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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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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이먼드 카버는 1938년 오리건주에서 태어나 1988년 사망한 미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그는 헤밍웨이의 영향을 받아 간결한 문체로 평범한 노동 계급의 삶을 묘사했으며, 알코올 중독과 편집자 고든 리쉬의 영향 속에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카버는 미니멀리즘 소설의 대표 작가로 평가받으며, 단편 소설과 시를 주로 썼다. 주요 작품으로는 단편집 『제발 조용히 해 주세요』,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대성당』 등이 있으며, 여러 작품이 영화로 각색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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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본명레이먼드 클레비 카버 주니어
출생일1938년 5월 25일
출생지미국오리건주 클랫스캐니
사망일1988년 8월 2일
사망지미국워싱턴주 포트앤젤레스
직업작가
학력
교육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치코
캘리포니아 주립 폴리테크닉 대학교, 훔볼트 (문학사)
아이오와 대학교
경력
활동 기간1958년–1988년
장르단편 소설, 시
사조미니멀리즘, 더티 리얼리즘
개인 정보
배우자메리앤 버크 (1957년 6월 결혼, 1982년 이혼)
테스 갤러거 (1988년 결혼)
주요 작품
대표 작품『부디, 아무도!』 (1976년)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1981년)
『대성당』 (1983년)

2. 생애

미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레이먼드 카버는 1938년 5월 25일 오리건주 클랫스카니의 제재소 마을에서 태어나 워싱턴주 야키마에서 성장했다.[4] 그의 아버지는 제재소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웨이트리스와 점원으로 일했다.[4][5]

195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7년 6월, 19세의 나이에 16세의 메리앤 버크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젊은 부부는 생계를 위해 카버는 여러 단순 노동직을 전전했고, 아내 메리앤 역시 다양한 일을 했다.[6]

1958년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한 카버는 치코 주립 대학에서 소설가 존 가드너에게 글쓰기를 배웠고, 이는 그의 문학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6] 1961년 첫 단편 소설 The Furious Seasons|분노의 계절영어을 발표했다. 이후 험볼트 주립 대학으로 옮겨 1963년 학사 학위를 받았고,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에 잠시 참여했으나 중퇴했다.[6]

1960년대 중반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 거주하며 병원 야간 관리인 등으로 일하는 틈틈이 글을 썼고, 시인 데니스 슈미츠의 지도를 받아 1967년 첫 시집 ''Near Klamath''를 출간했다.[6] 같은 해 단편 "제발 조용히 해 주세요"가 최우수 미국 단편 소설 선집에 실리며 주목받기 시작했다.[6] 이후 사이언스 리서치 어소시에이츠(SRA)에서 편집자로 일하며 훗날 그의 주요 편집자가 되는 고든 리쉬를 만났다.[6] 1971년 리쉬의 도움으로 ''에스콰이어''에 단편 Neighbors|이웃 사람들영어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6]

1970년대 초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며 작가 활동을 이어갔으나, 고된 생활과 글쓰기에 대한 압박 속에서 알코올 중독이 심화되었다.[6] 1976년 첫 단편집 ''Will You Please Be Quiet, Please?''를 출간하여 전미 도서상 후보에 오르는 등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지만[13], 알코올 문제로 인해 건강과 가정생활은 파탄에 이르렀고 결국 아내 메리앤과 별거하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입원 치료 끝에 1977년 6월 2일, 카버는 알코올 중독자 협회(AA)의 도움으로 술을 끊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6] 같은 해 11월, 작가 회의에서 시인 테스 갤러거를 만났고, 그녀는 이후 그의 중요한 문학적 동반자이자 삶의 파트너가 되었다.[17] 1979년 시러큐스 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고[36], 1982년 첫 아내 메리앤과 이혼했다.[15]

금주 이후 카버는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쳐 1983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소설집 『대성당』을 출간했다. 이 작품은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오 헨리 상을 수상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두며 그를 미국 현대 문학의 주요 작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1987년 9월 폐암 진단을 받았고, 암이 까지 전이되어 투병 생활을 했다. 1988년 6월 17일, 오랜 연인이었던 테스 갤러거와 정식으로 결혼했으나[18], 결혼 6주 만인 1988년 8월 2일 워싱턴주 포트앤젤레스 자택에서 향년 50세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발표작은 뉴요커에 실린 단편 「잔심부름」[37]이었다.

2. 1. 출생과 유년 시절

레이먼드 카버는 1938년 5월 25일 미국 오리건주 클랫스카니에서 태어났다.[4] 그의 부모인 엘라 비아트리스 카터(옛 성은 케이시)와 클리비 레이먼드 카버는 원래 아칸소주 출신으로, 일거리를 찾아 오리건으로 이주했다. 아버지 클리비 레이먼드 카버(C.R.)는 제재소 노동자이자 어부였으며, 술 문제를 겪었다.[4] 그는 뉴딜 정책 시기 벌목 및 제재 노동자 노조 파업에 참여했으나, 파업이 실패한 후 다시 일자리를 찾아 오리건으로 왔고, 카버가 태어난 후에는 워싱턴주 야키마로 이주했다.[4] 어머니 엘라는 웨이트리스와 소매점 점원으로 일했으며, 신경증을 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카버에게는 1943년에 태어난 남동생 제임스 프랭클린 카버가 있었다.[5]

카버는 워싱턴주 야키마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야키마는 화산재 토양 덕분에 비옥한 땅이었지만, 주로 가난한 노동계급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겪은 경험들, 예를 들어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한 아버지, 신경증을 앓던 어머니, 그리고 희망이 많지 않은 노동계급의 고단한 일상 등을 훗날 자신의 작품 세계에 중요한 소재로 반영했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이 마냥 암울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대공황과 파업을 겪으며 형성된 노동계급 특유의 자신감 있는 분위기 속에서 카버는 안정감을 느끼며 성장했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주말에는 비교적 풍족하게 음식을 먹었고, 돈 없이도 즐겁게 지내는 법을 알았다.

카버는 야키마의 지역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학업에 매우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 그의 초등학교 교사였던 월라드 L. 요크는 카버에 대해 "학업 능력이 만족스럽지만, 가진 능력에 비해 노력을 덜 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즉석에서 이야기를 잘 지어냈으며, 다소 내성적이고 우울한 면모를 가진 소년이었다. 여가 시간에는 미키 스필레인의 소설이나 ''Sports Afield'' 및 ''Outdoor Life''와 같은 잡지를 즐겨 읽었고, 친구나 가족과 함께 사냥과 낚시를 즐겼다.

1956년 야키마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카버는 캘리포니아의 제재소에서 아버지와 함께 잠시 일했다. 1955년 여름, 18세였던 카버는 워싱턴주 유니언 캡의 한 도넛 가게에서 당시 16세였던 메리엔 버크를 만났다. 메리엔 역시 가난한 환경이었지만 매우 총명했으며, 카버의 문학적 재능과 분위기를 알아보고 그와 결혼을 결심했다. 그녀는 이후 1982년 이혼하기 전까지 카버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지지자가 되었다. 둘은 1957년 6월에 결혼했는데, 이때 카버는 19세였고 메리엔은 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결혼 당시 메리엔은 사립 성공회 여자 학교를 갓 졸업한 상태였다. 결혼 후 딸 크리스틴 라 래가 1957년 12월에 태어났고, 이듬해에는 아들 반스 린지가 태어났다. 젊은 부부는 생계를 위해 카버는 배달원, 청소부, 도서관 조교, 제재소 노동자로 일했고, 메리엔은 행정 조교, 고등학교 영어 교사, 판매원, 웨이트리스 등 다양한 일을 했다.[6]

2. 2. 결혼과 초기 작품 활동

1957년 6월, 19세의 레이먼드 카버는 당시 16세였던 메리앤 버크와 결혼했다. 첫 아이가 태어난 후, 가족은 1958년 카버의 어머니 근처인 캘리포니아주 파라다이스로 이주했다.[7] 카버는 낮에는 약국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키마 초급대학에서 공부하는 등 가난 속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1959년 5월, 가족과 함께 치코로 이사하여 치코 주립 대학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그는 소설가 존 가드너를 만나 글쓰기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는데, 당시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에서 막 박사 학위를 받은 가드너는 그의 멘토로서 삶과 문학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카버는 가드너의 지도를 받으며 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고, 자신의 첫 작품으로 평가받는 <분노의 계절>(The Furious Seasons)을 대학 문학잡지 <선집>에 발표했다. 1961년에 정식으로 출판된 이 단편 소설은 윌리엄 포크너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며, 나중에 ''No Heroics, Please''[8] 및 ''Call If You Need Me''[9] 등 단편집에 수록되었다.

1960년 가을, 카버는 험볼트 주립 대학으로 옮겨 단편 소설 작가 리처드 코르테스 데이 밑에서 공부를 계속했다.[6] 그는 대학 문학 잡지인 ''Toyon''의 편집자로 활동하며 자신의 이름과 필명 존 베일(John Vale)을 사용하여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10] 외국어 필수 과목 이수를 거부하고 1963년에 일반 연구 전공으로 문학사 학위(B.A.)를 받았다.

데이의 추천으로 1963-1964학년도에 1000USD 장학금을 받고 권위 있는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에 입학했으나, 프로그램의 상류층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문학 석사(M.A.)나 예술 석사(M.F.A.) 학위에 필요한 학점을 채우지 못한 채 12학점만 이수하고 중퇴했다. 당시 프로그램 책임자였던 폴 잉글은 카버의 아내 메리앤의 간청으로 두 번째 해의 장학금을 제안했지만, 카버는 이를 거절하고 아이오와를 떠났다. 그는 나중에 이력서에 1966년에 아이오와에서 M.F.A. 학위를 받았다고 허위로 기재하기도 했다.[6] 남편의 학업과 문학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학업을 미뤘던 메리앤은 1970년에 산호세 주립 대학을 졸업하고, 이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친 뒤 1977년까지 로스 알토스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6]

1960년대 중반, 카버 가족은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 정착했다. 카버는 서점 직원, 머시 병원(Mercy Hospital)의 야간 관리인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했다.[6] 그는 야간 근무 시간의 일부를 글쓰기에 할애했으며, 새크라멘토 주립 대학에서 시인 데니스 슈미츠가 진행하는 워크숍을 포함한 여러 강좌를 청강했다. 카버와 슈미츠는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카버는 슈미츠의 지도를 받아 첫 시집 ''Near Klamath''를 쓰고 출판했다.[6]

1967년은 카버에게 중요한 해였다. 그의 단편 "Will You Please Be Quiet, Please?"가 마사 폴리의 연례 선집 ''최우수 미국 단편 소설''에 실렸고, 시집 ''Near Klamath''가 출판되었다. 그해 여름, 도서관학 대학원 프로그램에 잠시 등록했으나 아버지의 사망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팔로 알토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사이언스 리서치 어소시에이츠(Science Research Associates, IBM의 자회사)에 취직하여 1970년까지 교과서 편집자 및 홍보 이사로 간헐적으로 근무하며 처음으로 화이트칼라 직업을 가졌다.[6]

1968년 이스라엘 여행 후 캘리포니아주 산호세로 이주했으며,[11][12] 메리앤이 학사 학위를 마치는 동안 산호세 주립 대학에서 도서관학 대학원 과정을 다시 공부했지만 학위를 취득하지는 못했다. 이 시기에 그는 훗날 그의 작품 편집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편집자 고든 리쉬와 시인이자 출판인인 조지 히치콕과 교류하며 중요한 문학적 관계를 맺었다.[6]

리쉬의 도움으로 1971년 6월 단편 "Neighbors"가 당시 리쉬가 소설 편집자로 있던 ''에스콰이어''에 실렸다. 이를 계기로 카버는 아이오와 동문이자 오리건 대학교 학장 제임스 B. 홀의 초청으로 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타크루즈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여러 번의 지원 끝에 1972-1973학년도에 4000USD의 장학금을 받고 스탠퍼드 대학교의 명망 있는 비학위 과정인 스테그너 펠로우십에 선발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에드 맥클라나한, 거니 노먼, 척 킨더, 윌리엄 키트리지 등 동료 작가들과 교류했다. 장학금으로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에 집을 마련했으며,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도 강의를 맡았다. 이 무렵 키트리지의 친구이자 몬태나 대학교 행정가였던 다이앤 세실리와 불륜 관계를 시작했다.[6]

여러 직업을 전전하고, 아이들을 양육하며 글쓰기에 매진하는 과정에서 카버는 알코올 남용에 빠지기 시작했다.[6] 그는 점차 글쓰기보다 술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1973년 가을, 존 치버와 함께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의 객원 강사로 초빙되었으나, 카버는 당시 가르치는 일보다 술 마시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글은 거의 쓰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알코올 문제와 잦은 결강으로 인해 결국 산타크루즈 대학에서 사임을 권고받았다. 이후 몇 년간 알코올 중독 치료를 시도했지만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6]

카버의 알코올 중독은 결혼 생활에도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메리앤 버크 카버는 2006년 회고록에서 1972년 카버가 다이앤 세실리와 불륜을 시작하면서 심각한 음주 문제가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가정에 큰 고통이 따랐다고 밝혔다. 메리앤은 카버의 알코올 중독 치료를 돕기 위해 자신의 박사 과정을 중단해야 했으며, 카버로부터 신체적 학대를 당하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메리앤은 관계를 쉽게 정리하지 못했지만, 1976년 10월 카버는 메리앤과 별거에 들어갔다.

1976년 3월, 고든 리쉬의 도움을 받아 첫 단편집 ''Will You Please Be Quiet, Please?''를 출간했다. 이 책은 카버가 처음으로 대형 출판사에서 낸 작품으로, 그해 전미 도서상 후보에 올랐지만 판매량은 5,000부 미만에 그쳤다.[13]

1976년 6월부터 1977년 2월 사이에 세 차례 병원에 입원하며 치료를 시도한 끝에, 카버는 1977년 6월 2일 알코올 중독자 협회(AA)의 도움으로 술을 끊고 "두 번째 삶"을 시작했다.[6] 그는 이후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대마초는 계속 피웠고 1980년 뉴욕 방문 시 제이 맥이너니의 권유로 코카인을 경험하기도 했다. 카버 자신은 만약 금주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40세에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을 것이라고 믿었다.[16]

1977년 11월,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열린 작가 회의에서 시인 테스 갤러거를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 카버가 갤러거를 추수감사절에 초대하려 한다는 편지를 받은 메리앤은 결국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기로 결심했고, 카버는 1982년에 메리앤과 공식적으로 이혼했다.

2. 3. 문학적 성취와 알코올 중독

카버는 가난 때문에 한곳에 정착하기 어려웠고, 아이오와 M.F.A. 과정 중에도 아내 메리엔과 함께 일을 해야 했다. 아이오와의 겨울과 학업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새크라멘토로 돌아와 백화점, 서점, 병원 청소부, 야간 관리인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글쓰기를 이어갔다.[6] 1967년 첫 파산 신청을 하고 아버지 C.R. 카버가 사망한 후, 캘리포니아주 팔로 알토로 이주하여 사이언스 리서치 어소시에이츠(SRA)에 교과서 편집자로 취직했다. 이곳에서 훗날 그의 문학적 성공에 큰 영향을 미친 편집자 고든 리쉬를 처음 만났다.[6]

같은 해(1967년) 그의 단편 소설 "<제발 조용히 해 주세요>"가 마사 폴리의 연례 ''최우수 미국 단편 소설'' 앤솔로지에 수록되면서[6] 카버의 이름이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고 대학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수월해졌다. 이후 1970년 "<육십 에이커>"가 <최우수 미국 단편 소설> 앤솔로지에 다시 선정되었고, 1971년에는 리쉬가 소설 편집자로 있던 에스콰이어에 "<이웃 사람들>"이 실렸다.[6] 1976년에는 첫 단편집 ''Will You Please Be Quiet, Please?''가 리쉬의 도움을 받아 출간되었고, 이 작품은 전미 도서상 소설 부문 후보에 오르며 문학 인생의 첫 번째 중요한 성취를 이루었다.[13]

그러나 젊은 시절부터 시작된 알코올 중독은 그의 삶을 점차 잠식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고 글쓰기를 병행하는 동안 알코올 남용이 심화되었으며,[6] 강의 중간에도 술을 마셨고 이로 인해 아내 메리엔과 끊임없이 갈등을 겪었다. 알코올 중독과 관련된 문제로 UC 산타크루즈와 UC 버클리에서의 강사직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웠고,[6] 1973년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 객원 강사 시절에는 동료 작가 존 치버와 함께 글쓰기보다 술 마시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했다.[6] 1974년 이후 알코올 의존증 치료 시설에 입소하는 등 노력을 했지만,[6] 1977년까지 음주 문제는 계속되었다. 이 시기 그는 건강, 친구, 가정을 거의 잃었으며 문학에 대한 자신감마저 상실해 갔다. 전 부인 메리엔 버크 카버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무렵 카버는 불륜을 저지르고 아내에게 신체적 학대를 가하기도 했다. 1976년 10월, 메리엔과 별거에 들어갔다.

1976년 6월부터 1977년 초까지 세 차례 입원 치료를 받은 후, 카버는 1977년 6월 2일 알코올 중독자 협회(AA)의 도움으로 마침내 금주를 결심하고 이를 실천하며 "두 번째 삶"을 시작했다.[6] 그는 훗날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인생의 어떤 것보다도 술을 끊은 게 더 자랑스럽답니다"라고 말하며 금주의 의미를 강조했다.[16]

금주 이후 카버는 다시 문학 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1977년 11월,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열린 작가 회의에서 시인 테스 갤러거를 만났고, 그녀는 이후 그의 중요한 문학적 동반자이자 삶의 파트너가 되었다.[17] 1979년 1월부터 두 사람은 함께 살기 시작했으며, 카버는 뉴욕주 시러큐스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로 임용되어 1980년부터 강단에 섰다.[36] 1982년에는 첫 아내 메리엔과 법적으로 이혼했다.[15]

1983년에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소설집 ''대성당''이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전미 도서상과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고, 그를 미국 현대 단편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같은 해 이 작품으로 오 헨리 상을 수상했으며, 1988년에도 다시 한번 이 상을 받았다.

1987년 9월, 폐암 진단을 받았고 이듬해 암이 뇌까지 전이되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투병 중에도 그는 미국 문학예술 아카데미의 정식 회원으로 선출되는 영예를 안았다. 1988년 6월 17일, 오랜 연인이었던 테스 갤러거와 네바다주 리노에서 정식으로 결혼했다.[18] 그러나 결혼 6주 뒤인 1988년 8월 2일, 워싱턴주 포트앤젤레스 자택에서 향년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포트앤젤레스의 오션 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생전 마지막 발표작은 뉴요커 1987년 6월 1일호에 실린 단편 "잔심부름"이었다.[37]

2. 4. 이혼과 재혼

1971년, 단편 "뚱보"가 조셉 헨리 잭슨 상의 "특별 추천"에 선정되어, 『하퍼스 바자』에 게재되었다. 1972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창작과의 객원 강사가 되었다.

그러나 카버의 알코올 중독은 점차 심각해졌다. 1972년, 친구이자 문학적 조력자인 빌 키트리지를 만나러 몬태나주 미줄라로 여행을 갔다가, 몬태나 대학교 편집자인 다이앤 세실리와 관계를 맺으면서 음주 문제가 더욱 악화되었다. 첫 부인 메리앤 버크 카버는 당시 상황에 대해 "그때부터 심각한 음주가 시작되었어요. 그것은 제 마음을 아프게 하고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었죠. 모든 것을 바꿔 놓았어요."라고 회고했다.[6] 1974년 가을에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메리앤이 박사 과정을 중퇴하고 그를 돌봐야 할 정도였다. 이후 몇 년간 카버는 메리앤에게 신체적 학대를 가하기도 했다.[6]

1976년 3월, 첫 단편집 『제발 조용히 해 주세요』를 출간했지만, 그 직후 알코올 중독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결국 같은 해 10월, 메리앤과 별거하게 되었다. 1976년 6월부터 1977년 2월 또는 3월 사이에 세 번 입원한 후, 카버는 1977년 6월 2일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AA)의 도움으로 금주를 시작하며 "두 번째 삶"을 맞이했다.[6] 그는 이후 대마초를 피우거나 1980년 뉴욕 방문 시 제이 맥이너니의 권유로 코카인을 접하기도 했지만, 평생 금주 상태를 유지했다. 카버 스스로도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40세에 사망했을 것이라고 믿었다.[16]

1977년 11월,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열린 작가 회의에서 시인 테스 갤러거를 만났다. 갤러거는 훗날 카버와의 만남을 "그를 만나기 전까지의 내 삶은 그저 연습이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으며,[17] 두 사람은 깊은 관계를 맺었다. 1978년 가을, 카버는 텍사스 대학교 엘패소에서 교직을 얻었고, 갤러거와의 관계를 시작했다. 이는 메리앤과의 관계가 완전히 끝나는 계기가 되었다.[6]

1979년 1월부터 카버와 갤러거는 엘패소, 포트앤젤레스 근처의 빌린 오두막, 투손 등지에서 함께 살았다. 1980년에는 갤러거가 시러큐스 대학교 창작 문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카버가 영어과 교수로 임용되어 시러큐스로 이사했다.

1982년, 카버는 첫 번째 아내 메리앤과 공식적으로 이혼했다.[15]

1987년 9월,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암은 뇌까지 전이되어 방사선 치료 등을 받았다. 1988년 6월 17일, 카버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갤러거와 리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18] 결혼 6주 후인 1988년 8월 2일, 카버는 포트앤젤레스 자택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50세였다. 같은 해 미국 예술 문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대되었다.[19]

카버의 유언에 따라 테스 갤러거가 그의 문학 유산 관리를 맡게 되었다.[6]

2. 5. 사망

1987년 9월, 폐에서 출혈이 발생하여 폐암 진단을 받았고, 이후 로 전이되어 방사선 치료 등을 받았다. 1988년 6월 17일, 오랜 연인이었던 시인 테스 갤러거와 결혼했다.[6] 같은 해 미국 예술 문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대되었다.[19]

1988년 8월 2일, 워싱턴주 포트앤젤레스 자택에서 폐암으로 인해 5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뉴요커』 1987년 6월 1일호에 게재된 단편 「잔심부름」[37]이었다.

사후 워싱턴주 포트앤젤레스의 오션 뷰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시 「늦은 조각」 전문과 시 「그레이비」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20]

>

> 늦은 조각

> 당신은 이 생에서

> 원하는 것을 얻었는가?

> 나는 얻었다.

> 그리고 당신은 무엇을 원했는가?

> 스스로를 사랑받는 존재라고 부르고,

> 이 세상에서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것.

>


카버의 유언에 따라 그의 문학 유산 관리는 아내 테스 갤러거가 맡게 되었다.[6]

레이먼드 카버 기념관(오리건주 클랫스카니)


카버는 첫 주요 작품집 『제발 조용히 해 주세요』(1976)로 전미 도서상 후보에 올랐으며,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세 번째 작품집 『대성당』(1983)은 퓰리처상 소설 부문 후보에 올랐다. 『대성당』에는 오 헨리 상 수상작인 「작고 좋은 것」과 「내가 여기서 전화하는 곳」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존 업다이크는 「내가 여기서 전화하는 곳」을 '20세기 최고의 미국 단편 소설'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카버 자신도 『대성당』을 통해 이전보다 더 낙관적이고 자신감 있는 스타일로 변화했으며, 이를 자신의 작가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겼다.[21] 그는 생전에 「이것이 실제 마일인가?」(1972), 「내 입장이 되어봐」(1974), 「의사 선생님이십니까?」(1975), 「작고 좋은 것」(1983), 「잔심부름」(1988)으로 총 다섯 번의 오 헨리 상을 수상했다.

카버가 태어난 오리건주 클랫스카니에는 도서관 건너편 릴리치 스트리트와 네할렘 스트리트 교차로에 그를 기리는 기념 공원과 동상이 세워져 있다.

1989년 9월 22일, BBC는 카버의 생애와 작품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꿈이란 깨어나는 것이다 (Dreams Are What You Wake Up From)』를 방영했다.

3. 문학 세계

레이먼드 카버는 주로 단편 소설과 시 창작에 집중했으며, 스스로 "간결함과 강렬함에 기울어져 있고" "단편 소설 쓰기에 빠져 있다"고 묘사했다. 그의 작품은 블루칼라 계층의 경험을 주로 다루며, 이는 작가 자신의 삶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헤밍웨이의 간결한 문체를 동경했지만,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 그는 평범한 노동계급 가정의 일상과 그 속의 불화, 고단함을 그리는 데 주력했다. 그의 작품에 대해 절망적이라는 평가도 있었으나, 카버 자신은 그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라고 여긴 듯하다.

카버의 문체는 에스콰이어 편집자였던 고든 리쉬의 영향을 받았다는 평가가 있으며, 이는 그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지점이다. (리시와의 관계 및 그 영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고든 리시와의 관계 섹션 참조) 미국 문단에서는 그를 미니멀리즘 소설의 대표 주자로 평가하며, 워즈워스 이후 일상적인 언어로 문학적 성취를 이룬 작가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의 스타일은 더티 리얼리즘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미니멀리즘과 더티 리얼리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미니멀리즘과 더티 리얼리즘 섹션 참조)

<파리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카버는 예술과 소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예술이 일종의 오락과 같지만 더 고양된 형태이며, 소설은 어떤 목적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강렬한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카버의 삶과 문학은 그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서도 조명된다. 그의 두 번째 아내이자 시인인 테스 갤러거는 2006년 ''더 선 잡지''에 카버의 알코올 중독 극복 과정에 대한 에세이 "죽는 대신"(Instead of Dyingeng)을 발표했다.[22][23] 또한 카버의 친구였던 척 킨더는 카버와의 우정을 다룬 열쇠 소설 ''허니무너스: 경고의 이야기''(Honeymooners: A Cautionary Taleeng)(2001)를, 첫 번째 아내 메리앤 버크 카버는 회고록 ''예전의 모습: 레이먼드 카버와의 결혼 초상''(What it Used to be Like: A Portrait of My Marriage to Raymond Carvereng)(2006)을 출간했다. 캐롤 스클레니카의 전기 ''레이먼드 카버: 작가의 삶''(Raymond Carver: A Writer's Lifeeng)(2009)은 뉴욕 타임스 북 리뷰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서 그 해 최고의 책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24][25]

카버 사후, 테스 갤러거는 고든 리시의 편집을 거치지 않은 원본 소설을 출판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사랑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의 원본 원고가 2009년 ''초심자''(Beginnerseng)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27][28][29][30] 카버의 마지막 미완성 단편 모음집은 영국에서 ''코끼리와 다른 이야기들''(Elephant and Other Storieseng)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며, 이는 그가 사망하기 전 5년 동안 쓴 작품들을 모은 것이다.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시라큐스 대학교에서는 매년 저명한 작가들을 초청하는 레이먼드 카버 독서 시리즈를 운영하고 있다.[32]

3. 1. 미니멀리즘과 더티 리얼리즘

레이먼드 카버는 헤밍웨이의 간결한 문체와 터프한 인물을 동경했지만, 가난 때문에 헤밍웨이와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평범한 블루칼라 가정의 불화, 비열함, 소소한 일상 등을 주로 다루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소설을 절망적이라고 평가했지만, 카버 자신은 대부분 사람들의 삶이 그러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카버의 문체 형성에는 에스콰이어의 편집장이었던 고든 리쉬의 역할이 컸다는 논란이 있다. 리시는 카버가 보낸 단편의 내용, 문체, 제목 등을 적극적으로 수정했으며, 카버는 이를 비교적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이는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불안감, 리시의 문학적 재능에 대한 신뢰, 빠른 성공에 대한 욕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초기 지도교수였던 존 가드너가 카버에게 25단어 대신 15단어를 사용하라고 조언한 반면, 리시는 15단어 대신 5단어를 사용하도록 유도하며 극단적인 간결함을 추구했다. 그러나 리시의 과도한 편집, 즉 "수술적인 절단과 이식"에 반발하여 카버는 결국 그와 결별했다.[33] 그럼에도 카버의 소설들은 그가 끊임없이 글쓰기에 매진했기에 나올 수 있었다.

미국 문단은 카버를 '미니멀리즘 소설'의 정점으로 평가한다. "실제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작품을 쓰겠다"고 선언한 워즈워스 이후, 일상어로 작품을 쓰는 데 성공한 작가로 미국 문학사에 기록되고 있다. 카버는 단편 소설과 시 창작에 집중했는데, 스스로 "간결함과 강렬함에 기울어져 있고", "단편 소설 쓰기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이는 단순히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글쓰기와 생업을 병행해야 했던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이야기[또는 시]를 한 번에 쓰고 읽을 수 있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미니멀리즘은 카버 작품의 특징으로 자주 언급되지만, 정작 카버 자신은 이러한 분류를 거부했다. 비평가 데이비드 위간드는 카버가 자신을 미니멀리스트나 특정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지적했으며[26], 스클레니카 역시 "그는 일반적으로 범주를 거부했다"며 "추상적인 사고를 전혀 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것을 대변할 적절한 세부 사항을 선택하는 데 매우 능숙했다"고 평가했다.

카버의 스타일은 더티 리얼리즘으로도 묘사된다. 이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활동한 리처드 포드, 토비아스 울프 등과 그를 연결 짓는 용어이다. 카버는 이들과 친밀했으며, 앤 비티, 프레데릭 바텔름, 제인 앤 필립스 같은 작가들과도 교류했다. 상류 중산층을 주로 다룬 비티를 제외하면, 이들은 주로 하류 중산층이나 소외된 사람들의 일상 속 슬픔과 상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파리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카버는 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예술은 당구를 하거나 카드 게임을 하거나 볼링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단지 뭔가 다른 형태, 아마도 더 고양된 형태의 오락이지요. 그렇다고 예술에 정신적인 자양분이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중략) 소설은 뭔가를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소설은 단지 그것에서 얻는 강렬한 즐거움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뭔가 지속적이고 오래가고 그 자체로 아름다운 어떤 것을 읽는 데서 오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지요. 아무리 희미할지라도 계속해서 불타오르는 이런 불꽃을 쏘아 올리는 어떤 것이랍니다.

그는 에세이 "영향에 관하여"에서 헤밍웨이의 소설을 존경하지만 영향으로 보지는 않으며, 대신 로렌스 더렐의 작품을 언급하기도 했다.

3. 2. 고든 리시와의 관계

카버의 문학에서 고든 리시의 역할은 중요한 논쟁거리이다. 리시는 1968년 이후 카버가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에 거주할 당시 알게 된 인물로, 당시 리시는 카버의 맞은편에 위치한 사이언스 리서치 어소시에이츠(SRA)에서 근무하고 있었다.[6] 이후 에스콰이어의 소설 편집자가 된 리시는 카버가 보내온 단편들의 내용, 문체, 제목 등을 적극적으로 수정했다. 1971년 6월, 리시의 주도로 카버의 단편 "Neighbors"가 에스콰이어에 실리기도 했다.[6]

카버는 리시의 편집 제안을 비교적 관대하게 받아들였는데, 이는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불안감, 리시의 문학적 재능에 대한 신뢰, 그리고 자신의 작품이 빨리 출간되어 문학적 입지를 다지고 싶다는 욕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카버 문학의 상당 부분이 사실상 리시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하지만 리시의 상당한 개입에도 불구하고, 카버의 소설들은 그가 끊임없이 글쓰기에 매진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리시의 편집을 거친 작품들은 결과적으로 카버를 미니멀리즘 소설의 대표 작가로 평가받게 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3. 3. 주요 작품

제목출판일출판사내용
Near Klamath영어1968년새크라멘토 주립 대학교 잉글리시 클럽시집
Winter Insomnia영어1970년 4월카약 프레스시집
밤에 연어는 움직인다[42]1976년 2월캐프라 프레스시집
제발 조용히 해줘
Will You Please Be Quiet, Please?영어
1976년 3월 9일맥그로-힐단편 소설
격노의 계절
Furious Seasons and Other Stories영어
1977년 11월캐프라 프레스단편 소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영어
1981년 4월 20일크노프단편 소설
파이어스 (불)
Fires: Essays, Poems, Stories영어
1983년 4월 14일캐프라 프레스에세이, 시집, 단편 소설
대성당
Cathedral영어
1983년 9월 15일크노프단편 소설
물과 물이 만나다
Where Water Comes Together with Other Water영어
1985년 5월 1일랜덤 하우스시집
울트라마린
Ultramarine영어
1986년 11월 7일랜덤 하우스시집
Where I'm Calling From: New and Selected Stories영어[40]1988년 5월애틀랜틱 먼슬리 프레스소설
코끼리
Elephant and Other Stories영어
1988년 8월 4일콜린스 하빌단편 소설
폭포로 가는 새로운 길
A New Path to the Waterfall영어
1989년 6월 15일애틀랜틱 먼슬리 프레스시집
영웅을 노래하지 마오
No Heroics, Please: Uncollected Writings영어
1992년 6월 9일빈티지 북스소설, 시집, 에세이, 서평
Short Cuts: Selected Stories영어[43]1993년 9월 14일빈티지 북스소설, 시
All of Us: The Collected Poems영어1998년크노프시집
필요하면 전화해
Call If You Need Me: The Uncollected Fiction and Other Prose영어
2001년 1월 9일빈티지 북스소설, 에세이, 기타[44]
비기너스
Beginners영어
2009년 11월 1일조너선 케이프소설


  • Short Cuts: Selected Stories영어로버트 올트먼 감독의 영화 숏 컷 개봉에 맞춰 출판되었다.[43]
  • 2009년에는 그의 모든 단편 소설을 모은 레이먼드 카버 전집이 출간되었으며, 여기에는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의 편집 전 원고인 비기너스 전문이 포함되어 있다.

4. 한국에 출간된 작품

현재 한국에는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5권이 출간되어 있다.

제목출판사출간 연도
제발 조용히 좀 해요문학동네2004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문학동네2005년
대성당문학동네2014년
풋내기들문학동네2015년 3월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문학동네2015년 8월


5. 수상 경력



카버는 첫 번째 주요 출판 작품집인 "제발 조용히 해주세요"로 1977년 전미 도서상 후보에 올랐다. 그의 세 번째 주요 출판 작품집인 ''대성당''(1983년)은 퓰리처상 소설 부문 후보에 올랐으며, 이 작품집은 일반적으로 그의 최고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대성당''에는 수상작인 "작고 좋은 것"과 "내가 여기서 전화하는 곳"이 포함되어 있다. 존 업다이크는 후자를 ''20세기 최고의 미국 단편 소설''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카버 자신도 ''대성당''을 문학적 영향력이 변화하며 더욱 낙관적이고 자신감 있는 시적 스타일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겼다.[21]

또한 카버는 다음과 같이 총 5번의 O. 헨리 상을 수상했다.

수상 연도작품명 (원제)
1972년이것이 실제 마일인가 (그게 뭐지?)
1974년내 입장이 되어봐
1975년의사 선생님이십니까?
1983년작고 좋은 것
1988년심부름



카버가 태어난 오리건주 클랫스카니에는 도서관 건너편 릴리치 스트리트와 네할렘 스트리트 교차로에 그를 기리는 기념 공원과 동상이 있다. 한 블록 떨어진 곳에는 카버가 태어난 건물이 있다.

6. 각색


  • 1982년 클라크 대학교에서 상연된 연극 ''I Could See the Smallest Things...''는 카버의 단편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 수록된 5개의 단편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34]
  •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영화 ''숏 컷''(1993)은 카버의 단편 9편과 시 한 편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 앤드루 코타코 감독의 영화 ''에브리씽 고즈''(2004)는 휴고 위빙, 애비 코니쉬, 설리번 스테이플턴이 출연했으며, 카버의 단편 "Why Don't You Dance?"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 레이 로렌스 감독의 영화 ''진다바인''(2006)은 카버의 단편 "So Much Water So Close to Home"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 댄 러시 감독의 영화 ''에브리씽 머스트 고''(2010)는 윌 페렐이 출연했으며, 카버의 단편 "Why Don't You Dance?"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35]
  •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 ''버드맨 또는 (무지의 뜻밖의 미덕)''(2014)은 브로드웨이 연극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의 제작 과정을 중심 줄거리로 다룬다. 영화의 주인공 리건 톰슨은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레이먼드 카버가 칵테일 냅킨에 써준 칭찬 메모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영화는 카버의 시 "Late Fragment"로 시작한다. 2015년 2월, ''버드맨''은 아카데미 작품상을 포함하여 4개의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 앤드루 코타코 감독의 영화 ''Whoever Was Using This Bed''(2016)는 장-마르크 바, 라다 미첼, 제인 버킨이 출연했으며, 카버의 동명 단편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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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스 The final cut https://www.theguard[...] 2023-11-03
[3] 서적 Chronicle of the Pulitzer Prizes for Fiction: Discussions, Decisions and Documents https://books.google[...] De Gruyter 2023-11-03
[4] 뉴스 Raymond Carver, Writer and Poet Of the Working Poor, Dies at 50 https://www.nytimes.[...] 2018-03-13
[5] 뉴스 Obituary. James Franklin Carver (1943–2022) https://www.statesma[...] 2023-02-04
[6] 서적 Raymond Carver: A Writer's Life https://archive.org/[...] Scribner
[7] 웹사이트 Raymond Carver: A Writer's Life https://www.popmatte[...] 2022-06-03
[8] 뉴스 'A Dirty Realist : NO HEROICS, PLEASE': Uncollected Writings By Raymond Carver (Vintage Books: $10; 239 pp.) https://www.latimes.[...] 2022-06-03
[9] 뉴스 CALL IF YOU NEED ME: The Uncollected Fiction and Other Prose by Raymond Carver https://www.kirkusre[...] 2022-06-03
[10] 간행물 Toyon 1963-03-01
[11] 웹사이트 Raymond Carver, Israeli Writer - Tablet Magazine https://www.tabletma[...] 2021-08-02
[12] 웹사이트 Raymond Carver's Life and Stories - The New York Times https://www.nytimes.[...] 2023-10-31
[13] 웹사이트 National Book Awards 1977 https://www.national[...] 2022-06-03
[14] 뉴스 A life spent in love with Raymond Carver is captured in memoir's intimate moments https://www.seattlep[...] 2022-06-03
[15] 서적 What It Used to Be Like: A Portrait of My Marriage to Raymond Carver https://archive.org/[...] St. Martin's Press
[16] 뉴스 Short Cuts https://www.rogerebe[...] 2022-06-03
[17] 웹사이트 When Tess and Ray Talked About Love https://www.theattic[...] 2019-11-05
[18] 서적 Conversations with Raymond Carver https://books.google[...] University Press of Mississippi 2024-06-08
[19] 웹사이트 Academy Members http://artsandletter[...] 2019-06-01
[20] 웹사이트 raymond carver's tombstone inscription https://harrisrichar[...] 2019-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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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뉴스 Instead of Dying http://www.thesunmag[...] 2006-12-01
[23] 웹사이트 Instead of Dying http://www.literatur[...] Academi Intoxication Conference
[24] 뉴스 Serendipitous stay led writer to Raymond Carver http://www.sfgate.co[...] 2009-12-19
[25] 뉴스 Raymond Carver's Life and Stories 2009-11-19
[26] 뉴스 Serendipitous stay led writer to Raymond Carver http://www.sfgate.co[...] 2009-12-19
[27] 뉴스 The Real Carver: Expansive or Minimal? https://www.nytimes.[...] 2007-10-17
[28] 웹사이트 Beginners by Raymond Carver https://www.theguard[...] 2009-10-17
[29] 문서 and re-edited by William Stull and Maureen Carroll
[30] 서적 Beginners Jonathan Cape 2009
[31] 웹사이트 Raymond Carver: Collected Stories (The Library of America) http://www.loa.org/v[...] 2015-05-11
[32] 웹사이트 Raymond Carver Reading Series https://surface.syr.[...] Syracuse University 2021-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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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뉴스 No love lost https://archive.org/[...] 2024-10-06
[35] 뉴스 Everything Must Go – review https://www.theguard[...] 2023-11-13
[36] 서적 レイモンド・カーヴァー 作家としての人生 中央公論新社 2013-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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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서적 THE COMPLETE WORKS OF RAYMOND CARVER 4 大聖堂 中央公論社 1990-05-20
[39] 서적 Carver's Dozen レイモンド・カーヴァー傑作選 中公文庫
[40] 서적 Where I'm Calling From: New and Selected Stories 1988-05
[41] 서적 翻訳文学ブックカフェ 本の雑誌社 2004-09-10
[42] 서적 At Night the Salmon Move 1976
[43] 서적 ショート・カッツ
[44] 서적 Call If You Need Me: The Uncollected Fiction and Other Prose
[45] 서적 THE COMPLETE WORKS OF RAYMOND CARVER 7 英雄を謳うまい 中央公論新社 2002-07-07
[46] 서적 レイモンド・カーヴァー 作家としての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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