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옹 블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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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옹 블룸은 1872년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정치인이자 사회주의 이론가이다.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여 프랑스 사회노동당(SFIO)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고, 당 기관지 《르 포퓔레르》의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1936년 총선에서 인민 전선이 승리하면서 총리가 되어, 40시간 노동제, 유급 휴가, 단체 교섭 등 개혁 정책을 추진했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스페인 내전 등의 문제로 인해 정부는 붕괴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반역죄로 투옥되었고, 전후에는 임시 정부 총리를 역임하며 유럽 재건을 지지했다. 블룸은 시오니즘을 지지했으며, 1950년 사망할 때까지 《르 포퓔레르》에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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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옹 블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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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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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앙드레 레옹 블룸 |
출생지 | 프랑스 파리 |
사망지 | 프랑스 주이앙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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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파리 대학교 |
경력 | |
임기 시작 | 1946년 12월 16일 |
임기 종료 | 1947년 1월 22일 |
대통령 | 뱅상 오리올 |
이전 | 조르주 비도 |
이후 | 폴 라마디에 |
임기 시작 2 | 1938년 3월 13일 |
임기 종료 2 | 1938년 4월 10일 |
부총리 2 | 에두아르 달라디에 |
대통령 2 | 알베르 르브륑 |
이전 2 | 카미유 쇼탕 |
이후 2 | 에두아르 달라디에 |
임기 시작 3 | 1936년 6월 4일 |
임기 종료 3 | 1937년 6월 22일 |
부총리 3 | 에두아르 달라디에 |
대통령 3 | 알베르 르브륑 |
이전 3 | 알베르 사로 |
이후 3 | 카미유 쇼탕 |
임기 시작 4 | 1948년 7월 28일 |
임기 종료 4 | 1948년 9월 5일 |
총리 4 | 앙드레 마리 |
이전 4 | 공석 |
이후 4 | 앙드레 마리 |
임기 시작 5 | 1937년 6월 29일 |
임기 종료 5 | 1938년 1월 18일 |
총리 5 | 카미유 쇼탕 |
이전 5 | 에두아르 달라디에 |
이후 5 | 에두아르 달라디에 |
개인 정보 | |
정당 |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 |
배우자 | 리즈 블로흐 (1896–1931) 테레즈 페레이라 (1932–1938) 잔 레빌리에 (1943–1950) |
자녀 | 로베르 블룸 |
부모 | 아브라함 오귀스트 블룸 아델 마리 알리스 피카르 |
2. 생애
레옹 블룸은 1872년 파리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비교적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1] 그의 부모는 모두 알자스 출신이었으며, 가정은 프랑스 공화주의 가치를 옹호하는 분위기였다.[2] [3] 블룸은 프랑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종교보다는 합리주의적이고 반성직주의적인 사상을 가졌다.[6]
블룸은 리세 샤를마뉴와 리세 앙리 4세를 거쳐 1890년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지만 1년 후 중퇴하고 파리 대학교 법학부에 들어가 변호사이자 문학 평론가가 되었다.[7] [8] 1892년부터 잡지 ''라 레뷰 블랑슈''의 평론가로 활동하며 아나톨 프랑스, 앙드레 지드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평론했다.[8] 스탕달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마르셀 프루스트와도 친분이 있었다.[10]
1894년 드레퓌스 사건은 블룸을 정치의 길로 이끈 결정적인 사건이었다.[20] 그는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재판에 참석하기도 했다.[13] 1896년 장 조레스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21]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장 조레스가 암살된 후, 블룸은 사회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43]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당은 소련에 대한 평가를 두고 분열되었는데, 블룸은 레닌주의와 볼셰비키의 독재를 부정했다.[43]
1934년 2월 6일 왕당파와 파시스트 집단의 폭동 이후, 블룸은 공산당, 급진당 등과 함께 인민 전선을 결성하여 파시즘에 대항했다. 1936년 총선에서 인민 전선이 승리하면서 블룸은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자 총리가 되었다.
블룸의 인민 전선 정부는 주 40시간 노동제와 유급 휴가제(바캉스)를 도입하고, 프랑 가치를 절하시키는 등 여러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17] [44] 그러나 스페인 내전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민 전선 내각은 분열되었고, 블룸은 1937년 6월에 사임했다.[12] [44]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1940년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블룸은 비시 프랑스 정부에 체포되어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 등 여러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45]
전후 정계에 복귀한 블룸은 프랑스 제4공화국을 골주의와 공산주의로부터 지키기 위해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 정당 간의 동맹을 옹호했다. 1946년에는 미국과 블룸-번스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의 전쟁 부채를 탕감받았다.[45]
블룸은 1946년 12월 16일부터 1947년 1월 22일까지 임시 정부의 대통령 겸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의 내각 구성은 다음과 같다:
직책 | 이름 |
---|---|
임시 정부 대통령 겸 외무부 장관 | 레옹 블룸 |
국방부 장관 | 앙드레 르 트로케 |
내무부 장관 | 에두아르 드프뢰 |
가족 경제 및 재무부 장관 | 앙드레 필리프 |
산업 생산부 장관 | 로베르 라코스트 |
노동 사회 보장부 장관 | 다니엘 마이에르 |
법무부 장관 | 폴 라마디에 |
공공시설부 장관 | 이브 탕기 |
국민 교육부 장관 | 마르셀 에드몽 네젤렌 |
재향군인 및 전쟁 피해자부 장관 | fr |
농업부 장관 | 프랑수아 탕기-프리장 |
해외 프랑스부 장관 | 마리우스 무테 (1946년 12월 23일부터 오귀스탱 로랑) |
공공 사업, 운송, 재건 및 도시 계획부 장관 | 쥘 모크 |
공중 보건 및 인구부 장관 | fr |
우편부 장관 | 외젠 토마 |
기획부 장관 | 펠릭스 구앵 |
국무 장관 | 기 몰레, 오귀스탱 로랑 |
블룸은 시오니즘을 지지했으며, 이스라엘 건국(1948년)을 옹호했다.[45] 1950년 3월 30일 파리 근처 주이앙조사에서 사망했다.[45]
2. 1. 출생과 성장 배경
레옹 블룸은 1872년 파리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비교적 유복한 중산층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알자스 출신의 상인이었고, 어머니 아델-마리-앨리스 피카르 역시 알자스 출신이었다.[2] 블룸의 가정은 공화국과 매우 동일시하는 분위기였으며, 어린 시절 레옹 강베타, 빅토르 위고와 같은 프랑스 공화주의 가치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3] 그는 프랑스를 계몽된 국가로 묘사하고, 프랑스 문명이 종교, 민족, 인종에 관계없이 프랑스어와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프랑스 공화주의의 보편주의에 동일시하게 되었다.[4] 블룸 자신은 종교적이지 않았지만, 항상 유대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며, 반유대주의적 모욕을 받을 때마다 자신의 유대인 정체성을 확인했다.[5] 그는 유대교보다는 프랑스 계몽주의의 합리주의적이고 반성직주의적인 사상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6]블룸은 리세 샤를마뉴에 다니다가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리세 앙리 4세로 전학했다.[7] 1890년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지만 1년 후 중퇴하고 파리 대학교 법학부에 들어가 변호사이자 문학 평론가가 되었다. 1892년부터 잡지 ''라 레뷰 블랑슈''의 평론가로 활동하며 아나톨 프랑스, 피에르 루이스, 쥘 르나르, 앙드레 지드의 작품을 평론했다.[8] 그는 스탕달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스탕달에 관한 글을 자주 쓰면서 스탕달 전문가가 되었다.[9] 젊은 시절 댄디 스타일을 연출했으며, 마르셀 프루스트와도 친분이 있었다.[10]
블룸은 1896년 리즈 블로흐와 결혼했다.[11]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의 유죄를 처음에는 확신했지만, 1897년 뤼시앙 에르의 설득으로 드레퓌스가 무죄라고 믿게 되었고, 이후 드레퓌스 사건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12] 그는 에밀 졸라의 서한 ''나는 고발한다!'' 재판에 참석하기도 했다.[13] 블룸은 모리스 바레스를 드레퓌스파에 가담시키려 했지만, 바레스가 반드레퓌스파임을 알게 되자 큰 상처를 받았다.[14] 드레퓌스 사건은 블룸이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5]
1905년에서 1907년 사이, 그는 결혼 전 여성의 순결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결혼의 문제점을 다룬 비평 에세이 ''Du Mariage''를 썼다.[16] 블룸은 남녀 모두 결혼 전에 자유로운 성생활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17] 그의 견해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당시 프랑스에서, 특히 샤를 모라스와 같은 극우 및 왕당파 정치인들에게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18] 1912년, 블룸은 경쟁 극장 평론가 피에르 베버와 결투를 벌여 부상을 입기도 했다.[19]
1894년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은 블룸을 정치의 길로 이끈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는 1871년 보불전쟁 패배 이후 프랑스 사회에 만연한 배타적 민족주의를 우려하여 정치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20] 1896년 장 조레스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21]
2. 2. 학창 시절과 문학 활동
레옹 블룸은 1872년 파리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비교적 유복한 중산층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리세 샤를마뉴에 다녔지만 학업 성적이 매우 우수하여 엘리트들이 선호하는 학교인 리세 앙리 4세로 전학했다.[1] 1890년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지만 1년 후 중퇴하고 법학부에 들어갔다. 그는 파리 대학교에 다니며 변호사이자 문학 평론가가 되었다. 1892년부터 그는 잡지 ''라 레뷰 블랑슈''의 평론가가 되어 아나톨 프랑스, 피에르 루이스, 쥘 레나르, 앙드레 지드의 작품을 평론했다.[1] 그의 평론은 파리 지식인 사회에서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으며, 그는 현대 프랑스 문학에 대한 흥미롭고 도발적인 견해를 가진 평론가로 알려지게 되었다.[1] 그는 또한 잡지 ''라 콩크''와 ''르 방케''에 시를 기고했다.[1] 블룸은 소설가 스탕달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스탕달에 관한 글을 자주 쓰면서 스탕달 전문가가 되었다.[1] 젊은 시절 그는 댄디 스타일을 연출했으며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지인이었다.[1]1905년에서 1907년 사이에 그는 19세기 후반 종교적, 경제적 배경을 가진 전통적인 결혼에 대한 문제와 결혼 전 여성의 순결을 강조하는 문제를 다룬 매우 논란이 많았던(당시 기준) 비평 에세이 ''Du Mariage''를 썼다.[2] 블룸은 남녀 모두 결혼 후 더 성숙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경험하기 위해 "일부다처제"의 자유로운 성생활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녀 모두에게 모험의 삶은 결혼의 삶에 앞서야 하고, 본능의 삶은 이성의 삶에 앞서야 한다” [2]
1894년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의 현실을 폭로한 사건이었고, 이 사회 정세를 우려한 블룸은 정치 활동에 발을 들였다. 1896년, 당시 대표적인 사회주의자이자, 블룸이 존경하게 된 장 조레스를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에 뛰어들었다.
2. 3. 정치 입문: 드레퓌스 사건과 사회주의
1872년 유대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레옹 블룸은 파리에서 성장했다. 젊은 시절에는 정치보다 문학에 더 관심이 많았다. 프랑스 민족주의 작가이자 하원 의원이었던 모리스 바레스를 존경했고, 앙드레 지드와는 앙리 4세 고등학교 동급생이었다. 고등사범학교 도서관사서로 좌파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뤼시앙 에르와도 친분이 있었다. 소르본 대학교에서 문학과 법학을 전공한 후 변호사이자 문학 평론가로 활동했다.1894년 드레퓌스 사건은 블룸을 정치의 길로 이끌었다. 1871년 보불 전쟁 패배 이후 프랑스 사회에 팽배했던 배타적 민족주의와 반독 감정은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났다. 블룸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우려하여 정치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896년 사회주의 지도자 장 조레스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4]
2. 4. 제1차 세계 대전과 사회당의 분열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반전을 외치던 장 조레스가 광신적인 우익에 의해 살해된 후, 레옹 블룸은 사회당에서 더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43]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소련이 성립되자, 사회당은 소련에 대한 평가를 두고 분열하게 되었다.[43] 블룸은 사회주의 이념은 존중했지만, 레닌주의와 볼셰비키의 독재는 부정했다.[43] 반면, 러시아 혁명을 긍정하고 레닌주의에 기반한 혁명 노선을 지향하는 세력은 당을 떠나 프랑스 공산당을 조직했다.[43]2. 5. 사회당 지도자 (1920-1936)
블룸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프랑스 사회당(SFIO)을 이끌었으며, 당 기관지인 르 포퓔레르의 편집장이었다. 그는 노동자 계급을 대표하는 정당 지도자로서는 이례적으로 항상 깔끔한 정장을 입고 핀스네즈 안경을 착용했다.[43] 블룸은 사회주의자 집회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야유와 폭력 위협에 용감하게 맞선 것으로 존경받았으며, "말의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43]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소련이 성립되자, 사회주의적 이념을 존중했던 블룸은 레닌주의와 볼셰비키 독재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1920년 말 투르 당대회에서 사회당이 분열되고 프랑스 공산당이 결성될 때, 그는 사회당에 남아 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1922년 연설에서 블룸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정권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라고 비판하며, "여성, 어린이, 감성적 삶, 가정생활을 개선할" 사회주의를 요구했다.[43] 그는 소비에트 러시아 공산 정권의 본질인 "잔혹함"을 사회주의의 본질인 "인도주의"와 대조하며 볼셰비즘을 비판했다.[43]
1919년 총선에서 당선된 블룸은 1924년 5월, 사회주의자들이 중도 좌파 동맹인 카르텔 데 고슈에 참여하여 하원 의석수를 55석에서 104석으로 늘리는 데 기여했다.[43] 에두아르 에리요가 블룸에게 정부 참여를 요청했지만, 블룸은 사회주의자들이 집권하면 일부 원칙을 타협해야 하므로 공산주의자들에게 표를 잃을까 두려워 거절했다.[43] 그는 에리요 정부의 알렉상드르 밀레랑 대통령 사임 강요, 반성직자 법안, 독일 화해 정책, 로카르노 조약 찬성, 국제 연맹 지지, 소련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지지했다.[43]
1928년 선거에서 보수 세력이 승리하며 블룸은 의석을 잃었지만, 1929년 5월 보궐 선거에서 하원 의원으로 복귀했다. 1932년 선거에서 급진당과 사회주의자가 득표한 후, 블룸은 다시 한번 에리요가 이끄는 정부를 지지했지만, 내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군비 축소를 열렬히 지지하면서 국제 연맹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국방비 지출보다는 대공황을 완화하기 위한 사회 프로그램에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43]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수상이 된 후에도 블룸은 한동안 국방비 지출에 반대하며,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34년 스타비스키 사건과 왕당파 및 파시스트의 폭동으로 프랑스가 내전 직전으로 몰리자, 블룸은 프랑스가 직면한 주요 위험이 파시즘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1934년 2월 6일 콩코르드 광장 폭동을 공화국에 대한 반란 행위로 규정하고, 1934년 2월 6일 위기를 파시스트 쿠데타 시도로 보았다.
1934년 2월 7일, 블룸은 급진당과 사회주의자 간의 동맹을 논의하며 프랑스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인민 전선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1935년 바스티유의 날, 블룸은 급진당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공산주의자의 모리스 토레즈와 함께 파리 바스티유 광장에서 국민 광장까지 행진하며 인민 전선을 창립했다.
1936년 선거에서 사회당, 공산당, 급진 사회당 등 인민 전선은 376석(사회당은 147석으로 제1당)을 획득하여 승리했고, 블룸을 수반으로 하는 인민 전선 내각이 6월 4일에 성립되었다.[43]
2. 6. 인민 전선 정부 수립 (1936-1938)
레옹 블룸은 1930년대 프랑스 사회노동당(SFIO)을 이끌었으며, 당 기관지인 《르 포퓔레르》의 편집장이었다. 노동자 계급 출신은 아니었지만, 항상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노동자 계급을 대변했다. 1920년대부터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으며, 볼셰비키 정권을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라고 비판했다.[44]1934년 2월 6일 왕당파와 파시스트 집단의 폭동 이후, 블룸은 공산당, 급진당 등과 함께 인민 전선을 결성하여 파시즘에 대항했다. 1936년 총선에서 인민 전선이 승리하면서 블룸은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자 총리가 되었다.
블룸의 인민 전선 정부는 세계 대공황 이후의 불황 극복, 노동자 권리 옹호, 우파 세력 견제, 독일과 내전 중인 스페인에 대한 외교 정책 등 여러 과제를 안고 있었다.
블룸은 통화 가치 경쟁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영국과 3국 통화 협정을 체결하고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프랑 가치를 절하하고, 대규모 공공 사업과 군비 확장을 통해 경기 부양을 시도했다. 주 40시간 노동제와 2주간의 유급 휴가제(바캉스)를 도입하는 등 노동 정책에도 힘썼다. 이러한 정책은 "블룸의 실험"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실업률 감소에는 기여했지만, 물가 상승과 자금 유출 등의 문제를 야기했다. 반유대주의를 내세운 파시즘 단체들을 해산시켰지만, 우파 세력의 반발과 유대인인 블룸에 대한 개인적인 공격도 거셌다.
인민 전선 내각은 스페인 내전에 대한 입장 차이로 분열되었다. 스페인 인민 전선 지원을 주장하는 공산당과 불간섭을 원하는 급진 사회당 사이의 갈등은 결국 블룸 내각의 퇴진으로 이어졌다. 이후 블룸은 다시 총리가 되었지만,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내각이 붕괴되었다.
2. 6. 1. 인민 전선 정부의 개혁 정책
1936년, 레옹 블룸이 이끄는 인민 전선 정부는 프랑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여러 개혁 정책을 시행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동 시간 단축: 주 40시간 노동제를 도입하여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했다.[17]
- 유급 휴가: 노동자들에게 연간 12일의 유급 휴가를 제공하여 휴식과 재충전의 기회를 보장했다.[17]
- 단체 교섭: 노동자들이 임금 청구에 대해 단체로 교섭할 수 있는 권리를 강화했다.[17]
- 국유화: 무기 및 군용 항공 산업을 완전히 국유화하여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했다.[17]
이러한 개혁 정책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무기 생산에 차질을 빚는 등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었다.[17] 블룸은 알제리 아랍인들의 권리 확대를 위한 법안을 추진했으나, 식민지 대표들의 반대로 실패했다.[17]
인민 전선 정부는 세계 대공황 이후의 불황 극복과 노동자 권리 옹호, 파시즘 세력 견제 등 국내외적인 과제를 안고 있었다. 나치 독일의 재무장과 스페인 내전 발발 등 국제 정세도 불안했다.
블룸은 통화 가치 경쟁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영국과 3국 통화 협정을 체결하고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프랑의 가치를 절하하고, 대규모 공공 사업과 군비 확장을 통해 경기 부양을 시도했다.[44] 주 40시간 노동제와 2주간의 유급 휴가제(바캉스)를 도입하는 등 노동 정책에도 힘썼다. 이러한 정책은 "블룸의 실험"이라고 불렸다.[44]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실업률 감소에는 기여했지만, 물가 상승과 자금 유출 등의 문제를 야기했다.[44] 반유대주의를 내세운 파시즘 단체들을 해산시켰지만, 우파 세력의 반발과 유대인인 블룸에 대한 개인적인 공격도 거셌다.[44]
스페인 내전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인민 전선 내각은 분열되었다. 스페인 인민 전선 지원을 주장하는 공산당과 불간섭을 원하는 급진 사회당 사이의 갈등은 결국 블룸 내각의 퇴진으로 이어졌다.[44]
2. 6. 2. 인민 전선 정부의 외교 정책
스페인 내전은 1936년 7월에 발발하여 프랑스를 깊이 분열시켰다. 레옹 블룸은 자신의 이념적 동지인 스페인 좌파 공화국을 지원하기보다는 중립 정책을 채택했다. 그는 중도주의 급진당과의 국내 연합이 분열되거나 심지어 프랑스 내에서 이념적 내전을 촉발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같이 행동했다.[12] 스페인에 무기를 보내는 것을 거부한 것은 소련의 정책을 따라 스페인 공화국에 전폭적인 지원을 요구한 공산주의자들과의 동맹을 악화시켰다.[12] 이러한 문제로 인해 발생한 불가능한 딜레마로 인해 블룸은 1937년 6월에 사임했다.[12]프랑스 좌파의 모든 구성원은 마드리드의 공화국 정부를 지지했고, 우파는 민족주의 반군을 지지했다. 블룸 내각은 심각하게 분열되었고, 그는 불간섭 정책을 결정했으며, 영국 및 25개 다른 국가와 협력하여 스페인에 무기나 의용병을 보내는 것을 금지하는 협정을 공식화했다. 공군 장관은 내각에 반하여 몰래 마드리드에 전투기를 판매했다. 잭슨은 프랑스 정부가 "국내의 내전 위협, 국외의 독일의 위험, 자체 방어력의 약점으로 인해 사실상 마비되었다"고 결론 내린다.[13] 공화국은 1938년까지 심하게 패배했고 (1939년에 항복), 50만 명 이상의 정치적 난민을 프랑스 국경 너머로 보내 수용소에 수용했다.[14]
레옹 블룸은 1938년 3월과 4월에 잠시 다시 총리를 역임했는데, 이는 야포(heavy artillery)와 기타 절실히 필요한 군사 장비를 스페인 공화국(Spanish Republican)에 수송하기에 충분한 기간이었다.[18] 블룸은 현재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를 통치했던 것과 같은 "신성 동맹" 정부를 창설하기 위해 중도 우파 정당에 제안했지만, 이 제안은 거부되었다. 1938년 3월 15일, 블룸은 스페인에 무기를 수송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 외에도, 내각 회의에서 프랑스가 공화국 측에 서서 스페인 내전에 개입할 것을 제안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이 스페인 국민주의자 측에 개입했기 때문에, 달라디에가 이끄는 내각의 다수는 이탈리아 및 독일과의 전쟁을 의미한다는 이유로 블룸의 노선을 거부했다.
블룸은 1938년 초에 새로운 군비 계획을 수립했다. 블룸은 군비 계획의 자금 조달을 위해 소득 및 법인 이익에 대한 세금을 대폭 인상하고, 채권 시장에서 대규모 차입을 하고, 탄약 지불을 위해 신용 어음 형태로 더 많은 프랑을 발행하여 인플레이션 과정을 시작하고, 예상되는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한 환율 통제를 계획했다. 블룸의 군비 계획은 1938년 4월 5일 상원에서 부결되어 사임하게 되었다. 그는 안정적인 내각을 구성할 수 없었고, 1938년 4월 10일 그의 사회주의 정부는 붕괴되었고 그는 직에서 물러났다. 외교 정책에서 그의 정부는 프랑스 좌파(French Left)의 전통적인 반군국주의와 나치 독일(Nazi Germany)의 고조되는 위협의 시급함 사이에서 갈등했다.
외교 면에서도, 인민 전선 내각 내의 대립 구도가 드러났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간섭을 원하지 않는 급진 사회당과, 스페인 인민 전선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는 공산당 사이의 의견 차이를 수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2. 6. 3. 인민 전선 정부의 한계와 붕괴
스페인 내전은 1936년 7월에 발발하여 프랑스를 깊이 분열시켰다. 블룸은 자신의 이념적 동지인 스페인 좌파 공화국을 지원하기보다는 중립 정책을 채택했다. 그는 중도주의 급진당과의 국내 연합이 분열되거나 심지어 프랑스 내에서 이념적 내전을 촉발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같이 행동했다. 스페인에 무기를 보내기를 거부한 것은 소련의 정책을 따라 스페인 공화국에 전폭적인 지원을 요구한 공산주의자들과의 동맹을 악화시켰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발생한 불가능한 딜레마로 인해 블룸은 1937년 6월에 사임했다.[12] 프랑스 좌파의 모든 구성원은 마드리드의 공화국 정부를 지지했고, 우파는 민족주의 반군을 지지했다. 블룸 내각은 심각하게 분열되었고, 그는 불간섭 정책을 결정했으며, 영국 및 25개 다른 국가와 협력하여 스페인에 무기나 의용병을 보내는 것을 금지하는 협정을 공식화했다. 공군 장관은 내각에 반하여 몰래 마드리드에 전투기를 판매했다. 잭슨은 프랑스 정부가 "국내의 내전 위협, 국외의 독일의 위험, 자체 방어력의 약점으로 인해 사실상 마비되었다"고 결론 내린다.[13] 공화국은 1938년까지 심하게 패배했고 (1939년에 항복), 50만 명 이상의 정치적 난민을 프랑스 국경 너머로 보내 수용소에 수용했다.[14]새로운 에두아르 달라디에 정부는 영국과 협력했다. 이념적 갈등의 반대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38년 4월 14일부터 보수당 의원 윈스턴 처칠은 블룸과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고, 그는 독특한 프랑스어로 쓴 일련의 편지를 블룸에게 보내 재무장을 지지하고 유화 정책에 반대하도록 격려했다. 1938년의 수데텐란트 위기 동안, 달라디에는 타협점을 찾기 위한 시도로 영국의 총리 네빌 체임벌린의 "정직한 중개인" 제안을 받아들였다. 1938년 9월 한동안 유럽은 다시 전쟁 직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블룸은 9월 28일,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비상 정상 회담이 다음 날 뮌헨에서 열릴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엄청난 기쁨과 희망의 반응"을 느꼈다고 썼다. 9월 29일, 블룸은 신문 ''르 팝율레르''의 사설에서 "뮌헨 회담은 불꽃이 깜박이고 꺼질 위기에 처한 바로 그 순간, 신성한 불꽃에 던져진 장작 한 묶음이다."라고 썼다. 위기를 종식시킨 뮌헨 협정은 수데텐란트가 독일에 양도될 것이라는 점을 확인했지만, 10월 1일 이후에만 양도될 것이라는 점에서 타협이었다. 1938년 9월 30일 뮌헨 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블룸은 프랑스가 독일과 전쟁을 벌이지 않게 되어 기뻤지만,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키면서 독일을 선호하는 협정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적으면서 "'수치스러운 안도감'"이라고 느꼈다고 썼다. 1938년 10월 1일, 블룸은 ''르 팝율레르''에 "네빌 체임벌린 씨와 에두아르 달라디에 씨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감사의 표시를 거부할 여성과 남성은 없다. 전쟁은 피했다."라고 썼다.
뮌헨 협정은 사회주의자들을 협정을 지지하는 평화주의적 반전 단체와 반대하는 반파시스트 단체로 심하게 분열시켰고, 블룸은 사회주의자들의 분열을 피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블룸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국익이 아닌 독일 유대인을 위해 독일과의 전쟁을 원한다는 비난에 직면하면서 논쟁은 더욱 어려워졌다. 1938년 10월 4일 ''하원''에서 뮌헨 협정에 대한 투표에서 블룸은 뮌헨 협정에 찬성표를 던졌다. 뮌헨 협정에 대한 논쟁에서 블룸은 "이 깊이 느껴지고 열정적인 평화를 위한 의지는 한 국민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도록 이끌 수 없으며, 그 반대로 독립과 자유를 위해 필요하다면 투쟁하고 희생할 결의를 강화하며, 정당하고 부당한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했다. 뮌헨 협정에 찬성표를 던졌지만 추가적인 유화 정책에 반대하는 블룸의 입장은 사회주의자들을 결속시키려는 시도였다. 그 후 몇 달 동안 블룸은 "뮌헨의 사람들"에 대해 더욱 비판적이 되었다. 그의 비판의 주요 대상은 달라디에가 아니라 - 그는 유화 정책을 꺼리는 사람이었음을 알았지만 - 외무 장관 조르주 보네였다. 보네는 프랑스가 동유럽을 독일의 영향권으로 인정하고 동유럽의 모든 프랑스 동맹국을 포기하는 프랑스-독일 간의 모종의 합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블룸은 내각에서 유화 정책의 주요 옹호자로서 보네에 대한 비판에 집중했다.
프랑스 무기 산업, 특히 항공 산업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재무 장관 폴 레이노는 달라디에의 지원을 받아 인민 전선의 경제 정책의 많은 부분을 무효화하는 일련의 광범위한 법률을 도입했는데,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주 48시간 노동 시간제의 종료였다. 블룸은 공산주의자들과 힘을 합쳐 달라디에 정부의 경제 정책에 반대했고, 1938년 11월 30일 공산주의자들이 소집한 총파업을 지지했다. 달라디에는 프랑스군을 불러 필수 서비스를 운영하게 하고 프랑스 경찰에게 눈물 가스를 사용하여 르노 공장에서 파업 노동자들을 몰아냈다. 군대를 사용하여 필수 서비스를 운영하는 동시에 경찰을 보내 파업 지도자들을 체포한 것은 총파업을 깨뜨렸다. 블룸은 연설에서 달라디에가 프랑스 노동 계급을 짓밟고 프랑스를 1936년 이전의 경제 체제로 되돌리기 위해 억압적인 방법을 사용했다고 비난했다.
1938년 11월 30일 이탈리아 외무 장관 가레아초 치아노 백작이 조직한 신중하게 연출된 "자발적인" 시위가 이탈리아 하원에서 열렸고, 신호에 따라 모든 의원들이 일어나 "튀니스, 코르시카, 니스, 사보이!"를 외쳤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프랑스에 "수데텐 방법"이라고 부르는 것을 사용하려 했고, 이탈리아 언론은 프랑스가 코르시카, 니스, 사보이, 튀니지를 이탈리아에 양도할 것을 요구하는 폭력적인 반프랑스 캠페인을 시작했다. 달라디에는 프랑스 라디오에서 일련의 단호한 연설로 대응하여 이탈리아의 모든 요구를 거부했고, 이는 프랑스에서 그에게 많은 인기를 안겨주었다. 블룸의 관점에서 볼 때, 이탈리아에 대항하여 프랑스의 영토 보전의 수호자로서 많은 찬사를 받은 달라디에에게 반대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어려웠다. 1938년 12월 9일, 다음 하원 회기에서 달라디에는 우파와 중도 정당의 과반수를 기반으로 하기로 결정하면서 인민 전선은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인민 전선이 종말을 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블룸은 불신임 투표나 새로운 선거를 추진하지 않았다. 블룸은 달라디에가 선거가 치러진다면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고, 사회주의자들은 달라디에 정부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불신임 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다.
1938년 12월 몽루주에서 열린 사회당 전당대회에서 블룸은 당원들에게 평화주의를 포기하고 프랑스의 재무장을 지지할 것을 촉구했다. 블룸은 자신의 스승 조레스가 주창한 전쟁을 막기 위한 유럽 모든 국가의 총파업이라는 아이디어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는데, 독일의 노동 조합과 사회 민주당이 오래전에 금지되었고, 전쟁을 막기 위한 "제국"에서의 총파업 가능성은 없었다. 1938년 12월 27일에 행한 연설에서 블룸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 정부가 극도로 공격적인 제국주의 정책에 전념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또 다른 세계 대전을 막는 방법은 재무장과 추축국에 의해 위협받는 모든 국가의 동맹이라고 주장했다. 블룸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복종과 전쟁 사이의 끔찍한 선택"을 피하기 위해 재무장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12월 28일, 전당대회는 블룸의 재무장 요구에 대해 4,332명의 사회주의 대표가 찬성표를 던지고 폴 포르의 재무장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적 동의안에 2,837표, 투표를 기권한 대표가 1,014표로 마감되었다. 블룸이 몽루주 전당대회에서 승리했지만, 투표 결과는 사회당의 상당수가 재무장에 반대하거나 적어도 미온적임을 보여주었다. 1939년 2월 10일, 블룸은 파리에서 소련 대사 야코프 수리츠를 만나 달라디에와 보네가 프랑스를 "새로운 세단"으로 이끌고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수리츠는 블룸이 우울하고 낙담한 모습을 보였다고 묘사하면서 블룸이 프랑스가 그것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재앙으로 향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언급했다.
블룸의 인민 전선 내각은 세계 대공황 이후의 불황, 노동자의 권리 옹호, 우파 세력 견제, 독일과 내전이 벌어진 스페인에 대한 외교 정책 등 다방면에 걸친 과제를 안고 있었다.
블룸은 통화 가치 경쟁 대책으로 미국 및 영국과 3국 통화 협정을 체결하고, 금본위제를 이탈, 프랑 평가 절하, 대규모 공공 사업 실시, 군사 산업 예산 투입을 통해 불황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또한, 주 40시간 노동제, 2주간의 유급 휴가제(바캉스)와 같은 노동 정책, 파시즘 단체 해산 등을 추진했다. 실업률은 급감했지만, 파리 만박의 노동 수요나 군비 확장 등에 의한 것으로 여겨졌고, 유럽에서 가장 높은 물가와 노동 운동의 급진화를 피하기 위해 자금 유출이 일어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44] 또한, 우파 세력은 완전히 쇠퇴한 것이 아니었고, 유대계인 블룸에 대해 개인적인 언론 공격도 가해졌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간섭을 원하지 않는 급진 사회당과 (스페인) 인민 전선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는 공산당 사이의 의견 차이, 중산 계급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급진 사회당의 이탈 등으로 블룸은 퇴진했다.
그 후 성립한 급진 사회당 내각에도 부총리로서 입각했지만, 급진 사회당이 공산당 탄압을 꾀하게 되자 블룸 등 사회당은 내각 붕괴를 지지했다. 1938년 블룸은 다시 수상이 되었지만,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내각이 붕괴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미가 수습되지 않은 채, 프랑스는 제2차 세계 대전에 돌입했다.
2. 7. 제2차 세계 대전과 투옥 (1939-1945)
에두아르 달라디에 정부는 영국과 협력했다. 1938년 4월부터 윈스턴 처칠은 블룸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재무장을 지지하고 유화 정책에 반대하도록 격려했다.[1] 1938년 수데텐 위기 동안, 달라디에는 네빌 체임벌린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돌프 히틀러와 정상 회담을 가졌다.[2] 히틀러는 수데텐란트 지역을 독일에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3]블룸은 뮌헨 회담 소식에 "엄청난 기쁨과 희망"을 느꼈다고 썼다.[4] 1938년 9월 29일, 블룸은 뮌헨 회담이 "신성한 불꽃에 던져진 장작 한 묶음"이라고 표현했다.[5] 뮌헨 협정은 수데텐란트가 독일에 양도될 것이라는 점을 확인했지만, 10월 1일 이후에만 양도될 것이라는 타협이었다. 블룸은 프랑스가 전쟁을 피하게 되어 기뻤지만,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킨 협정에 대해 "'수치스러운 안도감'"을 느꼈다고 썼다.[6] 1938년 10월 1일, 블룸은 전쟁을 피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했다.[7]
뮌헨 협정은 사회주의자들을 분열시켰고, 블룸은 타협점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8] 블룸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비난받았고, 이는 그가 반독일적으로 보이지 않으려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9] 1938년 10월 4일, 블룸은 뮌헨 협정에 찬성표를 던졌다.[10] 그는 평화를 위한 의지가 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 결의를 강화한다고 선언했다.[11] 블룸은 조르주 보네를 유화 정책의 주요 옹호자로 비판했다.[12]
폴 레이노는 프랑스 무기 산업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주 48시간 노동 시간제 종료 등 인민 전선의 경제 정책을 무효화하는 법률을 도입했다.[13] 블룸은 이에 반대했고, 1938년 11월 30일 총파업을 지지했다.[14] 달라디에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총파업을 진압했다.[15] 블룸은 달라디에가 억압적인 방법을 사용했다고 비난했다.[16] 1938년 11월 30일, 이탈리아는 프랑스에 영토 양도를 요구하는 반프랑스 캠페인을 시작했다.[17] 달라디에는 이탈리아의 요구를 거부했고, 블룸은 달라디에를 반대하기 어려웠다. 1938년 12월 9일, 인민 전선은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했다.[18]
1938년 12월, 블룸은 사회당 전당대회에서 평화주의를 포기하고 재무장을 지지할 것을 촉구했다.[19] 그는 독일의 제국주의 정책을 비난하고 재무장과 추축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주장했다.[20] 블룸은 "복종과 전쟁 사이의 끔찍한 선택"을 피하기 위해 재무장을 선호한다고 말했다.[21] 전당대회는 블룸의 재무장 요구에 찬성표를 던졌지만, 사회당 내 상당수는 재무장에 반대하거나 미온적이었다.[22] 1939년 2월 10일, 블룸은 소련 대사에게 프랑스가 재앙으로 향하고 있다고 말했다.[23]
1939년 단치히 위기 동안, 블룸은 독일을 "억제"하기 위한 영국과 프랑스의 조치를 지지했다.[24] 그는 군비 증강을 지지하며 "무력에 호소하는 것은 평화에 대한 호소"라고 말했다.[25] 블룸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공개 서한을 지지했지만, 히틀러는 이를 조롱했다.[26]
블룸은 영국 노동당의 평시 징병 반대 태도에 경악했다.[27] 그는 노동당에 평시 징병을 지지하도록 촉구하는 편지를 썼다.[28] 블룸은 "대륙 공약"(즉, 대규모 원정군을 프랑스로 파견)을 위해 평시 징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29] 1939년 5월 11일, 챔벌린은 블룸과의 대화를 언급하며 유럽에 전쟁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30] 블룸은 프랑스가 폴란드와의 동맹을 지킬 것을 촉구했다.[31]
블룸은 영국, 프랑스, 소 সোভिएト連邦|소련]]을 통합하는 "평화 전선" 계획을 지지했다.[32] 그는 폴란드 외무 장관에게 소련군의 폴란드 통과 권한 문제에 양보할 것을 촉구했다.[33] 1939년 8월 22일, 블룸은 "평화 전선"이 곧 존재할 것이라는 희망을 표명했다.[34] 그러나 다음 날,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다. 블룸은 이 조약에 대해 이오시프 스탈린을 강력하게 비난했다.[35] 그는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에게 코민테른과 결별할 것을 촉구했다.[36]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1940년 나치 독일군이 파리를 함락시키고 프랑스가 항복했지만, 블룸은 망명하지 않았다. 1940년 7월 10일, 블룸은 필리프 페탱 원수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진 80명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비시 프랑스 정부에 체포되었다.
1942년 초, 블룸은 리옹의 특별 법정에 피고로 출두했지만, 재판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군비 증강에 기여한 점을 주장하여 재판을 중단시켰다.
1943년, 블룸은 독일로 보내져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 다하우 강제 수용소, 티롤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블룸의 동생 르네 블룸은 아우슈비츠에서 처형되었다.
블룸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어 강제 수용소에서 구출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에세이인 『인간으로서의 척도』는 이 수용소에서 쓰여졌다.
2. 8. 전후 활동과 사망 (1945-1950)
레옹 블룸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계에 복귀하여 1945년 5월 14일에 파리로 돌아왔다.[45] 그는 프랑스의 임시 대통령을 자처한 샤를 드골을 지지하면서도, 드골의 대통령 중심제 헌법에는 반대했다. 블룸은 총리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새로운 헌법을 원했다.블룸은 프랑스 제4공화국을 골주의와 공산주의로부터 지키기 위해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 정당 간의 동맹을 옹호했다. 또한, 정부 특사로 미국을 방문하여 제임스 F. 번스 국무장관과 블룸-번스 조약(1946년 5월 28일)을 체결, 프랑스의 전쟁 부채를 탕감받고 유리한 조건으로 신용을 제공받았다.[45]
베트남 문제와 관련하여 블룸은 호치민에게 프랑스가 즉시 베트남에 독립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 식민지에 자치령 지위를 부여하는 프랑스 연합 계획을 선호했다. 그러나 1946년 12월 베트남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블룸은 반란을 진압하겠다고 다짐했다.
블룸은 유럽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을 지지했으며, 덩케르크 조약 (1947년)을 통해 영국과의 군사 동맹을 강화했다. 그는 또한 시오니즘을 지지하며, SS 엑소더스호 사건(1947년)을 비난하고 이스라엘 건국(1948년)을 옹호했다.
1949년, 블룸은 유럽 연방을 지지하며 "세계를 생각하면서 유럽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인들에게 독일인을 용서하라고 촉구하며, 나치즘에 대한 독일의 집단적 죄책감에 반대했다.
블룸은 1946년 12월 16일부터 1947년 1월 22일까지 임시 정부의 대통령 겸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의 내각은 다음과 같았다.
직책 | 이름 |
---|---|
임시 정부 대통령 겸 외무부 장관 | 레옹 블룸 |
국방부 장관 | 앙드레 르 트로케 |
내무부 장관 | 에두아르 드프뢰 |
가족 경제 및 재무부 장관 | 앙드레 필리프 |
산업 생산부 장관 | 로베르 라코스트 |
노동 사회 보장부 장관 | 다니엘 마이에르 |
법무부 장관 | 폴 라마디에 |
공공시설부 장관 | 이브 탕기 |
국민 교육부 장관 | 마르셀 에드몽 네젤렌 |
재향군인 및 전쟁 피해자부 장관 | fr |
농업부 장관 | 프랑수아 탕기-프리장 |
해외 프랑스부 장관 | 마리우스 무테 (1946년 12월 23일부터 오귀스탱 로랑) |
공공 사업, 운송, 재건 및 도시 계획부 장관 | 쥘 모크 |
공중 보건 및 인구부 장관 | fr |
우편부 장관 | 외젠 토마 |
기획부 장관 | 펠릭스 구앵 |
국무 장관 | 기 몰레, 오귀스탱 로랑 |
레옹 블룸은 툴루즈 외곽 농장에서 은퇴 생활을 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소식을 접했다. 1940년 7월, 블룸은 다니엘 마이어에게 프랑스 남부에서 저항 단체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해 9월, 블룸은 반역죄로 체포되었는데, 이는 그가 프랑스에 "위험한" 인물임을 보여주기 위한 과장된 경찰 작전이었다.[22]
[1]
서적
Leon Blum: Humanist in Politics
https://books.google[...]
Knopf Doubleday Publishing Group
2013-07-10
블룸은 1948년 여름 앙드레 마리 정부에서 한 달간 부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1950년 3월 30일 파리 근처 주이앙조사에서 사망할 때까지 ''르 포퓔레르''에 계속 글을 썼다.[45] 이스라엘 북부에 있는 크파르 블룸 키부츠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3. 유산과 평가
블룸은 샤토 드 샤제론과 부라솔의 낡은 저택 등 여러 곳에 투옥되었다. 그는 수감 중 회고록을 통해 1940년 프랑스 패배의 원인을 부르주아지의 물질주의와 이기심 탓으로 돌렸다. 1941년, 미국의 엘리너 루스벨트 등 저명인사들로부터 생일 축하 편지를 받기도 했다.
1942년 2월, 블룸은 리옹 재판에서 "프랑스의 방어력을 약화시켰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이 재판을 통해 프랑스 군대와 친독 정치인들을 비판하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특히 1936년 9월에 시작된 프랑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평화 시대 방어 프로그램을 언급하며 자신의 정부가 프랑스 방어를 소홀히 했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이 재판은 비시 정권에 큰 타격을 주었고, 독일은 블룸의 변론이 대중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재판 중단을 명령했다.[23] 언론의 많은 관심을 받은 이 재판은 블룸을 대중적인 영웅으로 만들었다.
1943년, 블룸은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이후 다하우 강제 수용소로 옮겨졌다. 그는 수용소에서 아내 잔 아델 "자노" 레빌리에르와 함께 생활하며 결혼식을 올렸다.[24][25][26] 전쟁 말기, 나치 정권은 블룸을 처형하려 했으나, 지역 당국의 반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1945년 5월, 블룸은 연합군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의 형제 르네는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설립자로, 1942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참조
[2]
서적
Du mariage / Léon Blum
https://gallica.bnf.[...]
2021-08-02
[3]
웹사이트
Léon Blum et la question du mariage
https://www.lefigaro[...]
2021-04-28
[4]
서적
Leon Blum: Humanist in Politics
1987-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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