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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드퍼드 올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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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드퍼드 올콕은 1809년 런던에서 태어난 외교관으로, 영국군 군의관, 푸저우, 상하이, 광저우 영사를 거쳐 초대 주일 총영사 및 특명전권공사로 활동했다. 그는 일본에서 영일수호통상조약 비준 및 요코하마 개항에 기여했으며, 후지산 등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청나라 주재 공사로 활동했으며, 외교관 은퇴 후에는 왕립지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올콕은 일본 미술에 대한 관심을 높였으며, 저서 '대군의 수도'를 통해 일본 문화와 사회를 서구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1897년 런던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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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드퍼드 올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876년 ~ 1884년 사이에 촬영된 올콕
1876년 ~ 1884년 사이에 촬영된 올콕
이름러더퍼드 올콕 경
출생일1809년 5월
사망일1897년 11월 2일
사망지영국 런던
국적영국
직업외교관
경력의사, 주 청나라 대사, 주일 대사

2. 생애

1809년 런던 근교 일링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의학을 공부했다. 영국군 군의관으로 이베리아반도 등에서 복무했으나, 관절염으로 외과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1844년 외무성에 들어가 외교관이 되었다.

같은 해 청나라 푸저우 영사로 임명되어 아편 전쟁 이후 개항된 항구에서 외교 업무를 시작했다.[1] 이후 상하이, 광저우 영사를 역임하며 조계 관리, 영사 재판권 행사 등 불평등 조약에 따른 영국의 이익 관철에 힘썼다. 특히 상하이 영사 시절에는 영국 정부에 청나라에 대한 무력 행사를 건의하여 제2차 아편 전쟁 발발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1858년 영일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초대 주일 총영사(후에 특명전권공사로 승격)로 임명되어 1859년 일본에 부임했다.[6] 에도 다카나와의 도젠지에 영국 공사관을 열고 개항 관련 업무를 처리했으나, 당시 고조되던 양이(攘夷) 운동으로 인해 신변의 위협을 겪었다. 1861년에는 공사관이 양이파 낭인들의 습격을 받는 제1차 도젠지 사건을 겪기도 했다. 일본 내 양이 세력을 억누르고 영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1864년 시모노세키 포격 사건을 주도했으나, 이 독단적인 결정으로 인해 영국 본국 정부에 의해 소환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그의 외교 정책이 부당하지 않았음이 인정되었으나 일본 귀임 요청은 거부되었다. 대신 1865년 청나라 주재 공사로 임명되어 1869년까지 베이징에서 근무했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왕립 지리학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으며, 일본 미술과 문화에 대한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1897년 런던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809-1837)

1809년, 런던 서부 근교의 일링에서 의사 토마스 올콕 박사와 그의 아내 메리의 아들로 태어났다.[2][3][1]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북부의 친척 집에 맡겨졌다가, 15살 때 아버지에게 돌아가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웨스트민스터 병원과 웨스트민스터 안과 병원에서 1년간 교육을 받은 뒤, 1828년까지 파리에 유학하여 해부학, 화학, 자연사를 배웠다. 또한 프랑스어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어를 습득했으며,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조각가의 아틀리에에 다니며 조각의 기초를 배우기도 했다. 런던으로 돌아온 뒤에는 앞서 교육받았던 두 병원에서 레지던트(수련의)로 2년을 보냈고, 1830년에 왕립 외과 학교에서 외과 개업의로서 면허를 얻었다.

1832년부터 4년간은 영국군 군의관이 되어, 전란 중이던 이베리아반도에 부임했다. 특히 1836년에는 스페인에서 일어난 카를리스타 전쟁에 참전한 해병 여단의 외과 의사로 복무하며 공로를 인정받아 명성을 얻었고, 병원 부감찰관이 되었다.[1] 그는 1837년에 이 직무에서 은퇴했다.

2. 2. 청나라에서의 외교 활동 (1844-1858)

아편 전쟁 이후 난징 조약 체결로 청나라의 5개 항구가 개항되자, 올콕은 1844년 푸저우 영사로 임명되었다.[13] 잠시 샤먼에서 머문 뒤, 조약 항구인 푸저우에서 본격적인 영사 업무를 시작했다. 당시 푸저우는 난징 조약에 따라 개방된 항구 중 하나였으며, 올콕은 이곳에서 "영국 대법관에서 보안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스스로 표현할 만큼 광범위한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불평등 조약에 규정된 조계 관리, 영사 재판권 행사 등 복잡한 외교 업무를 처리하며 성과를 거두었고, 1846년 가을, 아내 헨리에타, 처제 엠마 S. 베이컨, 장모 베이컨 부인과 함께 상하이로 이주하여 상하이 영사로 승진했다.

상하이에서 올콕은 급증하는 영국, 프랑스, 북미 출신 외국인 커뮤니티를 관리하고, 영국 상업 활동의 거점이 될 영국 거류지를 설립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중국 정부를 감독하는 특별 임무를 맡았으며, 거류지 내 질서 유지와 발전에 힘썼다. 또한, 상하이 성공회 교회를 설립하는 과정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1853년 3월 아내 헨리에타가 사망하고, 같은 해 태평천국의 난이 상하이에 도달하면서 도시는 혼란에 빠졌다. 상하이는 반군에게 포위 공격을 당했으며, 이러한 상황은 1855년 2월까지 이어졌다. 올콕은 그해 4월까지 상하이에 남아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1855년, 그는 광저우 영사로 전임되었다. 광저우는 1840년대부터 외국과의 마찰이 잦았던 지역이었으나, 올콕은 이곳에서 약 1년간 근무했다.

올콕은 중국에서의 시장 개척을 위해 청나라와의 추가적인 전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특히 상하이 영사로 재직하던 시절, 그는 영국 총리 파머스턴 자작에게 청나라에 대한 무력 행사를 건의하는 서한을 보냈으며, 이는 1856년 발발한 제2차 아편 전쟁(애로우 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14]

1856년 10월, 광저우에서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기 직전, 올콕은 휴가를 받아 영국으로 귀국했다. 이로써 그의 15년에 걸친 중국에서의 첫 외교 활동 기간이 마무리되었다.

2. 3. 일본에서의 외교 활동 (1858-1864)

1858년, 엘긴 백작 제임스 브루스가 일본을 방문하여 영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고, 이에 따라 1859년 7월 1일부터 나가사키, 가나가와, 하코다테 세 항구를 개항하기로 약속되었다.[15] 올콕은 극동 지역에서의 오랜 경험과 능력을 인정받아, 1859년 3월 1일부로 초대 주일 총영사로 임명되었다.[6][15]

올콕은 5월 3일 홍콩에서 임명장을 받고, 5월 16일 홍콩을 출발하여 상하이를 거쳐 6월 4일 나가사키에 도착했다.[16] 그는 영일수호통상조약 비준서를 7월 1일 이전에 교환하라는 지시를 받았기에, 6월 20일 나가사키를 떠나 6월 26일 시나가와 앞바다에 도착하여 다카나와의 도젠지에 머물렀다.

막부 측은 올콕 일행의 도착을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지만, 협상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어 7월 11일 일행은 에도성에 가서 비준서를 교환했다. 이에 앞서 7월 6일, 올콕은 도젠지에 임시 영국 총영사관을 열고[17] 막부에 군마 매각을 요청하는 등 활동을 시작했다. 7월 1일에는 개항 예정지인 가나가와를 시찰했는데, 실제 개항지로 지정된 곳은 건너편의 요코하마임을 알게 되었다.[18] 올콕은 실용적인 측면에서 요코하마가 더 유리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조약 준수를 요구했고, 결국 영사관을 가나가와의 조타쿠지에 설치하는 선에서 타협했다.[19]

1859년 9월부터 10월까지는 또 다른 개항지인 하코다테를 여행했으며, 12월 23일에는 특명전권공사로 승격되었다.

1860년 9월 11일, 올콕은 오미야·무라야마구치 등산로를 통해 후지산을 등반했는데, 이는 기록상 외국인 최초의 후지산 등정이었다.[21][22] 그는 등반 후 아타미를 방문했으며, 이때의 기념비와 그의 애견 토비의 묘가 현재 아타미에 남아 있다.[23][24][25]

올콕은 당시 일본의 농촌 풍경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이 잘 경작된 골짜기 땅에서 사람들이 행복가득한 좋은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이 압제에 고통받으며 가혹한 세금을 징수당하고, 고통 받는 곳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유럽은 이렇게 행복하고, 형편이 좋은 농부는 없고, 또한 그렇게 온화하고 비옥한 토지도 없다고 생각한다."[20]

그러나 동시에 일본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서구 우월주의적이고 편견에 찬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 "그들은 우상숭배자요, 이교도이며, 축생처럼 하나님을 믿는 않고 죽는 저주받은 영겁의 벌을 받은 사람들이다. 짐승처럼 신앙은 없고 사후의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도 없이 죽어가는 것이다. 시인, 사상가와 정치가와 재능있는 예술가로 구성된 민족의 일원인 우리에 비해 일본인은 열등 민족이다."

그는 일본 사회의 발전을 서구 사회와 비교하며 "작은 잔과 큰 잔은 똑같이 채워질 수 있지만, 큰 잔은 작은 잔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다"는 비유를 통해 일본 사회의 '왜소함'을 지적하고, 일본인을 "능력의 발전이나, 각성을 얻지 못한 채 휴면 상태에 놓여, 멸종 위기 동물과 같은 상태에 있는 이교도나 상 숭배자들"의 국가로 묘사하며 문명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28]

당시 일본에서는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攘夷)이 높아 외국인 거주자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1860년, 올콕의 현지 통역사가 공사관 정문에서 살해되었고, 1861년 1월 14일에는 미국 공사 타운젠드 해리스의 통역 헨리 휴스켄이 양이파 낭사들에게 습격당해 다음 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올콕은 외국인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막부에 항의하며 외교단을 요코하마로 철수시킬 것을 제안했으나, 해리스는 반대했다. 결국 올콕은 프랑스 공사 귀스타브 뒤셰느 드 베르크루와 함께 요코하마로 이동했다가 한 달 뒤 에도로 복귀했다.[26] 이 사건을 계기로 올콕과 해리스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27]

1861년 4월 하순, 올콕은 모스 사건 처리를 위해 홍콩에 머물던 중 러시아 군함 대마도 점령 사건 보고를 받고, 영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 제임스 호프와 협의하여 군함 2척을 대마도에 파견해 정찰하게 했다. 5월 후반 나가사키에 도착한 올콕은 6월 1일부터 세토 내해와 육로를 거쳐 34일간 일본 내륙을 여행하고 7월 4일 에도로 돌아왔다.

1861년 에도 도젠지에서 발생한 영국 공사관 공격.


1861년 7월 5일 도젠지에서 발생한 영국 공사관 공격.


돌아온 다음 날인 7월 5일, 미토 번 출신 양이파 낭사 14명이 다카나와의 도젠지 영국 공사관을 습격하는 제1차 도젠지 사건이 발생했다. 올콕은 무사했지만, 일등 서기관 로렌스 올리펀트와 나가사키 영사 조지 모리슨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올콕은 영국 수병의 공사관 주둔을 막부로부터 인정받았고, 영국 군함이 요코하마에 상주하게 되었다. 8월 13일, 호프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일본을 방문하자, 다음 날 올콕은 호프와 함께 막부에 영국 함대의 압력을 이용해 대마도의 러시아 군함을 철수시킬 것을 제안했고 막부는 이를 수용했다. 9월 19일, 러시아 군함은 대마도에서 철수했다.

8월 14일과 15일, 올콕, 호프, 올리펀트(부상으로 귀국 예정)는 막부의 노중 안도 노부마사, 와카도시요리 사카이 다다즈미와 비밀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을 통해 올콕은 막부의 권력이 약화된 실태를 파악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올콕은 막부의 니가타, 효고 및 에도, 오사카 개항 연기 요청을 거부했으나, 회담 이후 연기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막부가 파견할 예정이던 견구 사절단 파견을 적극 지원하기로 입장을 바꾸었다. 올콕은 1862년 런던 만국 박람회에 사절단이 초대 손님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주선하고, 자신의 휴가 귀국을 이용해 영국 정부에 직접 개항 연기를 설득하기로 했다.

1862년 1월 21일 사절단이 일본을 떠났고, 올콕은 3월 23일 휴가를 위해 영국으로 출발했다. 귀국 직전인 3월 16일과 17일에는 노중 수좌 구제 히로치카(안도 노부마사는 사카시타몬 밖의 변으로 부상 중)와 비밀 회담을 갖고 일본 정세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했다. 5월 30일 런던에 도착한 올콕은 개항 연기 협상을 지원했고, 6월 6일 5년간의 개항 연기를 인정하는 런던 각서가 조인되었다. 귀국 중이던 6월 19일, 올콕은 바스 훈장을 수여받고 기사 작위(Sir)를 받았다. 휴가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 《대군의 도읍》(The Capital of the Tycoon)을 집필하여 1863년 런던에서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일본의 아름다움과 생활상을 상세히 묘사하면서도, 에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구 군대가 일본을 점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과 함께 일본 사회와 문화에 대한 서구 우월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약 2년의 휴가를 마치고 1864년 봄 일본에 복귀했을 때, 일본의 상황은 급변해 있었다. 올콕의 부재 중 나마무기 사건과 그 보복으로 인한 사쓰에이 전쟁이 발발했고, 조슈 번의 외국 선박 포격으로 간몬 해협 통항이 불가능해지는 등 양이 운동이 격화되었다. 막부 역시 양이파를 달래기 위해 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을 유럽에 파견한 상태였다.[29]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올콕은 시코쿠 함대 시모노세키 포격 사건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조슈 번의 양이 활동을 응징하고 서구 열강의 위신을 세우고자 했으나, 이 강경책은 영국 본국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결국 영국 외무장관 존 러셀은 올콕의 행동을 문제 삼아 그에게 귀국 명령을 내렸다.[30] 주일 공사 자리는 과거 청나라에서 그의 부하였던 해리 파크스가 이어받게 되었다.

올콕은 1850년대와 1860년대 일본에서 디르크 데 흐라프 판 폴스브로에크, 타운센드 해리스, 막스 폰 브란트, 귀스타브 뒤셰느 등 다른 서구 외교관들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기도 했지만, 각국의 이해관계와 일본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로 인해 갈등과 반목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개항 초기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상호 협력의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다.[7]

2. 4. 청나라 공사 재임과 은퇴 이후 (1865-1897)

일본에서의 임무를 마친 후, 올콕의 외교 정책에 대한 타당성이 인정되어 일본으로의 귀임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대신 1865년에는 당시 아시아 주재 영국 외교관 중 가장 높은 지위였던 청나라 주재 공사로 임명되어 1869년까지 베이징에서 근무했다.

1869년 외교관 생활을 은퇴한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수년간 왕립 지리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여러 정부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런던에서 열린 1862년 국제 박람회의 일본 공식 전시를 준비했는데, 여기에는 그의 개인 소장품도 포함되었다. 이 전시는 서양 미술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장식 미술 분야에서 영국 자포니즘과 영일 양식(Anglo-Japanese style)의 시작점으로 여겨진다. 또한 1882년부터 1893년까지 영국령 북보르네오 차터 회사(British North Borneo Chartered Company)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올콕은 여러 저서를 남겼으며, 영국 내에서 일본 미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했으며 직접 교재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1863년에 출간된 ''The Capital of the Tycoon'' (타이쿤의 수도, 여기서 타이쿤은 쇼군을 의미)이다. 이 책은 미카도교토에 있던 시기에 쓰였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부인 헨리에타 메리 베이컨(Henrietta Mary Bacon)과는 1841년 결혼했으나 1853년 사별했다. 1862년 7월 8일, 존 로더(John Lowder) 목사의 미망인이었던 루시 로더(Lucy Lowder, 결혼 전 성은 윈저(Windsor))와 재혼했다. 루시는 1899년 3월 13일에 사망했다.

1897년 11월 2일 런던에서 사망했으며, 잉글랜드 서리주 머스텀에 있는 세인트 캐서린 교회 묘지에 루이스 펠리(Lewis Pelly) 경 옆에 묻혔다.

러더퍼드 올콕의 무덤, 머스텀의 세인트 캐서린 교회.

3. 일본 문화와 사회에 대한 평가

러더퍼드 올콕은 저서 『대군의 도시』(The Capital of the Tycooneng)를 통해 당시 일본의 사회와 문화를 서양에 소개했다. 이 책은 그가 에도 막부 말기 일본에 3년간 체류하며 관찰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일본인의 생활, 사회상, 문화에 대한 그의 독자적인 시각과 평가가 드러난다.

올콕은 일본 농촌의 풍요로움과 주민들의 생활 모습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 이 잘 경작된 골짜기 땅에서 사람들이 행복 가득한 좋은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이 압제에 고통받으며 가혹한 세금을 징수당하고, 고통 받는 곳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유럽은 이렇게 행복하고, 형편이 좋은 농부는 없고, 또한 그렇게 온화하고 비옥한 토지도 없다고 생각한다.

> -- 러더퍼드 올콕, ''대군의 도시''

또한 그는 1860년의 일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했다.

> "평화, 풍요, 겉보기에 만족스러운 모습, 그리고 잉글랜드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경작되고 관리되며, 도처에 관상용 목재가 많은 국가"[8]

> -- 러더퍼드 올콕 경, 1860년

그러나 마쓰바라 히사코에 따르면, 올콕은 당시 서구 중심적인 시각에서 일본인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 그들은 우상숭배자요, 이교도이며, 축생처럼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죽는 저주받은 영겁의 벌을 받은 사람들이다. 짐승처럼 신앙은 없고 사후의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도 없이 죽어가는 것이다. 시인, 사상가와 정치가와 재능있는 예술가로 구성된 민족의 일원인 우리에 비해 일본인은 열등 민족이다.

『대군의 도시』에서 올콕은 일본의 기술력과 문화 수용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 「그들(일본)의 문명은 고도의 물질 문명이며, 모든 산업 기술은 증기의 힘이나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한계까지 완성도를 보인다. 거의 무한정 얻을 수 있는 저렴한 노동력과 원료가 증기의 힘과 기계를 보완하는 많은 이점을 제공하는 듯하다. (중략) 그들이 지금까지 도달한 것보다 더 고도하고 더 훌륭한 문명을 받아들일 능력은 중국인을 포함한 다른 어떤 동양의 국민의 능력보다 훨씬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 -- 러더퍼드 올콕, 1863년 『대군의 도읍』에서

그는 일본인이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해 중국인과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일본인은 중국인과 같은 어리석은 자만심을 그다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물론 외국 제품을 모방하거나 거기에서 힌트를 얻는 일이 있을 것이다. 중국인은 그 자만심 때문에 외국 제품의 우수성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려고 한다. 반대로 일본인은 어떤 점에서 외국 제품이 뛰어난지, 어떻게 하면 자신들도 훌륭한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하는 것을 찾아내는 데 열심이며, 또한 빠르다."

일본인의 손재주와 예술적 감각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했다.

> "일본인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솜씨 좋은 대목수이며, 가구장이이며, 통장이일 것이다. 그들의 통, 욕조, 바구니는 모두 완벽한 세공의 견본이다. (중략) 칠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다. 이 제품의 창시자는 아마도 일본인이며, 아시아에서도 유럽에서도 이에 필적하는 것은 아직까지 없었다. (중략) 일본인은 매우 간단한 방법으로, 그리고 가능한 한 시간과 돈,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가능한 한 큰 결과를 얻고 있는데, 아마도 이러한 경우의 놀라운 천재성은 일본인의 가장 칭찬할 만한 점일 것이다."

> "인물화나 동물화에서는 붓으로 그린 습작을 다소 소유하고 있는데, 매우 생생하고 사실적이며, 이처럼 선명하게 드러나는 확실한 터치와 경쾌한 붓놀림은 우리 시대 최고의 화가들조차 부러워할 정도이다."

올콕은 일본 문명의 독특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 "일본인의 외부 생활, 법률, 습관, 제도 등은 모두 일종의 독특한 것이어서 항상 뚜렷하게 인정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중국풍도 아니고 유럽적이지도 않으며, 또한 그 양식은 순수하게 아시아적이라고도 할 수 없다. 일본인은 오히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쇠사슬 역할을 했던 고대 세계의 그리스인처럼 보인다. 그들의 가장 뛰어난 성질의 어떤 점에서는 유럽 민족과 아시아 민족 어느 쪽에도 뒤지지 않는 위치에 놓이기를 요구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양 민족의 가장 나쁜 특질도 신기하게 함께 가지고 있다."

그는 당시 일본의 정치 체제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분석했다.

> "모든 직책이 이중으로 되어 있다. 각자가 서로 감시하며, 감시받고 있다. 전체 행정 기구가 복수제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긍정된 마키아벨리즘의 원칙에 따라, 사람을 견제하고, 반대로 견제받는 제도의 가장 세심한 체제가, 이 곳에서는 세부적인 점에 대해서도 정밀하고 완전히 발달해 있다."

일본인의 국민성에 대해서는 모순적인 면모를 지적하기도 했다.

> "우리가 첫 번째로 알아야 할 것은, 이상하게 자기 비하를 하는 (일본인의) 경향과 개인주의 및 자기 주장이 어느 정도 결여되어 있다는 점인데,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국민성 속에 있는 어떤 것과는 매우 반대된다. 일본인은 자신의 종족이나 국가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신의 위엄을 존중하며, 모든 관습과 에티켓이 규정하는 것을 게을리하거나 거부함으로써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경멸이나 모욕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들은 의례적이고 딱딱한 국민이다. 그들이 경멸이나 모욕에 민감한 것과 정확히 비례하여, 타인을 화나게 하거나 타인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매우 신경을 쓴다."

또한 일본인의 위생 관념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 "오랜 경험으로 볼 때, 일반적으로 일본인은 청결한 국민이며,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주 몸을 씻고(알몸으로 있어도 별로 비난받지 않는다), 몸에 걸치는 것은 얼마 되지 않으며, 통풍이 잘 되는 집에 살고, 그 집은 넓고 통풍이 잘 되는 거리에 면해 있으며, 또한 그 거리에는 불쾌한 것은 아무것도 놓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것을 나는 감히 꺼리지 않는다. 모든 청결함에 있어서는 일본인은 다른 동양 민족보다 훨씬 뛰어나며, 특히 중국인보다 뛰어나다. 중국인의 거리를 보면, 보는 눈과 냄새 맡는 코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한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중략) 그들은 분명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국민임에 틀림없다. 이 점은 우리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든 그들의 위대한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4. 올콕의 유산과 영향



공식적인 외교관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올콕은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수년간 왕립 지리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여러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특히 런던에서 열린 1862년 국제 박람회의 일본 공식 전시 준비를 맡았는데, 여기에는 그의 개인 소장품도 포함되었다. 이 전시는 서양 미술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영국 자포니즘과 영일 양식 유행의 시작점으로 여겨진다. 이를 통해 올콕은 서구 사회에 일본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2]

또한, 1882년부터 1893년까지 영국령 북보르네오 차터 회사의 회장을 역임하며 경제 활동에도 관여했다.

올콕은 여러 저서를 남겼으며, 영국 내에서 일본 미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는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했으며 직접 교재를 저술하기도 했다.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저서는 1863년에 출간된 ''The Capital of the Tycoon: A Narrative of a Three Years' Residence in Japaneng''(쇼군의 수도)으로, 당시 미카도교토에 머물던 시기의 일본 사회와 문화를 서구에 소개했다. OCLC/WorldCat에 따르면 그의 저작은 5개 언어로 100개 이상의 판본이 출판되었으며, 전 세계 1,000개 이상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12]

올콕은 1897년 11월 2일 런던에서 사망했으며, 서리주 머스텀에 있는 세인트 캐서린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주요 저서'''[12]

출판 연도제목비고
1838스페인 영국 군단의 의학적 역사와 통계에 관한 노트; 외과 수술의 중요한 문제와 관련된 총상 결과 포함
1857인생의 문제: 에세이; 도덕적, 사회적, 심리적
1861초보자를 위한 일본어 문법 요소
1862러더퍼드 올콕이 일본에서 보낸 산업 및 예술 작품 카탈로그1862년 런던 국제 박람회 관련
1863'The Capital of the Tycoon: A Narrative of a Three Years Residence in Japaneng'' (대군의 수도: 일본에서의 3년간의 거주 이야기)1862년 3월까지의 기록
1869한커우의 선교사와 중국 여러 항구의 상황에 관한 러더퍼드 올콕 경과의 서신
1870중국이 1869년 10월 23일에 서명한 톈진 조약의 부속 협약에 관한 러더퍼드 올콕 경의 발송
1871중국 정치가와 국정 보고서
1878Art and Art Industries in Japaneng (일본의 예술과 예술 산업)
1886영국령 북보르네오 핸드북: 식민 및 인도 박람회에서 영국령 북보르네오 회사의 트레처 총독과 다른 관리로부터 받은 보고서를 바탕으로 작성


참조

[1] 문서 London, England, Church of England Baptisms, Marriages and Burials, 1538–1812
[2] 문서 1891 England Census
[3] 웹사이트 The Englishman in China during the Victorian era : as illustrated in the career of Sir Rutherford Alcock https://archive.org/[...] Edinburgh : W. Blackwood 2017-11-24
[4] 문서 The Englishman in China during the Victorian era : as illustrated in the career of Sir Rutherford Alcock, K.C.B., D.C.L., many years consul and minister in China and Japan by Alexander Michie.
[5] 웹사이트 Provincial Archives of New Brunswick, Joan Burchill fonds: MC4045-MS11-C http://www.archives.[...]
[6] 문서 The first British Ambassador to Japan was appointed in 1905. Before 1905, the senior British diplomat had different titles: (a) [[Consul-General]] and [[Envoy Extraordinary and Minister Plenipotentiary]], which is a rank just below Ambassador.
[7] 서적 Consuls and the Institutions of Global Capitalism, 1783–1914 https://books.google[...] 2015
[8] 서적 Giving Up the Gun 1979
[9] 서적 The Capital of the Tycoon: A Narrative of a Three Years' Residence in Japan https://books.google[...] Longman, Green, Longman, Roberts & Green 1863
[10] 간행물 London Gazette 1860-12-04
[11] 간행물 London Gazette 1862-06-20
[12] 웹사이트 WorldCat Identities http://www.oclc.org/[...]
[13] 문서 日本大百科全書『オールコック』。
[14] 문서 "[[#横井(1988)|横井(1988)]] p.101-102"
[15] 문서 当時の[[イギリス]]では、領事は在留イギリス国民の利益を保護する立場にはあるが、「外交官」ではなく、また領事が「[[大使]]」「[[公使]]」に昇進することも無かった。しかし、オールコックには法的には「全権」が与えられており、実質的には外交官としての役割が期待されていた。オールコックは後に公使に昇進するが、これは領事から公使へ昇進した最初の例であった。
[16] 문서 上海には丁度[[タウンゼント・ハリス]]が滞在しており、オールコックはここで日本に関する予備知識を得ることができた。
[17] 문서 "[[#川崎(2012)|川崎(2012)]] p.40"
[18] 문서 幕府が横浜を開港地に決めたのはオルコック来日の3ヶ月も前の[[4月1日]]([[2月28日 (旧暦)|2月28日]])であり、突貫工事で横浜居留地を完成させていた。
[19] 문서 他国も神奈川に領事館を置いたが、1年後にオランダ領事館が横浜に移転し、結局はイギリス領事館も横浜に移転した。この間、イギリスの商人たちは自己の利益を追求し、全くオールコックに協力しなかったため、立腹して「ヨーロッパの人間の屑」と言い表している。
[20] 문서 "[[iarchive:in.ernet.dli.2015.83109/page/n411/mode/2up|The Capital Of The Tycoon Vol I]] SIR RUTHERFORD ADCOCK"
[21] 문서 "[[#宮永(2005)|宮永(2005)]]"
[22] 문서 『[[古事類苑]]』にオールコックの登山についての記録([[富士重本]]が[[寺社奉行]]所に提出した届出)があり、「英人富士山ヲ測量スルニ就キ、大宮司ヨリ届書寫…廿二日大雨にて、廿四日晝立、大宮小休、村山泊に相成り、廿五日快晴致し、不士山六合目へ泊り、廿六日快晴頂上いたし…」とあり、オールコック一行は7月24日に大宮から村山に入り登山を行い、26日に登頂したらしい。
[23] 뉴스 日本とイギリスの懸け橋となった“おもてなしの心” <オールコックの碑と愛犬トビーの墓>【熱海市】 http://m.izu-np.co.j[...] 伊豆新聞 2015-07-09
[24] 뉴스 オールコック銘板、大湯へ https://www.ataminew[...] 熱海市観光協会 2018-01-26
[25] 문서 この時の様子は『富士登山と熱海の硫黄温泉訪問』として日本でも出版されている。
[26] 문서 江戸帰還の交渉のためのに[[酒井忠毗|酒井忠眦]]が横浜へ派遣され、ラザフォードらは幕府から満足できる回答を得たとして江戸に戻った。が、実際には、オールコックが面子を失わないように江戸へ戻る手配をしたのは、ハリスであった。
[27] 문서 もっとも、南北戦争の影響もあり、日本に対するアメリカの影響力は急速に低下した。ハリスは翌年4月に帰国し、その後日本における外国勢力の中心は英仏に移った。
[28] 문서 "[[iarchive:in.ernet.dli.2015.83109/page/n489/mode/2up|The Capital Of The Tycoon Vol I by Sir Rutherford Alcock, Chap. XXI. A MORAL PROBLEM.]]"
[29] 문서 横浜鎖港など到底実現不可能なため、フランスと交渉しただけで一行は帰国した。この際フランスと[[パリ約定]]を結び、関門海峡の自由通航を保証するとしたが、これも幕府の手では実現できず、イギリス・フランス・オランダ・アメリカの4カ国による下関砲台の占領にいたる。もっとも、この使節の真の目的は[[井土ヶ谷事件]]でフランス軍人が殺害されたことに対する謝罪交渉であり、横浜鎖港談判は名目であるとの説もある。
[30] 문서 帰国の途次に下関に立ち寄り、[[長州征討]]を間近に控えた[[伊藤博文]]に会っ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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