다른 '불평등 조약'의 무역 협정은 시암 정부 수입에도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 식민지 위협과 관련하여 왕국의 안보를 보존하기 위해 전통적인 무역 관세가 희생되었다.[12] 이로 인해 시암의 경제가 확장되는 시점에서도 시암 정부는 심각한 재정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31] 몽꿋 국왕 재위 기간 동안 중국인 징수원에게 14개의 세금 농장을 더 만들게 했다. 수많은 무질서한 세금은 많은 부서에 분산되었고, 이 부서는 세금 징수 책임을 통해 이익을 얻는 귀족들의 통제를 받았다. 가장 큰 세금인 아편세와 알코올세는 분나그가 이끄는 ''Kalahom''과 ''Kromma Tha''에 속했다.[31] 세금 징수를 담당하는 귀족들은 자신이 통제하는 세금 농장을 자신의 재산으로 취급하고 정부 금고에 고정 요율로 납부하는 것을 제한하려 했다.[31] 이 혼란스러운 과세 시스템으로부터 정부 수입이 효과적으로 활용되지 않았고 1873년 쭐랄롱꼰 국왕의 재정 개혁으로 이어졌다.
5. 4. 재정 개혁 (1873년–1893년)
쭐랄롱꼰 국왕은 1873년 친정을 시작하면서, 부패한 세무 관리로 인해 비효율적이던 과세 제도를 개혁하고자 했다.[57] 1873년 6월, 왕국의 세금 부과를 담당하는 '호 랏사다꼰 피팟' (หอรัษฎากรพิพัฒน์th) 또는 재무 감사 사무소를 설립했다.[57] 이 기관은 중국인 세금 징수원들이 분낙 가문의 대신을 거치지 않고 왕실 국고에 세금을 직접 납부하도록 통제했고, 세금 농장 입찰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했다. 이는 국가 재무를 중앙집권화하고 왕실 권력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31][103]이전에는 시암의 국가 과세가 중국인 세금 징수원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들은 임대받은 약정된 세금 부과액을 정부에 지불해야 했지만, 사적 투자를 위해 세금을 사용하며 지급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57] 이들은 시암 귀족 작위를 받고 사병을 소유하며, 세금 농장을 자신들의 봉토처럼 취급했다.[57] 세금 농장은 분낙 가문의 대신들이 관할하는 여러 행정 부서에 흩어져 있었고,[31] 중국인 세금 농부들은 그들에게 세금을 지불했다. 감독 대신들 또한 세금 농장을 개인 재산으로 취급하여 모든 세금을 왕실 및 국가 재무부에 보내지 않았다. 그 결과 1868년부터 1873년까지 시암 왕실의 국가 수입은 연간 480만 바트에서 160만 바트로 감소했다.[57]
쭐랄롱꼰의 개혁은 구체제에 의존하는 이익을 가진 반대 세력과 충돌했다. 1874년 말 전면 궁전 위기 이후, 쭐랄롱꼰은 정치적 대립을 피하기 위해 추가 개혁을 보류했다.[12] 1875년 4월, 쭐랄롱꼰은 왕국의 재정과 과세를 감독하는 현대적인 재무부를 설립하여 전통적인 ''프라클랑'' 재무 부서를 재무부와 외무부로 나누었다.
재정 개혁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여전히 중국인 세금 징수원들에게 의존했는데, 이는 국가가 자체 세금을 효과적으로 징수할 재정 지식과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1890년, 쭐랄롱꼰 국왕은 재무부를 재무부로 승격시켰다. 1892년에는 중국인 세금 징수원 제도를 폐지하고, 시암 정부가 직접 세금을 징수할 수 있도록 관리들을 고용했다.
5. 5. 통화

라따나꼬신 왕국은 1904년 평면 동전으로 공식적으로 대체될 때까지 ''photduang'' (폿두앙/พดด้วงth)로 알려진 은제 탄환 화폐를 통화로 사용했다.[104] ''Photduang''은 수코타이 시대에 기원했으며 아유타야 시대를 거쳐 사용되었다. 은괴를 일정한 무게 단위로 잘라 녹여 꼬인 벌레 형태, 즉 '꼬인 벌레'라는 뜻의 ''photduang'' 형태로 구부려 만들었다.[104][105] ''Photduang'' 탄환 화폐는 한쪽 면에 왕국 도장인 ''차크라'' 도장이, 다른 한쪽 면에는 각 통치 시대의 왕실 도장이 새겨져 있었다. 라마 1세는 자신의 통치 시대의 ''photduang''에 ''우날롬'' 연꽃 도장을 새겼다. 라마 2세는 가루다 도장을 사용했다. 라마 3세의 도장은 궁궐 모양이었다.[104] ''Photduang''의 무게 단위는 ''탐르엉'' (탐르엉/ตำลึงth, 은 60g), ''바트'' (바트/บาทth, 15g), ''살르엉'' (살르엉/สลึงth, ''바트''의 1/4), ''프엉'' (프엉/เฟื้องth, ''살르엉''의 1/2) 및 ''파이'' (파이/ไพth, ''프엉''의 1/4)였다.
란나 왕국과 라오스에서는 다른 통화가 사용되었다. 라오스에서는 ''lat'' 은괴가 사용되었다. ''Photduang''도 이 지역에서 통용되었다.
''Photduang'' 통화가 존재했지만, 물물 교환이 여전히 널리 행해졌다. 라마 2세 시대에는 왕실에서 정부 관리들에게 흰 옷 형태로 ''비야왓'' 수당을 지급했다. 일부 세금은 상품 형태로 징수되었다.
1855년 보링 조약 이전에는 대부분의 시암 경제 거래가 물물 교환을 통해 이루어졌다. 보링 조약 이후 시암 경제는 규모가 커졌고 경제의 화폐화로 이어졌다.[136] 멕시코 레알, 네덜란드 굴덴, 인도 루피, 일본 및 베트남 동전 형태의 현금이 시암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시암 사람들은 동전 사용으로 전환하는 것을 꺼려했고 자신들의 ''photduang''을 고수했다. 외국 동전은 녹여 ''photduang'' 은탄환으로 다시 주조되었다. 그러나 ''photduang'' 주조에는 기술이 필요했고 시암의 성장하는 경제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정부는 1857년 외국 동전을 시암 내에서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선언해야 했다.[136] 1857년 시암 사절단이 런던을 방문했을 때, 빅토리아 여왕은 시암 왕실에 동전 주조 기계를 선물했다,[105] 이로 인해 왕실 재무부서에 주조소가 설립되었다. 1857년 3명의 영국 기술자가 기계와 함께 시암에 도착했지만, 그들 모두 곧 열병, 익사 및 콜레라로 사망하여 기계를 작동하지 못하게 되었다. 라마 4세는 모드(Moed, 모드/โหมดth)라는 시암 귀족에게 주조 기계 작동법을 배우도록 지시해야 했다.[105] 최초의 시암 기계 주조 동전은 1860년에 발행되었다. 시암 사회가 현대적인 동전 사용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고, 전통적인 ''photduang''이 동시에 사용되었다.
6. 외교
6. 1. 청나라
라따나꼬신 왕국은 수코타이와 아유타야 시대부터 중국의 조공 시스템에 참여하여 중국 제국 조정이 관계 유지를 위해 시암의 통치자를 인정했다.[106] 시암이 중국 제국 조정에 보내는 사절단을 ''침 콩''(進貢, POJ: chìn-kòng จิ้มก้องth "선물을 바치다")이라고 불렀다.[106] 중국 황제는 시암 군주에게 ''홍''(封, Peng'im: hong1 หองth)을 수여하여 ''시암로 콕 옹''(暹羅國王)으로 봉했다.[106] 시암 왕들은 자신을 조공을 바치는 통치자로 여기지 않고 우호적인 선물 교환자로 여겼지만, 중국 조정은 이를 시암의 신하로서의 조공으로 해석했다.[106]중국과의 조공 관계를 맺음으로써 시암 왕실은 그곳에서 수익성 있는 상업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시암 왕실은 중국 황제에게 조공으로 지정된 물품을 바쳤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중국 황제는 시암이 바친 물품보다 더 가치 있는 사치품을 하사했다. 시암 왕실의 입장에서 중국에 보내는 사절단은 그 자체로 수익성 있는 지출이었다. 중국과의 조공 관계는 시암에 정치적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데, 베이징 조정이 시암에 거의 또는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기 라따나꼬신 시대의 짜끄리 왕조의 왕들은 ''침 콩''의 전통을 이어갔다. 톤부리 왕 딱신은 건륭 황제가 딱신에게 스스로 왕이 되는 대신 아유타야 왕조를 복원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중국 제국 조정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07] 이후 청나라는 딱신에게 더 긍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고, 딱신은 1781년에 베이징에 외교적인 조공 사절단을 파견하는 데 성공했다.[107] 중국 제국 조정은 새로운 시암 왕 라마 1세가 딱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통보받았고,[107] 방콕의 새로운 왕실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으며, 1787년에 청 조정으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았다.[107] 시암은 3년에 한 번씩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 짜끄리 왕들은 중국에 보내는 외교 서신에 딱신 왕의 성씨인 "정"(鄭)을 사용했다.[106] 중국 제국 조정은 시암 왕에게 인정을 의미하는 ''로크토'' 인장(駱駝 โลโตth)을 하사했다.
''로크토'' 인장은 시암 사절단의 유효성을 확인하는 역할을 했다. 중국으로 파견되는 시암 사절은 중국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크롬마 타 사이'' (กรมท่าซ้ายth '좌측 부두 부서') 출신이었으며, 보통 중국어를 구사했다. 사절단은 세 명의 고위 관리, 즉 제1 사절 ''라차툿'', 제2 사절 ''우파툿'', 제3 사절 ''트리툿''과 두 명의 통역관 ''통스에''와 ''판스에''로 구성되었다. 시암 사절단은 광저우로 해상 여행을 했고, 그곳에서 중국 관리들이 ''로크토''의 진위를 확인했다. 그 후 시암 사절단은 육로로 베이징으로 이동했다.
1830년대에 중국 정크선 무역이 쇠퇴했다.[106] 1839년, 도광 황제는 시암에게 3년에 한 번이 아닌 4년에 한 번 조공을 보내라고 명령했다.[106] 아편 전쟁 이후 1842년 난징 조약으로 광저우 시스템이 폐지되었고, 영국이 아시아의 해상 무역을 장악했다. 중-시암 무역은 ''침 콩''에 기반한 정크선 무역에서 영국 화물을 이용한 자유 무역으로 전환되었다.[106] 몽꿋 왕은 즉위 후 1851년에 중국에 ''침 콩''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 사절단은 함풍 황제가 아버지 도광 황제의 상을 치르고 있다는 이유로 광저우에서 거부당했다. 1852년에는 또 다른 사절단이 다시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 사절단은 현지 중국 강도들에게 강탈당했고, ''판스에'' 통역관이 살해되었다. 몽꿋 왕은 ''침 콩'' 전통이 시암이 중국의 정치적 종주권 아래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으며, 독립 주권 왕국이 수행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106] 몽꿋 왕은 1863년에 ''침 콩''의 중단을 명령했다. 1852년의 ''침 콩''은 역사상 시암이 중국에 보낸 마지막 조공 사절단이었다.
6. 2. 영국
6. 2. 1. 초기 접촉
1785년, 케다 술탄국의 술탄은 시암에 대한 영국의 군사적 보호를 대가로 페낭 섬을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 할양했다. 케다는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의 붕괴 이후 시암 궁정에 조공을 보내는 것을 중단했다. 짜끄리 왕조가 즉위한 후, 시암은 케다 술탄국에 조공 임무의 재개를 요구했다. 시암 군대가 케다의 문 앞에 이르자, 영국은 케다 술탄국을 지원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는 술탄과 프랜시스 라이트 사이에 맺어진 조약이었지 동인도 회사와 맺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케다 술탄국은 페낭을 되찾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그 결과 1791년에 페낭이 영국에 공식적으로 넘겨졌다. 1800년에는 세베랑 페라이 (웰즐리 지방)가 영국에 할양되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시암과의 공식적인 영국의 접촉이 20년 더 지연되었다.1821년, 프랜시스 로던-헤이스팅스, 헤이스팅스 후작 당시 인도 총독은 존 크로퍼드를 시암으로 보냈다.[108] 또한 1821년, "리고르의 라자" 짜오 프라야 나콘 노이는 케다 술탄국을 침공하여 점령했으며, 그 결과 아흐마드 타주딘 할림 샤는 영국이 지배하는 페낭으로 피신했다. 1822년 크로퍼드가 페낭에 도착했을 때 영국은 케다에 대한 시암의 주둔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크로퍼드는 1822년 방콕에 도착했다.[108]

시암 궁정에는 영어 통역관이 없어 영국 측 메시지는 포르투갈어로 번역된 다음 말레이어로, 다시 태국어로 번역되었다. 크로퍼드는 관세 인하를 제안했다. 프라야 프라클랑 (딧 분낙)은 시암을 위해 화기를 획득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크로퍼드는 영국이 시암이 "영국의 친구이자 이웃 국가와 평화를 유지할 경우"에만 화기를 판매할 것이라고 말하며, 간접적으로 버마를 언급했다. 서구 열강과의 관계에서 시암 궁정의 주된 관심사는 버마 전쟁에 사용하기 위한 화기 구매였기 때문에,[129] 불만을 품었다. 크로퍼드가 케다 술탄의 개인 서신을 라마 2세 국왕에게 전달하여 나콘 노이를 불만의 근원으로 지목한 것이 마지막 결정타가 되었다. 협상은 사실상 악화되었다.[129] 크로퍼드는 결국 그 해 말 사이공으로 떠났다.[109]
1822년 그의 임무 기간 동안의 사건에도 불구하고 크로퍼드는 싱가포르 주재관으로서 시암 궁정과 연락을 유지했다. 1824년 제1차 영국-버마 전쟁에서 크로퍼드는 대영 제국이 버마와 전쟁 중이며 시암의 지원을 요청한다고 시암에 알렸다. 라마 3세는 몬족 사령관 짜오프라야 마하요타가 이끄는 시암 군대를 타닌타리 지방에서 영국을 지원하도록 배정했다.[129] 그러나 1825년 '메르기 사건'에서 시암과 영국 사령관이 메르기 주민의 추방을 놓고 다투면서 라마 3세는 버마에서 모든 군대를 철수시켰다.
6. 2. 2. 버니 조약
버니 조약과 관련된 내용이 원본 소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약(summary)에 해당하는 내용이 원본 소스에 없으므로, 위키텍스트를 생성할 수 없습니다.6. 2. 3. 보링 조약 이후
1855년 홍콩 총독 존 보링 경이 도착하여 보링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는 태국 역사에 있어 전환점이 되어 태국에 큰 사회경제적 영향을 미쳤다.[37] 존 보링 경은 애버딘 정부의 런던 대표였으며,[37] 동인도 회사의 대표가 아니었다.[12] 그는 1855년 3월 방콕에 해리 파크스와 함께 선박 ''래틀러''를 타고 도착했다.[37]
자유 무역 제안에 대해 솜뎃 짜오프라야 '옹 노이'[38][37] 피차이얏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합의가 이루어져 1855년 4월 보링 조약이 체결되었다.
해리 파크스는 초안된 협약을 런던으로 가져갔고, 영국 왕실 법무관은 일부 모호한 부분을 명확히 해줄 것을 요구하여 '1856년 부속 협약'으로 이어졌다.[38] 파크스는 1856년 비준서를 가지고 방콕으로 돌아왔다. 보링 조약은 일반적인 관세를 3%로 인하 및 고정하고, 시암 내 영국인에게 치외 법권을 부여하여 시암 사법 제도 대신 영국 영사 당국과 영국법의 적용을 받도록 했다.[38] 영국인은 또한 방콕에서 24시간 이내 거리에 있는 지역의 토지 소유도 허용받았다.
1856년 찰스 힐리어는 방콕 최초의 영국 영사가 되었지만[113] 4개월 만에 사망했다. 몽꿋 국왕은 포르투갈 영사관 옆 짜오프라야 강변의 토지를 영국 영사관으로 할당했다.[113]
몽꿋 국왕은 1857년 프라야 몬트리 수리야웡 (쭘 분낙)이 이끄는 시암 사절단을 영국 선박 ''인카운터''에 태워 런던으로 보냈다. 이 사절단은 1688년 아유타야 시대 이후 유럽으로 파견된 최초의 시암 사절단이었다. 사절단은 1857년 11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했다.

보링 조약의 조건이 란나 치앙마이를 포함한 시암의 조공국에 영향을 미치고 적용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로버트 숌부르크는 1857년에 방콕 영사직을 맡기 위해 도착했다.[113] 자연학자이기도 했던 숌부르크는 1859~60년에 치앙마이를 방문하여 정치적 상황을 관찰하고 크라 지협과의 연결 가능성을 탐구했다.[114] 치앙마이의 통치자 카빌로롯 수리야웡 국왕은 조약에 조공국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보링 조약이 란나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영국이 치앙마이와 별도의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5]
리아우-링가의 마무드 무자파르 샤 술탄은 1857년 네덜란드에 의해 폐위되었다. 또한 1857년에는 영국 해협 식민지의 지원을 받는 파항 벤다하라 툰 무타히르 오브 파항와 그의 형제 완 아흐마드 사이의 파항 내전이 발발했다.
1862년 마무드 무자파르는 시암 궁정에 테렝가누에 있는 어머니를 방문하러 간다고 말하고 시암 선박을 테렝가누로 가져갔다. 윌리엄 캐버나 해협 식민지 총독은 시암의 개입이 전쟁을 확대할 것이라고 크게 우려했다.
테렝가누가 굴복하지 않자 영국 군함은 테렝가누를 포격하여 화재와 피해를 입혔다.[116] 마무드 무자파르는 결국 시암으로 돌아왔다. 테렝가누는 시암의 조공국이었기 때문에, ''프라클랑''인 짜오프라야 티파코라웡 (캄 분낙)은 런던에 이 사건을 항의하며 조사를 촉구했다.[116] 영국 의회는 캐버나 총독이 '우호 도시'를 공격한 것을 비난하고, 영국 해군 사령관에게 해군성이 명령하지 않고서는 공격하지 않도록 지시했다.[116]
영국령 인도는 제2차 영국-미얀마 전쟁 이후 하부 버마를 획득했다.
1868년에 국경 협정 조약이 체결되었고,[46] 이는 현대의 미얀마-태국 국경의 정의가 되었다.
6. 2. 4. 1909년 조약
1786년 이래로 케다, 켈란탄, 트렝가누의 북부 말레이 술탄국들은 샴 왕실에 전통적인 공물인 ''분가 마스''를 정기적으로 바쳤다. 그러나 이러한 조공 관계는 현대 국제법과 외교의 영역에서 모호하고 불분명했다. 영국 외무부와 식민부는 말레이 반도에 대한 샴의 통치에 대해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을 취했으며,[121] 샴은 싱가포르의 식민 정부를 우회하기 위해 런던과 직접 거래하는 경향이 있었다. 1882년 프랭크 스웨트넘은 샴에 대한 말레이 ''분가 마스'' 공물이 복종의 징표가 아닌 '우정의 표시'라고 주장했지만, 외무부는 1885년 샴의 편을 들어 영국이 이 지역에서 샴의 주권을 완충 국가로 유지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영국 외무부 장관인 솔즈베리 경은 샴에 동정적이었고, 영국령 말라야의 확장을 훼손했다. [121]
1900년에서 1902년 사이에 샴에게는 상황이 악화되었다. 새로운 영국 외무부 장관인 랜즈다운 경은 샴을 희생시키면서 말레이 반도에서 영국의 식민지 확장을 지원했다.[121] 켈란탄의 새로운 술탄인 무하마드 4세는 친영파였다.[121] 1880년대부터 말레이인에 대한 샴의 통치에 반대해 온 프랭크 스웨트넘은 말레이 반도에서 영국의 식민지 확장을 가장 강력하게 옹호했으며,[121] 해협 식민지 총독이었다. 1900년, 로버트 윌리엄 더프는 그의 회사인 더프 신디케이트를 위해 켈란탄의 켈란탄 술탄으로부터 주석 채굴 특허를 얻었지만,[121] 그의 승인은 샴 정부에 의해 비준되지 않았는데, 조공 통치자들이 방콕의 승인 없이 양보를 발급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121] 더프는 그의 사건을 외무부와 프랭크 스웨트넘에게 불만을 제기했고, 스웨트넘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샴의 영향력을 해체했다. 스웨트넘과 랜즈다운 경은 샴이 켈란탄과 트렝가누에 영국 고문관을 허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제안했다.[121] 쭐랄롱꼰 국왕은 런던에서 랜즈다운과 직접 대화하기 위해 대표인 프라야 시 사하텝을 보냈다.[121] 샴은 그러한 말레이 국가에 영국 고문관을 파견하는 데 동의했지만 그들은 샴에 의해 선택되어야 했다. 1902년 12월에 영국 중재 하에 켈란탄-샴 및 트렝가누-샴 조약이 체결되어 '고문관 시스템'이 수립되었다.[121] 1903년 7월, 샴에 호의적인 영국 고문관들이 켈란탄과 트렝가누에 파견되었는데,[121] 이는 스웨트넘이 해협 식민지에서 친식민지 인사를 대신 임명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크게 실망했다.[121]

1907년 프랑스-샴 조약에서 샴은 샴 내 프랑스 치외 법권의 축소를 대가로 캄보디아 북서부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양도했다.[38] 쭐랄롱꼰 국왕의 고문인 에드워드 헨리 스트로벨은 샴 정부에 1907년 프랑스-샴 조약과 유사하게 샴이 더 유리한 조약 조건을 위해 비태국 주변 조공 국가를 희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의미는 남부 샴 철도 사업과 일치했다. 1909년 영국-샴 조약은 1909년 3월 10일 샴 외무부 장관 데와웡세 왕자와 랄프 페짓 방콕 주재 영국 공사 사이에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에서 샴은 케다, 켈란탄, 트렝가누 및 페를리스를 포함한 북부 말레이 술탄국을 영국령 말라야에 양도했다. 이 지역은 샴의 종주권 아래 있었거나,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샴 내 모든 영국 국민, 아시아인과 유럽인 모두 샴의 현대화된 법적 시스템에 편입되는 대가로, 남부 샴 철도 건설을 위한 영국 대출 4백만 파운드, 논란이 많은 1897년 비밀 협약의 폐지, 샴에 외교 정책의 독립성 반환 등이 이루어졌다. 60년 전인 1855년 보링 조약에 의해 규정된 샴에 대한 영국의 치외 법권은 이 1909년 영국-샴 조약에 의해 대부분 폐지되었다.[38]
6. 3. 프랑스
아유타야 왕조 시기의 1688년 샴 혁명 이후 프랑스-샴 관계는 단절되었다.[38] 프랑스는 프랑스 선교 활동을 통해 샴에 낮은 수준의 존재감을 유지했다. 1856년 샤를 드 몽티니는 샴의 주교 대리인 장-밥티스트 팔레고아의 도움을 받아 방콕에 도착하여, 영국 보링 조약과 유사하게 프랑스에게 낮은 관세와 치외법권을 부여하는 1856년 프랑스-샴 조약을 체결했다. 카스텔노 백작은 방콕의 초대 프랑스 영사가 되었다. 몽꿋 왕은 1861년 프라야 시피피팟(패 분낙)을 단장으로 한 사절단을 파리로 보내, 나폴레옹 3세 황제를 알현했다.
프랑스가 1862년 프랑스령 코친차이나를 획득한 후, 샴과의 경쟁에서 베트남의 입지를 차지했으며 팽창주의 식민 세력임을 입증했다. 1860년, 캄보디아의 앙두옹 왕이 사망하면서 노로돔과 그의 형제 시 보타 사이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피에르-폴 드 라 그랑디에르 프랑스령 코친차이나 총독은 1863년 우동으로 항해하여 노로돔에게 샴의 승인 없이 캄보디아를 프랑스 보호령 캄보디아로 만드는 조약에 서명하도록 설득했다. 가브리엘 오베레는 1864년 방콕에서 영사직을 맡았다. 프랑스는 샴에게 캄보디아 왕실의 보물을 노로돔에게 인도할 것을 촉구했다. 샴은 프라야 몬트리 수리야웡 (춤 분낙)을 파견하여 프랑스 영사 오베레와 동행하여 1864년 6월 캄보디아의 보물을 우동으로 가져갔고, 프랑스 해군 제독 데스물랭은 캄보디아 왕관을 노로돔에게 씌워[43] 프랑스의 캄보디아 지배권을 나타냈다. 그러나, 크랄라홈인 솜뎃 차오프라야 시 수리웡세는 이보다 먼저 비밀리에 노로돔에게 캄보디아에 대한 샴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또 다른 상반된 조약에 서명하게 했고, 이는 1864년 8월 ''The Straits Times''에 게재되었다.[43] 오베레는 그러한 상반된 조약의 존재에 당황했다. 프랑스는 캄보디아-샴 조약의 무효를 모색했고, 오베레는 1864년 방콕에 군함 ''미트라유''를 가져왔다.[43] 샴과 프랑스 간의 타협안 초안은 1865년 오베레에 의해 파리로 가져와 비준을 받았다.[45] 그러나 파리에서의 비준은 프랑스가 '샴 라오스'에 대한 샴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할 가능성 때문에 지연되었다[43] – 프랑스의 미래 식민 야망. 샴은 캄보디아 문제 분쟁을 해결하고 1867년 만국 박람회에 참석하기 위해 프라야 수라웡 와이아왓 (원 분낙)을 단장으로 한 또 다른 사절단을 1865년 파리로 보냈다. 이 조약은 마침내 1867년 7월에 비준되었다.[45] 이전 캄보디아-샴 조약은 무효화되었고 샴은 공식적으로 캄보디아를 프랑스에 할양했지만, 바탐방과 시엠레아프를 포함한 캄보디아 북서부를 유지했다. 이 조약은 또한 프랑스가 샴 영토에서 메콩 강을 항해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45] 1866–1868년 메콩 탐험으로 이어졌다. 샴은 1868년 프랑스 보호령 캄보디아와 공동으로 예비 국경 획정을 실시하여, 톤레삽 북쪽에 치 크라엥 구에, 남쪽에 몽 루에세이에 국경 표지를 세웠으며, 캄보디아 북서부는 샴의 지배하에 남았다.
6. 3. 1. 초기 접촉
아유타야 왕조 시기의 1688년 샴 혁명 이후 프랑스-샴 관계는 단절되었다.[38] 프랑스는 프랑스 선교 활동을 통해 샴에 낮은 수준의 존재감을 유지했다. 1856년 샤를 드 몽티니는 샴의 주교 대리인 장-밥티스트 팔레고아의 도움을 받아 방콕에 도착하여, 영국 보링 조약과 유사하게 프랑스에게 낮은 관세와 치외법권을 부여하는 1856년 프랑스-샴 조약을 체결했다. 카스텔노 백작은 방콕의 초대 프랑스 영사가 되었다. 몽꿋 왕은 1861년 프라야 시피피팟(패 분낙)을 단장으로 한 사절단을 파리로 보내, 나폴레옹 3세 황제를 알현했다.프랑스가 1862년 프랑스령 코친차이나를 획득한 후, 샴과의 경쟁에서 베트남의 입지를 차지했으며 팽창주의 식민 세력임을 입증했다. 1860년, 캄보디아의 앙두옹 왕이 사망하면서 노로돔과 그의 형제 시 보타 사이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피에르-폴 드 라 그랑디에르 프랑스령 코친차이나 총독은 1863년 우동으로 항해하여 노로돔에게 샴의 승인 없이 캄보디아를 프랑스 보호령 캄보디아로 만드는 조약에 서명하도록 설득했다. 가브리엘 오베레는 1864년 방콕에서 영사직을 맡았다. 프랑스는 샴에게 캄보디아 왕실의 보물을 노로돔에게 인도할 것을 촉구했다. 샴은 프라야 몬트리 수리야웡 (춤 분낙)을 파견하여 프랑스 영사 오베레와 동행하여 1864년 6월 캄보디아의 보물을 우동으로 가져갔고, 프랑스 해군 제독 데스물랭은 캄보디아 왕관을 노로돔에게 씌워[43] 프랑스의 캄보디아 지배권을 나타냈다. 그러나, 크랄라홈인 솜뎃 차오프라야 시 수리웡세는 이보다 먼저 비밀리에 노로돔에게 캄보디아에 대한 샴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또 다른 상반된 조약에 서명하게 했고, 이는 1864년 8월 ''The Straits Times''에 게재되었다.[43] 오베레는 그러한 상반된 조약의 존재에 당황했다. 프랑스는 캄보디아-샴 조약의 무효를 모색했고, 오베레는 1864년 방콕에 군함 ''미트라유''를 가져왔다.[43] 샴과 프랑스 간의 타협안 초안은 1865년 오베레에 의해 파리로 가져와 비준을 받았다.[45] 그러나 파리에서의 비준은 프랑스가 '샴 라오스'에 대한 샴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할 가능성 때문에 지연되었다[43] – 프랑스의 미래 식민 야망. 샴은 캄보디아 문제 분쟁을 해결하고 1867년 만국 박람회에 참석하기 위해 프라야 수라웡 와이아왓 (원 분낙)을 단장으로 한 또 다른 사절단을 1865년 파리로 보냈다. 이 조약은 마침내 1867년 7월에 비준되었다.[45] 이전 캄보디아-샴 조약은 무효화되었고 샴은 공식적으로 캄보디아를 프랑스에 할양했지만, 바탐방과 시엠레아프를 포함한 캄보디아 북서부를 유지했다. 이 조약은 또한 프랑스가 샴 영토에서 메콩 강을 항해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45] 1866–1868년 메콩 탐험으로 이어졌다. 샴은 1868년 프랑스 보호령 캄보디아와 공동으로 예비 국경 획정을 실시하여, 톤레삽 북쪽에 치 크라엥 구에, 남쪽에 몽 루에세이에 국경 표지를 세웠으며, 캄보디아 북서부는 샴의 지배하에 남았다.
6. 3. 2. 캄보디아 문제
소스가 비어 있으므로 캄보디아 문제 섹션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6. 3. 3. 십송추타이 분쟁

프랑스는 1884년 후에 조약을 통해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얻었고, 1884~1885년의 청불 전쟁 이후 통킹 또는 북부 베트남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얻었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장악한 후 1779년부터 샴의 지배를 받던 라오스에 대한 식민 야욕을 추구했다. 라오스와 북부 베트남을 구분하는 고지대에는 십이쩌우 타이, 후아판 성, 므앙 푸안을 포함한 여러 타이 족장국이 있었는데, 이들은 라오스-샴 또는 베트남, 혹은 양쪽에 전통적인 충성과 조공을 바쳤다. 1870년대부터 중단된 태평천국의 난의 '호' 또는 중국 반군이 이 타이 족장국을 약탈하고 약탈했으며, 샴은 호 전쟁에서 '호'를 격퇴하고 억제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프랑스는 샴이 1883년 치앙마이에서 영국에 부여한 것과 유사한 권리를 라오스에 있는 프랑스인에게 부여할 것을 요구하며, 당시 라오스에는 프랑스인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앙프라방에 두 번째 프랑스 영사관을 설치하도록 요구했다.[38] 샴은 1886년에 프랑스가 루앙프라방에 두 번째 영사관을 설치하는 것을 허용했고[38], 라오스를 프랑스 식민지로 만들 것을 주장하는 오귀스트 파비가[23] 루앙프라방의 초대 프랑스 부영사로 임명되었다. 파비가 루앙프라방에서 직책을 맡게 된 것은 짜오문 와이워라낫(후에 차오프라야 수라삭 몬트리)의 1885~1887년 '호' 진압을 위한 샴 원정과 일치했다. 샴은 '호'와 동맹을 맺은 므앙 레이의 백 타이 통치자 데오 반 찌의 아들인 데오 반 싱으로부터 반대에 직면했다. 와이워라낫은 '호'가 진압되었다고 믿고 1887년 캠페인을 종료하고 방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데오 반 찌는 샴이 그의 형제를 체포한 것에 분노하여 2개월 후인 1887년에 루앙프라방을 약탈했다.[54] 파비는 루앙프라방의 운캄 왕을 불타는 궁궐에서 방콕으로 구출했다.[54]

1887년 데오 반 찌의 루앙프라방 약탈은 샴의 국경 상황을 악화시켰고, 프랑스에게 이 지역에서 샴의 권력에 도전할 기회를 제공했다.[23] 샴은 '호'에 대한 프랑스의 군사적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샴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프랑스는 므앙 레이를 점령하기 위한 프랑스 원정에 참여한 테오필 페네킨 휘하의 프랑스군을 허락한 데오 반 찌와 동맹을 맺었다. 수라삭 몬트리는 1887년 흑 타이 마을인 므앙 탱 또는 디엔비엔푸로 샴 군대를 이끌었지만, '호'를 진압하기 위한 전쟁은 십이쩌우 타이에 대한 프랑스-샴 갈등으로 바뀌었고, 이 지역에 대한 각 당사자의 영토 주장에 측량과 지도 제작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55] 1888년 12월, 므앙 탱 협정에서 파비와 수라삭 몬트리는 샴이 후아판과 므앙 푸안을 유지하는 대가로 십이쩌우 타이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파비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베트남의 역사 기록을 근거로 라오스에 대한 주장을 펼쳤다.
6. 3. 4. 프랑스-시암 전쟁과 파크남 사건
베트남 응우옌 정부는 시암에 반란을 일으킨 타이 푸안 관료 방 비엔을 프랑스 후원 아래 무앙 푸안의 관료로 임명했다. 이 행위는 시암 정부를 격분시켜 1891년 무앙 푸안에서 방 비엔을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파비는 루앙프라방에서 방콕 주재 프랑스 총영사로 전임되었다.[23] 1892년 4월, 두 명의 프랑스인이 적절한 서류도 없이 관세도 지불하지 않고 캄무안에서 국경을 넘으려다 추방당하면서 시암 당국에 반항했다. 프랑스 식민지당 또는 "파르티 콜로니알"은 시암을 프랑스 보호령으로 만들도록 압력을 가했다.[56] 프랑스는 중국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상부 메콩강에 도달하기 위해 메콩강의 동쪽 전체를 원했다.[58] 다음 해, 장 마리 앙투안 드 라네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은 1893년 3월 스퉁트렝과 콩 주변의 남부 라오스를 점령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여 시암이 통제하는 라오스 영토로 공격을 시작했고, 이로써 프랑스-시암 전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3월에 파비는 프랑스 포격선 "뤼탱"을 방콕 프랑스 대사관으로 가져와 시암에 압력을 가해 메콩강 좌안(동쪽)의 모든 라오스 땅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넘기도록 하는 군함 외교를 펼쳤다. 시암은 영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기에[23] 굴복하지 않았다. 국경에서 시암 방어군은 대응하여 5월에는 프랑스 관리 토로를 체포했고[56] 6월에는 프랑스 장교 그로구린이 시암 지휘관 프라 욧 므앙 쾅의 손에 사망했다. 식민주의자와 팽창주의적 감정을 가진 프랑스 정부는 식민지 및 공화국 모두 이러한 사건에 격분했다.[56] 프랑스 식민지당은 언론을 통해 프랑스 국민의 시암에 대한 증오를 선동했다.[58] 시암은 또한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시암에게 도발하지 말라고 말한[58] 영국으로부터 지원을 요청하려 시도했다.

영국 포격선이 영국 시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1893년 7월 초 방콕에 도착하기 시작했다.[58] 영국의 도착은 1856년 조약에 따라 프랑스가 방콕에 함선을 가져올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파비로 하여금 프랑스 포격선 "코메트"와 "앵코스탕"을 방콕으로 보내 이미 거기에 있던 프랑스 포격선 "뤼탱"에 합류하게 하여 위협을 고조시켰다. 사이공의 에드거 휴먼 해군 소장은 보레이 대위에게 이 두 척의 프랑스 포격선을 방콕으로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파비의 프랑스 위협이 고조되자, 시암의 외무부 장관 데와웡세 바라파칸 왕자는 파리 주재 시암 장관에게 프랑스 외무부 장관 쥘 드벨르에게 중재를 요청하도록 전보를 보냈다. 드벨르는 파비의 두 포격선을 중단하는 데 동의하고 샤를 르 미르 드 빌레르를 보내 시암이 프랑스 조건을 수용하도록 설득했다. 파비는 상사의 정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건으로, 프랑스 계획의 변경에 대해 아직 통보받지 못한 보레이 대위는 1893년 7월 13일 파크남의 강변을 건너 "코메트"와 "앵코스탕"을 데리고 방콕으로 진입하여 파크남 사건을 일으켰다. 보레이는 덴마크 지휘관 "프라야 촌라윳 요틴" 안드레아스 뒤 플레시 드 리슐리외 휘하의 쭐라쫌끌라오 요새에서 시암 방어군과 교전을 벌였다. 결국 보레이는 프랑스 대사관 앞에서 정박하는 데 성공했다. 시암과 프랑스 모두 보레이 대위의 행동에 충격을 받았다.
6. 3. 5.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의 영토 상실
1893년 7월 20일, 프랑스는 시암에 메콩강 동쪽 영토 할양 등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전달했다.[122] 시암이 제18 병렬선까지만 할양하려 하자, 프랑스는 7월 26일 시암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차오프라야강 하구에서 방콕을 해상 봉쇄했다. 결국 시암은 프랑스의 모든 요구를 수용했고, 1893년 프랑스-시암 조약이 체결되어 메콩강 동쪽의 모든 라오스 영토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할양했다.[122] 메콩강 서쪽 제방을 따라 25킬로미터의 비무장 지대가 설정되었고, 시암은 배상금 300만 프랑을 지불했다.[122] 1896년 1월 영불 선언[58]은 중앙 시암에서만 시암의 주권을 보장하고, 동부 및 북동부 시암에 대한 프랑스의 개입을 허용했다.프랑스는 시암 내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이민자들을 '보호 대상'[38]으로 간주하여 시암에 대한 관할권을 행사하려 했다. 1902년 프랑스-시암 협약에서 시암은 프랑스 아시아인을 프랑스의 '보호 대상'으로 등록하는 데 동의했다.[38] 1904년 프랑스-시암 조약에서 시암은 사이냐부리, 참파삭, 멜루프레이(현대 쁘레아비헤아르 주)를 포함한 메콩강 서(우)안의 지역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할양했다. 이 조약은 1904년 2월에 체결되었다.

1794년[110]부터 시암은 바탐방, 시엠립, 시소폰 (현대 캄보디아 바탐방, 시엠립, 반테아이멘체이, 오다르멘체이 지방)을 포함한 북서부 캄보디아를 통치했다. 1907년 프랑스-시암 조약에서 시암은 북서부 캄보디아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할양하고, 끄랏과 단사이를 반환받았다. 이 조약은 1907년 3월 13일에 체결되었다.[38] 이 조약은 2008-2011년 캄보디아-태국 국경 분쟁을 초래했다.
6. 4. 미국
에드먼드 로버츠는 1831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에 의해 극동 지역의 미국 특사로 임명되었다.[123] 1833년 미국의 슬루프 ''피콕''을 타고 방콕에 도착한 로버츠는[124] 차오 프라야 프라클랑과의 협상을 통해 '로버츠 조약'으로 알려진 우호 통상 조약 초안을[123][124] 라마 3세에게 제출했다. 이 조약은 미국과 아시아 국가 간의 최초의 조약이었으며, 시암은 미국과 공식 관계를 맺은 최초의 아시아 국가가 되었다. 조약의 내용은 영국의 버니 조약과 거의 동일했지만, 미국은 다른 서방 국가와 동일한 장래의 이점을 얻을 것을 요구했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시암이 다른 서방 국가의 관세를 인하하면 미국도 동일한 권리를 누릴 수 있었고, 시암이 포르투갈을 제외한 다른 서방 국가의 영사관 설립을 허용하면 미국도 허용되었다. 또한, 조약은 미국인이 시암의 부채를 지불하지 못하거나 파산하는 경우, 시암은 미국 채무자를 처벌하거나 노예로 삼지 않도록 규정했다.그러나 1840년대 중국의 세금 징수 시스템은 무역의 수익성을 크게 떨어뜨렸고, 1838년부터 1850년까지 미국 상선은 방콕으로 항해하지 않았다.[39] 미국 외교관이 된 프랑스인 조셉 발레스티어는 1850년 조약 수정안을 제안하기 위해 방콕에 도착했지만,[124] 프라클랑(딧 분낙)은 남부 시암에서 ''삭 렉''을 진행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고, 그의 남동생 프라야 시피팟(탓 분낙)이 조셉 발레스티어를 접대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만남은 우호적이지 않았고, 태국 연대기에 따르면 발레스티어는 무례하게 행동했다.[39] 결국 발레스티어는 빈손으로 방콕을 떠났다.
타운젠드 해리스는 일본으로 가는 길에 1856년 4월 ''샌 재신토'' 호를 타고 시암에 도착하여 새로운 조약을 체결했다. 해리스의 도착은 영국인 해리 파크스가 보우링 조약의 보충 조건을 협상하고 있던 시점과 겹쳤다.[38] 시암 궁정은 영국과 미국이 만나 양국이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미국 특사의 접견이 지연되었다.[39] 해리스는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의 선물을 시암 궁정에 전달하고, 미국이 "동부에 영토가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고 부왕 핑크라오에게 주장했다.[39] 보우링 조약에 기초하여 1856년 5월에 서명된 시암 해리스 조약은 낮은 관세와 치외 법권 등과 같은 권리를 미국인에게 부여했다. 스티븐 매툰은 방콕의 초대 미국 영사로 고용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와 비교하여 미국은 시암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39] 1859년 J.H. 챈들러가 방콕의 미국 영사로 임명되었다. 몽꿋 국왕은 1861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게 시암이 짐을 싣는 데 사용될 코끼리를 선물할 것이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고, 링컨 대통령은 "증기가 국내 상업에서 우리의 가장 좋고 가장 효율적인 운송 수단이었다"고 답하며 정중하게 거절했다.[39]
7. 인구
아유타야 왕조 말기부터 태국의 실질적인 인력은 감소하고 있었다. 1767년 아유타야의 멸망은 대부분의 시암인들이 버마로 강제 이주되거나 전쟁에서 사망하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1785년 9개 군대의 전쟁에서 태국의 인력 부족이 드러났는데, 당시 버마는 총 14만 4천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태국을 침략했으나, 태국은 방어를 위해 7만 명의 병력만을 겨우 모을 수 있었다.[125] 1826년 헨리 번이를 따라 방콕에 간 D.E. 맬로치는 태국의 인구 밀도가 낮으며 시암의 토지가 당시 인구의 약 두 배를 부양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126]
=== 인력 관리 ===
방콕 초기 시대에는 인력이 부족한 자원이었다. 징병 또는 등록 부서인 ''Krom Suratsawadi'' (끄롬 수랏사와디/กรมสุรัสวดีth)는 부역과 전쟁에 동원될 수 있는 건장한 남성들의 기록을 관리했다. ''Krom Suratsawadi''는 징집을 위한 가용 ''Phrai'' 평민과 ''That'' 노예 목록인 ''Hangwow'' 등록[127] (반치 항와오/บัญชีหางว่าวth)을 기록했다. 그러나 근대 이전의 시암은 인구에 대한 정확한 인구 조사를 유지하지 않았다. 궁정의 조사는 통계적 정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유능한 인력의 모집에 초점을 맞추었다.[128] 여성, 어린이, 그리고 권력을 피해 정글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제외하고, 건장한 남성만 이 목적으로 계산되었다.
시암 정부의 권한은 도시와 강 유역의 농지에만 미쳤다. 근대 이전의 대부분의 시암 지역은 야생 동물이 돌아다니는 울창한 열대 정글이었다. 도시를 떠나 정글로 가는 것은 시암 남성들이 부역 의무를 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시암 궁정은 가용 인력을 엄격하게 통제하기 위해 ''Sak Lek'' (싹 렉/สักเลกth) 방식을 고안했다. 남성은 그의 책임 부서의 상징으로 손등에 문신을 새기기 위해 뜨겁게 달군 쇠로 낙인 찍혔다. ''Sak Lek''은 신속한 신원 확인을 가능하게 했고, ''Phrai''가 정부의 의무를 회피하는 것을 막았다. ''Sak Lek''은 전통적으로 한 세대에 한 번, 일반적으로 한 통치 기간에 한 번, 그리고 중앙 시암에서 시행되었다. 라마 3세는 1824년에 라오스에 ''Sak Lek''을 명령[129]했는데, 이는 1827년 아누봉의 라오스 반란의 선행 사건 중 하나가 되었다. 남부 시암 사람들의 ''Sak Lek''은 1785년, 1813년, 1849년에 시행되었다. 효과적인 인력 통제는 안정과 안보를 유지하기 위한 시암 궁정의 주요 정책 중 하나였다.
=== 인구 ===
라따나꼬신 시대 이전의 정확한 인구 자료는 남아 있지 않으며, 추정치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130] 초기에는 약 400만 명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인구를 유지했다.[130] 출산율은 높았지만, 기대 수명은 40세 미만이었고 영아 사망률은 1,000명당 200명에 달했다.[130] 전쟁과 질병이 주요 사망 원인이었다. 남성들은 전쟁에 징집되었고, 태국 어린이들은 매년 천연두로 사망했다.[131] 1820년 콜레라 유행과 1849년 콜레라 유행으로 각각 3만 명[132]과 4만 명이 사망했다.
1782년 왕실 수도가 된 방콕은 시암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방콕은 톤부리의 인구를 물려받았고, 라오스 및 캄보디아 전쟁 포로와 중국 및 몬족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인구가 증가했다. 초기 방콕의 인구는 약 5만 명으로 추정되었다.[133] 1820년대에 방콕은 시암의 다른 모든 도시를 인구 규모에서 능가했다.[133] 1827년 중앙 시암의 주요 도시 인구는 아유타야 41,350명, 찬타부리 36,900명, 사라부리 14,320명, 피싸눌록 5,000명이었다.[131] 치앙마이는 방콕 다음으로 라따나꼬신 왕국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133]
1855년 보링 조약을 통해 시암 경제가 쌀 수출 지향 경제로 변화하면서, 잉여 식량이 노동력을 위한 신생아 출산을 장려하여 인구 증가를 유발했다.[130] 시암의 인구는 1850년경 500만 명에서 1910년까지 813만 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1850년 방콕의 인구는 약 10만 명이었으며 1909년에는 478,994명으로 증가했다.[131] 19세기 말 서양 의학의 도입과 위생 시스템 구축은 삶의 질을 향상시켰고[130] 치명적인 유행병의 가능성을 줄였다. 1909년, 최초의 공식적인 현대 전국 태국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다.
=== 민족 이주 ===
톤부리 시대부터 시암은 이웃 왕국들과의 많은 전쟁을 통해 민족 집단을 얻었으며, 전쟁 포로들은 강제로 이주되었다. 1779년, 시암군은 비엔티안을 점령했을 때, 비엔티안에서 온 만 명[134]의 라오족이 사라부리와 랏차부리로 이주하여 정착했고, 이들은 '라오 비엥'(라오비엥th)으로 알려졌다. 라오스 왕자의 아들들을 포함한 라오스 엘리트 계층은 방콕에 정착했다.[134] 1804년에는 시암-란나군이 버마가 점령한 치앙샌을 점령하면서 "라오 퐁담"(라오퐁담th, 검은 배를 가진 라오족)으로 알려진 치앙샌의 북부 태국 주민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여 사라부리와 랏차부리에 정착했다. 1828년 비엔티안이 완전히 파괴된 후에는 10만 명 이상[129][134]의 라오족이 유입되었다. 19세기 초, 라오스 인구는 메콩 지역에서 치-문 강 유역의 이산으로 점차 이동하여 이산에 많은 도시들이 건설되었다. 1833년, 시암-베트남 전쟁 중에 시암군은 무앙푸안을 장악했고, 라오 푸안족은 중앙 시암에 정착했다.
1782년 캄보디아 내전 중 앙 응 왕과 그의 캄보디아 측근은 방콕에 정착했다. 1783년, 응우옌 푸옥 아인은 베트남 추종자들과 함께 방콕으로 피신하여 정착했다. 캄보디아인들은 1812년과 1833년의 시암-베트남 분쟁 사건으로 시암으로 이주하여 방콕과 쁘라친부리 지역에 정착했다. 1833년, 시암의 코친차이나 원정 중에 코친차이나에서 온 기독교 베트남인과 캄보디아인들이 삼센의 방콕에 정착했다.
말레이 반란국이 시암에 반란을 일으킨 탓에, 말레이인들은 여러 차례 전쟁 포로로 방콕으로 이송되었다.[134] 1786년, 파타니가 약탈당했을 때, 파타니 말레이인[135]은 방콕의 방 람푸에 정착하기 위해 이주했다.[134] 1830년대, 파타니와 케다의 반란은 4,000명에서 5,000명[134]의 말레이인들이 남쪽에서 방콕의 동부 교외인 센샌과 나콘시탐마랏에 정착하도록 했다.
1757년 한타와디 왕국의 멸망 이후, 하부 버마의 몬족은 버마인에 의한 집단 학살로 고통받았으며 아유타야 시대 후반부터 시암으로 피신했다. 1774년 톤부리 시대에 몬족의 반란 실패로 몬족이 유입되었고, 1814년, 모타마의 몬족은 억압적인 버마 총독에 반항했고 4만 명의 몬족이 세 개의 탑 고개를 통해 시암으로 이주했다. 라마 2세는 이 기회에 어린 아들 몽꿋 왕자를 칸차나부리로 보내 몬족을 환영했다.
중국 이민은 중앙 시암의 인구 증가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 크라퍼드는 1822년 방문에서 방콕에 31,500[126]명의 등록된 남성 중국인 납세자가 있다고 언급했다. 맬로치는 1826년 그의 체류 기간 동안 12,000[126]명의 중국인이 매년 광둥과 푸젠 성에서 시암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중국 정착민들은 왕실로부터 특별 대우를 받았으며, 다른 민족과 달리, 중국인들은 '푸크 피'(푸크피th)라고 알려진 일정액의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부역 의무와 전시 징집에서 면제되었다.[126] 세금을 납부하면 손목에 묶는 부적이 주어졌으며, 최초의 '푸크 피'는 라마 2세 통치 기간에 시행되었다. 중국 정착민들은 초기 방콕 시대 시암 경제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제한으로 이동할 수 있었던 중국인들은 상업 중개인 역할을 했고, 시암의 최초 '부르주아' 계급이 되었다.
7. 1. 인력 관리
방콕 초기 시대에는 인력이 부족한 자원이었다. 징병 또는 등록 부서인 ''Krom Suratsawadi'' (끄롬 수랏사와디/กรมสุรัสวดีth)는 부역과 전쟁에 동원될 수 있는 건장한 남성들의 기록을 관리했다. ''Krom Suratsawadi''는 징집을 위한 가용 ''Phrai'' 평민과 ''That'' 노예 목록인 ''Hangwow'' 등록[127] (반치 항와오/บัญชีหางว่าวth)을 기록했다. 그러나 근대 이전의 시암은 인구에 대한 정확한 인구 조사를 유지하지 않았다. 궁정의 조사는 통계적 정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유능한 인력의 모집에 초점을 맞추었다.[128] 여성, 어린이, 그리고 권력을 피해 정글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제외하고, 건장한 남성만 이 목적으로 계산되었다.시암 정부의 권한은 도시와 강 유역의 농지에만 미쳤다. 근대 이전의 대부분의 시암 지역은 야생 동물이 돌아다니는 울창한 열대 정글이었다. 도시를 떠나 정글로 가는 것은 시암 남성들이 부역 의무를 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시암 궁정은 가용 인력을 엄격하게 통제하기 위해 ''Sak Lek'' (싹 렉/สักเลกth) 방식을 고안했다. 남성은 그의 책임 부서의 상징으로 손등에 문신을 새기기 위해 뜨겁게 달군 쇠로 낙인 찍혔다. ''Sak Lek''은 신속한 신원 확인을 가능하게 했고, ''Phrai''가 정부의 의무를 회피하는 것을 막았다. ''Sak Lek''은 전통적으로 한 세대에 한 번, 일반적으로 한 통치 기간에 한 번, 그리고 중앙 시암에서 시행되었다. 라마 3세는 1824년에 라오스에 ''Sak Lek''을 명령[129]했는데, 이는 1827년 아누봉의 라오스 반란의 선행 사건 중 하나가 되었다. 남부 시암 사람들의 ''Sak Lek''은 1785년, 1813년, 1849년에 시행되었다. 효과적인 인력 통제는 안정과 안보를 유지하기 위한 시암 궁정의 주요 정책 중 하나였다.
7. 2. 인구
라따나꼬신 시대 이전의 정확한 인구 자료는 남아 있지 않으며, 추정치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130] 초기에는 약 400만 명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인구를 유지했다.[130] 출산율은 높았지만, 기대 수명은 40세 미만이었고 영아 사망률은 1,000명당 200명에 달했다.[130] 전쟁과 질병이 주요 사망 원인이었다. 남성들은 전쟁에 징집되었고, 태국 어린이들은 매년 천연두로 사망했다.[131] 1820년 콜레라 유행과 1849년 콜레라 유행으로 각각 3만 명[132]과 4만 명이 사망했다.1782년 왕실 수도가 된 방콕은 시암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방콕은 톤부리의 인구를 물려받았고, 라오스 및 캄보디아 전쟁 포로와 중국 및 몬족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인구가 증가했다. 초기 방콕의 인구는 약 5만 명으로 추정되었다.[133] 1820년대에 방콕은 시암의 다른 모든 도시를 인구 규모에서 능가했다.[133] 1827년 중앙 시암의 주요 도시 인구는 아유타야 41,350명, 찬타부리 36,900명, 사라부리 14,320명, 피싸눌록 5,000명이었다.[131] 치앙마이는 방콕 다음으로 라따나꼬신 왕국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133]
1855년 보링 조약을 통해 시암 경제가 쌀 수출 지향 경제로 변화하면서, 잉여 식량이 노동력을 위한 신생아 출산을 장려하여 인구 증가를 유발했다.[130] 시암의 인구는 1850년경 500만 명에서 1910년까지 813만 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1850년 방콕의 인구는 약 10만 명이었으며 1909년에는 478,994명으로 증가했다.[131] 19세기 말 서양 의학의 도입과 위생 시스템 구축은 삶의 질을 향상시켰고[130] 치명적인 유행병의 가능성을 줄였다. 1909년, 최초의 공식적인 현대 전국 태국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다.
7. 3. 민족 이주
톤부리 시대부터 시암은 이웃 왕국들과의 많은 전쟁을 통해 민족 집단을 얻었으며, 전쟁 포로들은 강제로 이주되었다. 1779년, 시암군은 비엔티안을 점령했을 때, 비엔티안에서 온 만 명[134]의 라오족이 사라부리와 랏차부리로 이주하여 정착했고, 이들은 '라오 비엥'(라오비엥th)으로 알려졌다. 라오스 왕자의 아들들을 포함한 라오스 엘리트 계층은 방콕에 정착했다.[134] 1804년에는 시암-란나군이 버마가 점령한 치앙샌을 점령하면서 "라오 퐁담"(라오퐁담th, 검은 배를 가진 라오족)으로 알려진 치앙샌의 북부 태국 주민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여 사라부리와 랏차부리에 정착했다. 1828년 비엔티안이 완전히 파괴된 후에는 10만 명 이상[129][134]의 라오족이 유입되었다. 19세기 초, 라오스 인구는 메콩 지역에서 치-문 강 유역의 이산으로 점차 이동하여 이산에 많은 도시들이 건설되었다. 1833년, 시암-베트남 전쟁 중에 시암군은 무앙푸안을 장악했고, 라오 푸안족은 중앙 시암에 정착했다.
1782년 캄보디아 내전 중 앙 응 왕과 그의 캄보디아 측근은 방콕에 정착했다. 1783년, 응우옌 푸옥 아인은 베트남 추종자들과 함께 방콕으로 피신하여 정착했다. 캄보디아인들은 1812년과 1833년의 시암-베트남 분쟁 사건으로 시암으로 이주하여 방콕과 쁘라친부리 지역에 정착했다. 1833년, 시암의 코친차이나 원정 중에 코친차이나에서 온 기독교 베트남인과 캄보디아인들이 삼센의 방콕에 정착했다.
말레이 반란국이 시암에 반란을 일으킨 탓에, 말레이인들은 여러 차례 전쟁 포로로 방콕으로 이송되었다.[134] 1786년, 파타니가 약탈당했을 때, 파타니 말레이인[135]은 방콕의 방 람푸에 정착하기 위해 이주했다.[134] 1830년대, 파타니와 케다의 반란은 4,000명에서 5,000명[134]의 말레이인들이 남쪽에서 방콕의 동부 교외인 센샌과 나콘시탐마랏에 정착하도록 했다.
1757년 한타와디 왕국의 멸망 이후, 하부 버마의 몬족은 버마인에 의한 집단 학살로 고통받았으며 아유타야 시대 후반부터 시암으로 피신했다. 1774년 톤부리 시대에 몬족의 반란 실패로 몬족이 유입되었고, 1814년, 모타마의 몬족은 억압적인 버마 총독에 반항했고 4만 명의 몬족이 세 개의 탑 고개를 통해 시암으로 이주했다. 라마 2세는 이 기회에 어린 아들 몽꿋 왕자를 칸차나부리로 보내 몬족을 환영했다.
중국 이민은 중앙 시암의 인구 증가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 크라퍼드는 1822년 방문에서 방콕에 31,500[126]명의 등록된 남성 중국인 납세자가 있다고 언급했다. 맬로치는 1826년 그의 체류 기간 동안 12,000[126]명의 중국인이 매년 광둥과 푸젠 성에서 시암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중국 정착민들은 왕실로부터 특별 대우를 받았으며, 다른 민족과 달리, 중국인들은 '푸크 피'(푸크피th)라고 알려진 일정액의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부역 의무와 전시 징집에서 면제되었다.[126] 세금을 납부하면 손목에 묶는 부적이 주어졌으며, 최초의 '푸크 피'는 라마 2세 통치 기간에 시행되었다. 중국 정착민들은 초기 방콕 시대 시암 경제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제한으로 이동할 수 있었던 중국인들은 상업 중개인 역할을 했고, 시암의 최초 '부르주아' 계급이 되었다.
8. 사회
라따나꼬신 초기 시대의 샴 사회는 아유타야 시대와 마찬가지로 상좌부 불교를 주요 이념으로 삼았다.[136] 국왕과 왕실이 사회 최상위에 위치했고, 그 아래에 귀족 ''쿤낭''( ขุนนางth ), 평민 ''프라이''( ไพร่th ), 노예 ''탓''( ทาสth )가 있었다.[136]
삼인법에 따른 삭디나 제도는 사회 계급을 규정했다.[90] 귀족은 400~10,000 라이, 일반 승려는 400 라이, 노예는 5 라이의 삭디나를 가졌다.[90] 사회 계급은 크게 왕족(''차오''), 귀족(''쿤낭''), 평민(''프라이''), 노예(''탓'')로 나뉘었다.[138]
귀족은 400 라이 이상의 삭디나를 가진 관직 보유자와 그 가족을 지칭했다.[138] 이들은 ''프라이'' 부하를 통제하는 ''나이'' (นายth)였다.[136] 관직은 세습되지 않았지만, 가문 및 개인적 관계로 유지되기도 했다.[136] 귀족은 ''비아왓'' (เบี้ยหวัดth) 수당을 받았고, 사망 시 재산은 왕실에 보고되어 일부가 상속세로 징수되었다.
왕족과 귀족은 ''문나이'' (มูลนายth)로 불리며 평민을 지배했다. 평민 ''프라이''는 인구 대다수를 차지했으며,[138] ''문나이''의 통제를 받는 농업 생산자였다. 건강한 남성 ''프라이''는 부역 노동과 전쟁에 참여해야 했다.[12] 라마 1세는 인력 부족으로 모든 남성 ''프라이''에게 등록을 명령했고,[12] ''삭 렉'' 문신이 부과되었다.[12]
''프라이''는 왕실에 직접 봉사하는 ''프라이 루앙'' (ไพร่หลวงth), 왕자에게 배정된 ''프라이 솜'' (ไพร่สมth), 세금 납부로 복무를 대신하는 ''프라이 수아이'' (ไพร่ส่วยth)로 나뉘었다.[136] ''프라이 루앙''은 교대로 왕실에서 복무했으며, 기간은 라마 1세 시대에 2개월, 이후 3개월로 변경되었다.[91] ''프라이 솜''은 왕자를 섬겼지만, 연간 1개월은 왕실에 직접 봉사해야 했다. ''프라이 수아이''는 지역 상품과 귀중품으로 세금을 냈고, 왕실은 이를 외국에 판매했다.
''탓'' 노예는 주인의 재산으로 간주되어 상속, 거래, 양도가 가능했다. ''탓''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스스로를 팔거나 빚 때문에 노예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부채를 갚으면 해방될 수 있었지만, ''탓 나이 루안 비아'' (ทาสในเรือนเบี้ยth)와 ''탓 찰레이'' (ทาสเชลยth)는 평생 노예였다. 노예 여성이 주인이나 아들의 아내가 되면 해방되었고, 적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도 해방되었다.
불교 승려는 모든 계급에게 존경받았고, 부역과 과세에서 면제되었다.
8. 0. 1. 상좌부 불교
초기 라타나코신 시대 시암 왕실의 주요 정책 중 하나는 정통 테라바다 ''상가'' 승려단의 유지였다.[12] 라마 1세는 1788년 고위 승려들에게 불교 회의를 소집하여 경(Tripiṭaka) 팔리어 경전을 재편찬하도록 명령했는데, 이는 태국 서술에 따르면 아홉 번째 불교 회의로 여겨졌다. 라마 1세는 방콕의 많은 기존 사찰들을 훌륭한 사찰로 개조했다. 방콕의 중요한 승원 사찰로는 왓 마하탓 유와랏랑사릿, 왓 포, 왓 아룬, 왓 라캉코시타람 등이 있다. 라마 3세 통치 기간 동안, 왕실 사찰과 일반 사찰을 포함하여 약 70개의 불교 사찰이 방콕에서 대규모로 건설되거나 개조되었다. 초기 방콕에는 주류 시암 테라바다와 몬 전통의 두 가지 테라바다 종파가 있었다. 미얀마에서 유입된 몬족은 몬 불교 전통과 몬 승려들을 함께 가져왔다.
시암 남성은 사회적 계급에 관계없이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 승려로 서품받는 것이 예상되었다.[139] 보통, 20세의 청년은 성인식의 일환으로 잠시 승려가 되었다. 여성은 승려가 될 수 없었지만, 머리를 깎고 흰 옷을 입을 수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승려로 간주되지 않았다. 두 가지 승려의 길이 있었다: 테라바다 철학과 팔리어 학습에 집중하는 교리적인 '도시 거주' ''Khamavasi''[139] (카마와시/คามวาสีth)와 정신 수련과 명상 수행에 집중하는 명상적인 '숲 거주' ''Aranyavasi''[139] (아란야와시/อรัญวาสีth). 프라 야나상본 수크는 1810년대에 명상적인 ''Vipatsana''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영향력 있는 승려였으며, 일부 현대 학자들은 이를 탄트라 테라바다로 해석했다.[140]
승원 통치는 계층적인 교회 관료제로 구성되었다. 왕이 임명한 ''상가라자'' 또는 불교의 주교 또는 최고 총대주교는 시암 승려단의 수장이었다.[139] ''상가라자''는 ''라차삽''이 사용되어 왕자처럼 대우받았다. ''상가라자'' 아래에는 왕이 임명한 계급과 직위가 있는 교회 계층이 있었다. ''상가라자''는 ''솜뎃 프라'' 아리야웡사 카타얀의 칭호를 받게 되며 왓 마하탓에 공식 거처를 두었다. 왕실은 ''Krom Sankhakari'' (끄롬 상카카리/กรมสังฆการีth) 또는 승원 업무 부서를 통해 정통으로 간주되는 전통을 규제하고 보존하기 위해 불교 ''상가''를 통제했는데, 이 부서는 ''비나야'' 위반을 조사하고 승려의 직위를 박탈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8. 0. 2. 탐마윳


수계 시, 불교 승려는 일상생활을 규제하는 법인 ''비나야''에 따라 227가지 계율을 지키기로 서약한다.[139] 유효한 수계는 승려에게 승가(僧伽)를 전수하기 위해 존재하는 진정한 승려의 참석이 필요했다. 불교 승려는 수계의 계보를 부처님 자신에게서 찾았다. 초기 방콕 시대에, 시암 정부는 불교 율법이 쇠퇴하는 딜레마에 직면했는데, 이는 개인적 재산 축적과 자녀를 갖는 것을 포함한 ''비나야'' 위반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왕실은 승가를 정화하고 '비순응' 승려들을 숙청하려는 여러 시도를 했다.
1824년, 몽꿋 왕자는 승려로 수계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라마 2세는 15일 후에 사망했고, 그의 이복 형제인 쳇사다보딘 왕자가 라마 3세로 왕위에 올랐다. 몽꿋 왕자는 정치적 음모를 피하기 위해 승려로 남았고[141][142] 종교적, 지적 생활을 추구했다. 몽꿋 왕자는 곧 당시 주류 시암 승가가 일반적으로 ''비나야''에 대해 느슨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1830년에 몬족 승려 프라 수멧무니를 만났고[142] 몬족의 전통이 더 엄격하고 부처님의 원래 ''비나야''에 더 가깝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따라서 부처님에게서 유래된 진정한 계보를 발견했다. 1830년, 몽꿋 왕자는 왓 마하탓에서 왓 사모라이로 옮겨 ''탐마윳'' 또는 ''담마윳티카''(탐마윳/ธรรมยุตth '달마를 따름') 운동을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몬족의 전통을 연구하고 따랐다. 몽꿋 왕자는 왓 사모라이에서 몬족 전통에 따라 승려로 다시 수계했으며,[141] 그곳에서 ''탐마윳''은 추종자를 모았다. 당시 주류 시암 승려는 ''마하나이카이''(마하나이카이/มหานิกายth)로 알려지게 되었다. ''탐마윳'' 승려의 가사는 몬족 스타일로 양 어깨에 걸쳐 입는 갈색-붉은색이었으며,[142] ''마하나이카이'' 승려의 가사 색상은 밝은 주황색이었다. ''탐마윳''은 승려가 돈을 만지는 것을 금지했다. 새로운 팔리어 발음과 매일의 불교 의례인 염불도 도입되었다.[142] 몽꿋 왕자는 1836년에 ''탐마윳''의 본부가 된 왓 바원 니웻의 주지로 임명되었다.

왕실은 탐마윳에 대해 혼합된 반응을 보였다. 라마 3세는 탐마윳을 용인했지만, 몬족 스타일의 가사에 대해 논평했다. ''크롬 샹카카리''를 감독하는 라크론나렛 왕자는 탐마윳의 주요 반대자였다. 몽꿋 왕자는 방콕에서 팔레고아 주교를 포함한 서양인들과 교류했으며, 그의 탐마윳 이상에서 몽꿋의 합리적 재고와 불교적 현실주의에 영향을 미칠 서양 과학과 철학을 배웠다.[142][143] 탐마윳은 유일한 교리적 근원으로 팔리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명상, 마법적 수행 및 민간 신앙 혼합을 신화로 간주했다.[141][142] 1851년, 몽꿋 왕자는 압력으로 인해 탐마윳 승려들에게 몬족 스타일의 가사를 포기하도록 명령하기로 결정했다. 몽꿋 왕자는 1851년에 왕이 되었고, 몬족 스타일의 승려 가사는 복원되었다. 탐마윳의 지도력은 파바레스 바리얄롱콘 왕자에게 넘어갔다.
8. 0. 3. 가톨릭 선교

아유타야 시대인 1730년부터 시암은 태국 문자로 기독교 교리서를 쓰는 것을 금지했다.[144] 또한 시암, 몬, 라오-란나 사람들은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기에 개종이 금지되었다.[144] 근대 이전의 시암에서는 종교가 민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서양인들은 시암에서 자유롭게 종교를 실천할 수 있었지만, 토착민의 개종은 민족 문화적 규범에서 벗어나는 행위로 금지되었다. 1779년, 톤부리 왕 딱신은 세 명의 프랑스 가톨릭 사제들을 추방하라고 명령했다:[145] 시암의 사도 대리인 올리비에-시몽 르 봉, 조제프-루이 쿠데, 그리고 아르노-앙투안 가르노는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성수를 마시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르 봉은 고아로 은퇴하여 1780년에 사망했다.[145] 쿠데는 케다로 떠났고, 1782년에 시암의 새로운 사도 대리로 임명되었다.[146] 쿠데는 1783년 방콕으로 돌아왔다. 쿠데는 라마 1세에 의해 사면받았고, 정화 의식에서 성수를 마시는 것을 면제받았다. 쿠데는 쿠디 친 지역의 산타 크루즈 성당에서 사도 대리직을 맡았다. 그러나 프랑스 주교들이 시암의 사도 대리직을 독점하면서, 쿠데는 방콕 가톨릭 신자 다수를 차지하는 포르투갈인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쿠데는 방콕을 떠나 케다로 갔고, 1785년에 사망[146]했으며, 1787년 가르노가 그의 뒤를 이었다. 방콕 초기 시대의 시암 사도 대리들은 고아나 마카오에서 포르투갈 주교를 요구하는 방콕의 포르투갈인들의 반대 때문에 케다, 페낭, 머귀에서 대부분의 임기를 보냈다. 짠타부리는 이주한 베트남 가톨릭 신자들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840년에 케다, 믈라카, 싱가포르, 테나세림이 시암의 사도 대리 영토에 추가되었다.[147]
시암의 사도 대리인 장-폴 쿠르베지는 1838년에 장-밥티스트 팔레고이스를 자신의 보좌로 선택했다.[147][148] 쿠르베지는 싱가포르에 영구적으로 머물기로 결정[147]했고, 팔레고이스는 방콕에 남았다. 1841년, 교황 칙서인 "Univerci Dominici"[147]에 따라 시암의 사도 대리직은 시암 본토에 해당하는 동부 시암과 말레이 반도에 해당하는 서부 시암의 사도 대리직으로 분할되었다. 쿠르베지는 싱가포르에서 서부 시암의 사도 대리로 남았고,[147] 팔레고이스는 방콕에서 동부 시암의 사도 대리로 임명되었다.[148] 팔레고이스는 방콕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최초의 사도 대리였다. 시암 사람들의 개종이 금지되었기에, 시암의 주교 권한은 외국 출신의 기독교인들을 감독했다. 1841년, 시암에는 총 4,300명의 가톨릭 신자가 기록되었으며, 방콕의 성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성당에는 1,700명의 베트남 가톨릭 신자가, 무염시태 성당에는 700명의 포르투갈-캄보디아 가톨릭 신자가, 산타 크루즈 성당에는 500명의 포르투갈-시암 가톨릭 신자가, 성 로사리오 칼바리오 성당에는 500명의 가톨릭 신자가, 짠타부리에는 800명의 베트남 가톨릭 신자가 있었다.[148] 1849년, 콜레라 유행 동안 라마 3세는 기독교 교회에 가축을 풀어 먹이를 주어[148] 불교 신념에 따라 질병을 달래기 위한 공덕을 쌓으라고 명령했다. 선교사들은 이에 따르지 않아 국왕의 분노를 샀다. 팔레고이스는 왕의 명령에 따라 동물을 풀어주기로 결정했다. 라마 3세는 만족했지만, 이에 불응한 8명의 사제를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1852년, 몽꿋 국왕은 추방된 8명의 선교사들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귀국을 요청하고 앞으로 선교사들에게 불교 신념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비오 9세는 교황 칙서 "Pergrata Nobis"(1852)와 "Summa quidem"(1861)을 통해 몽꿋 국왕에게 감사를 표했다.[148] 몽꿋은 1858년에 그의 백성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언[42]하여, 1세기 이상 지속된 개종 금지를 종식시키고 토착 시암 기독교 개종자들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8. 0. 4. 개신교 선교
1828년, 방콕에는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두 명이 도착했다. 그들은 영국 출신의 제이콥 톰린(런던 선교 협회)과 독일 루터교 출신 칼 구츨라프였다.[91][149] 톰린은 9개월만 머물렀고, 구츨라프는 1833년까지 머물렀다. 당시 시암의 개신교 선교는 매우 초창기였다. 이 시기에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미국 해외 선교 위원회)과 침례교 선교사들이 도착했다. 미국 선교사들은 서양 의학을 주로 실천했기 때문에 시암인들에게 '의사'로 불렸다. 선교 활동은 대체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서양 과학과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태국 역사에 기여했다. 여기에는 외과 수술, 인쇄술, 예방 접종을 시암에 도입한 장로교 단 비치 브래들리[91](모 브래들리/หมอบรัดเลth, 1835년 도착)와 몽쿳 왕자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장로교 선교사 제시 캐스웰[150](아사 헤먼웨이와 함께 1839년 도착), 침례교 존 테일러 존스[151](1833년 도착)와 침례교 J.H. 챈들리(모 챈들리/หมอจันดเลth, 1843년 도착) 등이 포함된다.9. 문화
9. 1. 예술과 건축
9. 1. 1. 아유타야의 연속성
초기 차크리 왕들이 옛 아유타야를 모방하려 했기 때문에 초기 라따나꼬신 왕국 시대의 예술 전통은 후기 아유타야 양식을 따랐다. 시암 예술과 건축은 19세기 초 초기 방콕에서 새로운 정점에 도달했다.[156] 지배적인 분위기는 뚜렷한 혁신이 거의 없는 재건의 분위기였다.[156] 아유타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방콕 궁정은 예술, 공예 및 건축물을 제작하기 위해 ''창십무''(ช่างสิบหมู่th) 또는 십자 왕실 장인 길드를 유치했다.[157]전통 시암 예술은 주로 왕궁과 사원에 봉사했다. 라따나꼬신 왕국의 창시자인 라마 1세는 승려가 거주하지 않고 의식에 사용되는 '왕실 예배당'인 왓 프라깨우를 포함한 대궁전 건설을 1783년에 시작했다.[158] 왕궁 파빌리온은 아유타야 궁전 건물에서 영감을 받았다. 완성되었을 때 왓 프라깨우에는 1784년 왓 아룬에서 옮겨온 에메랄드 부처가 안치되었다. 왓 프라깨우의 ''우보솟'' 또는 주요 승인 홀은 초기 방콕 시대에 아유타야 양식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보여주는 가장 잘 보존된 구조물이다.[158] 3층 지붕, 곡선형 베이스와 자개 문으로 장식된 박공 모티프는 아유타야 건축의 특징이었다.[158][159]
초기 방콕 시대에는 방콕의 기존 지역 사원이 훌륭한 사원으로 개조되었다. 태국 사원의 주요 구조는 승려가 의식을 수행하고 수행하는 광범위한 직사각형 모양의 ''우보솟'' (อุโบสถth),[158] 대중 종교 의례를 위한 ''위한'' (วิหารth)을 포함했다. 박공 페디먼트의 부조는 힌두교 인물과 금도금 조각된 나무 또는 유리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패턴을 나타냈다.[157] 혁신은 방콕 시대의 사원 건물은 아유타야에는 없었던 ''라비앙 콧'' (ระเบียงคตth)이라는 회랑 갤러리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157] 승려들을 위한 성스러운 의식장은 ''바이 세마'' (ใบเสมาth) 돌로 표시되었다. ''프라삿''(ปราสาทth)은 십자형 평면과 중앙에 앙코르 스타일의 ''프랑''이 솟아 있는 초기 방콕의 새로운 구조였다.[156] 사원은 튼튼한 벽돌로 지어졌지만, 토착 및 일반 주거 구조는 나무로 만들어져서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했다.[156][158]
들쭉날쭉한 모서리와 신고대 ''프랑''은 초기 방콕 시대에 ''체디'' 또는 탑의 가장 인기 있는 스타일이었다.[156] 왓 아룬의 웅장한 ''프랑'' 탑은 1842년에 건설되어 1851년에 완성되었다. 그것은 상당 기간 동안 시암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로 남아 있었다. 당시 불교 승려였던 몽쿳 왕은 북부 시암으로 순례를 갔을 때 수코타이-싱할라 둥근 탑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아 1853년에 둥근 모양의 왓 프라 파톰 체디 탑을 건설하게 되었다.[156]
전통 태국 회화는 부처의 생애, 자타카 이야기 및 불교 우주론을 포함한 불교 테마를 묘사하는 사원의 불교 벽화 예술에 헌신했다.[156] 색상은 주로 흙색으로 제한되었다.
부처님 이미지는 아유타야 시대만큼 광범위하게 주조되지 않았다.[156] 아유타야, 수코타이 및 핏사눌록의 유적 도시에서 가져온 수많은 부처님 이미지가 초기 방콕 시대에 방콕의 다양한 사원에 안치되었다.
9. 1. 2. 중국의 영향
체사다보딘 왕자로 즉위하기 전 알려졌던 라마 3세는 ''Kromma Tha'', 즉 무역부를 감독했고 방콕의 중국 상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1820년, 체사다보딘 왕자는 버마와 싸우기 위해 서쪽으로 군대를 이끌었다. 그는 촘 통에서 군대를 쉬게 했는데, 그곳에서 기존의 촘 통 사원을 전통적인 시암 장식 대신 중국 모티프로 장식된 스투코를 사용하여 중국 양식으로 개조했다. 이 개조는 1831년에 완료되었고, 이 사원은 시노-샴 융합 건축의 원형인 왓 랏차오롯 사원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는 ''Phra Ratchaniyom'' (프라 랏차니욤/พระราชนิยมth) "왕실 선호" 양식이라고 불렸다. 중국화는 라마 3세[157](1824–1851년 재위) 통치 기간에 강력하게 나타났으며, 이 기간 동안 최대 70개의 테라바다 사원이 건설되거나 개조되었고, 그 사원 중 4분의 1이 중국 양식으로 지어졌다.[157] 도입된 중국 요소는 파란색과 흰색 스투코 상감,[159] 화려한 세라믹 모자이크, 세라믹 지붕 및 능선 타일이었다. 박공은 석고로 덮여 있었고 전통적인 나무로 된 금박 힌두 신 장식 대신 세라믹 모자이크로 중국 꽃무늬로 장식되었다.[157] 중국식 탑, 문지기상, 문틀, 유리 그림을 포함한 중국 장식품은 중국에서 수입되어 중국풍 사원에 설치되었다. 잘 알려진 중국식 사찰로는 왓 랏차오롯, 왓 텝티다람, 왓 피차이얏이 있다. 라마 3세 통치 기간에 건설된 왓 아룬의 신 앙코르 양식 ''쁘랑''은 중국식 스투코 모티프로 장식되었으며,[159] 다양한 양식의 융합을 나타낸다. 중국 양식은 1860년대 몽쿳 왕의 통치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9. 1. 3. 서양의 영향
시암은 1855년 보링 조약의 결과로 왕국을 개방하여 시암 미술에 서양의 영향이 유입되었다. 시암 출신 승려 화가인 크루아 인 콩은 서양의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작품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전의 전통적인 시암 회화는 평면적인 표현에 제한되어 있었다. 1850년대에 활동한 크루아 인 콩은 불교 장면과 ''법'' 수수께끼를 묘사하기 위해 서양의 영향을 받은 3차원 스타일을 도입했다. 그의 사찰 벽화에서 크루아 인 콩은 원근법을 적용하고 색상과 명암 기법을 사용하여 서양의 도시 경관을 묘사했다.[160]
프랑스 주교 팔레고익스는 1845년 시암에 다게레오타입 사진을 도입했다. 팔레고익스는 또 다른 프랑스 사제 루이 라르노디에게 파리에서 방콕으로 카메라 장치를 가져오도록 했다.[161] 그러나 시암의 미신적 믿음은 사진이 사람의 영혼을 가둔다는 점에서 사진을 반대했다. 이후 몽쿳 왕은 사진을 받아들였다. 라르노디는 시암 귀족 못 아마티아쿨에게 습판 사진술을 가르쳤는데, 그는 최초의 시암 출신 사진가였고, 시암 가톨릭 신자인 프란시스 칫에게도 가르쳤다.[161] 프란시스 칫은 1863년 쿠디 친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열어 사찰, 궁전, 고위 관리, 풍경, 도시 경관 사진을 제작했다.[161] 칫은 1866년 쿤 쏜톤사티살락이라는 직함으로 공식 왕실 사진사로 임명되었고, 1880년 루앙 아카니 나루미트로 승진했다. 프란시스 칫은 국외 여행에서 왕실 사진사로 쭐랄롱꼰 왕을 수행했다.[161] 칫은 아들을 독일에 사진술을 배우도록 보냈고, 1891년 사망한 후 그의 스튜디오 ''Francis Chit & Sons''는 계속 운영되었다.[161]
9. 2. 언어와 문학
9. 2. 1. 언어 변화

라따나꼬신 왕국의 언어는 타이어였다. 왕실은 크메르어 어휘를 사용하여 왕족에게 사용되는 ''라차삽''이라는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했다.[162] 또 다른 특별한 어휘는 승려들에게 사용되었다. 타이 문자는 역사 연대기, 정부 법령, 개인 시를 포함한 세속적인 문제를 기록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크메르 문자의 변형인 콤 타이 문자는 트리피타카를 포함한 불교 팔리어 텍스트를 기록하는 데 사용되었다. 토착 시암인은 시암어를 사용했다. 다른 언어는 란나어의 란나, 라오어의 라오스 및 코랏 고원, 남부 술탄국의 말레이어 및 기타 소수 언어를 포함하여 민족 이민자 또는 조공 국가의 사람들이 사용했다. 중국 이민자의 언어는 조주어와 민남어였다. 민족 이민도 시암어에 영향을 미쳤다. 많은 남부 민어 어휘가 태국어에 유입되었다. 중국 차용어는 두 개의 새로운 성조 부호, 즉 중국어 성조를 전달하기 위해 중국어 단어에만 사용된 ''마이 트리''와 ''마이 차타와''의 발명을 촉진했다.[163] ''마이 트리''와 ''마이 차타와''는 18세기 중후반에 처음 등장했다.[163]
19세기 중반 종교 개혁 동안 몽꿋 왕은 크메르 문자가 신성하고 마법적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준다는 이유로 종교 작품에서 콤 타이 문자 사용을 장려하지 않았고, 승려들에게 불교 경전을 기록하는 데 타이 문자를 사용하도록 명령했다. 몽꿋은 또한 전통적으로 야자 잎에 새기는 대신 트리피타카 인쇄를 촉진하기 위해 1841년경에 로마자에서 영감을 얻은 '아리야카 문자'를 발명했지만, 널리 사용되지는 못했고 결국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1893년에야 타이 문자로 된 팔리어 경전 전체 세트가 처음으로 인쇄되었다.[164]
9. 2. 2. 전통 문학
초기 방콕 시대의 샴 왕실은 전쟁으로 유실된 왕실 서사시와 연극을 복원하려 했다. 라마 1세와 라마 2세 국왕은 직접 ''라마키엔''(인도 서사시 라마야나를 각색)과 이나오(자바 판지 이야기의 태국 버전)를 포함한 왕실 연극을 쓰고 개작했다.[165][166] 국왕의 작품은 ''프라 라차니폰''(프라 라차니폰/พระราชนิพนธ์th)이라고 불렸다.[167] ''라콘 나이''[168](라콘 나이/ละครในth)로 알려진 정교한 왕실 연극은 왕실 궁정만을 위해 특별히 제작되었으며, 왕실의 휘장 역할을 하는 여성 배우들이 공연했다.[169] 반면에 평민들을 즐겁게 하고 남성 극단이 공연하는 통속적이고 활기찬 ''라콘 녹''[168](라콘 녹/ละครนอกth)과는 대조적이었다.[169] ''크롬 아락'' 또는 왕실 서기관 부서는 왕실의 감독하에 저명한 궁정 시인과 학자들을 배출했다.[167] 전통적인 샴 논픽션 장르는 불교와 역사적 주제를 포함했다. 차오프라야 프라클랑 혼[167]은 중국의 삼국지연의와 미얀마의 ''라자다릿 아예다본''을 산문 작품인 ''삼곡''과 ''라차티랏''으로 번역한 것으로 유명하다.[165] 이 작품들은 외국에서 유래되었지만 태국 문학에 포함되어 독특하게 태국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며 많은 현지 샴 전설을 포함했다. 1851년부터 1853년까지 ''상가라자''인 포라마누치트 왕자는 도덕적 교훈을 이야기하는 태국 베산타라 자타카의 새로운 버전인 ''사뭇타콧캄찬'', 여성들을 위한 도덕을 이야기하는 ''크리슈나는 그의 여동생을 가르친다'', 그리고 나레수안 국왕의 버마-샴 전쟁을 묘사한 ''릴릿 탈렝 파이''(1832)를 포함한 광범위한 교육 문학을 제작했다.[166][167] 전통적인 태국 문학은 다른 시대보다 처음 세 번의 통치 기간 동안 더 많이 제작되었다.[167]

라마 2세(재위 1809–1824)는 샴 시를 숭상하는 위대한 후원자였으며 그의 치세는 "태국 문학의 황금기"로 여겨졌다.[166][170] 그의 궁정에는 많은 작가들이 있었으며 훌륭한 문학 작품을 쓸 수 있는 귀족들은 왕실의 총애를 얻었다고 한다. '시인 왕'으로 불린 라마 2세[170]는 개인적으로 많은 작품을 썼고 상 통의 새로운 버전[166]을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왕은 능숙한 음악가였으며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작곡했으며 새로운 기법을 도입했다. 그는 조각가이기도 했으며 왓 아룬에 있는 니라미트 부처의 얼굴을 조각했다고 한다. 왕실 시인 중 가장 저명한 인물은 순톤 푸 (1786–1855)로, 그는 가장 뛰어난 궁정 시인 중 한 명으로 왕실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순톤 푸는 이전에 그에게 불만을 품었던 라마 3세가 즉위한 1824년에 불운을 겪었다. 푸는 결국 왕실 궁정을 떠나 방랑자와 술꾼이 되었다. 순톤 푸가 가장 유명한 작품을 쓴 것은 불행한 시절이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걸작은 ''프라 아파이 마니''로, 30,000행이 넘는[171] 해상에서 용감한 모험을 추구하기 위해 왕국을 떠난 바람둥이 왕자의 이야기를 담은 시적 작품이다. 순톤 푸는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여정을 묘사하는 많은 ''니랏''을 제작했다.[172] 여기에는 니랏 므앙 클랭(아버지의 고향인 클랭으로의 여행, 1806–07),[172] 니랏 프라 밧(프라 풋타밧으로의 여행, 1807),[171] 니랏 푸카오통(아유타야로의 여행, 1828), 니랏 수판(수판부리로의 여행, 1831), 니랏 프라 파톰(프라 파톰 체디로의 여행, 1842)과 니랏 므앙 펫(펫차부리로의 여행, )이 있다. 순톤 푸의 위대함은 그의 문학적 범위, 그의 훌륭한 창의력, 그리고 세련된 형식에 국한되지 않은 자연주의였다.[172] 푸의 진실한 언어, 진정성, 현실주의는 그의 작품을 대중에게 호소력 있게 만들었다.[172]
9. 3. 교육
근대 이전의 시암에는 대학교와 같은 공식적인 교육 기관이 없었다. 시암의 전통 교육은 불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소년들은 사원에 가거나 수습 승려가 되어 승려들로부터 태국어와 빨리어를 배웠는데, 승려들은 종교 활동의 일환으로 무료로 개인 교습을 제공했다. 왕자들과 젊은 귀족들은 훌륭한 사찰에서 고위 승려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소녀들은 문맹으로 여겨졌고, 요리 및 자수와 같은 가정 예술을 배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여성의 교육이 제한된 것은 아니었고, 상류층 여성은 문해력을 높일 기회가 더 많았다. 라타나코신 초기에는 몇몇 저명한 여성 작가들이 있었다. 장인 기술과 예술 기술은 동일한 가족 또는 지역 사회 내에서 내부적으로 가르쳐졌다.근대 이전의 시암에서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고등 교육은 불교 빨리어 교리 학습, 즉 '''파리얏탐'''(ปริยัติธรรมth)이었다. 승려들은 교회 관료주의에서 승진하기 위해 시험을 보았다. 아유타야 왕국에서 물려받은 세 단계의 '''파리얏탐''' 시험이 있었고, 각 단계는 '''파리안'''[173](เปรียญth)이라고 불렸다. 1810년대에는 세 단계의 '''파리안'''이 아홉 단계의 '''파리안'''으로 재편성되었다. '''파리얏탐''' 시험은 불교를 지지하기 위해 빨리어 학습을 장려한 왕실에서 주관했으며, 일반적으로 에메랄드 부처 사원에서 개최되었다. 시험에는 심사 승려 앞에서 빨리어 교리를 번역하고 구두 암송하는 것이 포함되었다[173].'''파리얏탐''' 시험은 승려가 지적 추구와 수도 계급에서 승진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라마 3세는 1831년부터 1841년까지 왓 포에서 불교 교리, 전통 의학, 문학, 지정학을 포함한 전통적인 태국 종교 및 세속 예술을 석비에 새기도록 명령했다. 왓 포의 금석문 기록 보관소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의 기억으로 인정받았으며, 현대 교육과 더 유사한 자료의 예시이다. https://en.unesco.org/sites/default/files/thailand_epigraphic.pdf 왓 포의 금석문 기록 보관소 (외부 링크)
라마 6세는 시암에서 두짓 궁전에 헌법 모델을 처음으로 세운 국왕이었다. 그는 먼저 이 서구식 체제 하에서 어떻게 운영될 수 있는지 보고 싶어 했다. 그는 이 체제의 장점을 보았고, 시암이 서서히 이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대부분의 시암인들이 그러한 변화를 이해할 만큼 충분한 교육을 아직 받지 못했기에 즉시 채택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1916년에는 고등 교육이 시암에 도입되었다. 라마 6세는 영국 이튼 칼리지를 모델로 한 와치라웃 칼리지와 옥스브리지를 모델로 한 최초의 태국 대학교인 쭐라롱껀 대학교[174]를 설립했다.
9. 3. 1. 교육 개혁
라마 6세는 시암에서 두짓 궁전에 헌법 모델을 처음으로 세운 국왕이었다. 그는 먼저 이 서구식 체제 하에서 어떻게 운영될 수 있는지 보고 싶어 했다. 그는 이 체제의 장점을 보았고, 시암이 서서히 이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대부분의 시암인들이 그러한 변화를 이해할 만큼 충분한 교육을 아직 받지 못했기에 즉시 채택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1916년에는 고등 교육이 시암에 도입되었다. 라마 6세는 영국 이튼 칼리지를 모델로 한 와치라웃 칼리지와 옥스브리지를 모델로 한 최초의 태국 대학교인 쭐라롱껀 대학교[174]를 설립했다.9. 4. 복식
아유타야 시대와 마찬가지로, 태국 남녀 모두 총 크라벤이라고 불리는 허리 덮개로 옷을 입었다. 남성은 허리에서 허벅지 중간까지, 여성은 허리에서 무릎 아래까지 ''총 크라벤''을 착용했다.[175] 맨 가슴과 맨발은 태국 정장의 일부로 받아들여졌으며, 1800년대 중반까지 벽화, 삽화 필사본, 초기 사진에서 관찰된다.[175] 아유타야의 두 번째 몰락 이후, 중앙 태국 여성들은 크루컷 스타일의 짧은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고, 이것은 1900년대까지 국가적인 헤어스타일로 남았다.[176] 20세기 이전에는 태국 의복에서 계급을 구별하는 주요 표시는 인쇄 또는 직조된 무늬가 있는 면과 실크 천의 사용이었지만, 평민과 왕족 모두 바느질하지 않은 천으로 옷을 입었다.[177]1860년대부터 태국 왕족들은 "기계적으로 재현된 이미지를 통해 국내 및 국제적으로 홍보된 현대적인 인물을 만들기 위해 빅토리아 시대의 육체적, 복식적 에티켓을 선택적으로 채택했다."[177] 궁정 복장과 의례복을 포함한 바느질된 의복은 쭐라롱껀 국왕 시대에 발명되었다.[177] 이 시기에 방콕의 도시 거주자들 사이에서 서양식 의복이 인기를 얻었다.[177]

1900년대 초, 라마 6세 국왕은 태국 여성들에게 전통적인 짧은 머리 대신 긴 머리를 하고, 천 랩인 () 대신 튜브 스커트인 (ผ้าซิ่น|th)을 착용하도록 장려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178]
10. 군사
1767년 버마 전쟁과 아유타야 왕조의 멸망 이후, 태국군은 덜 방어적인 전략과 효과적인 인력 통제를 통해 전통적인 적들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외교 및 개인 구매를 통해 서방식 플린트락 총기를 획득하는 것이 중요했다.[154]
전시에는 문무를 막론하고 모든 조정 관리와 대신들이 군대를 이끌었으며, 국왕을 최고 사령관으로 하는 전쟁 지휘 계층으로 전환되었다. 전쟁 수행을 규제하는 계엄령이 있었고, 패배한 장군은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전투 전에는 브라만교 의식이 거행되었고, 군대는 성수로 축복받았다.
초기 방콕 시대의 태국군은 주로 징집된 민병대로 구성되었으며, 전문적인 정규군인 ''Krom Asa''()도 존재했지만 역할이 축소되었다. 칼, 창, 투창 또는 매치락 총으로 무장한 ''프라이'' 민병대 보병이 주축이었으며, 연대는 사회적 계층에 따라 구성되었다. 왕실 정예 부대의 말을 관리하는 ''Krom Phra Asawarat''()와 왕실 코끼리를 돌보는 ''Krom Khotchaban''()이 있었다.
참-말레이인 연대인 ''Krom Asa Cham''()과 몬족 연대와 같이 특별한 임무가 할당된 민족 연대도 있었다. 몬족 연대는 버마와의 국경 감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세기 포르투갈은 머스킷총 아르케부스를 시암에 도입했고,[153] 포르투갈인과 다른 유럽인들은 ''크롬 파랑 마엔 푼''(กรมฝรั่งแม่นปืนth)이라는 아르케부스병 연대에 자리를 채웠다. 이후 화기 사용은 토착 시암 병사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나라이 왕 통치 시기인 17세기에 시암은 프랑스 군인들로부터 플린트락 머스킷을 접했다.[153] 플린트락 머스킷은 머스킷총 아르케부스에 비해 두 배의 발사 빈도를 보였으나,[153] 희귀하여 서양인으로부터 구매를 통해 획득했다. 영국 상인 프란시스 라이트는 시암 궁정에 화기를 공급하는 주요 공급자였으며, 1785년 아홉 군대 전쟁 동안 탈랑의 방어군에게 머스킷을 제공하고, 1,400정의 머스킷을 시암 궁정에 제공하여 프라야 라차 카피탄의 칭호를 받았다.[154] 왕실은 시암에서의 화기 거래를 엄격하게 통제했다.[155]
시암인들은 아유타야 시대부터 자체적으로 대포를 주조할 수 있었다.[153] 토착 시암의 대형 전장식 대포는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차롱''(จ่ารงค์th)이라고 불렸다. ''바리암''(บาเรียมth) 대포는 유럽에서 생산된 주철 대포였다. 라마 3세 치세에 시암인들은 중국인으로부터 소형 주철 대포를 생산하는 법을 배웠다. 1834년에는 코친차이나 출신의 기독교 베트남인들이 방콕으로 이주하여 대포와 머스킷을 전문으로 하는 베트남 화기 연대를 결성했다.
1807년, 시암에는 총 2,500문의[155] 대포가 있었고, 1827년 시암의 총 화기 수는 57,000정이 넘었다.[155]
1852년 이전의 샴은 정규 해군을 보유하지 않았다. 해상전이 시작되면 당국은 토착 샴 강선을 수집하고, 서양 갤리선이나 중국 정크선을 동원했다. 해군은 해군 지식을 갖춘 ''Krom Asa Cham''에 의해 운용되었다. 해군 사령관은 ''Krom Asa Cham''의 지도자인 프라야 라차왕산 또는 통상부 장관인 프라클랑이었다.
1820년대 영국과 베트남의 세력이 커지면서 샴은 해상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해군 준비에 나섰다. 샴 군함은 기본적으로 ''차롱'' 대포를 장착한 중국 정크선이었다. 1820년대에 차오 프라야 나콘 노이는 뜨랑에 자신의 조선소를 유지했다. 1828년, 나콘 노이는 서양식 돛대를 장착한 증강된 중국 정크선을 건조했다. 1835년, 추앙 분낙은 최초의 토착 브리그선인 ''아리엘''을, 이사렛 왕자는 1836년에 바크선인 ''페어리''를 건조했다. 그러나 바크선과 브리그는 이미 19세기 중반 증기선의 등장으로 구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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